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민주노조운동의 소멸을 공간으로 설명한다, 外

[사고들]

겨울철쭉님의 [[독서]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 에 관련된 글.

 

뒤 늦게 (1)겨울철쭉님의 서평 을 발견했는데, 내친김에 구글로 책 제목을 검색해 봤더니 조명래 교수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웹진에 쓴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서평, (1)민주노조운동의 소멸을 공간으로 설명한다가 있길래 옮겨둔다. 그리고 (2)황정일, 민주노조,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보다, <노동자의 힘>, 제146호도 같이 옮긴다.

 

 

 

민주노조운동의 소멸을 공간으로 설명한다

김원 외,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천권의 책,  2008

 

 

조명래 단국대학교 도시 및 지역계획전공 교수

 

 

시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시간을 만든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존재being를 규정하는 두 축이라고 한다. 인간에게 시간이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삶의 궤적이라면 특정 시간적 단계의 삶은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물론 공간은 시간을 담아내는 종속변수만이 아니라 삶의 시간성을 조직하고 변경시키는 독립변수이기도 하다. 존재를 시간과 공간으로 나누어 살펴본다는 것은, 비판적 실제주의 철학자인 로이 바스카Roy Bhaskar의 표현을 빌면, ‘존재론적 깊이를 회복하는the recovery of ontological depth’ 의미를 띤다.
고등동물인 인간은 정치를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정치함으로써 비로소 자아실현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삶 치고 정치적인 것이 없지 않는 바, 이는 곧 정치의 공간을 만들게 된다. 삶의 역학관계를 표현하는 정치는 시간의 궤적에 따라 변하고, 또한 이는 공간의 형상configuration을 변화시킨다. 과거의 정치가 과거의 공간을 만든다면 현재의 정치는 현재의 공간을 만든다.
시간이 연속적인 실체이듯, 공간도 단절적이지 않다. 시간상으로 과거는 현재에 존재하지 않지만, 현재의 시간 켜 속에는 과거로부터 흘러 온 시간들이 퇴적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공간도 시간의 현재성만 담고 있지 않다. 현재란 시점까지 흘러온 시간성을 기억이란 형태로 공간은 품고 있다.
과거의 정치는 과거의 공간성으로만 남는 데, 그러한 공간을 흔히 ‘사라진 공간’이라 한다.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앞서 논급한대로 존재의 시공간성은 그 내면에 지속성과 계보성을 담고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사라진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으로 대체되거나 변형된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정치가 현재의 것으로 대체되거나 변형된 공간으로 남아 있다면, 어떤 것일까? 문화연구집단 ‘시월’이 출간한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은 이 물음에 하나의 예시적 답을 주고 있다. 제목에서 『사라진 정치’는 민주적 노조운동의 소멸을 말하고 ‘장소’는 노조운동이 구축되고 전개되는 영역으로서 공장, 지역, 가족, 매체 등을 지칭한다. 책의 논제는 민주노조운동의 시효소멸을 규명하는 것이다. 노동자 정치로서 민주노조운동은 시간의 계기를 통해 성장과 퇴화를 겪었다. 이러한 과정은 장소(공장, 지역, 가족, 매체 등)란 공간의 구성과 배열을 통해서도 동시적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민주노조운동의 문화적 양식을 구성하는 두 기본 축이다. 시간과 공간의 공진화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시효가 소멸했다는 것을 밝히는 게 책의 핵심내용이다.
