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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2호(통권10호)] 왜 지금 ‘당 건설 공동전선’인가? - ‘공동행동’의 필요와 당위와 역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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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당 건설 공동전선’인가?
 

 - ‘공동행동’의 필요와 당위와 역사성-

       

                                                    
고민택

 


  노동자혁명당추진모임(이하 노혁추)은 <혁명> 창간호를 통해 노혁추가 현 시점에서 왜 “가칭) 노동자 독자 정당 건설 공동행동”(이하 제안)을 공개적으로 제안하는지 이미 충분히 밝혔다고 생각한다. 또한 맑스코뮤날레 2차 포럼에서 발표한 발제문을 통해서도 그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하고 있다.
  더 길게는 이번 제안은 노혁추 결성에서부터, 특히 총선방침을 제출한 시기부터 밝혀왔던 일련의 정세인식과 그에 따른 정치활동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즉 이번 제안은 객관적으로는 ‘통진당 사태’에 대해 노동자계급이 취해야 할 올바른 정치방침 또는 구체적 전술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며, 노혁추 내적으로는 조직을 결성하면서 스스로 상정한 ‘당 건설 추진체’로서의 임무와 역할을 다하고자 하는 맥락과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번 제안을 처음 접한 동지들은 물론이고 좀 더 폭넓은 이해를 원하는 동지들은 수고스럽더라도 노혁추 블로그(http//blog.jinbo.net/wrp)에 접속하여 <여기에> 란에 올려놓은 글들을 함께 읽어 보기를 당부한다. 그래야만 이번 제안에서 노혁추가 말하고자 하는 정치적 맥락과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좀 더 정확하고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제안에 대한 동의여부는 그런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문제제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는 지금의 제안이 과연 노혁추 결성 초동 주체들이 ‘사노위 정치적 해산 선언’을 주장하고 노혁추를 결성하면서 밝힌 당 건설 노선과 일치하는가, 올바르고 타당한 정세 분석에 기초하고 있는가, 실현 가능성이 있는가? 등에 대한 의문 내지 질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성적 판단을 하기에 앞서 정서적으로 선뜻 내켜하지 않는 반응도 나올 수 있다. 또한 심정도 심정이지만 현장은 현실적으로 그 동안 오랜 시간에 걸쳐 이미 정파적 판단과 분립이 고착되어 있으며 동시에 설령 어떤 형태, 어떤 수준에서든 공동전선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역사적으로 공동전선에 대한 운동 경험과 축적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판단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번 제안이 혁명세력/사회주의세력이 그동안 주장해 온 ‘정치적/혁명적 순수성’ 또는 ‘정치적/혁명적 원칙과 기조’만 의심받게 되고, 의도와 무관하게, 결국 또 다른 의회/개량주의(사민주의) 정당을 강화, 정당화시키는 결과만 낳게 될 것이라고 전망할 수도 있다고 본다. 
  또한 이번 제안이 아무리 대의에 입각하고 있으며, 정세적으로도 절실하기 때문에 객관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 공동전선을 성립시키고 주도할 수 있는 확고한 의지와 최소한의 정치력을 담보하고 있는 정파가 뚜렷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 때문에 공동전선 자체가 아예 성립조차 되지 않을 것이라고 비관적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덧붙여 이와 같은 정황에 대한 판단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 독자 정당 창당’과 ‘혁명정당/사회주의정당 건설’ 문제를 별개의 사안/개념으로 보거나 적어도 단계적으로 접근/사고하면서 지금 노동자계급이 마주하고 있는 일반적 과제는 전 세계 차원에서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 또는 ‘노동자 독자 정당 창당’이 아니라 ‘혁명정당/사회주의정당 건설’이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반대로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또는 ‘진보좌파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조직이나 활동가들의 입장에서는 혁명 또는 사회주의를 말하는 세력과는 서로 어차피 같이 할 생각도, 가능성도 없다는 판단 아래 역시 제안의 실효성에 의문을 품거나 부정적으로 바라 볼 수 있다. 또한 그게 아니라도 매우 현실적으로 혁명세력/사회주의 세력이 소수라는 점을 이유로 그들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노동자 독자 정당’의 정체성을 아예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내지 ‘진보좌파정당’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구체화 할 것인가‘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자 할 수 있다.
