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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서평] 책을 말하다_ 『디지털야만: 기술잉여, 빅데이터와 정보재난』 이광석 지음

책을 말하다_ 『디지털야만: 기술잉여, 빅데이터와 정보재난』 이광석 지음|한울|256쪽|23,000원

여전히 디지털 주체들에게 희망을 거는 까닭

이번 책에서 나는 한 사회의 통제능력 이상으로 기술과 정보가 비정상적으로 우리 사회에 착근되는 상황을‘기술잉여’란 개념을 갖고 풀어내려 했다.
 

나 는 오랫동안 해외생활을 전전하면서 바깥에서 디지털 한국을 보려는 특이한 학문적 습관이 존재해왔다. 이를테면 한국형 디지털 야만상태에 대한 이방인적 시선과 비판적 관찰이다. 디지털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물질화되고 스펙터클화된 삶을 영위하면서 그에 길들여진 한국인들의 기술 욕망, 자본을 매개하는 기술과 정보의 과잉 현실, 그리고 독특하게 정치적 퇴행과 굴절로 각인된 정보·기술 퇴적물들 등이 내게 줄곧 포착됐다. 『디지털야만』은 대부분이 칭송해 마지않는 ‘디지털한국’을 타자의 시선으로 지켜보며 거칠게 써왔던 최근 몇 년간의 글들을 모아 만든 앤솔로지다.


이미 1990년대 중반경 인터넷의 부상을 지켜보면서, 나는 디지털기술의 자본주의적 흡수 아래 진행되는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적 이행 논의에서부터 누리꾼들의 부상하는 온라인 문화정치 분석에 이르기까지 기술·정보 영역에서의 (자본)권력화 과정과 그에 대항하는 이용자들에 대한 비판적 탐색을 꾸준히 시도해왔다. 『디지털야만』은, 내 연구 결과물의 연대기로 보면 1996년 국내에서 석사 학위논문을 책으로 묶어 낸 『디지털패러독스』(2000), 2008년 미국에서 박사논문을 책으로 낸 IT Development in Korea: Digital Nirvana? (2012)에 이어서 한국형 정보통신기술의 현주소를 살피는 최신판에 해당한다. 이전 글들이 대체로 한국사회에서 부상하거나 형성 중의 디지털 자본주의의 쟁점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는 일에 집중했다면, 이번 책은 오늘날 기술과 정보 누적 속에서 발생하는 한국 특유의 사회·문화적 ‘야만성’(디지털통치, 정보재난, 빅데이터감시 등)을 유형화하고 특징화하는 데 할애했다.

기술과 정보의 비정상적 착근 상황
한 국 사회에서 정보(미디어)통신기술은 스펙터클 자본주의의 주된 역할에 덧붙여 퇴행의 정치사회적 현실에 의해 구성되면서 우리네 특유의 굴절된 진화 경로를 만들어냈다. 이번 책에서 나는 한 사회의 통제능력 이상으로 기술과 정보가 비정상적으로 우리 사회에 착근되는 상황을 ‘기술잉여’란 개념을 가지고 풀어내려 했다. 즉 기술 디자인, 개인, 커뮤니티, 경제, 정치, 문화의 각 층위들을 통해 국내 ‘기술잉여’의 누적적인 특징들을 살피고, 그 특유의 디지털 기형성과 야만성을 유형화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기 술잉여’의 사례 하나만 들어보자. 바로 오늘 여기 누리꾼들은 도처에서 ‘사이버 망명’을 시도한다. 너도나도 카카오톡에 닥칠 검열을 피해 텔레그램 등 또 다른 메신저로 거처를 옮긴다. ‘정치적’ 사이버망명의 과잉은 이미 한국적 디지털문화의 전형이 된 지 오래다. 기억을 잠시만 더듬어 보자. 한 때 인터넷실명제로 게시판 글쓰기의 자유를 박탈당하면서 누리꾼들이 블로그나 미니홈피 등으로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던 시절이 있었다. 네이버 등 국내 포털 사이트들에 계정을 두고 메일을 주고받는데 査察의 불안감을 느낀 누리꾼들이 너도나도 구글 계정으로 갈아타던 때도 있었다. 지난 대선 시기 정보기관의 트위터 댓글 조작 의혹에 환멸을 느낀 이들은 폐쇄형 페이스북 공간으로 아예 짐을 싸기도 했다. 수그러들지 않고 틈만 나면 스멀스멀 권력의 촉수를 들이밀던 국가 레짐의 퇴행성과 결합된 디지털 환경의 야만 상태가 외려 이용자들에게 특유의 생존 기술과 문화를 터득하게끔 하는 효과를 불러왔던 것이다.


‘정 보재난’도 다르지 않다. 이는 또 다른 한국적 ‘기술잉여’를 구성하는 주요 위험요소다. 수백만이나 천만 명 이상의 개인 정보들이 지난 몇 년간 10여회 이상 대규모로 털리고 유출돼도 여전히 사회의 위기의식은 둔감하다. 그 어느 곳보다 한국사회는 압축 성장에 따른 파행적 근대화를 겪어 왔고 계속해서 신권위주의 체제와 대자본의 공조와 연합에 의해 강력한 통치 기술과 기술과잉의 양상을 보여주는 터라, 계속된 정보재난과 관련 인프라의 오작동 발생시 파국의 범위와 정도를 가늠조차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디지털야만』은 정보재난의 새로운 ‘빅데이터’ 국면까지 포함한다. 즉 현대인들의 무정형 데이터 생산, 예를 들면 카톡, 페이스북, 트위터를 통해서 벌이는 좋아요, 댓글, 리트윗, 공유 등 무정형의 개인 ‘빅데이터’ 정보 배출 행위의 보편성이 한국형 정보재난과 맺을 수 있는 위험의 징후들, 더 나아가 국가 통치기술의 일부로 기능하는 ‘빅데이터’ 정보통제 행위의 오늘날 새로운 위기 상황까지 살피고 있다.


한국의 ‘기술잉여’적 디지털 진화와 야만성의 면모는 이렇듯 한국 사회의 굴절된 현실과 쏙 빼닮아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또 다르기도 하다. 정치문화의 비민주적 속성이 기술환경에 그대로 녹아있기도 하고 누리꾼들의 과도한 기술 집착을 낳기도 했지만, 나는 적어도 전자적 네트워크 매개체를 통한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율 문화를 이끌기도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디지털 야만』의 후반부 장들은 그래서 온라인문화 속 정치적 퇴행과 권력 억압의 기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돌출하는 새로운 자율적 미디어 주체들의 다양한 움직임들(정보공유운동, 세대별 온라인 문화정치, 소셜웹 행동주의 등)을 포착하려 했다.

미래 대안적 희망의 가능성
예를 들어, 내 책에서 소셜웹에 대한 평가는 양가적이다. 소셜웹이란 민주적 네트워크 장치가 적어도 초창기에 우리 사회에 정착하면서 권력의 억압적 속성을 알리고 주류 미디어를 움직이게 하고 이슈와 관련해 감성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인 공론장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물론 소셜웹의 대중화는 곧이어 퇴행의 여러 측면을 보여줬다. 대선 시기 정보기관들의 댓글조작과 誤정보 살포 의혹 등이 소셜웹 생태계를 오염시키면서 디지털 야만성의 극단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세월호 참사’에서 침묵하고 여론을 호도하는 지상파와 보수언론을 사회적으로 감시하는 ‘제3의 미디어’로서 소셜웹의 민주적 소통의 가능성과 이와 결합된 누리꾼들의 역능에서 문화정치의 희망을 또한 발견하고 있다.


『디지털야만』에서 나는 결국 한국적 기술 발전의 과잉 굴절 상황을 분석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대안적 기술 실천의 희망과 가능성을 함께 착안하려 했다. 현 시점에 대한 암울한 기술현실의 분석이 미래 대안적 희망의 가능성을 사그리 부정하는 제스처가 아님을 내 책에서 의도적으로 전제했다. 물론 이는 근거 없는 낙관론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체제적 모순들이 중층적으로 겹쳐져 사회가 제 기능을 못하고 기술의 양상이 도착적이거나 비정상적 논리에 의해 압도되는 현실이 건재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디지털 주체들의 본능적 탈주와 비순응적 태도가 질기게 살아남지 않았던가. 이것이 디지털야만의 시대에 여전히 디지털 주체에게 희망을 거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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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제지간 ‘트러스트’의 종말?

<교수칼럼 -- 사제지간 ‘트러스트’의 종말? >

이광석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상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트러스트>라는 책에서, 사회 구성원의 트러스트, 즉 신뢰 문화가 크게 쌓인 고신뢰 사회일수록 사회경제적 번영을 가져 오고, 그렇지 못한 상호 불신의 저신뢰 사회는 발전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호 신뢰가 사회적 자본에 연결되며, 그 자체 사회·경제적 부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라고 본다.

후쿠야마의 트러스트 개념이 새로워 보이지만 사실상 한국사회에서 산업화 이래 이는 익숙했던 개념이기도 하다. 즉 트러스트란 한국사회의 여러 계급·층간 관계적 충돌을 잠재우려는 중요한 형식 논리였다. 우리에게 트러스트의 논리란 대개 그 상호 불평등과 불합리한 관계를 개선하기 보다는 갈등을 봉합하는 경제 메타포였던 셈이다. 예컨대, (슈퍼)갑과 을의 부당계약 관계, 재벌과 제휴사 수직 관계, 기업주와 (해고)노동자의 불평등 관계, 기획사와 소속 연예인간 노예계약 관계 등은 우리 사회 트러스트가 굴절돼 나타난 우울한 모습들이었다.

대학에도 여러 트러스트의 관계망이 존재한다. 그 중 학생과 교수간 신뢰망을 보자. 안타깝게도 많은 부분 사제간 트러스트의 진화 방식 또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 트러스트 문화와 닮아가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트러스트의 굴절된 모습과 달리 사제 관계에는 뭔가 고유하고 투명한 영역이 있어 보인다.

상호 불신과 억압의 속곳을 입은 트러스트의 위장된 모습들에도 불구하고 근근이 살아남은 사제간 상호 신뢰의 고유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난 강의와 수강이 이뤄지는 대학 ‘강단’의 특수한 장소적 의미를 중요하게 꼽고자 한다. 대학이 시장경제의 형식주의적 관계를 트러스트의 속성으로 삼은 지 이미 오래됐지만, 나름 강단이란 관계의 장소는 지식의 소통장이자 상호 교호적 트러스트를 쌓는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앎에 대한 의지와 가르침을 상호 교통하고 이로부터 지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강단은 여전히 사제간 투명한 신뢰 관계의 형성을 돕는 장소로 남아 있다. 물론 강단에서 이들 양자간에 맺는 계약의 장치들, 예를 들어, 강의 시간, 출석, 시험, 평가 등은 일방적 통제와 강제력이기 보다는 상호 존중과 약속의 기제로 보는 편이 옳다.

대학 강단이 지닌 이렇듯 긍정적 신뢰망으로서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매 학기 강의를 시작하는 내 자신으로 돌아오면 또 다시 자괴감에 빠진다. 내가 학생들에게 과연 얼마만큼 투명한 트러스트의 덕목을 요구하고 있는지 혹은 할 수 있을지 항상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얼마나 내 강의와 뭇 강의들을 트러스트의 상대로 진지하게 고려하는 지도 여전히 오리무중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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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미디어 문화정치를 사유하라

 

중앙대대학원신문 2010. 11.

 

기술·미디어 문화정치를 사유하라

 

이광석

 

한국 사회에서 기술 혹은 미디어 결정론이 이상기후식으로 번성하거나, 맥루언과 같은 미디어 생태학자들을 기술결정론자로 생각해 도매금으로 비난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학계에서는 누군가 기술을 중심에 놓고 얘기하면 ‘기술주의자’란 혐의나 딱지를 얻기 일쑤였다. 이제와 보면 기실 이도 일종의 일화인 듯싶다. 예나 지금이나 기술·미디어 논의 생산과 대중화의 주류는 진짜배기 기술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인터넷이나 디지털 발전의 자문역으로 임명돼 정부 관료들의 우상이 된, 앨빈 토플러나 피터 드러커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떠올려 보라. 맥루언은 기술주의에 경도된 이들 미래학자들과 동종의 이론적 선구자로 추앙받다가 뒤늦게 비판적 미디어 생태학자로 재조명받은 경우다.

 

플루서나 베냐민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들의 전집 번역 출판이 좀 늦었다 뿐이지, 만약 그 시기가 얼추 90년대 중반쯤이었다면 맥루언처럼 기술주의자의 오명을 뒤집어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림-텍스트-테크노 코드의 세 가지 커뮤니케이션 코드로 인간 상징체계의 진화하는 속성을 설명하는 플루서의 방식은 기술주의 혹은 결정론의 혐의를 쉽게 받을 수 있다. 또한 베냐민이 시각매체에 의해 형성되는 탈인간화된 세계가 인간 지각구조에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기술·미디어의 가능성을 살핀 것 역시 충분히 비슷한 기술주의의 굴레를 뒤집어쓸 수 있다.