진보적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논의가 적지 않지 않지만 이 책은 장소란 ‘공간을 통한 노동자 정치의 재생산 실패’가 곧 ‘민주노조’운동이 소멸하는 까닭으로 주목한다. 이는 이 책의 남다름이다. 공장, 지역, 가족 등의 영역에서 민주노조 운동에 의해 창출되고 구성되었던 노동자 정치의 장소들이 시간과 화폐가 지배하는 장소로 환원됨으로써 당대적인 노동자 형상에 상응하는 노동운동과 노동자 정치로서 나가지 못했다. 이의 논증을 위해 저자들은 울산의 현대자동차 노조운동 사례를 실증분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 노동조합의 민주화 운동, 즉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자 정치의 이념형으로 설정되고 있다. “지난 40여 년 간의 근대화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은 한국 노동자 계급의 지배적인 문화적 표현형식이면서 이들의 사고를 투영하는 정치다. 그것은 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부당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억압과 착취의 상황에 저항하고 불의와 어용노조에 반대해서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노동조합을 건설하고자 투쟁했던, 그 모든 장소들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었던 사고 형식이기도 하다”. 민주노조운동이 그 정치적 고유성을 잘 드러냈던 시간은 87년 이후 수년간의 시기였다고 한다. 당시 민주노조운동은 공동체적인 연대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공장, 지역, 가족을 대중적인 노동자 투쟁의 역사적인 장소, 노동자 정치의 현장으로 구성해 갔다. 그래서 이 시기 공장과 가족, 거주지는 노동자들에게 동질적이었고, 또한 시장, 음식점, 술집, 거리 등 노동자들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곳들은 모두 노동자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주노조운동의 시간성은 공간성으로 투영되어 조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의 시간성과 공간성은 1997년 환란위기를 거치면서 탈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이 역점을 두는 것은 시간성과 공간성이 일치하는 민주노조의 정치양식이 아니라 탈구하는 양식이다. 90년대 중반을 접어들면서 민주노동운동은 전국조직화에 따른 ‘정치세력화’와 경제위기 이후 노조운동의 ‘엘리트화’란 두 가지 흐름을 타면서 노동자 정치의 장소에서 노동자를 분리시켰다.
‘정치세력화’는 노동자 운동과 정치의 사회적 확장을 동반하면서, 그 이면에선 민주노조운동을 국가 중심의 정치, 즉 의회주의적 정치로 치환시켰다. 노동자와 사회의 결합을 꾀하는 정치적 기획들은 노동자와 관련된 집합적 언표들과 역사적 장소들로부터 노동자라는 이름을 분리시키는 효과를 창출했다. 국가의 권력에 의해 침윤되면서 노동자의 정치가 조직되고 재생산되어야 할 장소는 형해화形骸化 혹은 탈구했다.
노조운동의 ‘엘리트화’는 1997년 위기 이후 자본의 유연화 공세에 의해 야기된 고용불안의 팽배한 상황에서 노조운동이 위임받은 상층 활동가 실천으로 치환되고 노조가 대리 기구화 되는 현상을 초래했다. 이에 따라 민주노조운동에 의해 형성되었던 문화적 실천들은 경제적 협상을 위한 세과시용 의례가 된 채 그 진보성을 공장 내부에 가두어 버렸다. 그 결과 작업장은 지성을 잃은 채 자본에 의해 조종 받는 노동자의 수동적 일터로 변했고, 지역사회는 중산층 생활양식을 희구하는 탈노동자적 개인들의 경쟁적 삶터로 변했으며, 가족은 국가와 자본에 의해 규율 받는 재생산 단위로 전락했다. 공장, 지역, 가족이란 장소의 이러한 변화는 노동자의 정치가 구축되던 공간으로부터 노동자를 지워내는 효과를 낳았다.
이 두 가지 과정은 노동자들의 일상이 정치의 장소로 조직되지 못한 채, 자본과 국가에 의한 통치 논리가 작동하는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민주노조운동의 시효소멸은 바로 신자유주의 속에서 노동자 정치의 장소가 조직되지 못하는 상태로 나타났다. 노동자 정치가 장소화 된다는 것은 노동자의 정치적 관계를 일상관계에 안착시켜 안정적 계급으로 재생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자 정치의 장소들이 탈구 내지 해체된다는 것은 바로 민주노동계급의 재생산이 단절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사라진 정치의 장소’가 ‘노동자 정치가 탈각된 장소’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노동자 정치의 장소가 형해화 된 뒤 국가와 자본의 통치논리가 작동하는 공간으로 대체되었다 하더라도 노동자 현장이 사라진 게 아니라 잠재적인 장소로 늘 존재한다. 오늘날, 이런 류의 장소는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 여성노동자, 실업자 등과 같이 자본에 의해 선택적으로 배제를 겪거나 억압받는 노동주체들이 삶을 꾸려가는 지역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 책은 이렇듯 노동자 정치가 장소로 조직되지 못한 것이 현 시기 노조운동 전반의 위기를 촉발한 원인으로 분석한다. 이 분석을 통해 저자들은 민주노조운동의 위기극복 방안을 외부세계에서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삶의 공간 재구축, 즉 노동자 정치의 장소를 진정한 재생산 공간으로 전유하는 데서 찾고 있다. 노동운동의 위기극복을 위한 공간적 처방은 이 책을 다른 유사 연구와 구분시켜주는 핵심 지점이다. 이 책은 장소, 즉 공간이란 창문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문화적 양식, 나아가 그 위기의 뿌리를 들추어보고 있다.

