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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매년 생각나는 정월 대보름 음식들...
여기에 더불어 어머니가 찹살로 새알심을 빚어 만들어주신 동지 팥죽도 그립다.
웹서핑하다가 생각이나서... 맛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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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늦가을 참 열심히도 호박을 말렸다. 늙고 노란 호박이 아니다. 한 번으로도 모자라 두 번, 세 번에 걸쳐서 말렸다. 그렇다고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두 번째까지는 궂은 날씨가 반복되어 마를라치면 눅눅해지고, 괜찮다 싶어 뒤집어보면 뒤쪽은 곰팡이가 탱탱 슬어 결국 썩히고 말았다. 아까웠지만 밭에 다시 버려야 하는 수고도 감수했다. '어어, 이러다 올 가을 정말 호박쪼가리는 날 샜나 보네'하며 거의 포기할 즈음 콩대를 베러 갔더니 호박이 대여섯 개나 슬며시 정체를 드러내는 게 아닌가. 기뻤다. 요, 이쁜 놈들을 조심히 싸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날이 더 선선해지고 하루 바짝 햇볕이 들자 쪼글쪼글 부각처럼 빠득 말랐다. 그걸 긁어모아 담는데 어찌나 맑고 고운 자연의 소리가 들리는지 소음에 찌든 귀가 고향의 소리를 들은 듯 즐겁다 했다. 여기서 내가 말렸던 호박은 기다란 마디애호박도 아니고 그렇다고 쇠어서 익기 직전 늙은호박도 아니다. 서리만 맞았다 하면 곯듯 얼음을 잔뜩 머금고 푹 떨어질 가장 늦가을에 열린 여리고 둥근 애호박이었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내 주먹덩이만 하다.
예전 어머니와 나는 동구 밖 마당바위를 소쿠리에 호박을 썰어서는 무던히도 오갔다. 일년 중 딱 하루를 위해서 보통 공력을 들이지 않았다. 어머니와 내가 연애하듯 호박쪼가리를 빌미삼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때 여동생은 아직 어렸다. 그 아이가 벌써 서른하고도 다섯인데 호박 말릴 때는 절대 뒤집지 말아야 한다고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훈수를 두지만 들은 척도 안했다. 제까짓 게 뭘 안다고 함부로 오빠에게 아는 체를 하는가 말이다. 단 한 가지 비법도 아닌 비밀은 날 좋은 아침 일찍 얄팍하게 썰어서 말리고 날이 궂지 않을 성 싶으면 밤이슬을 맞혀야 더 쫄깃하고 가을 향기를 가득 품게 된다는 사실 뿐이다. 들기름과 들깨국물에 자작자작 조린 둘도 없는 나물 요리 아, 아쉬운 설도 지났다. 물리게 먹었건만 기름진 것 투성이었으니 이젠 정말로 속을 달랠 때다. 어루만져주고 다독여 보해주면 제들도 잇속 차린다고 뭔가 보답은 하지 않겠는가.
이에 보드랍고 살살 녹는 두어 가지가 있으매 한 가지는 두부와 쌀뜨물만 넣고 끓인 돼지고기요, 또 하나는 무채를 썰어 매한가지로 자작자작 물 잡아 끓여 숨죽인 하얀 나물반찬이다. 이도 아쉬우니 이제 본격 호박고지, 호박쪼가리로 어릴 적 어깨 너머로 흘깃흘깃 훔쳐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복잡다단하게 요리조리 할 것 없이 간단한 몇 번의 과정을 밟아 오늘의 주인공을 빛내고 내 살아 있는 미각을 일깨우고 싶다. 호박고지를 뜨뜻미지근한 물에 불려 놓으면 서서히 풀어진다. 곧 쪼글쪼글 잔주름을 펴면서 부풀어 오른다. 파르란 기운이 되살고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덜 익은 호박씨도 야들야들해지니 굳이 떼어낼 필요가 없다. 느긋하게 제들끼리 변화무쌍한 변신을 하면 물을 따라버리고 꾹 짜둔다. 묵나물에 잘 어울리는 들기름과 멸치국물, 다진 마늘을 넣고 집 간장으로 간하여 지글지글 볶아놓는다. 이제 진짜 국물을 준비해야 한다.
들깨국물을 넉넉하게 잡고 볶아놓은 호박쪼가리를 넣고 맘껏 끓여주자. 속이 부글부글 끓듯 다갈다갈 끓는 모습을 한번 보라. 과장된 영화장면에서나 본 듯하다. 방구들이 지진 영향을 받아 들썩인다. 용암이 거품을 뽀글뽀글 뱉어내듯 얇실하고 넓게 뜬 수제비처럼 기지개를 한껏 켜고 양이 더 늘어만 간다. 여긴 흰 국물과 하얗고 포롬한 연둣빛이 다소 섞여 있을 뿐이다. 고춧가루는 애당초 쓸 명분이 없다. 국물 한 번만 떠먹어보고는 더 이상 퍼지지 않게 뚜껑을 열어 차가운 곳에 놔두자. 아직 오곡찰밥과 갖가지 나물이 대령하기엔 이를 뿐 아니라 호박나물은 시원하게, 가능한 차갑게 먹어야 진가가 발휘되니 "참아야 하느니라"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풋풋하고 달보드레하고 감칠맛 나고 쫄깃한 감동 식혀서 쌀쌀한 바깥에 두면 더 좋으련만. 상에 차릴 것 다 차려지는 동안 속에 부담되지 않은 것부터 한 수저 떠먹는 시식 시간이 잠깐 있으면 좋으리라. 그 중에서도 맨 먼저 내 손을 움직이게 하는 음식은 여태 만들어놓았던 호박고지나물이다. 다시 한기를 머금어 금세 약간은 쪼그라들었다.
손이 바빠진다. 고루 잘 퍼진 찐 찰밥이 당도하여 찹쌀과 팥이 으깨지면서 진득한 끈기로 풍악을 울리니 마침내 나는 자작한 국물과 건더기가 있는 호박나물을 떠 넣는다. 목멜 듯하다가 이내 정상을 되찾았다. 오랜 가뭄 끝 단비라고나 할까. 질겅질겅 씹힌다. 쫄깃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보드라운 입감에 질기지 않는 쫄깃함까지 곁들여졌다. 호박씨마저 볼가져 나와 이가 심심할 새도 없다. 달보드레하고 감칠맛이 난다는 건 이럴 때라야 정확한 표현이겠다. 하찮은 호박쪼가리가 내게 이런 근사한 감동을 선사하다니!
한참을 정신없이 먹고 있노라면 옆에 있던 사람이 불쑥 한마디 던지는 게 일상이었다. "너 혼자 다 먹을라고 그러냐?" "바깥에 많으니까 또 갖다먹으면 되잖녀." 미안한 마음에 부엌을 들락거렸다. 이게 볶음이던가. 조림일까. 에라 모르겠다. 볶다가 졸였으니 알아서 이름 짓자. 호박고지, 호박쪼가리 나물은 맞지 않은가. 나는 아직도 30년 전 어머니가 대충 만들어줬던 지독한 사랑, 그 맛을 잊지 못하여 오늘 오후를 어찌 보낼지가 명확해졌다. 오늘같이 좋은 날 어디 있는가. 아이와 아내를 위한 밸런타인데이에 작은 설 대보름까지 겹쳐 있으니 한번 부지런히 움직여도 아깝지 않은 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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