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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디바이스’의 진화와 가족의 재탄생

‘소파 디바이스’의 진화와 가족의 재탄생

 

이광석

 

 


‘소파 디바이스’(sofa devices)란, 말 그대로 주로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거실 소파를 중심으로 활용되는 미디어 장치를 지칭한다. 그러다보니 이 미디어 장치들은 가족 구성원 공통의 여가 활동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 예전 텔레비전 시대를 떠올려 보라. 한 때 가족 성원들이 밖에 나갔다 저녁에 들어와 모이는 공간에 항상 텔레비전이란 ‘소파 디바이스’가 그 중심에 있었다. 옹기종기 가족들의 저녁밥상 머리에 혹은 다과를 나누면서 행하는 가족의 대화에 어김없이 텔레비전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가구가 배치됐고, 그 반대편엔 가족이 진을 치고 앉을 수 있는 소파의 자리가 늘 준비되었다. 이렇듯 텔레비전은 가족 공동체의 집단적 여가 활동의 적절한 대상이자 주요 매체였던 셈이다.

 

90년대 접어들면, 오래된 미디어 기기들이 ‘경박단소’하게 변하면서 대중들은 개인의 취향대로 미디어를 소비하는데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모두들 대중의 분중화와 파편화를 거론했다. 텔레비전의 방송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와 채널들을 통한 소비가 그리 만든 것이다. 이는 개성과 스타일의 부각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의 징후이기도 했지만, 정치적 혹은 사회적 공통 관심사의 축소라는 불편한 미디어 효과를 만들기도 했다. 후자의 측면에서 가족내 구성원끼리의 소통의 단절 또한 거론됐다. 한 때 거실-텔레비전-소파의 축 안에서 거행되던 공통의 가족 ‘의례’(ritual)가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조차 컴퓨터로 내려받아 보거나, 가족 구성원들 각각 각자의 방에서 자신의 선호하는 미디어를 소비하는 형상으로 가고 있다. 예를 들면, 부모들은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형이나 누나는 DMB나 넷북을,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서 컴퓨터나 게임기를 갖고 놀면서, 전통적 ‘소파 디바이스’인 텔레비전 앞에서 맺어지는 가족간 유대가 사라져 간다.  


최근 이렇듯 점점 죽어가는 ‘소파 디바이스’의 영역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애플이 개발한 ‘아이패드’(iPad) 개발 시연에 회장 스티브 잡스가 강연대 앞에 서는 대신, 그 자리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편안히 회심의 개발품을 두드린다. 아이패드를 통해 해체됐다고 믿었던 가족들을 다시 거실에 모을 수 있다는 얘기일까? 이도 허황된 것만은 아닌 것이, 최근 닌텐도 ‘위’(Wii) 광고를 보라. 비디오 게임도 이젠 가족이 함께 즐기는 여가 활동이다. 소통의 실마리는 간편하고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에 있다. 여기에 오락적 요소는 필수불가결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손주, 며느리 모두 모여 위 게임을 한다. 집안의 며느리는 요가를, 할아버지와 손주는 테니스를, 할머니와 아들은 권투를 즐긴다. 게임 도중에 쉬고 있는 가족들은 대개들 흐뭇한 표정으로 소파 위에 기대앉은 채 다른 가족 구성원의 게임을 지켜보거나 응원한다. 결국 이제 위 게임기가 텔레비전을 대신해 신종 ‘소파 디바이스’가 된다. 파편화되고 흩어졌던 현대 가족을 새롭게 모으는 역할을 이와 같은 신종 디지털 장비들이 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위처럼 아이패드 또한 이와 같은 ‘소파 디바이스’ 부류의 전면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소파 디바이스의 초창기 모델들


잠시 좀 더 먼 과거로 돌아가보자. 사실상 소파 디바이스의 초창기 모델은 축음기였다. 태엽을 감아 돌려 소리를 듣는 돌판 축음기부터 엘피(LP) 축음기까지 초창기 소리 장치는 거실 문화의 중요한 요소였다. 워낙 가정내 문화적 향수 자체가 희소했던 시절에 축음 장치는 중요한 가족 여가 수단이었다. 이어서, 보다 본격적인 소파 디바이스는 라디오였다. 1920년대 라디오가 상업화되면서 등장했을 당시, 이는 어지간한 김치냉장고 크기만큼이나 거대했다. 손가락 마디 굵기의 진공관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당시 라디오 크기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일반 가정에서 라디오는 가족들이 함께 여가를 즐기는 중요한 매체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뿐만 아니라 라디오 극장이나 안방 뉴스 등은 가족들이 모여 즐길 수 있는 축음기 이후의 한껏 진화된 매체 형식이었다. 이후 텔레비전의 등장은 극적으로 가족의 유대를 강화했던 매체다. 한 기업 광고에서 진흙으로 만든 인형들을 이용해 근대화 시기의 한국 생활을 묘사했던 시리즈물을 떠올려 보라. 텔레비전이 귀하던 시절에, 김일 박치기 레슬링 경기라도 볼라치면 동네 이장네 안방이나 돈푼이나 있던 집 대청마루 앞에 몰려 가던 시절이 있었다. 텔레비전은, 적어도 한국사회에선 60년대 시골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적 여가 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70년대로 넘어오면, 마을 단위의 공동 시청 유형에서 각 가정의 거실을 지배하는 중요 매체로 군림한다.

 

한편, 80년대 들어서면 기존 라디오는 텔레비전에 소파 디바이스의 자리를 넘겨주고, ‘개인 미디어’로써 그 자리를 잡는다. 그 시기는,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라디오 기술에 일대 혁신이 일던 때와 괘를 같이 한다. 트랜지스터의 가장 큰 이점은 덩치 큰 라디오 크기를 대폭 소형화해 휴대가 간편해진 점이다. 마치 정보국 직원들처럼, 버스에 오른 회사원들이 외짝 이어폰을 한쪽 귀에 꼽고 뉴스와 음악을 청취하던 시절은, 트랜지스터 기술이 만들어준 신문화였다. 당시 청소년은 이런 라디오를 끼고 공부방과 독서실로 향했다. 혹은 집에 돌아와 한창 사춘기 때에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 뒤집어쓴 채 ‘별이 빛나는 밤에(별밤)’을 들으며 밤을 지새우곤 했다. 나름 매체 소비의 가족간 변별과 단절이 존재했던 시절이다. 당시 어른들은 여전히 거실에 남아 텔레비전을 소비했고, 아이들은 개별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개별 매체의 소비를 즐겼다.

 

8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 90년대로 넘어오면 확연하게 매체의 개별 소비가 확대된다. 십대들은 워크맨과 노트북으로 무장한다. 오디오 청취와 이미지 소비의 공간 이동성이 실내에서 확장되어 길거리 신체 이동의 동선과 함께 하는 시대가 열린다. 2천년대 이후 아이들은 아이폰, 게임보이, 넷북 등에 의존하면서 공간 제약과 무관하게 다면적이고 개인화된 미디어 소비 단계에 들어선다. 어른들 또한 DMB 방송을 휴대전화나 네비게이션 등을 통해 시청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이젠 거실의 텔레비전이란 스펙터클한 영화를 보는 정도에 쓰이는 붙박이 미디어 장치로 전락한다.

아이패드, 가족 재탄생의 신호탄?

