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5/05/31

삼성의 나라, 시장의 독재/ 조돈문

삼성 이건희 회장의 철학박사학위 수여식을 성대히 치르려다 학생들의 비판과 행사 저지로 빚어진 갈등, 그것은 고려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의 한 단면, 그 동학의 핵심이 표출된 것이다.

모든 대학들이 영리추구 기업처럼 자본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고, 교수들은 사외이사, 자문위원, 연구비 사냥에 혈안이 되어 있고, 학생들은 세계적 기업 삼성에 입사하는 것이 대학생활 최고의 목표로 되어 있는 사회. 어찌 그것이 고려대만의 문제일 수 있겠는가. 아마 삼성의 은총을 입지 못한 대학들은 400억 유치에 성공한 고려대를 한없이 부러워하며 자신들의 무능을 나무라고 있을 것이다.

▲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사회학과.
정부의 몇 억짜리 유인책에도 대학의 학제가 농단되는 현실 속에서 400억, 아니 10억만 받더라도 건물마다 “삼성관” “이건희관” “이재용관”의 이름을 붙이고 달랑 철학박사 한 개가 아니라 수십 개의 박사학위를 헌정하려는 대학들이 줄을 서 있다. 고려대는 시장의 지배에 모범적으로 적응한 성공사례일 뿐이다.

삼성그룹은 이미 총자산 200조원대 규모이고, 삼성전자 하나만 하더라도 지난해 당기순이익 10.8조원으로 세계 아홉 번째로 “100억달러 클럽”에 진입하여 도요타와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초우량기업이 되었다. 경제위기 전후하여 줄줄이 무너지던 재벌기업들을 떠올리면 삼성그룹의 건재와 삼성전자의 성장은 고마울 뿐이다.

차떼기, 트럭떼기로 이회창-노무현 대선캠프에 불법자금을 실어 나르는 것보다 대학에 발전기금을 제공하는 것은 백배 나은 것이고, 베트남에서 꿈나무 교실을 운영하고 중국에서 무료 개안수술로 공헌하는 삼성의 모습은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만큼 삼성은 우리의 대표적 국민기업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삼성의 불법적 노조탄압과 부당노동행위, 불법·탈법 세습행위까지 덮어두어야 한다면 그것은 삼성의 위상과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스럽지 못할 것이다.

삼성전자 사장을 장관으로 모시고 중앙일보 사장을 주미대사로 임명하고 온갖 비리의 증거·의혹에도 굴하지 않고 확고한 신뢰를 보내며 고려대 학생들 질타에 앞장서는 정권. 노조설립을 방해하고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자행되는 온갖 불법행위들과 경영권세습을 위해 동원된 백화점식 불법·탈법행위들에 대해 무혐의 기각 처분을 반복하며, 삼성 앞에서는 현직 대통령 앞에서도 곧추세우던 “검사스러움”조차 한 번도 보이지 못하는 검찰. 지난해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불법 휴대전화 위치추적 의혹을 받고 있던 삼성SDI 대표이사 등을 증인으로 채택하려 했던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의 시도를 무산시킨 국회.

불행하게도 이 같은 지배세력들의 삼성에 대한 비뚤어진 보은의식은 삼성을 투명하고 건실하고 자랑스런 국민기업이 아니라 추악한 마피아기업처럼 만들어 삼성과 국민경제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가고 있는 듯하다. 삼성이 지배하는 어둡고 두렵고 불길한 “삼성의 나라”로.

“삼성의 자본축적 방식을 비판하지 말고, 삼성이 싫으면 삼성에 취업하지 말라”고 하여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개인적 선택과 한 사기업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의 흥망에 국민경제가 달려있을 만큼 삼성의 경제적 비중은 너무도 커져버린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개발독재 시기를 지나서 어떤 방식의 경제발전모델을 정립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고 있다. 물론 국가와 자본은 경제위기를 빙자하여 “시장의 지배”를 핵심으로 하는 미국식 자유시장경제모델로의 이행에 박차를 가했었고, 보수정당, 보수언론, 시민단체들의 협력과 함께 그 프로젝트는 이미 상당한 성과를 보았다.

