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저작권 과잉 시대의 카피레프트 문화정치

저작권 과잉 시대의 카피레프트 문화정치

 

- 『황해문화』2009 겨울호

 

이광석 (@txmole)

자본주의의 디지털 국면에서 정보, 지식, 그리고 문화는 기존의 물질 재화의 고전적 운동 방식을 허물고 있다. 이제는 토대의 상부구조에 대한 영향력이 문제가 아니라, 상부구조에 머물렀던 문화가 토대 쪽으로 무너져내리며 ‘문화의 산업화’ (the Industrialization of culture)로 탄생하고, 다시 ‘산업의 문화화’(the culture-ification of industry)를 재반복하는 모양새다 (Lash & Lury, 2007, p.9). 정보와 문화는 저작권 등 지적 재산권의 합법적ㆍ‘체계적 식민화’(Wittkower, 2008) 과정을 겪는다. 이미지와 꿈이 사회, 경제의 중심 엔진이 되는 ‘드림소사이어티’에서는 제품 위주의 마케팅에서 이미지와 향유 문화를 파는 행위가 중심에 놓인다 (서진석, 2007, 16-17쪽). 인류애의 철학과 비전은 비자 등 신용카드 회사들이 주도하는 글로벌 디지털 소비문화로 둔갑한다. 개성과 유행은 밀라노와 파리의 패션 도시와 함께 노키아, 모토롤라, 애플, 삼성전자의 디자인실로부터 주조되어 나온다. 현실 속 조중동 족벌신문의 뉴스 생산의 바통을 네이버와 야후가 이어받아 황색 포탈 저널리즘으로 완성한다. 구질구질한 재래시장 좌판들을 뒤집어엎어 홈쇼핑과 미니 유통체인들이 자신들의 편리함으로 도배한다. 인용, 트랙백, 혼성모방, 변용, 샘플링, 콜라주의 문화는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으로 낙인찍힌다. 루카치(Lukács, 1923)식으로 보자면, 이 모든 현상들은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모든 관계들을 교환 가치화하는 ‘(사)물화’(Verdinglichung)의 새로운 디지털 국면이다.


처음부터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상품시장의 확장에 의해 유지되고, 상품화 과정은 오늘날 물질재뿐만 아니라 정보와 문화 영역에까지 걸쳐 확대된다. 이 글에서, 필자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저작권과 같은 강제적 재산권화 과정이 없이는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자본주의 시장의 이윤원에 크게 변화가 왔다고 본다. 우리의 문화산업 진영도 ‘한류’ 등을 등에 업고 저작권 소유자의 지배적 권리를 아시아권에 행사하면서 할리우드의 아류적 맛에 중독된 지 오래다. 국내의 시장 행위자들은 ‘아시아적 가치’란 주술을 통해 지역에서 문화 영역의 (재)영토화를 통한 이윤 창출의 기제를 형성하려 하면서, 국내외 저작권법 적용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글은 저작권 과잉의 문화가 만들어내는 현실 유감으로 쓰여졌다. 문화적 향유와 생산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이용자 혹은 시민의 권리가 소멸하는 현실에 대한 가능한 다른 길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우선 코미디같은 저작권 문화의 몇 가지 사례들로 시작한다. 이 사례들로부터 자본주의의 디지털 국면에서 지식생산의 사유화 방식의 미래 경향성을 볼 것이다. 그 경향성에서 보면, 생각보다 시장 권력의 변화 방식은 꽤 세련되고 공고하다고 본다. 예컨대, 마르크스가「공산당선언」에서 “모든 굳건해 보이는 것들이 대기 중으로 녹아 사라져버린다”고 짚었던 것처럼, 무엇이든 삼키는 가공할 괴물의 모습을 현대 자본으로부터 확인한다. 흔히들 열광하는 누리꾼들의 ‘집단지성’ 혹은 ‘창발성’,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저항성’을 상업화하여 포획하는 자본의 힘들을 우려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전망이 자본에 대한 투항으로 비춰져선 곤란하다. 현단계 자본의 능력에 대한 판단이 대안의 문화정치적 전망에 누가 될 순 없다. 냉엄한 사태 파악이 대안의 전제가 된다.

 

필자는 자본에 의한 지식의 사적 전유에 대한 대항의 논리로 '카피레프트' 개념을 중심에 둔다. 무엇보다 이를 통한 실천을 비관의 현실을 깨는 시작점으로 삼으려 한다. 역사적으로 과감히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면서 지식 사유의 경향을 비판했던 아방가르드 예술과 미디어 행동주의의 사례들을 근간으로 해서, 오늘 우리 현실에서 정보와 지식의 사유화를 역전할 수 있는 카피레프트적 가능성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저작권 과잉의 현실유감

우리의 저작권 문화 현실로 와 보자. 한 아이의 엄마가 어린 딸아이의 재롱이 혼자보기에 너무 아까워 이를 캠코더로 담았다. 기술적으로 한 것이라곤 집안 거실에서 가수 손담비 ‘미쳤어’ 음악을 배경에 맞춰 아이의 춤추는 모습을 찍었을 뿐이다. 곧이어 이를 그대로 UCC (손수제작물)의 형태로 웹에 올렸다. 그런데, 음원저작권협회로부터 아이의 엄마가 게시물을 올렸던 그 포털업체에 경고가 들어왔다. 유명 가수의 음원을 함부로 도용했기에 이는 저작권 위반이란다. 만약 게시물을 삭제치 않으면 법대로 조처를 취하겠다는 엄포가 들어왔다. 그러자, 포털업체는 얼마 지나지않아 아이의 엄마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스르르 게시물을 삭제했다. 마치 생일상 앞에서 아이의 재롱을 찍던 부모의 캠코더를 누군가 나타나 강제로 빼앗아 녹화 테이프를 바닥에 내팽개치는 형국이다. 몇년전 이와 거의 흡사한 일이 미국에서도 있었다. 당시에 이를 두고 정말 해외 토픽감이라 여겼는데, 그같은 일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재연출된다.