  또한 민주노조운동에 기반하고 있는 활동가층에서도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어떤 당이든 간에 지금 과연 ‘노동자 독자 정당 창당’을 말하거나 추진할 수 있는 대중적 동력과 기반이 있는가, 이제까지의 역사적 경과와 경험으로 볼 때 정파들에게 당 건설을 추동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금 당 문제보다는 투쟁조직화나 대선 대응이 더 시급한 문제 아닌가?(우리의 제안은 이 문제를 중요하게 포함하고 있지만) 등의 질문이나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이렇다고 할 때 ‘제안서’만으로는 제안이 갖는 정치적 맥락과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제안이 갖는 정치적 맥락과 의미에 대해 좀 더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설득을 하고자 하는 노력과 시도이다. 그러나 손바닥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듯이 우리가 우리 바깥의 생각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 소통과 논쟁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우리도 미처 보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한 새로운 문제제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한다.
  다만 한 가지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제안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출발지점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출구, 즉 최종 결론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 물론 우리로서는 우리의 의도와 목적을 분명히 갖고 있다. 공동전선을 함께 한다면 어느 누구라도 당연히 그래야 하며 그럴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더라도 이는 동상이몽이나 오월동주와는 다르다.
  그 무엇보다 지금은 각자 의도나 생존전략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도 그 이전에 전체 노동자계급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 즉 “자본가 정당과 단절! 야권연대 반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복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속에서 각자 의도나 생존전략만을 앞세운다면 너나 할 것 없이 자멸 내지 고사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한 태도는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무능/편협/오만한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대중이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오히려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될 뿐이다. 이것이 현재 엄존하는 객관적/대중적 압력이다.
  물론 대중들이 아직은 이를 직접 요구하거나 행동으로 보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의 책임도 의무도 아니다. 대중이 직접 그런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객관적/대중적 압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파나 활동가라면 당연히 스스로 인지하고 느껴야만 하는 압력이다. 대중을 핑계 삼아 이를 외면하는 것은 스스로 꽁무니주의 내지 대기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니다.  
  다음으로 제안이 특정 개별 사안(현안)에 대한 공동전선을 넘어 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능한 설정/전술인가. 이점은 차치하더라도 이를 통해 단일한 정치적 결론을 낸다는 것은 객관적/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 분명한데 결과적으로 대중에게 정치적 무책임을 드러내고 더 큰 실망을 안겨 주게 되지 않겠는가. 공동전선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출발부터 매 사안마다 부딪쳐야 하는 숱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정치력이 존재하는가? 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공동전선의 기승전결이 도대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가 머리 속에서 그려지지 않을 수 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누구도 여기에 대한 답을 미리 갖고 있을 수 없다. 지금은 오직 원리와 원칙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구체적 과정은 참여자 사이에서의 논의와 논쟁을 통해서만 계속해서 만들어 갈 수 있다. 이 또한 대중들에게 정치력을 시험받고 검증받는 중요한 정치적 과정이다.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한 과정들이 펼쳐질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 우여곡절, 좌충우돌이 있겠지만 이를 풀어나가는 것 역시 대중적 차원에서 새로운 경험을 축적하고 지도력을 검증받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필요조건