 

흔히 ‘낙인’찍는 방식으로 보자면, 기술·미디어 결정론은 기술과 미디어가 한 사회와 문화의 발전을 추동하고 이끈다고 보는 관점이다. 반대로 사회적 구성론이나 비판적 기술론 등은 한 사회와 문화가 기술의 형성과 구성에 미치는 구조적 영향력을 강조하는 관점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들 두 극단의 시각들이 포개지는 접점에 놓인 학자들의 다채로운 주장들인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들의 관점은 시대에 따라 양자택일로 간단히 무 자르듯 한쪽으로 구겨넣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맥루언이 그 대표적 희생양이다. 

 

기술·미디어 사회구성주의의 새로운 시도들

 

기술·미디어의 사회적 구성주의가 좀 더 다층적인 결을 보여줄 수 있게 된 데는 과학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덕이 크다. 그는 기술 디자인 자체가 사회와 문화 형성에 미치는 역할론을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즉 행위자 대신 ‘행위소’ 개념을 사용해 ‘비인간’적 요소인 기술·미디어를 엄연한 주체 구성의 일부로 추가, 기술 진화의 구조적 해석을 폭넓게 한 측면이 있다. 라투르의 관점은 기술과 사회적 맥락이 주고받는 영향 관계를 밝히는데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논의로 볼 수 있다. 우리는 기술 혹은 미디어가 사람에게 말을 걸고 그것의 디자인이 인간의 행위나 문화를 바꾸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예컨대, 어떤 곳에 어떤 특정의 교통 신호 체계(신호등, 과속 방지턱, 경고문, 감시카메라, 경찰의 등장 가운데 하나 혹은 겸)를 설치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인지 방식과 태도에 미치는 영향은 달라진다. 이처럼 기술·미디어 발전의 논리를 규정하는 맥락의 규정성과 함께 그 역으로 기술·미디어가 인간 의식과 행동, 넓게는 문화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무시하기 어렵다. 

 

라투르에 의해 기술·미디어가 행위소로 등극된 것과 함께, 기술·미디어 디자인이 품고 각인하고 있는 사회·문화·인종·계급·성차 등의 모습을 구체적 해석의 지평으로 삼는 논의 또한 사회적 구성론에서 이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쥬디 웨이크만의 ‘테크노페미니즘’ 개념은 계급의 문제를 기술 해석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기술내 권력의 각인화 과정에 있어서 보다 다양한 층위들을 살피려 한다. 생산 기술(노동 과정내 젠더 생산), 재생산 기술(생명 재상산의 가부장적 동학), 가내 기술(가정내 가전기기들의 젠더 리모델링), 젠더화된 공간 등을 살피면서, 계급과 젠더를 중심으로 한 기술을 둘러싼 중층의 사회 문화적 결정 요인들을 살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성주의에 기댄 근거없는 기술낙관론(속칭 ‘사이버페미니즘’의 부류)이나 조건반사적으로 기술을 남성성과 동일시하여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에코페미니즘의 부류와 결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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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만이나 라투르 등의 사회적 구성론 혹은 기술과의 상호주체성론은 다양한 층위에서 기술·미디어-사회간 조응의 방식과 지형을 밝히는데 업적을 쌓아왔으나, 단순 해석을 넘어 지배적 기술·미디어 디자인을 뒤엎는 탈주와 저항의 기술·미디어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 점에서 마르쿠제의 제자이자 비판적 기술철학자인 앤드류 핀버그의 ‘기술 코드’란 개념은 상당히 유효해 보인다. 기술에는 계급·인종·성차·당대 사회·문화 요인 등이 그 디자인 속에 잠입하고, 한 사회의 법과 정책은 기술에 면죄부를 발급한다. 핀버그 논점의 중요성은 지배의 논리만이 코드의 디자인을 단순 압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애초에 억압의 계기를 가진 기술 디자인도 정해진 이용 매뉴얼을 벗어나려는 다른 길로의 가능성들에 항상 열려 있다. 그래서 핀버그의 기술 코드는 누리꾼들에게 권력의 자기장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역설계’의 실천을 부추긴다.    

 

닫힘과 열림의 ‘기술 코드’적 양가성은 우리에게 자본 권력의 코드화를 경계하고 그 코드로부터 탈주하고 저항하는 계기들을 포착하도록 이끈다. 대부분의 기술·미디어 철학이나 사회학이 그것의 영향력에 대한 사후 해석에 치중하는 경향에 비해 핀버그의 접근법은 지배 코드를 깨는 자발적 실천을 강조한다. 기술·미디어가 사실상 현실에 대한 이해를 막는 장애물로 등장하는 오늘날, 가상의 현실에선 오히려 기술·미디어 코드를 변형해 그 자유로운 소통과 표현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문화정치의 기술·미디어 철학적 사유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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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과잉 시대의 카피레프트 문화정치

저작권 과잉 시대의 카피레프트 문화정치

 

- 『황해문화』2009 겨울호

 

이광석 (@txmole)

자본주의의 디지털 국면에서 정보, 지식, 그리고 문화는 기존의 물질 재화의 고전적 운동 방식을 허물고 있다. 이제는 토대의 상부구조에 대한 영향력이 문제가 아니라, 상부구조에 머물렀던 문화가 토대 쪽으로 무너져내리며 ‘문화의 산업화’ (the Industrialization of culture)로 탄생하고, 다시 ‘산업의 문화화’(the culture-ification of industry)를 재반복하는 모양새다 (Lash & Lury, 2007, p.9). 정보와 문화는 저작권 등 지적 재산권의 합법적ㆍ‘체계적 식민화’(Wittkower, 2008) 과정을 겪는다. 이미지와 꿈이 사회, 경제의 중심 엔진이 되는 ‘드림소사이어티’에서는 제품 위주의 마케팅에서 이미지와 향유 문화를 파는 행위가 중심에 놓인다 (서진석, 2007, 16-17쪽). 인류애의 철학과 비전은 비자 등 신용카드 회사들이 주도하는 글로벌 디지털 소비문화로 둔갑한다. 개성과 유행은 밀라노와 파리의 패션 도시와 함께 노키아, 모토롤라, 애플, 삼성전자의 디자인실로부터 주조되어 나온다. 현실 속 조중동 족벌신문의 뉴스 생산의 바통을 네이버와 야후가 이어받아 황색 포탈 저널리즘으로 완성한다. 구질구질한 재래시장 좌판들을 뒤집어엎어 홈쇼핑과 미니 유통체인들이 자신들의 편리함으로 도배한다. 인용, 트랙백, 혼성모방, 변용, 샘플링, 콜라주의 문화는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으로 낙인찍힌다. 루카치(Lukács, 1923)식으로 보자면, 이 모든 현상들은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모든 관계들을 교환 가치화하는 ‘(사)물화’(Verdinglichung)의 새로운 디지털 국면이다.


처음부터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상품시장의 확장에 의해 유지되고, 상품화 과정은 오늘날 물질재뿐만 아니라 정보와 문화 영역에까지 걸쳐 확대된다. 이 글에서, 필자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저작권과 같은 강제적 재산권화 과정이 없이는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자본주의 시장의 이윤원에 크게 변화가 왔다고 본다. 우리의 문화산업 진영도 ‘한류’ 등을 등에 업고 저작권 소유자의 지배적 권리를 아시아권에 행사하면서 할리우드의 아류적 맛에 중독된 지 오래다. 국내의 시장 행위자들은 ‘아시아적 가치’란 주술을 통해 지역에서 문화 영역의 (재)영토화를 통한 이윤 창출의 기제를 형성하려 하면서, 국내외 저작권법 적용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글은 저작권 과잉의 문화가 만들어내는 현실 유감으로 쓰여졌다. 문화적 향유와 생산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이용자 혹은 시민의 권리가 소멸하는 현실에 대한 가능한 다른 길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우선 코미디같은 저작권 문화의 몇 가지 사례들로 시작한다. 이 사례들로부터 자본주의의 디지털 국면에서 지식생산의 사유화 방식의 미래 경향성을 볼 것이다. 그 경향성에서 보면, 생각보다 시장 권력의 변화 방식은 꽤 세련되고 공고하다고 본다. 예컨대, 마르크스가「공산당선언」에서 “모든 굳건해 보이는 것들이 대기 중으로 녹아 사라져버린다”고 짚었던 것처럼, 무엇이든 삼키는 가공할 괴물의 모습을 현대 자본으로부터 확인한다. 흔히들 열광하는 누리꾼들의 ‘집단지성’ 혹은 ‘창발성’,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저항성’을 상업화하여 포획하는 자본의 힘들을 우려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전망이 자본에 대한 투항으로 비춰져선 곤란하다. 현단계 자본의 능력에 대한 판단이 대안의 문화정치적 전망에 누가 될 순 없다. 냉엄한 사태 파악이 대안의 전제가 된다.

 

필자는 자본에 의한 지식의 사적 전유에 대한 대항의 논리로 '카피레프트' 개념을 중심에 둔다. 무엇보다 이를 통한 실천을 비관의 현실을 깨는 시작점으로 삼으려 한다. 역사적으로 과감히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면서 지식 사유의 경향을 비판했던 아방가르드 예술과 미디어 행동주의의 사례들을 근간으로 해서, 오늘 우리 현실에서 정보와 지식의 사유화를 역전할 수 있는 카피레프트적 가능성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저작권 과잉의 현실유감

우리의 저작권 문화 현실로 와 보자. 한 아이의 엄마가 어린 딸아이의 재롱이 혼자보기에 너무 아까워 이를 캠코더로 담았다. 기술적으로 한 것이라곤 집안 거실에서 가수 손담비 ‘미쳤어’ 음악을 배경에 맞춰 아이의 춤추는 모습을 찍었을 뿐이다. 곧이어 이를 그대로 UCC (손수제작물)의 형태로 웹에 올렸다. 그런데, 음원저작권협회로부터 아이의 엄마가 게시물을 올렸던 그 포털업체에 경고가 들어왔다. 유명 가수의 음원을 함부로 도용했기에 이는 저작권 위반이란다. 만약 게시물을 삭제치 않으면 법대로 조처를 취하겠다는 엄포가 들어왔다. 그러자, 포털업체는 얼마 지나지않아 아이의 엄마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스르르 게시물을 삭제했다. 마치 생일상 앞에서 아이의 재롱을 찍던 부모의 캠코더를 누군가 나타나 강제로 빼앗아 녹화 테이프를 바닥에 내팽개치는 형국이다. 몇년전 이와 거의 흡사한 일이 미국에서도 있었다. 당시에 이를 두고 정말 해외 토픽감이라 여겼는데, 그같은 일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재연출된다.


두 번째 이야기. 내가 잘 아는 출판사 사장님의 기막힌 사연이다. 국내 출판사 대부분이 언론사나 잡지사 등에 신간을 위한 자체 제작 홍보용 기사를 뿌린다는 것쯤은 많이들 알고 있다. 출판사에서 보낸 맞춤형 글에 자신의 글 몇 줄을 가감해, 힘들여 읽지 않고도 희한하게 서평을 써댄다. 그리곤 법적으로 그 기사에 대한 저작권은 언론사가 갖는다. 필자가 면식이 있는 영세한 출판사의 사장은, 기획도 하고 책도 만들고 번역도 하고 거의 모든 일을 홀로 자들은 받아서 서평을 썼다. 의당 책 선전도 할 겸, 그이는 자랑스럽게 활자화된 서평 기사를 출판사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언론사를 대리하여 한 변호사 사무실로부터 소송이 들어왔다. 저작권자인 언론사의 동의 없이 감히 글을 무단으로 올린 죄란다. 불쌍한 사장은 법적으로 붙어봐야 이길 수 없는 싸움, 그저 벌금을 물고 물러섰다 한다.

 

세 번째 이야기. 2008년 6월경이다. 거리는 한창 촛불시위로 후끈했던 때다. 당시 조용히 나우콤의 문용식 대표이사가 구속됐다. 이유인즉슨 누리꾼들의 ‘불법’ 파일교환 행위에 대한 방조죄였다. 온라인 서비스 사업자의 중립적 지위와 역할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갑작스런 대표 구속은 그 정도를 넘어섰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대단히 양심적 기업인으로 정평이 나있던 이를 불법 파일교환 방조죄로 몰았으니 잡아가는 쪽의 꼴이 우스워졌다. 실제 구속 사유를 따져보니, 문대표가 촛불 국면을 생방송해 누리꾼들의 사랑을 받던 ‘아프리카TV’의 운영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작권 앞에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단단한 모든 것들’

앞서 세 가지 사례들은 지식 생산의 사유화가 벌어지는 서로 다른 지점으로부터 뽑아낸, 동시에 대단히 최근의 저작권 위반 사례들이다. 먼저 첫 번째, ‘미쳤어’ 사례를 일반화하면 다음과 같은 진술이 가능하다. 가족, 친지, 친구 또래 등 사적 영역에서의 문화 향유 방식과 지식 상품화의 강제 규제력인 저작권 진영이 첨예하게 맞부딪힐 때, 점점 후자의 영향력이 확대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도 영역에서의 저작권법 개정 작업, 기술적 보호와 잠금장치, 초등학교내 저작권 교육, 연예인들이 벌이는 ‘굿 다운로더 캠페인’ 등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사유화된 문화를 빠르게 체득하고 있다. 자본주의 태동이래 화폐가 물질 재화의 교환가치를 위한 추상의 등가물로 등극하는 방식에 비해, 비물질 재화에 소유 개념과 재산권을 강요하는 방식은 훨씬 더 집요하고 다면적이고 빠르다.


