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과학 (2010 가을호 게재) * 각주는 편의상 다 잘라냈습니다. 일부 실천문학(2010 여름)에 실었던 내용이 중복되나, 거의 새롭게 쓰여진 글입니다. 논평 부탁드립니다.
이광석 (@txmole)
가만보면 우리에겐 특정 역사적 국면에서 대중의 정치적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발산한 특정 미디어 혹은 기술적 서비스의 전례들이 꽤 많다. 다소 거칠게 본다면, 90년대 초∙중반의 피시 통신문화, 90년대말 게시판 문화와 딴지일보 등 풍자·패러디 사이트들의 등장, 2000년대 초반 오마이뉴스 등 누리꾼들의 게릴라식 글쓰기를 통한 온라인 시민 저널리즘의 발전, 2004년 중반 총선과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시 인터넷 카페들을 통한 대항 담론 생산, 2008년 광우병 파동과 촛불 시위 속 휴대전화, 넷북, 휴대 카메라 등 게릴라 이동형 매체 등을 활용한 실시간 인터넷 방송과 UCC 제작, 그리고, 올해 지방선거에서 대항 여론 형성과 투표 독려에 한몫한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가 그것이다.
물론 특정 시기에 오로지 어느 한 매체만이 아래로부터의 소통로들을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 사안에 따라 누리꾼들은 다양한 매체들을 혼용해 여러 담론들을 생산해내는데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마찬가지로, 신진 매체의 등장은 구매체의 퇴장을 전제하여 발달하진 않는다. 즉 복수적 매체들이 한 시점에 여럿 걸쳐서 그 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불과 두 해 전 촛불의 저항 국면에서 보여줬던 다양한 매체 전술 가운데 구매체의 변형이나 복원 형식들, 즉 리플릿, 팸플릿, 전단, 명함, 무가지, 걸개, 대자보, 벽화, 판화, 음악, 판소리, 춤사위, 지역 방송, 공동체 라디오, 스티커, 짤방, 플래카드, 풍선, 해킹, 반저작권, 플래시몹, 온라인 패러디, 1인 시위, 그라피티 등은 신진의 다양한 소셜 미디어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대부분은 정치적 격변기 현장 속에서 항상 존재했었으나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전술 매체들과 예술 장르와 기법들이다. 이와 같은 일반적 미디어 조건들을 인정하는 한에서 논의를 끌어가자면, 적어도 어느 특정 매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유의 디자인과 효과가 당대 이용자들의 문화나 정치 상황과 잘 맞물리는 지점이 분명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정 시점에서 특별한 기술 디자인과의 조응은, 단순히 디지털 기술이 시장에 도입될 때마다 누리꾼들이 덥석 덥석 문다는 ‘기술주의’적 논의와 무관하다. 디자인의 당대 적합성이 잘 물릴 때 대중의 어필을 받을 수 있다는 가설은, 그 디자인의 생성과 발전을 규정하는 힘들이 존재함을 지칭한다. 보통 새롭게 도입되는 기술의 디자인에는 이미 일정 부분 사회의 논리가 각인되고, 이에 반응하는 기술들이 대중의 호응을 얻는다. 이미 설계된 기술의 디자인 또한 그 자리에서 멈춰있지 않고 이용자들의 문화와 결합되면서 같이 조응하거나 이용자들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대표적 예로, 애플은 컴퓨터를 팔기도 하지만 이를 구입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자발적 ‘애플 문화’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고 자본의 재생산을 도모하는 근거가 된다.
마르쿠제의 제자이자 비판적 기술철학자인 앤드류 핀버그는 기술 디자인의 형성과 진화 과정에 대해 ‘기술 코드’(technical codes)란 개념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즉 자명한 듯 보이는 기술에는 계급, 인종, 성차, 당대 사회∙문화 요인 등이 그 디자인 속에 내면화돼 있고, 이는 한 사회의 법과 정책 등으로 검증받는다고 본 것이다. 물론 이 코드의 디자인에는 지배의 논리만이 강조되진 않는다. 애초에 억압의 계기를 가진 기술 디자인도 정해진 이용 매뉴얼을 벗어나려는 다른 길로의 가능성들에 항상 열려 있다. 핀버그의 기술 코드는, 그래서 누리꾼들에게 권력의 자장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역설계’(reverse engineering)의 실천을 부추긴다.
