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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4] 통진당 사태를 계기로 등장한 주요 쟁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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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진당 사태를 계기로 등장한 주요 쟁점에 대하여

 

 

고민택

 

 

 

  통진당 사태가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보수우익세력의 정치적 의도와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전에 통진당 내 당권파와 신당권파가 벌이고 있는 사생결단 식의 이전투구가 그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어우러짐으로부터 발생하고 있는 쟁점들이 마구 뒤섞여 노동자계급에게도 일정한 혼란과 혼선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진당 ‘진상조사위원회’가 밝힌 ‘총체적 부실, 부정 선거’를 둘러싼 통진당 내부의 ‘진실 게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당권파와 신당권파는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일련의 행위들이 지금 노동자계급 전체를 수렁으로 빠뜨리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염원했던, 지금도 염원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뜻을 짓밟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뒤돌아보고 있지 않다. 이것은 그들이 단순히 자세가 잘못됐거나 정치적으로 미숙한 것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가 취하고 있는 의회/개량주의 노선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 터져 나온 것에 불과하다. 즉 이미 곪아 있던 것이 터진 것이며, 가까운 장래에 불거질 문제가 앞당겨 등장한 것뿐이다.
  그로 인해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만큼이나 수많은 쟁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동안 밖에서는 대강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그들 자신들의 입을 통해, 심지어 어떤 것은 지배계급의 보도를 통해 속속들이 들춰지고 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누가 실세라는 보도를 접해야 하는 노동자계급의 심정은 참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코 흥미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지배계급이 의도하는 것이자, 통진당 내 당권파와 신당권파가 노동자계급의 분노와 비판을 비껴가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 노동자계급에게는 ‘진실 게임’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진실은 이미 충분히 밝혀졌다. 이 진실은 통진당이 더는 노동자계급 내에서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를 몇 가지 주요 쟁점을 중심으로 밝히고자 한다.   

  
    
‘민주주의’

 

  지금 보수세력은 통진당만이 아니라 전체 피지배계급을 대상으로 민주주의를 앞세워 부르주아 정치 체제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라는 사상 공세를 전방위적으로 펼치고 있다. 지금 벌이고 있는 이데올로기 공세는 어느 면에서는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사건을 매개로 한 공세보다도 훨씬 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천안함이나 연평도 사건 당시에는 이명박 정권이 아무리 위세를 떨면서 공안정국을 조성했어도 그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 사건 직후에 치러진 선거 결과를 보더라도 효과를 본 게 별로 없었다. 현장노동자들에게 정치적 위축이나 냉소를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실관계야 어찌됐든 그것들은 반MB 투쟁의 한 요소가 되기조차 했다.

 

  그러나 지금 보수세력이 통진당을 향해 벌이는 이데올로기, 사상 공세는 간단히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한 위력을 떨치고 있다. 그 이유는 보수세력의 공세가 진공 속에서 교과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어이없게도 통진당이 제공하고 있는 ‘부실, 부정’ 선거, ‘민주적 절차 무시’, ‘폭력사태’, ‘당권파와 비당권파가 벌이는 사생결단식 이전투구’ 등과 같은 눈앞에서 생생히 벌어지고 있는 구체적 정황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보수세력이 ‘도덕성’, ‘정당성’, ‘국민의 눈높이’, ‘상식’ 등과 같은 관념들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들이대며 마음껏 공세의 무기로 동원해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 같은 관념들은 오히려 이전에는 ‘진보진영’이 보수세력을 향해 투쟁할 때 취한 ‘진보진영’의 무기 역할을 했던 것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절대로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도덕적’ 공세를 ‘진보진영’이 당하는 형국이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공세가 단지 보수세력에 의해서만 가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대체적으로 보수세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과 태도를 취했던 ‘광의의 진보진영’에 속했던 자유주의 인사(이데올로그)들은 물론 직접적인 ‘진보진영’ 내의 논객들까지 공세에 가세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당권파와 비당권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전투구, 사생결단식의 투쟁이 노선투쟁이 아니라 당의 주도권 장악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관계로 자유주의 인사(이데올로그)들이 개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저들이 실은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나 당파성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아니 그것들을 오히려 부정하거나 나아가 적대시 했던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이 점에서는 저들만이 아니라 통진당 내 당권파나 비당권파 주요 인사들도 한통속이 되어 그래왔다. 그러니 저들의 가세가 전혀 이상하게 비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보수세력의 공세를 포함한 저들의 가세가 노동자계급에게도 적지 않은 공세(부담)로 다가오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 민주주의를 말하는 자들이, 통진당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원인이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가졌던 습성과 관행을 ‘진보진영’이 아직도 버리지 못한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지금 ‘진보진영’은 민주적 진화가 덜 된 집단이라는 취급을 당하고 있다. ‘진보가 민주를 파괴’하고 있다는 주장이 광의의 ‘진보진영’에 속한 저명한 학자의 입에서 버젓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저들의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으며 올바른 분석이나 판단도 아니다. 독재정권 시절에 운동한 모든 세력이나 개인을 그렇게 일반화하는 것은 순전히 그들의 주관적 편견과 왜곡에 불과하다.

