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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판에서의 성차별... “너 아직도 그런 소리 하고 다니니?”

전소희


운동사회에서 여성들은 편해졌다


“운동판에서 가부장주의와 성차별은 여전해...” “남자들 끼리끼리 다 해먹으려고 해” “그거, 성희롱이야. 성폭력이야” “겉으로만 동지지 사실은 아냐”


예전에는 긴장을 초래하기도,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분노와 울분을 토하게 만들기도, 잔인한 침묵을 드리우기도, 욕설과 비아냥을 오가게 만들었던 이 말들은 이제 옛 것이 된 듯하다.


한편으로는 운동사회 내 성차별과 성폭력을 근절하겠다던 100인위의 영향으로 주요 사회단체들과 노동조합들 내에서 성폭력 내규를 만들어 신고받고, 대책위 구성하여 징계 내리는 것이 당연한 절차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들이 운동판에서 나름 ‘승진’하는 경우도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남성들 스스로 문제가 될 만한 말과 행동을 자제하게 된 것도 있고, 문제가 될 만한 말과 행동이 나왔을 경우 여성들이 집단적 경고체계를 발동하여 대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보다 솔직해지고 도발적인 젊은 여성들이 운동사회 내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정파를 막론하고 몇 년 전에 비해 운동사회가 보다 덜 가부장적이 된 것도 사실이고, 여성들이 보다 덜 힘들게 활동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사실이다.


100인위’와 ‘성폭력’ 폭풍이 불어 닥친 지 언 8년. 운동판 말아먹는 미친년들, 계급혁명을 배신한 포스트주의자들, 신종 순결주의에 빠진 좌익소아병 환자들, 한 남자 인생 파탄내는 무서운 페미니스트들 - 당시 온갖 비난과 딱지에도 불구하고 100인위로 인해 운동(조직) 내 성폭력이 도마 위에 올랐고, 많은 단체 내 성폭력 내규가 만들어지는 성과가 있었다. 성폭력 사건 해결을 위한 나름대로의 매뉴얼도 생겼고, 노하우들도 축적됐다. 여러 조직과 노동조합 등에서 그 동안 묵혀 있던 사건이 새롭게 조명됐고, 크고 작은 새로운 사건들이 고발되고, 공개되고, 논쟁을 거쳐 가해자가 징계됐다.


운동조직 특히 노동조합 내에서 차심부름시키거나, 여성이라고 특정 업무에서 차별을 두거나, 임신과 출산, 생리 등이 농담거리가 되거나 운동을 그만두게 만드는 문화는 다소 약해진 듯 하다. 요즘은 아무런 배려 없이 “부어라 마셔라”하면서 여성이 “꽃”이길 바라는 술자리 문화도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남성들이 어쩌다 “실수”하면 따 당하기도 하고, 즉석에서 문제제기를 받곤 한다. 그 동안 여성들이 투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확실히 상황이 나아진 것 같다. 또는 그런 듯하다.


운동사회에서 여성들은 편해졌다?


2008년이 막 시작된 지금 이 시점에서 여전히 뭔가 큰 공백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90년대 중후반과 2000년대 초까지 쉴 날 없이 터졌던 각종 성폭력 사건들, 조직문화와 운동이념을 둘러싸고 논쟁 아닌 논쟁을 해야 했던 그 지긋지긋하고 상처깊은 시절이 그리울 일 없는데도 말이다.


온 동네 파장을 일으켰던 이런 성폭력 사건이 요즘 들어 뜸한 것 같다는 생각은 오로지 나만의 생각인가? 정말 운동판에서 성폭력이 근절된 것일까?


또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거나 여성을 소재로 한 모든 말과 행동이 “성”폭력이 되어버린, 그래서 오히려 아무런 긴장조차 불러일으키지 않는 아이러니는 또 어떻게 봐야 하나? “이런 말하면 성폭력인가?“ (그러면서도 한다.) ”그거 성폭력이야!“ (지적한 후 간단하게 웃고 넘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문제제기하지 않고, 문제제기할 명분을 찾지 못하는 사이 몇 년 전 징계받았던 가해자들이 어느덧 운동판에 자연스럽게 복귀해 있는 것은 이제 모든 상처가 치유되었고, 충분한 반성을 하였고, 용서받을 때가 되는 등 “적당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가?


