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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5/11
    소회
    구렛
  2. 2009/04/20
    굳세어라 하니
    구렛
  3. 2009/04/15
    또 와(3)
    구렛
  4. 2009/04/07
    "제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기 쉽지 않다"-문정현신부
    구렛
  5. 2009/03/31
    조희주의 봄(14)
    구렛
  6. 2009/03/04
    s2 : 축복 받은 조건
    구렛
  7. 2008/08/12
    관계맺기루저
    구렛
  8. 2008/08/01
    뉴스의중심!으하하(3)
    구렛
  9. 2008/07/20
    내가 당신의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유
    구렛
  10. 2008/07/15
    어느날 버스안에서(4)
    구렛

소회

'환타언니'는 엊그제 퇴원했다.

'태권소녀'친구는 그 뒤로 소식이 없다. 

'참세상'친구에게 '영화보고 수다떨자'는 메세지를 보냈으나 아직 날짜를 잡진 않았다. 

'조희주샘'은 여전히 용산의 거리에서 농성중이다. 

 

'환타언니'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약을 먹어야 하고, 오랫동안 일을 하지 못하고 집안에서 생활을 해야 한다. 먹어야 하는 약만 4가지, 한 달 약값만 100만원을 써야한단다.  

'태권소녀'친구는 6살 연하 남친과 틈틈히 연애하는 것을 낙삼아 밤10시까지 마사지샵을 벗어나지 못하고 엄마와 하루를 보내고 있다.

'조희주'샘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용산을 지키는 농성의 달인'이라는 비공식 타이틀을 달았다. 주변인들이 응원차 농반진반으로 달아준 것이다.

 

'환타언니'의 남편은 퇴원이 너무 기쁘지만 한편 앞으로가 막막하다고 말했다.

'태권소녀'는 '순간순간 치가 떨린다'라고 했었다.

'조샘'은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벌건 눈으로 농성장을 지키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모두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낸다, 힘들고 지치고 의문스럽고 또 치떨리게 고단한 하루들일 것이다.

 '힘들다 힘들다' 티내도 좋고 그런 감정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보내도 좋지만, 그럼에도 문득문득 한 텀 호흡의 의미를 찾고 확인해야 할텐데, 그 의미란 것이 백만개의 촉수로 더듬어도 골라내기 어려워 끌어다붙이고 이어다붙인 누더기 같이 억지스러울 때가 많다.  

 

그러므로 그런 나의 글에 대한 반응도 제각각. 다분히 주관적이고 나의 생각으로 한정된 글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 예상한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도 당연하고 또 뭔소린지 헷갈려 하는 것도 예상되는 바다. 그러나 막상 그런 반응들을 접하고 나면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도 드는데, 결국 말(글)을 줄여야 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만다.

 

그것은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먼저 말을 건내는 것에 대한 주저함이며 결과를 낙관할 때의 오만함에 대한 망설임이다.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그런 고단한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니 무서워 말아야 하는데, 좀처럼 그리 맘먹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더 말을 많이 해야지, 더 솔직하고 거칠게 드러내야지. 그런저런 반응들도 새삼 용기였으리라. 얼마나 고민하다 건낸 말이었겠는가. 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드러내놓고 타인이 생각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흠짓 놀라 움추려 드는 행동은 비겁해. 긴장감을 잃지 말자. 차이는 서로 드러내고 이약해야 확연해지는 것이고 그렇게 차이들이 드러나야 더욱 풍요로와질 것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난 악의가 없고 신뢰가 있고 애정이 있으니, 또 악의적인 것과 진정성을 갖은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식견을 갖고 있으니 이 모든 것에서 자신감을 갖자!! 