 

  실상은 정반대다. 독재정권 시절에 투쟁했던 사람들이야말로 동시대 어느 집단보다도 더욱 더 철저히 민주적 훈련을 쌓아왔다. 지금 통진당(구당권파든, 신당권파든)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태는 독재정권 아래에서 운동했을 당시의 습성과 잔영이 남아서가 아니다. 그 뒤 그들 운동이 노선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즉 피지배계급으로부터 벗어나 지배계급의 한 부분으로 변신하는 속에서 오히려 지배계급의 행태를 쫓고 닮아가면서 생긴 문제다. 아직은 완전한 지배계급의 일원이 되지 못한 불충분함 때문에 미숙한 모습과 행태를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당연히 신당권파가 구당권파에 비해 더 민주적인 것도 아니다. 비록 구당권파가 신당권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얼마나 더 패권적이고 얼마나 더 비민주적이냐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동시에 신당권파가 구당권파를 비판하기 위해 내세우는 기준과 논리가 실은 부르주아들의 논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다. 상황이 바뀌면 신당권파와 구당권파의 위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나아가 아무리 통진당 문제가 지금 심각하다고 해도 기존 보수정당이 더 민주적인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한국에서 아직도 상대적으로 가장 민주적인 집단은 다름 아닌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이 절대적으로는 아무리 관료화되고 비민주적인 요소가 스며있고 그 정도와 속도가 커지고 있다 해도 아직 이 사실까지 달라진 정도는 아니다. 한국의 기존 부르주아 정당, 특히 기업집단 심지어 학교나 종교 집단조차도 어디 노동조합에 비교나 할 수 있는가? 그들 조직의 주류 집단이야말로 썩어도 한 참 썩었다. 그들이 겉으로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절차성이나 민주적 방식이라는 것도 지고지선 한 것을 그들이 추구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미 내부 권력관계에 철저히 물들고 종속된 것으로부터 취할 수밖에 없는 박제화되고 제도화된 죽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본질적 의미에서 가장 민주적이지 않은 모습이다. 특히 어떤 것이 더 민주적이고, 덜 민주적이냐는 문제를 재는 기준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그 잣대가 될 수도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란 본질에서 부르주아 독재(체제)를 일컫는 것일 뿐이다. 대리주의(저들이 지고지선 한 가치로 여기는 대의제 민주주의), 1인 1표에 기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야 말로 노동자계급을 철저히 해체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

 


‘종북(주의)’, ‘주사파’

 

  지금 한창 ‘종북’, ‘주사파’에 대한 공세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고 있다. 기존에는 물론 지금도 이것들은 (극우)보수세력이 국가보안법과 국정원, 검찰, 경찰 등 국가 폭력장치, 기구 등을 앞세워 한국의 좌파민족주의 세력(특히 이른바 NL 주사파)을 탄압하는 데 사용하는 단골 메뉴다. 그러다가 지난 민주노동당 분당시기에 ‘진보정당’ 내부에서도 이 문제가 전면화 되었다. 당시 분당을 주도한 세력이 ‘범NL’을 향해 패권주의와 ‘종북(주의)’를 제기하면서 비로소 운동진영 안에서도 ‘종북(주의)’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여기서 문제를 삼기 시작했다는 의미는 이런 것이다. 이 문제는 그 전에도 운동진영 내에서 운동노선을 둘러싼 주요 쟁점으로 있어왔으며 그에 따른 대립과 투쟁도 줄곧 이어졌다. 이 점은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정치현실 때문에 ‘종북(주의)’ 문제를 수면 위에서, 즉 부르주아 사법 체제 속에서 논쟁하는 것은 불가능했거나 우회(비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가 이러한 금기(?) 내지 암묵적 묵인을 깨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그것은 국가탄압을 인정한다는 적극적 입장에서는 아니다. 국가탄압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비공개’ 차원에서의 논쟁이나 문제제기에 가두지 않겠다는 차원에서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정황이 존재한다.

