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12. SF영화 속 여성 이미지,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 아마도 이것이 SF영화 연재의 마지막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분간 쉬었다, 나중에 떄가 되면 또 계속하지요. ****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12

고전 SF영화 속 여성 이미지,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과학기술이 남성의 전유물처럼 받아들여지던 시대가 지났다 하나, 여전히 그 편견과 불평등은 여전하다. SF영화 속 컴퓨터 엔지니어들의 이미지를 보자. 머리좋고 좋은 학벌에 중산층의 잘생긴 백인 남성이 대부분이다. 설사 하이테크 직종의 전문 여성이 등장해도, 남성의 들러리나 보조역으로 만족해야 한다. 리들리 스콧감독의 <에이리언 Alien (1979)>에서 화염방사기를 들고 등장하는 여성 전사의 이미지는 파격에 해당한다. 70년대까지도 SF영화에서 언제나 여성은 괴물에 납치되거나 습격을 받아 히스테릭하게 비명을 지르며 혼절하거나, 악한 악녀로 등장해 남성에 의해 처단되거나, 온몸으로 성적 소구(sex appeal)를 하며 남성을 유혹하거나, 혹은 남자 주인공의 로맨스를 위해 구색용으로 등장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영화에서 이렇듯 표현된 왜곡된 여성상은 현실 속의 여성 지위를 그대로 말한다. 이번 호는 아직도 근절되지 못하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과거 SF영화 속에서 다시 들춰내 볼 작정이다.

 

약자 혹은 성적 소구의 대상

미국에서 5, 60년대 만들어진 SF영화들의 포스터를 볼라치면 재밌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슴의 윤곽이 드러나고 치마가 찢긴 채 괴물의 품에 안겨있거나 혹은 곤충의 이빨 사이에 혼절해 있는 여성들을 흔히 관찰할 수 있다. 언제나 괴물들은 폭력적 남성성의 대리자처럼 행동한다. 예를 들어, '아가미 인간 (the Gill Man)' 3부작에선 아가미인간의 여주인공에 대한 성적 집착이 매 장면마다 드러난다. 아가미인간이 보여주는 강한 힘과 폭력, 그리고 여주인공에 대한 성적 집착은 주로 남성 관객에게 묘한 대리 만족을 선사한다. 관객들은 남성성을 대변하는 돌연변이 물속 괴물을 통해 여성에 미치는 가학적 이미지들을 맘껏 즐겼던 것이다.

        지구 밖 외계 행성을 다룬 영화들 중 일부는 아예 이런 남성들의 시선을 의식해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저예산 B SF영화 <달의 캣우먼들 Cat-women of the Moon (1953)>에선, 달에 사는 매력적인 금단의 여자 외계인들의 모습을 다룬다. 지구인들의 우주 탐사선이 달에 도착한다. 승무원 중 헬렌(Helen)이란 여성은 무언가모를 힘에 이끌려 캣우먼들이 사는 그리스 사원 같은 곳으로 자신의 남성 동료들을 이끈다. 이곳에서 그들은 목부터 발끝까지 검은 타이즈를 입고 마치 고양이처럼 생긴 육감적인 여자 외계인들과 마주친다. 한편 캣우먼의 우두머리인 알파(Alpha)는 승무원들을 죽이고 우주선을 탈취해 지구에서 자신들의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캣우먼들의 음모는 실패하고 승무원들은 지구로 향하는 우주선에 오른다. 이 영화에선 남자 승무원들이 달에 도착해 요염한 캣우먼들을 얼빠져 바라보고, 급기야 이들과 연애하는데 온정신을 쏟는다. 캣우먼들의 제례 의식으로 치러지는 춤사위를 보노라면, 이방인에 느끼는 경외보단 성적 소구가 더 강하다.

        미지의 외계 혹성에 대한 인간의 동경이 금광의 발견에 있다거나 < 캣우먼들>처럼 매혹적 여성들과의 조우로 연결되는 것은 대단히 흔하디흔한 광경이다. 이는 서부영화 (the Western) 장르에서 노다지를 두고 총질을 하거나 선술집에서 하룻밤 여자를 취하는 장면처럼 흔하다. 비슷한 줄거리의 <외계의 여왕 Queen of the Outer Space (1958)>에서도 볼거리로서의 여성에 대한 편견이 줄을 잇는다. 때는 1985, 지구 외곽의 우주정거장으로 향해 우주선이 발사되나, 어디선가 레이저 빔이 날아와 순식간에 그 정거장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그 우주선 또한 그 광선에 이끌려 자연림 속의 금성에 도착하는데, 그 곳에서는 하이힐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화장을 짙게 한 매혹적인 여인들이 광선총을 들고 나타난다. 그곳의 여왕, 일라나(Yllana)는 우주선을 타고온 승무원들을 염탐 혐의로 감옥에 가둔다. 곧 지구인들이 금성을 공격하리라 보고, 먼저 레이저 빔으로 지구를 날려버릴 계획까지 세운다.

        일라나는 남성들에 반기를 들고 혁명을 일으켜 금성을 금단의 여인 천하로 바꾼 인물이다. 남성들은 금성의 조그만 위성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 그녀는 혁명 도중 핵박사능에 노출돼 얼굴이 추해져 그 외모 콤플렉스를 숨기기 위해 가면을 착용하고 다닌다. 지구인 중 팀장이자 잘생긴 패터슨(Patterson)에 호감을 가진 그녀는 밤늦게 그를 불러 유혹을 한다. 허나 패터슨이 그녀의 가면 안의 실체를 보고 소스라쳐 놀라자 여왕은 극도의 모멸감에 지구인들의 처단을 서두른다. 한편 탈리아(Talleah)라는 여인은 반체제 조직을 만들어 지구인을 도와 여왕에 반기를 들고, 그녀를 제거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두 남성으로 이뤄진 지구로부터 온 승무원들은 우주선이 고쳐질 때까지 금성의 여인들과 찐한 로맨스를 갖는다.

 

성 상품화의 극단 이미지   

<외계의 여왕>은 극도로 여성에 대한 편견에 젖어 있다. 탈리아가 지구인을 돕는 가장 큰 까닭을 여왕의 폭압보단 패터슨에 대한 연정에 더 큰 무게를 둔다. 또한 패터슨이 일라나 여왕의 방에 불려가자 남성 승무원들은 어떡해든 여왕을 '꼬셔'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주고 지구의 운명을 바꿔달라는 어처구니없는 대사를 친다. 금성의 남성들을 내쫓은 강한 일라나조차 지구인 남성, 패터슨에 외면당하자 좌절하고 외모 콤플렉스에 괴로워하는 모순을 보인다. 일라나 여왕에게 쫓기는 중, 지구의 남성들이 금성 여인들과 동굴 안에서 무리지어 키스와 스킨십을 하는데 이르면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제인 폰다가 주연을 맡은 <바바렐라 Barbarella (1968)>를 보면, 그도 점잖은 편이다.   

        영화의 도입 부분부터 우주복을 하나씩 벗으며 몸매를 드러내는 지구 첩보원, 바바렐라의 누드쇼는 마치 '어우동'쇼를 보여주듯 민망하다. 그녀의 임무는 실종된 과학자 듀란 듀란(Duran Duran)을 찾아내는 일. 결말에서 바바렐라는 이 미친 과학자 듀란의 우주 정복의 음모를 막는다. 그것도 그녀의 오로지 남성을 녹이는 성적 매력만으로 지구와 우주를 구한다. 당시 지구인들은 오염을 두려워하여 육체적 접촉을 통한 섹스행위 대신 약을 먹고 손을 맞대며 섹스를 가상으로 상상하는 것에 익숙하다. 바바렐라는 과학자를 찾으면서 여러 위험에 처하고 그녀를 구해주는 남성들에게 보답으로 이같은 섹스 서비스를 제공한다.

        6, 70년대 미국 문화의 대세였던 자유로운 섹스와 마약을 통한 영성 혁명 등 히피운동이 이 영화에 많이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면, 이도 이해못할 바가 아니다. 리고, <바바렐라>에서 등장하는 외계 행성의 재현이나 그 우스꽝스런 복장과 대사는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예컨대, 얼음 도시, 미로 도시, 사탄의 인형들과 새들의 습격 등은 상상력의 무한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로 제인 폰다의 몸매와 얼마나 그녀가 섹시한가를 보여주려는 시도에 외려 영화의 재미가 반감된다.