 

앞으로는 주변으로 한정된 시야를 확장할 수 있도록 컨텐츠도 수집하고 타인의 이약과 의견, 주장에도 관심을 넓혀야 겠다. 더 많이 이약하고 소통해야지. 그러나 우선 뭐든 짧게 써야겠다....난 넘 말이 많고 내 글은 넘 길다.ㅠㅠ 

       

 

지난 7일 용산에 들려 카네이션 한 송이를 전했다. 사실 남친만나러 가는 길에 빈손으로 가기 뻘줌하여 들고 간 것인데, 받는 조샘도 받는 모양새가 '불손(?)'하다. 얼굴이 벌겋고 더욱 팅팅 부은 것이 이날 아침까지 활동가들과 술잔을 기울인 모양이다. 그러니 어버이날이다 카이네션 받는 것이 영 미안하고 쑥쓰러웠을 터, 받는 둥 마는 둥 손에 잡긴 했는데 꼭 자기 것이 아닌 양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시늉이다.

 

뭐 어버이날 카이네션이야 존경과 사랑만 담는 것이 아닐 것이니 '자기 생활은 자기가 책임집시다!'라는 무언의 경고를 담아  드렸으나 그런 내맘이야 내맘일뿐, 지속적으로 술을 먹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것인지 하얀 천 깔린 의자 위에 빨간 카네이션이 오래토록 나뒹굴긴 했다.

 

남친에게 나중 전해들은 것이지만, 이 날 회의중 어버이날 행사 관련 이약이 나오자 조샘이 "자신은 이미 카네이션을 받았네"라고 은연중 말을 흘렸던 모양이다. '센스없는 인간들(?)'이 노친네 맘도 몰라주고 그냥 흘려넘겼나본데 그 맘을 눈치챈 남친이 '누가요?'라고 맞장구친 것까지 홀랑 함께 꿀꺽했다는 이약을 들었다. 노친네 꽤나 섭섭했겠다.ㅋ 잘이나 받을 것이지...쩝.

 

사실 내 감수성으로는 이야기 소재 아닌 것이 없고, 막장에 끝장(?)까지 더한 드라마가 아닌 것이 없으며, 통속에 청승까지 겸한 신파가 아닌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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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어라 하니

얼마전 나의 블로그에 화려하게(?) 데뷔했던 쿨함의 달인 홧병 하선생은 15년 헷갈려온 과거의 남친으로부터 '대부' 요청 문자를 받고 난 후 계속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러더니 얼마전 싸이 홈피에 '아름다운 이별'과 관련된 짧막한 글을 올렸는데, 그 후 예상치 못한 반응들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대체로 도대체 갑자기 누구냐는 반응이 가장 많은데, 그도 그럴 것이 그 대상이 중-고등학생 시절 첫 사랑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갈거란 상상력 부족에서 오는 탓이다. 그래도 그간 하선생과 많은 소통을 해온 나같은 몇몇 친구들은 그 지긋지긋한 15년간의 과거와 일별하고 이제 현재를 살려니 하는 반가운 마음도 있지만, 대체 갑자기 그런 마음을 먹게된 계기에 대해 몹시 궁금해하고들 있다. 그러던 차, 결국 지난 주말 그녀를 만났다.

 

"갑자기 왜? 깜짝놀랐다. 새벽 7시 그런 글 올라와서. 뭔일 있는건 아니지?"

"메일 정리하다가 갑자기 울컥 했다!!"

"...............메일?"

"옛날에 온 메일들"

"푸하하하하하. 얼마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디?? 혹시 1990년대도 있는거야??"

"쩝. 있더라. 초코 남친 메일"

 

도대체 결혼까지 해서 애 둘낳고 잘살고 있는 대학교 동창 초코의 전 남친 메일을 그녀가 왜 아직 갖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타고난 순발력에 낙천적인 성격을 지닌 그녀와 "지금 죽으면 사인이 홧병일거"라 농담 따먹으며, 삼성동 대로 한복판에서 한참을 배꼽잡고 웃어버렸다.    

과거를 안고 사는 그녀의 집은 여러모로 친구들의 폭발대상 1호다. 김모양 성형수술 전 사진부터 나의 우울한 학창시절 눈물젖은 레터링북까지 세상의 없어져야할(?) 그리고 잊혀져야할 모든 것들을 그녀는 여지껏 소중히 보관중이고, 당분간 없앨 생각이 없을뿐더러 김모양 성형수술 전 사진은 그녀의 결혼식날 헬기타고 삐라로 뿌릴 예정이라니 친구들로부터 폭격대상(?)이 될만도 하다. 뭔 수작인지, 요즘 나의 남친과도 묘종의 거래중이다.