‘미쳤어’ 사례는 근본적으로 이용자쪽(직업적 작가군과 아마추어 누리꾼들 포함)이 자유롭게 창작에 써야할 소재의 접근에 점점 더 큰 위협을 받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누리꾼들의 UCC 제작에 이미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들을 소재로 이용하는데 제약이 걸리면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심대하게 위협한다. 즉 풍자, 패러디, 혼성모방 등 창작 행위가 이미 권력이나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철통같이 보호되는 영역 속에 놓여 있음으로 해서, 저작권은 표현에 대한 검열 기제로 등장한다. 그래서, 모든 이가 지식의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인 ‘프로슈머’(prosumer)의 장밋빛 전망은, 일상의 대중적 표현과 연계된 저작권 법리를 벗어날 때만 유효한 개념일 뿐이다.  

 

표현 자유의 쟁점과 함께 또 다르게 등장하는 위협 요인은, 아마추어 창작과 저항 행위 자체의 비지니스적 포획이다. 디지털 국면에서 저작권을 행사하는 기업들은, 일반 누리꾼들이 지니는 자유로운 카피레프트 문화를 시장 안에서 순화하거나 끌어들이려 한다. 그것이 닷컴이후 경제 모델인 소위 ‘리믹스’(remix) 경제의 근간이 된다. 정보재가 지닌 공유적 특성(비배제적 혹은 비경쟁적, 무한복제, 한계비용 0 등)을 인정하고, 누리꾼들이 형성하는 창작물과 놀이 형식을 비즈니스의 영역 안에 포획하려는 것이 리믹스 경제의 요체다. 이 법칙을 거스르곤 미래에 성공은 고사하고 쪽박차기 십상이라는 것을 기업들 스스로도 체득한다. 예를 들어, 2008년 삼성경제연구소에서「인터넷과 미디어산업의 재편」이란 보고서를 내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필자는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이 기업 보고서를 간간이 읽히는데, 그 이유는 오직 단 하나다. 소위 이윤의 생리에 밝은 우리의 삼성 대재벌조차 누리꾼들의 정보공유와 자유문화의 경향을 포착하는데 있다. 이 보고서에서 삼성은, 누리꾼들에 의한 공유 문화를 법적으로 옥죄기 보다는 이를 인정하고 그 문화 현실에 조응하는 사업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당연하게도, 정보 풍요의 시대에 “범용화된 정보는 모두 무료화될 가능성이 놓고, 유료서비스의 경우도 가격하락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래서, 장차 사업 방식은 “이용자에게 저가ㆍ무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기업 입장에서는 수입을 보전할 수 있는 차별화된 비지니스 모델 발굴”로 가자고 말한다. 정치인들이 이 정도의 사업 마인드만 있어도, 올해 국회에서 시대에 역행하는 저작권법 개정안을 들이미는 비상식은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따져보면, 사실상 삼성은 구글이나 애플을 롤모델로 삼고 있는데, 주로 온라인 소비자들의 흐름과 그들의 문화 생산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상업적 모델을 구성하는 방식을 고민한다.


삼성 보고서에서 드러난 리믹스형 경제의 요체는 무엇보다 더욱 더 아마추어적 정보 생산자/이용자들에 기생해 그 힘을 키우고 유저들의 자유로운 기운으로부터 자산의 증식력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말은 불순하고 위험할 수 있다. 즉, 인간 신체의 네트워크 접속, 그리고 그 인간 뇌를 자양분삼아 진화하는 상업 미디어 사이에 맺어진 상호 공생의 효과가 집단 지성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미래는 바로 이 인간들의 뇌 촉수로부터 사출한 집단 지성을 자본의 것으로 재가공하는 능력에 달렸다. ‘닷컴 이후’ 자본주의의 진화는 급속히 이와 같은 기생형 모델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즉, ‘참여’와 ‘창조/창의 산업’(the creative industries)이라는 명목으로 누리꾼들이 생산하는 지식 생산물들의 끊임없는 사출을 통해 기생하는 네트워크 잡종형 (사유와 공유의 혼합형 - 리믹스형) 경제 모델로 가고 있다. 결국, 현대 자본의 사활은 살아 움직이는 누리꾼들의 문화와 생산물들을 자기화하는데 달려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누리꾼들은 이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접속하고 자발적으로 연결될 때에만 주소를 갖고 아이디를 얻고 타인과 연계되고 ‘호명’되는 지위에 이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두 번째, 비운의 ‘책쟁이’ 사례다. 저작권의 비상식적 강화라는 측면에서 첫 번째 ‘미쳤어’와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째 사례에서 저작권 로얄티 배분과 관련해 실제 실소유자와 시장에서 문화생산자로 전락한 힘없는 창작자 (여기에선 언론사와 책쟁이)의 권리적 모순과 불평등 구조를 읽어야 한다. 많은 이들은 창작자를 위한 ‘인센티브’(일종의 다음 창작을 유도하기 위한 동기유발)를 위해 보상(rewards)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저작권이 존재하는 이유라 답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그와 같은 고색창연한 ‘낭만적 저자’(romantic authorship)들을 칭송하고 보답해야할 상황이 이젠 사라진 지 오래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저자에 의한 지식 창작과 그 창작물의 소유자(방송사, 이통사, 연예기획사, 문화산업 등)가 점점 분리되고, 전자는 후자에 종속된 문화노동자로 전락했다. 그 실소유자들은 음반회사들을 거느리고, 책을 출판하고, 영화를 제작하고, 문화상품을 전세계에 전파한다. 창작자들은 계약관계를 통해 그들의 대리자를 위해 머리를 쥐어짠다. 해외의 문화제국들인 소니, 워너브라더스, 월트디즈니는 전세계 문화노동자들의 대리인이자 실제 소유주다.

 

애초에 저작권이라 함은, 저자가 수행했던 창작에 대한 법적 최소 보상 체제임과 동시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모두의 공공재로 자유롭게 돌리자는 합의의 소산이었다. 한 축에 저작권자의 권리 규정과 함께, 다른 한 축에는 저작권자의 공익적 역할이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작권은 점점 사적인 재산권 행사의 장으로 변질된다. 더군다나 저작권의 소멸 전에도 저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이용자들의 최소한의 권리 규정들인 ‘공정 이용’ 혹은 ‘저작권 제한 조항’조차 제 기능을 잃고 있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앞서 출판사 사장의 경험은 사실상 ‘공정 이용’에 의해 충분히 보호될 권리였으나, 그도 작동하지 못하는 비상식의 현실을 지칭한다.

 

실상 ‘비운의 책쟁이’ 사례는 문화산업 전반의 불평등 현실을 예증한다. 연예기획사들은 연예인들을 가부장적 노예계약을 맺어 그들의 노동력을 강탈한다. 연예 제작자들은 소속사 연예인들을 출현시키기 위해 제작자들에게 종노릇을 자청하거나, 고장자연씨 자살사건에서 보듯 소속사 연예인들을 술좌석에 배석시키는 ‘성상납’의 파렴치 행위를 저지른다. 외주제작사가 만든 프로그램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공중파 방송사에 자신의 권리를 대부분 양도한다. 영화 제작사들은 제작 여건이 계속해서 어렵다지만, 대기업과 금융기업 등 전략적 투자자와 불평등한 수입 분배 (제작사 대 투자사 4:6 혹은 2:8로 수입 배분)에 만족해야 한다. 음반 시장이 다 죽어가고 새로이 떠오른 음원 수입에서 최고의 수혜자가 음원 배급사인 이동통신업체(음원 저작권 로얄티의 거의 40% 독식)다. 이같은 현실 논리 앞에서, 불법 근절의 ‘굿다운로더’를 키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업자간 공정 플레이가 실제 모순의 깊은 골임을 직시해야 한다.

 

마지막 ‘아프리카TV’ 대표의 구속 사례는 대단히 한국적인 저작권 남용의 모습이다. 저작권을 통해 ‘의사’(擬似) 재산권을 점점 늘리는 것도 모자라, 누리꾼들의 정치 발언까지도 정부 기관이 나서서 저작권 위반으로 겁박하는 경우다. 문화산업 논리로 시작된 우리의 저작권 철학에다가 우리네 통치권의 폭압적 논리가 결합되면서, 명분은 저작권 위반 혐의로 옭아매고 실제로는 누리꾼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단순히 디지털 경제논리를 보호하고 규제를 푸는 서구 국가들의 역할과 달리 우리 국내 상황은 순수 시장 논리보다 아직도 국가의 통치 퇴행성이 함께 작동한다. 이 점에서 개정 저작권법에 추가된 ‘삼진아웃제’(세 번의 저작권위반 경고후 게시판의 임의 폐쇄 조치 가능)가 누리꾼들의 ‘불법’파일 교환행위에 대한 서비스업자 측의 자체 모니터링을 강제하기위한 방법이라는 명분이 애초부터 의심스러웠다. 필요하면 언제든 정치발언에 재갈을 물릴 수 있는 장치도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국적 현실에서 저작권은 신자유주의 시장의 논리이자 대단히 정치적 통제의 논리다. 디지털의 물질적 기반은 누구보다 선진적으로 봐야 하지만, 그 운용 원리는 국가의 폭력에 억압당하는 질곡을 떠안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의 공공적 기원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우리의 저작권 과잉 현실을 보고 그 퇴행적 진행 방향에 대해 짚어보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저작권의 전면화와 일상화, 창작자보다는 소유자의 권한 강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작권을 통한 정치적 표현과 창작의 자유 제한을 읽을 수 있었다. 저작권 과잉의 이러한 부정적 경향성을 부추키는데, 사실상 국내에선 저작권 입법의 산업주의적 배경이 한몫하고 있다. 이미 미국과 유럽의 저작권 체제가 글로벌 경제 재편을 위한 산업 우위의 강제 논리로 바뀌고 있으나, 애초에 그들의 저작권이란 ‘공익’과 ‘시민권’을 염두에 둔 이용자 권리와 저작물에 대한 창작자 권리간 타협의 산물이었다.


서구 유럽의 역사를 보자. 15세기 중엽 인쇄술의 발달은 새로운 문화와 이념을 전파하고, 인쇄된 책을 통해 의식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민족주의가 번성하는데 일조한다. 인쇄출판의 대중화와 그것의 위력은 유럽의 군주들에게 이를 검열을 통해 관리하도록 요구했고, 16세기에 접어들면 영국에선 국왕이 친히 인쇄출판업자를 지정하여 통치자의 출판물을 독점하여 내도록 명했다. 당시 몇몇 인쇄 출판업자들의 시장 독점은 저자에 대한 영구적인 재산권 보장에 대한 요구를 낳았다. 또한 유럽 출판 시장의 전성기인 18세기에 들어서면 이는 해적 출판의 난립과 소수 독점업자들의 출판 길드조합간의 대립을 가져온다. 1710년에 제정된 최초 저작권법인 영국 ‘앤 여왕법’은 이 둘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작품의 재산권을 옹호하는 출판 길드와 지식에 대한 접근권을 외쳤던 해적출판 등 자영업자나 독자들 사이의 쟁투와 타협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Hesse, 2002; 남형두, 2008)

 

비슷한 시기에 이미 프랑스에서도 저작권에 대한 접근은 반영구적 재산권으로서 보다는 일시적 점유의 ‘특권’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 정치철학자이자 프랑스 혁명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꽁도르세(M. de Condorcet)의 다음 진술을 들어보자.

그러한 (지적) 재산은 자연의 질서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회의 힘에 의해 보호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로부터 만들어진 재산이다. 그것은 진정 재산권이 아니라, 특혜(privilége)에 불과하다. 이 특혜는 별 큰 폭력없이 그 원소유자로부터 가로챘을 때 느끼는 배타적인 즐거움과 비슷하다. (마르케스 드 꽁도르세, 「표현의 자유에 대한 단상」, 1776)

사회적 원천으로서 지적 재산과 이의 일시적 점유를 주장하던 꽁도르세의 주장은 지금 세상에서 보자면 격세지감이요 급진적 주장이다. 이제는 헐리우드와 문화산업이 지배하는 저작권 소유자의 재산권으로 개념화하면서, 꽁도르세가 보는 일시적 ‘특혜’나 공익과 같은 접근은 이제는 기억 속에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의 저작권은 마치 서구의 문화생산물을 수입할 수 있는 아시아 수출 시장의 합법화된 조문처럼 꾸며졌다. 다시 말해, 1957년에 처음 만들어진 우리 저작권법은, 이용자의 권리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국내외 문화산업 시장과 사익에 기반을 둔 저작권 소유자의 권리만을 강조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찬가지로 국내에서 ‘공유 영역’(public domain)이라 수입돼 쓰이는 용어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는 저작권법이 만료가 되든 저작자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든 이의 사정권이 미치지않게 되어 자유롭고 누구나 접근이 용이한 공간을 지칭한다. 이도 확실히 공간의 메타포를 지닌 서구적 개념이다. 원래 공유 영역이란 영국 황실이나 미국 연방정부가 국민에게 제한적으로 빌려줘 쓰도록 했던 토지를 일컫던 말이다. 역사적으로 19세기 유럽에 널리 알려진 비슷한 개념은, ‘공공재’ (public property) 혹은 ‘공유재산’(common property)이었다 (Ochoa, 2003). 그것이 1886년 베른협약에서 불어로 domaine publique라는 개념으로 최초 지적 재산에 이용되고, 20세기에 갓 접어들면 미국 저작권법(1909년) 하에서 정보와 지식의 '공유 영역'이란 개념으로 정착돼 쓰이게 된다 (Littman, 1990). 그런 이유로 국내에선 비물질재 개념으로 '정보'란 말을 삽입해, '공유정보영역'이라 쓰기도 한다. 즉 이제는 저작권의 시장 권역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적 산물의 독립된 그린벨트 영역을 상징하는 은유로 이용된다. 미국의 법학자 레식(Lawrence Lessig)의 ‘창작 공유터’(creative commons) 혹은 제임스 보일(James Boyle, 2003)의 ‘마음 공유터’(the commons of the mind)란 개념은 바로 이 18세기 ‘공유 영역’ 개념의 현대적 변용인 셈이다.

