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08/06 20:54

 

[너에게]

정호승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 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도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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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6 20:54 2006/08/06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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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8/06 20:52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 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 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 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 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김용택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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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6 20:52 2006/08/06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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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8/06 20:50

숨길 수 없는 노래 2

-이성복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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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6 20:50 2006/08/06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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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 2004/09/14 23:59

恐怖와 言論이 戰場에 미친 영향

    - 미국의 월남전쟁과 GULF전을 중심으로 -

 

6 軍團長   中將  徐  慶  錫


 

[目次]

1. 序   言

2. 本   言
 가. 恐怖가 戰場에 미친 영향
    1) 핵(核)에 대한 恐怖
    2) 중공군의 참전과 그들의 인해전술(人海戰術)
       에 대한 恐怖
    3) 세계 여론과 공산권에 대한 恐怖
 나. 언론이 전장에 미친 영향
     ** GULF전에서는 어떻게 했나? **
3. 結   言

                                                     
1. 序   言

 

클라우제비츠(Clausewitz)는 그의 저서에서 “공포(Fear)”는 기본적인 전력 특히 그 중에서도 공격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주장했다.1)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 중장이 저술한 『지휘의 연구(A Study in Command)』에서도 이미 100년 전에 『공포에 대한 선입관을 가져서는 안된다.』라고 충고한 바 있다.

 

또한,『공포(Fear)라는 말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바보라 할지라도 공포가 전쟁터에서 위험한 요소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공포에 대한 선입관(先入觀)이며 만약 두려움에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면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사고기능(思考機能)은 마비(麻痺)되고 따라서 위험만이 증가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공포와 위험과 위협(威脅)에 대한 선입관을 가져서는 안된다. 전쟁시는 언제 어디서나 공포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국의 어떤 위협요소나 공포요소에 집착(執着)한 나머지 선입관이나 편견에 따른 고정관념(固定觀念)을 갖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고(思考)의 기능을 마비(麻痺)시켜서 영원히 극복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전쟁지도부는 명확하고 확고한 전쟁지침을 내릴 수 없으며 예하 전투 지휘관들은 소신있는 작전구상과 지휘를 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은 패전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미국이 월남전에서 역사상 최초의 패전을 기록한 것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국면에 직면하므로서 전쟁에 대한 공포의식이 조성되고 전승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세계 최대강대국인 미국으로 하여금 패전의 길을 걷도록 한 요인은 무엇인가?

 

 

2. 本    言
 
   가. 공포가 전장에 미친 영향

 

      1) 핵(核)에 대한 恐怖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은 핵(核)이 얼마나 가공(可恐)할 무서운 무기인지를 인식하였다. 1953년 8월에 소련이 핵무기를 실험하였고, 1964년 10월 16일에는 중공이 첫 핵실험을 시작하면서 핵투발계통(Nuclear Delivery System)을 급격히 향상시켜 나갔다.
 
한국전쟁 당시와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국이 소련 공산주의와 서로 대치하게 됨을 인식하자 국민들 사이에는 소련과 중공의 핵(核)을 미국이 일본에 터트린 것과 같은 무서운 위험으로 간주하여 그 당시와 같은 무시무시한 피해가 우리에게 닥치겠구나 하는 공포의식(恐怖意識)이 싹트게 되었다.

 

이는 매우 현실적인 위협으로 당시 미국인의 공포는 미국이 적의 핵으로 망(亡)하지나 않나, 최소한 월남전에서 적국이 전술핵(戰術核)을 사용하여 미국 군인이 떼 죽음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2) 중공군의 참전과 인해전술에 대한 恐怖

 

미국이 핵의 위력을 믿고 있을 때, 중공은 1964년 10월에 핵 실험을 하고 나서는 한국전쟁의 예를 들면서 월남전에 참전하겠다고 위협을 했다. 미국은 핵 공격도 우려되지만 전쟁의 확산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또 하나의 공포는 미국이 아시아의 지상전에서 중공과 싸우게 되지나 않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한국전쟁 초기에 미국은 위험과 공포를 느끼지 않고 오직 북괴군을 격멸하기 위한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문제의 양상이 바뀌었다.

 

1950년 10월 26일 Smith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1해병사단이 원산에 상륙하여 장진호(長津湖)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하고 서부에서는 Walker 장군이 지휘하는 제8군이 한국군 제1사단을 선두로 평양을 탈취하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한만(韓滿) 국경선으로 공격을 계속하여 일부는 압록강까지 전진하였다.

 

이때 중공군 제42군의 3개 사단은 만주를 출발하여 10월 14일 압록강을 건넜으며, 11월 초에는 제9병단의 3개군이 장진호 지역으로 남하하였다. 서부에서는 한국군 제2군단이 온정리(溫井理)에서, 동부에서는 미해병 제1사단이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에 강타 당하고 도처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를 당해 많은 피해를 보고 서울이 다시 적에게 피탈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미군은 일본으로 철수하는 계획까지 수립했었다.

 

이에 미국은 중공 본토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 수(數)도 없이 밀려드는 중공군을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휴전이라는 카드를 내놓고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모두가 중공군의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인해전술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미국은 6.25 전쟁의 악몽이 월남전에서 되풀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3) 세계 여론과 공산권에 대한 恐怖

 

분명히 월남전쟁은 월맹군의 도전에 의한 월남에 대한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월맹뿐 아니라 모든 공산국가들은 월남전쟁을 월남국민들이 현재 체제를 부정하고 스스로 봉기(蜂起)한 내전(內戰)이라고 선전하면서 “남의 나라 국내 문제에 다른 강대국이 개입하는 것은 내정간섭(內政干涉)이다. 따라서 월남인 스스로 자기나라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월남전 참전은 내정간섭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로 인하여 세계의 여론은 미국의 월남전쟁을 정의(正義)롭고 가치있는 전쟁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미국은 국내여론이 나빠지고 반전사상이 팽배하게 되자 월남전쟁은 분명히 월맹의 침략전쟁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월남내의 내전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미국은 게릴라를 목표로 하여 게릴라를 쫓는 군사행동만을 주로 행사함으로써 월맹내의 적 군사주력과 전쟁지도본부를 공격하지도 못하고 포기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기간중에 공군에 의한 월맹폭격은 있었으나 이것 또한 지속적이거나 적의 의지를 파괴하기 위하여 실시하지는 못했으며 지상군이  국경을 넘어서 월맹본토를 공격한 일이 한번도 없었던 것은 적 주력 격멸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는 월남전쟁을 한 나라의 단순한 내전(內戰)으로만 보았다는 의미가 되고, 세계의 여론을 극복하지 못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여론에 떠밀려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연합국은 소련 및 중공과의 군사적 충돌을 두려워하면서 과감한 군사행동을 계속하지 못하고 전쟁을 월맹측으로 확산시킨다던가 Combodia, Laos등에 있는 소위 성역(聖域)인 호지명 루트를 공격하는 등의 과감한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나. 言論이 戰場에 미친 영향