 

그녀와 그 첫사랑과의 관계는 당시 부러움을 사는 관계였다. 풋풋했고, 이뻤다. 결국 만인의 문제인 소통의 문제로 그녀는 그 첫사랑으로부터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았고, 이후 합의도 안된 친구관계를 쿨한 척 이어오고 있다. 서로간 소통이 없었던 탓이겠지만 어찌되었던 '쿨하게 친구해줄 수 있다'는 착각의 역사 15년을 청산하겠다 마음먹은 친구에게 쉽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응원을 보낼 생각이다. 

 

그러고보면 나에겐 액면적으로 착각의 역사가 없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람이더라도 생애 가장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 살아가거나 혹은 멀지 않은 희망적인 미래를 상정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기도 할텐데, 난 좋았던 시절이 없어서던가 혹은 아름다운 미래를 상정할만큼 현재의 여유가 없어서였던가 착각이었다 판단되는 과거가 없다. 

 

착각. 사전적으로는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지각하거나 생각함'. 상상력 부족 탓인지, 실제라봤자 고통 그 자체였으니 다르게 인지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을텐데, 대체로 현실의 자극이 고되 상상 그 이상 현실에 가까이 둘 수 없었다.

 

그나마 내가 한 착각이라면 나의 부모에겐 죄스런 일이지만, 불행하게도 '약 20살쯤 되면 나의 친부모가 날 찾으러 올 거'란 것이었다. 사실상 착각이라기 보다 공상에 가깝다. 친부모라면 나한테 이럴 수가 없는데....라는 아주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므로 살아가기 위한 생활의 위안이었다고나 할까. 여하튼 요즘과 같은 막장드라마의 수혜(?)를 받았다면 재벌의 친부모와 대기업 실땅급 이복오빠까지 옵션으로 달아 좀더 풍부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을 것을....나의 그것은 시대의 뒷받침도 받지 못했다...희안하게도 내 얼굴에서 조샘의 얼굴의 일부를 발견하게 되고, 박윤년(엄마의 개명전 이름)씨의 성격 일부를 조금씩 닮아갈수록 마음이 급해졌다.

 

착각이란 현실 위안의 방식 중 하나일텐데, 그 덕분에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 나의 삶에는 퍽 유용한 면이 있었다 볼 수 있다. 결국 그 착각은 지금의 현실에 부합되어 있는 편이라 착각만도 아니었다. 지금 나에겐 '친부모'가 절실한 조건이 아니게 되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그 착각은 현실에 제대로 적용된 셈이다. 부모에게도 각자 자기의 삶이 있고, 최소한의 기본요건 이상 난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감사함도 갖게 되었으므로 더이상 부모를 괴롭힐 일도 아니지만, 조샘을 간간히 삥뜯는 짓(?)이나 박윤년씨 골려주기를 그만둘 생각은 아직 없다. 삶의 낙 중 하나라......

 

그러므로 적어도 액면적으로 착각의 역사는 나와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뭔가 좀 찝찝은 한데,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내가 착각의 늪 속에 폭 빠져 허우적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가 저기서 뭐하고 있는거지...언제 저기 들어가 있었댜.....'

 

받아야할 사랑의 부피, 무리 속에 살면서 끼쳐야할 불편의 용량,  상대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역할의 무게를 최소로 설정해 두어야 한다는 착각. 난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며, 결국 받았어도 그것은 절대 나의 것이 아니란 착각. 이런 걸두고 손이 오그라드는 청승이라고들 한다. 신파가 따로 없다. 쩝.... 

 

나에겐  복수심을 불태울 라이벌도, 악랄한 계모(웃는 낯에 뒤통수를 맞기도, 마른 하늘에 벼락이 등에 꽂히는 느낌이 들때가 간간히 있지만, 악한 감정이 일지는 않는다)도 없으니 '달려라 하니'와 '굳세어라 금순이'의 그 중간 어디쯤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의지가 곧고 성격이 긍정적인 주인공들이라 좀 위안이 되긴 한다.   

 

착각으로 점철된 삶이었을줄이야. 이제 이런 거랑 빠빠이하고 내 삶을 살아야 하는데.......