 

서구에서 ‘공유(정보)영역’에 대한 보호를 외치는 것은 정보와 지식에 대한 공익적 접근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도 우리 현실에 오면 용어만 갖다쓰고 그 맥락을 거두절미한다. 오직 산업의 논리가 득세하기 일쑤다. 예를 들어, 요즘 국내 인문학계에서는 ‘공유영역’에 놓여있는 무형의 자산들을 어떻게 하면 돈이 되는 쪽으로 재가공(2차적 저작물 제작)해 시장에 내놓을까 다들 고심 중이다. 예서 인문학의 미래 밥줄을 찾는 듯한데, 학술진흥재단에서 프로젝트를 따내거나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자연스레 ‘공유영역’의 사유화 방법들을 제각각 모색한다. 이같은 시각에선,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지적 공유 자원들, ‘장화홍련전’, ‘전우치전’, ‘구운몽’ 등은 다시 각색돼 영화에 쓰이거나 게임 내러티브를 만드는데 유용할 뿐이다, ‘공유영역’은 쏙쏙 빼먹을 양념꼬치로 전락하고 원래의 공공적 의미를 되묻거나 이 영역을 누구든 비상업의 지속가능한 지적 자원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다.

 

‘카피레프트’적 비전이란 것은 이와 같은 저작권 과잉을 막고 공유영역을 개발하자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한다. 예를 들어, 저작권 내부에 ‘이용허락’의 라이센스 방식을 통해 이용자의 저작물 권리를 훨씬 더 유연하고 쉽게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과거 사회주의의 재산권 철폐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아예 저작권 체제 자체를 폐지하자는 사회적 전망들도 존재한다. 통칭하여 보면 카피레프트는 정보공유론의 시각이다. 정보와 지식에 대한 접근은 대체로 공동 소유와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사회주의적 체제의 저작권 시각을 빼고보면, 카피레프트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창작 행위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효해야 하며, 저작물이 개인의 지적 작업에 의한 산물이긴 하나 외부 자원과의 관계망을 통해서 지적 자극과 혜택을 입은 것이기에 궁극적으로 공공의 자산으로 봐야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래서, 카피레프트는 이용자와 공익을 중심에 놓는 정보 권리 선언이요 다양성의 문화 논리다.

 

이 글은 이제부터 카피레프트의 징후들을 역사 속 예술 창작의 영역에서 찾고자 한다. 자본주의의 소비 기호화된 스펙터클과 브랜딩 이미지를 넘어서고자했던 문제의식을 예술의 역사로부터 주목하려 한다. 이미 국내에도 지식 생산의 민주화나 저작권의 유연적 적용에 관한 ‘이용허락’의 법률적 전망이 나오긴 했지만, 아직까지 크게 문화생산의 하위 영역에까지 퍼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그 지지부진한 이유가 카피레프트란 좋은 것이고 모든 이들에게 득이 되고 자본의 탐욕을 막을 수 있다는 평범한 메시지를 대중에게 심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라 본다. 이용자를 보호하는 ‘공정 이용’이나 ‘저작권의 제한’ 조항에 대한 검토 혹은 대안적 라이센스 모델의 적용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끊임없이 상품화된 지식 생산의 조건들을 조롱하고 비틀었던 창작 전위의 사례들에서 우리식 정보공유의 대중적 모델이나 캠페인을 개발하는 것도 돌봐야할 시급한 과제다.


  카피레프트의 예술적 유산들

카피레프트의 예술적 기원은 모방(mimesis), 베끼기, 혹은 참조, 패러디 등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15세기 라파엘의 <파리의 심판 Judgement of Paris (c1515)>이란 소실된 작품을 이제 현대인들은 원본없이 복사품을 통해 감상들 하고 있다. 라파엘의 직원이던 라이몽디(Marcantonio Raimondi)가 이를 에칭(蝕刻)해 복제본을 만들어둔 것이 결국 라파엘의 원본이 소실되면서 이를 추측하는 희대의 작품으로 남게된 것이다. 또한 그로부터 얼마 후에 라베나(Marco Dente da Ravenna)란 이는 라이몽디의 동판본을 표절하여 여러 장 만들어 팔아먹었던 당대 전문적 복사꾼으로 묘사되고 있다. 라파엘의 기운이 예서 멈추진 않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로부터 350년이 지나 1863년에 프랑스 작가 에두아르 마네(Manet)는 라파엘의 작품에 등장하는 바다의 신들 일부를 변경하는 대신 당대 현실의 의상과 나체의 여성을 삽입해 패러디 작품 <풀밭위의 점심식사 Dejeuner sur l'Herbe>를 남겼다. 물론 파카소는 자신의 일련의 작품 시리즈(1959~61, Les Dejeuners)에서 마네의 작품을 또 한번 창의적으로 재해석해 150개의 드로잉과 27개의 회화 작품으로 표현해냈다. 또한, 미국의 극사실주의 조각가로 알려진 존 드 안드레아(John De Andrea)가 제작한 같은 제목의 조형물(1982년)이나 ‘팝파겐다’(popaganda)로 알려진 론 잉글리쉬(Ron English, 1994년)의 같은 제목의 그림 작품은 다들 인물 구성을 현대적으로 재배치해 풍자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같은 잘 알려진 라파엘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시대를 가르면서 끊임없이 보여줬던 상호참조와 베끼기, 복제, 재창작, 풍자, 패러디 등의 기법들이 사실상 인류의 일반화된 창작의 기본 패턴임을 인정해야 한다. 따져보면 인간의 역사에서 몇몇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던 대발명을 제외하곤, 대개는 인용과 모방의 상호 참조를 통해 재해석하는 작업 정도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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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혹은 그것이 지닌 아우라를 거부하고 무위화하는 예술 운동이 보다 본격화된 계기는 흔히들 ‘반예술’적 경향이라 꼽는 ‘다다이즘’(dadaism)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특히, 이들은 창작의 천재성이나 주체성을 찬양하는 ‘낭만적 저자’(romantic authorship) 개념에 저항한다. 그 중에서 많은 이들은 대표적으로 뒤샹(Marcel Duchamp)을, 그리고 그의 변기 작품을 기억한다. 뒤샹의 1917년 남성용 소변기로 만든 작품 <샘 Fountain>에 ‘R. Mutt’이란 변기 회사의 이름을 서명해 미술전시회에 보냈을 때, 이는 예술 생산과 관련해 혁명적 의미를 지닌다. 흔히들 알고 있는 예술 제도와 시장의 허구성에 대한 도발을 넘어서, 자본주의 대량생산품인 변기에 찍힌 서명은 작가 개인의 창조성에 대한 조롱과 독창성을 의문시하는 도발 행위였다. (Bürger, 1974, 98~104쪽 참고) 사실상 이는 반예술의 표명이요, 저작권에 날리는 비릿한 조롱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베를린-다다 모임의 구성원들 중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는 ‘포토몽타주’ (photomontage)라는 예술 기법을 통해 당대 독일 파시즘의 폭력과 엄숙주의를 완벽하게 비판했다. ‘콜라주’는 기존 이미지들의 합성이란 의미에서 ‘포토몽타주’와 거의 흡사하나, 후자의 경우 반영구적 인쇄를 통한 복제 기능을 적절히 결합하는 기법 때문에 달리 지칭한다. 그의 기법은 표제와 부제들을 달고 나타나는 합성 이미지들을 잡지나 책 등의 표지에 대량 제작해 많은 독자들에게 돌려보게 한다는 점에서 대중적이었다. 상징 언어를 새로이 만들기보단 하트필드는 잡지나 신문의 보도 사진이나 기사 등 이미 존재하는(레디메이드) 이미지들과 글자들을 오려붙여 새롭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당대 현실을 지배했던 권위 체계를 조롱하고 뒤집고 전복하려 했다 (Walker, 1983, p.102).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와 비슷하게 프랑스 상황주의자들 일부의 작업 중 비예글레(Jacques de la villeglé)의 ‘데콜라주’(décollage) 혹은 ‘익명적 찢기’란 방식도 창작 행위의 집단적 성격을 강조한다 (Crow, 2007, 73쪽). 벽보 광고의 일부를 찢어내면 그 자리에 이전의 포스터와 전단들이 드러나면서 관객들은 그 아래 감춰졌던 과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위에 덧씌운 최근의 광고들과 찢기면서 드러난 오래된 광고의 이름 모를 기억이 혼합되면서 그 어떤 남다른 특권적 개인도 찢어진 게시물의 소유자라고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데콜라주는 바로 개인 창작의 가치를 무위화하는 카피레프트의 기본 정신인 익명의 공동 창조성을 강조한다. 포토몽타주는 기성의 저작 이미지들을 모아붙여 새로운 창작에 응용하면서 과거의 흔적을 지우는데 반해, 데콜라주는 후면에 덧붙여진 이미지를 찢기로 드러내면서 익명의 과거들을 흔들어 깨우고 이로부터 다중의 협업 효과를 깨우치게 만든다. 방식은 서로 역전돼 있지만 둘 다 개인 창작의 무위성을 드러내는 카피레프트적 실천 행위라 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뒤샹, 하트필드, 혹은 비예글레 등의 창작은 따져보면 오늘날 리믹스 시대에는 아방가르드 전위 축에도 끼질 못한다. ‘포샵질’ 등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동원해 하룻밤 사이에 생산해내는 아마추어 누리꾼들의 창작물은, 처음부터 창작의 자유를 막는 저작권과 소비자본의 횡포와 통치 권력에 대한 조롱을 함께 전하는 다다식 문화정치 행위라 볼 수 있다. 뒤샹, 하트필드 혹은 비예글레처럼 현대에는 아마추어 창작자들이 스스로 창작물의 전위로 등장한다. 법학자 레식(Lessig, 2009; 2004)의 개념으로 본다면, 이렇듯 다다식 창작문화는 ‘변용가능 문화’, ‘자유문화 혹은 ‘RW (Read & Write) 문화’에 해당한다. 다다이스트들과 상황주의자들은 닫힌 예술을 파기하고 새로운 예술을 구상하기 위한 카피레프트적 시도로써 창작자와 저자 개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축에는 ‘읽기전용 (Read Only) 문화’와 ‘허가 문화’(permission culture)의 현실이 도사린다.