이명박 시대 모든 사람이 살아가기 척박한 데 또 “여성” 문제 가지고 왈가왈부하기 싫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예전의 긴장감과 논쟁, 상처들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은 심리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굳이 지적하거나 지적당하지 않아도 잘 처신한다는 사고도 기저에 깔려 있을 것이다. 또는 모든 것을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이를 “지적”하는 것(그리고 여유있게 웃어넘기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착각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차별이 없어지고 여성이 진정 ‘차이’로서 인정받으면서 마음놓고 운동할 수 있는 공간과 문화가 형성된 것일까? 정말 이제는 우리의 운동이 일상에서나 거대 이념에서나 여성의 해방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변혁으로 향하고 있는걸까? 혹시… 여성들 스스로 성희롱적, 성차별적 언어와 행동에 대해 분위기 깨지 않는 수준에서만 문제제기하고, “실수”였다고 인정하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돌아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성은 물론이거니와 여성들조차 긴장을 늦춘 것은 아닐까? 차별이 차이가 되어가고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 그 차이가 다시 차별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조"와 "거대담론" 논하면서 은폐되거나 잊어진 것들


여성할당제가 일정 정도 시행되고 있지만 여성들을 위한 일상적인 사업과 구조적 변화를 위한 노력은 노동조합이든 사회, 정치운동 조직이든 여전히 부재하다. “생물학적 여성이 특정 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조와 문화가 문제다!”라는 주장은 오히려 여성할당제조차 필요없다는 핑계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비정규직 80%가 여성이다“라는 말을 할 줄은 알지만 그 여성들에게 어떻게 다가서서 어떻게 주체화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은 별로 없다. 여성들이 각자 제 분야에서 열심히 하고 그 속에서 인정받지만, 그 특정 분야에서만 전문가이지 전체적인 기획은 여전히 남성들의 몫이다.


가부장적 위계질서 자체를 바꾸는 것은 오늘 내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그냥 영원히 지연시키는 사고도 여전하다. 생물학적 여성을 물리적으로 어느 특정 지위에 앉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조가 문제이며, 조직을 친여성적이고 페미니즘적 가치로 운영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결국은 생물학적인 여성도 없고, 페미니즘적 가치도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 아닌가? 가부장제라는 구조와 페미니즘이라는 거대담론은 있는데, 이제는 여성문제도 고민해야 한다는 언급은 있는데, 여성에 대한 착취와 차별을 일상적으로 재생산하고 지탱하고 있는 개개인의 행동과 말, 일상생활은 묵인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구조”와 “거대담론” 속에 갇혀서 오히려 반동적인 행동과 말들이 은폐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삼스럽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운동사회 성차별, 성폭력" 다시 꺼내자


지금, 다시 스스로에게, 조직에게, 주위 동지들에게, 운동 전체에 따져보자. “운동판에서 가부장주의와 성차별은 여전해...” “남자들만 다 해먹으려고 해” “그거, 성폭력이야” “겉으로만 동지지 사실은 아냐” 어떻게 보면 세삼스럽고 유치하기 그지없고, “아직도 그런 소리 하냐”라고 문제제기 받을 만한 것들을.


피터질 것으로 예상되는 이명박식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심화될 계급적대와 여성억압의 관계, 또는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계급주체의 부상과 보다 급진적 정치운동에 대한 논의가 대두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지난 과거에 대한 또 한 차례의 반성과 성찰, 솔직함이 필요하다. 정치경제적으로 규정되는 성차별적 구조에 대해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성과 여성 개개인의 행동과 말, 이런 것들이 모여 구성되는 사회와 문화를 다시 곱씹어보는 법도 익혀야 할 것 같다. 소위 활동가로서 자기 행동이나 일상 하나 변혁시키지 못하면서 무슨 사회 변혁을 논하는가? 남을 탓하거나 남에게 유보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 이제 중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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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성매매, '어떻게' '입장'으로 진입할 것인가

 [아시아여성연구 2007년 46집 제 2호]

 

 

 

성매매, ‘어떻게’ ‘입장’으로 진입할 것인가

           

 막달레나공동체 용감한여성연구소(2007)  <경계의 차이, 사이, 틈새>, 그린비

엄혜진(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성매매라는 아포리아가 한국 페미니즘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성매매는 성적 권력의 문제는 물론, 무엇보다 여성의 차이를 정치경제학적 심급을 통해 가장 극렬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제쟁점을 경유하는 오랜 난제다. 그런데 성매매방지법 제정 이후 몇 년 간 성매매에 대한 페미니즘의 논쟁과 그것에 대한 의미화 과정을 보자면 이 아포리아로부터의 탈출은 요원해 보이기까지 하다. 해답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서가 아니다. 해답이 자명하다고 가정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이 아포리아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다.