거대한 “신자유주의 동맹”은 그에 저항하던 민주노총과 민주노조들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했고, 시장의 지배는 삼성의 지배력과 함께 “시장의 독재” 형태로 관철되고 있다. 삼성의 어두운 측면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적 보도와 분석에 앞장섰던 일부 개혁성향 언론들마저 하나둘 무너지는 것을 보며 “군사독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시장의 독재”임을 실감하게 된다.

“시장의 독재”의 모범사육장 한가운데에서 그에 도전한 고려대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지배세력들의 이지메 현상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장의 독재”에 대한 저항과 대안의 모색은 아쉬운 점과 미숙한 점이 있더라도 그만큼 값진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사회학과  yon@labortoday.co.kr
      
2005-05-31 오전 8:28:19  입력 ⓒ매일노동뉴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삼성공화국’ 여론역풍 사장단회의 머리 맞대

“나라를 위해서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밀어주지는 못할망정 발목이나 잡아서야 되겠습니까?” “국민의 95%는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를 헐뜯는 것은 참여연대나 일부 언론 등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외부 시선이 따가운 것도 사실이니, 스스로 할 일이 무엇인지도 찾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고위층 대책마련 지시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지난 25일 서울 남대문로 삼성그룹 본관에서 열린 삼성 수요회의에선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삼성공화국’ 논란이 안건으로 올랐다. 삼성 수요회의는 주요 계열사 사장들과 그룹 구조조정본부 팀장 등 30~40명이 참석하는 삼성 최고경영자들의 모임이다. 지난번 ‘고려대 사태’ 이후 삼성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져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냐는 이른바 ‘삼성공화국’ 논란이 거세진 것을 계기로 삼성 사장단이 원인 분석 및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삼성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는 처음이다. 그룹 최고위층도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며 대책 마련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직은 ‘네탓’ 분위기속
“무노조·세습 버릴수 있나”

삼성 안에서는 사태 원인과 관련해 안팎의 여러 요인 중 무엇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대체로 ‘내 탓보다는 네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다. 삼성의 한 임원은 30일 “삼성은 국가 수출의 20%, 세수의 8%, 상장사 매출의 15%와 이익의 25%를 차지한다”며 “삼성 같은 기업이 4~5개만 더 나오면 국민소득이 당장 3만달러로 뛸 것”이라고 ‘기여’를 강조했다. 또 다른 간부는 “우리 사회의 영향력과 신뢰도에서 삼성이 모두 1위”라며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냐”고 불만을 나타냈다.

그러면서도 삼성은 대책 마련에 고민하는 모습이다. 한 수요회의 참석자는 “25일에는 논의가 충분치 않았고, 6월1일 열리는 다음 수요회의 때 본격 논의가 될 것”이라며 어려움을 내비쳤다. 계열사 사장들은 다음 회의 때 발언 내용을 준비하느라 비상이 걸린 것으로 전해졌다. 한 계열사 간부는 “삼성이 다 잘하지만 무노조 경영과 경영권 세습이라는 두가지 아킬레스건이 있는데, 솔직히 스스로 대책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이제 권력은 국가나 시장이 아니라 재벌에게 넘어갔다”며 “삼성이 우리 사회의 원칙과 룰을 존중하기보다, 막강한 힘을 이용해서 자기네 입맛대로 원칙과 룰을 뜯어고치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한겨레 2005. 6. 1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70년대 임금, 7.8% 하락--"임금상승 주장은 자료 오독/ 정성진

논쟁_박정희 시대 임금과 노동생산성 문제
70년대 임금, 7.8% 하락..."임금상승 주장은 자료 오독"

2005년 05월 31일   정성진 경상대 이메일 보내기

 

박기성교수가 <교수신문> 제356호에서 주장한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1)임금을 평균노동생산성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2)임금은 한계노동생산성과 비교해야 하며, “1988-97년을 제외하고 임금은 한계노동생산성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1960-70년대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장상환교수가 주장하듯이 “초과착취 당한 것”이 아니라 “생산에 기여한 만큼” “임금”을 “지급”받았다.

