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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미디어 문화정치를 사유하라

 

중앙대대학원신문 2010. 11.

 

기술·미디어 문화정치를 사유하라

 

이광석

 

한국 사회에서 기술 혹은 미디어 결정론이 이상기후식으로 번성하거나, 맥루언과 같은 미디어 생태학자들을 기술결정론자로 생각해 도매금으로 비난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학계에서는 누군가 기술을 중심에 놓고 얘기하면 ‘기술주의자’란 혐의나 딱지를 얻기 일쑤였다. 이제와 보면 기실 이도 일종의 일화인 듯싶다. 예나 지금이나 기술·미디어 논의 생산과 대중화의 주류는 진짜배기 기술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인터넷이나 디지털 발전의 자문역으로 임명돼 정부 관료들의 우상이 된, 앨빈 토플러나 피터 드러커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떠올려 보라. 맥루언은 기술주의에 경도된 이들 미래학자들과 동종의 이론적 선구자로 추앙받다가 뒤늦게 비판적 미디어 생태학자로 재조명받은 경우다.

 

플루서나 베냐민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들의 전집 번역 출판이 좀 늦었다 뿐이지, 만약 그 시기가 얼추 90년대 중반쯤이었다면 맥루언처럼 기술주의자의 오명을 뒤집어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림-텍스트-테크노 코드의 세 가지 커뮤니케이션 코드로 인간 상징체계의 진화하는 속성을 설명하는 플루서의 방식은 기술주의 혹은 결정론의 혐의를 쉽게 받을 수 있다. 또한 베냐민이 시각매체에 의해 형성되는 탈인간화된 세계가 인간 지각구조에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기술·미디어의 가능성을 살핀 것 역시 충분히 비슷한 기술주의의 굴레를 뒤집어쓸 수 있다.

 

흔히 ‘낙인’찍는 방식으로 보자면, 기술·미디어 결정론은 기술과 미디어가 한 사회와 문화의 발전을 추동하고 이끈다고 보는 관점이다. 반대로 사회적 구성론이나 비판적 기술론 등은 한 사회와 문화가 기술의 형성과 구성에 미치는 구조적 영향력을 강조하는 관점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들 두 극단의 시각들이 포개지는 접점에 놓인 학자들의 다채로운 주장들인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들의 관점은 시대에 따라 양자택일로 간단히 무 자르듯 한쪽으로 구겨넣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맥루언이 그 대표적 희생양이다. 

 

기술·미디어 사회구성주의의 새로운 시도들

 

기술·미디어의 사회적 구성주의가 좀 더 다층적인 결을 보여줄 수 있게 된 데는 과학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덕이 크다. 그는 기술 디자인 자체가 사회와 문화 형성에 미치는 역할론을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즉 행위자 대신 ‘행위소’ 개념을 사용해 ‘비인간’적 요소인 기술·미디어를 엄연한 주체 구성의 일부로 추가, 기술 진화의 구조적 해석을 폭넓게 한 측면이 있다. 라투르의 관점은 기술과 사회적 맥락이 주고받는 영향 관계를 밝히는데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논의로 볼 수 있다. 우리는 기술 혹은 미디어가 사람에게 말을 걸고 그것의 디자인이 인간의 행위나 문화를 바꾸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예컨대, 어떤 곳에 어떤 특정의 교통 신호 체계(신호등, 과속 방지턱, 경고문, 감시카메라, 경찰의 등장 가운데 하나 혹은 겸)를 설치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인지 방식과 태도에 미치는 영향은 달라진다. 이처럼 기술·미디어 발전의 논리를 규정하는 맥락의 규정성과 함께 그 역으로 기술·미디어가 인간 의식과 행동, 넓게는 문화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무시하기 어렵다. 

 

라투르에 의해 기술·미디어가 행위소로 등극된 것과 함께, 기술·미디어 디자인이 품고 각인하고 있는 사회·문화·인종·계급·성차 등의 모습을 구체적 해석의 지평으로 삼는 논의 또한 사회적 구성론에서 이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쥬디 웨이크만의 ‘테크노페미니즘’ 개념은 계급의 문제를 기술 해석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기술내 권력의 각인화 과정에 있어서 보다 다양한 층위들을 살피려 한다. 생산 기술(노동 과정내 젠더 생산), 재생산 기술(생명 재상산의 가부장적 동학), 가내 기술(가정내 가전기기들의 젠더 리모델링), 젠더화된 공간 등을 살피면서, 계급과 젠더를 중심으로 한 기술을 둘러싼 중층의 사회 문화적 결정 요인들을 살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성주의에 기댄 근거없는 기술낙관론(속칭 ‘사이버페미니즘’의 부류)이나 조건반사적으로 기술을 남성성과 동일시하여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에코페미니즘의 부류와 결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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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만이나 라투르 등의 사회적 구성론 혹은 기술과의 상호주체성론은 다양한 층위에서 기술·미디어-사회간 조응의 방식과 지형을 밝히는데 업적을 쌓아왔으나, 단순 해석을 넘어 지배적 기술·미디어 디자인을 뒤엎는 탈주와 저항의 기술·미디어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 점에서 마르쿠제의 제자이자 비판적 기술철학자인 앤드류 핀버그의 ‘기술 코드’란 개념은 상당히 유효해 보인다. 기술에는 계급·인종·성차·당대 사회·문화 요인 등이 그 디자인 속에 잠입하고, 한 사회의 법과 정책은 기술에 면죄부를 발급한다. 핀버그 논점의 중요성은 지배의 논리만이 코드의 디자인을 단순 압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애초에 억압의 계기를 가진 기술 디자인도 정해진 이용 매뉴얼을 벗어나려는 다른 길로의 가능성들에 항상 열려 있다. 그래서 핀버그의 기술 코드는 누리꾼들에게 권력의 자기장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역설계’의 실천을 부추긴다.    

 

닫힘과 열림의 ‘기술 코드’적 양가성은 우리에게 자본 권력의 코드화를 경계하고 그 코드로부터 탈주하고 저항하는 계기들을 포착하도록 이끈다. 대부분의 기술·미디어 철학이나 사회학이 그것의 영향력에 대한 사후 해석에 치중하는 경향에 비해 핀버그의 접근법은 지배 코드를 깨는 자발적 실천을 강조한다. 기술·미디어가 사실상 현실에 대한 이해를 막는 장애물로 등장하는 오늘날, 가상의 현실에선 오히려 기술·미디어 코드를 변형해 그 자유로운 소통과 표현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문화정치의 기술·미디어 철학적 사유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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