 

필자가 현재 사는 아파트에 3세대가 같이 산다. 이처럼 많은 가족 구성원이 같은 시간대에 함께 모일 수 있는 상황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런데도, 다들 모이는 때가 있다. 식사 때를 제외하곤 ‘위’ 비디오 게임을 할 때다. 이 때 거실 텔레비전은 위라는 소파 디바이스를 위해 이미지만을 투사해주는 조력자에 불과하다. 사실상 우리 가족 유대를 키우는데 위가 핵심에 서고 그것이 가족의 여가를 구성한다. 놀이방식의 격세지감이요 변화된 가족의 소통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소파 디바이스로 이제 아이패드까지 거론된다. 아이패드의 인터페이스는 철저하게 터치형에다 대단히 감각적이기 때문에 익히기 쉽게 만들어져 있다. 노인들 또한 몇 가지 기능만 익히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거나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소통을 할 정도로 조작이 수월하다. 집안의 항상 연결된 무선 인터넷 구조를 이용해 손쉽게 정보를 찾고, 아이패드용 체스를 두기도 하고, 맞춤형 잡지를 함께 보고 읽을 수도, 아이패드 게임을 하기도 하고, 간단한 영화도 함께 볼 수 있다. 또는 음식 레시피를 공유한다거나, 집안 관련 경조사나 그날 일의 메모나 스케줄을 함께 관리한다거나 중요한 수입과 지출을 기록해 놓는다거나, 쉽게 즐기는 게임을 올려두는 등의 용도로 쓸 수 있다. 아이패드형 터치스크린 기기들은 다분히 개인형 매체로 볼 수 있지만, 또한 누구든 쉽게 소파에 머물면서 함께 할 수 있는 미디어의 성격 또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본 것처럼, 새로운 소파 디바이스의 출현이 가족 성원들간 소통 방식에 유대와 혁신을 불러올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위나 아이패드 등 미래형 소파 디바이스란 단순히 틈새 기술이란 점을 주지해야 한다. 이미 다양하게 소비자들 혹은 가족들의 분권화와 파편화를 증대하는 신종 기술들과 문화 상황이 대세요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2010. 7. 지역정보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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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텔레비전 대신 차라리 구글TV를 내게 다오!

3차원 재현의 완벽성이 텔레비전 미래의 전부인가?

- 또 다른 하드웨어 중심주의의 신화론에 부쳐


이광석(@txmole)

최근 3차원(3D) 재현 기술에 국가가 발벗고 나서고 관련 업계가 열광하고 있다. 주도적 혹은 핵심적 IT기술의 선점과 수출 증대는 장기적으로 중요한 국내외 성장 동력임이 분명하다. 이 점에서 3차원 재현 기술은 우리가 욕심을 낼 수 있는 영역이다. 하지만, 3차원 재현기술의 개발은 현재 그리고 향후 전세계 IT시장의 추이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 맥락을 세심히 살핀 후 이뤄질 일이다. 사실상 국제적으로 최고 순위를 지켰던 한국의 정보통신 지수들이 왜 최근 위기 국면을 맞았는 지와도 잘 연계해 따져봐야 할 일이다. 


먼저 3차원 영상기술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를 주도했던 사건은, 해외 영화 <아바타>의 국내 개봉이었다. 이 영화는 국내에서 최고 흥행 기록을 갱신했을 뿐만 아니라, 3차원 영화의 오락적/기술적 가능성까지도 현실화했다. 국내 일반 상영관은 물론이요, 3차원 전용 영화 상영 아이맥스관이 연일 매진 행진을 이어갔던 것은 이를 반증한다. 엄밀히 따져보면 <아바타> 흥행의 성공 요인은, 우선은 잘 짜여지고 탄탄한 스토리에다 특수컴퓨터그래픽(CG)의 효과까지 잘 앉혀있고, 이에 3차원 효과의 맛까지 적절히 가미한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제작자들의 말처럼, 3차원 효과는 “<아바타>란 아이스크림 위에 살짝 얹은 체리”와 같다는 말이 예서 적절한 표현이다. 기술보다 콘텐츠의 중요성을 지적한 말이지만, 아무튼 이로 인해 3차원 기술은 한국에서 대중의 화두가 됐다.

 

입체영화에 대한 이와 같은 오락적 기대치와 함께, 삼성과  LG 등 가전업체들의 새로운 텔레비전 시장 마케팅도 분위기 조성에 한몫하고 있다. 국제 텔레비전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우위를 선점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크게, 플라즈마 티브이와 같이 벽걸이 텔레비전의 가정내 극장화나 가구화와 더불어 3차원 고화질 입체영상을 통한 이미지 재현 능력의 고도화라는 이중의 목표에 걸쳐 있다. 특히, 전자의 영역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재미를 봤던 가전사들이라, 기술적으로 후자의 영역에서 향후 큰 시장 잠재력을 본다. 그래서인지 국내 두 가전사는 3차원 입체 텔레비전 판매 전망에도 대단히 낙관적이다. 6월에 있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등의 특수에 주목하면서, 향후 스포츠나 영화, 게임, 오락 등의 영역에서 3차원 영상 구현의 가능성을 본다. 특히, 국내 ‘디지털 텔레비전’(DTV) 전환과 관련해서도, 3차원 영상 구현이 나름 적절한 연계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본다.

 

정부 접근은 어떠한가? 3차원 입체영상 정책 로드맵이 어느 정도 구체화하고 있다. 이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가고용전략회의’에서는 올해 3차원 텔레비전 시험방송을 시작으로 2015년 입체용 고글안경 착용 없이도 시청가능한 텔레비전을 개발한다는 야심찬 산업 발전 전략을 밝힌 상태다. 2015년까지 이 분야에 8천억을 투자해 2014년까지 시장 규모 15조원에 4만여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야심찬 목표치도 설정했다. 말 그대로 ‘꿩먹고 알먹자’는 것인데, 우선 좀 뒤쳐진 우리의 국제 IT정책 지수도 회복하고 핵심기술 영역도 만들어 먹거리도 만들어보자는 복안이 깔려있다.

좋다. 늦게나마 IT 정책에 정부가 나서서 업계의 분발을 위해 3차원 핵심 기술에 대한 육성 전략을 내오는 것은 우선은 고무적이다. 우리의 IT 성장이 일정 부분 국가와 기업간 협의 구도를 통해 성공을 이뤘던 사례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가시적으로 흥행수표인 듯 보이는 기술들이 진정 미래까지 책임지는 핵심 동력인가를 잘 따져봐야 한다.

 

먼저, 기술적으로 현재까지 국내에서 개발한 3차원 영상 구현 기술은 아직도 많이 불완전하다. 입체 시청이 가능한 안경 없이도 3차원 화질을 완벽히 구현할 수 있는 시점이 그리 빨리 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입체 영상을 즐기기 위해 지불해야하는 비용들을 따져보면,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그만한 비용을 감내하고라도 구입할 수 있는 오락 미디어로 자리잡을 지는 아직 미지수다.

 

둘째, 정부는 보다 근원적으로 텔레비전 기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얼마전 구글이 ‘구글 텔레비전’을 개발한다는 뉴스가 미국의 <뉴욕타임즈>에 크게 실렸던 적이 있다. 현재 시험방송 중인 구글TV는, 구글(운영체제), 소니(수상기 제작), 인텔(스마트칩 내장) 등이 연합해 만들어내는 미래의 텔레비전 모델 중 하나다. 텔레비전 기술의 한 축이 지금의 3차원 텔레비전처럼 재현과 실사 능력을 극대화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실제와 같은 착시를 일으키는 쪽으로 개발되고 있는 반면에, 구글 TV는 인터랙티브한 컴퓨터와 콘텐츠 개념을 전통의 텔레비전 개념과 ‘합치는’(convergent)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구글TV로 대표되는 후자의 텔레비전 기술 경향에 대한 고려 없이는 미래 텔레비전의 발전에 대해 반쪽짜리 진화론을 주장하는 꼴이 될 수 있다. 3차원 기술에 대한 정책 독려도 중요하지만, 후자에 대한 대응 혹은 대비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곤란하다. 