 

결국 난 막장드라마의 피해자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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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와

 

서준이가 많이 아프다. 감기에 된통 걸렸다. 부쩍 보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한다.

 

원래는 "이모~~~나왔어. 어딨어" 이렇게 씩씩하게 나를 찾는데, 오늘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모....보고..싶어요"한다. 서준이도 슬프고 아플 땐 사람을 찾게 되나보다.

 

그런 서준이를 데리고 아침에 산책을 나갔다. 말수가 별로 없다. 1시간씩 놀아도 돌아갈 생각을 안는데, 오늘은 미끄럼틀 한번, 그네 한번 이렇게 한번씩 순회한 게 전부. 이런 서준이에겐 말이라도 많이 건네야 하는데, 괜히 나까지 센치해졌다.

 

"서준아, 벚꽃이 벌써 많이 떨어졌네"

"벚꽃 왜 떨어졌어 왜?"

"어?.................어....그건 말이야.........그건....아까 서준이가 '놀이터야 안녕. 다음에 또 오께' 했지? 이번에는 벚꽃이 서준이한테 '서준아 안녕. 다음 봄에 또 오께' 하는거야" 

 

내가 스쳐지나온 것들은 까마득하기만 한데, 나를 스처지나가는 것들에겐 담담할 수가 없다.

 

.

 

이런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생각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 서준이랑 오랫동안 이야기 하려면.

 

산책 갔다 돌아가는 길에 요쿠르트 리어커가 있길래 몇 백원이라도 들고 나올걸 후회했는데, 일주일에 한두번씩 우유를 배달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알아보고 서준이가 인형같이 이쁘다며 하나를 주고 갔다. 손에 꼭 쥐고 들어와서는 "서준이랑 이모랑 이뻐서 줬어"라고 할미에게 보고를 한다. 나를 빼놓지 않아 주어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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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기 쉽지 않다"-문정현신부

얼마전 용산촛불미디어센터에서 문정현 신부님을 뵈었다. 대추리에서 뵙고 신부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대추리에서 또 용산에서, 그 분의 인생이 내가 아는 몇몇의 활동가와 비슷하단 생각을 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남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학교, 성당, 공장에 없고 거리에 나와있어' 외길인생 00년 이라고들 하는데, 반대로 나는 진정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터뷰가 벌써 오래전이라 잊고 계실 줄 알고 모르는 척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먼저 다가와 말을 걸며 악수를 청하신다. 이럴 땐 그냥 내가 먼저 아는 척 할 걸 이란 후회가 든다. 

 

"여기서 뵈니 더욱 반갑습니다"

"흐흐...현장..." 나즈막히 되뇌이시며 씁쓸한 미소가 흘러져 나왔다.  

 

그 울림이 너무나도 강해 신부님과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오랫만에 참세상 페이지에 들려 일전에 내가 썼던 인터뷰 기사를 찾으려 했는데, "제가 여기 있습니다. 말하기 쉽지 않다"라는 박래군 활동가의 문정현 신부님 인터뷰기사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아주 강렬하게. 나의 기사 따위 잊혀질 만큼.

  

"성경의 가르침이 훌륭하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고뇌와 피땀이 어우러진 길 앞에서, 우리는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흔쾌히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부님은 군산에서 올라오는 중에도 이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로 소통하고, 공유하고, 끊임없이 낮아질 것을 주문하셨다. 대중들 속에서 아파하고, 끊임없이 낮아지는 가운데 새로운 상의 지도자가 나올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난 단 한 사람에 대해서도 아파해 본 적이 없던 것 같다. 심지어 내 자신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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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주의 봄

 

얼마전 주간지에서 수배중인 박래군 위원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박래군 위원장이 검찰에게 보내는 서신도 관심있게 보았으나, 개인적으로 이 인터뷰 기사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아주 개인적인 까닭이라 사료됩니다.  박래군 위원장의 큰 딸이 벌써 고2라네요. 