카피레프트의 현대 예술적 표현들

현대에 들어서면 다다와 상황주의적 행위들은 문화정치적 측면에서 ‘문화 간섭’(cultural jamming)이라는 대중문화의 브랜드 이미지에 대한 저항 전술과 연결된다. 움베르또 에코식으로 얘기하자면, ‘문화간섭’은 자본주의 브랜드 기호와 로고의 제국에서 펼치는 ‘기호의 게릴라전’(semiological guerrila warfare)이다. 브랜드 이미지가 구성하는 스펙터클 혹은 기호 이미지를 뒤집고 조롱하며 시장 가치를 희화화하려는 행위가 기호의 게릴라전이다. 원래 문화간섭이란 “햄 라디오 이용자들의 대화 혹은 라디오 방송에 간섭 현상을 발생시키는 불법 행위”를 지칭했다. (Harold, 2007, p. xxv) 즉 신호에 잡음을 끌어들이는 기술적 간섭 현상이 문화정치 영역에서 재해석되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카피레프트와 직접적으로 관련해서 본다면, 문화간섭의 저항 행위로 우리는 ‘전유’(appropriation)를 꼽을 수 있다. 전유의 어원적 의미 중 하나가 ‘훔치다’ 혹은 ‘묻지않고 가져오다’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Harris, 2006, p. 17) 이는 지배 문화와 지배 담론의 언어를 가져다 대중의 것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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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론 잉글리쉬는 대중문화를 비판하는 소재로 월트디즈니의 미키 마우스를 이용한다. 잉글리쉬의 마를린 먼로의 초상을 그린 시리즈 그림을 보면, 미키 마우스의 얼굴이 마를린 먼로의 가슴을 대체하고 있다. 마치 성적 상징물로써 여성의 풍만한 가슴에서 느낄 수 있는 관음의 성적 욕망을 자본주의 상품 문화의 소비 욕망과 포개놓는 효과를 갖는다. 이러한 예술 창작 행위가 일종의 문화간섭이요 전유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 ‘네거티브랜드’(Negativland)는 오랫동안 오디오 샘플링 (일종의 음원 콜라주)를 수행하면서 카피레프트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그룹이다. 요새 빅뱅 멤버인 G드래곤의 ‘하트브레이커’가 표절 시비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네거티브랜드는 이와 같은 스캔들이나 표절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소리, 소음, 음원, 목소리, 기계음 등 채취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조합해 이들은 새로운 곡들을 만들어낸다. 20여개가 넘는 샘플링 CD를 제작해 선보였고, 샘플링의 재배치와 재구성만으로도 딴판의 새로운 음악 창작이 가능함을 입증해왔다. 비슷하게 '걸턱'(Girl Talk)이란 뮤지션도 샘플링을 통해 음악을 창작하고 무대에 서면 악기와 보이스 대신 작은 노트북만을 몸에 걸친 채 공연한다. 사실상 이는 퍼블릭에너미(Public Enemy)나 척디(Chuck D) 등 정치색 짙은 하드코어 래퍼들이 자신들을 악동으로 그리며 보도하는 앵커들의 목소리, 블랙 리더들의 연설, 드라마나 영화 속 흑인의 묘사 등을 그들의 음악에 샘플링해 음원으로 쓰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렇듯 네거티브랜드나 걸턱, 그리고 몇몇 래퍼들은 소위 원본이라 얘기되는 음원들을 전유하여 새롭게 재구성하여 음원들의 진본성에 조소를 보내는 효과를 내고 있고, 미래 음악 창작과 공연 형식의 새로운 전범을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보자면, 이같은 전유 행위들은 소비문화를 통해 생산된 대중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재구성해 역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효과를 거둔다. 뉴-/디지털 미디어 예술은 ‘전유’의 창작 방식을 북돋고, 아마추어 누리꾼들을 손쉽게 작가의 스타덤으로 이끈다. 이때 전유는 인용, 샘플링, 콜라주 등의 기법을 동원하며 그로 인해 브랜드 가치를 보호하는 저작권 체계나 초상권, 명예 훼손 등과 항상 적대 관계에 놓인다. 통칭해, 이는 ‘전유 예술’ (Harold, 2008)이라 불린다. 전유는 마치 권력의 길거리 풍경을 반역의 약호들로 재탄생시키는 벽낙서(graffiti)와 같은 저항의 힘을 불어넣는다. 이와 같은 전유의 전술은 사실상 ‘사보타주’(sabotage)와 다르다. 사보타주는 부정과 배격의 저항 전술이자 가장 오래된 전법이다. 자본의 톱니바퀴에 공구를 던져넣어 생산 공정을 마비시키는 멍키랜치의 의미에서처럼, 사보타주는 자본의 흐름을 멈추려는 태업의 적극적 표현이다. 부정하지 않으면 휘말리고 포획됨을 알기에, 사보타주는 절연의 정치를 택한다. 바리케이트를 사이로 이쪽은 아요 저쪽은 적이 됐다. 이는 또한 안의 권력 파장을 벗어나 밖의 자유로 탈주하고자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허나 사보타주는 저 멀리 권력을 바라보며 벌이는 적대의 저항 방식이라 체제내 유연성이 부족하다. 슬로건은 해묵고 전술은 경직돼 있다.

 

외려 날조된 소비주의의 스펙터클 안에 갇힌 채 유희와 욕망의 명령을 따르는 인간에게 지향성을 갖고 맞서라한다면, 이는 오히려 ‘전용’ (détournement)이 맞다. 전용은 ‘전복’과 ‘우회’의 중간 지점에 머무른다. 상황주의의 대부였던 기 드보르(Guy Debord & Wolman, 1956)에 따르면, 전용은 지배문화의 언어에 대항하는 ‘다다식 부정’(Dadaist-type negation)의 전술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보타주가 감성에 기댄 반대라면, 전용 혹은 선회는 성찰성에 기반한 반대이자 합에 대한 고민이 들어 있다. 헤겔식의 변증법적 이상향에 대한 비전이 있다면, 전용의 힘은 배가된다. 소비자본주의의 스펙터클 이미지를 도용하면서도 그 자본의 흔적을 온전히 떨어내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방식이 선회요 전용이다. 한편, 앞서본 전유의 예술 행위가 아마추어 누리꾼들도 가능한 창작의 영역이라면, 선회나 전용은 예술로 표현하자면 좀 더 숙련과 미학적 재능을 요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마치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처럼, 각각의 차용된 이미지들이 지녔던 과거의 흔적이 완벽히 사라지고 콜라주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부분들로 자리매김하고 각각이 모여 새로운 의미로 형상화할 때 전용과 선회의 의미가 살아난다. 반면, 대개 패러디는 전용에 이르지못한 전유의 한 표현 형태로 남는다. 전유건 전용이건 사실상 그 나름대로 문화간섭의 한 방식이요, 카피레프트의 문화정치적 전술을 기획하는데 둘 다 중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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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20세기초 역사적 아방가르드 예술 시절에 콜라주 혹은 몽타주를 통해 창작했던 다다이스트들은 독일 파시스트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았지만, 적어도 시장으로부터의 위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 누리꾼들의 아마추어 UCC 창작이나 직업적 예술가들의 문화간섭을 위협하는 것은 저작권 위반 기소와 정치인들이나 족벌 언론인들의 초상권 침해나 명예훼손 소송이다. 과거와 달리 전문 작가들과 누리꾼들은 자신들의 창작을 위해 저작권 보호 대상의 저작물들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전유와 전용의 예술은 ‘절도 예술’ (Lütticken, 2002)의 길을 걷게 된다. 대중들은 저작권과 초상권 등에 의해 보호받는 이미지, 음원, 영상 등을 이용함으로써 그들이 행하는 창작으로부터 많은 제약을 받는다. 엔디 워홀이 소비사회의 상징들을 주요 소재로 쓰면서 저작권 분쟁으로 크게 시달렸단 것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는, 쉐리 레빈(Sherrie Levine)이나 조각가 제프 쿤스(Jeff Koons) 등 소위 전유 혹은 절도 예술을 자신의 기법으로 실천하는 전문 예술가들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쿤스는 아트 로저스(Art Rogers)라는 이름의 사진작가가 찍은 1980년 엽서를 참조하여 자신의 조각을 1998년 완성한다. 원본의 흑백사진 이미지는 똑같은 종의 새끼 강아지 7마리를 나란히 안고있는 중년 부부의 모습인데, 쿤스의 목각 작품에서는 개들의 털색깔이 보라색으로, 루돌프 사슴코처럼 과장된 개들의 코들, 그리고 중년부부의 머리에 꽂힌 꽃장식 등으로 원본과 달리 묘사됐다. 쿤스의 이 작품은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비싼 가격에 경매에 붙여졌다. 그러나, 쿤스는 로저스에게 저작권 위반 혐의로 고소당하여 법정 패소한다. 현 체제에선 쿤스의 작품은 복제물로 낙인이 찍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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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크 네피어(Mark Napier)란 작가 또한 바비인형을 자신의 창작 행위에 모델로 썼다가 그 인형을 제작하는 마텔 회사(Mattel, Inc.)으로부터 저작권 위반 위협을 받은 경우다. 그는 자신의 창작 자유가 어떻게 위협받았는지 자신의 웹 프로젝트에서 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일명 ‘뒤틀린 바비인형’(distorted Barbie)이란 온라인 작품들은 원래 자신이 만든 이미지들을 모두 다 뒤틀리게 묘사함으로써 기업이 소송을 통해 어떻게 창작 자유를 훼손할 수 있는지 그 침해 상황을 비꼬아 그려내고 있다.

 

네피어나 쿤스의 사례에서 보듯이, 기업들의 작가들에 대한 점증하는 공격과 그들이 생산하는 일상속 브랜드 이미지들의 위협은, 서두의 ‘미쳤어’ 사례를 포함해 복제에 기반한 패러디 예술 등 창작 행위 모두에 부정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불법예술’(illegal-art.org)이란 온라인 사이트는 이처럼 저작권의 위협을 받고 있거나 법정에 섰던 동영상, 음원, 예술 작품 등 문제작들의 아카이브 저장소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온라인 이용자들에게 창작의 자유에 훼손된 수많은 양질의 작품들을 전시해 저작권의 창작과 표현의 자유 훼손의 전범들을 기록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불법예술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한 이미지의 사례를 들어보자. 이 사이트에서 방문자는 켐브루 멕리오드사용자 삽입 이미지(Kembrew McLeod, 2007)란 아이오아대학 신방과 교수가 등록한 스캔된 상표권 이미지와 문구(‘표현의 자유’, 1998년 미 상표권 번호 2127381)를 볼 수 있다. 이는 저작권 과잉 현실과 관련해 두고두고 회자됐던 사례다. 멕리오드는 문화간섭의 일환으로 ‘표현의 자유’ 문구를 미 특허청에 법적으로 등록해 소유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그는 대기업들이 만약 이 문구를 오용하여 광고 등에 사용하면 지체없이 경고장을 날려 소송을 걸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는 나름 언론이 주목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우선은, ‘표현의 자유’라는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문구를 일개인이 상표권으로 사유화해 등록할 수 있다는데 모두들 놀랐다. 그 다음엔 무엇보다 이 실험이 대기업들이 공공 영역에 남아있는 용어들을 무작위로 상표권으로 사유화하는 현실에 대한 경종이 됐다. 이 상표권 실험 덕택에 그는 뉴욕타임즈 등 언론이 주목해 소기의 대중적  페다고지 효과를 봤던 것이다.

정보 생태운동으로서 카피레프트

이제까지 훑어본 것처럼, 서구에서 전유, 전용, 혹은 절도의 문화 행위들은 뿌리깊고, 이들 예술 형식들은 문화간섭이란 행위에 합류하면서 자본주의 소비문화 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을 수행해왔다. 이는 일상의 아마추어 누리꾼들의 창작에서부터 직업적 예술가들의 전유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무정형의 다중에 의해 표현되는 문화정치의 행동들이 앞서 얘기했던 ‘공유영역’을 일구는 기본 바탕이 될 것이라 본다. 이 글의 서두에서도 지적했던, 국내 저작권 과잉의 경향성들을 막기위한 하나의 문화정치의 전술로서 언급될 수 있다고 본다. 공유영역에 대한 전문 법학자인 보일(Boyle, 2003)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가진 것 없는 농민들이 나눠 경작하던 당시 유럽의 공유영역에 대한 재산권 소유자들의 역사적 ‘종획운동’(enclosure movement)으로 농민들이 토지를 박탈당한데 이어, 현대 기업들이 또 다시 정보와 지식의 공유영역을 사적인 이윤의 전쟁터로 만들어 누리꾼들을 범죄자로 몰고 있다. 자본의 변화에 대한, 그리고 저작권의 과잉에 대한 보다 적극적이고 세련된 문화정치적 저항의 판을 짜는데, 전유와 전용의 전술이 필요하다. 유쾌 발랄하면서도 권력의 비린 곳을 드러내면서 미래의 카피레프트 비전을 세우는 작업이 요구된다. 자본과 권력의 영역이 첨단화하고 스스로를 체질 개선하고 있다면, 그 속에서 정보 공유의 가치를 대중화하면서 새로운 대응 논리를 세우고 카피레프트의 구체적 사례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야 한다.

 

보일(Boyle, 2008)은 이를 지식과 정보의 생태주의적 시각에서 접근한다. 마치 공해산업으로부터 환경을 보호하듯 정보와 지식의 공유영역을 저작권의 과잉으로 인한 공해로부터 보호하여 그린벨트화하자고 제안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린피스 등 환경운동단체처럼 저작권의 지적 공해 현상을 적극적으로 사회 공론화하는 작업을 확대하자고 주장한다. 이 글과 그의 비유법이 서로 다르지만, 앞서본 카피레프트적 문화정치 행위들은 ‘정보생태주의’적 행동들과 일맥상통한다. 즉 전유와 전용의 문화정치적이고 문화간섭적 행위들을 정보 환경운동의 맥락에서 자리매김하고, 우리도 이와 같은 아방가르드적 문화정치를 통해 저작권 과잉을 떨쳐낼 새로운 지속가능한 전망들을 끄집어내는 집중화된 작업이 시급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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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뉴미디어 - 포스트486세대의 트위터 반란, 그리고 촛불세대의 부재증명

포스트486세대의 트위터 반란, 그리고 촛불세대의 부재증명

 

문화과학 (2010 가을호 게재) * 각주는 편의상 다 잘라냈습니다. 일부 실천문학(2010 여름)에 실었던 내용이 중복되나, 거의 새롭게 쓰여진 글입니다. 논평 부탁드립니다.