 

셋째, ‘쓸만한 콘텐츠 없이는 3차원 구현 텔레비전은 무용지물이다’라는 말들이 적잖이 들려온다. 3차원 실사 구현도 중요하나 이를 채울 콘텐츠 제작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앞서 <아바타>의 성공에 콘텐츠의 탄탄함이 기본이 됐음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시청자나 소비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원할까라는 문제의식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우리 휴대전화 생산업체들이 국내 모바일 시장에서 쌓아왔던 오랜 기술과 공력이 단 한순간 애플의 아이폰과 이이패드로 인해 단 몇 개월 사이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라. 기술 개발의 하드웨어적 접근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기술의 고도화로 대부분이 엇비슷한 경쟁력을 가질 때 소비자가 주목하는 것은 콘텐츠의 접근성과 활용 가능성이다. 미디어 이용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추동할 수 없는 기술들은 사실상 무용(uselessness)의 기술이 되기 십상이다. 마치 아이폰의 충격에서 처럼, 우리의 3차원 텔레비전 기술이 또 한번 구글TV와 같은 콘텐츠 중심형 텔레비전 모델에 무기력하게 당하는 일을 만들어선 곤란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IT 혹은 미디어 생태계 발전의 방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음을 봐야 한다. 한 때 정부 주도로 혹은 기업과의 협의기구를 통해 IT 초고속망을 깔고 하드웨어 기기를 단독 개발해 선진국형 기술을 독자 생산해 성공을 구가하던 호시절이 있었다. 그로부터 고도 성장의 중흥기를 제대로 맛 보았다. 그러나, 이제 디지털 경제의 체질이 바뀌고 있음을 지각해야 한다. 마치 90년대 중반 이후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도의 한계를 파악하고 발빠르게 정보화에 들어섰던 것처럼, 지금이 바로 그 비슷한 상황이며 또 다른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상황을 요구한다. 즉, 하드웨어 중심의 IT 발전으로부터 ‘소셜 미디어’가 각광받고 ‘집단지성’과 협업의 논리가 ‘신’경제의 핵심이 되는 시기로 전환되고 있다. 이같은 도도한 흐름 속에서 텔레비전 기술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다시 풀어 말하자면, 텔레비전 기술의 미래는 실사 재현의 기술 개발도 중요하지만, 관련된 콘텐츠 기술과 이를 추동할 수 있는 기술 문화를 육성하는데 모아져야 한다.


하드웨어 기술 개발은 국가가 나서 독려하면 단기간에 일정 정도 성과를 낼 수 있으나, 소프트웨어나 콘텐츠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미래 텔레비전 영상의 발전에 있어서도. 보다 장기적으로 꾸준하게 자유로운 문화 생산의 토양을 만들어주는 간접 지원이 정부 정책의 주된 역할이 돼야 한다. 기업들 또한 구글TV와 같이 소프트웨어 진화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텔레비전의 기술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2010. 5. 지역정보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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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와 지방선거 - 실천문학 (2010 여름)

트위터와 지방선거 - 실천문학 (2010 여름)

이광석 (@txmole)

작은 아이콘들이 네트를 통해 쉼없이 재잘거리며 말들을 뱉어낸다. 이를 영어말로 ‘트윗’이라 한다. 트윗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물이 ‘트위터’란 서비스다. 말 그대로 재잘거리는 트윗들에게 소통의 자리를 깔아주는 매개자이다. 이 작은 웅성거림이 이제 한 국가에선 혁명을 돕고, 정치 비리를 들쳐내고, 재난 소식을 공유하거나 완화하고, 지구촌 한쪽의 가난을 함께 나서서 해결하고, 누군가의 아픔을 공유하고, 낙후한 선거 정치에 혁명을 이끌 수 있는 울림으로 전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승 모드에 힘입어 최근 트위터 개발자는 마치 스스로 표현 자유의 투사인 듯 의기양양해서 중국 공산당의 권위주의에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이와 달리 대한민국에서는 트윗조차 권력이 허하는 ‘관용’(tolerance)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정치적 도발 행위로 간주된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리 대한민국 선관위가 불법 선거운동의 일환이라 하여 트위터를 틀어쥐려 한다. 소수의 재잘거림마저 막으면서까지 전세계 유일무이한 트위터 탄압국이 되려는 그 속내를 살펴보자.
 
이바구 억압의 새로운 배출구


한국은 이제까지 특유의 인터넷 문화를 만들어냈다. 누리꾼들은 벙개 모임, 게임방, 블로그, 싸이질, 댓글, 펌, 아햏햏, 포샵질, 유씨씨, 온라인 카페와 클럽 등 새로운 신조어들을 만들고 이를 통해 새로운 소통과 만남의 자유로운 출구들을 만들어냈다. 표현 수단들 각각의 효용값은 다 달랐지만, 이들 각각의 소통로와 문화들은 누리꾼들의 서로 다른 개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장이 돼 왔다.


불운하게도 현실 정치의 문제는 곧 온라인 공간의 억압으로 연결되어졌다. 인터넷이 점점 단속과 불통의 감옥이 되가고 있다.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주민등록번호가 실명 인증을 위해 쓰이고,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린다. 기술의 디자인이란 한번 만들어지면 고정되고 고착되는 습성이 있다. 이를 이용하는 유저들 또한 그 기술에 익숙해지면 쉽게 그것은 문화가 된다. 실명제 없이도 잘 굴러가던 인터넷에 본인확인의 인증을 위한 절차가 끼어들면, 처음에 유저들이 어색하고 불편해 하다가도 곧 쉽게 적응 단계에 들어간다. 그것이 인터넷 문화의 질곡이다. 

 

98년 봄에 미네르바가 무혐의로 나온 후에도, 여기저기 인터넷 사찰과 감청의 부활로 대한민국 현실이 정신없이 어지럽다. 국정감사 현장에서 속속 들어나고 있는 정보기관들의 ‘패킷 감청’과 함께, 일선 경찰에선 인터넷 사이트의 댓글들과 첨부 파일을 일일이 감시하는 시스템을 가동시킨다 한다. 패킷 감청 앞에서는, 유행처럼 불었던 국내 정보서비스업체에 못미더웠던 이용자들이 해외 서버로 자신의 계정을 옮기는 ‘사이버 망명’이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이용자의 메일 서버가 해외에 있더라도 누군가 가는 길목에 진을 치고 속속 열람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이제 트윗은 인터넷 구속과 억압의 신권위주의 정치 상황에 상처입고 답답한 누리꾼들의 이바구에 새 생명을 주고 재잘거리는 숨결을 불어넣는다. 바야흐로 새로운 소통의 배출구 노릇을 시작한다. 이미 실명 공개로 불구화된 댓글 문화에다가 인터넷 주소(IP) 추적으로 험악해진 게시판 환경에 누리꾼들은 말과 논쟁의 생동감을 잃던 차였다. 자신과 생각이 비슷하거나 뜻이 맞는 이들에게 140자로 요약된 말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신나는 일이다. 표현에 억압받던 누리꾼들의 이바구들에 다시 생명의 불꽃이 피어난다. 허나 트윗도 권력의 드잡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선거 국면에 접어들면서 공권력은 정치적 이슈로 재잘거리던 입들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트윗의 기술


일단 트윗팅의 논리를 잠깐 살펴보자. 누군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려면 트위터를 통해 입단 신고를 하고 자신만의 아이콘을 생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본인 확인 인증 절차는 필요 없다.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면 프로필에 적으면 그만이요 싫으면 숨기면 된다. 프로필과 아이콘 이미지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돕기도 혹은 숨기기도 한다. 요 단계까지는 아직 트위터 안의 홀로된 섬과 같다. 이제 누군가와 재잘거리기 위해선 먼저 원하는 상대의 재잘거림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팔로잉’이다. 이를 위해 그리 큰 노동은 없다. 그저 클릭으로 의사를 표시하면 된다. 팔로잉을 통해서 관계를 맺고 말을 트고 재잘거리다보면 자신 또한 수많은 ‘팔로워’가 생겨남을 인지할 수 있다.