 

  지금 정세는 큰 틀에서는(객관적으로는), 즉 노동자계급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통진당 사태’로 인해 최종 파산에 이른 노동자정치세력화와 관련하여 ‘새로운 노동자당’을 건설할 필요성이 대중적 차원에서까지 전면적으로 등장한 상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그러한 정세 속에서 크게 두 가지 쟁점이 놓여 있다.
 
  하나는 경로, 즉 전술 문제다. 여기서의 핵심은 통진당 및 야권연대(민주대연합)를 노동자계급과 철저히 분리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전선을 대중적으로 힘 있게 형성할 때만이 비로소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 문제가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지 못하면 주어는 계속해서 통진당이 될 수밖에 없다. 만약 ‘통진당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통진당과 야권연대를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문제가 훨씬 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통진당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분리시키지 못하면 그 때도 마찬가지다.
  혁명세력/사회주의세력의 일차적 과제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혁명세력/사회주의세력만의 힘으로 그를 현실화하기 어렵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이 형성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다. 그러나 필요조건을 건너뛰고는, 즉 각개약진 방식으로는 성공할 길이 없다. 지금으로서는 ‘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일차적 관건이다. 그에 따른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 곧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하나는 어떤 당을 건설할 것인가의 문제다. 여기서의(새로운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 안에서의) 핵심 쟁점은 또 다른 의회/개량주의 정당인가, 혁명/사회주의정당인가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이 점이 바로 지난 민주노동당 창당 시절, 그 뒤의 민주노동당 분당 시기, ‘진보대연합/민주대연합’이 주되게 거론됐던 당시에 비해 객관적, 결정적으로 달라진 지형이다. 대중적 공간에서 공공연하게 공식적으로 혁명/사회주의정당 건설을 주장할 수 있는, 대중적으로 검증받을 수 있는 정세가 객관적으로 도래한 것이다.
  물론 결과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또 다른 의회/개량주의 정당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될지 혁명/사회주의세력의 대중적 진출을 여는 계기로 작용할지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숙명론(패배주의)적 태도를 먼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나쁜 경우라도 그것을 하지 못했을 경우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대중적, 정치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으며 남길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강조해서 말하지만 ‘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 전술’은 노혁추의 당 건설 노선의 변경(폐기)은커녕 그것의 구체화/현실화이다. 즉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다. 우리의 전술은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노혁추의 입장에서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냥 한 번 해보자는 차원이나 임기응변이 아니다.

 

  노혁추의 당 건설은 노동자혁명당을 건설하는 노선이다. 혁명적 강령의 기초 위에서 당을 건설하는 노선이다. 노동자운동의 현 개량주의 지도력에 맞서 혁명적 지도력을 세우는 것을 통해 당을 건설하는 노선이다. 그 때문에 정세 대응에서 기권하지 않고 전국전선을 수립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서 계급투쟁 지도력을 세우고자 투쟁하는 당 건설 노선이다.
정세와 무관하게 중장기적으로 우리 조직의 외연을 확장하여 당 건설 토대를 구축하겠다는, 전국전선보다는 내 영역에서 쪽수를 늘리고 토대를 차분히 구축해서 당을 건설하겠다는 식의 대기주의 · 종파주의에 반대하는 당 건설 노선이다.

 

 

 
이유

 

  그러나 현실적으로 공동전선이 성립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무엇보다 노혁추 단독으로는 공동전선을 이끌어 낼 만큼의 정치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이것이 곧 공동전선을 제안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제안을 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
 
  첫째, 제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도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결국 전체 노동자계급이 당면한 과제를 중심으로 전술을 사고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조건을 우선시 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바로 ‘당 건설 추진체’를 자임했던 애초의 자신의 임무와 역할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다. 노혁추를 하나의 써클로 후퇴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가능성이 낮다는 것과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지금은 여전히 통진당과 야권연대를 대체할 수 있는 그 어떤 새로운 정치력도 형성되어 있지 않다. 아니 끝내 누구도 절대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함으로써 통진당과 야권연대를 다시 부활시킬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반대로 말하면 누구에게나 아직 기회는 열려 있다. 즉 세력은 대단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지금 누구도 자신의 세력만으로 전체를 주도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은 없다.

 

  셋째, 지금 정세는 역동적/유동적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하루하루 급변하고 있다. 지배계급조차도 자고나면 입장과 태도가 달라질 만큼 예측 불허의 정세가 이어지고 있다. 혁명세력이 개입할 정치적 공간은 널려 있다. 교과서적 추상이 아니라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현안을 매개로 혁명적 원칙과 전술을 제시할 수 있는 쟁점들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통진당만이 아니라 그 바깥의 의회/개량주의 세력의 취약성과 무능함도 함께 드러나고 있다. 그들로서도 어떻든 응답을 (하게) 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쟁점을 이어갈 수 있다.