두 번째 이야기. 내가 잘 아는 출판사 사장님의 기막힌 사연이다. 국내 출판사 대부분이 언론사나 잡지사 등에 신간을 위한 자체 제작 홍보용 기사를 뿌린다는 것쯤은 많이들 알고 있다. 출판사에서 보낸 맞춤형 글에 자신의 글 몇 줄을 가감해, 힘들여 읽지 않고도 희한하게 서평을 써댄다. 그리곤 법적으로 그 기사에 대한 저작권은 언론사가 갖는다. 필자가 면식이 있는 영세한 출판사의 사장은, 기획도 하고 책도 만들고 번역도 하고 거의 모든 일을 홀로 자들은 받아서 서평을 썼다. 의당 책 선전도 할 겸, 그이는 자랑스럽게 활자화된 서평 기사를 출판사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언론사를 대리하여 한 변호사 사무실로부터 소송이 들어왔다. 저작권자인 언론사의 동의 없이 감히 글을 무단으로 올린 죄란다. 불쌍한 사장은 법적으로 붙어봐야 이길 수 없는 싸움, 그저 벌금을 물고 물러섰다 한다.

 

세 번째 이야기. 2008년 6월경이다. 거리는 한창 촛불시위로 후끈했던 때다. 당시 조용히 나우콤의 문용식 대표이사가 구속됐다. 이유인즉슨 누리꾼들의 ‘불법’ 파일교환 행위에 대한 방조죄였다. 온라인 서비스 사업자의 중립적 지위와 역할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갑작스런 대표 구속은 그 정도를 넘어섰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대단히 양심적 기업인으로 정평이 나있던 이를 불법 파일교환 방조죄로 몰았으니 잡아가는 쪽의 꼴이 우스워졌다. 실제 구속 사유를 따져보니, 문대표가 촛불 국면을 생방송해 누리꾼들의 사랑을 받던 ‘아프리카TV’의 운영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작권 앞에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단단한 모든 것들’

앞서 세 가지 사례들은 지식 생산의 사유화가 벌어지는 서로 다른 지점으로부터 뽑아낸, 동시에 대단히 최근의 저작권 위반 사례들이다. 먼저 첫 번째, ‘미쳤어’ 사례를 일반화하면 다음과 같은 진술이 가능하다. 가족, 친지, 친구 또래 등 사적 영역에서의 문화 향유 방식과 지식 상품화의 강제 규제력인 저작권 진영이 첨예하게 맞부딪힐 때, 점점 후자의 영향력이 확대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도 영역에서의 저작권법 개정 작업, 기술적 보호와 잠금장치, 초등학교내 저작권 교육, 연예인들이 벌이는 ‘굿 다운로더 캠페인’ 등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사유화된 문화를 빠르게 체득하고 있다. 자본주의 태동이래 화폐가 물질 재화의 교환가치를 위한 추상의 등가물로 등극하는 방식에 비해, 비물질 재화에 소유 개념과 재산권을 강요하는 방식은 훨씬 더 집요하고 다면적이고 빠르다.


‘미쳤어’ 사례는 근본적으로 이용자쪽(직업적 작가군과 아마추어 누리꾼들 포함)이 자유롭게 창작에 써야할 소재의 접근에 점점 더 큰 위협을 받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누리꾼들의 UCC 제작에 이미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들을 소재로 이용하는데 제약이 걸리면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심대하게 위협한다. 즉 풍자, 패러디, 혼성모방 등 창작 행위가 이미 권력이나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철통같이 보호되는 영역 속에 놓여 있음으로 해서, 저작권은 표현에 대한 검열 기제로 등장한다. 그래서, 모든 이가 지식의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인 ‘프로슈머’(prosumer)의 장밋빛 전망은, 일상의 대중적 표현과 연계된 저작권 법리를 벗어날 때만 유효한 개념일 뿐이다.  

 

표현 자유의 쟁점과 함께 또 다르게 등장하는 위협 요인은, 아마추어 창작과 저항 행위 자체의 비지니스적 포획이다. 디지털 국면에서 저작권을 행사하는 기업들은, 일반 누리꾼들이 지니는 자유로운 카피레프트 문화를 시장 안에서 순화하거나 끌어들이려 한다. 그것이 닷컴이후 경제 모델인 소위 ‘리믹스’(remix) 경제의 근간이 된다. 정보재가 지닌 공유적 특성(비배제적 혹은 비경쟁적, 무한복제, 한계비용 0 등)을 인정하고, 누리꾼들이 형성하는 창작물과 놀이 형식을 비즈니스의 영역 안에 포획하려는 것이 리믹스 경제의 요체다. 이 법칙을 거스르곤 미래에 성공은 고사하고 쪽박차기 십상이라는 것을 기업들 스스로도 체득한다. 예를 들어, 2008년 삼성경제연구소에서「인터넷과 미디어산업의 재편」이란 보고서를 내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필자는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이 기업 보고서를 간간이 읽히는데, 그 이유는 오직 단 하나다. 소위 이윤의 생리에 밝은 우리의 삼성 대재벌조차 누리꾼들의 정보공유와 자유문화의 경향을 포착하는데 있다. 이 보고서에서 삼성은, 누리꾼들에 의한 공유 문화를 법적으로 옥죄기 보다는 이를 인정하고 그 문화 현실에 조응하는 사업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당연하게도, 정보 풍요의 시대에 “범용화된 정보는 모두 무료화될 가능성이 놓고, 유료서비스의 경우도 가격하락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래서, 장차 사업 방식은 “이용자에게 저가ㆍ무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기업 입장에서는 수입을 보전할 수 있는 차별화된 비지니스 모델 발굴”로 가자고 말한다. 정치인들이 이 정도의 사업 마인드만 있어도, 올해 국회에서 시대에 역행하는 저작권법 개정안을 들이미는 비상식은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따져보면, 사실상 삼성은 구글이나 애플을 롤모델로 삼고 있는데, 주로 온라인 소비자들의 흐름과 그들의 문화 생산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상업적 모델을 구성하는 방식을 고민한다.


