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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4/20
    굳세어라 하니
    구렛
  2. 2009/04/15
    또 와(3)
    구렛
  3. 2009/04/07
    "제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기 쉽지 않다"-문정현신부
    구렛

굳세어라 하니

얼마전 나의 블로그에 화려하게(?) 데뷔했던 쿨함의 달인 홧병 하선생은 15년 헷갈려온 과거의 남친으로부터 '대부' 요청 문자를 받고 난 후 계속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러더니 얼마전 싸이 홈피에 '아름다운 이별'과 관련된 짧막한 글을 올렸는데, 그 후 예상치 못한 반응들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대체로 도대체 갑자기 누구냐는 반응이 가장 많은데, 그도 그럴 것이 그 대상이 중-고등학생 시절 첫 사랑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갈거란 상상력 부족에서 오는 탓이다. 그래도 그간 하선생과 많은 소통을 해온 나같은 몇몇 친구들은 그 지긋지긋한 15년간의 과거와 일별하고 이제 현재를 살려니 하는 반가운 마음도 있지만, 대체 갑자기 그런 마음을 먹게된 계기에 대해 몹시 궁금해하고들 있다. 그러던 차, 결국 지난 주말 그녀를 만났다.

 

"갑자기 왜? 깜짝놀랐다. 새벽 7시 그런 글 올라와서. 뭔일 있는건 아니지?"

"메일 정리하다가 갑자기 울컥 했다!!"

"...............메일?"

"옛날에 온 메일들"

"푸하하하하하. 얼마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디?? 혹시 1990년대도 있는거야??"

"쩝. 있더라. 초코 남친 메일"

 

도대체 결혼까지 해서 애 둘낳고 잘살고 있는 대학교 동창 초코의 전 남친 메일을 그녀가 왜 아직 갖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타고난 순발력에 낙천적인 성격을 지닌 그녀와 "지금 죽으면 사인이 홧병일거"라 농담 따먹으며, 삼성동 대로 한복판에서 한참을 배꼽잡고 웃어버렸다.    

과거를 안고 사는 그녀의 집은 여러모로 친구들의 폭발대상 1호다. 김모양 성형수술 전 사진부터 나의 우울한 학창시절 눈물젖은 레터링북까지 세상의 없어져야할(?) 그리고 잊혀져야할 모든 것들을 그녀는 여지껏 소중히 보관중이고, 당분간 없앨 생각이 없을뿐더러 김모양 성형수술 전 사진은 그녀의 결혼식날 헬기타고 삐라로 뿌릴 예정이라니 친구들로부터 폭격대상(?)이 될만도 하다. 뭔 수작인지, 요즘 나의 남친과도 묘종의 거래중이다.

 

그녀와 그 첫사랑과의 관계는 당시 부러움을 사는 관계였다. 풋풋했고, 이뻤다. 결국 만인의 문제인 소통의 문제로 그녀는 그 첫사랑으로부터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았고, 이후 합의도 안된 친구관계를 쿨한 척 이어오고 있다. 서로간 소통이 없었던 탓이겠지만 어찌되었던 '쿨하게 친구해줄 수 있다'는 착각의 역사 15년을 청산하겠다 마음먹은 친구에게 쉽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응원을 보낼 생각이다. 

 

그러고보면 나에겐 액면적으로 착각의 역사가 없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람이더라도 생애 가장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 살아가거나 혹은 멀지 않은 희망적인 미래를 상정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기도 할텐데, 난 좋았던 시절이 없어서던가 혹은 아름다운 미래를 상정할만큼 현재의 여유가 없어서였던가 착각이었다 판단되는 과거가 없다. 

 

착각. 사전적으로는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지각하거나 생각함'. 상상력 부족 탓인지, 실제라봤자 고통 그 자체였으니 다르게 인지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을텐데, 대체로 현실의 자극이 고되 상상 그 이상 현실에 가까이 둘 수 없었다.

 

그나마 내가 한 착각이라면 나의 부모에겐 죄스런 일이지만, 불행하게도 '약 20살쯤 되면 나의 친부모가 날 찾으러 올 거'란 것이었다. 사실상 착각이라기 보다 공상에 가깝다. 친부모라면 나한테 이럴 수가 없는데....라는 아주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므로 살아가기 위한 생활의 위안이었다고나 할까. 여하튼 요즘과 같은 막장드라마의 수혜(?)를 받았다면 재벌의 친부모와 대기업 실땅급 이복오빠까지 옵션으로 달아 좀더 풍부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을 것을....나의 그것은 시대의 뒷받침도 받지 못했다...희안하게도 내 얼굴에서 조샘의 얼굴의 일부를 발견하게 되고, 박윤년(엄마의 개명전 이름)씨의 성격 일부를 조금씩 닮아갈수록 마음이 급해졌다.

 

착각이란 현실 위안의 방식 중 하나일텐데, 그 덕분에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 나의 삶에는 퍽 유용한 면이 있었다 볼 수 있다. 결국 그 착각은 지금의 현실에 부합되어 있는 편이라 착각만도 아니었다. 지금 나에겐 '친부모'가 절실한 조건이 아니게 되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그 착각은 현실에 제대로 적용된 셈이다. 부모에게도 각자 자기의 삶이 있고, 최소한의 기본요건 이상 난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감사함도 갖게 되었으므로 더이상 부모를 괴롭힐 일도 아니지만, 조샘을 간간히 삥뜯는 짓(?)이나 박윤년씨 골려주기를 그만둘 생각은 아직 없다. 삶의 낙 중 하나라......