 

악녀의 이미지

여성의 성상품화가 한 축이라면, 다른 한쪽에는 여성의 악마적 형상화 시도가 있었다.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1927)>에 등장하는 로봇 '퓨쳐라'(futura)는 비록 사람이 아니었지만, 초창기 악녀 이미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례다. 그녀는 노동자를 선동해 파업을 이끌고,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인물로 등장한다. <화성에서 온 악녀 Devil Girl from Mars (1954)>에선 외계인 여성을 악녀로 묘사한다. 검은 가죽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려쓴 강렬한 인상의 여인, 나이야(Nyah)가 미비행물체를 타고 스코트랜드 외곽의 한 여인숙 앞에 착륙한다. 여느 외계인처럼, 이 여인은 순간적 공간이동 능력에다 인간에게 최면을 걸고 자신의 로봇 샨티(Chanti)를 리모콘으로 조정한다. 나이야는 처음 본 인간을 전자총으로 흔적도 없이 날려보내는 잔인성을 보이고, 여인숙 사람들을 보이지않은 벽으로 감금해놓고 인질극까지 벌인다. 이유인즉슨 화성에 남자들이 멸종 위기에 놓여 지구로부터 건장한 남자를 씨받이로 데려가려한다는 것이다. 여인숙에 사람들을 가둬놓고 최종 한명의 인질을 데려가겠다는 그녀의 통첩에 투숙객들, 특히 남성들은 희생정신을 발휘해 자신이 인질이 되겠다고 아우성친다. 결국은 여인숙에 살인을 하고 숨어들었던 알버트(Albert)란 인물이 그녀를 따라가고, 화성으로 이륙 중 알버트는 그 우주선의 약점을 발견하고 그녀와 자폭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영화에선, 외계 악녀와 마주쳤을 때 남성과 여성의 대응 방식이 사뭇 다름을 보여준다. 남성은 그 어느 때보다 기지를 발휘하고 살신성인하는 모습을 보이나, 여성들은 그저 흐느끼고 현실에 어떤 저항도 못하는 무방비 상태의 나약한 인간종으로 나온다. 여성들은 무기력한 모습이거나 외계로부터 날아온 사악한 별종의 모습으로 퇴락한다.

 

악녀이거나 섹시 걸이거나            

달의 알파 여왕, 금성의 일라나 여왕, 화성의 나이야, 그리고 <바바렐라>에 등장하는 블랙퀸 모두는 사악한 여성의 이미지에다 강한 개성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에 비해 여왕을 뺀 나머지 영화 속 등장 여성들은 대체로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자극하고 순종적이다. 대부분 이들은 남성들을 도와 사악한 여왕들을 반대하고 쉽게 남성들과 로맨스에 빠진다. 즉 남성들의 시선에 강한 여성들로 비춰지는 부류는 대체로 사악한 괴물들로 취급되는 반면, 그들에게 고분고분한 여성들은 살아 움직이는 성적 '인형'들로 대상화한다. 이렇듯 여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SF영화를 지배하는 주된 정서다.

        남성들에 의해 해석된 세계, 그리고 그들에 의해 개척되는 미래와 비전에, 강한 여성의 존재는 일종의 도전이다. 언제나 여성은 남성을 위해 안아주길 기다리는 인형이어야 했다. 과학 박사를 지닌 영화 속 여주인공이, 동료 남성들을 위해 커피를 나르는 모습(<세계전쟁 The War of the Worlds (1953)>)에 무감각해하던 시절에서 우리는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세월이 흘러 이제 그 성적 편견과 불평등이 잦아들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그 벽이 느껴짐은 왜일까?        

 

(2007. 12)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SF영화로 본 기계-인간 인터페이스의 진화 (extra)

인간과 기계의 물아일체 시대가 온다: SF영화로 본 기계-인간 인터페이스의 진화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기계는 인간의 언어를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계가 알아들을 수 있는 기계어 명령을 만들어 제어한다. 프로그래밍이란 것은 바로 기계가 알아들을 수 있는 명령 패턴을 짜는 일에 해당한다. 일례로, 누군가 휴대폰 터치 스크린에 특수키를 눌러 관련 화면을 보는 데는 기계만이 알 수 있는 명령 수행의 코드가 이미 들어가 있다. 이렇게 인간의 언어 혹은 명령을 기계에 전달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인간의 개별 언어를 입력란에 쳐넣으면 기계가 인간의 언어를 기계어로 바꾸어 인식하는 수준이었다. 이젠 말, 몸짓, , 신체 접촉 등도 기계가 알아듣는 시대가 되간다

        인간과 기계와의 소통 관계에 놓여진 매개물을 우리는 '인터페이스'(interface)라 부른다. 인터페이스 기술의 발전은 곧 이들 둘의 소통 관계의 진화에 다름아니다. 글보다 말이나 몸짓만으로 소통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인터페이스의 질이 달라짐을 뜻한다. 결국 인터페이스의 궁극적 비전은 보다 쉽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기계와 소통하는, 아니 그 극으로 밀고가면 인간과 기계가 일체되는 모델을 만들어내는데 있지않을까 싶다. 이렇듯 인간과 기계와의 인터페이스 진화에 영향을 줬던,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상상력을 줄 수 있는 큰 진원지 중 하나로 과거 공상과학(SF) 영화들에 등장했던 기발한 인터페이스 기술들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할 듯싶다.       

 

통신 수단에 있어서 인터페이스의 응용

통신 기술이 발달해 이제는 터치스크린 기반하에 사진을 찍어 휴대폰으로 전송하고, 이것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바로 동영상을 서비스업체로부터 내려받아 보고, 모바일 인터넷을 하고, 얼굴을 보면서 통화까지 하는 시대가 됐다. 앞으로 그 추이가 어찌 진행될 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그 중 하나가 미래 3차원 홀로그램에 기반한 통신이 아닐까한다. 공상소설 작가 웰스 (H. G. Wells)가 소설을 쓰고 각본을 맡은 영국 영, <다가올 세상 Things to Come (1936)>에선, 누군가 대중에게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공공장소에서 홀로그램을 이용한다. 3차원 홀로그램은 그 자리에 없으면서도 통신 상대의 디지털 신체가 나타나 생생히 움직이며 의사를 전달하는 인터페이스 기술을 지칭한다. <별들의 전쟁 Star Wars> 시리즈에서도 주요 통신 수단 중에 하나로 이 기술이 종종 등장한다. <토탈 리콜 Total Recall (1990)>에서는 이 기술이 레저 학습용으로 쓰인다. 가상의 스포츠 강사를 따라 학생이 테니스의 자세를 교정하고 배우는데 홀로그램 프로그램이 훌륭한 교본 구실을 한다

 

컴퓨터 인터페이스의 진화

컴퓨터 인터페이스의 진화도 급속도로 이뤄진다. 문자 중심의 키보드 입력에서, 그래픽 윈도우 화면을 통해 마우스 클릭을 하다, 펜으로 정보를 흘려넣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장차 컴퓨터 인터페이스 진화의 방향 중 하나는, 디지털 공간 안에서 네트워크 설계나 정보 흐름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3차원 그래픽 인터페이스 기술의 발전일 것이다. 전자 네트워크망을 타고 흔히 기업 내부 문서를 빼가는 해커들의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영화들이 컴퓨터 내부 구조를 보여주는 3차원 인터페이스 기술의 미래를 소개했다. 일례로, <해커들 Hackers (1995)>에선 해커들의 바이러스 공격과 기업 내부 보안 담당자의 스릴넘치는 추격전을 이 3차원 기술로 실감나게 보여줬다.

        또 다른 인터페이스의 진화는 세밀해진 그래픽과 함께 성장하는, 말 중심의 명령어 인식 기술이다. 이미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 A Space Odyssey (1978)> '(HAL) 9000'이나, <알파빌 Alphaville (1965)>에서 도시 거주자들을 세뇌시키는 무시무시한 '알파60'이나, <악마의 씨 Demon Seed (1977)>에서 인간과 자신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족을 만들고 싶어했던 '프로테우스(Proteus)' 등은 더 이상 키보드로 소통하던 컴퓨터들이 아니다. 이들 인공지능 컴퓨터는 인간과 말을 통해 소통하고, 심지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이를 지배하려 했던 무서운 미래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어쨌든 이러한 컴퓨터들의 모습은 이미 기술적으로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는 말 중심의 명령어 인터페이스가 그 추세임을 보여준다.

j

신체정보 조회를 위한 인터페이스의 등장

기술에는 언제나 이를 쓰는 자의 힘의 논리가 깊게 깔려있다. 보안을 위해서든, 인구의 관리를 위해서든 현대 사회는 인간 정보를 그 때 그 때 조회하고 분류하고 집적한다. 우린 이미 휴대폰으로 애인이나 바람난 남편의 위치를 찾아내고, 전자태그(RFID) 칩으로 한 인간의 소비 성향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시대에 산다. 시대가 갈수록 한 인간의 신원에 대한 조회 방식은 첨단화하고 언제 어느 때든 쉽게 이뤄질 수 있도록 인터페이스 또한 진화한다. 그러다보니 이와 관련한 기술들을 소개하는 여러 SF영화들의 미래 전망은 굉장히 우울하다.