 

  팔로잉과 팔로워의 숫자와 함께 얽힌 이들의 성향을 보고, 한 명의 ‘트윗터리언’이 관계 맺고 있는 다른 이들의 면면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맞팔’이란 상대가 팔로잉하면 자신도 응대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에 연연하는 이들은 보통 트윗을 자신의 선전이나 홍보 수단으로 삼는 부류가 많다. 이들은 팔로워를 늘리는데 주력한다. 그 반대엔 작가 공지영이나 김연아와 같이 팔로잉이 아예 없거나 적은 이들도 있다. 팔로잉 없이 트윗을 ‘날리니’ 주로 개인 독백이요 방백이 되고, 이를 지켜보며 즐기는 팬들에게 적합하다. 하루이틀만에 수만명의 팔로워를 거느리는 유명 연예인들이나 잘 알려진 아이돌 스타들도 이 경우다. 이들 스타 중 일부는 적극적으로 팬서비스를 위해 팔로워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언팔’은 팔로잉을 끊는 행위인데, 주로 성향이 다르거나 트윗 공해를 일으키는 이들을 피할 때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리트윗’ 혹은 알티(RT)는 다른 트윗터리언이 올린 글을 다시 올리는 것을 뜻한다. 고재열 기자의 ‘독설’(@dogsul)과 같이 수만명의 팔로워들이 있는 경우, 어떤 이름없는 재잘거림도 독설이 한번 더 리트윗으로 튕겨주면 예상치 못한 파장을 불러오기도 한다. 즉 일종의 도움받기가 가능해지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이들을 만나는 기회도 획득한다. ‘트친소’(트윗 친구를 소개합니다)가 현실의 인적 관계가 확장되는 측면이 강하다면, 리트윗은 개인의 재잘거림에 주목하여 새로운 트윗터리언을 만나는 방식이라 훨씬 더 우연의 요소들이 많다.

 

   팔로잉한 트윗 글들은 각자의 ‘타임라인’을 통해 시간순으로 배열된다. 다시 말해, 트윗을 맺은 사람들이 내게 재잘거리는 말들의 기록은 각자가 선호하는 바에 따라 서로 다른 ‘타임라인’의 연대기를 만들어낸다. 누구든 트윗의 140자라는 제한된 글자수를 통해 자신만의 재잘거림을 내면서 타임라인에 편승할 수 있다. 몇 줄 안팎의 간결한 단문으로 제한되지만, 중국어나 한국어는 영문 조합에 비해 한번에 보다 많은 의미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이점또한 지닌다.

자유로운 재잘거림을 위협하는 선거법 


자, 속성으로 트윗의 기술을 이제 막 익혀 한번 놀아보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요새 정치판 돌아가는 꼴에 한마디 할까 했더니 선거법 위반이란다. 정치인에 대한 얘기도 금지란다. 선거 때 소통의 자유를 위해 ‘돈은 묶고 말은 풀라’했는데, 자유로운 재잘거림에 이렇듯 족쇄를 채운다. 대한민국 선관위는 트위터를 통한 특정 정치후보에 대한 지지나 비방을 금하겠다 한다. 게다가 선관위 명의(@nec3939)로 허수아비 트윗까지 운영하며 누리꾼들의 재잘거림에 선거 감시의 촉수를 곤두세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할 선거철이면, 선관위는 블로그, 채팅, 게시판, 유씨씨 제작 등 누리꾼들의 정치적 표현에 불법의 철퇴를 내려치기 일쑤다.

 

한국에서 트윗을 하는 인구는 이제사 걸음마를 떼어 얼추 10만명을 넘긴 정도라 한다. 그도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해 외곽으로 나가면 트윗을 통한 투표 독려와 같은 행동들은 아직은 사치일 수 있다. 그래서, 트윗족은 선도적 신기술 이용 집단으로 통하는 ‘얼리어댑터’들에 해당한다. 실제 이들은 연예, 스포츠, 예술, 정치, 학술, 정보통신 기술, 블로그 등 현실 영역에서 의견을 주도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보면 야당이나 여러 시민단체들에 근친성을 갖거나 비슷한 성향의 트윗터리언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초기 기술 수용자의 정치적 성향이 대체로 상식의 현실 감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트윗 문화는 아직은 건강하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누리꾼들의 재잘거림을 막는 행위는 다름아닌 집권 유력 정당이나 스타급 정치인들 보다는 힘없는 약소 군소 정당의 정치인들이나 주체적 시민들의 말길을 봉쇄하는 효과를 지닌다. 즉, 트윗을 불허한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나름 깨어있는 여론 선도형 집단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엄포에 해당한다.

 

트윗의 재잘거림이란, 확성기로 내는 소리가 아닌 말에서 말로 퍼지는 리트윗과 팔로잉으로 엮어진 자생적인 울림이다. 140자의 형식적 제약 속에 정치적 심각함을 나르고 논쟁을 촉발하긴 어렵다. 주로 특정 사안에 대한 즉흥적 속풀이와 단상들에 대한 공감에 그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자들에 의해 던져지는 다양한 화두와 함께, 하이퍼링크와 이미지, 동영상 등이 자유롭게 단문의 글들 바깥으로 연결되면서 형식적 제약을 거의 무위화하고 있다. 즉 트위터는 정치적 선동이나 광고로서의 면모보다는 다른 어떤 수단보다 간결하고 조용히 움직이나 유연하고 바깥으로 트임이 끝없이 이어져있는 지저귐의 경로를 지닌다.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 규정에 의한 트위터에 대한 처벌 조항은 그래서 대단히 임의적이다. 예를 들어, 선관위는 선거운동 기간 전에 각자의 타임라인을 이용해 특정 정치 후보자와 관련된 내용에 대한 리트윗 행위 자체를 금한다. 트윗을 광고성 집단 이메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살포되는 광고 메일과 달리 트윗의 타임라인은 강제적 소구력이 없는 상호 재잘거림의 목록이란 점에서 다르다. 또한 이메일의 개인 정착지적 속성과 달리 트윗들의 흘러간 타임라인은 거슬러 공들여 읽지 않으면 찾기조차 힘들다.

트윗으로 재잘거리며 넘볼 것들


트위터 또한 여타 ‘소셜 미디어’라 통칭하는 부류의 기술이요 수단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세계 최초로 인터넷을 통해 아래로부터 선출한 우리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를 되새겨보면, 이제 새로운 기술에 열광하는 일에 신중할 필요가 있음도 느낀다. 그런데도, 필자는 트윗으로부터 다시 한번 일상 혹은 생활 정치에 미치는 긍정의 가능성을 본다. 수만명의 팔로워를 거느리며 트윗을 날리는 소수 정당의 정치인들을 보라. 4만여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노회찬(@hcroh) 국회의원이 한번 트윗을 띄우면, 적어도 수만명의 팔로워들이 이를 받아 수백건의 리트윗을 올리며 반응한다. 리트윗을 통해 내는 재잘거림의 반향들은, 또 다른 관계망을 타고 거의 대부분의 국내 트윗터리언들에게 전달된다. 선관위 입장에서는 탐탁치 않을 것이요 불법 사전 선거 운동이란 구실로 옭아맬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트윗의 공간에서 이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요, 외려 소수 정당의 정치인이 구사할 수 있는 여럿 중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받아들일 일이다. 이조차 선거법으로 불허하면 소수 정당의 소통 능력을 불구화하겠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늘진 현실의 질곡과 권력의 힘이 트윗 공간에 자리를 틀 것이 자명하다. 선관위의 트윗에 뻗힌 촉수는 그 중 일부이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더라도 트윗의 재잘거림들이 크게 수그러들긴 어려워 보인다. 수많은 트윗터리언들이 모여, 트윗을 통해 이어받기 소설을 쓰고, 트윗을 통해 모임을 만들고, 선거자금 캠페인을 벌이고, 혹자들은 정치 논쟁을 벌이고, 트윗 단문을 모아 책을 쓰는 세상이 오고 있다. 더군다나 우린 2003년의 대선 정국, 2004년의 총선,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정국, 2008년의 촛불정국 등 중요한 고비마다 누리꾼들이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벌이는 문화 행동과 자율적인 말의 게릴라전에서 새로운 표현 매체의 가능성을 십분 활용했던 경험이 있다. 이 점에서 트위터는 누리꾼들의 풍부한 미디어 경험의 축적이란 연속성 위에 놓여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서, 아니 이를 계기로 그동안 쌓였던 허망함과 분노를 풀 유권자들의 일상의 정치적 의사표현 수단으로 요만큼 실한 물건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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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어린이] 어린이와 게임 - 게임, 타자가 필요한 오락

계간 창비어린이
2010. 3. 봄호.