 

그러므로 적어도 액면적으로 착각의 역사는 나와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뭔가 좀 찝찝은 한데,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내가 착각의 늪 속에 폭 빠져 허우적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가 저기서 뭐하고 있는거지...언제 저기 들어가 있었댜.....'

 

받아야할 사랑의 부피, 무리 속에 살면서 끼쳐야할 불편의 용량,  상대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역할의 무게를 최소로 설정해 두어야 한다는 착각. 난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며, 결국 받았어도 그것은 절대 나의 것이 아니란 착각. 이런 걸두고 손이 오그라드는 청승이라고들 한다. 신파가 따로 없다. 쩝.... 

 

나에겐  복수심을 불태울 라이벌도, 악랄한 계모(웃는 낯에 뒤통수를 맞기도, 마른 하늘에 벼락이 등에 꽂히는 느낌이 들때가 간간히 있지만, 악한 감정이 일지는 않는다)도 없으니 '달려라 하니'와 '굳세어라 금순이'의 그 중간 어디쯤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의지가 곧고 성격이 긍정적인 주인공들이라 좀 위안이 되긴 한다.   

 

착각으로 점철된 삶이었을줄이야. 이제 이런 거랑 빠빠이하고 내 삶을 살아야 하는데.......

 

결국 난 막장드라마의 피해자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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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와

 

서준이가 많이 아프다. 감기에 된통 걸렸다. 부쩍 보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한다.

 

원래는 "이모~~~나왔어. 어딨어" 이렇게 씩씩하게 나를 찾는데, 오늘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모....보고..싶어요"한다. 서준이도 슬프고 아플 땐 사람을 찾게 되나보다.

 

그런 서준이를 데리고 아침에 산책을 나갔다. 말수가 별로 없다. 1시간씩 놀아도 돌아갈 생각을 안는데, 오늘은 미끄럼틀 한번, 그네 한번 이렇게 한번씩 순회한 게 전부. 이런 서준이에겐 말이라도 많이 건네야 하는데, 괜히 나까지 센치해졌다.

 

"서준아, 벚꽃이 벌써 많이 떨어졌네"

"벚꽃 왜 떨어졌어 왜?"

"어?.................어....그건 말이야.........그건....아까 서준이가 '놀이터야 안녕. 다음에 또 오께' 했지? 이번에는 벚꽃이 서준이한테 '서준아 안녕. 다음 봄에 또 오께' 하는거야" 

 

내가 스쳐지나온 것들은 까마득하기만 한데, 나를 스처지나가는 것들에겐 담담할 수가 없다.

 

.

 

이런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생각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 서준이랑 오랫동안 이야기 하려면.

 

산책 갔다 돌아가는 길에 요쿠르트 리어커가 있길래 몇 백원이라도 들고 나올걸 후회했는데, 일주일에 한두번씩 우유를 배달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알아보고 서준이가 인형같이 이쁘다며 하나를 주고 갔다. 손에 꼭 쥐고 들어와서는 "서준이랑 이모랑 이뻐서 줬어"라고 할미에게 보고를 한다. 나를 빼놓지 않아 주어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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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기 쉽지 않다"-문정현신부

얼마전 용산촛불미디어센터에서 문정현 신부님을 뵈었다. 대추리에서 뵙고 신부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대추리에서 또 용산에서, 그 분의 인생이 내가 아는 몇몇의 활동가와 비슷하단 생각을 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남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학교, 성당, 공장에 없고 거리에 나와있어' 외길인생 00년 이라고들 하는데, 반대로 나는 진정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터뷰가 벌써 오래전이라 잊고 계실 줄 알고 모르는 척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먼저 다가와 말을 걸며 악수를 청하신다. 이럴 땐 그냥 내가 먼저 아는 척 할 걸 이란 후회가 든다. 

 

"여기서 뵈니 더욱 반갑습니다"

"흐흐...현장..." 나즈막히 되뇌이시며 씁쓸한 미소가 흘러져 나왔다.  

 

그 울림이 너무나도 강해 신부님과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오랫만에 참세상 페이지에 들려 일전에 내가 썼던 인터뷰 기사를 찾으려 했는데, "제가 여기 있습니다. 말하기 쉽지 않다"라는 박래군 활동가의 문정현 신부님 인터뷰기사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아주 강렬하게. 나의 기사 따위 잊혀질 만큼.

  

"성경의 가르침이 훌륭하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고뇌와 피땀이 어우러진 길 앞에서, 우리는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흔쾌히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부님은 군산에서 올라오는 중에도 이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로 소통하고, 공유하고, 끊임없이 낮아질 것을 주문하셨다. 대중들 속에서 아파하고, 끊임없이 낮아지는 가운데 새로운 상의 지도자가 나올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난 단 한 사람에 대해서도 아파해 본 적이 없던 것 같다. 심지어 내 자신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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