이광석 (@txmole)


가만보면 우리에겐 특정 역사적 국면에서 대중의 정치적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발산한  특정 미디어 혹은 기술적 서비스의 전례들이 꽤 많다. 다소 거칠게 본다면, 90년대 초∙중반의 피시 통신문화, 90년대말 게시판 문화와 딴지일보 등 풍자·패러디 사이트들의 등장, 2000년대 초반 오마이뉴스 등 누리꾼들의 게릴라식 글쓰기를 통한 온라인 시민 저널리즘의 발전, 2004년 중반 총선과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시 인터넷 카페들을 통한 대항 담론 생산, 2008년 광우병 파동과 촛불 시위 속 휴대전화, 넷북, 휴대 카메라 등 게릴라 이동형 매체 등을 활용한 실시간 인터넷 방송과 UCC 제작, 그리고, 올해 지방선거에서 대항 여론 형성과 투표 독려에 한몫한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가 그것이다.


물론 특정 시기에 오로지 어느 한 매체만이 아래로부터의 소통로들을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 사안에 따라 누리꾼들은 다양한 매체들을 혼용해 여러 담론들을 생산해내는데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마찬가지로, 신진 매체의 등장은 구매체의 퇴장을 전제하여 발달하진 않는다. 즉 복수적 매체들이 한 시점에 여럿 걸쳐서 그 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불과 두 해 전 촛불의 저항 국면에서 보여줬던 다양한 매체 전술 가운데 구매체의 변형이나 복원 형식들, 즉 리플릿, 팸플릿, 전단, 명함, 무가지, 걸개, 대자보, 벽화, 판화, 음악, 판소리, 춤사위, 지역 방송, 공동체 라디오, 스티커, 짤방, 플래카드, 풍선, 해킹, 반저작권, 플래시몹, 온라인 패러디, 1인 시위, 그라피티 등은 신진의 다양한 소셜 미디어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대부분은 정치적 격변기 현장 속에서 항상 존재했었으나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전술 매체들과 예술 장르와 기법들이다. 이와 같은 일반적 미디어 조건들을 인정하는 한에서 논의를 끌어가자면, 적어도 어느 특정 매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유의 디자인과 효과가 당대 이용자들의 문화나 정치 상황과 잘 맞물리는 지점이 분명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정 시점에서 특별한 기술 디자인과의 조응은, 단순히 디지털 기술이 시장에 도입될 때마다 누리꾼들이 덥석 덥석 문다는 ‘기술주의’적 논의와 무관하다. 디자인의 당대 적합성이 잘 물릴 때 대중의 어필을 받을 수 있다는 가설은, 그 디자인의 생성과 발전을 규정하는 힘들이 존재함을 지칭한다. 보통 새롭게 도입되는 기술의 디자인에는 이미 일정 부분 사회의 논리가 각인되고, 이에 반응하는 기술들이 대중의 호응을 얻는다. 이미 설계된 기술의 디자인 또한 그 자리에서 멈춰있지 않고 이용자들의 문화와 결합되면서 같이 조응하거나 이용자들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대표적 예로, 애플은 컴퓨터를 팔기도 하지만 이를 구입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자발적 ‘애플 문화’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고 자본의 재생산을 도모하는 근거가 된다.

 

마르쿠제의 제자이자 비판적 기술철학자인 앤드류 핀버그는 기술 디자인의 형성과 진화 과정에 대해 ‘기술 코드’(technical codes)란 개념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즉 자명한 듯 보이는 기술에는 계급, 인종, 성차, 당대 사회∙문화 요인 등이 그 디자인 속에 내면화돼 있고, 이는 한 사회의 법과 정책 등으로 검증받는다고 본 것이다. 물론 이 코드의 디자인에는 지배의 논리만이 강조되진 않는다. 애초에 억압의 계기를 가진 기술 디자인도 정해진 이용 매뉴얼을 벗어나려는 다른 길로의 가능성들에 항상 열려 있다. 핀버그의 기술 코드는, 그래서 누리꾼들에게 권력의 자장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역설계’(reverse engineering)의 실천을 부추긴다.  

 

한국 사회에서 누리꾼들에 의해 애용되는 신종 기술의 등장과 대중화는 대체로 공권력의 파장에 대응한 탈주의 성격이 강하다. 예를 들어, 지난 정부 때부터 시도됐던 내용등급제나 인터넷 실명제(소위 본인 확인제)는 현 정부 들어서 개인 홈페이지와 게시판 문화의 토론 기능을 급격히 약화시켰다. 인터넷 삼진아웃제나 법적 제제와 고발은 인터넷 카페나 인터넷방송 등 서비스 운영자의 표현의 자유를 막으면서 1인 방송을 불구화했다. 아고라 등 논쟁적 카페들은 명예훼손과 사생활 침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공권력을 견디지 못하면서 ‘인터넷 망명’이란 특유의 문화를 낳았다. 대단히 슬프게도 국정원 등 패킷 감청으로 인터넷 망명이란 의식적 행위가 부질없다는 사실로 인해 그 효과 또한 반감했다. 한 때 선거 시기 문자나 메일링 활용 방법이 선거법 위반으로 막히면서,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의 활용 등이 그 중심에 서기도 한다. 이렇듯 공권력의 힘과 농단의 정도에 따라 누리꾼들의 활동 반경에 영향을 주고, 새로운 대안 기술이나 우회로가 존재할 때 급격히 다른 기술로 빠르게 이전되어 간다. 예를 들어, 최근 본인 확인 절차 없이도 트위터를 경유해 토론 게시물을 등록할 수 있는 방식은, 정부 영향력 아래 불구화된 게시판 ‘본인 확인제’를 조롱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결국 권력의 일상화가 점점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화될수록, 기술 세대들은 억압의 계기가 강한 코드들을 담고있는 기술에서 멀어지거나 우회해 탈주 가능성이 높은 기술적 대안들에 눈을 뜨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소셜 미디어의 일종인 트위터는 촛불 정국 이후 소통과 이바구의 배출에 장애가 생기면서 누리꾼들의 대안으로 떠오른 경우다.

 

이 글에서는,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트위터 등 신종 ‘소셜 미디어’의 가치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이용했던 ‘2030세대’들의 역할과 이들을 잇는 촛불세대들의 문화정치적 가능성을 볼 것이다. 이들 세대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커뮤니티 소통의 배출구를 긍정하고, 무엇보다 뉴미디어를 활용하여 권력 억압과 여론 조작 국면에서 새로운 문화정치의 활력소를 찾고, ‘오정보’(misinformation)를 교정하고 권력의 구린 내면을 폭로하는 기능을 높이 산다. 이 글에서는, 소위 모바일 혹은 ‘유비쿼터스’ 환경하 총체화된 ‘삶권력’(bio-Power)에 저항할 ‘삶정치’(bio-politics) 혹은 ‘삶활력’(biopower)의 일환으로 소셜 미디어, 그 중 트윗 문화가 지닌 실천적 긍정성을 살펴보겠다.


소셜 미디어 전성 시대, 트위터의 논리 

6월 지방 선거의 긍정적 효과가 아니더라도, 요새 인터넷 소셜 미디어의 중흥기다. 위키피디아(Wikipedia), 플릭커(Flickr),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eeter), 마이스페이스(Myspace) 등 사람과 사람을 관계맺고 소통하도록 돕는 다양한 미디어들이 출현하고 있다. 단순히 자신의 글을 보여주거나 소비하던 시절을 지나, 가진 것들을 서로 나누고 생산하고 공유하고 연결하여 지속적 유대를 형성하는 미디어 서비스 유형들이 급증하고 있다. 국내에서 소셜 미디어의 일종이었던, 싸이월드나 아이러브스쿨이 커뮤니티 서비스 바깥으로 나가거나 그 바깥과 소통하기에 대단히 어려운 폐쇄적인 ‘섬 구조’를 지닌다면, 최근의 서비스들은 바깥으로 열려있는 공개와 개방성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무엇보다 기술적으로 ‘오픈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라는 개방적 특성을 지니면서, 타 개발사들이 만든 프로그램들과 쉽게 연동해 작동하는 특성을 지닌 것도 강점 중 하나다. 이렇듯 소셜 미디어는 참여, 협업, 공유, 공개, 커뮤니티 등을 특징으로 하면서, 젊은 누리꾼들을 급속하게 끌어모으고 있다.


아이폰 등 스마트폰의 뒤늦은 국내 시장 형성이, 최근 소셜 미디어의 성장을 과열로 몰아가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그 볼썽사나운 면모에는 국내 대기업들의 움직임이 단연 독보적이다. 어지간한 기업들은 구글/위키로부터 새로운 부 창출의 경제학을 학습하고,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네트워크 기업 조직관리학과 소셜 망을 활용한 기업 마케팅학의 재부활을 꿈꾼다. 직장인들은 자기계발의 일환으로 일과후 최신 소셜미디어 신간들을 자발적으로 읽고 토론하며 동료들과 학습 세미나를 수행한다. ‘씨크한’ 우리 사장님과 회장님의 트윗을 따르며, 노사간 평등과 민주적 소통의 가능성에 감격해하고 열광하는 젊은 직원들도 나온다.

 

소셜 미디어들 가운데 트위터를 보자. 영어말로 ‘트윗’이란 쉼없이 새처럼 재잘거리며 말들을 뱉어내는 행위를 지칭한다. 트윗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물이 ‘트위터’란 서비스다. 말 그대로 트위터는 재잘거리는 트윗들에게 소통의 자리를 깔아주는 서비스이다. 이 작은 웅성거림이 이제 한 국가에선 혁명을 돕고, 정치 비리를 들쳐내고, 미국에 흑인 대통령을 만들고, 재난 소식을 공유하거나 완화하고, 지구촌 한쪽의 가난을 함께 나서서 해결하고, 낙후한 선거 정치에 혁명을 이끌 수 있는 울림으로 전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승 모드에 힘입어 최근 트위터 개발자는 마치 스스로 표현 자유의 투사인 듯 의기양양해서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권위주의에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트위터가 다른 기술에 비해 뛰어난 점은 대단히 기동성이 좋고 날렵한 네트워킹 기술이란 점에 있다. 일반 인터넷 단말기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휴대전화의 트윗 기능을 통해 짬짬이 한 개인을 둘러싼 상황의 변화를 즉각적으로 단문을 통해 알리거나, 사건의 진실을 그 자리에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 링크로 올리거나, 특정 사실 등을 바로 공유하는데 탁월하다. 그만큼 모바일 문화 현실에 잘 어울리는 기술이다. 애초 트위터 프로그램의 개발자가 휴대전화용 단문 메시지 서비스 어플리케이션으로 트위터를 개발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다른 트위터의 독특한 점은 사람들간 관계 맺고 소통하는 방식에 있다. 페이스북과 마이스페이스는 주로 현실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간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큰 효과를 지닌 반면, 트위터는 아는 사람들과의 긴밀한 관계들만큼이나 느슨하지만 새롭게 형성되는 관계망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데 적합하다. 즉, 트위터망은 긴밀하게 엮인 작은 인적 관계망들이 서로들간에 느슨하게 연결된, ‘작은 세계망들’의 총합으로 구성된다. 이것이 트윗의 조직 구성 방식의 독특함이고, 이것 때문에 정치인들이 선거 시기 트윗의 연결망의 확산 효과를 보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트윗 문화의 또 다른 국내 흥행의 요인은, 아이폰이라는 모바일 기기의 국내 수입과 맞물린 스마트폰 시장의 발흥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말 아이폰 수입과 동시에 불과 몇 개월만에 한국 사회에 미쳤던 파장은 모바일 시장, 정책의 룰은 물론이고 모바일 문화까지도 바꿀 정도로 대단했다. 그 가운데 소위 ‘공짜’ 무선인터넷의 대중화란 예기치 못했던 모바일 환경 개선이 이뤄져, 어디서든 와이파이 전파가 잡히는 곳들에서 자유롭게 인터넷 접속이 가능해지면서 휴대전화를 통한 트위터 등 어플리케이션 사용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단 트윗팅의 논리를 잠깐 살펴보자. 누군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려면 트위터를 통해 입단 신고를 하고 자신만의 아이콘을 생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본인 확인 인증 절차는 필요 없다.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면 프로필에 적으면 그만이요 싫으면 숨기면 된다. 프로필과 아이콘 이미지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돕기도 혹은 숨기기도 한다. 요 단계까지는 아직 트위터 안에서 홀로된 상태다. 이제 누군가와 재잘거리기 위해선 먼저 원하는 상대의 재잘거림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팔로잉’이다. 이를 위해 그리 큰 노동은 없다. 그저 클릭으로 의사를 표시하면 된다. 팔로잉을 통해서 관계를 맺고 말을 트고 재잘거리다보면 자신 또한 수많은 ‘팔로워’가 생겨남을 인지할 수 있다.