 

어린이와 게임 - 게임, 타자가 필요한 오락

이광석

필자는 미국에서 한 9년간 유학생활을 했다. 오랜 세월 타지에서 지내다보니 가족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 누구보다 상대적으로 아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다. 유학생 가족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내는 학교 생활에서 가족이 주는 안식은 절대적이다. 하루종일 영어 스트레스에 입과 귀가 쥐나려할 때 아이와의 놀이와 휴식은 오아시스와 같은 여유를 줬다. 그렇게 살다 귀국해선 먹고사는 일이 뭐 그리 바쁜지 아들과 지내는 일이 가뭄에 콩나듯 하다. 좋았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미국에서 유학생 부모들, 특히 아빠와 자녀들간의 관계는 대체로 건전하게 보였지만 대개 미국식 소비문화의 틀 안에 갇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헐리웃의 흥행주기와 스케줄에 따라 어린이들과 부모들이 함께 움직인다. 알면서도 그냥 이에 반응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가족의 놀이 법칙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 상황을 잠깐 들여다보자.

어린이들의 원초적 게임들


먼저 헐리웃이 특정의 화제작을 띄우기 위해 바람을 잡으면, 대개 소비자들은 의도한 바를 알면서도 넘어간다. 예를 들어, 2011년 5월이나 개봉한다는 <스파이더맨4>가 당장 몇주 뒤 개봉한다고 치자. 때가 오면 텔레비전은 개봉을 앞두고 연일 관객몰이하느라 광고에 불이 난다. 이는 한국에서도 비슷하다. 잘 보이지않던 연예인들이 갑자기 이 채널 저 채널 자주 등장한다면 십중팔구 이들은 영화 홍보 도우미다. 반면 어린이들에게 영화 개봉의 바람잡이 역할은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인형들이 담당한다. <스파이더맨 4>가 개봉된다면 아마도 1, 2, 3 시리즈들에 출현했던 왕년의 캐릭터들이 보관 창고에서 먼지털고 나와 다시 상점 가판에 깔리고, 그들과 더불어 스파이더맨의 치명적 라이벌들인 ‘블랙캣’, ‘리저드’, ‘카니지’(Carnage) 등 새로운 캐릭터들이 추가로 늘어날 것이다.


  어린이들의 영화에 등장하는 하나의 시리즈물에도 캐릭터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수십 가지가 훨씬 넘는 나무로 만든 토마스 기차와 그의 친구 기차들을 생각해보라. 캐릭터 하나 사줄 때마다 등골이 휜다. 사실 이도 수백수천이 넘는 ‘스타워즈’ 영화 캐릭터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포켓몬’, ‘디지몬’, ‘유희왕’, ‘드래곤볼’, ‘나루토’ 캐릭터 게임 카드는 어떠한가. 마치 편의점의 껌처럼 아이들을 유혹하는 문방구 품목들이다.

  어린이들이 처음 벌이는 게임은, 사실 디지털 시대의 게임 유형보다는 이들 장난감 캐릭터나 카드를 양 손에 들고 펼치는 상황극이다. 초등학교 5학년인 내 아이는 아직도 한 1년남짓 팔다리가 너덜해 다 떨어진 ‘파워레인저’ 캐릭터 둘을 갖고 “푸쉬, 피웅, 피웅” 침을 튀기면서 이것들에 싸움을 붙여가며 논다. 올해 해를 넘기면서 뭔가 작심했는지 우리 아이는 쓰레기통에 그 너덜한 파워레인저들을 내던져버렸다. 그래도 아이의 손때를 타 만질만질한 그 녀석 둘을 마주하고 이내 버릴 수 없어 서랍 속 깊이 간직했다 보여줬더니 우리 아이가 날아갈 듯 기뻐해 놀란 적이 있다. 마치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 아이는 그 닳아빠진 캐릭터들을 집어들고 다시 침을 튀겨가며 놀고 지낸다. 이렇듯 캐릭터들의 실제 상황극은 아직도 우리 아이들을 지배하는 최고의 게임이다.


  비디오 게임의 사회적 효과들 


  하던 얘기를 계속 해보자. 이렇게 헐리웃이 장난감 업체들과 캐릭터로 한껏 분위기를 띄우면, 대개 어린이들은 영화 개봉일이 올 때까지 카운트다운에 돌입한다. 사실상 집안으로 들어가보면 카운트다운은 아이 대신 부모가 더 열심히 하는 경우가 많다. 보호자라는 명분으로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영화를 관람하고 아이보다 더 즐거워한다. 영화 관람후 후유증은 어른보다 아이들에게 더 오래 간다. 대개 어린이들은 관람후 다시 캐릭터 수집에 몰두하고 상황 게임에 한층 몰입한다. 관람했던 영화가 조만간 디브이디(DVD)로 출시되면 아이들은 이를 사달라고 조른다. 성화에 못이겨 구입한 디브이디를, 아이들은 질릴 때까지 반복  시청하며 즐긴다. 이것이 헐리웃의 가내 경제심리학이다.

   예서 하나 더. 어린이들이 영화 관람후 보다 본격적으로 그 여운을 즐기는 방식이 또 있다. 진짜배기 게임이다. 미국에선 주로 게임 콘솔, 즉 하드웨어를 구입해 즐기는 비디오 게임이 대세다. 크리스마스 때면 아이들의 최고 선물은 단연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Xbox)’,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PS)’, 그리고 닌텐도가 만든 ‘위(Wii)’ 등이다. 다들 게임 콘솔들이다. 필자의 유학 시절 아들과 즐겼던 놀이의 대부분 시간은 이들 비디오 게임을 같이 즐기는데 쓰였다. 만약 <스파이더맨4> 게임이 콘솔용으로 시장에 나오면, 손으로 쥐고 놀던 캐릭터 인형들의 상황극은 종료되고 화면 위 캐릭터들간의 격투신으로 바뀐다.

   콘솔 게임은 비용이 쏠쏠하게 많이 든다. 게임 콘솔을 위해 한번 구입하는 가격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매번 게임 타이틀 출시에 맞춰 구입하는 비용이 훨씬 더 크다. 정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다. 가정 경제의 지출 내역이 뭔지 알게 무엇인가. 그저 아이는 새 게임 타이틀을 사면 그것의 전체 스토리를 마칠 때까지 집중한다. 스토리가 없는 격투 게임인 경우에는 질릴 때까지 한다. 후자는 친구나 아빠랑 벌이는 격투가 대체로 많고, 전자의 경우엔 이들과 협업해 공동의 과제를 푸는 식이다. 어느 한쪽이 지건 이기건, 진행될수록 부자지간에 정이 드는 것도 효과 중 하나다. 아이의 생일 때나 집에 친구들이 놀러오면 주로 재미삼아 하겠지만 일종의 그들만의 ‘의식’(ritual)인양 비디오게임을 수행한다. 게임이 그들간 의식이 되면, 이미 스토리의 일부를 앞서 깬 친구들은 뒤따르는 아이들의 멘토이자 스승이 된다. 결국, 헐리웃의 돈벌이를 위해 고안된 홍보-캐릭터상품-영화-디브이디-게임 등으로 연결되는 연쇄 고리는 가족의 여가 생활을 부정적으로 구성하면서도, 일견 부모와 아이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 새로운 소통의 관계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입맛이 다른 게임들


  게임들에 따라 입맛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장르인지 어떤 콘솔을 쓰는지에 따라 즐기거나 빠져드는 정도가 다르다. 게임보이와 같은 휴대용 게임은 차량 이동 중 막간을 이용해 즐길 수 있는 야참형 콘솔이다. 비디오 게임은 앞서 본 것처럼, 친구, 가족 등과 함께 즐기기에 좋다. 좋은 점이라면 새 비디오 게임 타이틀을 사줘도 어린이들의 중독성은 대체로 일주일이면 가라앉는다. 즉 게임 내러티브를 얼추 다 깨고 읽으면 아이가 그제서야 정신을 깬다. 그 때까진 게임하는 아이보다 부모가 패닉 상태에 이른다. 요새 한창 유행하는 개콘의 남보원에서 유행하는 말, “괜히 사줬어, 사주지 말걸 그랬어”라는 후회가 몇 번이고 밀려온다. 이 상황을 보내면 대개 어린이들은 평정을 찾는다.