삼성 보고서에서 드러난 리믹스형 경제의 요체는 무엇보다 더욱 더 아마추어적 정보 생산자/이용자들에 기생해 그 힘을 키우고 유저들의 자유로운 기운으로부터 자산의 증식력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말은 불순하고 위험할 수 있다. 즉, 인간 신체의 네트워크 접속, 그리고 그 인간 뇌를 자양분삼아 진화하는 상업 미디어 사이에 맺어진 상호 공생의 효과가 집단 지성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미래는 바로 이 인간들의 뇌 촉수로부터 사출한 집단 지성을 자본의 것으로 재가공하는 능력에 달렸다. ‘닷컴 이후’ 자본주의의 진화는 급속히 이와 같은 기생형 모델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즉, ‘참여’와 ‘창조/창의 산업’(the creative industries)이라는 명목으로 누리꾼들이 생산하는 지식 생산물들의 끊임없는 사출을 통해 기생하는 네트워크 잡종형 (사유와 공유의 혼합형 - 리믹스형) 경제 모델로 가고 있다. 결국, 현대 자본의 사활은 살아 움직이는 누리꾼들의 문화와 생산물들을 자기화하는데 달려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누리꾼들은 이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접속하고 자발적으로 연결될 때에만 주소를 갖고 아이디를 얻고 타인과 연계되고 ‘호명’되는 지위에 이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두 번째, 비운의 ‘책쟁이’ 사례다. 저작권의 비상식적 강화라는 측면에서 첫 번째 ‘미쳤어’와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째 사례에서 저작권 로얄티 배분과 관련해 실제 실소유자와 시장에서 문화생산자로 전락한 힘없는 창작자 (여기에선 언론사와 책쟁이)의 권리적 모순과 불평등 구조를 읽어야 한다. 많은 이들은 창작자를 위한 ‘인센티브’(일종의 다음 창작을 유도하기 위한 동기유발)를 위해 보상(rewards)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저작권이 존재하는 이유라 답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그와 같은 고색창연한 ‘낭만적 저자’(romantic authorship)들을 칭송하고 보답해야할 상황이 이젠 사라진 지 오래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저자에 의한 지식 창작과 그 창작물의 소유자(방송사, 이통사, 연예기획사, 문화산업 등)가 점점 분리되고, 전자는 후자에 종속된 문화노동자로 전락했다. 그 실소유자들은 음반회사들을 거느리고, 책을 출판하고, 영화를 제작하고, 문화상품을 전세계에 전파한다. 창작자들은 계약관계를 통해 그들의 대리자를 위해 머리를 쥐어짠다. 해외의 문화제국들인 소니, 워너브라더스, 월트디즈니는 전세계 문화노동자들의 대리인이자 실제 소유주다.

 

애초에 저작권이라 함은, 저자가 수행했던 창작에 대한 법적 최소 보상 체제임과 동시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모두의 공공재로 자유롭게 돌리자는 합의의 소산이었다. 한 축에 저작권자의 권리 규정과 함께, 다른 한 축에는 저작권자의 공익적 역할이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작권은 점점 사적인 재산권 행사의 장으로 변질된다. 더군다나 저작권의 소멸 전에도 저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이용자들의 최소한의 권리 규정들인 ‘공정 이용’ 혹은 ‘저작권 제한 조항’조차 제 기능을 잃고 있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앞서 출판사 사장의 경험은 사실상 ‘공정 이용’에 의해 충분히 보호될 권리였으나, 그도 작동하지 못하는 비상식의 현실을 지칭한다.

 

실상 ‘비운의 책쟁이’ 사례는 문화산업 전반의 불평등 현실을 예증한다. 연예기획사들은 연예인들을 가부장적 노예계약을 맺어 그들의 노동력을 강탈한다. 연예 제작자들은 소속사 연예인들을 출현시키기 위해 제작자들에게 종노릇을 자청하거나, 고장자연씨 자살사건에서 보듯 소속사 연예인들을 술좌석에 배석시키는 ‘성상납’의 파렴치 행위를 저지른다. 외주제작사가 만든 프로그램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공중파 방송사에 자신의 권리를 대부분 양도한다. 영화 제작사들은 제작 여건이 계속해서 어렵다지만, 대기업과 금융기업 등 전략적 투자자와 불평등한 수입 분배 (제작사 대 투자사 4:6 혹은 2:8로 수입 배분)에 만족해야 한다. 음반 시장이 다 죽어가고 새로이 떠오른 음원 수입에서 최고의 수혜자가 음원 배급사인 이동통신업체(음원 저작권 로얄티의 거의 40% 독식)다. 이같은 현실 논리 앞에서, 불법 근절의 ‘굿다운로더’를 키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업자간 공정 플레이가 실제 모순의 깊은 골임을 직시해야 한다.

 

마지막 ‘아프리카TV’ 대표의 구속 사례는 대단히 한국적인 저작권 남용의 모습이다. 저작권을 통해 ‘의사’(擬似) 재산권을 점점 늘리는 것도 모자라, 누리꾼들의 정치 발언까지도 정부 기관이 나서서 저작권 위반으로 겁박하는 경우다. 문화산업 논리로 시작된 우리의 저작권 철학에다가 우리네 통치권의 폭압적 논리가 결합되면서, 명분은 저작권 위반 혐의로 옭아매고 실제로는 누리꾼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단순히 디지털 경제논리를 보호하고 규제를 푸는 서구 국가들의 역할과 달리 우리 국내 상황은 순수 시장 논리보다 아직도 국가의 통치 퇴행성이 함께 작동한다. 이 점에서 개정 저작권법에 추가된 ‘삼진아웃제’(세 번의 저작권위반 경고후 게시판의 임의 폐쇄 조치 가능)가 누리꾼들의 ‘불법’파일 교환행위에 대한 서비스업자 측의 자체 모니터링을 강제하기위한 방법이라는 명분이 애초부터 의심스러웠다. 필요하면 언제든 정치발언에 재갈을 물릴 수 있는 장치도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국적 현실에서 저작권은 신자유주의 시장의 논리이자 대단히 정치적 통제의 논리다. 디지털의 물질적 기반은 누구보다 선진적으로 봐야 하지만, 그 운용 원리는 국가의 폭력에 억압당하는 질곡을 떠안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의 공공적 기원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우리의 저작권 과잉 현실을 보고 그 퇴행적 진행 방향에 대해 짚어보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저작권의 전면화와 일상화, 창작자보다는 소유자의 권한 강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작권을 통한 정치적 표현과 창작의 자유 제한을 읽을 수 있었다. 저작권 과잉의 이러한 부정적 경향성을 부추키는데, 사실상 국내에선 저작권 입법의 산업주의적 배경이 한몫하고 있다. 이미 미국과 유럽의 저작권 체제가 글로벌 경제 재편을 위한 산업 우위의 강제 논리로 바뀌고 있으나, 애초에 그들의 저작권이란 ‘공익’과 ‘시민권’을 염두에 둔 이용자 권리와 저작물에 대한 창작자 권리간 타협의 산물이었다.