 

  팔로잉과 팔로워의 숫자와 함께 얽힌 이들의 성향을 보고, 한 명의 ‘트윗터리언’이 관계 맺고 있는 다른 이들의 면면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맞팔’이란 상대가 팔로잉하면 자신도 응대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에 연연하는 이들은 보통 트윗을 자신의 선전이나 홍보 수단으로 삼는 부류가 많다. 이들은 팔로워를 늘리는데 주력한다. 그래서, ‘하루 30분씩 7일이면 나도 팔로워 1,000명 거느린 트위터러’란 책 광고 문구가 등장하면서, 소셜 미디어를 인맥관리에 목마른 이들에게 단비인 듯 묘사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언팔’은 팔로잉을 끊는 행위인데, 주로 성향이 다르거나 트윗 공해를 일으키는 이들을 피할 때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리트윗’ 혹은 알티(RT)는 다른 트윗터리언이 올린 글을 다시 올리는 것을 뜻한다. 「시사 IN」의 고재열 기자(@dogsul)처럼 수만명의 팔로워들이 있는 경우, 어떤 이름없는 재잘거림도 독설이 한번 더 리트윗으로 튕겨주면 예상치 못한 파장을 불러오기도 한다. 즉 일종의 도움받기가 가능해지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이들을 만나는 기회를 획득한다.

 

   팔로잉한 트윗 글들은 각자의 ‘타임라인’을 통해 시간순으로 배열된다. 다시 말해, 트윗을 맺은 사람들이 내게 재잘거리는 말들의 기록은 각자가 선호하는 바에 따라 서로 다른 ‘타임라인’의 연대기를 만들어낸다. 누구든 트윗의 140자라는 제한된 글자수를 통해 자신만의 재잘거림을 내면서 타임라인에 편승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구나 김연아, 오프라 윈프리, 김주하와 대등해지는 곳’이 트위터라는 또 다른 광고 문구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대체로 김연아와 같이 알려진 스타급 인물들은 팔로잉이 아예 없거나 적다. 매니저에 의해 팬 관리 차원에서 이뤄지거나 현실의 문화 권력 관계가 그대로 트윗에 옮겨오기 때문이다. 


  선거 시기 모바일 행동과 촛불 세대의 공백

실시간 국내 트윗 인구를 조사하는 오이코랩(oikolab)에 따르면, 한국에서 트윗을 하는 인구는 8월 1일 현재 100만명을, 트윗의 수는 200억개를 넘었다 한다. 지방 선거가 있기 바로 전 달인 5월말에 50만명이었으니, 불과 두 달여만에 곱이 늘었다. 최근 스마트폰의 대중화 추세와 언론 등의 트윗 문화 열풍 때문이란 진단이 나온다. 6월 지방선거 때도 그랬지만, 아직까지는 트위터 이용자들이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해 외곽이나 지방으로 나가면 트윗을 통한 선거 투표 독려와 모바일을 통한 정치 행동은 낯선 얘기일 수 있다. 그래서, 트윗족은 아직은 선도적 신기술 이용 집단으로 통하는 ‘얼리 어댑터’들에 해당한다. 실제 이들은 연예, 스포츠, 예술, 정치, 학술, 정보통신 기술, 블로그 등 현실 영역에서 의견을 주도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보면 야당이나 여러 시민단체들에 근친성을 갖거나 비슷한 성향의 트윗터리언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초기 기술 수용자의 정치적 성향이 대체로 상식의 현실 감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트윗 문화는 아직은 건강하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누리꾼들의 재잘거림을 막는 행위는 다름아닌 집권 유력 정당이나 스타급 정치인들 보다는 힘없는 약소 군소 정당의 정치인들이나 주체적 시민들의 말길을 봉쇄하는 효과를 지닌다. 즉, 트윗을 불허한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나름 깨어있는 여론 선도형 집단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엄포에 해당한다.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트윗팅조차 권력이 허하는 ‘관용’(tolerance)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정치적 도발 행위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서도, 선관위와 정부가 불법 선거운동의 일환이라 하여 트위터를 틀어쥐려 하면서 우리는 트위터 탄압국의 오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현실의 억압의 결과는 오히려 디지털 세대들을 주축으로 폭넓게 트윗을 통한 투표 독려의 긍정적 효과로 기능했다. 여기서 ‘디지털 세대’가 누구인지를 좀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트윗 행위를 소위 세대론에 기초해 보자면, 이들 디지털 세대는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소비 문화에 친화적이고 새로운 디지털 기기와 문화에 민감한 ‘포스트 486세대들’이다. 보통 이들 세대의 범주에, X세대/신세대와 IMF세대 (소위 ‘2030세대’), 그리고 최근의 ‘광장세대’이자 촛불세대 (10대)가 혼재돼 있다. 무엇보다 6월 지방선거는 2030세대를 주축으로 극히 일부의 촛불세대가 트윗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선거 관련 적극적 투표 행위를 독려하는데 나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세대별 구분 표 참조). 이와 같은 필자의 단정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고등학생이나 현 대학 1, 2학년 학생들로 구성되는 촛불세대가 모바일 정치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구입할 수 있는 재정적 여건이 미약했다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즉 과거에 보여줬던 촛불세대의 발랄한 정치 참여적 지향성과는 무관하게, 세대적 지불 능력의 부족이 이들이 소셜 미디어의 관계망을 활용하는데 별 동기를 유발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올해 6월경 국내 트위터 인구의 연령별 조사를 보더라도, 2030세대에 비해 촛불 세대를 위한 모바일 정치행동의 물적 토대가 아직은 무르익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 소수 얼리 어댑터들의 기술 수용 그룹들을 제외하고, 트위터 인구를 연령대로 따지면 20대와 30대가 각각 28%와 53%로 8할 이상이 이들 연령대에 몰려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0대와 50대는 2%대에 머무르면서, 영미권의 50대 이상 19%와 10대(13~17살)의 7%에 비해서도 턱없이 낮은 비율을 보인다. 아이폰, 갤럭시S 등 스마트폰의 보급과 맞물려 관심은 있으나 기존의 약정 기간 해지 부담이나 스마트폰의 비싼 가격대로 인해 구입을 포기했던 10대 학생들과 대학 초년생들이 많았던 점은 촛불세대의 활동 부진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상 트위터의 접속은 휴대전화가 없어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기동성과 즉시성을 따지자면 무선인터넷 접속이 보장되는 스마트폰의 경우가 가장 최적화된 이용 조건이라 봐야 한다. 선거 이후의 시장 상황을 고려해보면, 촛불세대의 기술 장치로부터의 소외는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아이폰4 등 새 모델 출시로 가격대가 반으로 할인되는 등 전반적으로 스마트폰 가격 하락으로 그 소유 연령대가 더 낮아질 전망이다. 이 점에서 향후 스마트 모바일 기기를 통한 정치 행동에 있어서, 다른 어떤 세대보다 촛불세대의 재기발랄함이 훨씬 빛을 발할 거란 예측이 가능하다.
 

<새로운 기술 세대와 표현형식의 차이 구분>

 

 


세대 명명법

기술 세대 명명법

출생연도

표현 형식

대표 매체

대표 의제

성 격

 신세대/

신세대/

X 세대

디지털 세대

70년대(1973~78)

게시판/ 온라인 동호회

피시통신/홈페이지

- 2000년 총선, ‘인터넷 질서확립법’

- 2010년 6월 지방선거

개별적, 다소 이념적, 낭만적

IMF세대/ ‘88만원’세대

N 세대

(인터넷/

신인류 세대)

80년대(1978~88)

시민/ 1인 온라인 미디어

포탈 서비스/ 온라인카페/ 블로그

- 2002년 16대 대선

- 2004년 총선, 노전대통령 탄핵 정국

실용적, 온라인 지향, 동아리적, 협업적

촛불세대/광장세대

모바일 세대

(웹2.0 세대)

90년대(1988~ )

웹2.0/ 모바일 미디어

다양한 이동형/ 휴대형 매체 활용

- 2008년 광우병 파동과 촛불시위

온-오프 연동, 개방적, 참여적, 이동적



촛불세대에 대한 미래 모바일 정치에 대한 기대감과 별도로, 결국 이번 지방 선거에서 야권 도약에는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신세대와 IMF세대라는 듀오가 존재했다. 무엇보다 현실 정치 지형과 관련해서, 고용 불안 사회(precarious labor society)를 그 특징으로 삼는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2030세대에 미치는 경제적 악조건의 상황들이 장기화되고 현 이명박 정부에서 극대화하면서, 아직 사회진출을 멀리 앞둔 촛불세대 보다는 현실에서 극적 탈출구를 원했던 2030의 기술 친화 세대들의 소셜 미디어 활용을 통한 투표 독려가 먹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알려진대로 보수-진보의 이념적 지형보다는 실용적이고 반권주의적이고 생활 속 실천을 강조하는 세대들이다. 특히 IMF세대는 고용 안정에 대한 기대로 뽑았던 경제 대통령에 스스로 뒤통수를 맞으면서 이번 지방선거에서 트윗들을 통해 지지 정당의 선호도를 바꾸고자 하는 정치 행동을 고무했고 일부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 


트위터의 문화정치적 실험과 촛불세대의 미래

온라인 공간은 지방선거 이전에 이미 실명 공개로 불구화된 댓글 문화에다가 인터넷 주소(IP) 추적으로 험악해진 게시판 환경에 모바일 인터넷 세대들이 말과 논쟁의 생동감을 잃던 차였다. 6월 지방선거는 촛불 정국 이래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던 누리꾼들의 이바구들에 다시 생명의 불꽃이 피어났던 경우다. 물론 트윗 또한 권력의 드잡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선거 국면에서 공권력은 선거법 위반을 들이대면서 정치적 이슈로 재잘거리던 입들에 재갈을 물리려 했다. 그러나, 자신과 생각이 비슷하거나 뜻이 맞는 이들로부터 실시간으로 전하고 퍼뜨리는 이 시끄러운 재잘거림들의 활력을 막기에, 현 권력은 이 생경한 기술과 문화 디자인에 대한 학습이 부족했다.


트윗의 재잘거림이란, 확성기로 내는 소리가 아닌 말에서 말로 퍼지는 리트윗과 팔로잉으로 엮어진 자생적인 울림이다. 140자의 형식적 제약 속에 정치적 심각함을 나르고 논쟁을 촉발하긴 어렵다. 주로 특정 사안에 대한 즉흥적 속풀이와 때론 정제된 단상들을 올리거나 서로의 생각에 대한 공감에 그치기 쉽다. 2030세대가 실어 날랐던 트윗과 리트윗의 울림들은 사실상 직접적 투표 독려에서도 힘을 썼으나, 짧은 단문 속에 서로들 감흥하면서 만드는 현실 유감의 성찰적 탄식들에서 더욱 더 빛을 발했다. 게다가 단문의 글들 바깥으로 하이퍼링크와 이미지, 동영상 등이 자유롭게 연결되면서 형식적 제약을 거의 무위화하고, 현실 정치 기획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역할을 다층적으로 수행했다. 즉 트위터는 정치적 선동이나 광고로서의 면모보다는 다른 어떤 수단보다 간결하고 조용히 움직이나 유연하고 바깥으로 트임이 끝없이 나 있는 성찰적 지저귐과 상호 감흥의 세계라 볼 수 있다.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 규정에 의한 트위터에 대한 처벌 조항은 그래서 대단히 임의적이다. 예를 들어, 선관위는 선거운동 기간 전에 각자의 타임라인을 이용해 특정 정치 후보자와 관련된 내용에 대한 리트윗 행위 자체를 금했다. 트윗을 광고성 집단 이메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살포되는 광고 메일과 달리 트윗의 타임라인은 강제적 소구력이 없는 상호 재잘거림의 목록이란 점에서 다르다. 또한 이메일의 개인 정착지적 속성과 달리 트윗들의 흘러간 타임라인은 거슬러 공들여 읽지 않으면 찾기조차 힘들다. 그만큼 정치적 선동 효과가 적다.

 

[월간 조선] 2010년 7월호에 변희재가 대표 선수로 지방선거 패배의 원인 분석을 한 글, 「‘어르신’은 몰랐던 지방선거의 이면 - 승패 가른 트위터와 뉴미디어」를 보면 트위터에 대한 극우들의 재밌는 사고가 발견된다.

