겨울철쭉님의 [[독서]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 에 관련된 글.
뒤 늦게 (1)겨울철쭉님의 서평 을 발견했는데, 내친김에 구글로 책 제목을 검색해 봤더니 조명래 교수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웹진에 쓴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서평, (1)민주노조운동의 소멸을 공간으로 설명한다가 있길래 옮겨둔다. 그리고 (2)황정일, 민주노조,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보다, <노동자의 힘>, 제146호도 같이 옮긴다.
민주노조운동의 소멸을 공간으로 설명한다
김원 외,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천권의 책, 2008
조명래 단국대학교 도시 및 지역계획전공 교수
시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시간을 만든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존재being를 규정하는 두 축이라고 한다. 인간에게 시간이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삶의 궤적이라면 특정 시간적 단계의 삶은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물론 공간은 시간을 담아내는 종속변수만이 아니라 삶의 시간성을 조직하고 변경시키는 독립변수이기도 하다. 존재를 시간과 공간으로 나누어 살펴본다는 것은, 비판적 실제주의 철학자인 로이 바스카Roy Bhaskar의 표현을 빌면, ‘존재론적 깊이를 회복하는the recovery of ontological depth’ 의미를 띤다.
고등동물인 인간은 정치를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정치함으로써 비로소 자아실현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삶 치고 정치적인 것이 없지 않는 바, 이는 곧 정치의 공간을 만들게 된다. 삶의 역학관계를 표현하는 정치는 시간의 궤적에 따라 변하고, 또한 이는 공간의 형상configuration을 변화시킨다. 과거의 정치가 과거의 공간을 만든다면 현재의 정치는 현재의 공간을 만든다.
시간이 연속적인 실체이듯, 공간도 단절적이지 않다. 시간상으로 과거는 현재에 존재하지 않지만, 현재의 시간 켜 속에는 과거로부터 흘러 온 시간들이 퇴적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공간도 시간의 현재성만 담고 있지 않다. 현재란 시점까지 흘러온 시간성을 기억이란 형태로 공간은 품고 있다.
과거의 정치는 과거의 공간성으로만 남는 데, 그러한 공간을 흔히 ‘사라진 공간’이라 한다.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앞서 논급한대로 존재의 시공간성은 그 내면에 지속성과 계보성을 담고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사라진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으로 대체되거나 변형된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정치가 현재의 것으로 대체되거나 변형된 공간으로 남아 있다면, 어떤 것일까? 문화연구집단 ‘시월’이 출간한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은 이 물음에 하나의 예시적 답을 주고 있다. 제목에서 『사라진 정치’는 민주적 노조운동의 소멸을 말하고 ‘장소’는 노조운동이 구축되고 전개되는 영역으로서 공장, 지역, 가족, 매체 등을 지칭한다. 책의 논제는 민주노조운동의 시효소멸을 규명하는 것이다. 노동자 정치로서 민주노조운동은 시간의 계기를 통해 성장과 퇴화를 겪었다. 이러한 과정은 장소(공장, 지역, 가족, 매체 등)란 공간의 구성과 배열을 통해서도 동시적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민주노조운동의 문화적 양식을 구성하는 두 기본 축이다. 시간과 공간의 공진화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시효가 소멸했다는 것을 밝히는 게 책의 핵심내용이다.
진보적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논의가 적지 않지 않지만 이 책은 장소란 ‘공간을 통한 노동자 정치의 재생산 실패’가 곧 ‘민주노조’운동이 소멸하는 까닭으로 주목한다. 이는 이 책의 남다름이다. 공장, 지역, 가족 등의 영역에서 민주노조 운동에 의해 창출되고 구성되었던 노동자 정치의 장소들이 시간과 화폐가 지배하는 장소로 환원됨으로써 당대적인 노동자 형상에 상응하는 노동운동과 노동자 정치로서 나가지 못했다. 이의 논증을 위해 저자들은 울산의 현대자동차 노조운동 사례를 실증분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 노동조합의 민주화 운동, 즉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자 정치의 이념형으로 설정되고 있다. “지난 40여 년 간의 근대화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은 한국 노동자 계급의 지배적인 문화적 표현형식이면서 이들의 사고를 투영하는 정치다. 그것은 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부당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억압과 착취의 상황에 저항하고 불의와 어용노조에 반대해서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노동조합을 건설하고자 투쟁했던, 그 모든 장소들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었던 사고 형식이기도 하다”. 민주노조운동이 그 정치적 고유성을 잘 드러냈던 시간은 87년 이후 수년간의 시기였다고 한다. 당시 민주노조운동은 공동체적인 연대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공장, 지역, 가족을 대중적인 노동자 투쟁의 역사적인 장소, 노동자 정치의 현장으로 구성해 갔다. 그래서 이 시기 공장과 가족, 거주지는 노동자들에게 동질적이었고, 또한 시장, 음식점, 술집, 거리 등 노동자들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곳들은 모두 노동자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주노조운동의 시간성은 공간성으로 투영되어 조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의 시간성과 공간성은 1997년 환란위기를 거치면서 탈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이 역점을 두는 것은 시간성과 공간성이 일치하는 민주노조의 정치양식이 아니라 탈구하는 양식이다. 90년대 중반을 접어들면서 민주노동운동은 전국조직화에 따른 ‘정치세력화’와 경제위기 이후 노조운동의 ‘엘리트화’란 두 가지 흐름을 타면서 노동자 정치의 장소에서 노동자를 분리시켰다.