 

  당시 민주노동당 분당파(노심조, 진보신당)는 그 직전 있었던 대선에서의 참패 원인을 ‘범NL’ 세력의 전횡(패권주의)과 노선(민족주의) 때문으로 바라봤다. 따라서 그를 그대로 두고는 민주노동당이 ‘합법의회주의정당’ 내지 ‘대중적진보정당’으로의 발전을 계속해서 이루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랬음에도 ‘노심조’는 물론 심지어 ‘노심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비판적인 유시민(국참당)까지도 민주노동당과 함께 통진당을 결성했다. 그것도 두 세력을 모두 합해도 한참 소수 세력인 상황에서 단행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부르주아 정치인(정치세력)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들에게 노선은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생존이 노선에 훨씬 앞선다. 통진당 결성시 ‘종북’ 문제는 어렵지 않게(?) 타협을 이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자신들이(‘노심조’, 유시민)이 부르주아 정치에서 차지하는 대중적 인기를 앞세운 것이다. 그들은 이미 부르주아 정치 안에서 유력한 정치인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구당권파의 세력을 역으로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충분히 판단했을 수 있다. ‘경기동부연합’이 지금 정도 일 줄을 절대 몰라서가 아니다. 신당권파도 지금은 사태를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을 속으로는 후회할 게 뻔하다. 겉으로 어떤 명분을 내세운다고 해도 말이다.

 

  통진당 내에서는 ‘종북(주의)’는 이번 사태와 직접적인 관련도 없으며 쟁점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를 일으킨, 적어도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당권파(경기동부연합)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종북(주의)’, ‘주사파’가 전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지배계급이 한편으로는 통진당을 타격함으로써 야권연대를 흔드는 정치적 효과를 거두고자 하는 차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 노동자계급 및 혁명진영을 함께 공격하기 위한 맥락에서 이슈를 만들고 주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연말 대선을 앞두고 ‘진보진영’이 들고 나올, 보수세력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공약과 의제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다. 나아가 민주당이 좌 쪽으로의 이끌리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에서다. 그 뿐이 아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요구, 혁명진영이 제출하는 급진적 주장을 훼손하고 차단하기 위함이다. 신당권파 입장에서는 굳이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일이 시급하다고 해도 보수세력의 일방적 공세를 적극적으로 차단하기는커녕 소극적 차원에서나마 방어조차 하고 있지 않는 것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보수세력의 공세가 무차별적인데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종북(주의)’, ‘주사파’ 문제는 내부적으로 가져가야 하는 노선투쟁 문제다. 결코 지배계급에 의한 일방적 탄압이나 공세를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종북(주의)’를 비판, 부정한다고 해서 국가탄압을 등한시 한다면 그 탄압의 칼날은 결국 노동자계급을 향해 날아올 게 분명하다. ‘종북(주의)’, ‘주사파’ 문제는 오직 노동자계급과 혁명진영의 투쟁과 성장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종북(주의)’는 단지 그것이 잘못된 이데올로기이거나 노선 때문이어서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추상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알다시피 민족주의 세력은, 특히 노동자투쟁에서 언제나 계급타협적인 태도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노동조합 안에서도 계급협조적 자세를 보이면서 노동자에게 오히려 양보와 타협을 이끌어 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투쟁시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전투성 문제에서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일 뿐인 ‘비폭력’을 앞세우고 있다. 가장 결정적으로 정치적 차원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성과 독립성을 부정하고 있다. ‘민주대연합/야권연대’를 전략적으로 추진하는 것도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다. 민족주의 세력이 ‘북’에 대해 갖는 태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정작 이와 같은 중요한 문제를 보지 못하거나 대응할 수 없다. 신당권파가 민족주의를 향해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단지 ‘북’에 대한 그들의 태도일 뿐 그 못지않게 중요한, 아니 직접적, 일상적. 현실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 삼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신당권파도 그 점에서는 민족주의 세력과 다른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내부적으로 가져가야 할 노선투쟁 문제라고 해서 반드시 모든 것을 ‘비공개’적으로 진행해야 할 필요는 없다. 사회주의 혁명세력은 이미 국가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강령과 정치적 입장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활동하고 있으며 투쟁하고 있다. ‘종북(주의)’ 문제에 대해서도 혁명진영은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투쟁해왔다. 단지 그러한 비판과 투쟁이 신당권파처럼 국가탄압 문제를 회피, 부차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지배계급을 옹호하는 결과를 낳는 것을 등한시 하거나 의도하지 않을 뿐이다. 혁명진영이 신당권파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북’에 대한 태도만이 아니라 현실계급투쟁과 정치전략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보이고 있는 계급타협적 태도와 행태를 가차 없이 비판한다는 것이다.