서구 유럽의 역사를 보자. 15세기 중엽 인쇄술의 발달은 새로운 문화와 이념을 전파하고, 인쇄된 책을 통해 의식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민족주의가 번성하는데 일조한다. 인쇄출판의 대중화와 그것의 위력은 유럽의 군주들에게 이를 검열을 통해 관리하도록 요구했고, 16세기에 접어들면 영국에선 국왕이 친히 인쇄출판업자를 지정하여 통치자의 출판물을 독점하여 내도록 명했다. 당시 몇몇 인쇄 출판업자들의 시장 독점은 저자에 대한 영구적인 재산권 보장에 대한 요구를 낳았다. 또한 유럽 출판 시장의 전성기인 18세기에 들어서면 이는 해적 출판의 난립과 소수 독점업자들의 출판 길드조합간의 대립을 가져온다. 1710년에 제정된 최초 저작권법인 영국 ‘앤 여왕법’은 이 둘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작품의 재산권을 옹호하는 출판 길드와 지식에 대한 접근권을 외쳤던 해적출판 등 자영업자나 독자들 사이의 쟁투와 타협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Hesse, 2002; 남형두, 2008)

 

비슷한 시기에 이미 프랑스에서도 저작권에 대한 접근은 반영구적 재산권으로서 보다는 일시적 점유의 ‘특권’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 정치철학자이자 프랑스 혁명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꽁도르세(M. de Condorcet)의 다음 진술을 들어보자.

그러한 (지적) 재산은 자연의 질서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회의 힘에 의해 보호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로부터 만들어진 재산이다. 그것은 진정 재산권이 아니라, 특혜(privilége)에 불과하다. 이 특혜는 별 큰 폭력없이 그 원소유자로부터 가로챘을 때 느끼는 배타적인 즐거움과 비슷하다. (마르케스 드 꽁도르세, 「표현의 자유에 대한 단상」, 1776)

사회적 원천으로서 지적 재산과 이의 일시적 점유를 주장하던 꽁도르세의 주장은 지금 세상에서 보자면 격세지감이요 급진적 주장이다. 이제는 헐리우드와 문화산업이 지배하는 저작권 소유자의 재산권으로 개념화하면서, 꽁도르세가 보는 일시적 ‘특혜’나 공익과 같은 접근은 이제는 기억 속에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의 저작권은 마치 서구의 문화생산물을 수입할 수 있는 아시아 수출 시장의 합법화된 조문처럼 꾸며졌다. 다시 말해, 1957년에 처음 만들어진 우리 저작권법은, 이용자의 권리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국내외 문화산업 시장과 사익에 기반을 둔 저작권 소유자의 권리만을 강조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찬가지로 국내에서 ‘공유 영역’(public domain)이라 수입돼 쓰이는 용어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는 저작권법이 만료가 되든 저작자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든 이의 사정권이 미치지않게 되어 자유롭고 누구나 접근이 용이한 공간을 지칭한다. 이도 확실히 공간의 메타포를 지닌 서구적 개념이다. 원래 공유 영역이란 영국 황실이나 미국 연방정부가 국민에게 제한적으로 빌려줘 쓰도록 했던 토지를 일컫던 말이다. 역사적으로 19세기 유럽에 널리 알려진 비슷한 개념은, ‘공공재’ (public property) 혹은 ‘공유재산’(common property)이었다 (Ochoa, 2003). 그것이 1886년 베른협약에서 불어로 domaine publique라는 개념으로 최초 지적 재산에 이용되고, 20세기에 갓 접어들면 미국 저작권법(1909년) 하에서 정보와 지식의 '공유 영역'이란 개념으로 정착돼 쓰이게 된다 (Littman, 1990). 그런 이유로 국내에선 비물질재 개념으로 '정보'란 말을 삽입해, '공유정보영역'이라 쓰기도 한다. 즉 이제는 저작권의 시장 권역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적 산물의 독립된 그린벨트 영역을 상징하는 은유로 이용된다. 미국의 법학자 레식(Lawrence Lessig)의 ‘창작 공유터’(creative commons) 혹은 제임스 보일(James Boyle, 2003)의 ‘마음 공유터’(the commons of the mind)란 개념은 바로 이 18세기 ‘공유 영역’ 개념의 현대적 변용인 셈이다.

 

서구에서 ‘공유(정보)영역’에 대한 보호를 외치는 것은 정보와 지식에 대한 공익적 접근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도 우리 현실에 오면 용어만 갖다쓰고 그 맥락을 거두절미한다. 오직 산업의 논리가 득세하기 일쑤다. 예를 들어, 요즘 국내 인문학계에서는 ‘공유영역’에 놓여있는 무형의 자산들을 어떻게 하면 돈이 되는 쪽으로 재가공(2차적 저작물 제작)해 시장에 내놓을까 다들 고심 중이다. 예서 인문학의 미래 밥줄을 찾는 듯한데, 학술진흥재단에서 프로젝트를 따내거나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자연스레 ‘공유영역’의 사유화 방법들을 제각각 모색한다. 이같은 시각에선,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지적 공유 자원들, ‘장화홍련전’, ‘전우치전’, ‘구운몽’ 등은 다시 각색돼 영화에 쓰이거나 게임 내러티브를 만드는데 유용할 뿐이다, ‘공유영역’은 쏙쏙 빼먹을 양념꼬치로 전락하고 원래의 공공적 의미를 되묻거나 이 영역을 누구든 비상업의 지속가능한 지적 자원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다.

 

‘카피레프트’적 비전이란 것은 이와 같은 저작권 과잉을 막고 공유영역을 개발하자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한다. 예를 들어, 저작권 내부에 ‘이용허락’의 라이센스 방식을 통해 이용자의 저작물 권리를 훨씬 더 유연하고 쉽게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과거 사회주의의 재산권 철폐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아예 저작권 체제 자체를 폐지하자는 사회적 전망들도 존재한다. 통칭하여 보면 카피레프트는 정보공유론의 시각이다. 정보와 지식에 대한 접근은 대체로 공동 소유와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사회주의적 체제의 저작권 시각을 빼고보면, 카피레프트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창작 행위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효해야 하며, 저작물이 개인의 지적 작업에 의한 산물이긴 하나 외부 자원과의 관계망을 통해서 지적 자극과 혜택을 입은 것이기에 궁극적으로 공공의 자산으로 봐야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래서, 카피레프트는 이용자와 공익을 중심에 놓는 정보 권리 선언이요 다양성의 문화 논리다.

