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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17
    [서평] 성매매, '어떻게' '입장'으로 진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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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성매매, '어떻게' '입장'으로 진입할 것인가

 [아시아여성연구 2007년 46집 제 2호]

 

 

 

성매매, ‘어떻게’ ‘입장’으로 진입할 것인가

           

 막달레나공동체 용감한여성연구소(2007)  <경계의 차이, 사이, 틈새>, 그린비

엄혜진(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성매매라는 아포리아가 한국 페미니즘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성매매는 성적 권력의 문제는 물론, 무엇보다 여성의 차이를 정치경제학적 심급을 통해 가장 극렬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제쟁점을 경유하는 오랜 난제다. 그런데 성매매방지법 제정 이후 몇 년 간 성매매에 대한 페미니즘의 논쟁과 그것에 대한 의미화 과정을 보자면 이 아포리아로부터의 탈출은 요원해 보이기까지 하다. 해답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서가 아니다. 해답이 자명하다고 가정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이 아포리아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다.

단순하게 말해보자.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 성매매를 성욕의 문제로 자연화하면서 ‘찬성’하는 페미니스트는 많지 않다. 페미니스트 논쟁이 성매매 자체에 대한 찬반논쟁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얘기다. 철저히 자유 시장 논리를 앞세우거나 심지어 성매매의 필연성을 주장하면서 성판매 여성들의 가장 선도적 대변자로 자처하는 리버테리안적 혹은 가부장적 기득권 세력은 물론 여전히 다수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적 신념이 페미니즘 논쟁에 다양한 방식으로 얽혀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환기되어야 할 논쟁을 가로막거나 회피해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불거진 논의를 성매매에 대한 섣부른 ‘애도’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논점으로 번역하여, ‘입장’을 갖고 논쟁할 필요가 있다.

성매매에 대해서 ‘말하지 않거나’, ‘입장을 유보하는 것’은 한국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의 성매매에 대한 오랜 ‘입장’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역사적으로 한국의 반성매매 운동이 여성운동 내에서도 주변화되어 있었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성매매방지법 제정 이후 제출된 몇몇 ‘입장’들은 어떤 면에서 성매매에 대한 ‘입장’ 개진 그 자체만으로 주목받았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성매매에 대해 ‘입장’을 토로하는 것은 낙인을 감수하는 것이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낙인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긴박이 이론적 공백을 확장하는 효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빗대어, 필요에 따라 재단하고 침소봉대하는 주장들에 당혹스러워하는 필자들의 거부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입장’의 제출과 그에 대한 격렬한 토론은 오히려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입장’에 대한 필자들의 유보적 태도와 달리 이 책『경계의 차이 사이 틈새』는 ‘입장’으로의 진입을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에 주목해서 보자고 권유함으로써, 현재의 논의를 초과하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기반하여 아직까지 호명의 정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성매매관련 논쟁이 극복해야 할 지점을 풍부한 텍스트를 통해 직접적으로 혹은 우회적으로 지적해준다. 

공포 혹은 장외의 공간으로 치부되어 이론적으로 게토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성매매 관련 논쟁의 낙인 과정은 성매매 및 성판매 여성에 대한 낙인 프레임과 궤를 같이 한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성매매에 대한 완고한 금지주의적 입장이 누군가의 삶 자체를 금지시킬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나아가 유폐시킨 여성들의 풍부한 삶을 대면할 수 있는 의사소통 방식의 부재에서 비롯된 공포는 아니었을까? 이러한 생각에 동의한다면 성매매공간의 다면성을 추적하고 그 공간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에 주목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안하는 이 책은 매우 유용한 자극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경계의 차이 짓기는 경험 자체가 아니라 시공간성을 갖는 해석의 문제에 의존한다. 성매매방지법 제정 이전인 2002년에 쓰여진 백재희의 글이 이 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독해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다양한 연령, 지역, 국적을 가진 성판매 여성들과의 만남의 기록을 담은 이 글은 성매매 금지를 뒷받침할 확실한 피해의 증거를 계속해서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스스로에 대한 성찰에서 나아가, 불변적이고 단일화된 것으로 표상되는 성판매 여성들에 대한 재현을 갱신하고자 했던 필자의 고민과 해석에서 화석화되어 있지 않다. 여성의 경험보다는 성매매와 관련된 변인과 관계를 중심으로 한 대책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정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고 있는 바, 즉 성판매 여성들이 삶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시도하는 다양한 맥락과 의미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해석이 아니라 현재적 재해석의 과정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동태적 텍스트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동태적 텍스트에 기반하여 성매매공간에서의 삶의 권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교한 질문이 필요하다는 필자의 결론은 여러 명의 필진으로 구성된 이 책 전반에서 발견되는 주제의식이자 입장에 준한다.