단순하게 말해보자.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 성매매를 성욕의 문제로 자연화하면서 ‘찬성’하는 페미니스트는 많지 않다. 페미니스트 논쟁이 성매매 자체에 대한 찬반논쟁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얘기다. 철저히 자유 시장 논리를 앞세우거나 심지어 성매매의 필연성을 주장하면서 성판매 여성들의 가장 선도적 대변자로 자처하는 리버테리안적 혹은 가부장적 기득권 세력은 물론 여전히 다수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적 신념이 페미니즘 논쟁에 다양한 방식으로 얽혀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환기되어야 할 논쟁을 가로막거나 회피해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불거진 논의를 성매매에 대한 섣부른 ‘애도’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논점으로 번역하여, ‘입장’을 갖고 논쟁할 필요가 있다.

성매매에 대해서 ‘말하지 않거나’, ‘입장을 유보하는 것’은 한국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의 성매매에 대한 오랜 ‘입장’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역사적으로 한국의 반성매매 운동이 여성운동 내에서도 주변화되어 있었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성매매방지법 제정 이후 제출된 몇몇 ‘입장’들은 어떤 면에서 성매매에 대한 ‘입장’ 개진 그 자체만으로 주목받았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성매매에 대해 ‘입장’을 토로하는 것은 낙인을 감수하는 것이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낙인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긴박이 이론적 공백을 확장하는 효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빗대어, 필요에 따라 재단하고 침소봉대하는 주장들에 당혹스러워하는 필자들의 거부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입장’의 제출과 그에 대한 격렬한 토론은 오히려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입장’에 대한 필자들의 유보적 태도와 달리 이 책『경계의 차이 사이 틈새』는 ‘입장’으로의 진입을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에 주목해서 보자고 권유함으로써, 현재의 논의를 초과하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기반하여 아직까지 호명의 정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성매매관련 논쟁이 극복해야 할 지점을 풍부한 텍스트를 통해 직접적으로 혹은 우회적으로 지적해준다. 

공포 혹은 장외의 공간으로 치부되어 이론적으로 게토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성매매 관련 논쟁의 낙인 과정은 성매매 및 성판매 여성에 대한 낙인 프레임과 궤를 같이 한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성매매에 대한 완고한 금지주의적 입장이 누군가의 삶 자체를 금지시킬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나아가 유폐시킨 여성들의 풍부한 삶을 대면할 수 있는 의사소통 방식의 부재에서 비롯된 공포는 아니었을까? 이러한 생각에 동의한다면 성매매공간의 다면성을 추적하고 그 공간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에 주목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안하는 이 책은 매우 유용한 자극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경계의 차이 짓기는 경험 자체가 아니라 시공간성을 갖는 해석의 문제에 의존한다. 성매매방지법 제정 이전인 2002년에 쓰여진 백재희의 글이 이 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독해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다양한 연령, 지역, 국적을 가진 성판매 여성들과의 만남의 기록을 담은 이 글은 성매매 금지를 뒷받침할 확실한 피해의 증거를 계속해서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스스로에 대한 성찰에서 나아가, 불변적이고 단일화된 것으로 표상되는 성판매 여성들에 대한 재현을 갱신하고자 했던 필자의 고민과 해석에서 화석화되어 있지 않다. 여성의 경험보다는 성매매와 관련된 변인과 관계를 중심으로 한 대책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정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고 있는 바, 즉 성판매 여성들이 삶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시도하는 다양한 맥락과 의미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해석이 아니라 현재적 재해석의 과정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동태적 텍스트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동태적 텍스트에 기반하여 성매매공간에서의 삶의 권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교한 질문이 필요하다는 필자의 결론은 여러 명의 필진으로 구성된 이 책 전반에서 발견되는 주제의식이자 입장에 준한다.


단순하기보다는 복잡하게 질문하기 


이 책의 산실인 ‘막달레나의 집’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특수한 경계에 있는 공간이다. 20여년이 넘게 용산 집결지에서 성판매 여성들의 사랑방이자 쉼터 역할을 해온 막달레나의 집은 성판매 여성들의 생활세계의 안팎 바로 그 경계에서 형성된 관계와 긴장, 오해와 소통이 각인되고 역사화된 공간이다. 업주에게 탈출해 오거나 술 먹고 신세 한탄하러 오는 성판매 여성, 좌절과 자책과 그리고 희망 사이에서 감정 노동을 반복하는 활동가들, ‘재수 없다’며 활동가들에게 소금을 뿌려대던 동네 사람들, 정부와 자신들을 잇는 다리가 되어달라고 찾아오는 업주들 사이의 경계가 만들어낸 이 공동체의 역동성은 이 책을 현실감 있게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필자들은 이것이 정교하게 질문하는 방식을 개발시켜주었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성판매자와 구매자의 성별구조, 위계화된 섹슈얼리티와 권력의 문제, 정상성의 밖에 놓인 당사자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성매매를 통해 사유해야 할 방향들이 복잡하게 질문되어질 때, 오히려 명료해 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 책은 금지주의적 법체계에서 보호되고 있는 성판매 여성의 인권이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해야 할 인권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성매매 여성들의 피해자성과 행위성이 엄밀하게 구분가능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매매를 노동으로 보는 것과 성판매 여성의 일을 비가시화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따라서 성판매자가 해방되는 것이 성매매의 정상성과 지배성에 저항하는 것과 어떻게 공존될 수 있는가 등 무수한 논점들을 단독적이라기보다는 연쇄작용을 통해 복잡하게 질문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질문들이 이 책에서 처음 비롯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익히 경험했듯이 페미니즘 논의에서 이러한 논점들은 이미 분절적으로 혹은 단절적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성매매는 금지되어야 하는가 아닌가, 성판매 여성은 피해자인가 아닌가 하는 쟁점들이 단순하게 질문되는 것은 모두 이분법적 논리와 타자화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그 질문의 자기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끊임없는 번역과 우회라는 노동의 필요를 느낀다.