 

특히 미국 정부가 무서워한 두려움의 대상은 소련이나 중공 및 월맹보다도 자국내의 여론(與論)이었다. 많은 미국 젊은이가 전장에서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반전운동 및 공산주의자의 선전선동(宣傳煽動)활동 때문에 미국 행정부는 자국국민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취재활동 역시 구속받음이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법이 이를 보장하고 있다. 미국은 여론정치(與論政治)의 나라이다. 여론은 대부분 TV가 만든다. 미국이 월남에서 손을 떼고 월남이 공산화되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TV카메라 때문이었다. TV수상기는 그 특성상 종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TV는 거짓말쟁이 중에서 그럴듯한 거짓말쟁이다. 어느 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럴듯하게 설명을 하면 그것을 보는 국민은 TV의 설명을 믿는다.

 

월남전 이전에는 전황보고를 라디오를 통해 음성으로 전달하였다. 현장 사진이 없이 말로만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가 없다. 그러나 TV의 등장으로 생생한 현장사진이 안방에까지 전달되었다.

 

영국군은 미국 위성에서 중계한 TV를 통해 포클랜드 전쟁의 전기(戰機)를 잡을 수 있었고, 걸프 전쟁시는 전장의 생생한 모습이 전세계에 전파되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싸우려는 적의 의지를 파쇄(破碎)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의 전투력과 전쟁지도본부를 파괴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 자체가 살생(殺生)이고 파괴 그 자체다. 따라서 비참하고 잔인하다. 살생의 현장은 끔찍하다. 그런데도 미국내에서는 월맹의 수도인 하노이 폭격시 생생한 현장사진을 TV를 통해 보고 비인도적이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미 공군의 폭격으로 네이팜(Napalm)탄의 불길을 뒤집어 쓰고 울부짖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온 가족이 저녁을 먹고난 후 거실에 모여 앉아 즐거운 담소를 하는 시간에 TV스크린에 비춰졌다.

 

전 미국인의 대부분이 이 잔인한 모습을 같은 시간에 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 손녀가, 부모들은 내 딸이 울부짖는 것으로 착각까지 하게 되었다. 미국 국민으로 하여금 자국군대의 잔인성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오류(誤謬)를 낳았다. 월남인들이 모두가 다 그렇게 죽는 것으로 착각(錯覺)하고 자기 자식들이 그렇게 죽거나 잔인하고 무자비(無慈悲)하게 월남인을 죽이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TV 스크린은 월남전쟁을 부도덕한 전쟁, 더러운 전쟁으로 여기도록 여론을 들끓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한 셈이었다. 국익을 챙기지 않고 흥분되는 순간과 특종만을 찾아 다니는 TV가 이적행위(利敵行爲)를 한 결과를 가져왔다.


 

TV 화면이 등장한 이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TV의 화면과 해설이 국민의 여론을 주도하게 되고, 그 여론은 바로 한 나라의 힘의 중심점(Center of Gravity)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정부와 전쟁지도본부에서는 국민의 여론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월맹측과 공산주의 국가들은 월맹이 힘으로 싸워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간접접근 전략의 목표를 미국의 힘의 중심점이 되어버린 국민여론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미국의 TV가 한 수 더 떠서 나라의 힘의 중심점이 되어버린 국민여론을 적에게 유리하게 유도(誘導)하는데 크게 기여(寄與)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 공산진영의 선전매체는 이에 호응하여 사실을 확대과장(擴大誇張)하고 그들의 전쟁을 정당화(正當化)시키고, 미국의 전쟁을 비인간적이고 추악(醜惡)한 행위로 간주케하고 남의 나라의 내정(內政)에 뛰어들어 간섭(干涉)하면서 전쟁을 대신(代身)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결과적으로 월남정부는 미국의 꼭두각시로 미국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는 나라이고 정부가 부패하여 지원과 원조의 가치가 없는 나라로 부각시켰다.

 

힘의 중심점이 되어버린 미국의 여론을 파괴하기 위하여 무섭게 달려드는 적 앞에서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미국의 정신나간 대학교수, 주교, 목사, 수녀 등의 종교인과 지식인, 월남전 참전을 기피한 학생들로 구성된 반전단체(反戰團體)는 미국의 월남지원을 종료시킴으로써 세계평화를 달성하자는 멍청하고 악명 높은 호소문인 『목사의 편지』를 널리 유포시켰다.

 

마침내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 및 청년학생들의 반전시위로 인해 미국의 힘의 중심이된 여론은 자기정부가 아닌 적 월맹측으로 넘어가고 말았고 미국정부와 전쟁지도본부는 그 여론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쟁의 승리에 필요한 과감한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지 못했고 군사력을 집중 운용하지도 못했으며 노력을 통합하지도 못했다.

 

미국은 월남전쟁을 자국내의 내전(內戰)으로 규정함으로써 월남 내부에 있는 적과 싸우는 것으로 개념을 한정(限定)시켰다. 북폭을 한다던지 월남국경을 넘어서 호지명 루트나 월맹본토를 공격하는 명분(名分)도 상실했고 실제 공격을 하지도 못했다. 이는 미국이 자국내 여론(與論)을 두려워하고 싸워야 할 대상인 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은 월남에서 겪은 전철을 소말리아에서도 똑같이 되풀이 하고 있다.

 

지난 1993년 10월 3일 소말리아에서 미군 12명이 숨지고 최소한 6명이 실종한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이 들끓고 있었다. 소말리아의 반군에게 포로가 된 추락한 헬기 조종사 마이크 듀란트(32)는 다리를 다친 채 겁에 질린 표정이었고 얼굴은 피투성이이고 곳곳에 멍든 흔적이 있는 채 그대로 방영되었으며, 또한 그 조종사 가족의 침통한 모습도 앞을 다투어 보도하였다. 이와 함께 피습당한 미군 헬기의 찌그러진 모습과 살해된 미군의 시신(屍身)이 방치되어 있는 장면, 다른 하나는 소말리아의 소년들이 사살된 미군의 시체를 줄에 매어 질질 끌고 다니는 참혹한 모습이 TV에 그대로 방영되었다.

 

이런 내용이 방영된 직후 미국 전역에서는 월남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듀란트 준위의 고향인 카나다 국경부근의 소도시에서는 노란 리번이 빌딩과 차 안테나를 뒤덮었다. 60년대 말 베트남의 참혹한 실상이 TV에 방영된 뒤 반전여론(反戰與論)이 들끓었던 것처럼 평범한 군인이었던 듀란트 준위의 비참한 모습의 사진 한장이 미국의 소말리아 정책의 정당성 여부를 평가하는 하나의 상징(象徵)이 되어 버렸다.