 

"2월 26일이 2고 큰딸 생일이었고 아이가 생일 선물 대신 아빠와 삼겹살을 같이 먹고 싶어했는데,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고2가 된 큰딸은 아버지 직업을 적어내라는 학교의 주문에 우리 아빠는 MB 악법 저지를 위한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엄마에게는 아빠가 잘못한 게 없는데 판사에게 비굴하게 보이지 말라고 전하라고 했단다." 

 

기자가 인터뷰 전문 앞에 두어단락으로 추려놓은 부분에 이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짧게 나마 기자생활을 경험해봐서 살짝 상상해보았습니다만, 저 였어도 그리 했을 것 같습니다.

 

당차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부럽기도 하고, 한편 고개가 숙여집니다. 먹먹한 마음도 드는군요. '그래 시대가 좋아져서 요즘 친구들은 자기 표현이 좋은 거지' 라고 위로해보지만, 스스로에게도 그다지 설득되지 않기는 합니다.

 

'난 왜 그냥 눈물만 났을까'  초등학생 때는 공부하라는 얘기 안듣는게 좋고 선생님들 이야기 듣는게 좋아 아빠를 곧잘 쫒아다니곤 했는데, 정작 앞에 나가 '아빠에 대해', '나의 감정에 대해', '아빠가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할라치면, 외마디도 못하고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조용히 서있다 자리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 내 맘을 이해라도 하시는지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선생님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매번 그러니깐 다음에는 아예 말해보라고 권하지도 않더군요. 우리 아빠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아버지 직업란엔 그저 '교사' 이외에 쓰지 못했던 죄책감이었을지도, 사람들 앞에 서서 이야기 하는게 쑥쓰러워서 였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남모르는 부채가 있는데요. 참세상에 입사할 무렵 아빠와 동지라 불리는 전교조 선생님들과의 술자리에서.진지하게 "전교조 하는 아빠를 두는 딸의 기분은 어때요? 나도 딸이 있는데, 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요"라고 질문하셨던 선생님에게 맡겨둔 부채입니다. 단 한 차례 고민해본바 없는 그 질문에  "아마 아빠를 많이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라는 믿기지도 못할 대답을 했으니 얼마나 큰 부채겠습니까. 지금도 난감해하는 선생님의 표정이 꼬리표처럼 머리통에 붙어다닙니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 시절까지 아빠와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몸부림의 역사를 부정하는 말이니 저 자신도 믿기 어렵긴 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걸어가는 아빠를 보았습니다. '아빠'라고 두어번 부르면 대체로 '아빠'라 불림 받는 몇 사람은 힐끗 쳐다보기 마련이건만, 다섯번을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 아빠를 보면서 내가 찾지도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집회에 가신다네요. 원래 모여서들 가는데, 아빠 옆에 사람이 없는 걸 보면서 아빠 옆엔 가족이 없었구나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2시간 후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저녁 때 시간 되면 잠깐 보자고 하시길래 선약이 있어 얼버무렸는데, 결국 밤 10시가 다되서 종로 집회 장소로 아빠를 만나러 갔습니다. 별 말 없이 행진을 함께 하고 '밥 먹었냐'는 안부를 전하는 게 전부. 누군가 아빠에게 '대표님'하길래 "대표 직책은 어떤 것이냐", "노동전선 대표", "노동전선은 뭐예요?" "민주노총 좌파 정치조직".. 뭐 이런 대화도 오고 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아빠가 무얼 하고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한때는 전교조 부위원장에서 민주노총 위원장 후보였던 아빠였는데, 지금은 길게 설명할래도 할 게 없습니다.

 

아빠,

참세상 3년, 운동에 대한 회의도 많이 들었는데, 그래도 요즘 아빨 보면 가슴이 뜁니다. 벌써 25년 쯤 되었나요? 죽기 전에 혁명을 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아빠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좀더 일찍 물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듭니다.  저에게는 아빠의 사상을 공유하고 이해하게 되는 과정 자체가 퍽 혁명적이란 생각도 드는데요. 여전히 아빠가 원하는 혁명이란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살아 생전 아빠가 달성하려는 혁명을 결국 보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란 것 압니다. 정치적 자국을 역사에 기록하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거리에서 호흡하며, 열정과 낙관을 가지고 운동하는 아빠를 보는 많은 활동가와 대중들이 마음 속에 불씨를 지펴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광화문 청계광장에서, 청와대 4차선 도로에서, 여의도 국회 앞에서, 종로와 대학로 등 서울시내 곳곳의 거리에서 앞으로 오랫동안 아빠를 보게 될 거라 기대합니다. 힘내십시오.