특히 원미혜의 글은 직접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성판매 여성과 성매매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을 제시한다. 성판매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열악한 인권을 사회적 차원에서 돌보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술적 주체성’ 즉, 즉 상황적 맥락적 존재로서 성판매 여성의 위치를 이해하는 ‘소수자’ 관점의 채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존의 접근이 성판매 여성에게 집중된 것이라면, 소수자의 관점은 성판매자에 대한 ‘차별'에 대한 인식, 곧 이들에 대한 차별을 생산하는 이 ’사회‘로 그 관심이 전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역설한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공감의 폭은 다양할 수 있다. ‘전술적 주체성’ 혹은 ’소수자‘ 관점 이상이나 여분의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동의의 여부가 아니라 이러한 입장과 논점들을 형성해 나가는 방식에 있으며, 성매매 문제를 단일 의제가 아니라 페미니즘의 정치학의 정면에 배치하여 논의를 확장해야 할 우리의 과제를 인식하는 데 있다.


현실의 풍부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필자들이 바로 의도한 바대로, 성판매 여성들의 삶의 내부와 외부에서 부유하는 풍부한 현실과 성매매 공간의 다면성 및 입체성을 마주대하고 해석하는 자세를 상기시키고 성찰시킨다는 점이다. Ruth Rosen은 20세기 초 아메리카 진보의 시대에 일었던 열광적인 성매매 반대 운동을 고찰하면서 성매매가 여성들에게는 위험한 선택이지만 더 위한 선택들 가운데서 선택되었다는 점이 어떻게 간과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성매매 문제와 성판매자의 삶을 풍부하게 사고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 안에서 다양한 세력 및 주체들 간의 권력 관계를 통해 분석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책의 2부에서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는 성판매 경험 여성들의 생애사는 이러한 Rosen의 입장을 뒷받침한다.

이희영은 성매매 경험을 가진 각각 40대와 20대 여성들의 생애사를 통해 성매매라는 공간이 한국 사회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과 억압적 공간과 분리되어 있다기보다는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연속되어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성판매 여성들의 성매매 ‘선택’을 단순 일탈 논리나 경제 논리로 해석하는 것은 관례에 가까웠다. 그 과정에서 친족에 의한 근친상간이나 식모노동을 하면서 당했던 성폭력 등 폭력에 의해 전유되는 ‘성’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경제적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성매매가 보다 더 나은 것으로 판단하게 되는 구조적 과정은 소실되기 쉽다. 필자는 ‘불온하며 폭력적인’ 성매매 공간과 대비되는 것으로 담론화되는 한국 사회의 ‘신성한 가족’ 공간이라는 이분법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성매매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일방적인 인과논리나 가부장적 편견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주장한다.      

이는 성판매 여성들의 건강 문제를 사유하는 김민지․전유나의 글에서도 관통해 있다. 성판매 여성들의 건강에 관한 것이라면 몸과 정신이 주체없이 파멸해 가는 모습이거나, 좀 더 구체적으로라면 성병이나 산부인과 관련 질환만을 떠올리기 쉽다. 이러한 무의식의 발동은 성판매 여성들의 삶을 ‘성판매’의 행위 그 자체에만 주목한다는 점에서, ‘윤락’ 여성을 성병관리의 대상으로만 치부했던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우리 역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넌지시, 그러나 아프게 시사해 준다. 성판매 여성들은 무면허 의료행위자에게 정기적으로 소염제를 맞거나 구전으로 떠도는 정보를 유통하는 등 나름의 노하우로 ‘건강’ 관리를 특정하게 실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건강 문제는 누군가에게는 산부인과 질환보다 대인관계를 기피할 정도의 치아 상태의 문제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외출할 때마다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게 만드는 문신이 심각할 수 있는 다양한 이해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현실의 복합적이며 차이를 가진 문제가 성판매 여성들에게(도) 당연히 움크리고 있다는 점이 간과된다면 당면한 ‘자활’ 정책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성매매 정치학의 상상력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임에 분명하다. 