이 책은 노동문화를 탐구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쓰였다. 공간문제는 지리학자, 건축학자, 도시계획가, 문화비평가 등에 의해 주로 논의되어 왔다. 이에 견주어 노동문화 연구자들이 장소란 공간 문제를 다루는 것은 그 자체로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책이 실제 다루는 공간, 즉 장소의 개념과 실체는 분명치 않다. 제목으로만 본다면,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진보적 노동운동의 현장을 찾아, 그 장소성을 분석할 것이 책의 핵심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준다. 이 기대와 달리, 책이 다루는 장소는 공장, 지역, 가족, 매체 등과 같은 것으로 지칭될 뿐, 각 장소의 내면구조를 분석하는 시도는 전혀 없다. 아울러 많은 경우, 장소 혹은 공간은 메타포로만 사용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양식이 구축되는 장으로 장소성을 강조하면서, 정작 민주노조운동의 공간양식에 대한 논의나 분석은 없다. 즉, 민주노조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절, 그 공간성으로 장소가 실제 어떻게 조직되고 지속되다가 신자유주의 바람을 타면서 어떻게 탈장소적 공간으로 변형 왜곡 되었는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공간분석이 없는 상태에서 노동자 정치의 장소 해체를 노동운동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으로 속단할 수 없다.
정치란 표현도 그 의미가 분명치 않거나 또한 부정확하다. 노동자 정치의 장소를 말하면서 공장, 지역, 가족 등을 지칭하지만, 노동자 정치가 무엇이고, 또한 지역과 가족이란 장소를 노동자 정치가 조직되는 영역으로 설정할 수 있을지도 의문시 된다. 작업장은 노동을 통해 상품을 생산하는 공간인 만큼 자본의 통제에 맞서는 노동자의 저항이 노동자 정치란 형식으로 전개되는 현장이다. 반면 지역과 가족이란 영역은 기본적으로 재생산 공간이다. 이러한 재생산 공간으로 생산의 정치라 할 수 있는 노동자 정치를 확장시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재생산 공간은 재생산을 둘러싼 차별적인 역학관계가 작동하는 데, 많은 경우, 이는 시민사회 영역과 중첩되는 공간이다. 이곳에선 생산의 정치와 다른 소비정치 혹은 시민정치가 작동하기 때문에 노동자 정치의 영역으로 쉽게 규정할 수 있다.

 



민주노조,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보다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을 읽고
 
황정일, 노동자의 힘 회원, 제 146호
 
울산의 추억
 

1995년 양봉수 열사투쟁을 영상 기록하러 울산 북구에 들어섰을 때였다. 길 오른쪽엔 공장이 왼쪽엔 식당 호프집 당구장 다방이 100미터 간격으로 늘어서 있던 도시풍경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초보영상기록자였던 나는 조합원들을 인터뷰했는데 양봉수열사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다가왔고 열사를 통해 공장노동의 배치와 자본의 신차투입 노동강도강화전략을 이해 할 수 있었다.
1998년 현대자동차에 정리해고 바람이 몰아쳤을 때 다시 만난 조합원들은 ‘내가 무너지면 전국이 무너진다’는 정서로 뭉쳐 공장 내에 텐트를 쳤다. 최종 타결까지 드라마틱했던 40일간은 나에게 공장이라는 장소를 둘러싼 정치와 주체들 힘관계변화를 내밀하게 보여주었다. 마지막 영상은 공장의 한 주체였던 식당여성조합원들이 타결후 노동조합 사무실로 몰려와서 항변할 때의 그 얼굴들이었다. 그 역동적이었던 장소와 주체들은 어디로 사라져 간 것일까?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여기에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이란 책이 있다. 각주를 표기한 방식이 독특한 이 책은 ‘문화연구 시월’ 연구자들의 집단적인 저술이다. 책의 서문에서는 이 책이 수년간의 ‘앙케트’ 작업을 통해 신자유주의 시기 노동자해방정치, 교육과 문화운동의 방향을 논의한 산물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앙케트’는 단순한 여론조사라기보다는 노동자해방정치가 막혀있는 이 순간 우선 현장 노동자들의 일상과 사고에 대해 사고하자는 현장활동방법론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현장소위원이 ‘내가 과연 해방세상을 만들고 있는 걸까’라고 스스로 질문했을 때 이 생각이 그저 술 한 잔에 날려 보낼 어떤 상념이 아니라 더 따지고 들어가 우리가 민주노조를 구성했던 생각의 틀이 현재 유효한지의 문제까지 진전해나가는 방법론이다.

