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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3/07
    "지금 예수가 온다면 당신들 만나겠나"
    한울타리
  2. 2007/03/07
    사은품도 드려요.
    한울타리
  3. 2007/03/07
    위안부에 관한 기사 하나
    한울타리
  4. 2007/03/05
    책임이냐! 공헌이냐?(2)
    한울타리
  5. 2007/03/03
    트랙펙?(2)
    한울타리

"지금 예수가 온다면 당신들 만나겠나"

"개정 사학법 반대하는 저의가 뭔가"
최순영 의원, "지금 예수가 온다면 당신들 만나겠나"

 

민주노동당의 최순영 의원의 남편은 목사였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총회장 양태윤 목사)의 준목 출신이다. 현재 개정 사립학교법의 재개정을 외치는 일부 보수 개신교 목사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생기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최 의원은 지금 이 땅에 예수가 온다면, 가장 먼저 찾아갈 곳이 어디일까를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는 적어도 지금 재개정 투쟁을 하고 있는 목사나 교회는 아닐 것이라고 단언했다. 예수는 이 땅에 가장 헐벗고 굶주린 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를 찾아갈 것이라며 한국교회는 이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 버렸다고 비판했다.

최 의원은 일부 기독교 사학의 비리 때문에 전체 기독교 사학이 비리의 온상으로 매도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종교 사학은 비리가 한 군데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지금까지 기독교 사학의 비리가 있었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억울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그는 정말 기독교 사학이 그동안 학교를 투명하게 운영했다면, 이번 기회에 자신들의 깨끗함을 세상에 알리라고 조언했다.

그는 종교 사학이 가장 폐쇄적이라며, 진정 건학이념을 구현하고 싶다면 학교를 투명하게 운영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또 선교란 목적을 달성하고 싶다면, 학생들에게 종교교육을 1시간 더 하고, 예배에 참석하도록 강요하는 것보다,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닌, 함께 더불어 사는 교육을 하라는 것이다.

인터뷰는 2월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 있는 최순영 의원실에서 1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 최 의원은 정치권과 일부 보수 개신교계 목사들이 사학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뉴스앤조이 유헌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2월 임시국회에서 사학법을 재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정치권의 분위기는 어떤가. 

한나라당 안에서도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지지하는 의원과 그렇지 않은 의원이 있다. 한나라당 내부에도 사학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이권이 있는 사람이 있다. 물론 지도부는 (사학법 재개정에) 강경한 태도이긴 하지만. 한나라당은 사학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한나라당의 분위기와 맞물려 일부 종교 단체에서도 사학법 재개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생각이 있다. 

특히 한나라당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처음부터 장외투쟁을 하고, 이번 기회에 기득권을 가진 보수집단을 결집하려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사학법 때문에 다른 민생법안도 같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국민들만 불쌍한 것이다. 2월 국회에서 재개정이 되지 않으면, 4월 국회로 넘어간다. 그러면 곧바로 대선국면으로 접어든다. 17대 국회에는 중요한 법안들이 많이 올라와 잇다. 그런데 사학법 때문에 이런 법들이 다 묶여 있다. 교회가 그리고 목사님들이 사학법 재개정을 위해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민생법안을 빨리 통과시키라고 국회에 촉구해야 한다.
 


일부 보수 개신교계가 개정 사학법의 재개정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개신교를 포함해 종교 단체가 사학을 하는 것은 선교의 목적이 가장 크다. 그럼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종교 사학들이 가장 폐쇄적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선교 사업을 한다면, 더욱 투명하게 사학을 운영해야 한다. 사학은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교육을 1시간 더 한다고 선교가 되나. 그렇게 해서 학생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사학재단이 투명하고, 교사들이 진정 예수의 가르침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훨씬 좋다. 성경에 있는 이념으로 학생들을 교육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예배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학생을 처벌하는 것 등은 진정한 기독교 사학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종교가 기득권자가 됐다.

 

재개정을 주장하는 이들은 개방형 이사가 들어오면 학교의 건학이념을 구현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왜 개방형 이사를 반대하는지 내가 되묻고 싶다. 4분의 1밖에 안 되는 개방형 이사가 들어간다고 가정하자. 그들이 어떤 의결권을 가질 수 있나. 실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또 전교조가 학교를 장악한다는 표현을 쓰는데,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개방형 이사 420명 중 전교조 교사는 한 명도 없다. 거의 재단 쪽 사람들이 개방형 이사로 들어갔다.

개방형 이사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사학도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 반대하는 저의가 뭘까. 지난 세월 동안 폐쇄적으로 학교를 운영해왔는데, 개방형 이사가 들어가면 감추고 싶은 것들이 공개될까봐 그런 것인가. 솔직히 이런 부분이 의심이 된다.

개방형 이사는 교육의 측면에서 투명성과 민주성 그리고 공개성을 확보하자는 의미에서 만든 제도다. 또 비리를 사전에 예방하자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아무런 뜻도 없다.

 

개방형 이사가 한 명이라도 정말 악을 쓰고 달려든다면, 학교 운영이 어려워 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은 없다. 만약 그런 이사가 한 명이라도 있다고 하자. 다른 이사들은 그렇게 허약한가. 재단이 한 사람 때문에 혼란스러워 질 수 있나. 그렇게 허약하면 무너지는 게 낫지. 그리고 사학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개방형 이사가 떠들 수 있을까. 지금 종교인들이 우려하는 것 자체가 구린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닌가. 당당하면 뭐가 문젠가. 그리고 학교가 조금 혼란스럽다고 해서 정부가 관선이사를 그렇게 함부로 파견할 수 없다. 지금이 어느 시댄데, 그렇게 하나

 

이들은 극히 일부 사학의 비리 때문에 다수의 사학이 피해를 입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쁜가. 그동안 투명하게 학교를 운영했으면, 이번 기회에 공개가 되면 좋지 않겠나. 오히려 자신들이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종교재단이 운영하는 사학이 비리가 하나도 없어야지. 한 군데라도 있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동안 발생했던 여러 종교 사학들의 비리가 발생했을 때 지금 재개정을 외치는 사람들은 뭐했나. 그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억울하다고 기분 나쁘다고 하면 되나.

   
 
  ▲ 최 의원은 한국교회가 좀 더 낮은 곳으로 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뉴스앤조이 유헌  
 
개정 사학법으로 인해 종교교육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왜 할 수 없나. 개정 사학법 어디에도 종교교육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무데도 없다. 얼마든지 종교교육 할 수 있다.

 

일부 목사와 교인들은 삭발까지 했다.

참 안타깝다. 개인의 기득권을 위해 삭발하지 말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삭발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한국교회가 언제부턴가 사회의 기득권층에 편입되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나.

가슴이 아프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 지금 이 땅에 예수가 온다면 과연 어느 곳에 가장 먼저 갈까. 또 누구를 제일 먼저 만날까. 목사님들이 그걸 생각했으면 좋겠다. 가장 헐벗고 어려운 사람한데 찾아가지 않을까. 사학법 재개정을 부르짖는 목사님들을 먼저 만날 리가 있겠나.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정책과 기독교의 이념이 상당 부분 동일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민주노동당의 정책이나 추구하는 삶 자체는 기독교와 맞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 땅에 가난한 사람을 위한 것이나, 평화를 위한 것 등이 말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우리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면, 진보정당을 지지안 할 수 없다. (웃음)

개인적으로 포도밭 비유를 많이 인용한다. 한 나절을 일하나, 하루를 일하나 똑같이 임금을 줘야 한다는 말씀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수가 살던 당시에는 혁명적이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에 한 마디 한다면

정말 목사님들이 다시 생각해봤으면 한다. 기독교인이 이 땅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 문제를 고민해줬으면 고맙겠다. 정의를 위해, 가난한 자를 위해, 평화를 위해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예수가 지금 이 땅에 있으면 속상해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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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은품도 드려요.