        영화 <로건의 탈출 Logan's Run (1976)>에서 미래 첨단의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손바닥에 크리스탈 모양의 신원 확인용 칩을 부착한 채 살아간다. 이 칩의 또 다른 용도는 생명 시계의 역할이다. 칩의 빛깔이 푸른색이면 아직 청춘, 빨간색이면 서른이 다가오는 거의 죽을 때, 서른살이 지나면 이도 깜빡거리면서 '카루서'(Carrousel)라는 폐기장에서 '재생'(renewal)이란 이름하에 파괴될 때를 뜻한다. 서른에 무조건 죽어야 되는 세상에서, 도시의 인공지능 메인 컴퓨터에 의해 작동되는 이 크리스탈 칩은 개인을 옭아매는 족쇄로 기능한다. 또 다른 영화, <가타카 Gattaca (1997)>에서는 유전학적으로 우성과 열성을 선별하여 사회의 계급을 나누는 미래를 보여준다. 예서도 개인의 유전학적 데이터를 집적하는 서버 컴퓨터는 머리카락 한올이나 피 한방울의 분석에서조차 개인의 모든 신상 정보와 연결하는 무서운 능력을 발휘한다.

        컴퓨터와의 한번 마주침만으로도 한 사람의 신원이 확인되기도 한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Minority Report (2002)>에선 그 유명한 표적마케팅의 미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하철에서 내리는 승객들은 교통카드 대신 동공을 인식하는 시스템에 각자 눈의 초점을 맞춘다. 지하철 통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자광고판은 그 행인의 이름을 불러가며, 그의 소비 성향에 맞춰 맞춤 광고를 띄운다. 동공으로 파악되는 이들의 신원은 기업들의 소비자 정보로 이용되고, 메인 컴퓨터에 입력되어 언제 어디서나 맞춤 광고를 내보낼 수 있는 전자 데이터가 된.

         

사이버네틱스에 의한 인간-기계의 접속

외부로부터 기계에 이르는 명령 방식의 획기적 혁명은, 아마도 인간이 생각하는 것들을 그 신경을 통해 기계에 바로 전이하는 그러한 인터페이스 구조일 것이다. 이미 사이버네틱스 연구자인 케빈 워익(Kevin Warwick)은 신체 반응의 신호를 컴퓨터에 전송하는 칩을 자신의 팔의 신경망 안으로 이식함으로써 인간-기계 합일의 미래를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워쇼스키(Wachowski)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 The Matrix (1999)>에서 미래 혁명가들은 가상의 전자 공간을 들어가기 위해 목 뒤의 포트 깊숙이 연결 단자를 삽입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David Cronnenberg) 감독의 <엑시스텐츠 eXistenZ (1999)>에선, 가상현실(vrtual reality) 게임의 일종인 '엑시스텐츠'를 하기 위해, 인간 등의 척수 끝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어놓은 바이오포트(bioport)에 마치 유기체같이 생긴 '포드'(pod)를 연결시킨다. 신경이 모이는 목 뒤나 귀밑, 척수, 머리의 정수 등은 특히 SF픽션의 세계에서 인간이 기계에 접속하는 모뎀의 포트로 기능하는 경향이 있다. 쓰거나 말하지 않아도 신경의 신호에 따라 기계가 인식하는 합성(hybrid) 인터페이스의 미래가 도래한다.

           

인터페이스의 소멸, 사이보그의 미래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인터페이스 기술의 궁극적 미래는 인간-기계간 인터페이스의 종말이자 완전한 합일로 볼 수 있다. 그러려면 기계가 인간이 되고 인간이 기계가 돼야 한다. 앞서 얘기한 <매트릭스> <엑시스텐츠>에서 선보인 인간-기계간 인터페이스 기술을 미래의 첨단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들을 접속하기 위해선 연결 포트가 필요하며 이 둘이 떼어짐과 동시에 서로 다른 객체로 분리돼 인간의 명령이 기계에 전이될 수 없다는 단점이 늘 있다. 언제나 인간이 생각하는 바를 기계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는 인공지능의 살아있는 제 3의 무엇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인간과 기계의 인터페이스를 무용지물로 만들 것임이 분명하다. 이는 단순 프로그래밍된 지능을 가진 로봇이나 안드로이드 형태보다 더 발전된 무엇이다. 최근 영화들 속에서 소위 '사이보그'(cyborg) 혹은 '휴마노이드'(Humanoid)라는 사람도 기계도 아닌, 그 둘을 합친 것 이상의 것으로 묘사되는 신종족의 등장은 곧 이를 뜻한다.

        물론 이제까지 인간의 명령어를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받아들이던 기계가 이를 걷어버리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질 때 우리의 미래가 어찌 될 지는 깊게 따져볼 일이다. 예를 들어, 영화 <휴마노이드의 탄생 The Creation of the Humanoids (1962)>은 그 부정적 미래를 코믹하게 잘 그리고 있다. 가상의 핵폭발로 인류 문명의 절멸 이후 인간 사회는 기계에 지배당한다. 로봇들이 그들 스스로를 생산하고, 인간의 문명을 지배한다. 로봇들은 결국 인간을 나약한 환경 부적응자로 취급해 인간-기계가 합쳐진 제 3의 종인 '휴마노이드'를 만들어낸다. 이들 종족은 인간과 똑같은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지니며 문제가 생기면 누구보다 논리적으로 사태에 대응한다. 만일 이들 '휴마노이드'와 같은 신종족이 우리 미래의 인간-기계 소통의 미래 현실이 된다면, 인간-기계 잡종에 대한 상상이 그리 좋지만은 아닐 게다. (2007. 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1. 영화 속 로봇의 진화, 그리고 로봇들의 반란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11


영화 속 로봇의 진화, 그리고 로봇들의 반란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몇 년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일본의 '아시모'(ASIMO)에 맞먹는 인간형 로봇 '휴보'(HUBO)를 개발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를 보면, 인간의 동작, 사고와 판단 능력을 기계 속에 심으려는 인류의 노력이 끊임없이 경주되고 있는 듯싶다. 제 삶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SF영화 속에서도 그 줄거리를 이끄는데 로봇은 줄곧 중요한 역할을 점해왔다.

이번 호는 70년대까지 영화 속에 등장했던 로봇의 모습에 대한 얘기다. 영화에서는 저급의 단순 동작을 반복하고 반응하는 기계에서부터 인간의 외양에 감정까지 갖춘 사이보그 형식까지 다양한 로봇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기계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에 얼마나 근접하는가의 정도에 따라 로봇, 안드로이드, 인공지능 로봇, 사이보그, 휴마노이드 등으로 구분되거나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들 로봇의 이미지 또한 그 때 그 때마다 인간의 충복으로써, 혹은 권력의 수행자로써, 혹은 암울한 미래의 상징으로써 변해왔다.

 



권력의 이미지거나 인간의 충복이거나

아마도 영화속 로봇의 최초 모습은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1927)> '퓨쳐라'(futura)일 것이다. 미친 과학자 로트왕(Rotwang)에 의해 만들어진 이 로봇은 기계의 외양을 하고 있으나 마리아의 정념을 불어넣어 인간과 기계 조합을 시도한 초기 사이보그 형태다. 애초 메트로폴리스의 지배자 조 프레데르센(Joh Fredersen)의 죽은 부인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퓨쳐라는 지하 노동자들을 선동해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악녀로 등장한다. 권력의 하수인과 같은 로봇의 모습은 <THX1138 (1971)>의 사이보그형 안드로이드 경찰들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절대 권력의 폭력 수행자로, 은색의 금속 얼굴에 경찰복을 입고 손에 긴 진압용 전자 곤봉을 든 이들은 마치 권력의 냉혈한 하수인처럼 행동한다. 비록 외계인이 만들어낸 로봇이긴 하나, <지구를 조준하라 Target Earth (1954)>에 등장하는 깡통 로봇 또한 레이저 빔을 내뿜으며 닥치는대로 인류를 말살하는 이름모를 외계 종족의 하수인으로 등장한다.