단순하기보다는 복잡하게 질문하기 


이 책의 산실인 ‘막달레나의 집’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특수한 경계에 있는 공간이다. 20여년이 넘게 용산 집결지에서 성판매 여성들의 사랑방이자 쉼터 역할을 해온 막달레나의 집은 성판매 여성들의 생활세계의 안팎 바로 그 경계에서 형성된 관계와 긴장, 오해와 소통이 각인되고 역사화된 공간이다. 업주에게 탈출해 오거나 술 먹고 신세 한탄하러 오는 성판매 여성, 좌절과 자책과 그리고 희망 사이에서 감정 노동을 반복하는 활동가들, ‘재수 없다’며 활동가들에게 소금을 뿌려대던 동네 사람들, 정부와 자신들을 잇는 다리가 되어달라고 찾아오는 업주들 사이의 경계가 만들어낸 이 공동체의 역동성은 이 책을 현실감 있게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필자들은 이것이 정교하게 질문하는 방식을 개발시켜주었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성판매자와 구매자의 성별구조, 위계화된 섹슈얼리티와 권력의 문제, 정상성의 밖에 놓인 당사자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성매매를 통해 사유해야 할 방향들이 복잡하게 질문되어질 때, 오히려 명료해 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 책은 금지주의적 법체계에서 보호되고 있는 성판매 여성의 인권이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해야 할 인권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성매매 여성들의 피해자성과 행위성이 엄밀하게 구분가능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매매를 노동으로 보는 것과 성판매 여성의 일을 비가시화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따라서 성판매자가 해방되는 것이 성매매의 정상성과 지배성에 저항하는 것과 어떻게 공존될 수 있는가 등 무수한 논점들을 단독적이라기보다는 연쇄작용을 통해 복잡하게 질문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질문들이 이 책에서 처음 비롯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익히 경험했듯이 페미니즘 논의에서 이러한 논점들은 이미 분절적으로 혹은 단절적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성매매는 금지되어야 하는가 아닌가, 성판매 여성은 피해자인가 아닌가 하는 쟁점들이 단순하게 질문되는 것은 모두 이분법적 논리와 타자화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그 질문의 자기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끊임없는 번역과 우회라는 노동의 필요를 느낀다.

특히 원미혜의 글은 직접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성판매 여성과 성매매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을 제시한다. 성판매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열악한 인권을 사회적 차원에서 돌보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술적 주체성’ 즉, 즉 상황적 맥락적 존재로서 성판매 여성의 위치를 이해하는 ‘소수자’ 관점의 채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존의 접근이 성판매 여성에게 집중된 것이라면, 소수자의 관점은 성판매자에 대한 ‘차별'에 대한 인식, 곧 이들에 대한 차별을 생산하는 이 ’사회‘로 그 관심이 전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역설한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공감의 폭은 다양할 수 있다. ‘전술적 주체성’ 혹은 ’소수자‘ 관점 이상이나 여분의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동의의 여부가 아니라 이러한 입장과 논점들을 형성해 나가는 방식에 있으며, 성매매 문제를 단일 의제가 아니라 페미니즘의 정치학의 정면에 배치하여 논의를 확장해야 할 우리의 과제를 인식하는 데 있다.


현실의 풍부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필자들이 바로 의도한 바대로, 성판매 여성들의 삶의 내부와 외부에서 부유하는 풍부한 현실과 성매매 공간의 다면성 및 입체성을 마주대하고 해석하는 자세를 상기시키고 성찰시킨다는 점이다. Ruth Rosen은 20세기 초 아메리카 진보의 시대에 일었던 열광적인 성매매 반대 운동을 고찰하면서 성매매가 여성들에게는 위험한 선택이지만 더 위한 선택들 가운데서 선택되었다는 점이 어떻게 간과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성매매 문제와 성판매자의 삶을 풍부하게 사고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 안에서 다양한 세력 및 주체들 간의 권력 관계를 통해 분석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책의 2부에서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는 성판매 경험 여성들의 생애사는 이러한 Rosen의 입장을 뒷받침한다.

