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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한번 읽고싶다.

어느 저널리스트의 죽음!! - 후마니타스님

 

손석춘, 저널리즘의 위기를 말하다

“저널리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





한국기자협회가 2006년 8월에 전국 기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론조사에서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가 무엇인지 물었다. 절반에 가까운 45%가 “없다”라고 대답했다. 이 수치는 저널리스트 스스로 저널리즘을 불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증언’해 준다.


“노조, 포항에선 불법 시위, 울산에선 배부른 투정”, “억지와 생떼, 자해공갈식 노동운동”, “이런 노조, 세계 어디에 또 있는지 대 보라.” 노동3권이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언론,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2006년 7월 ‘파업’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은 포항에서 비정규직 건설노동자 하중근 씨가 노동쟁의 과정에서 숨졌고, 남편을 만나러 온 임산부가 경찰에게 구타당해 유산을 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어느 저널리스트의 죽음』. 비장함마저 묻어나는 제목의 이 책은 23년째 ‘저널리스트’로 살아가고 있는 손석춘이, 이렇게 뒤틀린 우리 시대 저널리즘의 현실을 조목조목 증언하는 책이다. 나아가 비틀린 저널리즘에 대한 그 고민의 절박함은 ‘공론장의 위기’와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한국 저널리즘의 위기를 한국 사회의 중대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비단 신문사나 방송사의 위기만이 아니라 공론장의 위기이자 민주주의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갖고 톺아봐야 할 의제들이 미디어 공론장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을 때, 민주주의의 과제이든, 사회 발전의 과제이든 진척될 수 없다는 것은 애써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낳는 부정적 결과는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오늘날 한국 미디어 공론장의 위기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 삶의 현실에서 비이성적 갈등과 분열의 심화, 민중의 고통으로 나타나고 있다. 요컨대 공론장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는 저널리즘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시대적 숙제다.”


 

 


1. 한국의 ‘분단 공론장’

 

 


‘분단 공론장’이란 한국의 저널리즘과 미디어 공론장이 갖는 세 가지 주요 특징을 집약하는 저자의 개념이다. 첫째, 한국의 미디어 공론장은 상층 기득 세력의 이해와 관점에 의해 과도하게 독과점되어 있다. 둘째, 다른 시각과 관점 내지 다수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대해 지극히 배타적이다. 셋째, 공론장의 갈등 구조는 서로 다른 관점 사이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토론과 경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왜곡과 직접적 배제의 형태를 띤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의 미디어 공론장은 우리 안팎의 중대 이슈들과 민중적 삶의 현실에 대한 합리적 이해와 이성적 소통으로부터 단절된 지배적 관점의 독과점 구조를 일방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2. 한국의 뒤틀린 저널리즘이 어떻게 공론장을 왜곡하는가.

 

 

이 책은 2005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중요하게 떠올랐던 이슈들에 대해 언론이 무엇을 보도하고 보도하지 않았으며, 어떻게 보도했고, 그것의 문제는 무엇인지, 기사 읽기와 논평을 진행하고 있다. 일례로, 언론은 2005년 9월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에서 여러 입장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들에 대해 “적화통일이 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는 것”(중앙일보)이라거나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를 부인하는 것은 자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세계일보)로 몰아갔다. 나아가 “맥아더를 공격하는 것이 역사청산과 닮았다”(동아일보), “이 나라를 송두리째 끝장내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진 세력이 엄존하고 있음을 실증하는 두 가지 사례가 맥아더 동상 철거와 삼성때리기”(중앙일보)라고 주장한다. 결국 맥아더 동상 사수나 옹호는 어느새 ‘과거 청산’에 반대하고 삼성을 옹호하는 논리로 둔갑한다. 한 사회에 존재하는 주장을 색깔론으로 왜곡하고, 나아가 자사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기까지 하는 모습은 한국 저널리즘의 공론장이 얼마나 폐쇄적인가를 확인하게 해준다.