한국 사회에서 누리꾼들에 의해 애용되는 신종 기술의 등장과 대중화는 대체로 공권력의 파장에 대응한 탈주의 성격이 강하다. 예를 들어, 지난 정부 때부터 시도됐던 내용등급제나 인터넷 실명제(소위 본인 확인제)는 현 정부 들어서 개인 홈페이지와 게시판 문화의 토론 기능을 급격히 약화시켰다. 인터넷 삼진아웃제나 법적 제제와 고발은 인터넷 카페나 인터넷방송 등 서비스 운영자의 표현의 자유를 막으면서 1인 방송을 불구화했다. 아고라 등 논쟁적 카페들은 명예훼손과 사생활 침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공권력을 견디지 못하면서 ‘인터넷 망명’이란 특유의 문화를 낳았다. 대단히 슬프게도 국정원 등 패킷 감청으로 인터넷 망명이란 의식적 행위가 부질없다는 사실로 인해 그 효과 또한 반감했다. 한 때 선거 시기 문자나 메일링 활용 방법이 선거법 위반으로 막히면서,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의 활용 등이 그 중심에 서기도 한다. 이렇듯 공권력의 힘과 농단의 정도에 따라 누리꾼들의 활동 반경에 영향을 주고, 새로운 대안 기술이나 우회로가 존재할 때 급격히 다른 기술로 빠르게 이전되어 간다. 예를 들어, 최근 본인 확인 절차 없이도 트위터를 경유해 토론 게시물을 등록할 수 있는 방식은, 정부 영향력 아래 불구화된 게시판 ‘본인 확인제’를 조롱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결국 권력의 일상화가 점점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화될수록, 기술 세대들은 억압의 계기가 강한 코드들을 담고있는 기술에서 멀어지거나 우회해 탈주 가능성이 높은 기술적 대안들에 눈을 뜨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소셜 미디어의 일종인 트위터는 촛불 정국 이후 소통과 이바구의 배출에 장애가 생기면서 누리꾼들의 대안으로 떠오른 경우다.
이 글에서는,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트위터 등 신종 ‘소셜 미디어’의 가치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이용했던 ‘2030세대’들의 역할과 이들을 잇는 촛불세대들의 문화정치적 가능성을 볼 것이다. 이들 세대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커뮤니티 소통의 배출구를 긍정하고, 무엇보다 뉴미디어를 활용하여 권력 억압과 여론 조작 국면에서 새로운 문화정치의 활력소를 찾고, ‘오정보’(misinformation)를 교정하고 권력의 구린 내면을 폭로하는 기능을 높이 산다. 이 글에서는, 소위 모바일 혹은 ‘유비쿼터스’ 환경하 총체화된 ‘삶권력’(bio-Power)에 저항할 ‘삶정치’(bio-politics) 혹은 ‘삶활력’(biopower)의 일환으로 소셜 미디어, 그 중 트윗 문화가 지닌 실천적 긍정성을 살펴보겠다.
소셜 미디어 전성 시대, 트위터의 논리
6월 지방 선거의 긍정적 효과가 아니더라도, 요새 인터넷 소셜 미디어의 중흥기다. 위키피디아(Wikipedia), 플릭커(Flickr),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eeter), 마이스페이스(Myspace) 등 사람과 사람을 관계맺고 소통하도록 돕는 다양한 미디어들이 출현하고 있다. 단순히 자신의 글을 보여주거나 소비하던 시절을 지나, 가진 것들을 서로 나누고 생산하고 공유하고 연결하여 지속적 유대를 형성하는 미디어 서비스 유형들이 급증하고 있다. 국내에서 소셜 미디어의 일종이었던, 싸이월드나 아이러브스쿨이 커뮤니티 서비스 바깥으로 나가거나 그 바깥과 소통하기에 대단히 어려운 폐쇄적인 ‘섬 구조’를 지닌다면, 최근의 서비스들은 바깥으로 열려있는 공개와 개방성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무엇보다 기술적으로 ‘오픈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라는 개방적 특성을 지니면서, 타 개발사들이 만든 프로그램들과 쉽게 연동해 작동하는 특성을 지닌 것도 강점 중 하나다. 이렇듯 소셜 미디어는 참여, 협업, 공유, 공개, 커뮤니티 등을 특징으로 하면서, 젊은 누리꾼들을 급속하게 끌어모으고 있다.