 

  넷째, 설령 우리의 제안이 어려움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안이 틀려서가 아니라, 즉 대의에 입각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파적 속사정이 달라서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적어도 대의를 거스르지 않고자 하는 세력이라면, 더 정확하게는 객관적으로 대의를 앞서 제출해야 할 위치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세력이라면 누가 제안을 했든 간에 관계없이 진지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그 속에서 얼마든지 스스로 판을 열 수도 있다. 노혁추의 입장에서는 본래의 취지만 달라지지 않는다면 거기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공동전선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남을 수 있는데 그것은 어쨌든 공동전선이 결국 의회/개량주의(사민주의)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이 더 높다는 판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먼저 이에 대해 말하기 전에 두 가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공동전선 전술을 제안하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그 공동전선 속에서 또는 공동전선을 통해 혁명/사회주의정당 건설 투쟁을 대중적으로 펼치기 위함이다. 우리로서는 최종(결과)적으로 공동전선 전체가 또는 공동전선의 보다 큰 부분이 혁명/사회주의정당으로 귀결될 수 있도록 최대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미리부터 불가능하다거나 어렵다고 스스로 선을 그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앞서 말했듯이 이 공동전선은 의회/개량주의(사민주의) 정당과 혁명/사회주의정당 사이의 정치투쟁의 장(공간)이 될 것이란 것만은 분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공동전선의 성격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이 공동전선이야말로 통진당과 야권연대를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며 가장 유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노동자 독자 정당 창당’ 과제와 ‘혁명/사회주의정당’ 건설 문제가 각각 병렬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어쨌든 이 공동전선이 성립된다면 그것은 바로 전자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공동전선은 계급협조 야권연대에 대한 반대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인정하는 이외의 그 어떤 전제조건도 필요치 않으며 달아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이 공동전선이 혁명/사회주의 조직 사이의 공동전선이 아니라 의회/개량주의 세력과 함께하는 공동전선이라는 점 외에도 또 다른 현실로 혁명/사회주의 세력이 이 공동전선에 적극적으로 임할 가능성이 지금의 단면만 놓고 보면 높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이와 연동하여 의회/개량주의 세력에 비판적인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현장활동가’들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혁명/사회주의 조직이나 ‘현장활동가’들의 이러한 태도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하다는 것은 일단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바로 이 현실을 바꾸지 않고는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사실상 자신이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할 수 없다. 혁명/사회주의 세력마저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활동에 나서지 않고 굴복한다면 결코 의회/개량주의 세력으로부터 지도력을 빼앗아 올 수 없다. 이것이 백배 천 배나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사실/현실이다. 즉 이 공동전선은 바로 의회/개량주의 세력에게 비판적인 노동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정치 공간을 제공하고 이 속에서 주체로 세우기 위한 운동이나 다름없다.

 

 

역사성

 

  이제 문제를 좀 더 근본적으로 제기해 보자. 지금의 현실은 그저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냥 지금과 같은 상태/결과에 도달한 것이 결코 아니다. 지금의 현실은 지난 운동의 역사적/필연적 산물/결과이다. 단지 한국만의 상황도 아니다. 세계적인 현상이다.
 