   내 아이의 경우 비디오 게임 타이틀을 사주는 것이 뜸해지면서 아빠를 통해 컴퓨터 게임을 배우고 즐기기 시작했다. 일단은 상대적으로 구입 비용이 저렴하다. 각종 게임을 컴퓨터에 내려받아 수행하는 컴퓨터 게임은 사실상 두 손 위에 조이스틱 대신 컴퓨터 키보드를 잡는 경우라 보면 무방하다. 서로 닮았으나, 비디오 게임의 경우 아무래도 그래픽 구현이 좀 떨어지긴 한다. 하지만, 이도 게임을 다 끝날 때까지 “괜히 깔아줬어”라는 부모들의 후회를 끝없이 밀려오게 한다는 점에선 비슷하다. 이도 사나흘 정도면 아이의 중독성은 정상 수치로 복귀한다. 내 아이를 관찰한 경험이다.


  

 

물론 어린이들이 게임이 일상이 될수록 어지간한 그래픽이나 상황 설정에 무감각해가는 경우가 점차 늘어난다. 예를 들어, 1인 슈팅 게임인 임무수행(Call of Duty) 시리즈가 최근 현대전 4탄까지 나왔는데, 게임이 일상인 어린이들에게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1, 2탄은 별 감흥을 주지 못한다. 머리에 철모쓰고 단발식 소총을 들고 등장하는 60년대 ‘전우’를 연상시키는 그래픽보다는, 최첨단 무기와 위성 미사일이 불을 뿜는 최신 용병전 정도가 되야 어지간히 재미가 붙는다. 게임의 그래픽 강도나 내러티브의 세밀함에 대한 어린이들의 적응력은 이처럼 대단히 빨라진다. 그러다보니 어지간한 애니메이션 영화도 우습다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애니메이션이면 무조건 신기해하던 때와는 다르다. 이렇듯 영상 과잉 노출로 감성이 무뎌질진 모르겠으나, 달리 보면 영상을 해독하는 감각에 변별력이 상승하는 측면도 동시에 존재한다.

 
  게임에 중독된 어린이?


  한동안 내 아이는 게임방 열병을 겪었다. 마치 놀이동산 가자고 보채는 아이처럼 게임방을 가자고 내게 졸랐다. 방과후 한두번 친구들이 가자고 제안했는데 아무래도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집으로 서둘러 돌아왔던 터였다. 내 아이의 머릿속에 게임방은 무서우면서도 선망의 곳이었다. 어디서 얘길 들었는지 게임방엔 나쁜 아저씨들이 입에 담배물고 잘못하면 돈도 뺐는 악의 소굴로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당시 아이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 곳에 가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이유는 게임방에선 원하는 게임을 실컷 할 수 있고 왠지 롤러코스터같은 짜릿함이 거기 가면 있다는 기대치 때문이었다. 내 아이는 자신의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으로 아빠를 택했다. 나를 대동하여 게임방에 갔으면 했다.

   아들을 통해 나 또한 머리털나고 처음 오락실에 친구들이랑 가슴을 콩닥거리며 들어섰던 기억을 떠올린다. 하필 그날 어머니 친구분이 고속터미널 근처 오락실에 있는 나를 정말 말도 안되는 막장드라마의 우연처럼 발견하시고 어머니께 고변하신 적이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께 정신없이 회초리로 맞던 기억이 생생하다. 왜 그 땐 그리도 어른들이 막을수록 하고 싶었는지. 중독과 열병은 결국 욕망의 과도한 통제 때문에 빚어지는 효과가 아니던가. 어머니의 과도한 체벌에 대한 반발 심리일까? 어른이 된 난 흔쾌히 아들과 게임방에 몇 번 같이 갔다. 다행히 동행의 효과인지 뭔지 우리 아이는 게임방에 흥미를 잃고 더 이상 가잔 소리가 없다.

   요샌 아이가 인터넷 게임을 하면서 좀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진정 말로만 듣던 심한 게임 중독 증세를 보였다. 일순간에 붙었다 가라앉을 것으로 보였던 게임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점점 늘어났다. 얼마전 아들에게 애둘러 물었다.

요새 왜 그리 ‘버블파이터’에 정신 못차리는데?
잘 몰라
왜 몰라. 비디오 게임보다 뭐가 재밌는데?
잘 몰라. 그냥 더 재밌어.
그냥 재밌어?
여럿이서 함께 하는 거라서 재밌어.
야, 미국에서도 ‘룬스케이프’(Runescape, 롤플레잉 게임의 일종) 하면서도 잠깐 재미로 잘 놀더구먼. 왜 그렇게 게임을 계속 해대는데?
룬스케이프는 롤플레잉만 하지만, 버블파이터는 여럿이서 슈팅하면서 놀 수 있어.


  아이들은 우선 단순히 타자와 함께 노는 것에 생동감을 느낀다. 스크린만 보고 하는 비디오 게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게다가 상대팀들을 교란하고 싸우기 위해 살아있는 여럿이 편을 먹고 지네끼리 소통하는 상황이 재밌다고 여긴다. 실제로 온라인 게임이 중독성에서 단연 뛰어나다는 점을 나름 감지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 아이만은 이미 게임으로 단련되어 중독증에 항체가 생겼다고 보았던 터였다. 게임이 잘 안풀리면 식구들에게 신경질도 점점 늘었다. 자발적으로 책읽고 조용히 그림 그리는 시간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게임하는 시간을 줄여 거짓말하기도 하고, 어른들이 외출후 들어오면 후다닥 컴퓨터를 끄는 모습도 보였다. 결국 집을 나설 때 컴퓨터에 패스워드를 걸고 게임을 지우는 수도 썼지만 무의미했다.


   이런 아이를 보면서 갑자기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 <서로게이트 Surrogates>가 떠올랐다. 인간들은 구질구질하고 나약하고 늙어가는 신체를 대신할 자신의 싱싱한 대리인(서로게이트)이 행세하는 세상에서 시들어간다. 마치 인터넷에 연결된 수많은 롤플레이어들처럼 인간들은 무기력하게 누워 이들 껍질뿐인 대리인들을 조정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 아이의 게임 중독에서 서로게이트에 의존해 점점 노쇠해가는 영화속 서로게이트형 인간의 모습까지 볼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다. 열병은 심했고 오래 걸렸으나 가족의 노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온라인 폐인이 되가는 느낌이 들었는지, 서서히 게임을 줄여나가는 법을 배워 갔다. 자연 책 읽는 시간이 늘었고, 다른 콘솔용 게임도 함께 즐기는 여유를 가지기 시작했다. 