 

하원과 상원에서는『미국이 제 2의 베트남전 수렁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소말리아 주둔 미군을 즉각 철수시키라고 클린턴 대통령에게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ABC - TV가 여론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64%가 미군 철수를 희망한 반면, 29%만이 미군의 계속 주둔을 지지했다.

 

결국 미국은 언론보도로 인한 국내여론에 의해 월남에서 와 똑같이 철수 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경우는 비단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체첸 공화국간의 전쟁에서도 러시아가 똑같은 체험을 했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은 러시아가 현대의 매스미디어 위력을 간과하므로서 미국의 월남전시 TV가 월남전 참상을 각 가정에 전파로 보낸 것과 똑같이 전장현장의 참상이 TV를 통해 생생하게 각 가정에 전달됨에 따라 전쟁에 대한 국민의 두려움이 반전(反戰)여론으로 돌아서고 전쟁지도부의 반목과 불협화음으로 까지 이어지게 되어 일사불란한 전쟁지도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러시아의 역사를 통해 보면 현재 체첸(Chechen)공화국 사태 정도의 참상(慘狀)과 비교도 되지않을 정도의 참혹한 시련이 수(數)도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hechen 사태는 Russia TV에 전장의 모습이 국가의 검열없이 보도된 최초의 전쟁으로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매일 밤 Russia의 각 가정에는 동토(凍土)의 얼어붙은 땅에서 죽거나, 부상당하여 울부짖는 Russia 병사의 참혹한 모습이나 결사항전(決死抗戰)을 외쳐대는 Chechen 병사들과 절규하는 민간인들의 모습이 TV를 통해 전달되었다.

 

그것은 폭격중지나 전쟁종식 등에 관한 정부의 주장(主張)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전달했으며, 오히려 Yeltsin 정부를 거짓과 잘못의 변명집단으로 부각(浮刻)시켰다. Russia인들은 검열제도가 사라지고 이토록 개방된 언론보도에 접해 본 적이 없어 당황했고 더 큰 분노를 느끼게 되었으며 언론보도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은 오히려 정부의 보도보다도 TV의 해설을 믿고 Chechen전쟁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언론 특히 TV스크린의 위력을 미쳐 모르던 Russia 정부는 다시 검열을 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이미 민심(民心)은 부도덕하고 불필요한 전쟁에 우리의 아들들이 너무 비참하게 죽어간다는 쪽으로 기울어 버린다.2)           

 

Yeltsin 대통령과 정부관리들은 Russia의 TV와 신문이 Chechen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편파보도(偏頗報道)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국영 TV 방송국의 사장을 해임하겠다고 위협하는 우스꽝스러운 사태에 까지 이르렀다.

 

일부 군장성들까지 Yeltsin을 포함한 정부관리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알렉산드로 레베트 중장(옛소련 공화국 몰도바에 주둔한 러시아 제14군 사령관)은 『그라쵸프 국방장관이 사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의 Chechen대응책을 비난하고 크렘린 지도자의 아들이나 손자들로 구성된 부대가 있다면 Chechen에서 그 부대를 지휘할 용의가 있다.』고 정부를 조롱(嘲弄)까지 했다.

 

모스크바의 푸쉬킨 광장에서는 Russia군의 어머니들이 체첸에서 전사한 아들의 영정을 들고 반전시위를 벌이고, 민영방송인 NTV는 『정치인은 이번 전쟁이 아프칸 전쟁같이 어물어물 마무리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언론의 역할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이다.』라고 언론의 전장 참여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意味)로 정부와 맞섰다.


지금 Russia에서는 언론(言論)과 정부의 줄다리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TV 스크린의 위력(威力)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정부가 사전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회의 동의(同意)도 받지 않고 국민의 의견수렴도 없이 공격을 감행한 Yeltsin 대통령은 국민 지지율이 14% 하락하여 군부에 의한 쿠테타까지 외신(外信)은 전달하고 있다.

 

언론의 무절제한 보도는 국민들로 하여금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므로서 결국은 전쟁에실패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종종 적을 이롭게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                     ※
  
2차대전시 영국에서의 "예" 

 

1994년 노르만디에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개시되어 독일 본토에 대한 위협이 증가되자 히틀러는 비장의 무기를 등장시켰다. 6월 12일 독일군의 영불해협쪽 비밀기지에서 런던을 향해 사상 최초로 V1 로켓트를 시험 발사하였다. 다음날에는 54대의 발사대에서 500여 발의 로켓트를 준비 하였으나 10발 정도만 발사에 성공하였고 그중 5발이 영국까지 날아갈 수 있었으며 그중 1발이 정확하게 런던 시가에 명중되었다. 런던 시가지에서 대폭발을 일으킨 로켓트의 위력은 그 파괴력 만큼이나 영국 시민들에게 던져 준 충격이 더 컸다. BBC를 비롯한 각 방송 매체에서는 즉각 사건의 전모를 추적 보도하면서 독일을 극렬하게 비난하였고 폭발 현장의 위치를 비롯한 생생한 피해 상황을 보도하였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은 2일 후 더욱 엄청난 불행을 가져왔다. 영국 방송에서 중계해 준 로켓트의 탄착 현황 덕분에 독일군은 정확하게 탄도 수정을 가하므로써 140여 발이 영국까지 도달하였고 그 중 73발이 런던에 명중하였다.
 
런던 시가지는 아비규환으로 변했고 엄청난 파괴와 불길 속에 속에서 도시의 절반 이상이 잿더미로 변했다. 영국의 BBC 방송은 조국과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걸프전에서는 어떻게 했는가?** 주3)

"뉴스 미디어 관계자는 항상 에스코트를 받아야 한다. 반복한다. 항상 에스코트를 받아야 한다."               
 
베트남전쟁 실패 이후, 패전 이유에 대한 연구가 미국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검토에서 여러 가지 패인(敗因)중에, 미 군부의 거의 일치된 견해중에 하나는 매스콤에 대한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기자들 특히 TV 방송기자들에게 거의 무제한의 취재자유와 현장접근을 허용했기 때문에, 작전에 차질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전장의 비참한 모습이 지나치게 부각되어,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적을 이롭게 함은 물론 반전(反戰)여론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군이 싸울 수 있는 명분을 상실케 된 것이 가장 큰 문제로 검토되었다.