 


‘진성당원제’

 

  구당권파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전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번져 나가자 사태 해결(수습)을 위한 방안으로 ‘당원총투표’를 주장하고 나왔다. 또한 ‘혁신비대위’가 꾸려진 뒤에는 그에 맞서기 위한 차원에서 ‘당원비대위’를 별도로 출범시켰다. 이것들은 모두 ‘진성당원제’에 그 근간을 두고 있으며 그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사실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비례대표’ 선출을 위한 선거에서 ‘당원총투표’ 방식을 채택한 것도 ‘진성당원제’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패권주의 문제도 ‘진성당원제’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범NL’이 다수파로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중에서도 특히 ‘경기동부연합’이 다수파로서의 일반적 지위, 우위를 넘어 패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도 ‘진보진영(정당)’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성당원제’를 앞세운 데 있다. ‘당원의 힘’에 기초한다는 형식이 주는 그 정당성을 통해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구당권파가 당원의 명예 보호와 당원에게 모욕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통진당이 결성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도 ‘진성당원제’라는 공통분모가 작용을 했다. 유시민의 국참당도 ‘진성당원제’를 취하고 있었다. 유시민 자신이 과거 민주당과 결별했던 한 이유도 ‘진성당원제’에 기초한 정당을 만들고자 했던 것도 주요한 한 이유였다. 구당권파가 ‘당원총투표’를 들고 나왔을 때 유시민은 ‘당원총투표’ 그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다만 ‘당원 명부’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기갑 비대위원장이 한 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타협책으로 ‘당원 50%, 국민50%’ 의견 반영 방안을 내비쳤던 것도 구당권파가 주장하는 ‘당원총투표’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기가 어려웠던 데 있다. 물론 이 제안은 양쪽 모두로부터 기각 당해 실현되지 못했다.

 

  보수세력 일부도, 비록 ‘비례대표’ 선출을 위한 투표 과정에서 ‘부실과 부정’이 발생한 것을 강하게 문제 삼으면서도, 아래로부터의 ‘당원총투표’를 통한 ‘비례대표’ 선출 방식 그 자체는, 기존 보수정당들로서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앞선 민주적 제도와 방식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들도 한국의 기존 보수정당들이 당원에 기초하지 않거나 노선에 의하지 않고, 즉 노선에 의해 훈련되고 조직된 당원에 중심을 둔 정치(정당)활동을 하지 않고 일반 국민여론조사에 지나치게 기대거나 의존하는 것은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로 빠지는 것이라고 비판해 온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러면 과연 ‘진보정당’이 취하고 있는 ‘진성당원제’는 위 보수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는 바 정도의 의미를 살리면서 실제로 그렇게 구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그동안 ‘진보정당’은 자신들의 조직원, 즉 ‘진성당원’들을 어떻게 훈련하고 조직했는가? 어떤 과정과 경로를 통해 당원을 모집했는가? 적어도 민주노동당은 노동조합에 기초한, 민주노총 산하 노동자를 중심으로 건설된 당이다. 비록 민주노동당이 의회/개량주의 정당이긴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노동자 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범NL’ 세력이 민주노동당에 대거 입당하면서 당의 성격과 노선은 노동자 당에서 부르주아 노동자 당으로 더욱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그들 세력만의 탓이 결코 아니다. 민주노동당 창당을 앞서 주도했던 이른바 PD 세력들도 ‘범NL’ 세력이 대거 입당하기 전에 이미 민주노동당을 부르주아 노동자 당으로 이끌고 있었다. ‘범NL’이 합류함으로써 그 같은 상황이 더욱 탄력을 받았을 뿐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산하 각급 산별노조 및 대공장, 공공부문 사업장 등의 노조지도부도 거기에 적극 동참했다. 이들은 삼각동맹을 이뤄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당원으로 가입시키면서 그들 당원들을 투쟁과 정치의 주체로 성장, 발전시키지 않고 당비를 내는 물적 토대로만 여겼다. 더 나아가 부르주아 선거 때 표를 찍는 유권자로서만 대하면서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동원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자연스럽게 민주노동당 내 정파들은 오직 당원, 더 정확하게는 자기 정파 숫자 늘이기 경쟁에만 매달렸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지지 방침을 통해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다. 모든 것을 수로 결정짓는 풍토가 완전히 굳어졌다. 이로써 ‘진성당원제’는 당원의 자발적, 능동적 참여와 활동에 기반 한, 즉 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당 활동을 이끌어가는 ‘민주적 제도’로서 기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원들을 정파의 부속물이 되게 하는 ‘괴물’로 변질되었다.