책에서는 직접적인 ‘앙케트’ 대상이 2005년 한국의 대표적 사업장인 현대자동차노조와의 현장 프로젝트임을 밝히고 있다. 지역의 다양한 대상을 인터뷰했고 현대자동차 조합원, 소위원, 노조간부등 11명의 구술자들의 사고가 책 곳곳에 흐르고 있다.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공장과 지역에서 가족이 함께 만들어냈던 곳곳의 노동자 정치의 장소들이 시간과 화폐가 지배하는 자본의 장소로 환원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운동은 와해되고 시효소멸된 ‘민주노조 정치양식’을 엘리트적으로 답습하면서 비정규직 여성 이주노동자와 같은 당대의 노동자형상과 호흡하는 노동자정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지역은 변화하는데 공장에 갇혀있다 
 
혹자는 현장조합원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기본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책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은 ‘민주노조 정치양식’의 문제를 지역 가족 파업 매체의 구체적 양상으로 풀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노조의 문제를 지역으로 확장해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신자유주의하의 자본의 개입은 지역 노동자가족공동체에 대한 공격으로 본격화되고 있다. 시장의 지배력은 지역의 주거, 교육, 소비, 문화산업 등으로 확장되었다. 울산 북구의 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있다. 현자 조합원들이 자녀교육을 위해 학군이 좋은 대단위 아파트로 이주하고 이 자리를 비정규노동자가 메우고 있다. 지역민과 현자조합원사이의 간극이 점점 커진다. “동네 주민이라고 못 느낀다. 회사-집 밖에 잘 모른다. 관심도 없다.” “활동가들이 지역사회 현안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방치해버린다.”
신자유주의는 지역노동시장을 원청 하청 구조로 재편하고 있다. 울산지역의 대다수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완전 하청계열화 되었다. 2000년 현자노조의 비정규직 16.9%이내 투입 합의 이후 사내하청에 대한 반성은 존재했지만 공장 밖에 존재하는 비정규직에 대한 관심은 거의 부재하다. “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위해 조직적으로 싸우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98년 정리해고 수용을 겪으면서 조합원들은 그렇게 순응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책은 이제 조합원들은 공장에 점점 더 갇히고 있다고 말한다. “언제 잘릴지 모르니 돈벌이가 될 때 쎄 빠지게 벌자.” 노동조합을 고용안전판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조합원들은 물량 시간 임금에 대한 변동도 고용불안으로 느낀다. 대의원의 역할이 물량확보와 특근처리등 고충처리로 한정되기도 한다. 내 조직이 아니라 대리기구로서 노조의 인식이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동자정치도 단위노조 틀 내로 사고되고 있다.

 

가족을 위해 잔업 특근한다?

 

책의 다음 주제는 가족이다. 신자유주의는 구조조정등 재생산위기를 가족을 통해 지연시키고 있다. 가족 중 남성이 생계부양자가 되고 여성은 성별분업으로 가사를 전담하거나 여분의 저임금 노동을 강요받는다. 실제 생계부양자인 남성이 받는다는 가족임금은 신화일 뿐이다. 결국 남편 노동자는 임금노예로 결박당하고 부인은 별개의 소외와 억압을 당하는 노동자 가족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민주노조운동에서도 역시 이러한 남성 생계부양자, 성별분업, 정상가족이 암묵적으로 인정된다. 1998년 현대자동차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에서처럼 여성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데 동참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IMF 고용불안 이후 조합원들은 자신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존재로 위치지우고 그 관계로부터 자부심을 얻는 가족중심성이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자 가족의 문제에 착목하거나 여성 노동의 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남성 노동자의 실질임금 상승으로 가족의 필요를 충당한다는 기존 임금투쟁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량이 지배하고 파업은 예측된다

 