‘경계’의 도그마를 경계하기 


Noah D. Zatz는 성매매 자체가 단일하고 동질적인 현상이라고 가정하거나, 모든 성매매를 성적 착취로 동일화하는 것을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1세계 중심적, 혹은 식민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금지주의에 입각한 성매매방지법의 제정에 아마도 가장 큰 영감을 주었을 Kathleen Barry의 논의가 주는 시사점이 제한적인 이유는, 달리 말해 피해자 서사가 ‘성노동’의 자유를 말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더욱 위험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러한 입장이 성매매와 인신매매 사이에 있는 무수한 삶의 경계들까지를 우연히, 혹은 고의적으로 외면하는 도그마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지점은 누구보다 이 책의 필자들에 의해 잘 인식되고 있다. ‘경계’, ‘차이’, ‘틈새’, ‘사이’는 이 책의 제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행간 곳곳에서 거듭되는 후렴구에 가깝다. 저자들은 열심히 ‘경계’를 자각하는데 몰두하며, ‘틈새’를 발견하고자 노력하며, ‘차이’를 소실시키지 않기 위해 애쓴다. 굳이 스피박을 상기하지 않는다할지라도 재현과 해석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필자들은 “우리의 언어가 다시금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권력’이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솔직히 토로한다. 특히 동료활동의 성과와 한계를 논의하는 엄상미의 글은 성판매 경험 여성들과 활동가들의 바람과 욕구, 오해와 이해의 교착점들을 드러내면서, 상호작용적이고 쌍방향적 소통의 지난함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계에서의 ‘머뭇거림, 주춤거림, 더듬거림’은 단순한 태도에서 그치기보다는 재현의 주체와 권력 구성의 문제를 이 시점에서 다시 상기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다시 말해 금지주의적 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하는 성노동 그룹의 활동이 이 법이 의도치 않게 성취해낸 중요한 진전이라는 김애령의 평가는 이러한 성과가 어떻게, 어떠한 주체에게 귀속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쟁점을 보다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성판매자 출신 페미니스트인 Gail Pheterson은 성매매에 대한 낙인이 일반적으로 여성들을 규율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성노동자’를 임파워링하는 것은 모든 여성을 임파워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성매매 논의의 목표가 결국 여성들의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삶에 대한 해석과 소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판매 여성을 포함한 모든 여성들의 임파워링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되새겨 준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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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협동과정 폐지시킨 숙명여대의 ‘여성리더십’

 

여성학협동과정 폐지시킨 숙명여대의 ‘여성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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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자대학교가 여성학협동과정 설치 10년 만에 폐지를 결정했다. 한마디로 여성학의 위기적 징후다. 사실 몇 해 전부터 대부분의 대학들에서 지원자들이 급격히 줄어드는 등 여성학의 제도적 생존은 이미 불안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여성학의 제도적 기반의 침식이라는 점을 넘어서서 여성학의 정체성 자체에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숙명여대는 폐지의 이유로 여성학 수요의 격감을 들면서 ‘여성학’보다는 ‘여성리더십’에 집중하는 것이 효율적이라 판단했다고 밝혔다. ‘여성학’이 ‘여성리더십’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신입생이 오지 않는 것 아니겠냐는 주장도 덧붙였다. 대학에 당도한 신자유주의적 재편 과정에서 학문의 존립 근거가 단시일적인 시장적 수요에 직결되는 논리가 어제 오늘의 일이거나, 여성학에만 국한되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숙명여대의 주장은 매우 이중적이다. ‘여성리더십’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책임을 ‘여성학’에 전가하고 대학의 역할은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일차적으로 협동과정이라는 제도적 틀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이화여대를 제외하고 현재 10여개 남짓의 여성학 관련 과정은 대부분 학제간(interdisciplinary) 프로그램, 즉 ‘협동과정’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협동과정은 논리상으로 봤을 때는 분과학문의 폐쇄성을 넘어설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학문의 경직된 경계를 넘어서고자하는 여성학적 연구에 있어 매우 유용한 체계다. 그러나 사실 대학의 제도적 운용의 측면에서 볼 때, 협동과정은 단순히 수지맞는 장사 수단에 그치고 있다. 협동과정은 과단위에서 요구되는 전담교원 등의 기본적인 인프라 구축에 대한 부담 없이 손쉽게 설치되고 운영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투자’ 부담은 ‘협동’을 빙자하여 학생을 포함한 학내 여성학 공동체에 떠맡기고 성과만을 회수한다. 숙명여대측이 주장하는 투자 대비 효율성과 같은 시장 논리는 그 투자의 부실함을 생각해 볼 때 시쳇말로 ‘공정무역’조차 아닌 셈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논리들이 만들어내는 여성학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1990년대 여성운동과 여성학의 성장은 여성관련 국가 정책의 도입과 궤를 같이 해 왔고, 여성인력의 수요 증가라는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이 과정에서 여성학은 여성리더의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여대의 경쟁 전략으로 적극 유치되었다. 여성학이 여성리더의 양성을 하나의 존립 근거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여성학 없이 여성리더의 양성이 가능하다는 숙명여대의 입장은 억견이다. 그러나 여성학은 또한 경쟁논리와 시장논리로 무장된 리더십을 해체하는 것 역시 자기 임무로 삼는다. 객관적이고 투명해 보이는 (취업)시장이 사실은 매우 젠더화된 조직 논리로 구성되어 여성을 배제하고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구성해 왔음을 제기하는 학문이 다름 아닌 여성학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개인의 자기계발식 성공을 추동하거나 유형화하는 것을 넘어서는 여성주의리더십의 개발과 학문적 연구가 진척되고 있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숙명여대측의 여성학협동과정 폐지의 논리에서 제기되고 있는 ‘여성리더십’은 여성학을 순시장기능적 역할로 축소시키는 것은 물론, 그에 기반하여 여성학의 위기를 호명하는 프레임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는 제도적, 관습적 차원의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기존의 수직적 소통 구조를 극복하고 대학 내에서 새로운 학문적 탐색을 주도하고 있는 여성학 공동체의 노력과 리더십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여성학의 학문적 정체성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다. 여성학은 젠더 분석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 새로운 젠더관계의 방향을 모색하는 학문이다. 여느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목적이 취사선택될 수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시장이나 취업의 젠더적 효과를 오롯이 여성학이 떠맡아야 할 이유가 없다.


