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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주의 봄

 

얼마전 주간지에서 수배중인 박래군 위원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박래군 위원장이 검찰에게 보내는 서신도 관심있게 보았으나, 개인적으로 이 인터뷰 기사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아주 개인적인 까닭이라 사료됩니다.  박래군 위원장의 큰 딸이 벌써 고2라네요. 

 

"2월 26일이 2고 큰딸 생일이었고 아이가 생일 선물 대신 아빠와 삼겹살을 같이 먹고 싶어했는데,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고2가 된 큰딸은 아버지 직업을 적어내라는 학교의 주문에 우리 아빠는 MB 악법 저지를 위한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엄마에게는 아빠가 잘못한 게 없는데 판사에게 비굴하게 보이지 말라고 전하라고 했단다." 

 

기자가 인터뷰 전문 앞에 두어단락으로 추려놓은 부분에 이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짧게 나마 기자생활을 경험해봐서 살짝 상상해보았습니다만, 저 였어도 그리 했을 것 같습니다.

 

당차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부럽기도 하고, 한편 고개가 숙여집니다. 먹먹한 마음도 드는군요. '그래 시대가 좋아져서 요즘 친구들은 자기 표현이 좋은 거지' 라고 위로해보지만, 스스로에게도 그다지 설득되지 않기는 합니다.

 

'난 왜 그냥 눈물만 났을까'  초등학생 때는 공부하라는 얘기 안듣는게 좋고 선생님들 이야기 듣는게 좋아 아빠를 곧잘 쫒아다니곤 했는데, 정작 앞에 나가 '아빠에 대해', '나의 감정에 대해', '아빠가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할라치면, 외마디도 못하고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조용히 서있다 자리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 내 맘을 이해라도 하시는지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선생님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매번 그러니깐 다음에는 아예 말해보라고 권하지도 않더군요. 우리 아빠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아버지 직업란엔 그저 '교사' 이외에 쓰지 못했던 죄책감이었을지도, 사람들 앞에 서서 이야기 하는게 쑥쓰러워서 였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남모르는 부채가 있는데요. 참세상에 입사할 무렵 아빠와 동지라 불리는 전교조 선생님들과의 술자리에서.진지하게 "전교조 하는 아빠를 두는 딸의 기분은 어때요? 나도 딸이 있는데, 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요"라고 질문하셨던 선생님에게 맡겨둔 부채입니다. 단 한 차례 고민해본바 없는 그 질문에  "아마 아빠를 많이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라는 믿기지도 못할 대답을 했으니 얼마나 큰 부채겠습니까. 지금도 난감해하는 선생님의 표정이 꼬리표처럼 머리통에 붙어다닙니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 시절까지 아빠와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몸부림의 역사를 부정하는 말이니 저 자신도 믿기 어렵긴 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걸어가는 아빠를 보았습니다. '아빠'라고 두어번 부르면 대체로 '아빠'라 불림 받는 몇 사람은 힐끗 쳐다보기 마련이건만, 다섯번을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 아빠를 보면서 내가 찾지도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집회에 가신다네요. 원래 모여서들 가는데, 아빠 옆에 사람이 없는 걸 보면서 아빠 옆엔 가족이 없었구나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2시간 후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저녁 때 시간 되면 잠깐 보자고 하시길래 선약이 있어 얼버무렸는데, 결국 밤 10시가 다되서 종로 집회 장소로 아빠를 만나러 갔습니다. 별 말 없이 행진을 함께 하고 '밥 먹었냐'는 안부를 전하는 게 전부. 누군가 아빠에게 '대표님'하길래 "대표 직책은 어떤 것이냐", "노동전선 대표", "노동전선은 뭐예요?" "민주노총 좌파 정치조직".. 뭐 이런 대화도 오고 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아빠가 무얼 하고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한때는 전교조 부위원장에서 민주노총 위원장 후보였던 아빠였는데, 지금은 길게 설명할래도 할 게 없습니다.

 

아빠,

참세상 3년, 운동에 대한 회의도 많이 들었는데, 그래도 요즘 아빨 보면 가슴이 뜁니다. 벌써 25년 쯤 되었나요? 죽기 전에 혁명을 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아빠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좀더 일찍 물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듭니다.  저에게는 아빠의 사상을 공유하고 이해하게 되는 과정 자체가 퍽 혁명적이란 생각도 드는데요. 여전히 아빠가 원하는 혁명이란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살아 생전 아빠가 달성하려는 혁명을 결국 보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란 것 압니다. 정치적 자국을 역사에 기록하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거리에서 호흡하며, 열정과 낙관을 가지고 운동하는 아빠를 보는 많은 활동가와 대중들이 마음 속에 불씨를 지펴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광화문 청계광장에서, 청와대 4차선 도로에서, 여의도 국회 앞에서, 종로와 대학로 등 서울시내 곳곳의 거리에서 앞으로 오랫동안 아빠를 보게 될 거라 기대합니다. 힘내십시오.

 

초등학교 2학년 때던가요. 어느 대학 무슨 집회에서 아빠의 딸이란 이유로 단상에 서서 편지를 낭독했던 적이 있습니다. 반강제였었지요. 온통 세상이 검했는데, 공포의 일간지 기자와의 인터뷰까지 마치고서야 제대로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섰던 단상 뒤로 개나리가 불꽃모양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들었던 '그날이 오면'은 노란 개나리빛으로 기억창고에 저장되었는지, 어느 장소 어느 시기에 들어도 반사적으로 코 끝이 찡해집니다.

 

서울에도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더군요. 근 30년만에 처음으로 아빠에게 봄소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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