 

  전 세계 모든 의회/개량주의 정당들은 기본적으로 정치(투쟁)와 경제(투쟁)를 분리시켜 경제투쟁은 노동조합이, (제도)정치투쟁은 당이 담당하는 이른바 양날개 전략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노동조합의 물적, 인적 수혈에 의존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상층지도부가 당의 간부로, 의원단으로 진출하는 통로가 형성된다. 노동조합 관료화, 당의 관료화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형성된 관료화는 이제 개별 당원들에게는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굳건한 성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과 당의 관료화가 진행될수록 그에 비례해 당원들은 더욱 비정치화, 탈계급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에 따라 조합주의가 당연히 기승을 부리게 된다. 조합주의가 단지 노동조합이 갖는 한계 그 자체에 의해서 필연적,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구체적, 실질적 과정과 결부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미 비정치화, 탈정치화 된 당원들은 당의 모든 결정을 당 관료들에게 위탁하거나 의존하게 된다. 대리주의가 온존하고 만연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번 ‘비례대표’ 선출을 위한 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부실과 부정’도 그 연장에서 터진 것이다. 그동안 이번과 같은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이것이 ‘경기동부연합’이 말하는 관행이고 ‘진성당원제’다. 앞서 말했듯이 신당권파(특히 지금은 신당권파로 분류되는 ‘범NL’에 속한 나머지 세력)도 그러한 관행을 만드는데 같이 했으며 그 자신들이 바로 그 관행의 수혜자였다. 다만 ‘경기동부연합’이 기존 관행에 비춰도 너무 무리수(황당한 짓거리)를 저지른 것이 화근이 된 것 뿐이다.

 


‘국민정당화’, ‘노동중심성’

 