 

 



3. ‘삼성저널리즘’과 의제의 왜곡

 

 


이 책은 3부에서 ‘삼성과 언론의 관계’라는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2000년대 한국 사회의 지배구조가 ‘삼성과 언론’으로 기호화되면서 대한민국이 ‘삼성공화국’이라는 담론이 퍼져 갔다. 심지어 삼성공화국의 차원을 넘어서 ‘삼성제국’을 형성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삼성공화국 또는 삼성제국에서 가장 핵심적 구실을 맡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언론이다. 대다수 신문과 방송이 삼성그룹과 그 총수 일가의 부정적 현상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삼성 신화를 앞장서서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우리 사회 전반이 해결해 나가야 할 의제들을 왜곡하고 있다는 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의제를 왜곡하고 있는 삼성 저널리즘의 특성을 필자는 다섯 개로 정리하고 그 사례를 들고 있다. 첫째는 전투적 노동통제인 ‘무노조 경영’, 둘째는 초법적 경영, 셋째, 경제성장 만능론, 넷째, ‘일등주의’ 경쟁론, 다섯째, 황제식 경영 세습이 그것이다.



그 밖에도, 필자는 신문의 특정 후보에 지지에 대한 찬반 논란에 대해 선거법을 개정해서 이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지금껏 실제로 신문들은 특정 후보를 지지해 왔으며, 오히려 이를 공개적으로 밝힐 때 선거 공론장의 왜곡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신문 읽기를 통해 2005년 이후 한국 사회의 중요한 이슈들을 다루고 있는 만큼, 문제제기의 설득력도 높으며, 각각의 파편적인 사례들을 모아 민주주의 문제로 모아가는 필자의 문제의식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언론, 투명한 창문이 되어야...

그는 한국 언론의 성향이 친미나 반미인지, 보수인지, 진보인지를 따질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보도와 논평이다. 그는 저널리즘이 “삶의 현실과 수용자 사이에 투명한 창문”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언론은 풍부한 현실을 가능한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보수적 칼럼니스트인 매기 갤러거Maggie Gallagher가 한 말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나는 독자를 조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세계를 내가 본 그대로 드러내고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바로 그것이 언론인과 선동가의 차이다.

 

 

 

목차

어느 저널리스트의 죽음: 한국 공론장의 위기와 전망


여는 글_ 저널리스트의 죽음과 공론장의 위기


1부 밖으로부터 왜곡의 저널리즘


1. 평화 위기와 저널리즘의 정확성

2. 독도 저널리즘의 실패

3. 미국‧일본의 국가이익과 한국 언론

4. 맥아더 동상과 꼭 닫힌 공론장

5. 공안 당국보다 서슬 푸른 공안 언론

6. 한‧미 관계 보도의 편향적 저널리즘

7. 언론이 언론이기를 포기한 성역 주한미군

8. 한국 언론의 색깔 과잉과 흑백 현실

9. 대한민국 안보의 구멍, 저널리즘

10. 전시작통권 보도와 대역죄


2부 위로부터 배제의 저널리즘


1. 노‧사‧정 저널리즘의 도덕성

2. 이건희 삼성 회장과 저널리즘의 명예

3. 무노조 경영과 무비판 언론

4. 안기부 X파일과 언론의 X파일

5. 농촌 저널리즘과 자살의 커뮤니케이션

6. 교육 공론장의 황폐화

7. 사학법 개정 보도와 저널리즘의 상식

8. 선거 공론장과 민주주의의 위기

9. 낡은 방식 벗어나지 못하는 노사 관계 보도

10. 비정규직 타살과 임산부 유산의 공범


3부 죽은 공론장 살리기


1. 언론 개혁과 철학의 실천

2. 신문윤리강령의 위선과 저널리스트의 의무

3. 노무현 정권과 누더기 언론 개혁’이 남긴 과제

4. 민주적 선거 공론장 만들기

5. 삼성 저널리즘의 해체를 위하여


닫는 글_ 아직 오지 않은 저널리스트를 기다리며


필자 소개


손석춘은 언론개혁시민연대 창립공동대표를 지낸 언론인으로 『한겨레』 기획위원입니다. 언론학 박사로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도 맡고 있습니다. 『신문읽기의혁명』, 『부자신문 가난한 독자』를 비롯한 언론비평서들과 학술서적인 『한국공론장의 구조변동』을 펴냈습니다. 장편소설 『아름다운 집』, 『유령의 사랑』, 『마흔아홉통의 편지』 3부작을 발표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최근 칼럼집 『과격하고 서툰 사랑고백』을 펴냈습니다. 현재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 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 더....

