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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고프고 배고플때 가는 곳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때는 여행을 가면 된다. 그런데 여행이 아니고 그냥 어디가서 하룻밤 자고 싶을때는 갈 곳이 없다. 아니, 사실은 놀 곳도 없다. 어쩌면 같이 놀사람이 없는걸지도 모르지만.

 

‘빈집’은 이러한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 준 곳이었다. 2008년 2월 정월대보름날 집들이를 한다는 공지를 블로그에서 보고 오곡밥을 한솥 해서 정종과 함께 가지고 갔다. 아는 사람이라곤 지음과 몇몇 진보블로거들이 다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처음보는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인사를 나누고 오곡밥과 나물을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때 봤던 사람들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날이 내가 빈집과 첫 대면을 한 날이다.

 

빈집의 발상은 아주 훌륭했다. 집을 소유하지 않고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든다는 취지와 어느 누구도 가리지 않고 ‘주인행세’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었다. 하룻밤 자는데 그 당시엔 2천원씩의 분담금을 냈으니 그 또한 매우 경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빈집은 여관이나 여인숙이 아니다. 모두가 주인인만큼 공동체 생활을 약속하고 이를 실천하는 곳이다. 공동체 생활이 익숙치 않은 나는 장기투숙이나 단기투숙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앞에서 말한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집이었다. 가끔 술 먹느라 밤을 새우기는 했다. ^^

 

장투와 단투를 하지 않았지만 사람이 고프거나 술이 고플때는 어슬렁 어슬렁 빈집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때 만난 친구들의 이름을 기억하자면 까마득하지만 여전히 생생하기만 하다. 지음, 아규(살구), 지각생, 데반, 이나, 샤, 슈아, 현명, 베라, 아침, 파안, 렛잇비, 공룡, 라봉, 용용, 나무, 양군, 달군, 승욱, 홍지, 디온, 말랴, 등등. 외국인들도 종종 보았지만 이름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이들 가운데 나에게 큰 도움을 준 친구는 이나, 데반, 지각생이다. 이나는 내가 논문의 초록을 쓸때 한글을 영어로 번역하지 못해 쩔쩔맬 때 절묘하게 나를 구해준 친구이다. 이후에는 우리집 꼬맹이와도 친구가 되어 종종 연락을 하곤 했다. 어느날은 파안, 렛잇비, 나무가 팥죽을 먹는다고 우리집에 달려와 꼬맹이까지 빈집으로 납치(?)해 가는 바람에 자유를 만끽하기도 했었다. 데반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아무 때나 연락하고 놀자고해도 두말 않고 놀아준 유일하게 편한 술친구였으며 지각생은 지금도 내가 가끔 괴롭히는 든든한 친구다. 베라는 내가 동자동사랑방에서 일할 때 침뜸 자원봉사를 주도하며 침뜸 선생님들을 모셔오기도 했고, 지음과 라봉은 자전거 택배로 사랑방의 사업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용용은 사랑방에 CMS후원을 해주었고, 공룡은 이제 사랑방의 마을기업을 담당하는 사업가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생각해보니 내가 기억하는 빈집과 친구들은 입는 것 빼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해준 마술같은 것이었다. 그저 먹고 놀았던 것 밖에 더 있을까, 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더불어 공동체의 의미를 알려 주었고 그 가지가 뻗어나가 다른 활동들로 연결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빈집에 자주 가지 못했다. 먹고 사는 일이 바빠서라는 핑계를 댈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빈집이 내 뒤에 버티고 있다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한다. 참! 2010년 가을, 아름다운재단에서 나눔에 관한 컨퍼런스에 참가 했을 때이다. 빈집의 친구들인 살구, 승욱, 그 외 2명(기억이 안남)이 나와서 이런말을 했다. “내것이 아니라, 내것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진정한 빈집정신이다, 그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것으로 금 그어 놓고 살고 있는가? 생각해보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심지어 빈집에서 만난 많은 친구들마저 나만의 친구들이라고 착각한 적도 있었으니까. ㅋㅋ

 

그런데 며칠전 지음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아랫집(빈집은 조금씩 다른 구성원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이 없어진다면서 아듀파티와 함께 빈집에 관한 수기를 써 달라면서. 그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리라 짐작하지만 내가 더 적극적으로 빈집활동에 참여하지 않아서인가 하는 마음이 들어서 찔리기도 했다. 이제는 언제든지 달려 갈 수 있는 친정같은 아랫집이 없어진다라는 생각을 하니 허전하며 슬픈마음 그 이상이다. 그리고 나 독립하면 빈집에서 꼭 장투하며 각종요리를 만들어서 뽐내려고 했는데. 맛 없어도 맛있다고 먹어줄 친구들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상상을 하곤했는데... 난 이제 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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