이희영은 성매매 경험을 가진 각각 40대와 20대 여성들의 생애사를 통해 성매매라는 공간이 한국 사회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과 억압적 공간과 분리되어 있다기보다는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연속되어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성판매 여성들의 성매매 ‘선택’을 단순 일탈 논리나 경제 논리로 해석하는 것은 관례에 가까웠다. 그 과정에서 친족에 의한 근친상간이나 식모노동을 하면서 당했던 성폭력 등 폭력에 의해 전유되는 ‘성’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경제적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성매매가 보다 더 나은 것으로 판단하게 되는 구조적 과정은 소실되기 쉽다. 필자는 ‘불온하며 폭력적인’ 성매매 공간과 대비되는 것으로 담론화되는 한국 사회의 ‘신성한 가족’ 공간이라는 이분법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성매매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일방적인 인과논리나 가부장적 편견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주장한다.      

이는 성판매 여성들의 건강 문제를 사유하는 김민지․전유나의 글에서도 관통해 있다. 성판매 여성들의 건강에 관한 것이라면 몸과 정신이 주체없이 파멸해 가는 모습이거나, 좀 더 구체적으로라면 성병이나 산부인과 관련 질환만을 떠올리기 쉽다. 이러한 무의식의 발동은 성판매 여성들의 삶을 ‘성판매’의 행위 그 자체에만 주목한다는 점에서, ‘윤락’ 여성을 성병관리의 대상으로만 치부했던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우리 역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넌지시, 그러나 아프게 시사해 준다. 성판매 여성들은 무면허 의료행위자에게 정기적으로 소염제를 맞거나 구전으로 떠도는 정보를 유통하는 등 나름의 노하우로 ‘건강’ 관리를 특정하게 실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건강 문제는 누군가에게는 산부인과 질환보다 대인관계를 기피할 정도의 치아 상태의 문제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외출할 때마다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게 만드는 문신이 심각할 수 있는 다양한 이해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현실의 복합적이며 차이를 가진 문제가 성판매 여성들에게(도) 당연히 움크리고 있다는 점이 간과된다면 당면한 ‘자활’ 정책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성매매 정치학의 상상력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임에 분명하다. 


‘경계’의 도그마를 경계하기 


Noah D. Zatz는 성매매 자체가 단일하고 동질적인 현상이라고 가정하거나, 모든 성매매를 성적 착취로 동일화하는 것을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1세계 중심적, 혹은 식민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금지주의에 입각한 성매매방지법의 제정에 아마도 가장 큰 영감을 주었을 Kathleen Barry의 논의가 주는 시사점이 제한적인 이유는, 달리 말해 피해자 서사가 ‘성노동’의 자유를 말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더욱 위험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러한 입장이 성매매와 인신매매 사이에 있는 무수한 삶의 경계들까지를 우연히, 혹은 고의적으로 외면하는 도그마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지점은 누구보다 이 책의 필자들에 의해 잘 인식되고 있다. ‘경계’, ‘차이’, ‘틈새’, ‘사이’는 이 책의 제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행간 곳곳에서 거듭되는 후렴구에 가깝다. 저자들은 열심히 ‘경계’를 자각하는데 몰두하며, ‘틈새’를 발견하고자 노력하며, ‘차이’를 소실시키지 않기 위해 애쓴다. 굳이 스피박을 상기하지 않는다할지라도 재현과 해석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필자들은 “우리의 언어가 다시금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권력’이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솔직히 토로한다. 특히 동료활동의 성과와 한계를 논의하는 엄상미의 글은 성판매 경험 여성들과 활동가들의 바람과 욕구, 오해와 이해의 교착점들을 드러내면서, 상호작용적이고 쌍방향적 소통의 지난함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계에서의 ‘머뭇거림, 주춤거림, 더듬거림’은 단순한 태도에서 그치기보다는 재현의 주체와 권력 구성의 문제를 이 시점에서 다시 상기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다시 말해 금지주의적 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하는 성노동 그룹의 활동이 이 법이 의도치 않게 성취해낸 중요한 진전이라는 김애령의 평가는 이러한 성과가 어떻게, 어떠한 주체에게 귀속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쟁점을 보다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성판매자 출신 페미니스트인 Gail Pheterson은 성매매에 대한 낙인이 일반적으로 여성들을 규율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성노동자’를 임파워링하는 것은 모든 여성을 임파워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성매매 논의의 목표가 결국 여성들의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삶에 대한 해석과 소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판매 여성을 포함한 모든 여성들의 임파워링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되새겨 준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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