  통진당 사태가 ‘신/구 당권파’ 사이의 당권 장악을 둘러싼 단순한(?) 권력투쟁에서 최근 들어서는 ‘노선투쟁’으로까지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 같은 조짐도 ‘신/구 당권파’가 각각 권력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노선투쟁’을 끼워 넣고 있는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두 세력 모두 ‘분당’을 각오하거나 주도하려는 의사나 의지가 없어 전면적인 ‘노선투쟁’으로 제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노선투쟁’이 반드시 ‘분당’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특히 현재 통진당 내 ‘신/구 당권파’ 모두는 ‘분당’을 무릅쓴 ‘노선투쟁’을 벌일 정도로 두 세력 사이에 노선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나아가 설령 일부 그런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당’이 각자에게 어떤 유리한 결과를 가져 오리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두 세력 모두 통진당을 국민정당화하는 것을 ‘전략적 관점’에서 사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으며, 노동중심성과 관련해서는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전술적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두 세력 모두 각각의 입장에서 국민정당과 노동중심성을 매개로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이것이 마치 두 세력이 ‘노선투쟁’을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두 세력이 말하는 국민정당화와 노동중심성에 어떤 ‘노선적 차이’가 있는 듯한 착시 현상을 낳고 있다.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통진당 바깥의 상황이다. 우선 가장 최근의 일로 민주노총 중집은 통진당에 대한 ‘조건부 지지철회’를 결정하면서 통진당에게 노동중심성을 회복, 강화할 것을 강하게 주문, 압박한 것을 들 수 있다. 민주노총 중집의 이 같은 태도는 정직하지 않다. 아니 자기배반(모순)적 행위다. 민주노총 자신이 ‘민주대연합/야권연대’를 반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앞장서 추진하고자 탄생한 통진당을 지지하기까지 했다. 야권연대와 노동중심성은 양립할 수 없다. 야권연대는 국민정당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이자 사다리다. 야권연대를 전제로 한 노동중심성이란 노동자계급의 조직적, 정치적 독립성과 독자성을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이번 4. 11 총선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부르주아 정당과 ‘정책협약’을 맺는 데에서 압력행사를 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주도권을 부르주아 정당에게 넘긴(맡긴) 채 유권자 압력집단으로 남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나아가 민주노총이 통진당을 향해 노동중심성을 강조하는 것은 통진당 내 민주노총 지분(자리)을 늘려달라는 요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통진당 당권파가 민주노총 내 ‘국민파’(범NL)를 역으로 비판하고 나올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으로 현재 민주노총 내 ‘비/반통진당’ 계열에 속한 활동가들도 역시 노동중심성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국민파와 같이 의회/개량주의 노선을 택하면서도 서구의 사민주의 정당처럼 노동자계급에 기반 한 수권정당(부르주아 지배정당)을 추구하는 세력들이다. 이들은 이점에서 ‘민주대연합/야권연대’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현실에서 이들은 그 같은 비판이나마 일관되고 끈질기게 하고 있지 않다. 이들 역시 야권연대를 전면, 완전히 부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민주노동당이 이미 본래적 의미의 노동중심성에서 벗어나 충분히 우경화되었던 때에도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지지 방침을 국민파 못지않게 옹호했다. 이들이 지금 통진당에 대한 배타적지지 방침을 문제 삼는 것은 한편으로는 통진당이 국참당과 통합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의회/개량주의 정당을 만들기 위한 때문이며, 이를 위해 노동중심성을 들고 나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노동중심성은 단지 형식적 차원의 조직적 독립성을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현재대로라면 그것으로는 ‘도로민노당’을 넘어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로민노당’ 정도라도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려울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들 또한 이미 역사적으로 민주노총 안에서 노동중심성을 국민파가 말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과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다른 부류는 의회/개량주의 노선에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현장활동가들이다. 이들은 나름으로는 노동중심성에 대한 진정성과 건강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한계는 있다. 이들은 아직 사회주의정당 건설에 주체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사회주의 세력(정파)이 안고 있는 문제와는 별개로 또는 그것을 핑계로 협소한 ‘전투적조합주의’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지 않다. 동시에 노동중심성과 노동자주의를 혼돈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이들 활동가들은 현실에서는 의회/개량주의 세력들보다 정치적으로 뒤쳐진 채 사업장 문제에 갇혀 있다. 의회/개량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중심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국적 차원에서 사회주의정당과 사회주의 강령을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회주의 세력(정파)이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집중을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누구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그럴 때만이 지금 통진당 사태를 계기로 다시 등장한 노동중심성 문제를 올바로 해결할 수 있다. 어쨌든 통진당 바깥의 이런 상황으로 인해 지금 통진당 내부에서 불거지고 있는 노동중심성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라 있다.

 

  다른 하나는 통진당 내 실정이다. 먼저 당권파가 현재 수세에 몰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앞에서 말한 ‘진성당원제’와 연동하여 국민정당화 문제를 새삼 꺼내들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논리와 정황은 이렇다.
 

 