        그 정반대의 경우로, <금단의 행성 Forbidden Planet (1956)>에 등장하는 로봇 로비(Robby the Robot)는 당시 미국 아동들의 장난감 문화를 바꿀만큼 인간에게 애완견과 같은 존재로 로봇의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지구가 멈춰선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1951)>에서 외계 행성의 평화사절단으로 온 클라투(Klaatu)의 충복 로봇 '고르트'(Gort)그 충성심에 있어서 가히 따를 로봇이 없다. 비록 고르트의 주인이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긴 하나,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른 주인을 살리거나 주인의 말에 복종하는 로봇 이미지를 또 한번 강하게 남겼다.

        인간을 따르고 인간 사회에 우호적인 로봇의 모습은 <침묵의 질주 Silent Running (1971)>에서 두드러진다. 영화의 무대는 미래 어느 우주 화물선이다. 생태계 파괴로 지구는 거의 모든 환경이 괴멸한 상태다. 주인공 프리맨 로웰(Freeman Lowell)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친환경주의자다. 우주선에 자연의 온실을 만들어 식물을 재배한다. 하지만, 우주선 본부는 화물 수송의 본업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추장스런 온실들 모두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극도로 분노한 로웰은 본부 명령을 수행하는 한 동료 승무원과 몸싸움 끝에 사고로 그를 죽이게 되고, 내친 김에 나머지 온실 폭파 작업을 수행하던 승무원 둘까지 폭발물로 날려보낸다. 화물선에 홀로 남은 그는 드론(Drone)이라 불리는 화물수리용 로봇들을 리프로그래밍해 충직한 하인처럼 부리거나 혹은 친한 친구처럼 지낸다. 프리맨은 로봇 드론 원을 '듀이'(Dewey), 드론 투를 '휴이'(Huey)라는 이름을 붙힌다. 그는 로봇들과 카드 게임도 같이 하고, 땅을 파 나무를 심으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본부 우주선이 자신의 화물선에 접근하면서 동료 승무원을 죽였다는 자괴감과 온실을 살려야겠다는 심정에 프리맨은 극단의 선택을 한다. 듀이에게 그 온실칸을 맡긴 채 우주 저 멀리로 쏘아보내고, 그는 사고로 다친 휴이와 함께 화물선에 남아 스스로 자폭한다. 배경 음악에 70년대 히피운동에 앞장섰던 조엔 바에즈(Joan Baez)의 환경친화적 음악이 은은히 깔린다.

        다른 어떤 영화보 <침묵의 질주>는 로봇에 대한 인상에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프리맨이 운전 실수로 다치게 한 휴이에 느끼는 인간적 슬픔이나 단지 기계에 불과한 듀이에게 생태계의 상징인 온실을 맡기는 장면 등은 인간의 충복으로서 로봇의 이미지를 넘어서 자연과 공생하는 기계의 미래까지도 점친다.    

 


위기의 징후로서 로봇들의 반란

반대로 인간에게 통제 불가능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로봇들의 미래 모습이 크게 눈에 띈다. 영화 <웨스트월드 Westworld (1973)>에선 로봇 오류에 의해 생길 수 있는 위기 상황을 다룬다. 인간들의 유흥을 위해 서부 시대, 고대 로마, 중세의 세가지 주제로 델로스(Delos)라는 가상의 테마공원이 만들어지고, 실제 인간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들이 각각의 테마의 현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동원된다. 하루 체험을 위해 막대한 돈을 지불한 관람객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현실감을 느끼지만, 로봇들은 점점 오류를 보이며 인간들을 해치기 시작한다. 중세 로봇 기사가 관람객을 살해하고, 로봇 뱀이 사람을 물어 죽이고, 서부의 악당 로봇(율 브린너역)이 체험 관객에 대고 총질을 해댄다. 유희 체험을 위해 만들어진 델로스엔 살인극이 벌어지고 통제 불가능의 아노미 상태에 이른다

       

B급 로봇 영화의 결정판, <휴마노이드의 탄생 The Creation of the Humanoids (1962)>은 핵 폭발 이후 92%의 인간이 멸종되고 도시 건설과 생산력 증대를 위해 로봇들이 인간보다 문명의 핵심에 서는 미래 사회에 대한 얘기다. '클릭커'(the Clicker)라 불리는 안드로이드 로봇들이 대거 활동하고, 이들이 직접 새로운 종류의 로봇 생산까지 책임진다. 로봇의 진화가 계속되면서, 당시 로봇의 핵심 모델이었던 R-34는 방사능 시대에 살아남을 후대의 생명체로 나약한 인간들이 부적합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이들 로봇은 인간과 똑같이 감정을 지니고, 인간의 기억을 갖고, 살인에 대한 충동까지 느끼는 불법 개조 모델, 휴마노이드 R-96을 만들어 모반을 꾀한다. 인간들이 로봇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신체질서국'(The Order of Flesh and Blood)의 몇몇 관리마저 비밀리에 R-96로 개조된다. R-96의 특징은 죽기 4시간 전의 인간 신체와 기억을 필요로 한다. 마치 외계인의 증식 방법처럼, 뇌 기억을 고스란히 로봇에 옮기고 죽은 인간의 거죽을 씌워 원래 인간을 대체한다. 휴마노이드들은 자신들에게 단지 한가지 빠진 약점인 재생산(출산)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또 다른 진화된 모델 R-100을 만들자는데 일치를 보고 영화의 막을 내린다.

        <악마의 씨 Demon Seed (1977)>에 이르면, 로봇 반란의 위기는 공포로 돌변한다. 또한 휴마노이드 모델 R-100의 실제 모습도 이 영화에선 볼 수 있다. 해리스(Alex Harris) 박사는 사업가들의 수주를 받아 '프로테우스 포' (Proteus 4)라는 마치 유기체처럼 살아있는 뇌덩어리의 인공지능 컴퓨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프로테우스는 인간이 만들어냈지만, 통제 불능의 무서운 괴물로 돌변한다. 프로테우스는 자신이 갇혀있는 터미널 박스를 나와 걸어다니는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의 숙주는 해리스 박사의 아내 수잔이 된다. 연구소와 연결된 수잔의 집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로봇, 컴퓨터 터미널, 자동 장치들은 프로테우스의 통제아래 들어간다. 수잔은 외부로 나가는 모든 통로가 봉쇄되고, 심지어 그에 저항하려다 로봇에 이끌려 포박까지 당한다. 결국 프로테우스가 강제로 그녀의 자궁으로부터 채취한 세포와 자신의 인공 유전자를 재배열하여 스스로 완벽한 사이보그 아기를 낳으려 한다. 한편 연구소에선 프로젝트를 지원했던 사업가들이 프로테우스가 지닌 위험성과 그 상업적 가치를 못미더워 이를 폐쇄하는 결정에 이른다. 전원을 잃기 전, 프로테우스는 수잔의 자궁에 '악마의 씨'를 밀어넣고, 한 달여만에 그녀의 배 안에서 로봇 아이를 속성 성장시킨다. 그 악마의 생명은 프로테우스가 만든 정육면체의 금속 인큐베이터에서 5일간의 숙성을 거쳐 태어난다. 수잔은 그 인큐베이터의 괴물을 죽이려 시도하나 괴물의 금속 비늘을 벗겨내자 병으로 죽었던 자신의 딸과 똑같은 아이의 얼굴과 피부를 본다. 영화는 음산하게  그 딸아이가 프로테우스의 목소리로 "나는 다시 살아났어"라 외치며 끝난다.