 

이 글은 이제부터 카피레프트의 징후들을 역사 속 예술 창작의 영역에서 찾고자 한다. 자본주의의 소비 기호화된 스펙터클과 브랜딩 이미지를 넘어서고자했던 문제의식을 예술의 역사로부터 주목하려 한다. 이미 국내에도 지식 생산의 민주화나 저작권의 유연적 적용에 관한 ‘이용허락’의 법률적 전망이 나오긴 했지만, 아직까지 크게 문화생산의 하위 영역에까지 퍼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그 지지부진한 이유가 카피레프트란 좋은 것이고 모든 이들에게 득이 되고 자본의 탐욕을 막을 수 있다는 평범한 메시지를 대중에게 심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라 본다. 이용자를 보호하는 ‘공정 이용’이나 ‘저작권의 제한’ 조항에 대한 검토 혹은 대안적 라이센스 모델의 적용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끊임없이 상품화된 지식 생산의 조건들을 조롱하고 비틀었던 창작 전위의 사례들에서 우리식 정보공유의 대중적 모델이나 캠페인을 개발하는 것도 돌봐야할 시급한 과제다.


  카피레프트의 예술적 유산들

카피레프트의 예술적 기원은 모방(mimesis), 베끼기, 혹은 참조, 패러디 등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15세기 라파엘의 <파리의 심판 Judgement of Paris (c1515)>이란 소실된 작품을 이제 현대인들은 원본없이 복사품을 통해 감상들 하고 있다. 라파엘의 직원이던 라이몽디(Marcantonio Raimondi)가 이를 에칭(蝕刻)해 복제본을 만들어둔 것이 결국 라파엘의 원본이 소실되면서 이를 추측하는 희대의 작품으로 남게된 것이다. 또한 그로부터 얼마 후에 라베나(Marco Dente da Ravenna)란 이는 라이몽디의 동판본을 표절하여 여러 장 만들어 팔아먹었던 당대 전문적 복사꾼으로 묘사되고 있다. 라파엘의 기운이 예서 멈추진 않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로부터 350년이 지나 1863년에 프랑스 작가 에두아르 마네(Manet)는 라파엘의 작품에 등장하는 바다의 신들 일부를 변경하는 대신 당대 현실의 의상과 나체의 여성을 삽입해 패러디 작품 <풀밭위의 점심식사 Dejeuner sur l'Herbe>를 남겼다. 물론 파카소는 자신의 일련의 작품 시리즈(1959~61, Les Dejeuners)에서 마네의 작품을 또 한번 창의적으로 재해석해 150개의 드로잉과 27개의 회화 작품으로 표현해냈다. 또한, 미국의 극사실주의 조각가로 알려진 존 드 안드레아(John De Andrea)가 제작한 같은 제목의 조형물(1982년)이나 ‘팝파겐다’(popaganda)로 알려진 론 잉글리쉬(Ron English, 1994년)의 같은 제목의 그림 작품은 다들 인물 구성을 현대적으로 재배치해 풍자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같은 잘 알려진 라파엘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시대를 가르면서 끊임없이 보여줬던 상호참조와 베끼기, 복제, 재창작, 풍자, 패러디 등의 기법들이 사실상 인류의 일반화된 창작의 기본 패턴임을 인정해야 한다. 따져보면 인간의 역사에서 몇몇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던 대발명을 제외하곤, 대개는 인용과 모방의 상호 참조를 통해 재해석하는 작업 정도가 아니었던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본 혹은 그것이 지닌 아우라를 거부하고 무위화하는 예술 운동이 보다 본격화된 계기는 흔히들 ‘반예술’적 경향이라 꼽는 ‘다다이즘’(dadaism)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특히, 이들은 창작의 천재성이나 주체성을 찬양하는 ‘낭만적 저자’(romantic authorship) 개념에 저항한다. 그 중에서 많은 이들은 대표적으로 뒤샹(Marcel Duchamp)을, 그리고 그의 변기 작품을 기억한다. 뒤샹의 1917년 남성용 소변기로 만든 작품 <샘 Fountain>에 ‘R. Mutt’이란 변기 회사의 이름을 서명해 미술전시회에 보냈을 때, 이는 예술 생산과 관련해 혁명적 의미를 지닌다. 흔히들 알고 있는 예술 제도와 시장의 허구성에 대한 도발을 넘어서, 자본주의 대량생산품인 변기에 찍힌 서명은 작가 개인의 창조성에 대한 조롱과 독창성을 의문시하는 도발 행위였다. (Bürger, 1974, 98~104쪽 참고) 사실상 이는 반예술의 표명이요, 저작권에 날리는 비릿한 조롱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베를린-다다 모임의 구성원들 중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는 ‘포토몽타주’ (photomontage)라는 예술 기법을 통해 당대 독일 파시즘의 폭력과 엄숙주의를 완벽하게 비판했다. ‘콜라주’는 기존 이미지들의 합성이란 의미에서 ‘포토몽타주’와 거의 흡사하나, 후자의 경우 반영구적 인쇄를 통한 복제 기능을 적절히 결합하는 기법 때문에 달리 지칭한다. 그의 기법은 표제와 부제들을 달고 나타나는 합성 이미지들을 잡지나 책 등의 표지에 대량 제작해 많은 독자들에게 돌려보게 한다는 점에서 대중적이었다. 상징 언어를 새로이 만들기보단 하트필드는 잡지나 신문의 보도 사진이나 기사 등 이미 존재하는(레디메이드) 이미지들과 글자들을 오려붙여 새롭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당대 현실을 지배했던 권위 체계를 조롱하고 뒤집고 전복하려 했다 (Walker, 1983, p.102).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와 비슷하게 프랑스 상황주의자들 일부의 작업 중 비예글레(Jacques de la villeglé)의 ‘데콜라주’(décollage) 혹은 ‘익명적 찢기’란 방식도 창작 행위의 집단적 성격을 강조한다 (Crow, 2007, 73쪽). 벽보 광고의 일부를 찢어내면 그 자리에 이전의 포스터와 전단들이 드러나면서 관객들은 그 아래 감춰졌던 과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위에 덧씌운 최근의 광고들과 찢기면서 드러난 오래된 광고의 이름 모를 기억이 혼합되면서 그 어떤 남다른 특권적 개인도 찢어진 게시물의 소유자라고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데콜라주는 바로 개인 창작의 가치를 무위화하는 카피레프트의 기본 정신인 익명의 공동 창조성을 강조한다. 포토몽타주는 기성의 저작 이미지들을 모아붙여 새로운 창작에 응용하면서 과거의 흔적을 지우는데 반해, 데콜라주는 후면에 덧붙여진 이미지를 찢기로 드러내면서 익명의 과거들을 흔들어 깨우고 이로부터 다중의 협업 효과를 깨우치게 만든다. 방식은 서로 역전돼 있지만 둘 다 개인 창작의 무위성을 드러내는 카피레프트적 실천 행위라 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뒤샹, 하트필드, 혹은 비예글레 등의 창작은 따져보면 오늘날 리믹스 시대에는 아방가르드 전위 축에도 끼질 못한다. ‘포샵질’ 등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동원해 하룻밤 사이에 생산해내는 아마추어 누리꾼들의 창작물은, 처음부터 창작의 자유를 막는 저작권과 소비자본의 횡포와 통치 권력에 대한 조롱을 함께 전하는 다다식 문화정치 행위라 볼 수 있다. 뒤샹, 하트필드 혹은 비예글레처럼 현대에는 아마추어 창작자들이 스스로 창작물의 전위로 등장한다. 법학자 레식(Lessig, 2009; 2004)의 개념으로 본다면, 이렇듯 다다식 창작문화는 ‘변용가능 문화’, ‘자유문화 혹은 ‘RW (Read & Write) 문화’에 해당한다. 다다이스트들과 상황주의자들은 닫힌 예술을 파기하고 새로운 예술을 구상하기 위한 카피레프트적 시도로써 창작자와 저자 개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축에는 ‘읽기전용 (Read Only) 문화’와 ‘허가 문화’(permission culture)의 현실이 도사린다.