아이폰 등 스마트폰의 뒤늦은 국내 시장 형성이, 최근 소셜 미디어의 성장을 과열로 몰아가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그 볼썽사나운 면모에는 국내 대기업들의 움직임이 단연 독보적이다. 어지간한 기업들은 구글/위키로부터 새로운 부 창출의 경제학을 학습하고,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네트워크 기업 조직관리학과 소셜 망을 활용한 기업 마케팅학의 재부활을 꿈꾼다. 직장인들은 자기계발의 일환으로 일과후 최신 소셜미디어 신간들을 자발적으로 읽고 토론하며 동료들과 학습 세미나를 수행한다. ‘씨크한’ 우리 사장님과 회장님의 트윗을 따르며, 노사간 평등과 민주적 소통의 가능성에 감격해하고 열광하는 젊은 직원들도 나온다.
소셜 미디어들 가운데 트위터를 보자. 영어말로 ‘트윗’이란 쉼없이 새처럼 재잘거리며 말들을 뱉어내는 행위를 지칭한다. 트윗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물이 ‘트위터’란 서비스다. 말 그대로 트위터는 재잘거리는 트윗들에게 소통의 자리를 깔아주는 서비스이다. 이 작은 웅성거림이 이제 한 국가에선 혁명을 돕고, 정치 비리를 들쳐내고, 미국에 흑인 대통령을 만들고, 재난 소식을 공유하거나 완화하고, 지구촌 한쪽의 가난을 함께 나서서 해결하고, 낙후한 선거 정치에 혁명을 이끌 수 있는 울림으로 전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승 모드에 힘입어 최근 트위터 개발자는 마치 스스로 표현 자유의 투사인 듯 의기양양해서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권위주의에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트위터가 다른 기술에 비해 뛰어난 점은 대단히 기동성이 좋고 날렵한 네트워킹 기술이란 점에 있다. 일반 인터넷 단말기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휴대전화의 트윗 기능을 통해 짬짬이 한 개인을 둘러싼 상황의 변화를 즉각적으로 단문을 통해 알리거나, 사건의 진실을 그 자리에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 링크로 올리거나, 특정 사실 등을 바로 공유하는데 탁월하다. 그만큼 모바일 문화 현실에 잘 어울리는 기술이다. 애초 트위터 프로그램의 개발자가 휴대전화용 단문 메시지 서비스 어플리케이션으로 트위터를 개발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다른 트위터의 독특한 점은 사람들간 관계 맺고 소통하는 방식에 있다. 페이스북과 마이스페이스는 주로 현실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간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큰 효과를 지닌 반면, 트위터는 아는 사람들과의 긴밀한 관계들만큼이나 느슨하지만 새롭게 형성되는 관계망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데 적합하다. 즉, 트위터망은 긴밀하게 엮인 작은 인적 관계망들이 서로들간에 느슨하게 연결된, ‘작은 세계망들’의 총합으로 구성된다. 이것이 트윗의 조직 구성 방식의 독특함이고, 이것 때문에 정치인들이 선거 시기 트윗의 연결망의 확산 효과를 보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트윗 문화의 또 다른 국내 흥행의 요인은, 아이폰이라는 모바일 기기의 국내 수입과 맞물린 스마트폰 시장의 발흥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말 아이폰 수입과 동시에 불과 몇 개월만에 한국 사회에 미쳤던 파장은 모바일 시장, 정책의 룰은 물론이고 모바일 문화까지도 바꿀 정도로 대단했다. 