삼국시대는 첩자의 전성시대 - 김영사님

 

극단적으로 말해 삼국시대는 전쟁의 시대라 말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기록으로 남은 삼국시대 전쟁 횟수는 약 460회에 이르며, 그중 삼국 간의 전쟁은 약 275회로 전체 전쟁의 6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삼국시대 역사를 대략 700년으로 볼 때 1.5년에 한 번 꼴로 전쟁이 벌어진 셈이다.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전쟁까지 포함시킨다면 거의 1년에 한 번은 전쟁을 벌였다는 단순한 계산이 나온다. 특히,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재편성되면서 전쟁의 양상은 국제전으로 변모했고, 이에 따라 전쟁의 횟수가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그 규모도 전례 없이 커졌다. 이후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합할 때까지 전쟁이 안 일어난 해는 거의 없었다. 7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

 

전쟁은 첩자의 온상이며, 첩자는 전쟁의 산물이다. 100년에 걸친 전쟁사는 바꿔 말하면 첩자의 역사이기도 했다. 삼국시대 첩자들의 활약상이 대부분 7세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국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상대국에 침투하여 첩자 활동을 펼쳤다

 

 

원효와 의상, 첩보 혐의로 구금

 

삼국 간의 군사 충돌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7세기 중반, 정확하게는 650년 신라의 승려 두 사람이 당으로 불법을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두 사람은 당시 당나라와 고구려를 구분 지었던 요동 지역으로 길을 잡아 나가던 중 국경을 지키던 고구려 군사에 의해 수십 일 동안 감금당한다. 당나라행은 물론 무산되었고, 둘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신라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이들의 발목을 붙잡은 혐의란 것이 뜻밖에도 ‘첩자’였다.

 

얼핏 뜻있는 종교인이 구법 과정에서 당한 시련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대목이긴 하다. 하지만 관심의 초점을 구법승 두 사람이 아닌 그들에게 씌워졌던 ‘첩자’라는 혐의에 둔다면 우리 고대사 연구에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뜻밖의 흥미진진한 연구거리와 조우할 수 있다. 바로 ‘첩자’라는 익명의 존재들이다. 역사에서 이들은 철저하게 조연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행위는 개인이나 집단은 물론 한 나라의 운명까지 좌우할 정도로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

 

650년 첩자 혐의를 받고 수십 일 동안 구금되었던 두 승려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4 의해 제5 ‘의상전교’)에 남아 있으며, 두 승려는 다름아닌 원효와 의상이었다

 

 

스스로 첩자가 된 을지문덕

 

살수대첩은 고구려의 치밀한 작전의 승리이자 을지문덕이란 명장의 심리전과 기만술 등이 효과적으로 작용한 첩보전의 승리다. 을지문덕은 스스로 첩자로 분해 적진에 뛰어들기도 하고 거짓으로 항복하기 전에 수나라 장군의 마음을 떠보는 등 최고 수준의 교란전술과 용병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고구려와 수의 제2차 전쟁은 그 규모가 가장 컸고 또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다. 1차 전쟁을 겪으면서 고구려는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한 상태였고, 수는 양제 개인의 성격적 결함과 서역에서의 성공 등에 자만하여 결국 대세를 그르치고 말았던 것이다. 사전 준비는 물론 전략과 전술 등 모든 면에서 고구려는 수를 압도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고구려가 일찍부터 수의 변경에서 활발한 첩자 활동과 첩보전을 벌여왔다는 사실과 수나라 내부 고위관리를 포섭하여 내간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을지문덕이 서슴없이 수의 군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첩자 활동과 첩보에 따른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여기에 활용 등 을지문덕의 능수능란한 용병술이 가미되어 고구려는 완승을 거둘 수 있었다. 얼마 전 드라마 <대조영>에서도 언급되었던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보낸 시에서 말한 귀신 같은 책략’ ‘기묘한 계책은 고스란히 을지문덕에게 돌아가야 할 대목있었던 셈이다. 

 

 

승려 첩자, 도림

 

고구려의 장수왕은 즉위 63년째인 475 9월에 3만 명의 병력으로 백제를 기습하여 개로왕을 사로잡아 처형하고 수도 한산을 점령했다. 백제는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그런데 백제의 이 치욕스러운 패배의 이면에는 한 승려가 있었다. 그는 고구려가 치밀하게 준비한 백제 공략 시나리오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 첩자였다. 장수왕은 첩자를 모집했고 그는 승려의 신분으로 조국 고구려를 위해 첩자를 자원했다. 그는 죄를 짓고 고구려에서 도망쳐 온 것처럼 꾸미고 개로왕의 취미인 바둑으로 접근하여 신임을 얻은 다음, 현란한 말솜씨로 각종 대형 토목사업을 부추겨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개로왕은 말할 수 없는 후회와 함께 첩자 도림을 저주하면서 죽어갔다. 이 사건은 첩자 한 사람이 한 국가를 멸망의 문턱까지 몰고 갈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신념의 화신, 박제상