전에 봤던 시간이 꽤나 지난 기사 같은데 왠지 눈길이 간다.(소위 '남편을 팝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여권도 신장되고 있는데 아직 성에 찰 정도가 안된 마당에 어느 처자가 올린글인 게비다. 읽을수록 재치있고 덧붙여 미국과 연계시켜 시사성(?)을 더 높였다.

그래서 더 괜찮은 한미관계 패러디가 됐다. 너무 코미디 아녀? 할 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우리 사회가 죄다 코미디인데~(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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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매이유

세상에 출시되어 장바닥을 떠돌아 다닌지 217년 밖에 안된 제품이지만,
수천년이 지난 우리 상품보다 정력이 팔팔하여 한눈에 반해 구입한 넘입니다.
그리고 을매나 늠름했던지 "이젠 안심하고 발뻗고 살 수 있겠구나" 싶어
이웃넘들이 사재기하는 틈에 끼여 재수좋게 구입한 거예요. 근디 말여요.
자꾸 오바하고 속을 많이 썩여 이젠 팔아버릴려구요.

제품상태

구입 당시 최상급인줄 알았습니다. 속아서 사용하다 보니 고생 무자게 했어요.
아직도 A급이라고 박박 우기는 소비자들을 보면 참말로 미쳐불어요.
글구 밤마다 요구하지만 머 만족을 줘야 말이지요. 그래도 처음 구입할 때는 괜찮았어요.
흠이라면 영국에서 원료를 수입해서 부속품들이 많이 히뚜룩해요.

사용자 리뷰

세월이 흐를수록 얼굴 반반한 거, 등치, 뜯어먹고 사는 것이 영 아니데요.
가만 본께 모델명이 '지구수비대'인 줄 잘못 알고 실수루 구입했습니다.
평화전도사 흉내 내는 꼬라지가 완전 날건달 산적 두목이었다니까요.
끼어들고, 간섭하고, 겁주고, 공짜루 이땅에서 놀구 먹으려 하질 않나,
설운 제주 섬사람들을 완전 피바다에 몰아넣질 않나,
두환이 졸개들이 광주에서 날뛰며 토끼사냥할 때 손뼉치며 좋아하질 않나...
아~ 이를 어쩐다요. 60년 대물림하며 써버렸으니 반품도 안된다네요. ㅠ.ㅠ

거그 다 "기브 미 쪼꼬레트" 하던 시절에는 맴이 바다같은 줄 알았는데
으매 으매 쪼잔한 거, 그넘의 잔소리 잔소리- 남자 맞어?
날마다 술만 쳐먹는지 주사(酒邪)질에다 지랄육갑 꽝입니다요.
지나가는 개가 다 시끄럽다 왈왈거립디다. 어떤 개는 약에도 쓸 수 없는
구린 개똥이라고 놀려대질 않나.

제 절친한 분은 그러데요. 지 서방에 반해 떡치는 대추리 국방부넘들 보고
"미국눔 월경 국물에 밥 말아 쳐 먹을 눔들아! 시멘트 공굴에 매장해 버릴 눔들아~~"
요렇게 고래 고래 고함 질러 대더랍니다. 지 서방이 또 가심 아파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5월이었어요. 다른 마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촌장께서
"신을 믿는다며, 다른나라를 침략해 수십만명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요렇게 따끔한 욕을 퍼부었더니 이 마을 때려부시겠다고 난리가 아니었어요.

이넘의 서방 만난 덕에 정말 얼굴 들고 마실다닐 수가 없습니다.
으아아~ 챙피하고 부끄러워서 어디 살겠냐 말여요?
먹는 것은 소 돼지 맹키로 육식 채식 안 가리고 게걸지게 잘 쳐먹구
한마디로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동물입니다.

능력

연봉은 3,900조 정도 됩니다. 그 중 무기구입 및 사용비가 연간 430조 되구요.
아직도 왕성한 정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라 그럽디다. 에구~끔찍한 넘!
빚도 많아요. 8,115조 됩니다. 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요.
중동국가를 잡수게 되면 거꾸로 재산 8,115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씸이 있었심다...

외형 및 디자인

지가 봤을땐 못된 짓만 골라 하는 개망나니로 보이지만 이넘의 서방은
'섹시한 수호천사'라고 박박 우깁디다. 그 말을 믿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날은 몽둥이가 쉬지 않습니다. (구입하시는 분 참고하세요.)

글구 메모하세요.
전체적 외관은 터프하고 그럴싸하나 조폭 영화에 출연 제의가 자주 들어온다는 것,
또 쌈질을 자주해서 사고를 많이 친다는 것, 그러나 이 서방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시집살이는 평생(?) 보장받는다는 겁니다. 앗싸아~

스피커

동급 최고 출력의 주딩이 째지는 소리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제 집에 있는 쏘니 오디오 출력이 450W인데요. 우리 냄편 주딩이는 450억W는 될 거예요.
돼야지 메가지 따는 소락진지...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온 마을에 쩌렁쩌렁 다 들립니다.
근디 워디가 고장이 났는지, 나사가 빠졌는지 한쪽이 막혔는지 엎어보고 뒤집어봐도
도대체가 컨트롤이 안됩니다. 지 내키는 대로라요. 구입 초기에는 그 아가리도 이쁘기만 하던데...
갱년기에 접어들었나 봐요. 고쳐 쓰시기 바랍니다.

전원

사용설명서에는 100~240V라고 나와 있는데 지가 볼 때는 100만 볼트로 보입니다.
프리볼트야요. 고압전류가 흘러도 감전되지 않습니다. 사용시 절대 주의-
생각없이 애무모드로 들어갔다가 새카맣게 타 꼴까닥 할 수도 있어요.

기능적 특징

추적기능
어디로 바람 피러 나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마눌이 있는 곳은 온 세상 어디를 가도
쪽집게 무당보담도 더 잘 찾아내구요. 간혹 다른 남정네와 눈이 맞는 날에는 바로
밧떼루 자세가 들어옵니다. 제 명에 죽지 않으려면 조심 조심 사용할 때 항상 조심-

음성녹음기능
옛날에 지가 실수했던 말을 으매 징글맞게, 기가 막히게 재생 리와인드하는 귀재입니다.

메모리포맷기능
자신의 실수는 바로 잊어버립니다. 증거를 내밀어도 오리발이 먼저 나옵니다.
자동포맷기능이 탑재되어 일부러 포맷할 필요는 없어요.

연사기능
1초에 수백마디를 퍼퍼퍼 합니다. 따바리라요.

리모컨기능
첨부터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러케 염장지르는 제품 금세기에 처음 봅니다.

인식기능
이 제품은 마을반상회를 '반란회'로 압니다.
다른 제품들이 거들지 않고 엇갈린 의견을 냈다가는 개박살 납니다.
머 좀 챙기려고 서방따라 갔다가 피멍들고 돌아온 일이 많았어요.
반상회 모임에 따라가 봤자 아무런 소득도 없응께 머리를 잘 굴려야 할 거예요.
새 마눌의 지혜로운 분발이 요구되어 집니다~!

취급시 주의사항

1. 세탁시 제품의 변형 및 탈색이 있을 수 있으니 삼가해 주십시오.
핵전쟁이 발발할 수 있습니다.

2. 직사광선 및 화기를 피해주십시오. 연거푸 폭발합니다.

3. 젖었을 때는 온몸에 신문지나 종이로 싸 통풍이 잘 되는 그늘에 말려 주십시오.
예민한 제품이라 오작동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4. 중고 서방이라 장시간 사용하면 곤란합니다. 가끔 소 닭보듯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마눌도 못 알아보고 후크선장 흉내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책이 없어요.

5. 구입시 자신의 체형이나 용도에 맞지 않더라도 고장은 아니니 적당히 맞춰
단란한 가정을 이루세요. 불평 불만을 토로해봤자 씨알도 먹혀들지 않습니다.