그 가운데 소위 ‘공짜’ 무선인터넷의 대중화란 예기치 못했던 모바일 환경 개선이 이뤄져, 어디서든 와이파이 전파가 잡히는 곳들에서 자유롭게 인터넷 접속이 가능해지면서 휴대전화를 통한 트위터 등 어플리케이션 사용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단 트윗팅의 논리를 잠깐 살펴보자. 누군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려면 트위터를 통해 입단 신고를 하고 자신만의 아이콘을 생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본인 확인 인증 절차는 필요 없다.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면 프로필에 적으면 그만이요 싫으면 숨기면 된다. 프로필과 아이콘 이미지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돕기도 혹은 숨기기도 한다. 요 단계까지는 아직 트위터 안에서 홀로된 상태다. 이제 누군가와 재잘거리기 위해선 먼저 원하는 상대의 재잘거림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팔로잉’이다. 이를 위해 그리 큰 노동은 없다. 그저 클릭으로 의사를 표시하면 된다. 팔로잉을 통해서 관계를 맺고 말을 트고 재잘거리다보면 자신 또한 수많은 ‘팔로워’가 생겨남을 인지할 수 있다.
팔로잉과 팔로워의 숫자와 함께 얽힌 이들의 성향을 보고, 한 명의 ‘트윗터리언’이 관계 맺고 있는 다른 이들의 면면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맞팔’이란 상대가 팔로잉하면 자신도 응대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에 연연하는 이들은 보통 트윗을 자신의 선전이나 홍보 수단으로 삼는 부류가 많다. 이들은 팔로워를 늘리는데 주력한다. 그래서, ‘하루 30분씩 7일이면 나도 팔로워 1,000명 거느린 트위터러’란 책 광고 문구가 등장하면서, 소셜 미디어를 인맥관리에 목마른 이들에게 단비인 듯 묘사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언팔’은 팔로잉을 끊는 행위인데, 주로 성향이 다르거나 트윗 공해를 일으키는 이들을 피할 때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리트윗’ 혹은 알티(RT)는 다른 트윗터리언이 올린 글을 다시 올리는 것을 뜻한다. 「시사 IN」의 고재열 기자(@dogsul)처럼 수만명의 팔로워들이 있는 경우, 어떤 이름없는 재잘거림도 독설이 한번 더 리트윗으로 튕겨주면 예상치 못한 파장을 불러오기도 한다. 즉 일종의 도움받기가 가능해지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이들을 만나는 기회를 획득한다.
팔로잉한 트윗 글들은 각자의 ‘타임라인’을 통해 시간순으로 배열된다. 다시 말해, 트윗을 맺은 사람들이 내게 재잘거리는 말들의 기록은 각자가 선호하는 바에 따라 서로 다른 ‘타임라인’의 연대기를 만들어낸다. 누구든 트윗의 140자라는 제한된 글자수를 통해 자신만의 재잘거림을 내면서 타임라인에 편승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구나 김연아, 오프라 윈프리, 김주하와 대등해지는 곳’이 트위터라는 또 다른 광고 문구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대체로 김연아와 같이 알려진 스타급 인물들은 팔로잉이 아예 없거나 적다. 매니저에 의해 팬 관리 차원에서 이뤄지거나 현실의 문화 권력 관계가 그대로 트윗에 옮겨오기 때문이다.