  게임하는 어린이들


  게임에 빠져드는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줄곧 생각나는 예술 작품이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호주의 시각예술 작가인 페트리샤 피치니니의 설치 작품들인 [우리는 한가족] 시리즈다. 그녀의 작품에선 미래 기술 현실에 대한 긍·부정의 이중적 시각이 교차한다. 기술이 미치는 해악을 경계하면서도 삶의 일부가 되고 삶의 진실이 되가는 인간 보편의 기술에 대한 긍정의 시선이 교차한다. 무엇보다 작품에 등장하는 게임보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얼굴은 반백이 지난 얼굴들이다. 고작 내 아들 나이만한 아이들이 한참 ‘삭은’ 얼굴로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은 짐짓 겉만 보면 누구나 소름 돋기 마련이다. 또한 그녀의 작품 속에서는 상상하기도 싫은 유전 조작의 돌연변이들이 인간의 애완 동물이 되고 한 식구가 된다. 아이들은 생명과학의 진보로 인해 얻은, 쭈글쭈글하고 허연 피부를 가진 강아지 비슷한 새 생명체와 놀고 장난친다. 그 새로운 과학과 생명의 혼합 속에서 태어난 돌연변이 생명체들은 그들 스스로 생식해 또 다른 가족을 형성한 채,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물린다. 과학적 성과에 있어서 부정의 메타포인 반백과 돌연변이가 피치니니의 작품 속에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해야할 ‘한가족’으로 묘사된다. 어쩌면 피치니니는 새로운 과학과 디지털 문화에 대해 선입견에 사로잡힌 부모 세대들의 마음 속 생각을, 흉측한 애늙은이와 돌연변이를 통해서 투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홀로 아빠의 서재에서 인터넷 게임을 몇 시간이고 집중하는 내 아들에게서 피치니니의 작품 속 아이들을 보며 흠칫 놀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아들의 모습에 그저 불안감만 엄습하진 않는다. 게임은 내 아이와 어린이들의 새로운 놀이 방식이라 믿고 싶다. 다만 온라인 게임이 다른 게임들과 달리 아이들에게 열병 주기가 좀 길 뿐이다. 게임하는 어린이들에게서 반백의 얼굴도 보지만, 아직은 게임이 그들에게 주는 긍정의 문화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온라인 공간을 통해 아이들은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것에 쉽게 동화되기도 하지만, 스토리 전개를 통해 서사 규칙을 배우고 타인과 소통하고 그들과 관계 맺는 과정을 습득하고 가상의 상황에 따른 전술을 짜는 법 등을 스스로 터득하기도 한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어린이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문화 경험이다. 그들에게는 가상공간의 ‘세컨 라이프’가 현실의 삶만큼 일상이 되고, 게임방이 우리 세대의 만화방만큼 안락하고, 게임이 놀이터만큼 하루 한두번쯤은 꼭 들러야하는 곳이 된다. 피치니니가 게임하는 애늙은이들에게서 그 양가성을 함께 보고 모두 끌어안은 것처럼, 이제 어른들도 게임하는 아이들에게서 두려움의 시선을 거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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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이 제 2의 미디어 혁명을 일으킨다

아이폰이 제 2의 미디어 혁명을 일으킨다

한국지역정보개발원 <지역정보화지>

이광석

얼마전 애플에서 ‘아이패드’(iPad)라는 터치스크린 전용 테블릿 피씨를 내놨다. 아이폰이 출시됐을 때 그 경이로움에 비하면, 기술적으로 그리 큰 새로운 스마트 장치로 보긴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실망만큼 애플의 주가가 동반 하락했다. 보통 해외 전자제품 매장에서의 신제품 디스플레이 갱신 속도가 일년에 보통 4회 정도라 한다. 우린 거의 계절별로 매번 새로운 디지털이나 가전 신상품들이 가판에 깔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아이패드가 일단 e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에 이렇듯 곧 나올 후속 아이패드 버전들에 기대를 걸어도 좋을 듯하다.


‘아이폰’의 전세계적 영향력에 비해 좀 못미치더라도, 아이패드는 주춤했던 디지털북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몇 년 아마존닷컴의 ‘킨들’(Kindle) 정도가 e북 리더기 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했었다. 킨들은 사실 아이패드와 그 기능성을 비교하면 형편없다. 터치스크린 기능도 없는데다 종이책을 흑백 화면에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가격대비 기능도 훨씬 떨어진다. 아마존닷컴이 주요 거대 출판사들과의 e북 가격 협상에서 항상 우위를 점하다 이번에 타격을 받은 것도 아이패드의 등장과 맞물려있다.         

 

아이패드와 같은 터치스크린형 테블릿은 우선, 킨들류의 e북 리더기 기능을 넘어선다. 우리가 보통 책을 사서 읽는다 하면, 당연히 부드러운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이로부터 눈의 피로를 덜고 생각날 때 종이 여백에 손쉽게 낙서를 하거나 귀퉁이를 접고 길을 걷다 나뭇잎을 꽂아넣을 수도 있는 개인적 정서상의 이유 때문이다. 아이패드와 같은 개인 테블릿들이 미래 독자들에게 선사하려하는 것은 종이책에서 느끼는 만족도를 스마트 전자기기에서도 채울 수 있도록 구상하는데 있다. 예를 들어, 엄지와 검지로 페이지를 휙휙 넘기다가 궁금한 정보가 나와 콕 누르면 그의 신상명세가 나오고 관련된 이미지들을 풍부하게 볼 수 있고 이와 관련한 비디오를 잠깐 시청하거나 이를 타인에게 메일로 보내는 등의 기능들이 가능하다. 먼 미래 얘기가 아니라 사실상 이미 테블릿 피씨에서 실현되는 기능들이다. 그야말로 무궁무진하게 텍스트 아래 다른 텍스트들과 사진, 동영상 등이 연결되어 향상된 인터랙티브한 e북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면, 아이패드의 미래도 가히 혁명적일 수 있다.

 

애플의 아이폰이 국내에 들어오기까지에 국내에서 참 말들이 많았다. 필자는 여러 지면을 통해 한국 휴대전화 시장에 아이폰을 도입해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국내 아이폰이 들어왔을 때 피해를 입을 사업자들은 여러 경로로 이를 막으려 했지만, 난 우리의 디지털 장래를 위해서는 필히 그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애플의 기술을 빨리 배울 필요가 있다고 얘기했다. 물론 난 기술 결정론자가 아니다. 기술 결정론이라 하면, 아이폰과 같은 기술이 인간과 우리 사회를 바꾸는 동력이라 믿고 그 반대의 경우는 별로 따지지 않는 기술숭배주의적 시각을 지칭한다. 그것이 국내 시장에 몰고올 기술적 효과를 분명히 봤지만, 난 한국인들의 자유로운 디지털 문화가 아이폰 기술 지형에 미칠 미래 파장에 사실은 더 흥분했다. 후자의 조짐은 곧 올 것이고, 지금은 예견된대로 그 기술적 파장만은 쉽게 감지된다.

 

아이폰이 미친 영향력의 가장 큰 변화는, 무선 인터넷의 이용방식이다. 이제까지 무선 인터넷은 집에서 무선공유기를 달고 노트북의 실내 공간 이동 목적으로 많이 쓰였다. 하지만, 아이폰의 등장으로 무선 인터넷 환경은, 아이폰 등 무료 접속과 이용자 서로간 정보공유의 출발 지점이 되고 있다. 아이폰 이전에 분당 인터넷 사용료로 재미를 봤던 이동통신회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속이 뒤틀린 상황이지만, 소비자 복지 측면에서 본다면 대단한 진전이다. 사실 미국에서 벌어졌던 시민사회내 무선인터넷과 정보공유운동이 없었다면, 사실상 아이폰의 성공은 반쪽짜리였을 것이다.

 

한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가 아이폰의 발전에 발판이 됐던 것이다. 두 번째는, 아이폰의 국내 등장으로 우리는 이동통신 콘텐츠 개발의 형편없는 현주소를 파악하는 계기가 됐다. 전세계 휴대폰 판매 점유율 1, 2위라는 순위가 사실상 허울임이 판명됐다. 하드웨어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휴대전화도 소위 ‘어플’(리케이션)이라 불리는 응용 프로그램들에 의해 좌우됨을 배웠다. 이제까지 국내 업체들은 대체로 휴대전화 신모델만을 시장에 내어놓으면서 구형 모델 소비자들의 어플 접근 제한을 하거나 쓸만한 어플도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는 어플 개발 환경이 폐쇄성을 갖는다는 점도 문제다. 누구든 원하면 콘텐츠 개발에 참여할 수 있고 구글 ‘안드로이드’와 같이 개방형 플랫폼을 응용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 우리도 정신을 차려 이와 같은 개방형 시스템을 도입 중이다.