카피레프트의 현대 예술적 표현들

현대에 들어서면 다다와 상황주의적 행위들은 문화정치적 측면에서 ‘문화 간섭’(cultural jamming)이라는 대중문화의 브랜드 이미지에 대한 저항 전술과 연결된다. 움베르또 에코식으로 얘기하자면, ‘문화간섭’은 자본주의 브랜드 기호와 로고의 제국에서 펼치는 ‘기호의 게릴라전’(semiological guerrila warfare)이다. 브랜드 이미지가 구성하는 스펙터클 혹은 기호 이미지를 뒤집고 조롱하며 시장 가치를 희화화하려는 행위가 기호의 게릴라전이다. 원래 문화간섭이란 “햄 라디오 이용자들의 대화 혹은 라디오 방송에 간섭 현상을 발생시키는 불법 행위”를 지칭했다. (Harold, 2007, p. xxv) 즉 신호에 잡음을 끌어들이는 기술적 간섭 현상이 문화정치 영역에서 재해석되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카피레프트와 직접적으로 관련해서 본다면, 문화간섭의 저항 행위로 우리는 ‘전유’(appropriation)를 꼽을 수 있다. 전유의 어원적 의미 중 하나가 ‘훔치다’ 혹은 ‘묻지않고 가져오다’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Harris, 2006, p. 17) 이는 지배 문화와 지배 담론의 언어를 가져다 대중의 것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에 해당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를 들면, 론 잉글리쉬는 대중문화를 비판하는 소재로 월트디즈니의 미키 마우스를 이용한다. 잉글리쉬의 마를린 먼로의 초상을 그린 시리즈 그림을 보면, 미키 마우스의 얼굴이 마를린 먼로의 가슴을 대체하고 있다. 마치 성적 상징물로써 여성의 풍만한 가슴에서 느낄 수 있는 관음의 성적 욕망을 자본주의 상품 문화의 소비 욕망과 포개놓는 효과를 갖는다. 이러한 예술 창작 행위가 일종의 문화간섭이요 전유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 ‘네거티브랜드’(Negativland)는 오랫동안 오디오 샘플링 (일종의 음원 콜라주)를 수행하면서 카피레프트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그룹이다. 요새 빅뱅 멤버인 G드래곤의 ‘하트브레이커’가 표절 시비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네거티브랜드는 이와 같은 스캔들이나 표절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소리, 소음, 음원, 목소리, 기계음 등 채취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조합해 이들은 새로운 곡들을 만들어낸다. 20여개가 넘는 샘플링 CD를 제작해 선보였고, 샘플링의 재배치와 재구성만으로도 딴판의 새로운 음악 창작이 가능함을 입증해왔다. 비슷하게 '걸턱'(Girl Talk)이란 뮤지션도 샘플링을 통해 음악을 창작하고 무대에 서면 악기와 보이스 대신 작은 노트북만을 몸에 걸친 채 공연한다. 사실상 이는 퍼블릭에너미(Public Enemy)나 척디(Chuck D) 등 정치색 짙은 하드코어 래퍼들이 자신들을 악동으로 그리며 보도하는 앵커들의 목소리, 블랙 리더들의 연설, 드라마나 영화 속 흑인의 묘사 등을 그들의 음악에 샘플링해 음원으로 쓰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렇듯 네거티브랜드나 걸턱, 그리고 몇몇 래퍼들은 소위 원본이라 얘기되는 음원들을 전유하여 새롭게 재구성하여 음원들의 진본성에 조소를 보내는 효과를 내고 있고, 미래 음악 창작과 공연 형식의 새로운 전범을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보자면, 이같은 전유 행위들은 소비문화를 통해 생산된 대중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재구성해 역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효과를 거둔다. 뉴-/디지털 미디어 예술은 ‘전유’의 창작 방식을 북돋고, 아마추어 누리꾼들을 손쉽게 작가의 스타덤으로 이끈다. 이때 전유는 인용, 샘플링, 콜라주 등의 기법을 동원하며 그로 인해 브랜드 가치를 보호하는 저작권 체계나 초상권, 명예 훼손 등과 항상 적대 관계에 놓인다. 통칭해, 이는 ‘전유 예술’ (Harold, 2008)이라 불린다. 전유는 마치 권력의 길거리 풍경을 반역의 약호들로 재탄생시키는 벽낙서(graffiti)와 같은 저항의 힘을 불어넣는다. 이와 같은 전유의 전술은 사실상 ‘사보타주’(sabotage)와 다르다. 사보타주는 부정과 배격의 저항 전술이자 가장 오래된 전법이다. 자본의 톱니바퀴에 공구를 던져넣어 생산 공정을 마비시키는 멍키랜치의 의미에서처럼, 사보타주는 자본의 흐름을 멈추려는 태업의 적극적 표현이다. 부정하지 않으면 휘말리고 포획됨을 알기에, 사보타주는 절연의 정치를 택한다. 바리케이트를 사이로 이쪽은 아요 저쪽은 적이 됐다. 이는 또한 안의 권력 파장을 벗어나 밖의 자유로 탈주하고자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허나 사보타주는 저 멀리 권력을 바라보며 벌이는 적대의 저항 방식이라 체제내 유연성이 부족하다. 슬로건은 해묵고 전술은 경직돼 있다.