 

이러한 박교수의 분석은 그가 지지하는 이영훈교수의 주장의 논거가 된 것인데, 이들은 모두 ‘박정희 시대’라고 불리는 1960-70년대가 수출주도 국가주도 초과착취 독재정치에 기초한 고도축적의 시기라는 통설을 뒤집으려 한다. 이교수와 박교수는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이 “초과착취”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1960-70년대 임금은 한계노동생산성과 거의 일치했다는 계량분석 결과를 제시한다. 박교수는 이에 근거하여 ‘박정희 시대’에 “노동시장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에 따라 작동하였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이들의 역사 다시 쓰기 시도가 성공했는가? 형편없이 실패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박정희 시대’는 이교수를 비롯한 ‘뉴라이트’들이 근래 다시 써온 조선후기나 식민지시대와 달라서 방대한 사료들, 아직도 살아있는 자료들 자신이 ‘역사 다시 쓰기’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실증사가로 알려진 이교수는 ‘박정희 시대’ 다시 쓰기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료가 아니라, 박교수의 계량분석 결과 ‘발견’된 사실에 의존하려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발견’된 사실, 혹은 확인되었다는 가설은, 실존하고 있는 방대한 자료들을 피해 갔다는 점에서, 또 박교수의 계량분석이 근거하고 있는 한계노동생산성 가설 자체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라기보다 자본주의 체제 옹호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또 박교수가 가설 증명을 위해 적용한 계량모델의 경우, 모델을 조금만 다르게 특정화해도 가설이 기각된다는 점에서, ‘박정희 시대’에 관한 통설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다. ‘박정희 시대’를 지배한 핵심적인 체제 이데올로기였으며, 21세기 들어서도 박근혜와 노무현이 리바이벌하고 있는 ‘선성장 후분배의 논리’ 자체가 박교수와 이교수가 뒤집으려 하는 통설, 즉 ‘초과착취에 기초한 고도축적’이 다름 아닌 ‘박정희 시대’의 진실이었음을 웅변한다.

 

박교수와 이교수가 주장하는 한계노동생산성 개념은 보통 한계자본생산성 개념과 한 세트로 주장되는데, 이 중 한계자본생산성은 그 개념의 정의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1970년대 케임브리지 자본논쟁에서 입증된 바 있다. 또 한계노동생산성 개념도 이것이 정의되기 위해서는 생산함수에서 자본 불변을 가정해야 하는데, 이와 같은 자본 불변의 가정 자체가 자본주의의 역동적 발전을 무시한 비현실적 가정이며, 또 이런 가정을 하기위해서도 자본이 먼저 정의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또 다시 이윤율, 따라서 임금율이 앞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순환논법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으로부터만 생성되는 노동력 상품의 가격인 임금의 결정은 다른 재화나 서비스의 경우와는 달리, 한계노동생산성과 같은 시장 요인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사회복지제도 등 제도적 요인,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계급적 역학관계 등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임금=한계노동생산성 가설은 이를 무시함으로써 임금격차의 확대, 분배의 불평등 심화, 생산성 상승에도 불구한 실질임금 상승의 정체, 혹은 ‘효율성임금’ 가설에서 보듯이, 생산성이 임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임금이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 등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일상적인 현상들을 설명할 수 없다. 임금=한계노동생산성 가설의 본질은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다.

 

즉 자본가에게는 한계자본생산성만큼 이윤이 귀속되며, 노동자에게는 한계노동생산성만큼 임금이 지급되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착취는 없다는 주장,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에서 계급적 착취적 소득분배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주장이다. 박교수가 한계노동생산성 가설에 근거하여, 자본주의에서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이 작동한다면, 착취는 없다고 주장한다면, 필자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부가가치의 생산은 오로지 살아있는 노동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산된 부가가치 중 임금을 초과하는 부분이 이윤 등의 형태로 자본가 등에게 수취된다면, 임금이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에 따라 결정되더라도, 착취가 발생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또 이교수나 박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문제가 된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디딤돌)의 실질임금과 평균노동생산성의 추이 비교 자료(p.181)는 필자 나름의 추계와 비교한 결과, ‘박정희 시대’의 진실을 그런대로 반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그 교과서는 박교수와 이교수가 주장하듯이 “평균노동생산성을 임금과 그대로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지수 (즉 변화율)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 또 실질임금과 평균노동생산성의 추이를 비교하는 것은 잘못되었기는커녕 아래 식들에서 보듯이 어떤 경제체제에서 생산된 국민소득의 분배의 추이를 확인하는 데서 필수적이다.