미 군부는 기자들에게 장비의 고장이나 작전의 실패같은 불리한 사실이 알려지면, 언론의 생리상 그런 부정적인 사건이 집중적으로 보도되고, 전투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기사는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같은 생각은 영국군의 포크랜드전쟁으로 더욱 확실해졌다.영국군은 아르헨티나와 싸운 이 전쟁에서 엄격한 보도통제를 실시했고, 군사작전을 군인들이 소신껏 수행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

 

미군은 1983년의 그라나다 작전 때 그 교훈을 활용하였다. 미군은 기자들을 완전히 따돌려 놓고 그라나다섬에 침공했다. 기자들의 항의가 거세자, 미군은 기자들의 대표자를 뽑아서 종군을 시키고는 그 내용을 나누어 갖게 하였다.

 

1989년 미군이 파나마를 침공할 때는 이러한 제도조차 운영하지 않았다. 체이니 국방장관에 의해 군사작전이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철저한 보안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국방부의 조사위원회에서 그러한 조치가 지나친 보도통제였음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 때는 군사작전이 다 끝난 뒤였다.

 

체이니 국방장관은 두 가지 원칙을 고집했다.

 

첫째는 언론의 권리보다는 군사적 성공이 우선한다. 이 원칙에 따라 지금까지 종군기자에게 부여되었던 여러 가지 특권이 폐지되었다.

둘째는 정부의 신뢰성을 확립한다는 것이다. 근거가 없거나, 확실한 자료도 없이 뜬 소문을 갖고 사실인 양 보도하는 것을 못하도록 그 근원부터 차단을 했다. 월남전쟁에서는 전선의 사실과 보도내용에 큰 차이가 있어서 신뢰성에 큰 문제를 갖고 있었다.

 

이같은 기본원칙에 따라 5가지 항목의 정보관리 정책이 추진되었으며 철저하게 지켜지도록 강조되었다.

 

첫째, 이라크의 위협과 군사력의 강대성을 최대한으로 홍보하고, 연합군의 역사적 임무를 최대한으로 강조한다.            

둘째, 국민이 과도한 기대를 갖지 않도록 하고 항상 예상을 상회하는 결과가 나오게 하여 신뢰감을 갖도록 한다.

 

셋째, 걸프전쟁이 비인도적이라는 인상을 갖지 않도록 한다. 부시 대통령이 주전론자라는 인상을 갖지 않도록 한다.

넷째, 이라크를 포위하는 동맹국, 연합군의 결속유지를 저해하는 정보를 극력 억제한다.

 

다섯째, 이라크를 기만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모든 거짓 정보를 이용한다.  

 

전쟁이 시작되기 한 달 전, 체이니 국방장관의 대변인 피트 윌리암스는 미국의 주요 언론사 사장들과 만나 기자들의 종군 취재를 약속했고, 전투가 벌어지면 풀 기자제도(기자들의 대표를 뽑아 종군시킨 다음 그 기사를 나누어 갖는 제도)를 운영할 것도 약속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착한 기자들은 미중앙군사령부에서 취재허가를 받기 위해 6페이지나 되는 종군보도지침에 서명을 해야 했다. 그 지침에는 윌더머드 대위가 써 넣은 구절이 아래와 같이 들어 있었다.

"항상 군이 제공하는 에스코트 병력과 행동을 같이 할 것."

 

그에 앞 서서 기자들은 체력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종군기자도 전장에서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의 체력 테스트는 종군기자들의 집결지인 다란의 인터네셔널 호텔의 풀장에서 실시되었다. 미군이 정한 기자들의 체력 테스트는 41세의 남자를 기준으로, 업드려 팔굽혀펴기 2분간에 33회를 한 뒤, 2분간 복근운동 29회였다. 마지막 과정은 달리기로, 호텔 주위 2400미터를 18분안에 돌아야 했다. 기자들을 통제하고 길들이기 위한 최초의 통제수단이었다.

 

기자들에게는 야전 자켓과 내피, 야전 하의, 슬리핑 백, 탄띠, 수통, 화학전 캡, 야전배낭, 붕대, 가스마스크, 아트로핀 주사기, 화학전보호의와 구두, 가글, 헬밋이 지급되었다. 이 군장을 다 짊어지면 움직이기 조차 힘들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한 이러한 조치는 군에 통제를 받지 않으면 죽는다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간접적인 통제방법을 사용하였다.

 

풀 기자제도는 미군의 중앙군사령부에서 마음대로 운영했기 때문에 기자들은 불평이 많았다.사우디아라비아에는 기자는 많이 있었지만 전선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제한되었다. 갈 수 있다고 해도 미군 당국에서 지정한 장소만 갈 수 있었고, 미군과 같이 생활할 수도 없었다.
물론 모든 기사는 검열을 받아야 송고할 수 있었다. 어느 현지 부대장은 휴대용 컴퓨터로 작성한 원고는 읽기가 어렵다고 타이프라이터로 친 원고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 이라크 국경선을 따라 동서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헌병이 배치되었다. 이들에게는 최우선적으로 기자를 저지하라는 명령이 내려갔다.

 

뉴욕타임스의 에릭 슈미트, 존 키프너, 크리스 헤지스 등 세 기자가 이 도로에서 한 미군병원을 취재하려 했다가 체포되었다. 워싱턴 포스트와 AP 통신사의 기자와 영국의 BBC 방송의 취재팀 6명을 포함하여 프랑스인 사진기자도 체포되거나 억류당했다.
 
그렇다고 모든 기자들이 미군의 작전계획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US NEWS AND WORLD REPORT지의 편집부장 데이비드 거겐은 지상전이 시작되기 2주전에 연합군의 공격목표를 알아냈고, 미해병대의 상륙작전도 없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지만 스스로 공개하지 않았다.

미국의 다른 언론매채도 여러가지 정보를 입수했지만 모두 미군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공개하지 않았다.

 

NEW YORK TIMES의 말콤 W. 브라운 기자는 걸프전의 스타로 떠오른 F-117A스텔스 전투기 기지를 방문했다.

 

그는 기사를 작성해서 그를 에스코트하는 장교에게 첫번째 검열을 받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이 통과되었다.

이 원고는 비행단 본부로 제출되었다. 비행단 본부에서 다시몇 개의 단어를 고치라는 지시가 전달되었다. 즉 gibby(충동적인)라는 단어로 조종사를 표현했는데 이는 호전적(好戰的)인 단어로 적당치가 않으니 proud(자랑스런)로 고치라는 것이고, 원고에는 F-117A를 "전폭기"로 표현했는데 이를 "전투기"로 고쳐 쓰라는 연락이었다.

 

마감시간에 쫓긴 두 기자는 비행단장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사는 다란에 있는 이테네셔널 호테로 보내진 것이 아니라, 미국 본토의 네바다주 토너퍼에 있는 F-117A 기지본부로 보내졌다. 이 기지의 보안장교는 군사기밀을 누설한다는 이유로 그 기사를 보류시켰다. 결국 그 기사는 작성된 지 24시간이 지난 뒤에야 김이 다 빠져서 검열을 통과했다.