6. 사용중 전자파가 심하니 너그럽게 "그런가 보다아" 이해해 주는 센스^^

7. 제품의 수명연장을 위해 반드시 취급시 주의사항을 지켜주십시오.

품질보증서

1. 본 제품은 엄격한 품질관리와 공정관리를 거쳐 생산되었으나, 규격 및 외관,
물성검사에서 어느 한 곳도 합격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한 골치 아픈 제품입니다.

2. 본 제품은 UN이 고시한 소비자 피해보상 규정에 의거 보상받을 수 있으며,
제품의 품질에 이상이 있어 피해보상을 원하실 경우, 반드시 품질보증서 또는 영수증을
지참하여 국제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유엔 사무국으로 제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한번도 해결된 사례가 없습니다만...)

3. 단, 소비자 과실 및 부주의로 인한 하자, 세탁으로 인한 탈색 및 변형,
품질보증기간(1년)이 경과한 제품은 보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 소비자상담실은 유엔에 마련돼 있습니다.
* 한번이라도 사용한 제품에 대해서는 소비자가 수리를 원칙으로 합니다.
* 교환장소 : 지구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판매정보

제품명 : 팍스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모델명 : No.1 지구부시대
원산지 : 영국
생산지 : 미국
제조년월일 : 1776년 7월 4일 시제품 첫 출시, 1789년 4월 30일 정품 첫 등록
유통기한 : 2001년 1월 20일 ~ 2009년 1월 19일(8년)
구입년월일 : 2001년 1월 20일
(최초 유사제품 구입년월일 : 1945년 9월 8일)
판매가격 : 흥정가능
배달가능지역 : 전세계
판매자가 내놓은 다른 제품 : 밥버러지 주한미군

매물정보

혈액형
측정불능, 철면피라는 야그도 있음.
종교
기독교라데요. 종교가 다른 분이 사 가신다면 쫌 깎아 드립니다.
역대 아꼈던 마눌 연공서열 순위
승마이 > 쩡히 > 두화이 = 물태우 > 032 > 큰쭝 = 나
의심되는 서방 직업 전력
석유수입 및 판매업, 불법무기 제조·판매업


앗싸! 사은품 일곱가지

아끼던 물건인데 유지비도 만만찮고, 내 인생에 도움이 안되어 급매합니다.
내꺼 서방을 구입하시는 분께 덤으루 드리는 사은품입니다.

1. 부채증서 ($8,550,702,986,864) - 2006년 10월 9일 0시 현재
2. 악의 축 마을 명단 - 1급 비밀
3. 남편과 친한 마을 촌장 이름들 - 정보공개 대상
4. 남편과 남편 가족의 50개 마을 헐뜯고 개판 만든 기록 - 영구비밀문서
5. 남편과 남편 가족의 마을주민 이유없이 죽인 기록 - 영구비밀문서
6. 생활용품 : 깨진 양동이, 짜그러진 물주전자, 사시미칼, 도끼, 기계톱, 칼로스쌀, 고엽제
7. 호신용품 : 성경책, 아끼던 방망이, 흑두건, 장갑차, 첩보위성, 핵무기, 네오콘(Neocon)
무료로 드립니다.

놓치지 마세요. 싸게 파는 겁니다.
즉시 구매가 가능하고, 별도의 수수료와 부가세가 붙지 않습니다.
이 제품은 TV 홈쇼핑에서 정중히 거부한 제품이니 인터넷으로 주문하십시오.
A/S는 안되고, 하늘이 두쪽나도 반품은 절대루 곤란합니다.
펜타곤 1급 기밀을 갖고 오신 분께는 최장 360개월 무이자 할부 가능합니다.
현금인출카드로도 구매가 가능한 제품입니다. (통장잔액을 확인하세요)
이 제품은 연말 소득 정산시 200만원의 특별세액공제가 주어집니다. 이얏호! 끝내준다~

맘이 바다같이 넓은 서방과 교환할 경우 추가금 드립니다.
내꺼 서방이 바람 피울 때 자주 만났던 무대뽀 잇스라엘 양도 덤으로 드립니다.
이 제품의 정체를 밝혀 주신 분께는 2007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해 드립니다.

위에서 야그한 내용 말고 사용설명서는 따로 없습니다.
읽어봐도 하등 도움이 안됩니다.

그럼 신의 가호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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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에 관한 기사 하나

세상이 노랗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흔들린다. 진실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정의는 쓰러졌다. 3월을 맞으면서 내가 바라본 일본 정부의 몰골이다.

3.1절을 비웃기나 한 듯, 이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일본군이 아시아 여성들에게 성착취를 강요한 증거가 없다"고 발언했다. 이른바 '고노 담화'에 대해 "강제성을 증명하는 증언이나 뒷받침하는 것은 없었다"고 입장을 드러냈다.

'고노 담화'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晋三) 당시 관방장관이 일제가 태평양전쟁 당시 종군 위안부를 동원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일본관리들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한 내용을 담았다는데 의의가 있다.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의 강제연행 사실을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기 때문에 아시아 국가들로서는 이 '담화'가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벌어진 범죄행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묻는 최소한의 열쇠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베 총리가 부정하고 짓밟아 버린 것이다. 혼다 의원의 말마따나 그의 발언은 "역사를 수정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이며,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일본 정부의 거듭된 입장 표명에 대해서도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역사도,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문화도 우월한 나라였는가. 인류의 궤도에 이탈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쳐왔던 조선의 역사가 그대들이 보기엔 그렇게 우스운가. 왜 함부로 세상의 분노를 자초하는가.

나는 그의 '발언'을 망언으로만 받아들일 정도로 인간적이지 못하다. 그의 발언이 장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에 대한 명백한 선전포고요, 침략행위에 가깝기 때문이다. 일본군 강제 성노예 계약을 지시한 일본정부와 군당국의 행위는 면죄부를 줄 수 없는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일본 우익들은 연행과정에서 피해자의 자발성 운운하거나 군 위안부제를 공창제와 동일시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관여를 밥 먹듯 부인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국제법마저 무시했다. '21세 미만인 여성이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원한다고 하여도 이는 불법'이라 규정하고 있는 국제법에 가입한 일본은 과연 어떻게 했는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선의 어린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지 않았는가. 우리 할머니들의 증언에 의하면 16, 17세 정도가 가장 많았고, 심지어 12, 13세의 어린이도 있었다. 연행된 조선여성들은 일본군이 지정한 곳에서 혹은 오키나와 등지에서 그들이 만든 위안소에 감금되어 반복적인 성폭력과 비인간적인 성노예를 강요받아 왔다. 이는 조선 식민지 여성 뿐만이 아니었다.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어마 등 점령지 식민지 여성들도 같은 운명이었다.

아시아 국가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아베 총리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어저께(4일) 그의 보좌관인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가 아사히 TV 토크쇼에 나와 총리의 입장을 전했다. "고노 담화를 따른다는 데 변화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고노 담화와 강제연행을 부인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발언과의 명백한 모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끝까지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 죄값을 숨김없이 고백하고 참회하는 것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순서다. 잘못을 했으면 순순히 시인하라. 어물쩡 넘겨서 될 문제가 아니다. 잔인한 범죄를 묻어두거나 반성하지 않는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 일본군 위안소 내부 모습

아베 총리는 아는가. 당신네 일본군이 우리 할머니들의 순결한 영혼을 짓밟은 나머지 15년이 넘도록 황량한 길바닥을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세계 그 어느 곳에서 이런 유례를 본 일이 있는가. 지난 2월 28일로 <수요시위>가 750회째를 맞이했다. 이 기록은 단지 수요일마다 되풀이 되는 우리 할머니들의 집회횟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750일을 외쳐도 외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부끄러움의 깊이요, 야만적 범죄를 옹호해온 반역의 숫자가 아니겠는가.