여성학의 정책실천력이나 현실대응적 순발력이 성과 못지않게 많은 한계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에서 소위 여성학의 ‘위기’를 규정하고,  취업시장과의 연계를 주요 대책으로 내놓는 일부 의견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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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물 전쟁, 그 속에는 항상 여성이 있었다

전세계 물 전쟁, 그 속에는 항상 여성이 있었다

전소희


19세기 최대 돈벌이는 “골드”이고 20세기 최대 돈벌이는 “블랙골드(석유)”라고 하는데, 21세기 최대 돈벌이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블루골드” 즉 물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지만 무차별적 개발과 천연자원 착취로 점차 부족해지는 물, 없으면 못 살기에 그 가치가 더더욱 높은 물이다. 그리고 더 많은 이윤을 찾아 끊임없이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나서는 자본은이 이제는 물에 집중하고 있다.

석유를 둘러싸고 세계 곳곳에서 치열한 경쟁과 싸움이 벌어지고 있듯이, 이제는 물을 둘러싼 전쟁이 시작됐다. 볼리비아 물 투쟁과 정권 교체, 남아프리카공화국 빈민들의 투쟁, 필리핀에서의 콜레라 확산… 우리나라에서도 물 사유화가 추진되면서 해외 물 사유화의 폐해와 이에 맞선 투쟁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런 투쟁의 중심축에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오렌지팜

주로 부유한 백인들이 많이 사는 요하네스버그 남쪽 45km에 있는 오렌지팜. 오렌지팜은 20년 전 빈민들이 유휴지를 점거하면서 시작된 마을이다. 그러다보니 상수도 보급률이 매우 낮다. 오렌지팜에서의 물 투쟁은 상수도 보급 확대를 정부가 아닌 사기업이 추진하면서 벌어졌다. 초국적 자본인 수에즈와 콘소시엄을 구성한 지방공기업 JOWCO가 상수도 연결 비용 500랜드(67,000원)를 주민들이 내야 하며 선불카드 식 요금제도를 도입한다고 하자 주민들은 ‘물 위기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즉각 투쟁에 돌입했다. 이 속에서 주된 역할을 한 것은 여성들이었다. 남아공 여성들은 물 사유화가 가져오는 물 위기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 이미 여러 번 경험한 바 있다. 수도 요금 폭등이나 단수는 기본이고, 2000년 및 2003년도에는 다른 두 도시에서 물 사유화와 단수로 콜레라가 번져 총 250여명이 사망했고, 궁핍한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오렌지팜 여성들은 결국 승리하여 수에즈-JOWCO에 의한 수도연결 계획을 무산시키고 원래 있던 지역 공동수도 시설을 자체적으로 개선하여 유지하고 있다.