 

 

(1)식은 GDP(Y)에서 임금(W)이 차지하는 비중인 노동소득분배분, 즉 임금몫(W/Y)이 실질임금(이는 시간당 명목임금(이는 W를 총노동시간(H)으로 나눈 값임)을 GDP 디플레이터(Py)로 나눈 값임)을 평균노동생산성(이는 명목 GDP를 Py로 나눈 다음 다시 총노동시간으로 나눈 값임)으로 나눈 값임을 보여준다. (1)식을 성장회계식으로 전환하면 아래 (2)식이 얻어진다.

 

 

(2)식은 실질임금의 증가율이 평균노동생산성의 증가율보다 큰지 혹은 작은지에 따라서 시간에 걸쳐 임금몫이 증가하는지 혹은 감소하는지가 결정됨을 보여준다. 아래 그림은 (1)식과 (2)식에서 제시된 임금몫과 실질임금의 증가율 및 평균노동생산성의 증가율을 1970-2002년 우리나라 비농림민간부문 (한국은행이 공간하는 <국민계정>과 <산업연관표>의 ‘고용표’를 이용하여 전 국민경제에서 농림수산업 부문과 정부부문을 제외한 다음, 각 산업부문 자영업주 소득 중 ‘임금등가’(wage equivalent)를 계산하여 임금에 가산하여 계산)에 대해 계산한 것이다. 임금몫은 1970-2002년 전 기간 약간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문제가 된 ‘박정희 시대’ 특히 1971-79년 동안 (진정한 의미에서 ‘박정희 시대’는 자유민주주의의 틀이 유지된 1960년대가 아니라, 1972년 ‘10월 유신’의 전주곡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탄압을 핵심으로 하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공포된 1971년에서 시작되어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까지 이르는 시기이다) 임금몫은 1970년 76.4%에서 1979년 68.6%로 무려 7.8% 포인트 감소했다.

 

1970-79년 동안 두 해 (1971, 1979년)를 제외한 나머지 7개 연도에서 실질임금 상승률은 노동생산성 상승률을 하회했다. 그리고 1971-2002년 32개 연도 중 실질임금 상승률이 노동생산성 상승률을 상회한 기간은 그 절반이 안 되는 15개 연도였다. ‘박정희 시대’ 임금몫의 저하는 그림에서 보듯이 다름 아닌 박기성교수가 근거한 데이터인 김동석외(2002)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김동석외(2002)는 ‘임금등가’ 조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가 산출한 임금몫의 추이와 비교하여 절대수치에서는 하방 편기 추세에서는 상방 편기를 보이고 있다.

 

문제가 된 교과서 자료도 1970-80년 동안 노동생산성 상승률이 실질임금 상승률을 앞질렀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공통적으로 ‘임금 억압’ (장 교수가 “초과착취”라고 표현한 것)이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의 기초를 제공했다는 통설을 재확인한다. 1987년 이후 임금 상승이 가속화되었지만, 이것은 ‘박정희 시대’ 억압된 임금의 회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울러 주목되는 점은 1987년 이후 임금 회복 따라서 임금몫의 상승이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중단되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 시대’와 마찬가지로 1997년 이후 경제회복과 자본의 수익성 회복은 임금몫의 저하 즉, ‘임금억압’을 기초로 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이교수와 박교수가 지지하는 임금=한계노동생산성 가설과 같은 오로지 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시민의식과 역사사회 인식을 함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고등학교 사회교과서에 포함되는 것에 반대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현행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의 진정한 문제는 이교수와 박교수가 강변하듯이 반시장적 편향이 아니라, 정반대로 극단적으로 주류경제학 일변도의 시장주의이며, 이는 시급히 개혁되어야 한다.


