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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스페이스는 인간에게 무엇인가?
과연 사이버공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이버공간은 기술을 통한 사회적•문화적 변형에 관한 우리의 열정과 불안 이 둘 모두를 상징화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에게 사이버공간은 상상력의 전망 속으로 들어가는 대모험의 첫 단계이다. 사이버공간은 일종의 물리적 현실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도 약속한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사이버공간의 이 일반적인 이상에 관해 보다 냉소적이고 불쾌해 한다. 그들은 사이버공간이라는 용어가 모순어법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nonspace)은 불가능한 것을 약속하는 신기루가 아닌가? 등등. 이 글은 사이버공간의 존재론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이 사이버공간과 맺고있는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차분히 성찰해보자는 의도를 갖고 있다.
포퍼의 제 3세계와 사이버공간
칼 포퍼(Karl Popper)란 과학철학자는 세계를 세 가지 연관된 층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가 보는 '제 1세계'는 에너지, 무게, 운동을 지닌 순수한 물질의 세계다. '제 2세계'는 의식의 주관적 세계다. 느끼고, 계산하고, 생각하고, 꿈꾸고, 기억하는 개인 정신의 세계다. 마지막으로 그가 언급하는 '제 3세계'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객관적인 현실의 세계다. 새들이 만든 나무 위의 집, 벌이 만든 벌집, 개미굴 등은 모두 이에 속한다. 물론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 수학, 종교, 철학, 예술, 과학 등이 제 3세계의 기초를 이룬다. 성전, 시장, 법정, 도서관, 극장, 책, 영화, 신문, 디브이디 등은 제 3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적 표현들이다. 이들은 모두 아이디어, 이미지, 사운드, 데이터 등을 담는 그릇이다. 제 3세계는 스스로 진화하고, 제 1, 2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안내자다. 포퍼의 제 3세계는 항상 성장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그의 제 3세계는 인간에게 있어서 문명과 같다.
포퍼는 3세계의 요건으로, 특히 사회 조직 형식 혹은 상호 소통의 양식을 보여주는 차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사이버공간은 바로 이같은 제 3세계가 진화하여 구성된 가장 최신 형태다. 3세계는 추상적으로 보면 정보의 공간이다. 사이버공간은 정보로 가득찬 공간이다. 3세계에서 기획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이상적인 표현물이 사이버공간이다. 물론 3세계는 1세계와 2세계의 안내자이지만 역으로 그것의 규정을 받는다. 그렇지만 제 3세계는 항상 제 1, 2세계와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사이버공간은 현실의 물질적 공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이버공간의 자연적 느낌들
1세계의 물질적 그릇은 보통 물리적 자연으로 통칭된다. 이 1세계는 3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2세계인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특히 사이버공간의 출현으로 인간의 공간 개념에 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마이클 하임(Michael Heim)이란 디지털 철학자는 인간이 더불어 사는 1세계인 자연에 비추어 3세계에 속한 새로운 전자공간의 출현이 인간 의식에 미치는 느낌을 몇 가지로 잘 요약하고 있다.
첫째가 무한성(infinite)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광대하고 무한한 느낌을 준다. 바다, 강, 산, 숲을 거닐다보면 우리의 감각은 마치 새처럼 자유롭다는 것을 느낀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우리는 끝없는 항해에 도취된다. 우리는 정보의 세계를 끝없이 흘러다니면서 전자 네트워크의 광활함을 만끽한다. 마모루 오시이가 감독한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에서 새로이 태어난 사이보그가 떠나면서 남기는 마지막 문구를 기억하는가? "네트는 넓고 광활해". 인터넷 접속의 첫 느낌은 태초에 인간이 자연에 버려질 때 그 느낌이리라. 그래서, 사이버공간의 무한함은 자연의 무한함에 비견한다.
두 번째는 근접하기 어려운(inaccessible) 어떤 느낌이다. 자연은 뭔가를 숨긴다. 모든 것이 공개되어있고 발견할 것이 없다면, 인간이 자연에 대한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언가의 발견에 대한 기쁨은 근접하기 어려운데서 만들어진다. 컴퓨터 네트워크도 동일한 속성을 갖고 있다. 중심이 없이 수많은 노드로 연결된 광대한 인터넷에서 항해를 한다는 것은 극히 일부분의 관찰일 것이다. 어제 간 길을 잃을 정도로 무한히 열려진 전자 공간에서 우리는 항상 발견의 기쁨을 얻는다.
세 번째는 압도하는(overwhelming) 느낌이다. 산 정상에서 광대하게 펼쳐진 자연은 나약한 인간에게 너무나 큰 존재이다. 자연의 강력하고 압도하는 힘에 대한 느낌은 네트워크에 접속할 때 네트의 바다에 맞닥뜨린 컴퓨터 초보자의 느낌과 동일하다. 적어도 처음으로 동영상, 사진, 애니메이션, 하이퍼텍스트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런 느낌은 일반적이다.