‘정치세력화’는 노동자 운동과 정치의 사회적 확장을 동반하면서, 그 이면에선 민주노조운동을 국가 중심의 정치, 즉 의회주의적 정치로 치환시켰다. 노동자와 사회의 결합을 꾀하는 정치적 기획들은 노동자와 관련된 집합적 언표들과 역사적 장소들로부터 노동자라는 이름을 분리시키는 효과를 창출했다. 국가의 권력에 의해 침윤되면서 노동자의 정치가 조직되고 재생산되어야 할 장소는 형해화形骸化 혹은 탈구했다.
노조운동의 ‘엘리트화’는 1997년 위기 이후 자본의 유연화 공세에 의해 야기된 고용불안의 팽배한 상황에서 노조운동이 위임받은 상층 활동가 실천으로 치환되고 노조가 대리 기구화 되는 현상을 초래했다. 이에 따라 민주노조운동에 의해 형성되었던 문화적 실천들은 경제적 협상을 위한 세과시용 의례가 된 채 그 진보성을 공장 내부에 가두어 버렸다. 그 결과 작업장은 지성을 잃은 채 자본에 의해 조종 받는 노동자의 수동적 일터로 변했고, 지역사회는 중산층 생활양식을 희구하는 탈노동자적 개인들의 경쟁적 삶터로 변했으며, 가족은 국가와 자본에 의해 규율 받는 재생산 단위로 전락했다. 공장, 지역, 가족이란 장소의 이러한 변화는 노동자의 정치가 구축되던 공간으로부터 노동자를 지워내는 효과를 낳았다.
이 두 가지 과정은 노동자들의 일상이 정치의 장소로 조직되지 못한 채, 자본과 국가에 의한 통치 논리가 작동하는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민주노조운동의 시효소멸은 바로 신자유주의 속에서 노동자 정치의 장소가 조직되지 못하는 상태로 나타났다. 노동자 정치가 장소화 된다는 것은 노동자의 정치적 관계를 일상관계에 안착시켜 안정적 계급으로 재생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자 정치의 장소들이 탈구 내지 해체된다는 것은 바로 민주노동계급의 재생산이 단절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사라진 정치의 장소’가 ‘노동자 정치가 탈각된 장소’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노동자 정치의 장소가 형해화 된 뒤 국가와 자본의 통치논리가 작동하는 공간으로 대체되었다 하더라도 노동자 현장이 사라진 게 아니라 잠재적인 장소로 늘 존재한다. 오늘날, 이런 류의 장소는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 여성노동자, 실업자 등과 같이 자본에 의해 선택적으로 배제를 겪거나 억압받는 노동주체들이 삶을 꾸려가는 지역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 책은 이렇듯 노동자 정치가 장소로 조직되지 못한 것이 현 시기 노조운동 전반의 위기를 촉발한 원인으로 분석한다. 이 분석을 통해 저자들은 민주노조운동의 위기극복 방안을 외부세계에서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삶의 공간 재구축, 즉 노동자 정치의 장소를 진정한 재생산 공간으로 전유하는 데서 찾고 있다. 노동운동의 위기극복을 위한 공간적 처방은 이 책을 다른 유사 연구와 구분시켜주는 핵심 지점이다. 이 책은 장소, 즉 공간이란 창문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문화적 양식, 나아가 그 위기의 뿌리를 들추어보고 있다.