선거 시기 모바일 행동과 촛불 세대의 공백
실시간 국내 트윗 인구를 조사하는 오이코랩(oikolab)에 따르면, 한국에서 트윗을 하는 인구는 8월 1일 현재 100만명을, 트윗의 수는 200억개를 넘었다 한다. 지방 선거가 있기 바로 전 달인 5월말에 50만명이었으니, 불과 두 달여만에 곱이 늘었다. 최근 스마트폰의 대중화 추세와 언론 등의 트윗 문화 열풍 때문이란 진단이 나온다. 6월 지방선거 때도 그랬지만, 아직까지는 트위터 이용자들이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해 외곽이나 지방으로 나가면 트윗을 통한 선거 투표 독려와 모바일을 통한 정치 행동은 낯선 얘기일 수 있다. 그래서, 트윗족은 아직은 선도적 신기술 이용 집단으로 통하는 ‘얼리 어댑터’들에 해당한다. 실제 이들은 연예, 스포츠, 예술, 정치, 학술, 정보통신 기술, 블로그 등 현실 영역에서 의견을 주도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보면 야당이나 여러 시민단체들에 근친성을 갖거나 비슷한 성향의 트윗터리언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초기 기술 수용자의 정치적 성향이 대체로 상식의 현실 감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트윗 문화는 아직은 건강하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누리꾼들의 재잘거림을 막는 행위는 다름아닌 집권 유력 정당이나 스타급 정치인들 보다는 힘없는 약소 군소 정당의 정치인들이나 주체적 시민들의 말길을 봉쇄하는 효과를 지닌다. 즉, 트윗을 불허한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나름 깨어있는 여론 선도형 집단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엄포에 해당한다.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트윗팅조차 권력이 허하는 ‘관용’(tolerance)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정치적 도발 행위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서도, 선관위와 정부가 불법 선거운동의 일환이라 하여 트위터를 틀어쥐려 하면서 우리는 트위터 탄압국의 오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현실의 억압의 결과는 오히려 디지털 세대들을 주축으로 폭넓게 트윗을 통한 투표 독려의 긍정적 효과로 기능했다. 여기서 ‘디지털 세대’가 누구인지를 좀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트윗 행위를 소위 세대론에 기초해 보자면, 이들 디지털 세대는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소비 문화에 친화적이고 새로운 디지털 기기와 문화에 민감한 ‘포스트 486세대들’이다. 보통 이들 세대의 범주에, X세대/신세대와 IMF세대 (소위 ‘2030세대’), 그리고 최근의 ‘광장세대’이자 촛불세대 (10대)가 혼재돼 있다. 무엇보다 6월 지방선거는 2030세대를 주축으로 극히 일부의 촛불세대가 트윗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선거 관련 적극적 투표 행위를 독려하는데 나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세대별 구분 표 참조). 이와 같은 필자의 단정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고등학생이나 현 대학 1, 2학년 학생들로 구성되는 촛불세대가 모바일 정치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구입할 수 있는 재정적 여건이 미약했다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즉 과거에 보여줬던 촛불세대의 발랄한 정치 참여적 지향성과는 무관하게, 세대적 지불 능력의 부족이 이들이 소셜 미디어의 관계망을 활용하는데 별 동기를 유발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올해 6월경 국내 트위터 인구의 연령별 조사를 보더라도, 2030세대에 비해 촛불 세대를 위한 모바일 정치행동의 물적 토대가 아직은 무르익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 소수 얼리 어댑터들의 기술 수용 그룹들을 제외하고, 트위터 인구를 연령대로 따지면 20대와 30대가 각각 28%와 53%로 8할 이상이 이들 연령대에 몰려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0대와 50대는 2%대에 머무르면서, 영미권의 50대 이상 19%와 10대(13~17살)의 7%에 비해서도 턱없이 낮은 비율을 보인다. 아이폰, 갤럭시S 등 스마트폰의 보급과 맞물려 관심은 있으나 기존의 약정 기간 해지 부담이나 스마트폰의 비싼 가격대로 인해 구입을 포기했던 10대 학생들과 대학 초년생들이 많았던 점은 촛불세대의 활동 부진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상 트위터의 접속은 휴대전화가 없어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기동성과 즉시성을 따지자면 무선인터넷 접속이 보장되는 스마트폰의 경우가 가장 최적화된 이용 조건이라 봐야 한다. 선거 이후의 시장 상황을 고려해보면, 촛불세대의 기술 장치로부터의 소외는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아이폰4 등 새 모델 출시로 가격대가 반으로 할인되는 등 전반적으로 스마트폰 가격 하락으로 그 소유 연령대가 더 낮아질 전망이다. 이 점에서 향후 스마트 모바일 기기를 통한 정치 행동에 있어서, 다른 어떤 세대보다 촛불세대의 재기발랄함이 훨씬 빛을 발할 거란 예측이 가능하다.