 

미 제1기갑 사단을 취재하던 LOSANGELES TIMES의 도우 젤 기자는 군당국의 검열로 일할 의욕까지 상실하였다.

 

"내 원고는 나를 따라다니는 에스코트 장교의 검열을 거쳐 제1기갑사단의 공보장교에게 넘겨지고, 공보장교가 그 원고를 본 다음, 사단 참모장에게 가지고 갔습니다.
그 다음에 그 원고는 다시 7군단 공보장교에게 보내져 다시 검열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원고는 중앙군사령부로 가서 검열을 받았습니다. 검열을 거칠 때마다 원고는 가필되고 새로운 해석이 추가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받고 전역한 데이비드 헤크워드 예비역 대령은 전장 기고가로서 뉴스위크지를 위해 취재를 하다가 기막힌 꼴을 당했다고 술회하였다.

"미군병사들이 소총에 총검을 꽂고 우리들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이번에 실제전투보다 더 많이 미군이나 사우디 아라비아군으로부터 총뿌리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기자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미군사령부의 검열과 통제를 벗어나려고 했다. 많은 기자들이 미육군 또는 해병대원으로 위장하여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많은 기자들이 체포되었다. 12시간이나 일선부대의 영창에 갖혀있던 기자도 있었다. 어떤 기자는 이렇게 한탄했다. "나는 일선에서 시간의 3분의 2는 MP의 눈을 피하는 데 썼습니다. 결국 취재시간은 3분의 1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3.結 言

 

북한은 전 세계의 국가 가운데 언론과  TV가 철저하게 통제당하며 국가에서 지시하는 것만 보도한다. 따라서 국민여론 형성도 국가의 의도대로 이끌려 간다. 전선의 비참한 모습은 각 가정에 비춰지지도 않겠지만 우리의 시각으로 북한의 국민 여론을 보아서는 안된다.

 

국가가 선전선동(宣傳煽動)의 매체로서 역할을 담당하여 옛날 독일의 Hitler가 하듯, 소련의 Starlin이 하듯, 전젱에 광분하여 뛰어들게 만들 것이다. 국가의 노력과 군대의 전투력 집중이 가능하고, 중공군이 하듯 한 전선 뚫기 위하여 인해전술도 불사할 것이다.
 
적의 선전매체는 월남 및 소말리아에서와 같이 잔인하고 비참한 전장의 모습을 골라 TV 스크린을 통해 집중적으로 비춰줄 것이다. 우리 자체내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미국이 자국군대의 과감한 전투력 투입을 주저토록 하기 위하여, 방송과 TV를 포함한 전 선전매체를 이용하여 집중적인 선전 공격을 가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와 미국 및 세계의 TV 스크린이 월남, 소련의 체첸 침공, 소말리아 사태와 같이 국익과 전쟁승리에 아랑곳없이 특종을 찾아 전혀 예측하고 계산되지 않은 자극성 보도를 할 때 국군과 미군의 전투수행 능력이 어떻게 될까?

 

군사적 식견과 자제(自制)가 없는 무절제한 보도는 정부로 하여금 국민의 눈치를 보게 하고 힘을 못쓰게 만든다. 군대의 고급지휘관은 결전의 호기를 포착하고도 인명 피해가 많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전투력 사용에 눈치를 보게되고 소신있는 부대 지휘를 하지 못하므로서 결국 전투에서 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직업군인들은 평소부터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포와 두려움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전례를 통해 연구분석하여 대처방안을 강구해야 하고 언론과 긴밀한 협조를 실시하여 군사작전에 지장이 없도록 필요한 조치를 사전에 강구해야 한다.

 

 

****

 

주1) On Strategy : A Critical Analysis of the Vietnam War.Harry G,Summers,Jr. 1983.12.25, 민평식역, 병학사 P75

주2) Russia's TV War. 다시 고개드는 러시아 언론 검열. Newsweek 1995. 2. 8. P 24-25

주3) 첨단전쟁, 이남규, 조선일보사,1992.3.11,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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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4 23:59 2004/09/1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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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 2004/09/14 23:46

'충격과 공포' 작전 96년 등장


미군과 영국군이 이라크 침공 이틀째인 2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충격과 공포’ 작전의 개념은 미 국방부가 1996년에 펴낸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보고서에서 처음 제시됐다.

전직 미군 장교였던 할런 얼먼과 제임스 웨이드는 <충격과 공포: 신속한 우위 확보>라는 보고서에서은 현재 군사적 우위를 갖고 있으나 적들은 앞으로 전쟁의 조건을 바꿔 미군의 이런 우위를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며 냉전 이후의 세계에 적합한 새로운 군사독트린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그 방안으로서, 전쟁 초기에 대규모 공격을 통해 적의 반격 의지를 꺾음으로써 자국에 굴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전략을 제시했다.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장관 취임 이전에 이미 이 개념에 큰 매력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졌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1999년 세르비아를 공습했을 때 그는 <시엔엔방송>과의 회견에서 “공격이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다”며 “점진적인 군사공격에는 항상 위험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얼먼과 웨이드가 제시한 충격과 공포 전략은 7가지 요소를 담고 있다. △목적은 적의 의지와 인지력을 장악하는 것 △군사력은 적의 반격을 불가능하게 할 것 △군대 규모는 적보다 작을 수 있으나 기술·전술은 우월할 것 △작전 범위는 전면적일 것 △신속한 공격은 필수적 △양쪽 사상자는 소규모 △마비·충격·무력화·부인·파괴 전술 사용 등이다. 이들은 이 전략의 목표는 핵폭탄 사용과 맞먹는 심리적 효과를 달성하는 데 있다며, 이라크전에서 이를 실전에 사용해 몇시간 또는 며칠 내에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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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4 23:46 2004/09/1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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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 2004/09/14 23:43

임무형전술(Auftragstaktik)의 등장과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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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형전술은 전격전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기갑부대들과 후반부에서 뛰어난 작전으로 저항을 지속했던 육군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임무형전술을 한마디로 평가하자고 한다면 임무는 주되 세세한 활동은 해당 지휘관에게 일임하거나 전투에 직접적으로 임하는 부대원에게 일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에서도 어떤 임무를 부여할 경우에 모든 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순서대로 해야 할 일들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단지 암시나 정확한 목표만을 내릴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임무형전술과는 거리가 있다. 실제로 독일군 내부에서도  사단은 군단으로부터 자유롭게 작전을 펼치고 싶지만 하급 연대나 대대를 직접 통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임무형전술은 독일이 승리를 얻고 패배를 당하는 가운데 보여준 전투력의 보이지 않는 힘 중에 하나이다.