네 번째는 두려운(fearsome) 느낌이다. 자연은 위압과 미적 숭고의 면모를 동시에 지닌다. 숭고미는 자연에 두려움을 자아낸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밤하늘의 별이 가진 무한함을 해명하지 못한다. 신비한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종종 나약한 인간에게 현기증을 유발한다. 인터넷은 너무나 거대해, 이용자는 결코 그 전체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살아서 움직이고 유기체처럼 끝없이 성장하는 인터넷의 광대함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일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야생의(wild) 느낌이다. 야생적이고 거칠다는 것은 이차적인 공정을 거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를 의미한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自然) 야생성에 다름 아니다. 이는 콜럼버스가 최초 신대륙을 보고 느낀 감정과 비슷하다. 사이버공간을 혹자는 새로운 개척지라고 얘기한다. 다른 사람들은 신세계라고도 지칭한다. 이 모두는 때묻지않은 미지의 공간을 전제한다.
마지막으로 근원의(primal) 느낌이다. 하이테크놀로지는 자연처럼 인간에게 낮은 투명성을 갖고 있다.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기에 인간의 시야와 보폭은 협소하다. 인간들은 구체적 기술의 원리를 모른 채 기술을 이용한다. 비록 인간이 만들었지만, 자율적으로 진화하는 거대한 전자공간은 인간에게 파악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남아있다. 네트워크의 미시 세계에서 작용하는 비트 스위칭, 전자, 마이크로칩 등에 대한 이해를 얻기는 힘들다. 자연처럼 사이버공간은 인간의 완전한 접근과 이해를 막는다.
이 여섯 가지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자 공간에 대한 경외다. 이는 현대 기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모델로 다가온다. 그러나, 인간의 기술에 대한 경외감은 단지 그 겉을 흐르는 기술적 이미지일 뿐이다. 이 새로운 전자 공간에 대한 경외감은 더 깊은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된다.
사이버공간은 어머니이자 자궁이다.
사이버펑크 작가로 유명한 윌리엄 깁슨은 1984년 뉴로맨서Neuromancer란 그의 소설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들의 광범위한 상호접속망으로 매개되는 인간과 기계간의 근본적인 변형을 묘사하기 위해 '사이버공간'이란 개념을 처음 사용하고 있다. 뉴로맨서에 등장하는 '매트릭스'라는 전자공간은 에로스 발생의 근거, 즉 '어머니'란 뜻의 라틴어에서 생겼다.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매트릭스 공간은 왜 매트릭스가 어머니에서 기원하는지에 대한 그 의미 생성의 맥락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매트릭스는 인간을 양육하는 기계 자궁이다. 인간들은 자궁안에 기계탯줄이 연결된 채 성장하고 살아간다. 죽은 인간은 따로 분리되어 으깨져 새로운 생명을 위한 양수로 쓰여진다. 매트릭스는 마치 어머니처럼 인간들을 수많은 탯줄로 연결하여 부양하는 인공지능 기계다.
대체로 네트워크나, 깁슨이 명명한 '매트릭스'로 빨려들어가는 사용자는 남성적이다. 매트릭스 그 자체는 여성적 대상이다. 동시에 매트릭스는 어머니이며 자궁이다. 접속 혹은 자궁에 들어가는 행위는 인간이 탯줄을 힘차게 끊고 세계를 향해 나온 정반대의 상황을 지칭한다. 자궁은 모든 인간에게 안전한 보호막이다. 아기들처럼 일단 자궁에 들어가면 자양분도 탯줄을 통해 공급받는 나약한 존재로 떨어진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곳은 자궁이다. 무섭고 지저분한 현실의 모든 상념을 잊고 가장 편안한 인간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고(苦)를 잊는다는 점에서 그 곳은 낙원이다. 그래서, 자궁은 인간을 너무 약하게 만든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를 벗어난 인간들은 매트릭스를 그리워한다. 꿀꿀이 죽을 먹느니 차라리 매트릭스 안의 가상식당 안에서 가짜 음식을 즐기겠다는 한 인간의 독백은 기계자궁에 종속된 약해진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매트릭스에 접속함으로써 잃는 것은 인간 신체와 현실 감각이다. 현실의 신체는 가면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인터넷 이용자들이 새로운 가상 정체성과 결합되어 느끼는 쾌감과 열망은 이와 비슷하다. 인터넷에서 부여받은 정체성이 현실을 대체하지 못하면서도, 이용자들은 끊임없이 네트를 배회한다. 동시에 잃는 것은 현실 감각이다. 아이디로 부여받은 정체성이 현실에서 동일하게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이용자들은 가끔 자괴감이나 우울증에 빠진다. 어머니/자궁으로서 매트릭스는 인간이 그리워하는 근원이기도 하지만, 깁슨이 그리는 미래 사회는 그리 밝지 않다. 현실의 모순이 고스란히 옮겨진 공간이다. 깁슨의 매트릭스는 바로 이런 암울한 사회에서 인간을 관리하는 통합적 기계다. 인간이 끊임없이 동경하고 그려왔던 공간이 실은 인간 삶을 관리하는 기계란 사실은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동일하다. 매트릭스의 기계 탯줄을 끊은 인간만이 제대로 현실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 비춰진다. 그 탯줄을 끊기까지의 과정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비록 현실이 위험으로 가득차고 불안하지만, 자궁의 탯줄을 끊은 자들만이 1세계의 물리적 공간을 몸으로 느낀다. 동시에 얻는 것은 현실 감각이다. 이것이 인간이 동경하는 사이버공간의 모순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전자적 3세계에 몸담기를 동경하지만, 1세계를 버리면 영원히 기계자궁 밖을 보지 못하고 살 수도 있다.