        

    세 영화의 로봇관은 비관론이라기보다는 거의 심각한 공포 사회의 모습에 가깝다. 로봇이 인간을 물고,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을 숙주로 삼는 미래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인류 역사이래 기술의 진보에 열광하는 자들에게 그의 오류와 위협을 감안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러시아 체르노빌 원전의 끔찍했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얼마전 지진으로 일본에서 가장 큰 핵발전소의 핵폐기물이 그 근해에 대량 유출된 적이 있다. 강도 높은 지진에 대한 예측 오류로 인한 인재라 한다. 앞으로 그 핵폐기물이 물속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과학기술이 안전하다는 믿음은 언제나 예상치 못했던 인간의 지적 한계 능력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미래 사회 로봇의 반란이 그리 상상만은 아니라 여겨지는 까닭은 아마도 알면 알수록 끊임없이 통제 불가능의 오류들로 인간을 괴롭히는 과학기술에 대한 지적 불안감 때문이 아닐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0. 감시사회의 섬찟한 미래가 우리의 진짜배기 현실로 되돌아온다면...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10

 

감시사회의 섬찟한 미래가 우리의 진짜배기 현실로 되돌아온다면...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챨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1936)>를 보면, 한 굴뚝 공장에서 경영주가 노동자를 제어하기 위해 쓰이는 갖가지 기법들을 동원한다. 컨베이어벨트, 자동 식사장치, 노동 분업 등은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 출입 펀치 카드 리더기와 폐쇄회로 TV는 소위 '농땡이'치는 자들을 파악하는데 이용된다. 영화에서 채플린이 쉬야하러 화장실에 가서 몰래 담배를 꼬실르다 거기에 설치된 공장주의 폐쇄회로를 통해 뒷덜미를 잡히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감시는 이렇듯 보이지않는 은밀한 곳에서 저도 모르게 일어난다. 감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로부터 생성된다. <모던 타임즈>에서 감시는 공장 안이란 공간을 통해 노동 생산성을 뽑아내려는 자의 권력과 전제적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감시는 요즘엔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소비 행태를 분석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 영역을 확장한다. 우리가 아는 감시는 무엇보다 권위주의 국가에 의해 크게 저질러졌다. 사회의 불순분자 혹은 반체제 인사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에 대한 블랙리스트 작성, 도청, 감청, 위치추적, 미행 등이 그것이었다. 소위 유비쿼터스 사회로 오면, 감시의 행태는 좀 더 숨고 식별 불가능하다. 현대 사회에서 감시자는 언제나 감시 행위를 시민들의 효율적 관리라는 명분으로 감싼다. 그래서 효율성의 논리 밑에 가려진 감시의 그늘을 찾아내기가 더욱 어렵다. 게다 첨단 기술의 발전은 그 은밀함을 더욱더 강화한다. 작아지고 이동 가능한,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유무선 감시가 활개친다.  

 

테크노-관료사회의 미래

어느 누구보다 감시사회의 미래를 잘 표현했던 작가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을 꼽을수 있다. 그는 SF소설의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되는데, 이는 상상에 의존한 기존의 장르 표현과 달리 있음직한 현실에 기반해 서사를 풀어나가고, 정치적으로 경직된 관료 사회의 모습을 빗대어 형상화하고, 그 결말 또한 비관적이기 그지없다는 점에서 기존의 장르 특성에 보다 많은 다양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오웰의 대표작 <1984>를 영화화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1956영국에서 이뤄졌다. 가상의 핵폭탄이 터져 세계는 불과 몇 개의 대륙만이 남고 그 중 '오세아니아'라 불리는 대륙은 '빅브라더'의 지배하에 놓인다. 이 영토 안에서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이 빅브라더의 통치권자 아래 감시된다. 눈깔처럼 깜빡거리는 '텔레바이저들'(televisors)이 그의 수족이 되어 모든 곳을 지켜본다. 한편 주인공 윈스턴(Winston) '진실부'(The Ministry of Truth)라는 곳에서 과거 사실과 역사를 현재에 맞게 왜곡하고 필요에 따라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는 일을 맡고 있다. '사상관리 경찰국'(the Thought Police)에서 일하는 쥴리아(Julia)는 언제부터인가 윈스턴을 사랑하고 그에게 마음을 전하려 한다. 이들 둘은 깊은 관계를 지니지만, '빅브라더' 통치 아래서는 적에 대한 증오 이외에 남녀간 사랑의 감정은 금지돼 있다. 밀정에 의해 그들의 감정이 발각된 윈스톤과 쥴리아는 결국 취조실에 잡혀가 '빅브라더' 사회에 금지된 불순의 감정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세뇌를 받고 빅브라더의 힘에 굴복한다. 영화는 비관적으로 끝을 맺는다. 윈스턴은 한 때 그의 사랑하던 연인이었던 쥴리아를 외면한 채, "만수무강 하십시오, 빅브라더!"를 미친 듯 소리치며 거리를 뛰쳐나간다.     

 

사랑과 자의식은 권력의 적

프랑스 뉴시네마의 기수 쟝 뤽 고다르(Jean Luc Godard)가 만든 영화, <알파빌 Alphaville (1965)>은 또 다른 감시사회의 비전을 펼친다. 이 영화는 빅브라더 컴퓨터와 이를 만든 과학자에 지배당한 한 사회를 음울하게 보여준다. 영화 촬영 거의 대부분이 밤에 이뤄진 이 영화는 침침한 르와르 장르에 전통의 SF영화를 뒤섞고 있다. 주인공 이반 존슨(Ivan Johnson) --- 그의 본명은 레미 꾸숑(Lemmy Caution)으로 후에 밝혀진다 --- 외계(the Outlands)에서 알파빌이란 도시로 보내진 비밀 첩보원이다. 그의 임무는 알파빌에 건너가 연락이 끊긴 자신의 동료들을 찾고, 그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있다. 동료의 행방을 찾다 그는 알파빌 시민들이 폰브론(Vonbraun) 교수와 그의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60'에 의해 감시받고 세뇌당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러는 동안 이반은 폰브론의 딸 나따샤(Natasha)에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알파빌이 사랑이나 인간의 자의식 등 비논리적 감상을 퍼뜨리는 자들은 공개적으로 처형되고, '프로그래밍과 기억국'이라는 곳에선 매일같이 단어의 의미를 컴퓨터 논리에 맞춰 새로 만들고 수정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모든 단어들을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삭제하는 사회임을 깨닫는다. 예컨대, 알파빌 사람들은 컴퓨터 논리에 따라 '왜냐하면'을 표현하지만, '?'란 단어와 그 물음을 기억에서 지우고 산다. 권력에 대한 의문 혹은 감정에 충실한 언어들은 철저히 그 사회로부터 배제된다. 그럼에도 나따샤는 이반을 통해 그 잃어버린 사랑과 의식이란 단어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알파60으로부터 외계 첩보원임을 발각당한 이반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결국 그는 폰브론 교수를 총으로 살해하고 나따샤와 함께 그 마을로부터 탈출한다. 자동차로 떠나면서, 나따샤는 그녀가 힘겹게 떠올린 단어 "사랑해"를 이반에게 속삭인다.    

           

이름대신 일련번호로 호출되는 사회

조지 루카스(Geroge Lucas) 감독의 초기작 (1971)>은 감시사회의 어두운 미래를 그리는데 그 절정에 서 있다. 그가 그린 감시사회의 인간 모두는 머리를 밀고 하얀 환자복같은 옷들을 입고 다니며 이름 대신 일련번호로 호명되어 살아가는 몰개성의 생명체다. 거대 정신병동을 연상시키는 이 지하도시에서 모든 이들은 권력자에 의해 투여되는 약물로 통제된다. 이 약물은 개성을 말살하고 사랑과 섹스 등 인간 감정을 누그러뜨리는데 쓰인다. 또한 이 사회에선 인간들을 감시하고 실제 폭력을 써서 통제하는데 사이보그 형태의 '안드로이드' 경찰들이 동원된다. 어느날 여주인공 LUH3417은 그 약물의 중독성을 깨닫고 은밀히 자신의 약을 줄이고, 함께 룸메이트로 기거하는 남자주인공 THX1138의 약 또한 바꿔치기 한다. 약물 중독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이 둘은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급기야 사회로부터 금지된 섹스 행위를 하게 된다. 이들의 사랑은 권력자의 레이더망에 잡혀, 결국 이들은 출구가 보이지않는 시뮬레이션의 백색 방에 각각 감금된다. 후에 THX1138은 자신이 사랑하는 LUH3417이 이미 권력에 의해 소생 불가능할 정도로 다른 인간으로 바뀌었음을 알고 체념한 채, 결국 바깥 세계로의 탈출을 결심한다. 안드로이드 경찰들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하 긴 터널을 지나 이제껏 보지못했던 태양으로 이글거리고 새들이 날아오르는 자유의 땅에 당도한다.          