 

초등학교 2학년 때던가요. 어느 대학 무슨 집회에서 아빠의 딸이란 이유로 단상에 서서 편지를 낭독했던 적이 있습니다. 반강제였었지요. 온통 세상이 검했는데, 공포의 일간지 기자와의 인터뷰까지 마치고서야 제대로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섰던 단상 뒤로 개나리가 불꽃모양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들었던 '그날이 오면'은 노란 개나리빛으로 기억창고에 저장되었는지, 어느 장소 어느 시기에 들어도 반사적으로 코 끝이 찡해집니다.

 

서울에도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더군요. 근 30년만에 처음으로 아빠에게 봄소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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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 : 축복 받은 조건

축복 받은 조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도, 심지어 운동권 내에서도 나의 조건들이 자유를 얻은 바 없었으나, 여성해방 노동해방을 위한 단계의 하나가 '가족'의 해체라면 난 단 한 차례 해체되어본 적도, 관계의 단절을 경험해보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난 오히려 요즘 축복받았다는 생각도 든다.   

 
여전히 미숙하고 감정조절에 능숙치 않은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고, 일찍이 아빠라는 존재는 사회에 환원한 채 '존경하는 전교조 교사'로 관계 진화를 한 지 오래다. 폭력적인 가정환경을 경험했고, 부모는 어린 나와 함께 성장했다.  한 때는 아빠의 라이벌이자 전 직장 동료의 아버지로부터 해체된 가정을 확인받고, 꽤 오래된 기억이지만 전교조 위원장 선거기간 당시에는 연락이 끊긴 지 10년도 더 지난 어느 낯선 전화한통으로 엄마는 별거상태를 인정해야 했지만, 스스럼없이 인정되고 확인하게 되는 것은 난 그들보다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해체는 커녕 난 단 한번도 관계에서 도망쳐본적도 없고, 능동적으로 대처해왔다. 나는 그 관계가 부모자식간일지라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고 난 그렇게 그들에 대한 나의 책임을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  난 어리광부리는 엄마랑 함께 살고 있으며, 아빠가 늙어가는 것을 지켜보지 못할뿐더러 모두에게나 다가올 그의 죽음은 따뜻할 순 있어도 '객사'라는 사회적 인식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안부를 묻고, 가족 행사에 참여를 유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다. 

 

퍽 축복 받은 조건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난 내 마음에 맞는 사람과 공동체를 이루고, 무인도에 혼자 들어가 자유로이 사는 것은 70살 이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난 좀더 세속적일 것이고 현실에 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이다.  혼자 날 때 보다 관계 속에서 공동체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더 높고, 멀리 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뭐든 시작하기 좋을 만큼 난 참 많이 성숙했고, 강해졌음을 느낀다. 더 파괴되고 분열되도록 더 깊이 들어가볼 참이다. 단지 아쉬움이라면, 응석을 부려보지 못한 것인데, 가능하면 이런 것도 미친 척 부려볼 것이다. 나의 응석을 받게된 그 누군가도 어떤 관계 속에서 성숙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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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맺기루저

남얘기에 억매이지 않기로 해놓고선

오늘 또 들리는 말을  막지 못하고 속상해했다.

그래서 오늘 나  참 우울하다.

난 이번주 내내 남자들과의 관계맺기에서 실패했다.

루저..

 

생각해보면 내 주변엔 남성인 지인이 드물다.

심지어 아빠랑도 그냥 그렇고, 남동생과는  담을 쌓고 산지 오래고.

음...학교선배들도 유독 나에게 연락하는 것을 어려워했었지.

 

난 왜 유독 남성들과 소통하기는 물론이거니와 좋은 관계를 맺기가 어려운걸까?