오렌팜 시위: "모든 이에게 전력과 물을 무상으로" "물은 인권이댜"


미국 디트로이트와 스톡튼

미국 미시간州 디트로이트에서도 물 사유화 반대 투쟁이 벌어졌다. 2002년 여름, 도시 곳곳 빈민층에 대한 단수 조치가 내려졌다. 요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였으며, 상수도 벨브를 아예 시멘트로 발라버렸다. 이유는 초국적 물기업 테임즈워터 출신인 디트로이트 시장이 시 상수도를 기업에 위탁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수익성을 개선하기 위해 요금 현실화(비용 회수)와 요금 미납에 대한 철저한 단속을 시행한 것이다. 미시간복지권기구(MWRO)는 복지에 의존해야 하는 빈민들로 구성된 단체인데, 이 단체 여성들이 디트로이트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고, 시장실 점거 농성 등 투쟁을 전개하였다.


캘리포니아州 스톡튼에서도 여성들이 물 사유화를 저지하는 주체로 나섰다. 2003년 스톡튼 시는 테임즈워터에 상수도를 위탁하려 하자, 스톡튼시민연합, 환경단체인 시에라클럽, 여성유권자동맹이 스톡튼 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승소했다.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주민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칠 위탁계약이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시는 위탁계약을 전면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주민들은 한발 더 나아가 500만 달러 이상 되는 공공시설 관련 모든 위탁 계약은 주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새로운 조례까지 통과시켰다.

 

스톡튼에서의 시위 :"공공의 물을 지키자"

우루과이 말도나도

2005년 스페인계 아구아델빌바오와 수에즈의 자회사가 각각 말도나도와 인근 해안도시의 상수도를 인수받았다. 애초에 상수도가 잘 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주민들은 시 정부가 여러 군데 세운 급수탑을 통해 물을 공급받고 있었는데, 그래도 수도요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말도나도 시는 현대식 수도를 보급한다는 미명 하에 그나마 있던 급수탑을 없애고, 사기업에 의뢰하여 상수도를 건설하여 운영하도록 했다. 무상 공급되던 물이 유료화됐으며, 높은 요금으로 부유층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주로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던 마을위원회가 나섰다. 사기업의 상수도를 거부하면서 없어진 급수탑 대신 우물을 팠고, 자체적인 간이상수도를 세웠다. 그리고 말도나도에서 수도 몬테비데오까지 행진을 하고 거리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투쟁은 전국으로 번져 전국적인 투쟁이 되었고, 국민투표 운동을 전개하여 물 사유화 금지하는 조항을 헌법에 삽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우익 정권을 선거에 패배시키고 (중도) 좌파 정권을 세웠다.

코차밤바 물투쟁


볼리비아 코차밤바

우리에게 “물 사유화”라는 다소 생소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사례는 아마도 볼리비아 코차밤바의 “물전쟁”이었을 것이다. 1998년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 IMF 등 국제금융기구들은 볼리비아에 대한 구제금융 제공의 조건으로 물을 사유화하라고 했고, 이에 볼리비아 정부는 코차밤바 지방상하수도사업을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정부는 요금을 현실화하고 수익성을 개선한다며 수도 관련 법을 개정하였는데, 도시지역 수도요금을 달러를 기준으로 산출하는 달러 페그(peg) 정책을 도입했고, 농촌지역에서는 무상으로 사용하던 간이상수도를 모두 없애고 사기업이 새로 건설한, 요금이 매우 높은 상수도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도시든 농촌이든 수도요금이 3배 이상 폭등하였다. 이 속에서 가장 피해를 입은 집단은 여성이었고, 먼저 반응한 것도 여성이었다. 2000년 초, 물 사유화에 대응하기 위해 노동자, 환경활동가, 여성, 농민․원주민 등을 포괄하는 연대체가 구성되어 물 투쟁을 주도했는데, 여성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대체 자체가 ‘여성’으로 불리거나 비유되곤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여성들은 기업에 의한 물의 독점을 비난하면서 여성이 물에 자유롭게 접근할 권리, 물 자원에 대한 공동체적 소유, 여성들의 참여 확대를 주장하면서 투쟁에 결합했다. 투쟁 초기 다양한 조직 간 불협화음이 생겼을 때에도 공통적 조건 속에서 공통적 요구를 하던 여성들의 조정과 연대로 이견이 해소됐다고도 한다. 물 투쟁에서 민중들이 승리했으며, 이후 이어진 가스 등 기타 천연자원에 대한 투쟁이 폭발적으로 벌어지면서 모랄레스라는 원주민이 대통령으로 선출,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경찰앞에 선 한 코차바 여성