아베 총리는 인류 앞에 부끄럽지 않는가. 국제사회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독일 정부의 나치 역사 반성을 왜 교훈으로 삼지 못하는가. 일본 정부의 속셈을 모르지 않는다.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로 규정한 결의안이 미국 하원에서 채택되는 것을 막으려는 얄팍한 수작인줄 나는 안다. 1996년 이후 미국 하원에 제출됐던 여덟 건의 소위 '종군위안부 규탄 결의안'이 일본 정부의 치열한 반대 로비로 모두 폐기된 전례를 지금도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본의 역사는 일본이 만들어 가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일본이 아시아 국가에 저지른 침략의 역사는 일본 스스로 규정할 수 없는 역사다.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는 아시아 역사다. 이 역사적 사실관계를 부정해버린다면 일본은 스스로 국제적 고립을 면할 길이 없다. 그들의 야망을 정상적으로 이룰 길이 없다.

일본은 역사적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한다. 무릎 꿇고 아시아 국가의 민중 앞에 사죄해야 한다. 자민당을 우두머리로 형성된 극우 반동 정치인들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시대착오적 망언을 남발하면서 패전 이후 어렵사니 쌓아온 전후 민주주의의 성과를 스스로 깎아내린다면 우리는 아시아 역사에서 일본을 인정할 수 없다. 아무리 경제대제국이라지만 인류의 동반자로서 우리의 기억에서 그대들을 지워버릴 수 밖에 없다. 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옹호하고, 화해와 협력으로 미래세상을 열어나가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당연히 이를 제거하는 것이 정의이다. 아베 총리여, 내말이 틀렸는가? /굴렁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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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포로수용소내 조선인 성노예 여성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강제 성노예 피해사례를 당한 우리 조선인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을 소개한다. 어려운 역경과 고단한 인생살이를 거쳐오면서, 더구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본군 '위안소' 생활과 또 다시 미군 성노예 생활을 겪은 할머니의 기록을 더듬는 동안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부끄럽다. 수많은 우리 할머니들이 통곡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몸은 천근 만근 무거운데 무턱대고 달려드는 군인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위안소라는 곳

1938년. 시모노세키와 타이완을 거쳐 우리가 도착한 곳은 중국의 광동이었다. 광동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열다섯명의 여자들을 모두 군용트럭에 싣고 어느 호텔로 갔다. 첫날은 그 호텔에서 밤을 지냈다. 한 방에 침대가 두 개씩 있는 서양식 호텔이었는데, 우리들을 한 방에 다섯 명씩 들어가게 하여, 침대 하나에 2∼3명씩을 몰아서 재웠다. 다음날 아침 군용트럭이 다시 와서 여자들을 태웠다. 여자들은 모두 트럭 뒤쪽의 짐칸에 탔다. 한참을 타고 들어가니 군부대가 있었고, 다시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 곳이 바로 위안소였다. 사실 그 당시에 나는 '위안부'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도착하기 전까지 여자들은 다들 공장에 가서 일을 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인솔자는 무엇을 할 것이라는 말은 비치지도 않았다. 막상 도착해서도 그 곳이 위안소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아니 실상은 남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며, 어떻게 위안해야 하고,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구나 그런 일이 나에게 닥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 곳에서 군인들이 들이닥칠 때에야 비로소 무엇 때문에 이 곳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청천벽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위안소에는 먼저 와 있던 여자들이 이미 대여섯 명이 있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적은 것에는 상관없이 먼저 온 여자에게는 무조건 '언니'라고 부르며 군대식으로 고참으로서의 대접을 깍듯이 해야했고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했다. 나를 포함하여 그 집에 배정을 받은 여자들 대여섯 명은 그 날부터 언니들로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새로 온 여자들은 남자를 접해본 경험이 없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니까 남자를 어떻게 상대하는가 하는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끝나면 뒷처리를 어떻게 하는가와 삿쿠를 끼워주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교육을 받았다.


무섭고 쓸쓸하고 비참하고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집에서는 아직도 철없던 어린아이였는데,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치다니 기가 막혔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와서 이제는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름도 '랑코'라는 일본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제부터는 마산의 처녀 박연이(가명·1921년생)가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랑코'로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나는 첫날부터 두 명을 받았다. 처음에는 나이가 지긋한 장교가 들어왔다. 군인이 자꾸 몸에 달라붙는데 그게 싫어 자꾸 밀어냈다. 아프니까 찡그리기도 했지만 신음소리를 안으로 삼켰다. 언니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이미 기가 꺾일 대로 꺾여 있는 상태여서 심하게 저항하거나 반항도 못했다. 보초들이 하루에 여러 차례씩 위안소 주변의 경비를 돌았다.

중국사람이 살던 집을 개조한 위안소의 방은 침대 하나가 놓일 정도의 공간으로 마치 헛간과도 같았다. 그 방에 군인이 하나 들어와 상대하고 나가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군인이 들어오고, 그 사람이 나가면 또 다른 군인이 들어오고 하였다. 그러니까 하루에 상대하는 군인의 수는 30명이 될 때도 있고 40명이 될 때도 있었다. 군인을 상대한 후에는 소독실에 가서 과망간산칼리 희석액이 나오는 소독 호스로 밑을 소독하게 되어 있는데, 나중에는 질이 퉁퉁 부어 소독 호스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군인들이 줄을 대서 오니까 미처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밥상을 방 문 앞에 들여다 놔주면 씻으러 가면서 한 숟가락 떠먹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또 한 숟가락 떠먹고 할 정도였다. 월경을 할 때도 군인들을 받았다. 한 번 받고 나면 씻고 와서 다시 받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과 군인들의 위생을 각별히 중시하는 훈련을 받았다. 위안소 입구에는 들어오는 군인마다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이 담긴 대야가 준비되어 있었다. 일 주일에 한 번씩 군의가 와서 산부인과 검진을 하고 다른 병이 생겼을 때도 군의가 치료해 주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처음에는 견딜 수가 없이 아팠지만 차츰 시일이 지나면서는 그렇게 여러 명을 상대하는데도 죽지 않고 몸이 견딜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젊고 건강해서인지 몸이 견뎌낸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스러울 정도였다.

부대에서 연회식이 있는 날이면 여자들은 기모노를 차려입고 그 자리에 참석했다. 연회식이 끝나면 장교들은 보통 자기 막사로 여자들을 데리고 들어가 일을 치렀다. 부대로 갈 때는 자동차에 태워서 데리고 갔지만 돌아올 때는 태워다 주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들이 여럿이 함께 모여서 왔지만 밤길은 역시 무서웠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위안소가 있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길을 걸어오려면 나는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며 울곤 했다. 내 처지가 마치 이 깜깜한 낯선 이국땅에 아무도 의지하거나 도와줄 사람 없이 내팽개쳐진 것으로 여겨졌다. 수많은 군인들을 받고도 몸은 견뎌낸다 하더라도 마음은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힌 것처럼 무섭고 쓸쓸하고 비참했다.

저녁이 되면 주인은 그 날 여자들이 상대한 군인의 수를 점검하고 군인을 적게 상대한 여자나 그 날 잘못을 저지른 여자들에게 벌을 주었다. 한 되들이 병에 물을 가득 담아서 그것을 양손에 들고 서 있는 벌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물을 흘리지 않고 꼼짝없이 서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얻어맞았다. 그리고 반항이라도 하면 더 오래 벌을 세우거나 맞았다. 집안 치우는 일로도 꼬투리를 잡히면 맞았고, 특히 상대하는 군인한테 반항하면 맞았다. 상대하는 군인은 '손님'으로 깍듯이 대접해야 했다. 손님에게 잘못하면 주인은 여자들에게 가차없이 벌을 세우거나 때리는 것이었다. 또한 손님을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에 따라 그 여자의 순위가 매겨졌다. 손님을 많이 받지 않는 여자는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쓰레기 같은 음식을 주거나 변소 청소를 시키는 등 잡일을 시켰다.