몇몇은 다루기가 어렵다고 하고,

또 누구는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다고 하고,

심지어 친구의 남편에게는 계산적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우울해서 재미삼아 네이버에서 손금을 봤는데, 정말 가지가지다. 내 손엔 남자에게만 있는 손금이 있단다. 한마디로 남자한테만 있어야할 것이 여자한테 있어 박복한 팔자라는 얘기지...쩝..

 

하긴 예전엔 남성포비아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말 다했지.

 

특정 집단과 융화되지 못하는 것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터, 오늘은 내 태도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만 두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난 남성에게 적대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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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중심!으하하

 

난 늘 뉴스의 중심에 있는 것 같다.

지지난이었는지

지난이었는지

휴가때는

속초 낙산에 불났을 때

하필 그곳으로 여행을 갔었드랬는데

이번엔 울릉도-독도

근데

산이불타는것보다

인간들이"독도는우리땅"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당기는 모습이

더욱 무섭긴했다.

뉴스가 날 좀 따라당긴다.

사양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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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의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유

내가 당신의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이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지요.

 

바로 그 점 때문에 당신은 우리의 '짱'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나로하여금 나의 어려움을 말조차 할 수 없게 했습니다. 당신은 상대로 하여금 '어려움'을 털어놓을만큼 넉넉한 품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더더군다나 내가 당신에게 지금의 나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손쳐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알려고 하지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오해했지요. 내가 당신에게 나의 편이 되어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가능치도 않은 기계적 중립을 지키려 애쓰시더군요.

 

전 단지 내 아픔을 말하고 싶었고, 당신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해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그래야 하니까요.

 

당신은 어려울 때, 그것이 그저 당신의 어려움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나의 아픔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셨겠지요.

 

당신은 실패했습니다. 당신은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각 구성원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헤아릴 줄 아는 진정한 '짱'이 되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배를 탈 수 없게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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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버스안에서

나는 첫째, 버스승객들의 인내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두번째, 정치적 표현의 소외계층이라고 생각했던 일부!!! 노령층들(노인인권 비하 아님ㅠ)이 어느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정치적 이해를 주장하고 있는지를 바로 눈 앞에서!, 목도하게 된 것에 대해 또한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소고기파동과 촛불집회에서부터 금강산 피격사건에 이르는 쟁점과 이슈를 넘나드는 열변이 이어졌다.  독도분쟁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었지만, 최근 상황을 지켜볼 때 독도분쟁이 진보와 보수를 가르지 않는 민족적 쟁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자신을 80대 노인이라고 밝힌 그는 광화문에서부터 용인수지 근방의 자신의집까지 귀가길을 이용해 너무나도 분명한, 그렇지만 너무나도 장황한 자신의 주장을 설파했다. 무차별 대중을 향하여.

 

성별과 연령을 초월한 50여 명의 승객들은 담담하고 묵묵하게...........졸았다. 또 이어폰을 조였다.

 

노인은 분명했다.

"공산주의 국가가 될려나 보다" 

"나 젊을 때는 그러지 않았다. 요즘 것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거리로 나와서 정부재산을 때려부순다"

"쇠고기값은 비싸다. 어지간히 먹을라 치면 4,5만원씩 든다. 고작 4.8g 먹는다고 어떻게 되진 않는다"

"총을 쏘길 왜 쏘나"

  

광화문에서 삼성본관을 지나 서울역 정류장에서 승차한 비슷한 나이또래의 한 노인이 귀를 귀울이자 이 노인은 힘이라도 받은 듯 더더욱 열변을 토했다. 곧이어 이 두 노인은 함께 의견을 모아 주장의 힘을 실었다.

 

40여 분 동안 두 노인의 난상토론이 진행되었지만, 버스 승객 중 단 한 사람도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는 이도 없었다. 경청하는 이 없이 무관심해도 보였지만, 소고기 문제에서 만큼은 정치적 발언에 익숙한 듯,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설령 형편없는 주장일지라도.

 

나는 마을의 초입에서 내렸고, 그 두 노인의 대화는 끝을 맺지 않았다. 하차한 나는 안팎의 온도차로 습기가 가득찬 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무성영화와도 같은 버스 안에서 두 노인만이 대조를 이루며 요동치고 있었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다음 행선지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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