임무형전술이 왜 그러하냐고 하면 우리는 전쟁론을 예로 들어 보자. 전쟁론에서는 전쟁은 우연의 연속이며 전쟁은 가장 간단한 원리에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이 간단한 원리가 사실은 가장 어렵다. 우연의 연속이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전쟁의 상황에서 모든 사건과 사실을 상급부대에 보고하고 그의 지시를 받고 실천하기에는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으며 우연하게 만난 호기를 놓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황을 판단하여 충분하게 자신의 능력에 맞는 기회가 주어 졌을 때 그것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고나 상급 지휘관의 지시가 없이도 독자적인 상황판단으로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군대에서는 명령 불복종이라는 함정이 있다. 보고도 없이 독자적인 작전을 수립, 활동하여 만약 실패를 당하였을 때 누군가 명령 불복종을 제시한다면 해당 지휘관은 보직해임이나 파면을 당할 지도 모른다. 이것이 딜레마이다.

도전적이며 냉철한 두뇌를 가지고 지휘관으로서 능력이 뛰어난 지휘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중지명령을 내렸는데 공격을 실행하여 혁혁한 전과를 얻었음에도 해임이 되는 실례가 있다면 그 누구도 상급부대의 명령에 반하여 독자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철저하게 복종할지도 모른다.
임무형전술은 분명히 독일군이 가졌던 독특한 전술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도 한국에는 임무형전술이 있었다. 이순신장군이 왜군에 대하여 조정에서 공격을 명령하였으나 상황을 볼 때 불가한 명령으로 판단되었으므로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이순신장군은 해임되었다. 그리고 백의종군하였다. 분명히 이순신장군의 결단은 옳았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모함으로 비극을 맞이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조선군에게 커다란 피해만을 주었다. 따라서 임무형전술은 이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장군의 결정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라는 말로 결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미 전사를 연구하는데 어려움을 전쟁론에서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임무형전술의 핵심이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독자적인 임무를 수행하려고 한다면 최소한 2단계 이상의 상급부대의 지휘의지와 그리고 분명한 자신의 임무를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정확하게 위치한 지휘부대의 상황과 앞으로 전개될 상황의 예측이 필요하다. 이것은 지휘관이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자 임무형전술을 수행하는데 필수요소이다. 또한 이러한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는 평범한 능력은 아니다. 그러나 전쟁의 혼란한 상황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임무형전술을 수행하자고 한다면 분명하게 필요한 것은 지휘관 특히 장교의 자질이다.

전쟁론에서 천재적인 지휘관의 상을 알았다. 이러한 능력은 그대로 천재적인 능력의 소유자의 몫이다. 모든 군인들이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장교들이 가져야 할 즉 지휘자로서 지녀야 할 능력이란 능동적인 책임감이라고 할 수 있다. 능동적인 책임감을 해설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책임감은 알겠는데 능동적이라는 말은 모호하다. 책임감에 덧붙여 이야기 하자면 지시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며 그에 맞는 작전과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지휘에 대한 인식은 독일이 이룩한 업적이며 다른 국가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독일이 이러한 전술을 획득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또한 독일만이 가졌던 독특한 교육체계와 문화가 바탕으로 한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과이다.

독일군은 전쟁에서 2번씩이나 패배했지만 진정한 승리자이다. "누가 일등인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독일군이다. 한 군대의 높은 질은 패배할 때 가장 잘 나타난다. 독일군은 연합군에 비하여 우수한 것은 질적인 우수성이었다.
독일군이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고 지속적인 저항과 반격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것은 질적인 우수성에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군대를 구성한 인간 그 자체에 있었다. 장비나 무기와 군수물자는 부차적인 요소이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힘은 연합국들과 독일이 보유한 외형적인 힘에 비하여 강력하였다.
그것은 독일이 원래부터 지녔던 힘은 아니다. 이 힘의 기원 프러시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정확한 시작점은 불분명하다. 대략적으로 나폴레옹 전쟁 이후라고 보여진다.
당시 프러시아군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완패당했다. 프러시아 육군은 당시에 사용한 전술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고전적인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보병과 포병 그리고 기병을 운용하는데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였다. 보다 현대적인 전투를 실시하였다. 섬멸전과 추격전이 주류를 이루었다. 프러시아군은 예나 전투와 아우에르쉬테트 전투에서 완패당했다. 그리고 굴욕적인 평화조약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프러시아육군 개혁의 시작이었다.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우제나우 그리고 클라우제비츠로 대변되는 프러시아 참모본부는 군 개혁의 선두로서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였다. 이 참모본부에서 시도된 노력으로 나폴레옹은 패배를 당하였다. 프랑스군은 왜 자신들이 우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후퇴를 하였는지 몰랐다.
나폴레옹은 천재였으나 프랑스 참모부는 그렇지가 못했다. 노력으로 이루어진 프러시아 참모본부는 나폴레옹을 격파한 것이었다. 프러시아의 개혁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 졌으며 약 100년 동안 독일제국의 장군들과 왕자들에 의한 노력으로 근대적인 독일군이 탄생하였다.

임무형전술은 임무, Auftrag와 전술,와 Taktik의 합성어로서 그 속에 포함된 의미들은 "자주성과 복종의 독특한 결합이며 명령은 짧고 명확하게 그러나 수단 선택은 위임한다. 그리고 장교, 하사관, 사병들의 인격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단결심과 신뢰감 그리고 복종심의 결합이다" 이다. 상호배반적인 이 단어들을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장교들의 능력이 중요시되었으며 독일은 독특한 교육체계로 장교들을 선발, 교육시켰다.
독일군이 패배당하고 항복한 1945년 이후 점령국 미국은 독일의 장교와 하사관 그리고 사병 관리를 위한 과학적인 모델이 없었음에 놀랐다. 독일에서는 장교들을 선발할 때 미국처럼 A+ 에서 F까지 나누지는 않았다. 이를 바탕으로 보직에 임명하거나 진급도 없었다. 사실 책임감, 열정, 명석한 두뇌, 탐구심, 인격등등을 숫자로 구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미국처럼 행정에 대하여 집착하지는 않았다. 행정이란 말은 연합군에게서나 절대적으로 신봉되었다. 독일의 장교들과 하시관들의 사상률은 사병들에 비하여 높았으며 연합국들에 비하여도 높았다. 그 이유는 독일군은 위험에 빠졌을 때 지휘관이 진두지휘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수세에 몰린 뒤로 지휘관들의 사상률이 높어졌다.
지휘관의 사상률이 의미하는 것은 지휘관이 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적절한 지휘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전투에서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임무형전술은 군대의 최하위 조직부터 최상위 조직까지 널리 퍼져있었으며 서로 결합될 수 없을 것 같은 원리들의 상호결합이었으며 막연한 원리들의 현실화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발휘했던 힘의 근원은 하나였다.
그것은 독일군을 구성한 개개인의 질적인 우수성이었다. 그 질적인 우수성은 독일의 문화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단편적인 고찰로서 정확한 답을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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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4 23:43 2004/09/14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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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 2004/09/14 23:42

[알린스키 병법]

 

알린스키 : 미국 최대 노동조합의 창립자인 동시에 한때는 고고학을 전공하기도 함. 알 카포네 밑에서 갱 노릇을 하기도 했던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

 

1) 힘이란 당신이 지닌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니고 있다고 주위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이다.

