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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여성미디어활동가 임파워먼트를 위한 걷기여행

푹 쉬었다. 평소 내 머릿속 대부분은 활동과 관련된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제주도 여행을 하던 2박 3일 동안 만큼은 내 머리가 검은 돌과 파도 소리, 그리고 짙은 초록의 아열대 식물들로 채워진 느낌이었다. 나의 일상과는 멀리 떨어진 제주도라는 공간,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는 여성미디어운동 활동가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었나 생각된다.

 

 

 

제주에는 혼자 도착했다. 제주 IN / OUT 시간을 다른 지역 활동가들과 대충 맞춰야 했는데 익산에서 가장 가까운 군산 공항에는 제주행 비행기가 하루에 두 차례 밖에 없어서 별 수 없이 광주공항에서 가는 항공권을 예매했었다. 익산에서 광주까지 1시간 30분 정도 온자 차를 끌고 가서 공항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처음 가본 광주공항은 정말 아담해서, 마치 필리핀 소도시 일로일로 공항을 연상시켰다. 오가는 비행기편도 얼마 없고 사람도 얼마 없으니 수속은 일사천리. 공항 오는 길에 괜히 지나치게 서둘렀다 싶은 것이, 지난 밤 잠을 조금 설쳐서 (여행에 대한 기대 때문에?) 무척 졸린 상태로 운전을 하느라 좀 위험했더랬다. 결국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서 잠시 눈을 붙이기도 했었다. 공항까지 오는데 고생을 많이 한 것 치고 비행은 너무 간단해서 신문을 조금 뒤적이나 보니 도착하고 말았다. 비행시간이 40분이라고 하지만 막상 뜨고 내리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늘을 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 듯. 제주국제공항에 내리니 역시 관광지 답게 북적거리는 모습. 별로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공항 청사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한참 기다렸다.

 

 

준비팀(?)과 연락이 닿아 공항 밖에 있는 활동가들을 만났다. 대부분 지난해 워크숍에서, 혹은 다른 회의 등을 통해 얼굴을 아는 사이이지만 어색한 건 사실이었다. 이번 여행에선 딱히 나와 평소에 친하게 지낸 활동가도 없으니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혼자인 여행. 마지막엔 결국 모두 잘 어울리긴 했지만, 이렇게 일정한 독립성(?)도 있었다는 것이 자유롭고 가뿐해서 어찌 보면 더 좋았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은 숙소, 밥, 놀이프로그램이 모두 제공된 일종의 패키지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행 프로그램을 짠 사람이 여행사 마인드가 아니라 같은 관광객이자 활동가의 입장이었다는 것. 그리고 여행의 목적이 ‘관광’이 아닌 ‘쉼’이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맘껏 쉬었다. 우선, 맛있는 것들을 많이 먹었다. 사실 제주도의 비싼 물가를 생각했을 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산해진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관광업계의 마인드가 아니라 여행자의 마인드를 가지고 각종 정보를 모으고 예산을 분배한 준비팀의 꼼꼼한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그리고 좋은 것들을 많이 보고 경험했다. 해수욕장에 두 번이나 가서 물놀이를 하고 (다수의 활동가들이 해수욕장에서 놀아보고 공동샤워실을 이용해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며 감탄했다.), 올레길을 걸으며 제주도의 자연을 만끽하고 해안도로변에 앉아서 파도소리를 들었다. 마지막 날 한 활동가는 이제 바다는 질릴 정도로 봤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굳이 올레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고, 제주도에서 바다를 보는 게 좋은지 산에 가는 게 좋은지 따져 묻지도 않았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하려고 허둥대지도 않았다. 활동가들이 가진 일상적 패턴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었다. 다만 지금 하는 행위의 목표와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 주어진 환경에 몸을 맞기고 맘껏 즐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분실물도 생기고 사진도 많이 찍지 못했을 수는 있지만, 그야 말로 ‘쉼’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우리의 여행이 마냥 돈 쓰고 놀기만 한 여행은 아니었다. 조급해하거나 종종거리지 않아서 그렇지 의미있는 경험도 많이 있었다. 우선 제주여성영화제에 참석했던 것은 개인적으로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지역 영화제에 좀처럼 가볼 일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지역 단체가 주최하는 영화제에 참석해서 아, 여기는 행사를 이렇게 하는구나 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함께 하는 사람들의 면면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개막작으로 상영된 여성영상집단 움이 제작하고 지역 여성주의미디어활동가들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오이오감>을 볼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 물론 언젠가 만나보게 되겠지만, 영화를 만든 지역에서 영화를 만든 사람들과 함께 큰 화면으로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제주 관객들의 반응도 볼 수 있었는데, 이후에 우리 지역에서 이 영화를 튼다면 우리 지역 관객들의 반응은 또 어떨지 하는 생각에 흥미로웠다. 익산에 돌아와 센터의 다른 스탭들과 <오이오감> 상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이오감>의 지역 상영 일정과 우리 상영관 일정을 고려하여 적당할 때에 상영을 추진해볼 계획이다. 이 영화의 상영이 지역 여성단체들과 미디어센터의 구체적 고리가 되고 우리 지역 여성활동가들도 미디어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도 있다.