사이버공간은 초월의 욕망이다.
물리적 세계의 한계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것, 즉 물질을 초월(physical transcendence)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태고적부터의 소망이다. 물질 초월은 바로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하려는 욕망이다. 자궁에 귀의하려는 욕망의 밑바닥에는 초월의 욕망이 자리한다. 현실의 무질서와 부족함은 인간에게 새로운 대안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사이버공간은 현실 공간이 주는 한계들과 부족함들에 대한 기술적 반응물이다. 현실은 인간을 짓누르는 짐이었다. 인간이 딛고있는 현실의 실존을 부정하고픈 욕망은 인간들 스스로에게 항상 새로운 유토피아의 전망을 구상하게끔 만들었다.
우선 인간은 어떤 현실적 위협없이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길 원한다. 그리고 육체에 갇힌 인간의 행동 반경이 삶의 근거지가 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것 또한 현실의 짐이었다. 무거운 살덩이를 훨훨 털어버리고 자유롭게 이동하고자 하는데는 인간 육체 초월에 대한 열망이 자리한다. 육체 초월의 시도는 동력 기술을 통한 기동성에서 일차적으로 구현되었다. 인간은 동력 장치가 달린 기차, 배, 자동차, 비행기 등을 개발하여 지리적 경계를 넘고자 하였다. 이러한 운송장치를 이용한 기동성은 아직까지도 신체의 속박을 전제한다. 이같은 동적 운동성은 인간에게 어느 선을 넘으면 신체에 무리가 오는 신호로써 멀미와 구토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정보 네트워크의 접속은 인간 이동의 또 다른 차원을 제시했다. 사이버공간은 마치 인간이 신체를 벗어나 다른 대상세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물리적 운송장치에 비해 그 기동성 또한 빛의 속도를 선사했다. 정보가 거대한 도관을 통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처럼,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지구촌을 구석구석을 넘나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일종의 '정적인 운동'이 이제 새로운 신체적 조건이 되었다. 이는 마치 신체를 버리고 네트에 이끌려 들어가는 인간의 모습과 유사하다. 만약 공간적 느낌을 주는 가상현실 시스템이 적절히 결합한다면, 보다 더 현실적인 신체이탈의 감각을 느낄 것이다.
한편 인간 주위에 널려있는 대상의 위험함, 더러움, 슬픔, 불평등, 악취 등등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문제였다. 사회와 역사 등이 개인에게 짊어지도록 강요하는 현실의 쇳덩이를 벗어나고픈 욕구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신체는 바로 현실과의 연결 고리이다. 육체 초월과 물질초월의 욕망은 바로 현실과 등을 지는 행위다. 플라톤이 구상한 이데아의 세계처럼 가장 이상적인 정보세계에 안주하려는 욕망은 기계 자궁에 대한 귀의만큼이나 본질적이다. 자신의 신체가 주는 속박, 그리고 현실 세계가 주는 한계들 모두가 물질 세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배태했다. 인간에게 사이버공간은 이러한 속박과 한계를 벗어난 새로운 신세계와 같다.
사이버공간의 패러독스
이제까지 본대로 사이버공간은 인간이 푸근하게 안기고픈 어머니이자 자궁이지만, 그 곳에 귀의하는데는 현실의 물질적 조건을 버리는 길을 택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물질과 육체 초월의 공간이지만 신체뿐만 아니라 현실의 부정과 모순 등을 모두 외면해야 한다. 그러나, 사이버공간의 존재적 지위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현실의 연장인 것이다. 포퍼가 지적했듯이 3세계는 1세계를 전제한다. 1세계 없이는 3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사이버공간은 물리적 현실을 전제한다. 사이버공간은 재생산의 장소다. 무엇을 재생산하는가? 우리 현실의 재생산이다. 현실에서 생활하고 꾸려지는 모든 것들은 사이버공간 안에 그대로 거울처럼 반사된다. 그 곳에도 현실처럼 슬픔과 분노가 존재한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인간에게 사이버공간의 자연적 느낌들이 생기는 이유는 현실 감각 때문이다. 바로 현실을 빼닮은 곳이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공간이다. 결국 사이버공간은 생각처럼 인간 태초의 자궁이 될 수도 육체를 벗어나 접속할 수도 없는 은유의 곳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같은 사이버공간의 현실성을 직시해야 한다. 사이버공간 안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새로운 평등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지고, 상업적 논리가 지배할 수 없다는 근거는 무모하다. 사이버공간을 보기 위해서는 항상 현실의 거울을 통해 들여다봐야 한다. 그럴 때 진정 인간이 욕망하는 사이버공간의 미래상이 분명해질 것이다.
(월간 웹디자인 200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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