        

미래 감시사회의 모습

예서 짧게 소개된 세 편의 영화들은 각기 다른 나라들에서 다른 시기에 제작되었지만 다같이 감시사회의 공통적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게다가 어느 정도 과장은 있어도 우리의 현실과 많이 닮아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우선 사람들은 이름 대신 사회가 부여한 일련번호로 호명된다. 일련번호는 인간의 언어라기보다는 컴퓨터의 언어고, 통제와 분류 목적으로 이용된다. 한국 사회의 문제많은 주민번호도 그에 상당부분 상응한다. 휴대폰 개통, 교통카드, 인터넷 실명제 등등에서, 우리가 나면서 지니는 주민번호는 스스로를 호명하는 족쇄로 쓰인다.

        다음으로 인간 감정의 통제다. 특히 영화들에서 사랑은 금지된 덕목이다. 세 영화 모두에서 주인공들의 사랑이 권력과 반목을 이룬다. <1984>에서는 사랑대신 증오를 키우고, <알파빌>에선 아예 사랑이란 말을 사전에서 없애버렸고, 에선 권력이 사랑의 감정을 거세하기 위해 약물을 투여한다. 섹스 행위도 권력이 허하는 선에서만 이뤄진다. 오직 차가운 과학의 논리가 사회를 떠받치는 중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다시 우리 현실을 보자. 우리는 경제, 사회, 과학기술 등 정책 수립시에 효율성의 논리를 외친다. 게서 소외되고 침묵하는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하는 것은 시민의 개개인 감성을 죽이는 기계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간 감성의 억압 행위는 오늘날 관료사회가 보여주는 비인간적 통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언제 어디서든 노출된 개인의 사생활이다. 에서 LUH THX, 그리고 <1984>에서 윈스톤과 줄리아의 은밀한 사랑은 권력자들의 시선에 완벽히 노출돼 있다. <1984>에선 이웃에 의한 감시마저 가세한다. <알파빌>에선 '거주자 통제국' (Residents Control)이란 곳에 설치된 알파60이 전 도시의 시민들을 세뇌하고 지켜본다. 홀로된 곳에서 움치고 뛸 수 있는 자유가 완벽히 차단된 최악의 사회들이다. 이제 우리는 유비쿼터스 사회에 열광한다. 언제 어디서든 연결된 사회의 위험성은 모든 곳의 감시 가능성으로 돌변할 수 있다. 공적 공간에 은밀히 설치된 폐쇄회로 TV, 몰래카메라, 휴대폰 카메라, 인터넷 쿠키, 모바일 친구찾기 서비스, 지리정보위치 시스템(GPS) 등 편의와 효율성에 받아들인 기술이 우리 스스로의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결국 이들 영화는 기술의 진보에 열광하기 이전에,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되돌아볼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렇지않으면 영화 속 섬찟한 상상이 우리의 진짜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경종도 덧붙인다.         

 

(2007. 1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9. 파괴의 과학에 스러진 인류, 삶의 과학으로 곳추 세우기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9

 

파괴의 과학에 스러진 인류, 삶의 과학으로 곳추 세우기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지난 호에 우리는 초기 흑백 영화들이 과학기술로 인도된 멋진 신세계의 과장된 미래 모습을 그리는데 열중했음을 보았다. 이 밑바닥에는 과학기술이 이뤄낸 생산력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크게 자리잡고 있음도 확인했다. 예컨대, 톨스토이의 원작 소설이자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1927)>에 큰 영감을 주었던,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초 SF영화 <앨리타: 화성의 여왕 Aelita: Queen of Mars (1924)>에서도 한 때 인류 구원의 세계로 제시됐던 사회주의 체제 혁명에 대한 열광과 당시 인간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동경이 잘 녹아있다. 이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라 하면, 레닌의 '신경제계획'(NEP)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로 박차를 가하고, 사회 진보와 생산력 아래 예술의 가치를 뒀던 소비에트 '구성주의' (constructivism)가 한참 유행하던 때이기도 하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한없이 밝았고, 혁명의 이상향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고,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위대함은 이를 위한 동력으로 간주되었다. 영화 <앨리타>에 등장하는 화성인들의 건축과 그들의 의상 등에는 당시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을 칭송하고 이를 상징화하여 표현한 무대 효과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물론 <앨리타>에선 이상향의 비전 제시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노동자를 등쳐먹는 당 간부, 어리숙한 소비에트 형사들, 화성 노동자들의 반란을 자신의 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엘리타 여왕의 배반 등을 통해 과거 전제군주 시대의 나쁜 습속들이 새 시대에도 근절되지 못함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허나 이들에게 인간평등의 신세계의 미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고, 기술 진보를 통한 신세계 건설의 믿음은 그 어느 시대보다 확고했다.

 

인류 재앙과 절멸의 불길한 상상들

피비린내 나는 정적 숙청과 관료주의로 소비에트의 비전이 차차 빛바래고 미소간 군비 경쟁의 팽팽한 냉전이 찾아들면서 인류 절멸에 대한 불안감은 점점 깊어진다. 핵실험이 늘어나면서 이에 개탄하고 인류 절멸을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차차 지지를 받기 시작한다. 지면을 통해 오래 전에 살펴보았던 SF 영화 속 거대 괴수들과 돌연변이들의 출현은 방사능 오염의 공포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던 사례들이었다. 무엇보다 구소련과 미국의 군비경쟁과 핵실험에 의한 지구 절멸의 순간은 발 게스트(Val Guest)의 영국 영화 <지구가 불타는 날 The Day that the Earth Caught Fire (1961)>에서 그 의미가 생생히 전달된다.   

        가상의 어느 60년대초, 미국의 남극 핵실험과 구소련의 시베리아 핵실험은 지국 축을 뒤흔들어 그 궤도를 태양 쪽으로 내밀리게 만든다. 이로부터 지구가 재로 될 날이 4개월 남짓 남게 된다. 이후 전세계는 이상 기후의 매서운 징후를 맛본다. 때 이른 개기 일식이 이일어나고 홍수로 범람하고 사방에 가뭄으로 땅이 메마르고 폭염으로 수많은 가축들이 쓰러지고 해일과 폭풍우는 대도시들을 쓸어가 버린다. 런던의 템즈강은 메마르고 더위를 못이긴 사람들은 반벌거숭이로 물을 찾아 헤맨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선 반핵 시위와 핵 옹호자들의 충돌이 발생한다. 몇 개월 후에 지구가 불타버릴 것이라는 파국의 메시지는 인류를 거의 무질서의 혼돈 상태로 내몬다. 살인이 자행되고 거리는 광란으로 수습이 불가능하다. 태양에 불타 녹아버리기 30초전, 주인공 일행은 술집 바에서 스카치로 건배하며 인류의 종말을 쓸쓸히 받아들인다. 영화에선 세계가 구원받을지 아니면 끝내 사라져버릴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피한다.    

        강대국간 핵경쟁에 의한 인류 절멸의 위기와 그 비극이 하나의 예라면, 의도치않은 천재지변에 의한 인류 절멸의 순간도 존재한다. 다른 행성에서 날아온 혹성들과의 충돌로 지구가 사라진다는 내용의 조지 팔(George Pal)의 영화 <세계 충돌의 날 When Worlds Collide (1952)>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영화에서 인류 종말의 예언자들은 천문학자들로 분한다. 이들은, 스콜피오 행성의 자이라(Zyra)와 벨러스(Bellus)라는 혹성이 궤도를 벗어나 지구로 돌진 중이며, 먼저 오는 자이라는 지구를 빗겨가지만 큰 천재지변을 불러올 것이고 뒤이은 벨러스의 충돌은 지구를 종말로 이끌 것이라 관측한다.    