죽음을 볼수록 살겠다는 의지가 더 강렬해

나는 처음에는 무서움에 떨며 고향 생각을 하곤 했다. 이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내 처지를 생각하며 자포자기가 되어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자 그 생활에 길이 들면서 처음의 무서움도 사라지게 되었다. 소극적으로 주인과 군인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추스리며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행패를 부리는 군인에게는 맞대거리를 할 줄도 알게 되었으며, 못된 군인에게는 나도 술을 마시고 같이 성질도 부리게 되었고, 군인이 때리면 나도 함께 막 치고 박고 싸우게도 되었다.

▲ 1944년 일본 나고야의 조선여자정신대. 12~16세의 어린 조선여성들이 군인에 의해 강제노동에 동원되고 있다.(위) 버마 미군포로수용소 조선인 성노예 여성들(가운데) 전선의 이동으로 일본군 트럭에 실려나가는 조선인 성노예 여성들(아래)
어느 날 동료 중에 '다마코'라는 여자가 병에 걸렸다. 열이 올라 밥도 못 먹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군인을 상대할 때는 늘 삿쿠를 사용하지만 더러 터지는 수가 있어서 임신을 하는 여자가 있었다. 다마코도 임신을 하여 배가 불러 있는 상태였다. 다마코가 어찌나 심하게 떨며 발작을 하는지 밤새도록 잠도 못 자고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사방에서 다리를 붙잡고 머리를 붙잡으며 간호를 했다. 그렇게 다마코를 살리려고 밤새도록 고생을 했건만 다마코는 이튿날 아침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느 날은 위안소 뒤쪽에 있는 사탕수수밭에 올라갔다가 밭둑에 옹기항아리가 여러 개 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인가 하고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봤더니 그 속에서 참을 수 없이 역겨운 악취가 풍겨나왔다. 그것은 사람의 뼈다귀들이었다. 가난한 중국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송장을 매장하지 않고 동이에 넣어 밭둑에 묻어둔 것이었다. 열어 놓은 뚜껑 속으로 빗물이 괴어들어 부패하여 물러터지면서 그 속에서 토악질을 일으킬 것 같은 악취가 풍겨나왔다. 단지마다 들어 있는 그 송장뼈를 보고 나는 아주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차하면 나도 저렇게 썪어 문드러지는 송장 같은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도 양잿물이나 크레졸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는 동료를 보았고, 폐병이 들어 고생하며 죽어가는 동료도 보았지만,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그럴수록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렬해졌다.

나에게도 죽을 고비가 있었다. 남방에서 자칫하면 걸릴 수 있는 학질에 걸린 것이다. 열이 나고 몸이 심하게 떨리는 이 병은 여러 날이 지나도 떨어지질 않았다. 키니네를 오래 계속 먹으니 나중에는 얼굴이 노랗게 될 정도였다. 게다가 주사 놓은 자리가 곪으면서 썩어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야전 병원에서 썩은 살을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나서야 그 자리가 아물게 되었다. 고통이 엄청났지만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참았다.


몸뚱이는 하나인데 지긋지긋해

군인들이 위안소에 들어와서 입구의 접수대에 돈을 내면 주인은 군인에게 표를 주었다. 그러면 군인은 여자의 방에 들어와 여자에게 그 표를 냈다. 여자들은 이 표를 모아서 저녁이 되면 주인에게 가져다 주고 주인은 그 여자의 하루 실적을 장부에 기록했다. 주인은 장부에 기록한 것을 다시 한달 단위로 합산을 하여 여자들의 순위를 매기는데, 1등, 2등을 하게 되면 여자들에게 배당되는 옷 중에서 좋은 옷이 차례로 돌아오고, 음식도 좋은 것을 주곤 했다. 그리고 계속 1등을 하는 여자에게는 몇 달에 한 번씩 금반지를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군인들에게 인기가 없어서 순위가 처지는 여자에게는 부엌일도 시키고 변소청소 등 궂은 일을 시켰다.

한창 샘이 많은 나이의 여자들을 주인은 그런 식으로 얼르고 위협하며 다스렸다. 여자들은 대접을 잘 받으려고 자연스럽게 경쟁을 하게 되었다. 군인을 많이 받으면 좋은 옷, 좋은 음식이 차례로 돌아오고, 더구나 장교를 잘 사귀면 위문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가져다 주기도 하니까 나도 열심히 군인들을 받았다. 하지만 수도 없이 밀려 들어오는 군인들을 다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몸뚱이는 하나인데 그렇게 여러 명이 달려드니 그들이 지긋지긋하게 지겨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몸은 천근 만근 무거운데 무턱대고 달려드는 군인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생활을 이겨내려니 술을 안 먹을래야 안 먹을 수가 없었다.

군인 중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순한 자도 있었지만 술을 먹고 들어와 공연히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같이 있던 동료 중에는 군인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휘둘러 머리를 내려쳐서 이마를 여덟 바늘이나 꿰맨 친구도 있었다.

주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3년 동안 그 위안소에서 일한 대가로 나는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했다. 고향에서부터 나를 데려오는 데 든 수속비와 여비 일체, 그리고 위안소에서 먹고 자고 입는데 든 비용과 심지어는 배당해준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빚으로 계산되었다. 주인이 여자들에게 당신 빚이 얼마다 하면 그대로 그게 모두 빚이 되었다. 뭐라고 말대꾸를 하면 막 때리니까 항의를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군인을 받으면 거기서 분배되는 액수가 나에게는 한 푼도 돌아오지 않은 채 빚 갚는 것으로 쓰여졌다. 나는 그 빚을 3년이 지나서야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광동에서 싱가포르로

1941년, 이제 스물한 살이 되었다. 그 집에서 일해야 하는 3년 기한을 마친 후 나는 광동 시내에 있는 '마츠노야'라는 위안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마츠노야 위안소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배가 몹시 아프기 시작했다. 배뿐만이 아니라 다리까지 지릿하면서 하체가 떨어져나갈 것 같이 아팠다. 내가 그렇게 몸이 아픈 와중에 마츠노야의 주인은 여자들을 모두 데리고 싱가포르로 떠난다고 했다. 나도 아픈 몸을 이끌고 그들을 따라 배에 올랐다. 싱가포르로 가는 배에는 군인과 간호원, 위안부들이 모두 함께 탔다. 그러나 배를 타고 가는 도중이라 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군의들이 들여다 볼 사이도 없었다. 중간에 배가 사이공에 들렀기 때문에 일행은 20일 가량 군인 숙소에서 머물다가 다시 출발했다. 이동을 하는 동안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그냥 내내 고생을 하면서 싱가포르까지 갔다.

싱가포르에 내리자 군트럭이 우리 일행을 그루앙 지구로 배치하였다. 파인애플 나무가 아주 많은 곳이었다. 그 위안소에 도착하자 군의가 나와서 신체 검사를 하고 검진을 했다. 그 때에야 비로서 나는 나팔관이 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면서 차차 아픈 것이 가라앉게 되었다.

싱가포르에 있는 위안소 건물은 중국 사람이 살던 크고 넓은 집이었다. 싱가포르의 위안소는 대개 중국인 부호나 서양사람들이 살다 피난을 가서 비어 있는 집들을 사용했다. 그래서 집의 규모가 비교적 크고 방도 넓직한 편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건물은 4층 건물이었다. 1층에는 탁구대가 놓여 있는 커다란 홀이 있고, 2층과 3층에는 방이 있었다. 그리고 4층은 창고이고 옥상은 빨래를 널어말리곤 했다. 2층에는 주인과 아이들이 살고, 3층에는 여자들이 각각 방을 하나씩 배당받아 기거했다. 방에는 세면기와 욕조, 양변기가 설치되어 있었고, 침대 하나와 서양 사람들이 쓰다 버리고 간 냉장고도 있었다.