통합진보당은 출범 당시 전통적 진보 노선이 주류였던 민주노동당과, 자유주의 개혁 성향의 국민참여당, 북유럽 사민주의가 다수인 진보신당 탈당그룹이 결합했다. 현재 신당권파로 통칭되는 세력을 보면 유시민 전 대표를 비롯한 참여계와, 과거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하 국민파) 성향으로 분류되는 민주노총 고위관료 출신들이 일련의 '재구성' 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국민파', 즉 민주노총의 관료 출신들은,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자신들의 당내 지분이 크지 않다는 사실에 지속적인 불만을 나타내왔다. 이에 더해 심상정·노회찬 의원 등의 사민주의 정치세력과 '인천연합'으로 대표되는 개량노선이 신당권파에 가세하고 있다. 요컨대 진보정당의 국민정당화를 추진해 온 세력들이 총선 이후 하나의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국민적 여론을 등에 업고 '구 당권파'를 겨누고 나선 것이다. 당의 최고 의사결정의 권한을 '당원'에 두고 있는 진성당원제는, 명망가정치의 확대와 당 고위층의 관료화 경향을 막는 장치였다. 또한 당지도부와 공직 후보들을 국민 여론조사로 뽑게 되면, 진보정당의 정치인들 역시 자연스럽게 여론주도층인 중간층을 수렴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유시민 대표는 지난 10일 전국운영위에서 애국가 제창을 포함한 국민의례를 당 행사에 도입해야 한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문제가 지난 19대 총선에서 당 득표율에 악영향을 미쳤고 "국민과 이념적 장벽이 없이 소통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 근거다.<민중의소리, 문형구 기자 기사 중 발췌 인용>

 

  이 같은 분석이 크게 틀리다고는 보지 않는다. 문제는 위 논리와 정황대로라면 마치 당권파는 국민정당화에 반대하고 있는 것처럼 다가오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거듭 말했듯이 당권파 역시, 아니 당권파야말로 국민정당화의 원조다. ‘진성당원제’(당권파가 말하는 노동중심성)와 ‘국민정당화’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대연합/야권연대’ 노선(전략)이야말로 국민정당으로 가는 가장 강력한 지렛대다. 거기에서 ‘진성당원제’의 역할은 국민정당화를 막는 장치가 아니라 다수파가 당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신당권파도 최근 박원석 당선자를 위원장으로 하는 “통진당 새로나기 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면서 당권파와의 ‘노선투쟁’을 불사하려는 전의를 보이고 있다. 신당권파는 당권파의 대응이 ‘진상조사’ 차원을 넘어 국면을 ‘노선문제’로 전환시키려고 나오자 이에 맞불을 놓을 겸, 이번 기회에 국민정당화의 기틀과 주도권을 자신들이 쥐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정당이라는 것도 누가 주도권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그 경로와 양상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원석 당선자의 말에서 알 수 있는 신당권파의 의중은 다음과 같다.

 

당 공식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문제와 관련, “하나의 문화로 관행으로 정착돼왔던 문제인데 국민들이 불편해하고 또 그로 인해서 통합진보당의 국가관 같은 것이 집단적으로 의심을 받는 상황이라면 그 문제를 바꾸기는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선명한 민생정당으로, 미래지향적 현대정당으로서의 가치 노선을 재정립해야 한다”며 “이 문제는 당내 진보의 가치에 대한 이견과 논란 문제다. 남북관계나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국민의 눈높이에서 당이 변화하는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너무 과거의 관점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 점을 숙고하겠다”, “특위 혁신 방향은 △당내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성찰을 통해 패권주의와 정파주의를 넘어선 혁신적, 민주적 당 운영을 확립 방안 △선명한 민생정당, 다양한 진보의 가치에 조응하는 미래지향적 현대정당을 위한 당의 가치, 비전, 정책노선 재정립 △붕괴된 노동 지지 기반과 노동정치 복구하기 위한 방안 마련 △유연하고 개방적인 대국민 소통능력 제고 등”, “노동계를 비롯해 당의 근간이 되는 대중조직, 시민사회, 전문가 그룹 등 각계각층의 의견그룹을 만나 통합진보당의 진로와 혁신방향에 관한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고 반영할 것”, “당의 혁신에 관해 당원과 국민의 의견을 묻고 듣는 공개토론회를 개최하고, 이 과정에서 진보시즌2 등 진보정당을 다시 살리고자 하는 시민사회의 흐름과도 적극 연계 협력할 것”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신당권파는 당권파에 비해서도 더 노골적으로, 다만 그 각도와 강조점을 달리하면서 국민정당화를 하겠다고 역설하고 있다. 즉 신당권파도 당권파 역시 국민정당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꿰뚫어 보면서 다만 당권파가 보이고 있는 약점(허점)을 파고들어 이 기회에 역시 자신들이 수적으로 열세에 놓인 상황(약점)을 만회 내지 역전시키고자 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당권파가 수세에 몰리면서 노동중심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신당권파는 당권파에 대한 보수세력의 공격과 공세가 이루어지는 정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에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두 세력 모두 자신들의 행위가 노동자계급을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우려하지 않고 있다.     