당연히 그 어느 사례에서도 여성들만 투쟁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물 사유화가 오로지 여성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물, 의료, 교육, 에너지, 보육 등 공공서비스가 사유화되면 여성들에게 일차적 타격이 가해진다는 사실이다. 그 중 특히 물이 그렇다. 양육을 포함한 가사노동의 80%가 물 사용에 기반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으며, 질병의 약 80%가 물을 통해 감염된다고도 한다. 결국 가사를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여성들에게 물 사유화는 안 그래도 고달픈 가사노동을 더욱 고달프게 만들고, 빈곤화를 더욱 촉진시키는 정책이다. 그렇기에 때문에 여성들이 일차적으로 반응하고 대응에 나섰던 것이다. 또한 농촌여성의 경우 자신들이 만들고 관리하고 공동으로 소유하던 상수도가 기업에게 도둑맞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난 7월 16일, 한국 정부는 ‘물산업 육성 5개년 세부추진계획’을 공표하였다. 사실 지난 2001년과 2005년에 수도법을 개정하여 지자체가 운영하는 상수도를 민간이 위탁받아 운영할 수 있도록 할 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이미 물 사유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번 물산업화 계획은 국가 정책이자 물 사유화를 위한 종합 패키지를 마련했다는 측면에서 본격적인 물 사유화의 신호탄이었다. 현재 공무원노조를 비롯하여 물 사유화 저지 공동행동 등 여러 단위가 대응을 시작했는데, 여성단체들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공공서비스를 사유화함으로써 여성의 재생산․보살핌 노동을 자본을 중심으로 재편한다는 사실, 그리고 물 사유화가 결국은 여성의 가사노동을 가중시키고 여성의 빈곤화를 촉진시킨다는 여러 사례를 봤을 때, 물 사유화에 대해 여성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외사례 참고 자료]
Beltran, Elizabeth. Water, Privatization and Conflict: Women from the Cochabamba Valley. 2004
WEDO. Diverting the Flow - A Resource Guide to Gender, Rights and Water Privatization. 2003
Stockton Record誌, “Stockton's Water Privatization Contract Reversed” 외,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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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서울대FTA심포]&quot;한미FTA와 여성의 미래&quot;

 

 

<여성학협동과정․여성연구소 심포지움>


"한미FTA와 여성의 미래 :글로벌 여성실천의 모색"



주최 : 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여성연구소

일시 : 2007년 3월 30일 2시-6시

장소 : 서울대 멀티미디어 강의동(83동) 501호


사회> 엄혜진(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발제1> “신자유주의 세계화, 한미 FTA 그리고 여성 : 한미 FTA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김원정(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석사과정,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


발제2> “FTA, 여성주의적으로 사고하고, 지구적으로 저항하자”

          정주연(세계화반대여성연대)


발제3> 한미FTA가 여성의 노동과 재생산관계에 미칠 영향: 멕시코 NAFTA 사례와의 비교분석

          문현아(여성문화이론연구소)



<토론>


배은경교수(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문경희박사(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

정미애박사(국민대 일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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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 FIRST from a Gender Perspective: NAFTA and the FTAA

Marceline White (Global Trade Program at Women's Edge Coalition, www.womensedge.org), 2004,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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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ons from NAFTA: The High Cost &quot;Free&quot; Trade

Lessons from NAFTA: The High Cost "Free" Trade

Hemispheric Social Alliance, June 2003


NAFTA in Mexico: Promises, Myths and Realities
NAFTA’s Impact on Mexican Agriculture: An Overview
NAFTA in the United States: An Assessment
NAFTA in Canada: The Era of a Supra-Constitution
Investment Provisions Threaten Democracy in All Three Cou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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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Jordan Free Trade Agreement Descends into Human Trafficking & Involuntary Servitude

U.S.-Jordan Free Trade Agreement Descends into Human Trafficking & Involuntary Servitude

May 2006

By Charles Kernaghan, National Labor Committ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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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ide & Conquer: FTAA, US Trade Strategies, and Public Services In Americas

Divide and Conquer - The FTAA, U.S. trade strategy and public services in the Americas

Public Services International

Prepared by
Scott Sinclair, Canadian Centre for Policy Alternatives
and
Ken Traynor, Canadian Environmental Law Association
for Public Services International

November,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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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여이연]한미FTA와 여성노동의 변화

 

한미FTA와 여성노동의 변화

 

 일시 : 2006년 6월 28일(수) 오후 2시 ~ 5시

 장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주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주최 : 한미FTA저지 교수학술공대위

            한미FTA저지를 위한 여성대책

 

발제1)  한미 FTA와 여성노동의 비정규화 (문현아/여이연)

발제2)  신자유주의, 한미 FTA 그리고 이주여성 (박천응/ 안산외국인 노동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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