2) 당신의 적이 자기 경험을 발휘할 수 있는 싸움터를 벗어나, 적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새로운 전쟁터를 창안하라.

3) 적의 무기로 적을 쳐부수고, 적의 전술 지침에 나오는 요소들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라.

4) 말로 대적할 때는 익살이 가장 효율적인 무기다. 상대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거나, 더 나아가서 상대방 혼자 우스꽝스런 짓을 하도록 이끌 수 있으면, 상대가 당신에게 다시 도전하기는 어려워진다.

5) 어떤 전술을 상투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특히 잘 통하는 전술일수록 자주 사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어떤 전술을 반복 사용해서 그 효과와 한계를 알게 되었으면, 하다못해 정반대의 전술을 채택해서라도 그것을 계속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6) 적이 수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적으로 하여금 마음놓고 휴식을 취하면서 전력을 재정비하겠다는 생각을 갖게해서는 안 된다. 시의 적절한 외적 요소들을 모두 사용하여 적에게 계속 압박을 가해야 한다.

7) 실행에 옮길 수 없으면, 허세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허장성세는 적에 대한 억제력을 모두 상실케 한다.

8) 겉으로 보이는 단점은 가장 훌륭한 장점이 될 수 있다. 자기의 특성 하나하나를 약점이 아니라 강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9) 승리를 거두었을 때는 그 승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승자의 몫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 선출된 지도자는 낡은 정책을 대체할 새로운 정책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을 장악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10) 목표를 하나로 집중시켜야 하고, 전투중에는 그것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목표는 가능한 한 가장 작고, 가장 뚜렷하고, 가장 상징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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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4 23:42 2004/09/14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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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04/09/14 23:32

* 한울노동문제연구소 하종강 소장님이 어느날 전화를 하셨다.

지금은 연재가 끝난 '한겨레21'의 '하종강이 만난사람'이란 기사에 내 이야기를 실으시겠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씀을 하셨다.

몇차례 간곡히 '아니됩니다'를 외쳤지만, 평소 지은 죄가 많았던지라 끝내 거절치 못하였고, 하소장님은 감히 거절코자했던 내가 미웠던지 제목도 '공개구혼'으로 뽑아 한동안 아는 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던 적이 있다.

그게 죄송해서 메일을 보냈었는데, 하소장님은 홈페이지에 메일을 공개하는 한편, 마지막 연재기사에서 내 사진과 편지내용 일부를 다시 게제, '확인사살'까지 하시는 바람에 대략 낭패스럽기 그지없었다.

 

[메일 내용]

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들 중에서 백기완 선생님이 쓰신 글이 참 기억에 남았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옛날에 할머님께 들으셨다는 어느 독립군 아줌마(?)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녀는 백두산과 만주벌판을 오가며 연락병이었다고 합니다. 애 둘이 딸려 있어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한 녀석은 앞에 매달고, 또 다른 녀석은 등에 업고 종횡무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뛰어다니셨답니다. 이 분이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이유는 그녀만의 독특한 장비 때문이었는데, 이 양반이 길을 나설 때면 허리에 커다란 빗자루를 꽁꽁 동여매셨답니다. 누가 "애 둘을 데리고 뛰어다니기도 불편할 텐데 웬 빗자루까지 매고 나서냐"고 물으면 이 분은 "혹시라도 눈길 위에 내 발자국이 남을까봐 빗자루를 매달았소. 등에 매달고 뛰면 자연스레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겠소"하며 호탕하게 웃으셨다더군요.

백 선생님은 그 이야기 말미에 역사를 움직여 온 것은 이렇게 제 발자국을 지우며 묵묵히 살아온 민중들이 아니겠느냐고, 운동이란 걸 할라치면 제 이름자 남기는 일 따윈 관심 갖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은하의 장강을 도도히 흐르게 하는 건, 역시 수억년 동안을 이름도 없이 제 자리를 지켜온 뭇 별들이라고, 운동을 하며 산다면 이 위대한 진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 친구녀석 중에 온갖 엠티며 농활, 수련회까지 모두 빠짐없이 참석해서 식사준비에 설거지 등등 갖은 뒷치닥거리를 도맡아하던 녀석이 있었습니다. 헌데 그 녀석, 과학생회실에 수북히 쌓인 각종 행사 사진들 어느 곳에서도 쉬이 찾을 수가 없더군요. 간혹 그 녀석이 출연한 장면이래봐야 친구들이 사진 찍느라 온갖 폼을 다 재며 서 있는 한쪽 귀퉁이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가 우연히 잡힌 모습 정도였습니다.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남들이 사진찍는다고 난리치고 있을 때에도 온갖 뒤치닥꺼리를 하고 있거나 사진기를 들고 친구들 사진 찍어주는 일을 주로 했었기 때문에 남아있는 사진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 저는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진에 찍히는' 사람과 '사진에 찍히지 않는' 사람 이렇게 두가지로 구분이 되더군요. 그러면서 혹여라도 '사진에 찍히는' 일이나 자리를 탐하며 살진 말자, 누구도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삶을 살자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야 워낙 재주도 없고 눈에 띄는 실력도 없어 경찰에게 불법행위(?) 장면이 채증되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카메라빨 받을 일은 없어서 평소엔 별 걱정은 안하고 삽니다.

소장님께서 "왜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건방 떤다고 혼날 것 같아서 차마 드리지 못했던 말씀입니다.... 죄송합니다.