  볼세비키 운동 이후로 혁명세력은 계속해서 실패해 왔다. 러시아 혁명과 코민테른 운동 이후로 혁명적 운동의 전통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크게 보아 그 후의 운동은 사민주의(개량주의 정당/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의 득세, 스탈린주의 인민전선(자본가정당과의 연합으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전망 제거)의 잔존, 혁명/사회주의 세력이 보인 소정파(써클), 종파, 대기주의(노동자계급에 대한 지도력 상실)로의 전락에 의해 얼룩졌다. 아직도 이 현실은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국은 온전한 의미의 혁명세력이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조차 없다. 최고로 잘 나갈 때조차 현장조직의 ‘배후 세력’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출범 이후에는 굴욕적이게도 민주노총/민주노동당의 투쟁부대 역할을 넘어서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사회주의 정파는 계속해서 후퇴를 거듭했으며 현재는 지리멸렬 한 채로 생존하기에도 허덕이고 있다. 2천년대 중반 이후에나 그나마 ‘사회주의’를 말하기 시작했으며, 당 건설, 강령 건설도 최근에서야 시작한 단계일 뿐이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이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조직하지 못한 결과다. 그 책임의 거의 대부분은 혁명/사회주의 세력 자신에게 있다. 대중투쟁이 미약했던 탓이 아니다. 대중들의 투쟁은 늘 있어왔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이 대중에게 빚졌으면 빚졌지 대중은 혁명/사회주의 세력을 볼 기회조차 제대로 대면한 적이 별로 없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대중적 차원에서 민주노총과 진보정당, 즉 개량주의 지도부와의 전면적인 정치투쟁을 펼치지 못했다. 그들 지도부와의 지도력 다툼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지도력 다툼 자체를 대중적 공간에서 벌이지를 못했다. 그와 같은 개념 자체가 없었다. 단지 ‘추상적/원칙적 비판’에 머물렀을 뿐이다. 따라서 과거는 물론 현재도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대중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대중을 향한 전국적 차원의 직접정치를 제대로 시도한 바가 없다. 결과적으로 의회/개량주의 세력에 대당할 수 있는 대안 세력(지도력)으로서의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대중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부끄럽지만 ‘골방 좌파’라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에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당 건설과 강령 건설의 문제를 계속해서 지연, 유보시켜왔다. 개량주의 지도부와의 전면적인 정치투쟁이나 전국적 차원에서의 대중을 향한 직접정치를 하지 않는데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때문이며 대중의 압력을 받지도 않은 때문이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당면 시공간을 구체적 물질운동이 형성되고 펼쳐지는, 따라서 대중의 의식과 행동에 매일매일 시시각각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계급투쟁의 장으로 대하지 않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대해왔다. 너무 먼 과거의 역사만을 말하거나 반대로 너무 먼 미래만을 말할 뿐이었다. 사회주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면 정세에 대해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전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기서의 전술이란 전략의 하위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개별 투쟁에 대한 즉자적인 대응 방안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의 전술이란 무엇보다 ‘전국적인 정치전술’을 일컫는 것이다. ‘강령/전술/조직’의 통일 차원에서의 전술을 말하는 것이다. 이 차원의 전술이야말로 노동자계급 정치의 핵심 요체다. 노동자계급을 이러한 전술을 통해 단련하고 훈련/축적시키지 않으면, 혁명/사회주의 세력 스스로 그를 통해 대중적으로 검증받지 못하면 노동자계급 정치, 혁명정치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얘기를 이어가 보자.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공동전선에 대해 위와 같은 우려가 나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지난 운동이 낳은 유산이며 아직 그 유산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고리를 끊지 않고는 혁명운동은 진전은 고사하고 지금보다 훨씬 더 후퇴할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혁명/사회주의 세력이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이 존재해야 할 이유도, 임무와 역할도 거기에 있다. 이것은 강령을 건설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아니 당과 강령을 건설하는데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불가결한 경로다.
  공동전선이 목적하는 바의 대의와 그 필요성(중요성)을 먼저 사고하지 않고 왜 ‘정치공학적’, ‘종파적’ 사고를 앞세우는가? 두 가지만 말하겠다. 하나는 공동전선이 의회/개량주의 정당을 강화시켜 줄 가능성보다는 공동전선을 하지 않았을 경우가 오히려 더 의회/개량주의 정당을 강화시켜 줄 가능성이 더 높다. 공동전선을 하든, 하지 않든 의회/개량주의 정당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게 되어 있다. 이들을 공동전선으로 불러들여 그 속에서 정치투쟁을 벌이지 못한다면 그들은 오히려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노동자계급을 또 다시 맘껏 휘두를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스스로의 정치적 긴장도, 대중으로부터의 정치적 강제도 훨씬 덜 받을 것이기 때문에 ‘준비와 태세’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주저한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자신이 정치투쟁을 벌일 준비와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둘째는 대중의 변화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는 것이다. 대중을 고정된 상태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혁명을 말할 수 있는가? 위기가 혁명을 저절로 가져다주지 않는다. 혁명이 단지 의식의 산물일 수 없지만 의식적 개입 없이는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혁명적 지도력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기다린다고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정치투쟁의 결과로써만 쟁취할 수 있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이라면 조합/현장 활동가들의 뒷꽁무니를 추수하며 아무 정치적 책임도 따르지 않는 배후정치로 도망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모처럼 새롭게 일고 있는 조합/현장 활동가들의 움직임을 정치적으로 상승/진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왜곡/후퇴시키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현 시기 노동자계급의 당 건설을 주장하는 정치조직이라면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책임 있게 자신의 계획과 전술을 계급 앞에 제출하고 검증하는 실천을 조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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