        이들 천문학자들은 인류의 절멸을 막기 위해선 '노아의 방주'와 같은 우주선을 구축해야 하며, 내부에는 가축, 동식물, 젊은 남녀 40여명을 선발하여 자이라 행성으로 이주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유엔의 각국 대표들은 이들의 예언에 콧방귀를 뀌나,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일부 돈푼깨나 있는 사업가들은 우주선을 만드는데 밑천을 대는 대가로 이 신식 '노아의 방주'에 탑승 티켓을 보장받으려 한다. 첫 번째 재앙인 자이라가 빗겨가면서 뉴욕은 해일로 물바다가 되고 세계는 화산폭발과 지진으로 인해 폐허로 돌변한다. 반면 우주선 발사 준비가 완료되고 탑승자 40여명의 선발 명단이 발표되자 이에 배제된 후보자들의 무리는 총을 들어 우주선을 장악하려 한다. 최후의 재앙인 벨러스 행성이 지구에 충돌 직전까지 오고, 우주선에 탑승한 이들은 선택되지 못한 폭도들을 뒤로하고 가까스로 지구를 벗어난다. <지구가 불타는 날>과 달리 이 영화는 곳곳에 인류애적 감상이 묻어난다. 어디에도 인간 무리들의 아노미 상태나 혼란은 없다. 질서정연하고, 때론 자신을 희생해 우주선에 합류하길 포기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탑승에서 배제된 무리나 돈으로 우주선 티켓을 사려던 일부 인간들도 존재하나, 모두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고 도덕적이다. 절멸 이후의 모습도 꽤 희망적이다. 지구의 종말로부터 생존한 이들은 자이라에 무사히 도착해, 지구보다도 훨씬 나은 이상향의 무릉도원을 맞이한다. 영화는 "신세계의 첫 번째 날"이라는 성경 창세기에 빗댄 해피엔딩의 메시지로 끝을 맺는다.    

           

먼저 찾아가본 우리의 미래

조지 팔(George Pal)이 제작하고, 웰스(H. G. Wells)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타임머신 The Time Machines (1960)>은 이같은 지구 절멸의 순간을 미리 보고, 그로부터 살아남은 인간 문명까지 미리 상상해볼 수 있는 재미를 준다. 주인공 조지는 새로운 세기를 앞둔 1899 12월 마지막 날, 자신이 개발한 타임머신을 타고 4차원 시간이동 여행을 떠난다. 그가 1917년에 타임머신 기계를 멈추자 유럽은 독일과 전쟁 중이고, 그 전쟁은 1940년까지도 계속된다. 다시 그가 1966년의 어느 날로 접어들자 인간들이 개발한 핵 위성으로 지구는 쑥대밭이 되고 다급히 이를 피해 더 먼 미래로 키를 잡는다. 인류의 암흑기가 계속되다 서기 802,701년에 접어들어서야 조지는 순수 자연의 지상 낙원을 발견한다. 하지만, 조지의 기쁨도 잠시 뿐, 그 곳엔 후대 인간들끼리의 암울한 먹이사슬이 존재함을 금방 깨닫는다.

        살아남은 인간 종족의 일부는 개미굴을 파 지하로 들어가 생활하면서 '몰락'(the Morlocks)이라는 종족이 되고, 일부는 지상에 남아 '일로이'(the Eloi)란 종족으로 번식해 살아간다. 몰락은 지하에 살면서 번쩍이는 눈을 가진 괴물로 변한 채, 일로이 종족을 가축처럼 풀어놓고 먹이와 옷을 주며 번식시켜 이들이 성숙해지면 잡아먹는 식인종이 된다. 일로이 종족은 찜질방에서나 입는 옷을 입고 금발의 무표정한 청춘 남녀들이 떼로 무리지어 다닌다. 일로이 종족은 몰락의 배를 불리는 인간 가축들에 진배없다. 몰락은 이전 인류의 전쟁 시기에 사용하던 공습 사이렌을 이용해 일로이 무리를 개미굴로 유인해 그 때 그 때 잡아먹는다. 조지는, 몰락이 불에 약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개미굴에 들어가 이들을 불태워 죽이고 자신이 사랑하는 일로이 족의 여인을 구출하고, 그 종족에게 문명을 일으키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그 먼 미래에 홀연히 남는다. 예서도 비극적 미래를 넘어서 인류 희망의 비전을 잃지 않으려는 시각이 묻어난다.               

        

인간 희망의 끈, 과학기술

핵기술에 의한 인류 절멸의 순간에서도 실낱같은 삶의 희망을 움켜지려는 인간의 모습은 당시 영화들의 공통된 정서였던 듯싶다. <세계 충돌의 날>에서 '노아의 방주'격인 지구 탈출 우주선의 아이디어가 지금에 와서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해도, 당시에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과학적 해결책이자 상상물로 봐야한다. <지구가 불타는 날>에서 인간들은 지구 축을 원상복귀하려고 절멸의 순간에 또 다른 핵 투하를 계획한다. 그도 터무니없는 시도이긴 하나, 역시나 당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었다. <애리타>에서도 소비에트 혁명의 파고를 화성까지 밀고가는데, 주인공 로스(Los)의 우주선과 화성인들의 상상 속의 첨단기술 없이는 불가능했다. <타임머신>에선, 조지의 최첨단 타임머신과 그가 가져갔던 성냥불 없이는 몰락 종족과 일로이 종족의 먹고 먹히는 비극적 삶을 끊기 힘들었을 것이다.        

        핵기술에 참담히 무너지고 또 다시 과학에 의탁해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모습은 어찌보면 허망하고 무기력해 보인다. 그래도 인류 절멸의 순간에 그 희망의 끈을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데 또 다시 과학기술의 공이 있다 생각하니 과학과 인간의 관계는 한 몸임을 느낀다. 베고 할퀼수록 인간들에게 상처로 돌아오나 보듬을수록 희망을 볼 수 있는 그 것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8. 첨단 과학기술로 가능한, 이유있는 미래 풍경들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8

 

첨단 과학기술로 가능한, 이유있는 미래 풍경들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인간에게 언제나 과학기술은 구질구질한 현실을 극복하는 희망이자 마취제와 같았다. 18세기 중엽 영국의 산업혁명, 그 굴뚝 공장에서 쉴틈없이 나오는 상품더미,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했던 과학기술에 인류는 경이의 시선을 보냈다. 한편으론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상품이 넘쳐날수록, 인류의 진보와 고른 분배가 위로부터 슬슬 아래 밑바닥까지 퍼져나갈 줄 믿었다. 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학기술에 탄력을 받아 이룬 생산력의 진보가 현실의 불균형 문제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그 골을 더 악화시키고 있었다. 20세기 전반 밀어닥친 혁명의 물결은 점점 깊어만가는 계층간 모순의 골 때문에 들끓었다. 하지만 당시의 혁명들조차 탐욕의 인간을 미워할지언정 기술에 대한 신뢰는 거두질 못했다. 마르크스 할아버지까지도 과학기술로부터 얻은 생산력이 찬란한 사회주의를 위한 토대라 하지 않았던가.

시간이 흘러, 이제 우리는 기술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인터넷 시대를 넘어서 바야흐로 유비쿼터스 시대로 가고 있다. 현실의 불균형과 모순은 그대로 떠안은 채, 어디든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실기간으로 접속되는 미래 모습에 우린 또 한번 열광한다. 한때 과학기술이 마련한 생산력의 마술에 흥분했다면, 이젠 언제 어디서든 빛의 속도로 연결되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매 시대마다 열광은 달랐지만, 과학기술에 대한 동경은 항상 그 자리를 지켰다. 과학기술은 그저 좋은 것이요, 쓰임새에 따라 좋기도 하고 심하게 나빠지기도 한다고 보았다. 그 믿음은 기술의 산업화가 급진전된 이래 아직까지 굳건하다. 하지만 현실이 삭제된 과학기술의 동경은 근거없는 법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번 호는 그 과학기술의 경이에 마취된 시대에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영화들을 몇 편 소개할까 한다.

 

물밑 잠수함을 통해 본 미래

과학 모험소설의 대가 중 하나를 고르라 하면 역시 쥘 베른 (Jules Verne)이다. 그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1916)>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이후에도 몇 차례 베른의 <해저2만리>가 영화화되었지만, 내가 유독 이 때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베른조차 소설 속에서 묘사하지 않았던 선장 네모의 출생사가 담겨있고, 과학에 대한 당시의 시대정신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우선 네모 선장의 출생 배경은 이렇다. 지금은 세상을 등지고 바다에 떠돌며 불의와 싸우는 독특한 인물로 등장하지만, 네모 선장은 원래 다카르(Daakar)라는 이름의 인도 왕자였다. 찰스 덴버(Charles Denver)라는 영국 무역상의 음해로, 영국 식민군에 반해 이들을 추출하려는 모반을 꾸민다하여 급기야 그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한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식민 군인들과 인도인들의 충돌 도중 덴버에 의해 살해되고, 그의 딸까지 잃고 왕국은 폐허로 변한다. 결국 네모는 세계 각지를 떠돌며 그 분노를 삭이며 식민주의자들과 싸우는 인물로 설정된다. 세월이 흘러 '신비의 섬'에 홀로 사는 자연인이 바로 네모의 딸로 판명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 불쌍한 부녀가 극적으로 상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네모는 그 충격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대부분이 <해저 2만리>를 연상할 때 떠올리는 장면은 '괴물문어'와 인간과의 싸움 장면이다. 허나 이 영화는 사건의 중심에 '괴물문어'의 습격을 막기 위한 탐사선의 모험담을 늘어놓기보단, 선장 네모를 통해 당시 식민주의의 거친 시대 상황을 표현하려 애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에 대한 동경과 장밋빛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데에 이르러서는 많이 과장되어 있다.