<새로운 기술 세대와 표현형식의 차이 구분>
세대 명명법
기술 세대 명명법
출생연도
표현 형식
대표 매체
대표 의제
성 격
신세대/
신세대/
X 세대
디지털 세대
70년대(1973~78)
게시판/ 온라인 동호회
피시통신/홈페이지
- 2000년 총선, ‘인터넷 질서확립법’
- 2010년 6월 지방선거
개별적, 다소 이념적, 낭만적
IMF세대/ ‘88만원’세대
N 세대
(인터넷/
신인류 세대)
80년대(1978~88)
시민/ 1인 온라인 미디어
포탈 서비스/ 온라인카페/ 블로그
- 2002년 16대 대선
- 2004년 총선, 노전대통령 탄핵 정국
실용적, 온라인 지향, 동아리적, 협업적
촛불세대/광장세대
모바일 세대
(웹2.0 세대)
90년대(1988~ )
웹2.0/ 모바일 미디어
다양한 이동형/ 휴대형 매체 활용
- 2008년 광우병 파동과 촛불시위
온-오프 연동, 개방적, 참여적, 이동적
촛불세대에 대한 미래 모바일 정치에 대한 기대감과 별도로, 결국 이번 지방 선거에서 야권 도약에는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신세대와 IMF세대라는 듀오가 존재했다. 무엇보다 현실 정치 지형과 관련해서, 고용 불안 사회(precarious labor society)를 그 특징으로 삼는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2030세대에 미치는 경제적 악조건의 상황들이 장기화되고 현 이명박 정부에서 극대화하면서, 아직 사회진출을 멀리 앞둔 촛불세대 보다는 현실에서 극적 탈출구를 원했던 2030의 기술 친화 세대들의 소셜 미디어 활용을 통한 투표 독려가 먹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알려진대로 보수-진보의 이념적 지형보다는 실용적이고 반권주의적이고 생활 속 실천을 강조하는 세대들이다. 특히 IMF세대는 고용 안정에 대한 기대로 뽑았던 경제 대통령에 스스로 뒤통수를 맞으면서 이번 지방선거에서 트윗들을 통해 지지 정당의 선호도를 바꾸고자 하는 정치 행동을 고무했고 일부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
트위터의 문화정치적 실험과 촛불세대의 미래
온라인 공간은 지방선거 이전에 이미 실명 공개로 불구화된 댓글 문화에다가 인터넷 주소(IP) 추적으로 험악해진 게시판 환경에 모바일 인터넷 세대들이 말과 논쟁의 생동감을 잃던 차였다. 6월 지방선거는 촛불 정국 이래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던 누리꾼들의 이바구들에 다시 생명의 불꽃이 피어났던 경우다. 물론 트윗 또한 권력의 드잡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선거 국면에서 공권력은 선거법 위반을 들이대면서 정치적 이슈로 재잘거리던 입들에 재갈을 물리려 했다. 그러나, 자신과 생각이 비슷하거나 뜻이 맞는 이들로부터 실시간으로 전하고 퍼뜨리는 이 시끄러운 재잘거림들의 활력을 막기에, 현 권력은 이 생경한 기술과 문화 디자인에 대한 학습이 부족했다.