1998년 현대자동차의 정리해고는 현장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사건은 불황에 따른 물량 감소는 구조조정으로 이어진다는 경험법칙을 성립시켰다. 이후 조합원들은 회사에 순응하며 ‘물량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벌기’위해 장시간의 힘든 노동을 자발적으로 감내했다. 이제 물량은 현장통제를 위한 회사의 전략, 노조의 반대 논리, 조합원의 고용요구에서 중심 논리가 된다.
회사는 대중매체의 고임금 노동자 이미지를 활용하고 사내매체에서 각종 불황담론과 위기론을 유포하면서 회사와의 상생 논리를 강조한다. 이런 회사의 전략은 성공하고 있다. 불법파업 출근 투쟁을 하고 있던 당시 위원장에게 “대체 어느 쪽 위원장이냐”는 조합원들의 반응은 이런 태도를 보여준다. 지금 현장은 회사의 상시적 구조조정으로 유연성 확보가 대전제가 되고 차선의 물량논리를 통해 맞교환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이처럼 화폐 시간이 지배하는 곳에서 회사 노조 조합원은 파업의 단결투쟁이 물량확보 및 권익 향상과 회사의 이해관계간 맞교환이라고 규정짓고 있다. “과거에는 노조가 투쟁 일변도였다면 지금은 유도리 있게 잘하고 있다.” 현재 현대자동차의 파업은 임단투에 국한된 채 노동자 학교나 생동하는 장으로서가 아니라 노조의 일방적 배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형식적인 질서 파업으로 통제된다. 조합원은 파업의 시기나 방식과 결과에 대해 도사가 다되었고 참여자라기보다 평론가가 되었다. 관성화된 활동 속에서 활동가들은 이제 새로운 기획과 실천에 자신 없어 하고 조합원들처럼 노는 것을 반기게 되었다. “조합원들은 평소에는 일하는 기계, 집에서는 돈 벌어 오는 기계, 파업할 때는 파업하는 기계입니다.”

 

노동자 미디어의 한계

 

구체적 양상의 마지막으로 노동자 조직들의 미디어 생산물에서는 노동자 주체가 어떻게 표현 재현되고 있는가?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노동자들의 재현실천은 국가 자본 회사와 적대하면서 노동자 대중을 전투적 남성적 군사적 권위적으로 동원하려 하였다. 이는 오늘날 노동자 미디어에서 유사하게 재현된다. 현대자동자노조의 방송과 기획광고를 보면 내용을 끌어가는 사람은 노조간부 활동가 임원들이다. 박수를 치는 동원된 조합원들에게 주체적인 노동자상을 찾기는 어렵다. 이는 엘리트주의 재현을 보여주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노동절 포스터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투쟁과 결의에 찬 남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배치하고 등장하는 여성은 수동적인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다른 사업장에 지원을 나가면 파업 결과에 분노하고, 환호하고, 우는 노동자의 얼굴을 담아오지만, 현대자동차 내부의 영상물을 만들 때는 그런 모습을 담지 못한다. 힘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조 정치양식의 시효소멸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민주노조운동은 한국 노동계급 형성을 주요하게 틀 지웠던 지배적인 사고 형식이었다. 이는 군부세력에 의해 주도된 산업화시기인 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만 그 모습을 드러냈던 고유하고 독특한 정치양식이다. 민주노조 설립과 평등세상 노동해방의 세상을 꿈꾸었던 고유한 사고의 형태를 ‘민주노조 정치양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곳은 파업 전야와 전태일 열사, 전노협이 상징하는 민주노조운동의 투쟁, 점거, 저항의 장소이기도 하다.

 