이 책은 노동문화를 탐구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쓰였다. 공간문제는 지리학자, 건축학자, 도시계획가, 문화비평가 등에 의해 주로 논의되어 왔다. 이에 견주어 노동문화 연구자들이 장소란 공간 문제를 다루는 것은 그 자체로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책이 실제 다루는 공간, 즉 장소의 개념과 실체는 분명치 않다. 제목으로만 본다면,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진보적 노동운동의 현장을 찾아, 그 장소성을 분석할 것이 책의 핵심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준다. 이 기대와 달리, 책이 다루는 장소는 공장, 지역, 가족, 매체 등과 같은 것으로 지칭될 뿐, 각 장소의 내면구조를 분석하는 시도는 전혀 없다. 아울러 많은 경우, 장소 혹은 공간은 메타포로만 사용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양식이 구축되는 장으로 장소성을 강조하면서, 정작 민주노조운동의 공간양식에 대한 논의나 분석은 없다. 즉, 민주노조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절, 그 공간성으로 장소가 실제 어떻게 조직되고 지속되다가 신자유주의 바람을 타면서 어떻게 탈장소적 공간으로 변형 왜곡 되었는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공간분석이 없는 상태에서 노동자 정치의 장소 해체를 노동운동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으로 속단할 수 없다.
정치란 표현도 그 의미가 분명치 않거나 또한 부정확하다. 노동자 정치의 장소를 말하면서 공장, 지역, 가족 등을 지칭하지만, 노동자 정치가 무엇이고, 또한 지역과 가족이란 장소를 노동자 정치가 조직되는 영역으로 설정할 수 있을지도 의문시 된다. 작업장은 노동을 통해 상품을 생산하는 공간인 만큼 자본의 통제에 맞서는 노동자의 저항이 노동자 정치란 형식으로 전개되는 현장이다. 반면 지역과 가족이란 영역은 기본적으로 재생산 공간이다. 이러한 재생산 공간으로 생산의 정치라 할 수 있는 노동자 정치를 확장시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재생산 공간은 재생산을 둘러싼 차별적인 역학관계가 작동하는 데, 많은 경우, 이는 시민사회 영역과 중첩되는 공간이다. 이곳에선 생산의 정치와 다른 소비정치 혹은 시민정치가 작동하기 때문에 노동자 정치의 영역으로 쉽게 규정할 수 있다.
1995년 양봉수 열사투쟁을 영상 기록하러 울산 북구에 들어섰을 때였다. 길 오른쪽엔 공장이 왼쪽엔 식당 호프집 당구장 다방이 100미터 간격으로 늘어서 있던 도시풍경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초보영상기록자였던 나는 조합원들을 인터뷰했는데 양봉수열사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다가왔고 열사를 통해 공장노동의 배치와 자본의 신차투입 노동강도강화전략을 이해 할 수 있었다.
1998년 현대자동차에 정리해고 바람이 몰아쳤을 때 다시 만난 조합원들은 ‘내가 무너지면 전국이 무너진다’는 정서로 뭉쳐 공장 내에 텐트를 쳤다. 최종 타결까지 드라마틱했던 40일간은 나에게 공장이라는 장소를 둘러싼 정치와 주체들 힘관계변화를 내밀하게 보여주었다. 마지막 영상은 공장의 한 주체였던 식당여성조합원들이 타결후 노동조합 사무실로 몰려와서 항변할 때의 그 얼굴들이었다. 그 역동적이었던 장소와 주체들은 어디로 사라져 간 것일까?
책에서는 직접적인 ‘앙케트’ 대상이 2005년 한국의 대표적 사업장인 현대자동차노조와의 현장 프로젝트임을 밝히고 있다. 지역의 다양한 대상을 인터뷰했고 현대자동차 조합원, 소위원, 노조간부등 11명의 구술자들의 사고가 책 곳곳에 흐르고 있다.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공장과 지역에서 가족이 함께 만들어냈던 곳곳의 노동자 정치의 장소들이 시간과 화폐가 지배하는 자본의 장소로 환원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운동은 와해되고 시효소멸된 ‘민주노조 정치양식’을 엘리트적으로 답습하면서 비정규직 여성 이주노동자와 같은 당대의 노동자형상과 호흡하는 노동자정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문화연구 시월 김원 신병현 심성보 이황현아 이희랑 공저, 천권의 책
《문화 현장 방법론》문화연구 시월 신병현 이황현아 현광일 공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인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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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Tracked from [2009/04/20 21:44] 삭제위기론의 위기를 마주하다 지난 40여 년 동안 산업화와 근대화를 거치는 과정 속에서 '민주적인 노동조합 건설'은 한국 노동자계급의 지배적인 문화적 표현 형식이었던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사고를 담아내던 고유한 정치였다. 이러한 고유한 정치가 현시점에서 위기론의 소용돌이 앞에 놓이게 된 것은 그 빛나던 투쟁과 성과의 시간들을 비추어 볼 때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 위기론의 대부분은 이데올로기적 공세이거나 외부적 시선에 입각한 진단에 기인하는 경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