선장 네모는 미국 정부의 탐사선, '아브라함 링컨호'에 탑승한 과학자 일행을 자신의 잠수함 노틸러스 (nautilus)'에 감금한 채, 일행에게 과학기술의 숭고함을 성토한. 현실 세계의 인간들은 선장 네모의 시선으로 미래 과학기술의 가능성을 체험한다. 그 당시 물밑을 가는 배가 존재할 수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노틸러스 그 자체는 기술의 경이였고, 해저 밑바닥에서 산호초 등 그 전경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드는 고강도 '신비의 유리 창문' (선장 네모는 그리 불렀다) 또한 그저 상상의 기술에 가까웠다. 우주복과 같은 해저 잠수복을 입고 바다 밑을 거니는 것도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아이디어였다. 실제 방수 카메라 장치가 없던 시절에 찍었던 이 영화에서 바닷속 촬영은, 윌리암슨 형제가 수중유리 박스에 카메라를 대고 비춰진 전경을 찍는데 만족해야 했다. 어쨌거나, 새로운 해저 세계의 경험은 기술에 의해 인도된 신세계임에 틀림없었다. 선장 네모는 "신조차 우리에게 보여주길 꺼렸던 것들을 (인간의 기술을 통해) 보여준다"며 인간 과학의 성과에 대해 침을 튀기며 극찬한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당시 식민주의 현실의 권력 관계와 인간의 탐욕 등을 잘 묘사하고 있지만, 기술에 인도된  물밑 신세계를 통해 인간이 바라는 과학기술의 이상향을 찬탄하는데 크게 주저하지 않았다.

 

미래주의자들의 시선을 통해 본 미래

미래 공상과학 소설의 대가하면 우린 누구보다 웰스 (H. G. Wells)를 떠올린다. 그가 소설을 쓰고, 영화의 각본을 맡은 영국 영화, <다가올 세상 Things to Come (1936)>은 과학기술 예찬론의 극단에 서있다. 1940년 크리스마스날 한 가상의 도시, '에브리타운 (Everytown)'이란 곳에 전쟁이 터지고, 그 전쟁은 30여년간 지속되며 인간의 문명을 잿더미로 만든다. 게다가 전쟁 중 창궐한 돌림병 (the wandering sickness)은 수많은 사람들을 앗아간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지역 자치구를 만들고, 그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주위 자치구를 정벌한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과학자들은 이라크의 바스라를 거점으로 지금의 UN 비슷하게 전세계의 무정부 상태를 원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세계연맹 (Wings over the World)'이란 조직을 구축한다. 이들은 미래 기술로 중무장하고 자신의 이름 아래 세계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자치구들을 진압한다. 주로 진압의 기술은 '평화의 가스 (the Gas of Peace)'라는 것으로, 미래형 전투기들을 통해 자치구에 가스탄을 살포해 도시의 시민들을 잠들게 한 후 이들 지역을 포획하는 방식이다.

시대가 흘러 2036년이 되면서 인류는 지하에 거대한 미래 도시 문명을 건설한다. 아테네 아고라 광장을 연상시키는 건축과 그 시대의 복장들을 하고 나타난 미래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만끽한다. 그 와중에 인간의 끊임없는 기술발전의 욕망에 넌더리를 내는 한 선동가에 의해 기술파괴의 러다이트 (Luddite) 봉기가 일어난다. 하지만 과학의 무궁한 기대치를 갖고 있는 지도자는 '스페이스 건' (space gun)이라는 대포 장치에 그의 딸을 우주선에 실어 달나라에 쏘아보낸다. 영화는 성난 군중들이 난입해 들어옴과 동시에 그 지도자가 또 다른 신세계에 대한 개척과 진보에 대한 믿음을 설파하면서 장렬히 끝을 맺는다.

영화 <다가올 세상> 2차 대전의 전운을 감지한 덕에 그 빛을 발했다. 실제 1939년을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시점으로 본다면 1940년의 전쟁 상황 설정은 상당히 적중했다. 전쟁으로 인한 인간 문명의 말살이라는 메시지가 유효했지만, 영화에서 시종일관 흐르는 과학 예찬의 경구는 지겨울 정도다. 전쟁 이후 생존한 과학자들에 의해 꾸려지는 미래 세계라는 설정은, 사회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평화의 역할자로 과학자 엘리트 집단을 다룬다는 점에서 상당히 위험한 시각이다. 게다가 과학의 미래를 불신하는 대중선동가와 이를 따르는 대중을 철저히 과학에 무지하고 걸리적거리는 부류로 치부한다.

        

가공의 기업 도시를 통해 본 미래

어쨌든 <다가올 세상>에서 큰 사회적 화두가 전쟁의 참혹상이었다면, 시아 혁명의 파고가 휩쓸고 간 시대에 토픽은 단연 사회에 뿌리깊은 계급 불평등의 문제일 것이다.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1927)>는 공상의 미래 기업 도시국가에서 계급 불신의 골을 다룬다. 랑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계급간 화해와 공존이다. 영화 시작을 알리는 경구용 자막에도 "머리와 손의 중개자는 가슴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서 머리란 지식노동자 혹은 경영자요, 손은 공장 노동자를 지칭한다. 가슴은 노사간 '신뢰'(trust)에 해당한다. 결국 영화는 계급 혁명으로 한쪽을 멸하는 방식이 아닌, 노사 화합의 믿을만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당의성에 집착한다.

어설프게 계급 화해를 부르짖는 내용에 눈살이 찌푸려지긴 해도, 랑이 그리는 메트로폴리스의 미래 도시 묘사는 상당히 섬세하고 풍부하다. 공중을 나는 비행선들, 고층빌딩 숲을 지나는 고가도로들, 미래의 고층 도시들, 증기를 뿜어내며 돌아가는 기계 장치들, 이 모두가 미래의 미장센(배경소품)들로 선택된다. 미래에도 노동자들의 땀을 쥐어짜는 시스템은 더욱 강화한다. 모든 시계는 노동자의 하루 노동시간인 10시간으로 고정되어있고, 노동자 군상들은 기계처럼 좀비처럼 혹은 군인처럼 어두운 작업복을 입고 작업 교대를 위해 묵묵히 발맞춰 공장으로 걸어간다.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곳은 빛이 들지 않는 깊은 지하에 위치하며, 일이 파하면 다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거처로 내려간다. 가진 자들은 지상에 산다. 메트로폴리스의 지배자 조 프레데르센(Joh Fredersen)과 그의 아들 프레더(Freder) '하이 타워'에 살면서 도시를 지배한다.

프레더는 우연히 노동자 마리아를 첫눈에 보고 사랑하게 되나, 미친 과학자 로트왕(Rotwang)의 농간으로 붙잡혀 그녀는 '퓨쳐라'(futura)라 불리는 사이보그에 정념을 심어넣는데 이용된다. 이후 마리아를 통해 프레더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눈을 뜨게 된다. 여기서 강조할 바는 랑의 미래 기술 묘사다. 비록 결론에서 자본가인 프레데르센와 노동자들의 리더인 그로트 (Grot)가 계급 화해를 하는 예고된 식상함을 보여줬지만, 이 영화는 기술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데 있어서만큼은 꽤 사실적이었다. 첨단 기술아래 허덕거리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나 인조인간 퓨처라의 부정적 묘사는, 기술이 중립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각본에 의해 생성됨을 새삼 깨닫게 한다. 계급간 모순을 감상으로 봉합하려는 각본이 여러모로 눈에 거슬리긴 하나 미래 과학기술에 대한 깊은 회의를 담은 점은 남다르다. 랑의 메시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기술관에 큰 시사점을 준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언제나 현실의 모순을 그대로 품어 안고 간다는 사실 말이다. 뒤집으면, 모순의 해결없이 진보는 허망한 신기루일 뿐이라는 진실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