트윗의 재잘거림이란, 확성기로 내는 소리가 아닌 말에서 말로 퍼지는 리트윗과 팔로잉으로 엮어진 자생적인 울림이다. 140자의 형식적 제약 속에 정치적 심각함을 나르고 논쟁을 촉발하긴 어렵다. 주로 특정 사안에 대한 즉흥적 속풀이와 때론 정제된 단상들을 올리거나 서로의 생각에 대한 공감에 그치기 쉽다. 2030세대가 실어 날랐던 트윗과 리트윗의 울림들은 사실상 직접적 투표 독려에서도 힘을 썼으나, 짧은 단문 속에 서로들 감흥하면서 만드는 현실 유감의 성찰적 탄식들에서 더욱 더 빛을 발했다. 게다가 단문의 글들 바깥으로 하이퍼링크와 이미지, 동영상 등이 자유롭게 연결되면서 형식적 제약을 거의 무위화하고, 현실 정치 기획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역할을 다층적으로 수행했다. 즉 트위터는 정치적 선동이나 광고로서의 면모보다는 다른 어떤 수단보다 간결하고 조용히 움직이나 유연하고 바깥으로 트임이 끝없이 나 있는 성찰적 지저귐과 상호 감흥의 세계라 볼 수 있다.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 규정에 의한 트위터에 대한 처벌 조항은 그래서 대단히 임의적이다. 예를 들어, 선관위는 선거운동 기간 전에 각자의 타임라인을 이용해 특정 정치 후보자와 관련된 내용에 대한 리트윗 행위 자체를 금했다. 트윗을 광고성 집단 이메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살포되는 광고 메일과 달리 트윗의 타임라인은 강제적 소구력이 없는 상호 재잘거림의 목록이란 점에서 다르다. 또한 이메일의 개인 정착지적 속성과 달리 트윗들의 흘러간 타임라인은 거슬러 공들여 읽지 않으면 찾기조차 힘들다. 그만큼 정치적 선동 효과가 적다.
[월간 조선] 2010년 7월호에 변희재가 대표 선수로 지방선거 패배의 원인 분석을 한 글, 「‘어르신’은 몰랐던 지방선거의 이면 - 승패 가른 트위터와 뉴미디어」를 보면 트위터에 대한 극우들의 재밌는 사고가 발견된다.
2010년, 지방선거의 미디어 환경은 2년 전보다 격차가 더 크게 벌어졌다. 기존의 포털[미디어다음-아고라]과 친노좌파 인터넷매체 이외에 ‘트위터’라는 다단계식(式) 선동형 매체가 가세한 것이다. 정치와 별 관계없어 보였던 IT 전문매체와 연예매체가 합류해 결정적인 사안이 등장할 때마다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와 관련한 대다수 미디어의 중심 역할은 30대 언론인들이 주도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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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라는 매체 자체의 영향력보다는 트위터로 상징되는 젊은 층의 정치 트렌드 변화가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분석이 최근 힘을 얻고 있다. 김제동 등 연예인들이 잇달아 트위터에 자신의 투표소를 배경으로 찍은 ‘투표 인증샷’을 올리면서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급속히 유행으로 퍼져 나갔다. 그 이전부터 20대 청년 조직들은 20대와 30대 투표하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여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쿨’하다고 평가받던 흐름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문화로 바뀔 조짐이 보였었다. 이를 상징화시킨 문화가 ‘투표 인증샷’ 이고, 최첨단 매체로 과대 포장된 트위터를 통해 젊은 층의 투표행위를 새로운 패션 트렌드로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골통 극우에 음모론까지 오염된 논의라 이를 논구할 가치가 없다고 한켠으로 제낄 수도 있겠으나, 다만 트위터에 대한 변씨의 평가를 주목해 보자. 우선 그가 트위터를 ‘다단계식 선동형 매체’로 보는 것은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의 근거 논리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소셜 미디어에 대한 극우들의 정치적 두려움의 극화된 과잉 반응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선거 당시 4만여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노회찬(@hcroh) 의원이 한번 트윗을 띄우면, 적어도 수만명의 팔로워들이 이를 받아 수백건의 리트윗을 올리며 반응한다. 리트윗을 통해 내는 재잘거림의 반향들은, 또 다른 관계망을 타고 거의 대부분의 국내 트윗터리언들에게 전달된다. 겁이 날만하다. 그러나, 아직 트윗의 공간에서 이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요, 외려 소수 정당의 정치인이 구사할 수 있는 여럿 중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받아들일 일이다. 이조차 선거법으로 불허하면 소수 정당의 소통 능력을 불구화하겠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변씨의 트위터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평가는 뭔가 좀 색다르다. 선거 시기 ‘투표 인증샷’을 ‘노빠’들의 정치적 감수성 변화의 징후로 읽고 있는데, 좀 뒤늦은 감이 있지만 트위터로 매개되는 디지털 세대의 스타일 정치의 맥락을 조금은 간파한 듯하다. 그는 우익 독자들에게, 무엇보다 대중문화 영역의 정치화를 막기 위해서 시장 논리로 밀어부쳐 이를 순화시키고, 뉴미디어도 “벼락치기가 아닌 평소 실력”으로 미리 미리 준비하여 선거전을 치러야한다고 조언한다. 트위터에 대한 그의 평가가 과잉 해석된 측면도 있지만, 그의 언설을 통해서 보면 보다 본격적으로 대중문화 영역과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 공간에 자리를 트려는 권력의 촉수를 쉬 감지할 수 있다.