그 건물에 도착하여 나는 2층 계단으로 돌아올라가다가 끔찍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계단에 로프로 목을 매어서 혀가 쑥 빠져나온 채 늘어져 있는 남자의 시체였다. 그 집에 살았던 중국 사람이 목을 매고 죽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후로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혀가 빠져 죽어 있던 그 중국인이 생각나서 무서움증이 일곤 했다. '동족은 모두 후퇴하고 오갈 데도 없는데다 먹을 것도 없으니까 계단에 목을 매었구나. 그들도 어디 한두 가지 고통만 겪었겠는가. 그리고 그 사람도 얼마나 고통을 겪었기에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생각에 불쌍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절망감만 더해

위안소의 환경은 전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제는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는 생각 때문에 절망하여 막 가는 심정이 되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술을 더 많이 먹게 되었다. 여자들 사이에는 절망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함께 있던 동료 '가네코'는 소독하라고 나눠준 과망간산칼리를 먹고 자살을 하려고 했다. 가네코가 신음하고 있는 것을 다행이 내가 발견하여 먹은 것을 토하게 하고 군병원에 연락하였다. 광동에서도 자살하려고 양잿물을 먹은 동료를 보았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일주일쯤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나온 가네코는 그뒤 목구멍이 쪼그라들어 일년 정도는 밥을 잘 넘기지 못할 정도로 고생을 하였다.

비참한 상황을 견디지 못해 이렇게 자살을 하려고 하는 여자들이 있었지만 나는 죽을 생각은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다. 내 처지를 생각해보면 막 가는 심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죽을 수는 없었다. '살아나가야 부모 형제를 다시 만나지' 하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그 생활을 참아나갔다.

지옥 같은 생활이지만 때때로 작은 위안도 찾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 위문단이 오면 군인들과 관람을 하기도 했다. 위안소의 주인인 가네카와는 광동의 주인처럼 때리거나 벌을 주지는 않았다. 여자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주인을 만난 것도 생각해보면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일본 군인 중에는 때리거나 행패를 부리거나 심지어는 칼을 휘두르는 등 못되게 구는 사람도 있었지만 제 볼일만 보고 나가는 사람이 있고, 가끔은 인정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마츠노야'에서는 군인이 낸 돈의 6할을 위안부 몫으로 받았다. 먹을 것은 주인이 해주지만 옷과 화장품, 간식거리는 모두 자기가 받은 돈으로 해결을 했다. 이미 버린 몸이라는 생각으로 이 때부터는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몸이 받을 수 있을 만큼 군인들을 받았다. 그러니 하루에 상대하는 군인의 수가 광동에서 보다 더 많을 때도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군인들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나는 내 몫으로 돌아오는 돈을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전시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위안부들에게도 저축을 적극 장려하고 강요하였다. 나도 순진하게 일본제국의 저축 장려책만을 믿고 은행('다이앙 유빙 겡꼬'로 기억하고 있다)에 돈을 받는 대로 모두 랑코라는 이름으로 저축했다. 그렇게 열심히 몇 년을 모으니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정확한 액수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상당한 액수가 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그 통장은 한낱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전쟁 직후에는 일본지폐로 불을 때서 밥을 해먹을 정도로 일본돈은 가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 통장을 한국까지 가지고 나왔지만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어느 날 결국 찢어버리고 말았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무슨 희망으로 돌아갈까

어느 날 위안소에 오던 군인의 발길이 딱 끊어졌다. 군인들은 다른 곳에 집결하였다고 하고, 시내는 떠들썩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손을 들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은 아주 갑자기 닥친 일이었다. 그 날 이전까지 나는 일본이 항복하고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원주민들이 방망이를 들고 다니면서 단속을 하는데, 위안소의 여자들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기쁜 마음보다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고향을 떠나서 낯선 땅에 내팽개쳐지더니 이제는 다시 일본군에게서 버림받고 아무 방패막이도 없이 또 다시 그 곳에 버림받을 처지에 놓인 것이었다. 막상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그 역시 비참했다. 몸도 망치고 가진 것도 없이 초라한 몰골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조국이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나 개인에게는 앞으로의 삶에 아무런 희망을 걸 수 없었다.

그 때 자주 찾아오던 일본군이 나에게 몰래 찾아와 자기는 일본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고 자기와 함께 이 곳에서 도망가자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불안하던 나는 그 군인의 말을 듣고 무작정 따라나섰다. 그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산 속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말레이지아인 집에 나를 데려다놓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며칠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말도 안 통하는 낯선 곳에서 혼자 지내자니 하루하루가 두렵고 힘겨운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말레이지아인 남자 하나가 나를 강탈하려고 달려들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밀어내며 가까스로 그 곳을 빠져나와 도망쳤다. 원주민 여자들은 내가 울면서 말을 해도 쳐다보지도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제 갈길을 갔다. '같은 여자로서 어떻게 이다지도 냉담할 수가 있나' 하고 서운한 생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으니 길을 물어보려고 해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는 산 속을 헤매고 헤매다가 고생 끝에 겨우 조선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조선 사람들은 첩첩산중인 '조롱'이라는 곳에 모여지내고 있었다. 거기 모인 조선 사람들은 위안부였던 여자들과 군속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깊은 산 속에 판자를 대충 엮어 하코방 같은 숙소를 닥지닥지 지어 그 곳에서 기거를 하고 있었다.

숙소는 모두 12동을 지었는데, 1호부터 3호까지는 여자숙소로 썼고, 4호부터 12호까지는 남자숙소로 썼다. 나는 1호 숙소에서 지냈다. 한 숙소에서 몇 십 명이 함께 지내기 때문에 숙소반장을 정해서 질서를 지켰다. 그 곳은 물이 아주 나빴다. 우물을 파면 일 주일이 지나지 않아 물이 썪어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물을 안 먹을 수는 없는 일이고, 매일 우물을 팔 수도 없으니 그 물을 떠서 끓여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물을 먹고 살자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게다가 미군이 나누어주는 배급식량이 턱없이 모자라서 먹는 것도 시원치 않았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칡이나 푸성귀를 캐다가 배급받은 밀가루나 옥수수에 섞어서 밀죽이나 수제비, 강냉이죽을 끓여 먹었다. 어느 때는 먹을 게 없으니까 고무나무꽃도 주워다 무쳐먹었다. 목욕을 하고 옷을 빨아입어도 흙이 황토흙이라 흰옷이 벌겋게 되었다. 게다가 옷도 변변한 게 없으니 사람마다 그런 상거지가 없었다.

숙소에는 울타리가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젊은 여자들이 있으니까 어느 날에는 말레이지아인 남자들 몇이 여자들을 겁탈하러 들어왔다. 숙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인기척을 듣고 여자들이 모두 왁작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니까 남자숙소에서 남자들이 달려나왔다. 그 바람에 말레이지아인들은 모두 도망을 쳤지만 그 후로는 마음놓고 지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내고 해가 바뀌어 1946년이 되었다. 마침 우리를 태우고 갈 배가 도착하였다고 했다. 커다란 미군화물선이었다. 우리 여자들은 룩색(등산용 베낭)을 둘러매고 군속들과 함께 배를 탔다. 배는 컸지만 풍랑이 심해 배멀미를 몹시 했다. 그 배는 타이완을 들러 부산에 닿았다. 부산에 도착하니 3월이었다. 싱가포르는 더운 지방이라 여름옷을 입고 나왔는데 부산의 날씨는 꽤 쌀쌀했다. 영도 다리 근처의 앞바다에 내렸다. 그 배에서 내려 작은 전마선을 타고 육지로 건너오는데 배를 젓는 사람이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조선 입성이었다. 나는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조선 사람을 보면서 마침내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내 처지를 생각하니 참 처량했다.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멀건 미역국에 밥을 말아주었다. 여자들은 그것을 먹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역전에서는 여자들에게 돈 천 원과 차표 한 장씩을 주었다. 하지만 해는 다 져가고 차 시간도 맞지 않아서 나는 그 날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수용소의 숙소반장을 따라서 한 여관으로 들어가 그 날 밤을 묵었다. 한 방에 든 여자들 몇이 막걸리를 사다가 마시며 고향에 돌아온 것과 헤어지는 감회를 서글프게 달랬다.