©2005 Kyosu.net
Updated: 2005-05-31 11:2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조세개혁 방해하는 지배세력-진주신문 5. 30

2002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선배들과 모일 기회가 있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 한 선배가 “우리 사회의 주요 분야의 지도급 인사들이 모두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해서 선거에서 패배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노무현 후보가 이긴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은 사회로부터 이득을 취하려고만 하지 사회에 대해 해야 할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자녀를 군대에 보내는 일, 세금을 정직하게 내는 일,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법을 지키는 일을 제대로 한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과거에 1년에 10% 정도로 고도성장을 할 때는 어쨌든 일반서민들의 생활도 나아지니까 이러한 의무 기피와 부정부패가 심했더라도 눈감아주었다. 그러나 이제 양극화와 실업, 고용 불안 등으로 생활이 악화되고 있으므로 사회보장 요구가 높아진 서민들은 이러한 행태를 계속하는 기득권 세력을 지지할 리가 없다.”

최근 보도를 보면 이러한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간에 소득격차는 커졌는데 조세부담률 차이는 오히려 줄어드는, 어이없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05년 1/4분기 가계수지 동향’에 의하면 도시가구의 소득 상·하위 20% 계층간 소득격차(1/4분기 기준)는 2003년 7.23배에서 2004년 7.28배, 2005년 7.6배로 확대되었다. 반면 상·하위 20% 계층간 조세부담률 격차는 2003년 5.16배에서 2004년 4.04배, 2005년 3.59배로 작아졌다.

또 의사, 변호사, 상인 등 자영업자들은 근로자들보다 소비지출은 더 많이 하면서도 세금은 턱없이 적게 내고 있다. 지난해 전국 가구의 소비지출은 월평균 소비지출은 196만원, 이 가운데 세금으로 7만 3천원을 냈다고 통계청은 발표했다. 조세부담률은 3.7%이다. 근로자 가장 가구의 경우 월평균 200만원을 소비하면서, 세금은 5%에 육박하는 9만 8천원을 부담했다. 사무직 근로자 가구는 월평균 소비지출 243만5천933만원의 6.74%인 16만4천139원을 세금으로 냈다. 하지만 의사와 변호사, 상인들을 포함한 자영업자의 경우 210만원으로 소비수준은 더 높은 데 반해, 세금은 고작 4만 3천원을 낸 것으로 조사돼 근로자의 44%수준에 불과했다.

이렇게 된 주된 이유는 부자들의 재산 보유와 재산소득에 대한 과세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경기활성화를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재산소득에 대한 정확한 과세에 힘을 쏟지 않고, 오히려 특별소비세 인하 등 부유층을 위한 간세정책을 편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금융소득 종합과세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고, 부동산 임대소득에 대한 과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상경 대법관은 자신의 건물 임대소득을 월 400만원 가량에서 100만원 가량으로 대폭 적게 신고해 10년 동안 3억원 가량의 세금을 떼먹었다는 사실이 임차한 가게주인과의 갈등 속에서 드러났다. 이러니 정액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기득권층은 이러한 모든 것이 그동안의 관행이었으니 자기만의 잘못도 아니고 혹 걸려도 추징세금 좀 내면 되므로 별로 문제될 것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졌다. 우선 민주주의가 무섭도록 성장하고 있다. 공무원노동조합조차 합법화되기에 이르렀다. 공무원노조는 바로 이러한 탈법과 부정부패를 척결하는데 힘을 쏟게 될 것이다.

또한 기득권 세력들이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사회 자체의 유지마저 어려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외환위기 후 노인들의 자살률이 급상승하여 2003년에는 65세 이상 10만 명 중 71명으로, 일본의 두 배, OECD 가입국가 1위를 기록했다. 어른을 잘 모신다는 우리의 전통 풍속에 비춰봐서 정말 부끄러운 기록이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노후보장을 받지 못하는 노인들의 절망이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다른 한편 자녀출산율은 1.17%로 세계 최하수준이다. 신규 노동자의 절대 다수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비정규직 노동자 부부로 구성된 신혼 가족이 아이를 제대로 키울 경제적 힘이 없고 사회보장도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기득권세력의 의무 수행 강제하기를 위해 특별한 각오를 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국세청과 전체 행정부의 힘을 총동원하여 조세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국민들이 기대하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소홀히 하는 것에 오늘날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위기의 뿌리가 있다.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장상환

진주신문 2005년 05월 30일 (760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