 

신라 눌지왕의 동생들을 구하고 장렬하게 죽은 영웅 박제상은 사실 첩자였다. 그는 변복과 잠입으로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었던 복호를 구해왔다. 그리고 왜국에 붙잡혀 있는 미사흔을 빼내오기 위해 자신을 고국을 배반한 자로 꾸며 왜로 건너갔다. 화려한 언술로 왜왕을 안심시킨 박제상은 미사흔을 성공적으로 탈출시키며 첩보술을 훌륭하게 구사한 전형적인 첩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첩보술의 전문가, 김유신

 

신라의 명장 김유신은 침투 간첩 조미곤을 통해 백제의 최고위층 실세인 좌평 임자를 포섭하여 백제 정권의 동향을 면밀히 파악하였고, 그 결과 상대적으로 크게 힘들이지 않고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조미곤은 백제에 포로로 잡혀가 좌평 임자의 집에서 종노릇을 하다가 도망쳐온 인물이었다. 김유신은 이 조미곤을 사상적으로 철저하게 훈련시켜 다시 임자에게 보내 그를 포섭하게 하는 완벽에 가까운 첩보술을 구사하고 있다. 백제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무너진 것은 신라의 첩보망이 백제 지배층 깊숙이 침투해 있었던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치정을 역이용한 모척

 

김춘추로 하여금 목숨을 건 고구려행을 감행하게 만든 642년 백제와 신라의 대야성 전투도 그 실상을 파고들면 치정과 그것을 이용한 첩보전이 핵심이다. 대야성 성주였던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막료 검일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다. 이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백제의 첩자 모척은 김품석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검일을 포섭?매수하여 내통함으로써 대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김품석과 그 가족을 몰살했다. 대야성 전투로 야기된 김춘추의 고구려행은 궁극적으로 나? 연합을 이끌어냈고, 나아가서는 신라가 삼국통합에 박차를 가하게 됨으로써 삼국은 물론 당시 국제정세의 판도 변화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이렇듯 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첩자들이 가장 왕성하고 눈부시게 활약하던 시기였다. 승려들까지 첩자로 활용할 정도로 첩자전이 치열하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삼국은 모두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총력전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상대에 대한 첩보와 그를 통한 정보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삼국은 첩자 침투와 첩보를 쉴새없이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첩자들의 무대는 삼국에만 한정되지 않고 수.당을 축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 사회 전반에 걸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활약상 여부에 따라 한 개인의 운명은 말할 것도 없고 한 국가의 흥망이 좌우되었으며, 나아가서는 국제정세의 판도까지 변화시켰던 것이다.

 

첩자의 역사는 동서양 모두 4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 수천 년 전부터 오늘날과 거의 다를 바 없이 많은 유형의 첩자들이 기발하고 다양한 첩보술로 무장한 채 종회무진 활약했다. 그리고 우리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서로를 공격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성에 깊숙이 개입했던 삼국시대 각국이 아주 폭넓게 첩자를 활용했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다. 우리의 첩자 역사가 2천 년이나 된다는 점도 새삼스럽다.

 

동서양 첩자의 역사를 훑어보면, 기원은 비슷하지만 그 이후의 전개상은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스파이’ 역사는 고대 이후로 2천 년 가까이 단절된 상태였다. 물론 그 사이 스파이가 없었다거나 그들이 활동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기록상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동양, 특히 중국 ‘첩자’의 역사는 역사적 실체로나 기록으로나 상당히 풍부한 자료를 남기고 있다. 고대사만 놓고 볼 때 우리 기록은 중국과 비교하면 빈약함을 면치 못하지만 서양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다. 서양의 본격적인 스파이 역사가 16세기 내지 17세기에 비로소 시작되었다면, 중국은 그보다 2천 년 이상 앞선 전국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의 경우는 기원 전후로 시작되어 7세기 때 절정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절정기로만 따져도 서양에 비해 1천 가까이 앞선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첩자의 역사에 관한 한 우리 고대사는 논의할 여지가 많은 시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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