고향집에 돌아오니 냉기만이 감돌고

다음날 아침 여자들은 각자 자기가 탈 기차를 타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 당시에 조선에 콜레라가 창궐했다. 고향집 근처에 다다르니 전염병이 도는 동네 어귀마다 새끼줄을 쳐놓고 출입을 막고 있었다. 길을 돌아 드디어 마산의 오빠집에 도착했다. 집에 딸린 참기름가게는 텅 비어 있었다. 기계는 모두 뜯겨져 없어지고, 썰렁한 냉기만이 감돌았다. 전쟁 말기에 일본이 조선에 있는 쓸 만한 쇠붙이를 공출해 갈 때 오빠 가게의 기계도 다 뜯어가고 놋그릇도 다 가져간 것이었다. 게다가 오빠는 일본으로 징용을 끌려가 올케언니와 여덟이나 되는 조카들은 양식도 없고 땔감도 없어서 굶주린 채 냉방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더구나 그 사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정신이 나가서 집을 나가 사방으로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듣자 나는 기가 탁 막혔다.

나는 수중에 남은 돈을 다 털어서 올케를 주며 양식을 사오라고 했다. 그것은 부산역전에서 받은 돈 중에서 차비로 쓰고 남은 돈이었다. 이제 수중에는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카들은 저녁상에 오른 죽을 보자 서로 다투며 걸신들린듯 먹어치웠다.

얼마 후 징용갔던 오빠가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형편도 어려운 오빠집에 얹혀서 하는 일 없이 그렇게 밥을 얻어먹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직접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식구들은 모두 내가 어디 갔다 왔다는 것을 눈치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자연 큰 조카들의 눈치가 좋지 않았고, 가뜩이나 먹을 것도 없는 집에 군식구가 늘어 양식을 축내고 있으니 올케도 궁시렁거리며 좋아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집에 앉아만 있어가지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올케와 말다툼이 생겼다. 나는 내가 밥을 많이 달라고 했느냐 뭣 때문에 그러느냐며 대들었고, 그 말을 들은 올케는 얼굴이 시뻘개지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큰 조카가 제 어미를 편들면서 내 옷가지가 든 보퉁이를 마당으로 내던지며 나가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 길로 집을 나와버렸다. 고향에 돌아온 지 일 년 남짓 지난 후의 일이었다.

집을 나와 길을 가다가 아는 사람의 집에 들르니 어디를 가면 돈을 벌 수 있는데 그런데나 가지 그러냐며 한 곳을 소개해 주었다. 가보니 술집이었다. 얼굴이 반반한 처녀가 홀로 몸뚱이만으로 의탁할 수 있는 길은 결국 그 길밖에 없었다.


집을 나와 객지로 떠돌다 미군 상대 위안부가 되다

처음에 들어간 곳은 창녕에 있는 작은 시골 술집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시골사람들이 나에게 달라붙어 술을 잔뜩 퍼먹이고 못 살게 굴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곳을 나와 밀양의 어느 집에 식모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집 주인 남자의 눈치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내가 또 어디로 흘러가야 하나 막막했다.

나는 다시 부산의 영도로 갔다. 어릴 적에 야학에 함께 다녔던 친구가 돈을 벌러 가자고 하여 따라나선 것이다. '청춘관'이라는 이름의 술집었는데, 술만 팔아가지고는 장사가 시원치 않으니 월급은 없이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했다. 한 일 년쯤 그 집에서 지내다가 그 집을 나와 해운대로 갔다. 돈을 벌자고 따라나섰는데 그 집에 계속 머물러 있어가지고는 돈을 벌 도리가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때가 1948년 무렵, 내 나이 스무여덟 살 때였다.

그 때부터 나는 미군을 상대로 하는 위안부가 되었다. 처음 시작한 곳은 해운대 바닷가의 헛간 같은 집이었다. 바닷가에 외떨어져 있는 집으로 원래는 뱃사람들이 쓰던 곳이었다. 거기에서 다시 초량으로 가서 여러 군데를 옮겨다녔다. 돈을 벌려고 나선 것이니까 어디고를 가리지 않고 흘러다녔다.

그렇지만 영어를 잘 할 줄 모르니 미군들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되어서 곤란한 경우를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군들 중에는 제맘대로 안된다고 화를 내거나 심지어는 총까지 겨누는 사람도 있었다. 한 번은 한 미군이 제맘대로 안되니까 나를 논바닥으로 데리고 나가서 손을 들라고 위협하며 총을 겨눈 적도 있었다. 금방이라도 총을 쏠 것처럼 분위기가 살벌했다. 한밤중에 나는 벌벌 떨며 손을 들고 서있었다. 이제는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그 미군은 한 번, 두 번, 세 번을 겨누더니 안되겠던지 나를 끌어잡아당기며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으면서 떠돌아 다녔다.

대개 업소의 주인과 위안부는 수입을 반분했다. 돈을 벌려니 힘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힘이 닿는 대로 손님을 받았다. 얼마 지나 돈이 좀 모이자 나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장사를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결국은 색시장사를 시작하려고 했다. 부산에 집을 하나 얻고 여자들을 모았다. 그런데 여자들에게 옷을 해 입히고 선금을 주었는데 모두 떼어먹고 달아나 버렸다. 그러니까 해보지도 못하고 거덜이 난 것이다. 처음에는 기가 막혔지만 곧 체념을 해버리고 말았다. 나도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딱한 처지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데 그 여자들을 어떻게 찾겠는가 생각하며 더 찾지 않았다.


흑인 혼혈아를 낳고 모진 고생을 겪고 살아

다시 미군들이 많이 주둔해 있는 평택으로 올라왔다. 평택에서 미군들을 상대하던 서른다섯 살 무렵에 한 흑인병사를 알게 되었다. 그 군인과 마음이 맞아 위안부를 그만두고 살림을 시작했다. 그 때까지는 한 번도 임신이 되지 않았는데, 이 사람을 만나고는 희한하게 아이가 생겼다. 그런데 한참 살림재미가 생길 무렵에 그는 만기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때 나는 만삭의 몸이었다.

나는 고향인 마산의 석정리로 내려가 방을 하나 얻어 거기서 몸을 풀었다. 서른여섯 살의 초산이었다. 아기는 아버지를 닮아 검은 피부, 고수머리의 아들이었다. 아이를 낳은 후부터 나는 다리가 퉁퉁 붓고 허리가 몹시 아프기 시작했다. 게다가 요도까지 막히고, 변도 제대로 못 보면서 거의 3년 동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몸이 아파 고생을 하며 지냈지만 옆방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었다. 다행이 아이 아버지가 미국에서 편지도 보내고 조금씩 돈도 부쳐주어서 그것으로 아이의 우유값을 했다. 그 때는 한 집에 세든 사람들의 살림형편도 모두 어려웠는데 그래도 어려운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살았다. 없는 돈이지만 내가 조금 도와주면 그 집에서도 나를 도와주고 해서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아들이 첫돌이 지난 후 아이 아버지가 다시 한국에 나왔다. 아이를 데리고 그를 따라 그의 주둔지인 제주도로 갔다. 그런데 아이 아버지는 내 몸이 성치 않으니 다른 여자들에게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속을 썩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차 술이 늘고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술을 마시고 다른 여자에게 가서 귀대 시간에 맞춰 부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일이 생겼다. 한 일 년쯤 지낸 후였다. 그런 일이 잦아지자 그는 다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연락이 끊어졌다.


고혜정(조사정리·정신대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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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이냐! 공헌이냐?

몇 년 전부터 사회공헌기금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기업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 할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라는 것인데... 당연히 했어야 할 책임을 사회에 공헌을 했다는 식으로 홍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노사가 합의한 사회공헌기금을 확보해 지역사업에 사용하고 있는데 -마치 노사가 합의해 성과로 가져왔다는 식- 그게 아니라는 거다.