2010년, 지방선거의 미디어 환경은 2년 전보다 격차가 더 크게 벌어졌다. 기존의 포털[미디어다음-아고라]과 친노좌파 인터넷매체 이외에 ‘트위터’라는 다단계식(式) 선동형 매체가 가세한 것이다. 정치와 별 관계없어 보였던 IT 전문매체와 연예매체가 합류해 결정적인 사안이 등장할 때마다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와 관련한 대다수 미디어의 중심 역할은 30대 언론인들이 주도한 것으로 추측된다.
[...]
트위터라는 매체 자체의 영향력보다는 트위터로 상징되는 젊은 층의 정치 트렌드 변화가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분석이 최근 힘을 얻고 있다. 김제동 등 연예인들이 잇달아 트위터에 자신의 투표소를 배경으로 찍은 ‘투표 인증샷’을 올리면서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급속히 유행으로 퍼져 나갔다. 그 이전부터 20대 청년 조직들은 20대와 30대 투표하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여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쿨’하다고 평가받던 흐름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문화로 바뀔 조짐이 보였었다. 이를 상징화시킨 문화가 ‘투표 인증샷’ 이고, 최첨단 매체로 과대 포장된 트위터를 통해 젊은 층의 투표행위를 새로운 패션 트렌드로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골통 극우에 음모론까지 오염된 논의라 이를 논구할 가치가 없다고 한켠으로 제낄 수도 있겠으나, 다만 트위터에 대한 변씨의 평가를 주목해 보자. 우선 그가 트위터를 ‘다단계식 선동형 매체’로 보는 것은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의 근거 논리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소셜 미디어에 대한 극우들의 정치적 두려움의 극화된 과잉 반응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선거 당시 4만여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노회찬(@hcroh) 의원이 한번 트윗을 띄우면, 적어도 수만명의 팔로워들이 이를 받아 수백건의 리트윗을 올리며 반응한다. 리트윗을 통해 내는 재잘거림의 반향들은, 또 다른 관계망을 타고 거의 대부분의 국내 트윗터리언들에게 전달된다. 겁이 날만하다. 그러나, 아직 트윗의 공간에서 이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요, 외려 소수 정당의 정치인이 구사할 수 있는 여럿 중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받아들일 일이다. 이조차 선거법으로 불허하면 소수 정당의 소통 능력을 불구화하겠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변씨의 트위터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평가는 뭔가 좀 색다르다. 선거 시기 ‘투표 인증샷’을 ‘노빠’들의 정치적 감수성 변화의 징후로 읽고 있는데, 좀 뒤늦은 감이 있지만 트위터로 매개되는 디지털 세대의 스타일 정치의 맥락을 조금은 간파한 듯하다. 그는 우익 독자들에게, 무엇보다 대중문화 영역의 정치화를 막기 위해서 시장 논리로 밀어부쳐 이를 순화시키고, 뉴미디어도 “벼락치기가 아닌 평소 실력”으로 미리 미리 준비하여 선거전을 치러야한다고 조언한다. 트위터에 대한 그의 평가가 과잉 해석된 측면도 있지만, 그의 언설을 통해서 보면 보다 본격적으로 대중문화 영역과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 공간에 자리를 트려는 권력의 촉수를 쉬 감지할 수 있다.

 

다가올 포획의 논리을 인정하더라도 트윗 문화의 열풍, 특히 생산적 혹은 긍정적 담화 생산의 출구로서의 소셜 미디어의 역할론은 당분간 꽤 오래 끌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트윗터리언들이 모여, 트윗을 통해 이어받기 소설을 쓰고, 트윗을 통해 모임을 만들고, 선거자금 캠페인을 벌이고, 혹자들은 정치 논쟁을 벌이고, 트윗 단문을 모아 책을 쓰는 세상이 오고 있다. 소통과 관계의 새로운 변화요 진전이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모순들의 결절점 마디마디에서 신세대 누리꾼들이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벌이는 문화 행동과 자율적인 말의 게릴라전에서 새로운 표현 매체의 가능성을 십분 활용했던 경험이 있다. 지방선거에서 활용된 트위터 또한 누리꾼들의 풍부한 미디어 경험의 축적이란 연속성 위에 놓여있음과 동시에 2030세대 유권자들의 일상의 정치를 위한 의사표현 형식으로 기능했음을 확인한다. 이번 선거 시기 트위터의 활용은 사실상 모바일 환경에 기초한 문화정치적 행동주의의 확장적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덧붙여, 2030세대를 잇는 ‘촛불세대’들이 그들만이 지닌 문화적 재기발랄함으로 아이폰 등 스마트폰으로 갈아타면서 앞으로 본격화될 ‘모바일세대’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은 이제까지 특유의 인터넷 문화를 만들어냈다. 누리꾼들, 특히 ‘486’ 이후의 세대들에게 번개 모임, 게임방, 블로그, 싸이질, 댓글, 펌, 아햏햏, 포샵질, 유시시, 온라인 카페와 클럽, 인증샷 등은 새로운 놀이의 소재들이자 문화정치의 공작소였다. 이들을 통해 느슨하지만 기존의 전통적인 사람간 관계맺기 (인맥관리)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소통과 만남의 자유로운 출구들을 만들어냈다. 표현 수단들 각각의 효용값은 다 달랐지만, 이들 각각의 소통로와 문화들은 누리꾼들의 서로 다른 개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장이 돼 왔다. 더욱 진전되고 긴밀한 형태로 다른 놀이의 소재들과 함께, 뉴미디어는 신권위주의 정치 상황의 희극적 상황들을 드러내고 전면화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인터넷을 통해 아래로부터 선출한 우리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를 되새겨보면, 이제 새로운 기술에 열광하는 일에 신중할 필요가 있음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어느 세대들에서 보다 문화적 감성이 풍부한 촛불세대로부터 제 2, 3의 모바일 행동을 통한 일상 혹은 생활 정치의 가능성에 더 큰 기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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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혁신과 모빌리티 - ‘알 권리’ 신장을 위한 정부의 문서혁신이 돼야

문서혁신과 모빌리티 - 일상, 기업, 정부 영역에서 확산되는 새로운 혁신의 디지털 문화

이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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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문서의 발달은 관료주의의 직접적 산물이다. 서구 유럽의 17, 18세기 고전주의 시대에는 정부의 공문서에 서명을 첨부하면서 그 권위를 보증받기 시작했다. 권위의 진정성을 표시하는 방식은, 무명으로 만든 종이 바탕에 심볼을 각인하여 만든 고유의 형식지, 봉인, 그리고 서명을 통해서였다. 무명지에 각인된 심볼과 타이틀은 소속 기관의 권위를, 서명은 그 권위의 출처를, 봉인은 문서에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을 정하는 표식이 되었다.

 

형식화된 공문서를 통한 국가 관료제의 확대는 시장의 기업 조직에도 참고 사항이 되어 영향을 미쳤다. 식민주의와 전 세계적 상권의 형성과 자본의 글로벌한 이동으로 말미암아 문서혁신은 점차 기업에 주도권을 넘기게 된다. 즉 기업 조직의 거대화와 글로벌화로 인한 업무 처리의 효율성이 관건이 되면서, 그리고, 80년대 극소전자통신혁명으로 말미암아, 기업들은 인트라넷 등 원격 네트워크를 통한 문서 결제 시스템의 도입을 이미 폭넓게 추진했다. 크게 보면, 근대 이래로 효과적 업무 처리를 위해 정부, 기업 할 것 없이 문서 형식은 그야말로 폭넓게 적용되어왔고, 때론 필요 이상의 문서 형식들을 만들어내면서 과도한 관료주의의 폐해를 낳기도 했다.

 

한국의 상황을 보자면, 사실상 현대적 의미의 문서혁신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전자정부’(e-government) 프로젝트 덕택이다. 이는 김대중 전임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정책 과제의 핵심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정부 업무의 관료적 효율성 재정비, 대민 서비스 강화, 종이문서 낭비와 비용 절감 등의 효과 때문에 시작된 논의가 문서혁신이었다. 최근의 문서혁신 논의는 이를 한 단계 업그레드하여 진전되고 있다. 즉 종이문서의 감축(페이퍼리스 환경 구축)을 통해 그린 IT 환경을 구현하자는 맥락을 넘어서서 모바일 업무 환경을 구축하여 생활의 전면적 변화를 도모하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그 혁신의 영역은 크게 보면, 우선 정부 영역과 몇몇 국내 기업들이 주도하는 모양새다.
 


일상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의 문서혁신 문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일상을 영위하는 오늘날 현대인들을 보자. 특히 젊은 세대들의 디지털 문화를 들여다 보자. 전자 문서를 읽고 수업에 임하거나, 과제 제출을 프린팅하는 대신 파일로 온라인 공간에 올리는데 대단히 익숙하다. 필서하기 보다는 교수 강의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내용을 보면서 강의 노트를 만든다. 필자의 경우도 어지간한 학술 논문, 보고서, 뉴스 기사를 전자문서 읽기 형식으로 저장해, 노트북의 키워드 찾기 기능으로 중요한 관련 문서들을 원하는 부분은 뽑아서 읽고 참고하는데 대단히 익숙해져 있다. 예를 들어, 포탈이나 블로그를 통해 중요하다고 보는 기사 콘텐츠는 그 자리에서 전자문서 형식으로 저장하거나, 오픈 색인 프로그램을 통해 아카이브(archive)화 작업을 수행한다.

 

스마트폰, 아이패드, 넷북, 아마존의 이북리더기인 킨들의 대중화는 결국 현대인들에게 종이책을 찾아 읽는 행위보다도 모니터를 통해 문서들을 대하는 시간을 더욱 늘리도록 유도하고 있다. 달리보면 이는 현대인들이 책을 통해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식과는 다른, 개인 이동형 매체에 저장된 수많은 전자 문서들을 빠른 시간내에 정확한 정보를 불러들여 참고하고 인용하는 새로운 지식이용 방식의 변화된 문화에 맞춰 문서혁신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안과 효율에 방점 둔 기업의 문서혁신

 

현대 기업들로 가보자. 이들의 입장에서는 문서혁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개인의 차원과는 다른 목적들이 존재한다. 최근 위키피디아, 플릭커,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의 대중화와 발전은 기업에도 대단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서혁신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정보/지식 공유와 협업 구도를 통한 기업 효율성의 원리를 강조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자율적인 방식으로 좀 더 개방된 환경하에서 기업내 정보를 공유하거나 함께 축조해나가는 관계와 소통의 소셜 문화가 확산되면서, 문서혁신에서도 이를 응용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이 늘고 있다. 사기업들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협업과 공유의 원리를 극대화하면서도, 불순한 외부자의 침입을 미연에 막거나 내부인력 중에서도 고급 정보에 대한 정보접근 권한을 차등화하면서 문서혁신이 이뤄져야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지사나 오피스 등을 분산화하여 여러 곳에 소유한 기업이나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분산된 정보를 중앙에서 관리하는 통합 서버의 기능이 점차 중요해진다. 중앙 서버의 관리 모드는 통제의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얻을 수 있으나, 그 서버가 외부 침입에 의해 정보가 누출되거나 바이러스 등에 의해 오염될 경우 그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이와 같은 위험성에 대한 사전 대비가 있다면, 통합 서버에 의한 문서 저장은 페이퍼리스 환경 구현은 물론이요 어디서든 가능한 유비쿼터스(Ubiquitous) 업무 환경 (24시간 모바일 오피스)을 가능하게 한다. 언제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문서 업무 프로세스를 가시화하여 여럿이서 서로 협업해 과제를 수행하거나 검토할 수 있는 환경을 쉽게 구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U-모빌리티에 기댄 문서혁신 환경은 문서 작성과 프로젝트 수행 시간을 단축하고 수행 능력을 배가하는 중요한 방법일 수 있다.
 

 

‘알 권리’ 신장을 위한 정부의 문서혁신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지막으로, 정부의 문서혁신을 살펴보자. 기업의 입장에서는 공유되는 축적 정보가 지식 자산이 되면서 이에 대한 보안과 관리가 점점 중요하겠지만, 정부 문서혁신의 관건은 오히려 축적 정보에 대한 개방과 접근의 평등성에 있다. 사기업과 달리 정부의 역할은, 대민 서비스와 알 권리 보장이라는 국민의 기본권이 항상 상위임을 유념해 둬야 한다. 그래서, 특수한 국가 기밀 문서의 경우에는 보안과 관리의 측면이 강조되겠지만 일반적으로 정부 문서 혁신의 방점은 U-모빌리티 환경내 비차별적 전자문서 접근 보장이 기본이 되어야할 것이다. 정부 정책 문서들 혹은 관련 대민 정보들에 대해서 다양한 고정형/이동형 전자 미디어들을 가지고 어디서든 접근이 가능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앞으로 정부 문서혁신의 관건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시민들의 생활 반경 어디서든 접근도를 높이는 ‘U-모빌리티’ 가용 능력이 점점 중요해진다.


   그러자면, 사기업의 지적 재산권 등을 통한 사내 중요 문서 보호와 달리, 정부 문서에 있어서는 시민의 자유로운 이용 권리와 관련한 공공 소유 권한을 분명히 정의해야 할 것이다. 특히, 다양한 정부 기관들의 국책 업무를 대행하면서 정부 문서를 관리하거나 새롭게 생성하는 유관 기관들이나 단체들과의 저작권 문제를 분명히 해서, 시민 공유 정보에 대한 소유권 문제를 이들에 일임하는 우를 범하거나 일반인들의 이용 접근에 불편함이 있어선 곤란하다. 특수하게는 문서관리의 통합 서버나 문서 데이터베이스 등에 대한 관리를 일부 외부업체에 위임하면서 시민들의 접근도를 떨어뜨리는 상황을 막아야한다. 예를 들어, 미 연방정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연방 문서 정보들을 혁신과 효율 관리란 명목하에 몇몇 지정된 사기업들에 관리 업무를 위임하면서, 국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해야할 공공 정보의 유료화를 부추키게 되고 결국엔 시민들의 알권리를 후퇴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낳기도 했다.

 

결국, 문서혁신이란 화두는 정부 기관내 관료주의적 효율성의 개선이나 사기업 내부의 조직 혁신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부와 국민이 맺는 문서 시스템의 혁신에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봐야 한다. 시민들의 정부 문서 이용의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넘는 U-모빌리티 강화의 페이퍼리스 환경 추구, 통합 서버에 의한 공공 문서들의 체계적 관리, 문서 접근에 있어서 기술적 용이성과 개방성 등이 조화롭게 이뤄진다면, 이것이 바로 시민들이 원하는 정부 문서혁신의 방향이리라.

 

(지역정보화 20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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