한가지 더...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어 솔직히 자백하겠습니다. 재정문제와 관련해서 철이 들어가면서 저는 두 가지 원칙을 생각했습니다. '자력갱생'과 '무소유'입니다. "운동한답시고 최소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는 끼치지 말자. 내 건강한 노동으로 먹고살 것이며 행여 타인의 노동에 기생하며 살진 말자"는 것과 "돈이건 내 몸뚱이건, 능력이건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그 모든 것은 이 더러운 자본가 세상을 뒤엎기 위한 투쟁에 쓰여야할 소중한 혁명의 자산이며, 혁명이 내게 잠시 관리를 위탁한 것일 뿐이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탐이 참 많았습니다. 특히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선배 집에 가서 맘에 드는 책들을 때로는 애원해서 때로는 훔쳐서 들고 나오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저를 보면서 어느 선배가 호통을 치더군요. "활동을 하는 놈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보따리 하나면 족하지 뭐 그리 욕심이 많으냐"고... 물론 그 선배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보안' 문제였겠지만, 문득 "입 속엔 말이 적어야 하고, 머리 속엔 생각이 적어야 하고, 뱃속엔 밥이 적어야 한다"는 불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자본주의를 뒤엎겠다는 놈이 '자본주의적 소유욕'에 찌들어 살고 있구나 하는 뼈아픈 반성이었습니다. 그 뒤론 재정문제에 대해서도 자력갱생의 원칙은 철저히 지키더라도 통장에 쌓이는 돈들을 결코 '내것'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습니다. (근데 솔직히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놈의 '소유욕'이란 게 칼로 무 베듯 잘라지지는 않아 고민스럽습니다)

소장님과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굉장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조금은 기분이 우울했습니다. 무엇하나 누구 앞에 내놓고 얘기할 꺼리가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초라한 진실을 '겸손한 태도'인척 자기 위안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고민들이 마구 들었습니다. 물론 소장님이 쓰신 '진짜 노동자'의 주인공이 된다는 일이 저에겐 평생 없을 '가문의 영광'이겠지만, 저 때문에 글쓰기가 막막하셨을 소장님께도 정말 죄송했습니다. 소장님께서 써주신 글... 더욱 열심히 살라는 호된 꾸지람으로 알고 늘 반성하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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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4 23:32 2004/09/14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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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9/14 09:51

돌맹이 하나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점 없고 답답하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나 제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자고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맣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날 저물어 캄캄한 밤
불씨 하나 되자고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쯤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대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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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4 09:51 2004/09/1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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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아둘 글 - 2004/09/14 09:48

나는 흙이다. 흙 중에서도 인간들이 쓰는 도자기나 토기를 만드는데 유용한 고령토의 일족으로 태어났다. 당연히 나나 내 친구들의 꿈은 名人의 눈에 띄어 그의 손에 빚어져 멋진 자기나 토기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궁에 진상되거나 귀족들의 은밀한 벽장 속에서 온갖 칭송과 우러름을 받으며 오래오래 사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었다.

어느날 어느 도공이 나를 선택했다. 그 도공은 국내 최고의 명인이었다. 그가 만든 자기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왕궁 납품 아니면 대갓집행의 길을 걸었기에 나는 뛸뜻이 기뻤다. 이제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 행복감은 나를 불가마 속의 뜨거움을 견디게 했고 물레 위의 어지러움도 웃어 넘기게 했다. 온갖 고통을 즐거이 이겨내던 내게 마침내 완성의 순간이 다가왔다. 가마에서 나를 꺼낸 도공은 "됐다"는 환성을 지르며 나를 고이 모셔 두었다. 그때까지도 행복했다.

그러나 우연히 옆에 있던 거울을 쳐다본 순간 그 행복은 천리 밖 만리 밖으로 달아났다. 거울에 비친 것은 내가 듣도보도 못했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괴한 토기의 모습이었다. 주둥이는 누가 먹다 남은 찐빵 모양 찌그러져 있었고 항아리 귀 (항아리를 드는 손잡이)는 코끼리 귀처럼 넓적한 모양으로 삐져 나와 있었다. 세상에... 이것이 이 나라 최고의 명인의 솜씨란 말인가. 그는 뭐라고 했던가.. "됐다"고 환성을 지르지 않았던가. 되기는 뭐가 되었단 말인가.

나의 뒤를 이어 가마에서 나온 동료들이 나를 보고 배를 쥐고 웃어 댔다. 그들이 분주히 왕궁으로, 귀족의 집으로 배달되는 동안 나는 찌그러진 입과 길게 늘어진 귀를 세운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자살을 기도했다. 안간힘을 다해 내가 세워져 있던 벽장에서 굴러 떨어지는 순간, 명인은 몸을 날려서 나를 받아 냈다. 그리고는 내 몸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고 비단으로 세 겹 네 겹으로 싸서 나의 자살 기도를 막았다. 이제 나는 자포자기에 빠졌다. 그래... 과연 네가 나를 어디로 데려 가나 두고나 보자.

어느날, 명인은 나를 가슴에 안고는 집을 나섰다. 왕궁이나 귀족들이 사는 거리와는 반대 방향, 성문밖 농민들의 마을이 그의 목적지였다. 대체 누구에게 나를 보내려는 건가. 이 몰골로는 어떤 비천한 농꾼이라도 물그릇으로도 쓰려고 하지 않을 텐데....

명인은 한 누추한 집의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나온 집주인을 보았을 때 나는 또 한 번 경악했다. 그는 농사일을 하다가 두 손이 잘려나간 사람이었다. 명인은 그가 나를 손 없는 팔로 가볍게 들 수 있게끔 항아리 귀를 코끼리 귀 모양 크게 만든 것이었고, 그의 가슴에 들어맞게끔 내 입을 찌그러뜨렸던 것이다. 명인의 솜씨 때문이었을까.. 내 몸과 농민의 몸은 마치 한몸처럼 어우러졌다.

무언가 내 몸 안에 떨어졌다. 처음으로 내 그릇에 담긴 것은 농민의 눈물이었다. "나으리 고맙습니다. 이제 저는 제가 목마를 때 제 팔로 물을 떠먹을 수도 있고 수프도 옮길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나으리의 이름은 지워 주십시오. 이 불쌍한 몰골의 토기가 나으리의 명성에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이 말에 명인은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나는 내 생애에 한 사람에게 이렇게 유용한 그릇을 만들어본 적이 없네. 나는 아름다운 그릇은 많이 만들어 봤으나 한 사람에게 그토록 절실한 그릇을 만들어 본 적은 없다는 말이네. 왜 내 이름을 지우겠나. 이 토기는 내 생애 최대의 작품일세. "

명인의 말을 들으며 농민과 나는 더불어 울었다. 나는 이 나라 최고의 명인의 최대의 걸작이 된 것이다. 고고하고 우아하게, 하지만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는 신세로 벽장 속에 갇힌 도자기 친구들과 달리, 한 사람에게 가장 값지고 소중한 한 몸같은 도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물론 도자기의 삶은 자신만이 가진 아름다움을 빛내며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그 삶을 포기한 데 대한 후회도 없다. 그대.. 누구에게 절실함이 되어 본 적 있는가, 그 기쁨을 혀에 묻힌 적이 있는가.

 

* 어딘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게시판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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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4 09:48 2004/09/1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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