실은 우리도 그 같은 경우가 있기에 솔직히 당혹스럽다.

기업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도록 해야 할 우리(혹 노동조합)가 마치 기업이 그 사회에 크나큰 혜택을 베푸는 것으로 인식시켜주는 역할 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기우는 아닌것 같다. 약간의 기부와 지역에 대한 행사가 사회공헌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홍보가 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야가 먼 야그를 하는거시여 라고 의아해 하는 분덜은 아래 글을 찬찬~히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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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영문 홈페이지(www.samsung.com)에 가면 '사회적 책임' 페이지가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기업은 사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문구 아래 맹인안내견 센터를 운영하고 1999년 자선기부금이 세전(稅前) 이익의 29%에 달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사회보장사업으로 무료개안수술, 유치원 건립, 노인지원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는 소식도 반복된다.
 
  사회적 책임에 관련된 삼성그룹의 활동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영문판 2005년 사업보고서를 살펴보았다. 삼성문화재단(종업원 103명)과 삼성복지재단(종업원 18명)을 다른 계열사 소개 끄트머리에 놓았을 뿐 재무 상태와 계열사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뺀다면 기업의 사업보고서라기 보다는 홍보용 책자 같다. 물론 사회적 책임에 관한 삼성그룹의 정책이나 사업은 찾을 길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똑같은 기부·자선 사업을 두고 삼성그룹이 한글 홈페이지에는 '사회공헌'이라고 해놓고, 영문 홈페이지에는 '사회적 책임'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삼성그룹이 영문 홈페이지에 '사회적 책임' 페이지를 두고도 그 내용에서는 '사회공헌' 활동으로 슬쩍 넘어간 것은 또 무슨 영문일까.
 
  기업의 '선행'과 사회적 책임은 다르다
 
  대표적인 외국기업들의 홈페이지나 사업보고서를 살펴보면 삼성과는 반대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에 관한 소개는 많은 반면, 사회공헌이라는 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기부자선 행위를 소개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책임' 사업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인권과 노동권, 환경보호와 반부패에 관한 내용이 주조를 이룬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기업이 의사결정을 할 때 재정적·경제적 이익에만 의지하지 않고 영업 활동의 사회적·환경적 결과들을 고려해야 하며, 주주의 이익과 이해당사자의 이익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이해당사자는 해당 기업의 활동에 이해관계를 가진 종업원, 소비자, 투자자, 거래업체, 지역사회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빈민층을 위한 주택 지원사업인 해비타트 운동 같은 '선행(good works)'이나 자선행위,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사회공헌'과는 구분된다. 물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완성된 개념이나 정책이 아니고 계속 발전하고 있는데, 그 대표성을 인정받는 국제적 기준으로는 국제연합(UN) '글로벌콤팩트'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기업가이드라인이 있다.
 
  노동권·환경보호·준법납세·반독점이 CSR의 핵심
 
  흥미로운 것은 UN 글로벌콤팩트와 OECD 다국적기업가이드라인 어느 것도 기부나 자선 같은 기업의 선행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UN 글로벌콤팩트는 인권, 노동권, 환경보호, 반부패와 관련된 10가지 원칙을 밝혀놓고 있다. OECD 다국적기업가이드라인은 기업정보 공개, 노사관계, 납세의무, 환경보호, 반독점과 관련된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2500개 기업들이 참여하는 UN 글로벌콤팩트는 UN 사무총장이 임명한 이사회에서 그 사업을 운영·감독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OECD 30개 회원국과 9개 자발적 참여국 등 모두 39개국의 정부가 승인한 OECD 다국적기업가이드라인의 이행 점검을 위해 참여국 정부는 정부조직으로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OECD 본부에서 관련 회의를 매년 진행하고 있다.
 
  사회적 책임과 관련하여 이들 회의에서 다루는 의제들은 기업이 기부자선 사업을 얼마나 활발하게 펼쳤는가가 아니다. 회의 참가자들은 기업들이 고아원을 짓고, 병자를 고치고, 장학금을 지원하는 사업을 잘 했느냐 못 했느냐를 따지지 않는다.
 
  글로벌콤팩트와 다국적기업가이드라인이 제시하는 기준은 기업이 인권을 잘 보호하고, 노동권을 충실하게 보장하며, 환경을 보호하고, 세금은 정직하게 내고 있으며, 공정경쟁을 저해하는 독점행위를 하지 않느냐 따위다.
 
  '사회적 책임' 회피 수단으로 전락
 
  선진국일수록, 그리고 국가경쟁력이 높은 나라일수록 기업의 사회공헌, 즉 기업이 기부자선 행위를 하느냐에 관심을 갖는 국민은 많지 않다. 빈곤층의 의료, 주택, 교육 문제는 국가와 사회가 책임질 문제이지 기업이 나설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은 노동권 보장과 투명납세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 이윤 확대와 부의 창출에 주력하면 될 뿐이다.
 
  최근 들어 기업의 사회공헌은 삼성만이 아닌 한국 대기업들의 화두가 되고 있다. 방송과 신문은 기업의 선행 광고로 넘쳐나는데, 그 광고 덕분에 만들어지는 뉴스는 해당 기업의 범법행위와 총수의 부패 소식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인권과 노동권은 무시하고, 환경보호는 뒷전이며, 반독점과 반부패에는 관심 없는 대기업들이 기부나 자선 같은 '선행'에 공을 들이는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노동권 보호와 조세정의에서 국민의 대의기관이 만든 법률도 무시하는 기업이 국가와 사회의 몫인 사회복지까지 거들겠다고 나서는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사회공헌'도 잘 하고, '사회적 책임'도 다 하는 기업이라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마는 대부분의 경우에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회공헌'에 집착한다는 느낌을 지울 길 없다(또 사회공헌 활동은 합법적인 '탈세'로 이어지기도 한다).
 
  인권 보호, 노동권 보장, 투명납세, 환경보호, 반독점 같은 사회적 책임을 피해가려는 대기업들의 꼼수에 '사회공헌'이 면죄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삼성의 사회공헌 목록을 보고 뿌듯해할 이건희 회장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기업이 원래 할 일이나 잘 하세요." 
   
 
 
  윤효원/ICEM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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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펙?

트랙팩님의 [이 영화들만은 보지 맙시다] 에 관련된 글

이 영화들만은 보지 맙시다

 저는 요즘에 다음 세 영화를 즉 극장에서 보지 말고, 비디오나 DVD를 사지도 말고,
관심에서 지워버리고,
더 나아가 기회있을 때마다 냉정하게 비판하기로,
무엇보다 시간 날 때마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보지 말 것을
권하려고 합니다

(마지막은 좀 쉬울 것 같지 않지만요)

사실 이 세 영화는, 모두 제가 굉장히 즐겨 봤던 영화입니다.
즉 이 주제는 제가 무슨 잘난 척을 하 기 위해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난 척할 건덕지가 있는 주제도 아니지만요...^^;;
그것보다는 '영화 매니아'라는 신선 놀음에 취해서,
최소한의 자제력 내지 의식을 갖지 못한 제 자신의, 나름의
서툰 저항이라고나 할까요?^^;;


1.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나치가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 죽이고 유물 훔쳐가는 건 나쁘고, 도굴 박사 인디아나가 훔쳐가서 미국 박물관에 멋대로 집어넣는 건 정의?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2.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어이 남부 사이비 신사 양반들, ''껌둥이'들 못 부려먹게 된 게 그렇게
서러우슈?
3. 007
너, 아직도 무덤에 안 들어갔냐? 냉전의 스팸 알바 시키 같으니.

여러분 모두의 목록 갱신을 기대할 께요! ^^

제안자 : 수부기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간을 쓰래기쯤으로 취급하는 저급상업영화이다.

하나 추가하자면 기관총들고 살육하는 미국놈이 주인공인(실베스타 스텔론) '람보'를 추가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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