 

외려 날조된 소비주의의 스펙터클 안에 갇힌 채 유희와 욕망의 명령을 따르는 인간에게 지향성을 갖고 맞서라한다면, 이는 오히려 ‘전용’ (détournement)이 맞다. 전용은 ‘전복’과 ‘우회’의 중간 지점에 머무른다. 상황주의의 대부였던 기 드보르(Guy Debord & Wolman, 1956)에 따르면, 전용은 지배문화의 언어에 대항하는 ‘다다식 부정’(Dadaist-type negation)의 전술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보타주가 감성에 기댄 반대라면, 전용 혹은 선회는 성찰성에 기반한 반대이자 합에 대한 고민이 들어 있다. 헤겔식의 변증법적 이상향에 대한 비전이 있다면, 전용의 힘은 배가된다. 소비자본주의의 스펙터클 이미지를 도용하면서도 그 자본의 흔적을 온전히 떨어내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방식이 선회요 전용이다. 한편, 앞서본 전유의 예술 행위가 아마추어 누리꾼들도 가능한 창작의 영역이라면, 선회나 전용은 예술로 표현하자면 좀 더 숙련과 미학적 재능을 요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마치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처럼, 각각의 차용된 이미지들이 지녔던 과거의 흔적이 완벽히 사라지고 콜라주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부분들로 자리매김하고 각각이 모여 새로운 의미로 형상화할 때 전용과 선회의 의미가 살아난다. 반면, 대개 패러디는 전용에 이르지못한 전유의 한 표현 형태로 남는다. 전유건 전용이건 사실상 그 나름대로 문화간섭의 한 방식이요, 카피레프트의 문화정치적 전술을 기획하는데 둘 다 중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문제는 20세기초 역사적 아방가르드 예술 시절에 콜라주 혹은 몽타주를 통해 창작했던 다다이스트들은 독일 파시스트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았지만, 적어도 시장으로부터의 위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 누리꾼들의 아마추어 UCC 창작이나 직업적 예술가들의 문화간섭을 위협하는 것은 저작권 위반 기소와 정치인들이나 족벌 언론인들의 초상권 침해나 명예훼손 소송이다. 과거와 달리 전문 작가들과 누리꾼들은 자신들의 창작을 위해 저작권 보호 대상의 저작물들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전유와 전용의 예술은 ‘절도 예술’ (Lütticken, 2002)의 길을 걷게 된다. 대중들은 저작권과 초상권 등에 의해 보호받는 이미지, 음원, 영상 등을 이용함으로써 그들이 행하는 창작으로부터 많은 제약을 받는다. 엔디 워홀이 소비사회의 상징들을 주요 소재로 쓰면서 저작권 분쟁으로 크게 시달렸단 것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는, 쉐리 레빈(Sherrie Levine)이나 조각가 제프 쿤스(Jeff Koons) 등 소위 전유 혹은 절도 예술을 자신의 기법으로 실천하는 전문 예술가들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쿤스는 아트 로저스(Art Rogers)라는 이름의 사진작가가 찍은 1980년 엽서를 참조하여 자신의 조각을 1998년 완성한다. 원본의 흑백사진 이미지는 똑같은 종의 새끼 강아지 7마리를 나란히 안고있는 중년 부부의 모습인데, 쿤스의 목각 작품에서는 개들의 털색깔이 보라색으로, 루돌프 사슴코처럼 과장된 개들의 코들, 그리고 중년부부의 머리에 꽂힌 꽃장식 등으로 원본과 달리 묘사됐다. 쿤스의 이 작품은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비싼 가격에 경매에 붙여졌다. 그러나, 쿤스는 로저스에게 저작권 위반 혐의로 고소당하여 법정 패소한다. 현 체제에선 쿤스의 작품은 복제물로 낙인이 찍힌 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크 네피어(Mark Napier)란 작가 또한 바비인형을 자신의 창작 행위에 모델로 썼다가 그 인형을 제작하는 마텔 회사(Mattel, Inc.)으로부터 저작권 위반 위협을 받은 경우다. 그는 자신의 창작 자유가 어떻게 위협받았는지 자신의 웹 프로젝트에서 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일명 ‘뒤틀린 바비인형’(distorted Barbie)이란 온라인 작품들은 원래 자신이 만든 이미지들을 모두 다 뒤틀리게 묘사함으로써 기업이 소송을 통해 어떻게 창작 자유를 훼손할 수 있는지 그 침해 상황을 비꼬아 그려내고 있다.

 

네피어나 쿤스의 사례에서 보듯이, 기업들의 작가들에 대한 점증하는 공격과 그들이 생산하는 일상속 브랜드 이미지들의 위협은, 서두의 ‘미쳤어’ 사례를 포함해 복제에 기반한 패러디 예술 등 창작 행위 모두에 부정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불법예술’(illegal-art.org)이란 온라인 사이트는 이처럼 저작권의 위협을 받고 있거나 법정에 섰던 동영상, 음원, 예술 작품 등 문제작들의 아카이브 저장소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온라인 이용자들에게 창작의 자유에 훼손된 수많은 양질의 작품들을 전시해 저작권의 창작과 표현의 자유 훼손의 전범들을 기록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불법예술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한 이미지의 사례를 들어보자. 이 사이트에서 방문자는 켐브루 멕리오드사용자 삽입 이미지(Kembrew McLeod, 2007)란 아이오아대학 신방과 교수가 등록한 스캔된 상표권 이미지와 문구(‘표현의 자유’, 1998년 미 상표권 번호 2127381)를 볼 수 있다. 이는 저작권 과잉 현실과 관련해 두고두고 회자됐던 사례다. 멕리오드는 문화간섭의 일환으로 ‘표현의 자유’ 문구를 미 특허청에 법적으로 등록해 소유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그는 대기업들이 만약 이 문구를 오용하여 광고 등에 사용하면 지체없이 경고장을 날려 소송을 걸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는 나름 언론이 주목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우선은, ‘표현의 자유’라는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문구를 일개인이 상표권으로 사유화해 등록할 수 있다는데 모두들 놀랐다. 그 다음엔 무엇보다 이 실험이 대기업들이 공공 영역에 남아있는 용어들을 무작위로 상표권으로 사유화하는 현실에 대한 경종이 됐다. 이 상표권 실험 덕택에 그는 뉴욕타임즈 등 언론이 주목해 소기의 대중적  페다고지 효과를 봤던 것이다.

