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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채널도 "찢어라"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우리 일상에 기생하는 "찢고" "찢겨져야" 할 악습, 권위, 폭압 등이 어디 한둘이랴.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국민 통제의 상징인 주민등록증이 아직까지 버젓이 힘쓰는 현실 또한 당연
"찢겨야할" 것들 중 하나다. 이번 KBS 열린채널의 편성에서 사라진 이마리오씨의 영상 보
고서,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는 바로 "찢겨야할" 구시대 악습을 "찢자"는 의도를 지닌다.
그런데, 당연 우리 사회의 "찢어야할" 것들에 대한 고민을 영상에 담아내야할 열린채널의
시청자프로그램운영협의회(운영협의회)가 오히려 "찢어라"라는 문구를 겁내해 문제삼고, 내
친 김에 자의적 검열의 칼까지 휘둘렀다.
시민단체들이 수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어렵사리 방송법에 명문화하여 이룬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들이 방송된지 이제 겨우 한 해가 지났건만, 벌써부터 편성 심의 권한과 관련해 운
영협의회의 실체가 의심을 받게 됐다. 이 협의체가 왜 시청자의 직접적인 방송 접근권을 고
무하기보다 이를 막는 사전 검열의 기구가 되었을까? 이 문제는 근원적으로 우리 공익 방송
의 현주소와 한계로부터 따질 문제로 보인다.
우리 공중파 방송의 비정상적 수준을 이해하면 사실 "~을 찢어라"는 그리 겁나는 문구가
아니다. 어느 채널에서든 더 겁나는 말도 겁나지않게 마냥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실 상
업화와 비정치화가 화면을 지배하는 우리의 영상 문화에선 "찢기는" 대상이 겁나는 문제다.
예컨대, 광고에서 청바지 "찢는" 것을 무슨 젊은이들이 만든 하위문화의 분출인냥 표현해도
별 문제없이 전파를 타지만, 주민등록증 따위를 "찢으면" 탈이 생긴다는 얘기다. 이것이 우
리 방송 문화의 정치적 한계치다. 따져보면 방송 불가 판정도 결국 "찢어라"를 문제삼기보
다 "찢는" 대상으로 주민등록증이 거론되는 것을 불경죄로 몰아 벌어진 결과다. 주민등록증
=준법정신의 고취(방송심의규정)라면, 이를 "찢어라"는 무시무시한 탈법이자 정치적 선동에
해당한다. 따라서, 박정희 생가 장면 삭제 등에 이어 제목의 순화까지 요구하며 편성 결정을
지루하게 미루다가 일방적으로 불가를 결정한 행위는 애초에 공중파를 통해 내보낼 의사가
없었다는 정황으로 읽힌다. 열린채널은 그야말로 방송사와 운영협의회의 저급한 정치 수준
만큼만 빼꼼히 '열린' 상태였던 셈이다.
어렵사리 상업화된 언론의 틈새를 뚫고 만들어 시민들이 꾸리는 공공 시간대를 정치 영역
이 거세된 불구화된 영상만으로 채우게 놔둘 수 없다. 우리는 옴부즈맨 프로그램이나 시청
자 비디오 등으로 공중파 방송이 어떻게 자신의 민주적 성격을 과대 포장해왔는지 잘 배워
왔다. 이번 기회로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해 제작하는 KBS의 열린채널 또한 방송사들의 현
실 포용 능력을 내세우는 선전 수단이 될 위험성이 짙다는 점 또한 쉽게 파악됐다. 운영협
의회가 독립 기구로 운영되는 듯 했지만, 정작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돌출되자 기존 방
송사들의 편성권자들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물론 열린채널에 대한 체념은 궁극적 해결이 못된다. 체념은 사태의 진실을 정확히 보는
데 쓰이는 것으로 족하다. 문제는 관련 시민단체들의 요구처럼 당장 <주민등록증을 찢어라
>의 편성 불가 철회와 함께, 민주적이고 개방적으로 시민참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열린채널
운영협의회의 권한과 위상에 대한 재점검이 뒤따라야 한다. 쓰레기더미에서도 억세게 커가
는 생명을 키우려고 힘들게 마련했던 소통로가 아니었던가.
(일일문화정책동향, 2002. 5. 1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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