 

세련된 디자인 외장과 향상된 기술 스펙을 갖춘다는 것이, 요새같이 무섭고 빠르게 휴대전화 기술 발전의 속도가 이뤄지는 때는 필수는 될 수 있을지언정 충분 조건은 아니다. 휴대전화 제작 전문 디자이너들이 모여 앉아서 소비자들에게 소구할 휴대전화 디자인에 신경쓰는 일도 중요하지만, 결국 문제는 어떻게 소비자들이 이를 갖고 최대의 만족감을 느끼게 하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

 

애플의 아이폰은 이 점에서 다른 터치 스크린폰과 다르다. 전혀 가격대비 월정액 금액이 싸지도 않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휴대전화에 비해 성능이나 디자인이 앞서지도 않는다. 설사 애플의 터치 스크린 인터페이스의 구성 능력이 우리보다 뛰어나도, 우리의 기술 수준을 고려하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모자란 것 혹은 없는 것은 뭘까? 아이폰에는 잘 알다시피 수천수만의 유·무료로 제공되는 어플들이 들러붙어 있다. 수없이 많은 어플들은 아이폰을 통해 소비자 개개인에게 맞춤형 스마트 기기가 된다. 이제 전화의 기능은 부차적이다. 아침이면 유튜브 순위를 따지고, 구글맵으로 맛집을 찾아나서고, 저장해둔 PDF파일을 읽을 수도 있고, 만화 e북을 보기도 하고, 막간을 이용해 여러 장르의 게임을 하기도 하고, 무선 인터넷망을 통해 해외에 스카이프로 전화를 하기도 하고, 음악과 동영상을 보고듣고, 사진을 찍어 바로 인터넷으로 친구에게 쏘아보내고, 그날 스케줄 관리도 하는 등 그 기능이 끝이 없다.

 

한국 기업들은 아직도 아이폰이 만들어내는 성공의 원리를 읽는 눈이 부족하다. 그 성공의 근거는 바로 소비자들의 디지털 정서 파악이다. 아직도 많은 나라들에서는 한국을 ‘인터넷 천국’이라 말하고 인용한다. 이와 같은 평가는 우선 일차적으로 초고속 인터넷이라는 물리적 환경 조성이라는 국가적 노력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한국인들 특유의 자유로운 정보 공유와 상호 소통의 문화가 그 속에서 꽃피지 않았다면 불가한 얘기다. 현재 우리의 휴대전화 문화의 새로운 2.0 버전에는 사실상 이 교훈이 빠져 있다. 제조업체는 기기 자체의 하드웨어 생산과 디자인에만 과도하게 집중했고, 이동통신사들은 보다 자유로운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하기 보단 이용자들의 이용 방식을 철저하게 통신료로 환산하는 잘못된 서비스 정책을 펴왔다. 이용자들의 문화에 대한 관대함과 배려가 없이는 아이폰과 같은 기술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한다. 예전처럼, 기기와 달라서 국가가 나서 단순히 콘텐츠 장려하자는 슬로건 내온다고 다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래로부터 자유롭게 놀 수 있는 판들을 마련해야, 독창적 콘텐츠들이 서서히 나올 수 있음을 잊지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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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인터넷 코리아, 정말로 괜찮니?

인터넷 코리아, 정말로 괜찮니?

 

[시사IN 125호] 2010년 02월 06일 (토) 09:15:35 이광석 (미디어 평론가)

 

대한민국에서는 신권위주의적 정치권력에다 기술에 대한 도구적 접근이 합해져 각종 디지털 악법과 정책이 난무한다. 인터넷 실명제는 대표적인 ‘인터넷 악법’이다.

 

 

 

요새 국제 뉴스를 보면 일부 국가의 인터넷 통제에 대한 욕망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중국에서는 반체제 인사들의 구글 계정에 대해 정부 당국이 나서서 해킹을 지원한다는 의혹이 커지면서 미국과 외교 분쟁으로까지 비화할 조짐이다. 사실 이제까지 중국 공산당의 검색 금칙어 등 인터넷 내용 검열 요구에 구글이 순순히 응해온 것에 대해 전 세계 비난 여론이 거셌던 터였다. 지난해 구글 소유의 유튜브가 한국의 인터넷 실명제가 표현의 자유를 막는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고자세와는 다른 사뭇 실망스러운 태도였다. 아무튼 이번 중국 내 해킹 건으로 말미암아 구글도 정신이 좀 깰 듯싶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인터넷 상황도 폭풍전야라는 느낌을 준다. 지난해 12월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인터넷 내용 규제 법안을 무리하게 강행하면서 녹색당, 시민단체, 지식인과 사회 각계각층 인사들의 반발을 샀다. 급기야 누리꾼들이 인터넷 ‘블랙아웃’(홈페이지 초기화면을 시커멓게 표시하고 그 위에 정부 검열에 저항하는 문구를 새기는 행위) 주간까지 선포하면서 커다란 시민 저항에 직면하게 됐다.

누구보다 오스트레일리아 인터넷의 내용 검열을 주도하는 인물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보통신부 스티븐 콘로이 장관이다. 그는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인터넷 필터링과 ‘부적절한’ 사이트에 대한 블랙리스트 작성을 골자로 한 내용의 규제 법안을 밀어붙이려 한다. 시간이 갈수록 내용 규제에 대한 여론이 그와 정부 쪽에 상당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인터넷 실명제

   

얼마전 해커들이 호주 정부 사이트를 해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은 호주 정부에서 추진하는 내용 검열에 대한 저항을 홈페이지 해킹으로 표현했다.

이 일로 얼마 전 오스트레일리아 학자들의 초청을 받아 울런공 대학에서 연사로 나선 적이 있다. 당시 워크숍 주제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인터넷 통제와 검열’이었다. 물론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인터넷 필터링 법안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들이 내게서 듣고 싶었던 얘기는 한국의 인터넷 검열 사례였다. 한국 인터넷 현실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점쳐보고 이에 대비하자는 심산이었다.

실제 오스트레일리아는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 수준만 따지면 한국에 비해 한 수 아래다. 그렇다보니, 과거에 우리에게 일어난 인터넷의 논쟁적 이슈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이제 속속 사회의 중심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인터넷 내용 규제 논쟁이 10여 년 전 국내의 ‘내용등급제’ 도입 때와 너무도 닮았다. 아직은 희망이 보이는 그들에게 나는 국내 인터넷 검열의 사례를 들었다. 일제강점기의 주민등록 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의 신상 정보를 관리하는 표준으로 쓰이는지, 이것을 중심으로 어떻게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인터넷 실명제’가 연동되는지, 우리의 인터넷 ‘내용등급제’가 어떻게 사전검열 효과를 발휘해왔는지, 국정원 등 정보기관에 의한 인터넷 패킷 감청이 어떠한지, 촛불정국 이래 ‘삼진아웃제’와 ‘사이버 모욕죄’ 등이 누리꾼의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침해하는지 따위를 소개했다.

그래도 아직은 악법을 피할 수 있는 그들의 논쟁을 부러워하면서, 필자는 돌아오는 내내 우리 인터넷 현실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가만 따져보면 우리처럼 전방위에서 인터넷을 억압하는 법안과 정책이 도입되는 나라가 도대체 있을까 싶다. 신권위주의적 정치권력에다 기술에 대한 도구적 접근이 합해져 각종 희한한 디지털 악법과 정책을 낳아왔다.

지난 1월25일, 국내 인터넷통신망법에 규정된 인터넷 실명제에 반발한 몇몇 누리꾼이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이제까지 이 악법이 얼마나 누리꾼에게 재갈 구실을 했는지 사회 전체에 공론화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듣자하니,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인터넷 실명제를 성공한 IT정책 사례로 해외 공식 석상에서 자랑하고 다닌다는 말이 들린다. 어이없고 한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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