 

 

뭐니뭐니 해도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나는 각자 자신의 주장을 담은 피켓을 달고 올레길을 걸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겠다. 여행에 참여한 16명과 중간에 합류해서 올레길을 같이 걸은 제주여성영화제 초청 감독 1분, 총 17명이 A4용지로 제작한 피켓을 한두개씩 달고 줄줄이 올레길을 걸은 것이다. 피켓의 내용은 주로 최근 어이없이 통과된 미디어법에 대한 비판, 쌍용차 정리해고와 강제진압을 반대하는 내용, 제주도 이슈인 영리 병원과 해군 기지에 반대하는 내용 등이었다. 휴가철을 맞아 여행을 온 타지 사람들이나 제주도 현지 사람들이나 17명의 선전전(?)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몇몇 제주도민분들은 우리 일행에게 말을 걸어 즉석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쉬엄쉬엄 올레길을 걸으면서 여러 활동가들과 보폭을 맞추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풍광에 맘이 뺏겨서 한참을 서있기도 했다. 그럴 때 마다 눈을 돌려 우리 일행들을 보면 저마다 자유로우면서도 할 말은 하면서(?) 걷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달까? 선전전 혹은 피켓팅을 하기 위해선 사전에 이런저런 준비가 필요하고 구호도 정해야 해서 복잡하고 할 일이 많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말 쉽게 선전전을 할 수 있구나 하는 교훈을 얻었다. 이 이벤트(?)는 전날 술자리에서 대구 핀다 활동가들의 제안으로 진행된 것이었는데, 당일 아침 A4용지 한뭉치와 매직 몇 개를 구입한 다음 올레길 초입의 카페에서 구호를 쓴 게 다였다. 화려하거나 짱짱한 피켓이 아니어도 열린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훌륭한 선전전이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저렇게, 제주 여행은 끝이 났다. 마지막 날에는 함께 했던 활동가들과 꽤 친해져서 집에 돌아가기 아쉬울 정도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어쩔 수 없이 남아있었던 익산에 남아있는 우리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겠다는 안도감도 있었던 것 같다. 돌아가는 길도 쉽지는 않았다. 올 때 보다 오히려 늘어난 짐을 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주차장에서 어쩐 일인지 방전되어버린 자동차 배터리 때문에 잠시 망연자실해지기도 하고 피로와 졸음을 꾹 참아가며 운전을 해서 집에 도착했다. 빨래해서 널고 기념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니 지난 2박 3일의 충만함은 마치 없었던 일 같기도 하다. 농담으로 이야기했던 것 처럼 함께 여행해서 무척 가까워졌던 활동가들이 다시 만나면 쑥스러운 사이로 변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느낌과 기억이 어디 갈까. 어차피 머리를 비우러 떠난 것인 만큼 지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제주도의 푸른 바다, 함께했던 여성활동가들의 웃음소리는 내 몸 어딘가에 기억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만날 때 까지, 제주도 안녕~ 언니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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