한 조합원 설문조사에서는 ‘국민’이나 ‘회사원’이라는 정체성과 경쟁하는 ‘노동자’ 정체성은 세 번째로 선택되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고유한 계급적 정체성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또한 이것은 민주노조운동이 대중들의 사고나 감성과는 달리, 일부 엘리트들의 추상적 계급주의 논리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보여준다. 활동가 집단은 독특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연대를 실천하고 운동에 투신해왔다. 하지만 이는 조합원과 점점 더 유리되어갔다.
민주노조 운동과 활동가 집단은 노동자 대중들이 어떠한 사고를 하는지에 대해 사고하지 모했다. 민주노조 합법화 이후 노동자 일상은 공장 내부로 더욱 갇히는 경향을 보여 왔다. 활동가 조직들의 정파적 담합 구조와 지배 구조의 순환성은 형식적인 총회민주주의 병폐를 다른 형태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제 민주노조 정치양식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현 시기는 형식적 민주화의 진전과 민주노조의 시민권획득, 자율과 자유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의 전면화 등이 맞물리는 변화의 시기이다. 어용과 민주노조의 구분도 더 이상 불명확해졌다. 중요한 것은 ‘공장’이라는 장소를 진정한 이 시대의 노동자 형상이 지배하는 생동성의 장소로 회복하고 다양한 노동자 정치양식들이 사고 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민주노조’운동이라는 고유한 정치양식은 노동자의 역사적 지성으로 새로이 발견되어야 한다. 공장, 거리, 거주지 일상에서 고유한 장소를 발견하고 그 여성,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등 이 시대의 고유한 노동자 형상과 더불어 공장과 지역에서 새로운 정치양식을 창출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생각들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관심이 생기는 부분은 이 책의 방법론인 ‘내재적 현장 활동 방법론’이다. 앞에서 ‘앙케트’ 작업의 의미에 대한 언급도 했지만 일차적으로 현장에 접근하여 노동자들의 사고를 사고하면서 이를 토론해서 개념화해 실천 방안을 모색하고 활동결과에 근거에 다시 조사해가는 관점은 신자유주의 시대 새로운 다양한 주체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적합하고 실천의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진행하는 작업에도 이 방법론을 적용해 볼 생각이다. 이 방법론 전반과 와해, 앙케트, 포화, 재현 등의 세부와 기본 모형은 책 [문화 현장 방법론]에서 다루고 있다.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은 이른바 민주노조 정치양식의 시효소멸과 ‘포화’를 말하고 있다. 그것을 낳은 근거중 이른바 활동가집단의 추상적 계급주의, 엘리트주의, 기획주의, 조합원과의 괴리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어떤 저술을 객관적으로 동의하느냐의 문제와는 다른 맥락이다. 책을 읽어나가고 서평을 쓰기에 어려웠던 이유는 이 책은 주체인 나의 내면에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내 활동의 사고를 스스로 거울에 비춰보게 한다. 한편 이 책은 활동가들이 어떤 모종의 대의를 위해 애써 자기내면으로 감추었던 사고에 대한 사고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그 모종의 대의는 시효 소멸되었다.

 

새로운 정치의 장소들

 

과거는 항상 현재의 관점에 의해 재해석 된다. 그동안 묻혀있던 경험들이 새롭게 조명된다.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에서는 과거의 새로운 정치의 장소와 형상을 말하고 있다. 해방주거공동체였던 울산만세대아파트단지의 1987년 모습이 그러하다.

 

“9월 5일 만세대에서 그 후 대파업의 전기가된 감격적인 승리가 이루어졌다. 경찰은 수천의 경찰병력으로 위압감을 조성하며 숙소 지역에 단전, 단수, 식당폐쇄를 실시했다. 이때 기숙사의 미혼 노동자 20명이 밥그릇을 숟가락으로 두들기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밥을 달라 훌라훌라’ 시위대는 50, 100, 500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만세대아파트를 돌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밥을 달라! 전기를 달라! 물을 달라!’ 시위대는 5,000여 명으로 거대한 물결이 되었고 전경들은 혼비백산해 철수해 버렸다. 숙소에 전깃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만세대의 노동자 가족들은 앞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기숙사 노동자들과 공동 취사, 공동 식사를 하였다. 뜨거운 신뢰와 믿음이 굳건하게 형성된 것이다.”(전노협백서 1권중에서)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문화연구 시월 김원 신병현 심성보 이황현아 이희랑 공저, 천권의 책
《문화 현장 방법론》문화연구 시월 신병현 이황현아 현광일 공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인천지회

 

2008년07월13일 22시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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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6 23:07 2008/10/16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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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Tracked from [2009/04/20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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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론의 위기를 마주하다 지난 40여 년 동안 산업화와 근대화를 거치는 과정 속에서 '민주적인 노동조합 건설'은 한국 노동자계급의 지배적인 문화적 표현 형식이었던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사고를 담아내던 고유한 정치였다. 이러한 고유한 정치가 현시점에서 위기론의 소용돌이 앞에 놓이게 된 것은 그 빛나던 투쟁과 성과의 시간들을 비추어 볼 때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 위기론의 대부분은 이데올로기적 공세이거나 외부적 시선에 입각한 진단에 기인하는 경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