다가올 포획의 논리을 인정하더라도 트윗 문화의 열풍, 특히 생산적 혹은 긍정적 담화 생산의 출구로서의 소셜 미디어의 역할론은 당분간 꽤 오래 끌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트윗터리언들이 모여, 트윗을 통해 이어받기 소설을 쓰고, 트윗을 통해 모임을 만들고, 선거자금 캠페인을 벌이고, 혹자들은 정치 논쟁을 벌이고, 트윗 단문을 모아 책을 쓰는 세상이 오고 있다. 소통과 관계의 새로운 변화요 진전이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모순들의 결절점 마디마디에서 신세대 누리꾼들이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벌이는 문화 행동과 자율적인 말의 게릴라전에서 새로운 표현 매체의 가능성을 십분 활용했던 경험이 있다. 지방선거에서 활용된 트위터 또한 누리꾼들의 풍부한 미디어 경험의 축적이란 연속성 위에 놓여있음과 동시에 2030세대 유권자들의 일상의 정치를 위한 의사표현 형식으로 기능했음을 확인한다. 이번 선거 시기 트위터의 활용은 사실상 모바일 환경에 기초한 문화정치적 행동주의의 확장적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덧붙여, 2030세대를 잇는 ‘촛불세대’들이 그들만이 지닌 문화적 재기발랄함으로 아이폰 등 스마트폰으로 갈아타면서 앞으로 본격화될 ‘모바일세대’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은 이제까지 특유의 인터넷 문화를 만들어냈다. 누리꾼들, 특히 ‘486’ 이후의 세대들에게 번개 모임, 게임방, 블로그, 싸이질, 댓글, 펌, 아햏햏, 포샵질, 유시시, 온라인 카페와 클럽, 인증샷 등은 새로운 놀이의 소재들이자 문화정치의 공작소였다. 이들을 통해 느슨하지만 기존의 전통적인 사람간 관계맺기 (인맥관리)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소통과 만남의 자유로운 출구들을 만들어냈다. 표현 수단들 각각의 효용값은 다 달랐지만, 이들 각각의 소통로와 문화들은 누리꾼들의 서로 다른 개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장이 돼 왔다. 더욱 진전되고 긴밀한 형태로 다른 놀이의 소재들과 함께, 뉴미디어는 신권위주의 정치 상황의 희극적 상황들을 드러내고 전면화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인터넷을 통해 아래로부터 선출한 우리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를 되새겨보면, 이제 새로운 기술에 열광하는 일에 신중할 필요가 있음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어느 세대들에서 보다 문화적 감성이 풍부한 촛불세대로부터 제 2, 3의 모바일 행동을 통한 일상 혹은 생활 정치의 가능성에 더 큰 기대를 건다.
RT @Stepania_: 와우 RT @unheim: http://bit.ly/cejQEa 더러 아쉬운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 그런대로 잘 썼네요. 참고하세요... 근데 재미있는 것은 트위터에 대한 어느 극우파의 견해.... 듣도... http://dw.am/L7D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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