정보 생태운동으로서 카피레프트

이제까지 훑어본 것처럼, 서구에서 전유, 전용, 혹은 절도의 문화 행위들은 뿌리깊고, 이들 예술 형식들은 문화간섭이란 행위에 합류하면서 자본주의 소비문화 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을 수행해왔다. 이는 일상의 아마추어 누리꾼들의 창작에서부터 직업적 예술가들의 전유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무정형의 다중에 의해 표현되는 문화정치의 행동들이 앞서 얘기했던 ‘공유영역’을 일구는 기본 바탕이 될 것이라 본다. 이 글의 서두에서도 지적했던, 국내 저작권 과잉의 경향성들을 막기위한 하나의 문화정치의 전술로서 언급될 수 있다고 본다. 공유영역에 대한 전문 법학자인 보일(Boyle, 2003)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가진 것 없는 농민들이 나눠 경작하던 당시 유럽의 공유영역에 대한 재산권 소유자들의 역사적 ‘종획운동’(enclosure movement)으로 농민들이 토지를 박탈당한데 이어, 현대 기업들이 또 다시 정보와 지식의 공유영역을 사적인 이윤의 전쟁터로 만들어 누리꾼들을 범죄자로 몰고 있다. 자본의 변화에 대한, 그리고 저작권의 과잉에 대한 보다 적극적이고 세련된 문화정치적 저항의 판을 짜는데, 전유와 전용의 전술이 필요하다. 유쾌 발랄하면서도 권력의 비린 곳을 드러내면서 미래의 카피레프트 비전을 세우는 작업이 요구된다. 자본과 권력의 영역이 첨단화하고 스스로를 체질 개선하고 있다면, 그 속에서 정보 공유의 가치를 대중화하면서 새로운 대응 논리를 세우고 카피레프트의 구체적 사례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야 한다.

 

보일(Boyle, 2008)은 이를 지식과 정보의 생태주의적 시각에서 접근한다. 마치 공해산업으로부터 환경을 보호하듯 정보와 지식의 공유영역을 저작권의 과잉으로 인한 공해로부터 보호하여 그린벨트화하자고 제안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린피스 등 환경운동단체처럼 저작권의 지적 공해 현상을 적극적으로 사회 공론화하는 작업을 확대하자고 주장한다. 이 글과 그의 비유법이 서로 다르지만, 앞서본 카피레프트적 문화정치 행위들은 ‘정보생태주의’적 행동들과 일맥상통한다. 즉 전유와 전용의 문화정치적이고 문화간섭적 행위들을 정보 환경운동의 맥락에서 자리매김하고, 우리도 이와 같은 아방가르드적 문화정치를 통해 저작권 과잉을 떨쳐낼 새로운 지속가능한 전망들을 끄집어내는 집중화된 작업이 시급히 요구된다.







참고문헌


권기덕·이성호 (2008) 「인터넷과 미디어산업의 재편」,『CEO INFORMATION』(681호), 삼성경제연구소.
남형두 (2008) 「저작권의 역사와 철학」,『산업재산권』(26호), 245~306쪽.
서진석 (2007) 「미술과 자본」, Art&Capital: Spiritual Odyssey, 대안공간 루프, 18~31쪽.
이광석 (2009)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 최영묵 엮음,『미디어콘텐츠와 저작권』, 논형출판사, 112~138쪽.
Anderson, B. (1991) Imagined Communities, London: Verso.
Anderson, B. (2001) Western Nationalism and Eastern Nationalism. New Left Review (No.9), pp. 31~42,
Boyle, J. (2003) The Second Enclosure Movement and the construction of the public domain, Law and Contemporary Problems, 66(1&2), pp. 33–74.
Boyle, J. (2008), An Environmentalism for Information (pp.230~248), The Public Domain: Enclosing the Commons of the Mind, New Haven &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Crow, T. (1996) The Rise of the Sixties: American and European Art in the Era of Dissent (New York: Harry N. Abrams, Inc.) 조주연 (역) (2007) 『60년대 미술: 순수미술에서 문화정치학으로』, 현실문화.
Bürger, P. (1974) Theorie der avantgarde. 최성만 (역) (2009) 아방가르드의 이론, 지식을만드는지식.
Debord, G & Wolman, G. J. (1956) A User's Guide to Détournement (pp.14~20), Ken Knabb (ed.) the Situationist International Anthology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2006), Berkeley, CA: Bureau of Public Secrets.
Harris, J. (2006) Art History: The Key Concepts. London: Routledge.
Harold, C. (2007) Ourspace: Resisting the Corporate Control of Cultur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Hesse, C. (2002) The rise of intellectual property, Daedalus, pp. 26~45.
Lash, S. & Lury, C. (2007) Global Culture Industry: The Mediation of Things, Cambridge: Polity.
Littman, J. (1990) The public domain, Emory Law Journal, 39(4), pp. 965~1023.
Lukács, G. (1923)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박정호ㆍ조만영 (역) (1999) 역사와 계급의식 - 맑스주의 변증법 연구, 거름.
Lütticken, S. (2002) The Art of Theft. New Left Review 13, January-February, pp. 89~104.
McClean, D. & Schubert, K. (2002) Dear Images: art, copyright and culture, ICA and Ridinghouse, London, 2002
McLeod, K. (2007) Freedom of Expression: Resistance and Repression in the Age of Intellectual Proper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Ochoa, T. (2003) Origins and meanings of the public domain, University of Dayton Law Review, 28(2), pp. 215–267.
Wittkower, D. E. (2008) Revolutionary Industry and Digital Colonialism. Fast Capitalism (On-1ine), 4(1), Available: http://www.uta.edu/huma/agger/fastcapitalism/4_1/wittkower.html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