  이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통진당은 이미 노동자계급의 이해와는 상관이 없는 부르주아 내 한 정당에 불과하다. 사실 이 점은 지난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그 싹을 키워왔다. 적어도 민주노동당 분당 시점에서 정리했어야 할 문제였다. 아니 분당 이후 ‘진보대통합/민주대통합’을 놓고 헛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라도 그랬어야 했다. 아무리 늦어도 야권연대가 기승을 부리고, 통진당이 결성될 때에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결별했어야 마땅한 문제였다. 그랬더라면 통진당 사태가 터져 나왔을 때 지금처럼 지배계급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앞장서 주도적으로 통진당을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지배계급이 감히 지금과 같은 행태를 부리지도 못하게 했을 것이다.
  야권연대에 대당하는 정세, 정치, 대안 구심이 형성되어 있었다면 굳이 민주노총이 ‘조건부 철회’나 ‘제2 정치세력화’를 말하지 않더라도 벌써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이 힘차게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정리되고 있지 않다. 그 핵심적 이유는 통진당 이후에 대한 정치적 대안이 불투명하고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여전히 통진당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면서 단호하게 결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진당 바깥의, 진보신당은 물론이고 의회/개량주의 노선에 비판적인 활동가를 포함해 사회주의 세력의 행동이 굼뜨고 있기 때문이다. 야권연대에 대당할 수 있는, 통진당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을 광범위하게, 본격적으로, 빠른 시간 안에 출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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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4]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제 2막을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로 열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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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제 2막을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로 열어 나가자!

 

 

임천용

 

 


  민노당을 통해 10년 넘게 진행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파산이 눈앞에서 분명해지고 있다. 민주노총의 결의로 정치세력화가 시작되었지만, 민주노총이 만든 정당이 노동자계급을 배신하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제1막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 계급을 배신할 수밖에 없는 개량주의, 의회주의 정당의 불가피한 경로다.

 

  지난해 민노당이 국참당, 노심조와 합당하고 총선 비례후보 선출과정에서 부정선거 의혹이 더해져서 몰락 사태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통진당의 부르주아 정당화가 이번 사태에 의해 가속화되지 않았다면, 대선에서 야권연대가 이어지고 그래서 ‘만약’ 민주당과 공동정부를 구성한다면 거기에서 더 큰 파산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 통진당 사태의 마무리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만약’의 영역은 가까운 미래의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개량주의, 사민주의 정당들이 국가권력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노동자계급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의회주의 정당들이 나아가는 기본 발전경로의 종착점이다.
의회주의에 결박된 통진당, 진보신당은 자본주의 체제의 개선을 목표로 자본가계급 내 한 분파와의 연대를 추구해왔다. 이들 정당들이 노동자 투쟁에서 권고안이라는 형태로 자본가계급과 타협을 권유하는 것은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한 이상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민주당과 함께하는 야권연대를 옹호하고 실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자들을 자본가 정당의 2중대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이 자본가 정당과 단절하는 것이야말로 사활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요즘 통진당 사태로부터 “진보정당”의 몰락을 설명할 때, 패권주의니 비민주주적의니 하는 형식들을 가지고 자본주의 체제의 보수, 수선에 집착하는 의회주의 정당의 본질을 숨겨버린다면 이번 사태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단지 또 다른 의회주의 “진보정당”을 만들자는 공염불을 외치는 것뿐이다. 그래서 오래되기는 했지만 민주노총을 매개로 시작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고 사회주의혁명정당 건설운동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적 정치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개량주의 정치세력화의 시작 속에서 이미 노동자계급 배신의 씨앗이 발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통진당 사태는 선거를 통한 집권이라는 개량주의의 꽃이 피기도 전에 몰락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선언과 국민승리 21 시기

 

  김영삼 정권 당시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이 날치기로 통과시킨 근로자파견제,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등의 노동악법에 맞선 민주노총의 96-97년 총파업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추동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노동자 국회의원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노동자 정치의 진면목이었던 무기한 총파업과 거리에서의 투쟁은 96-97년 총파업 당시 수요파업으로 사그라졌고, 노동악법들은 98년에 다시 살아나기에 이르렀다. 총파업을 통한 노동자 정치가 왜곡되고 파괴되었는데 오히려 이것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역설적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경제투쟁은 노동조합이, 정치투쟁은 정당이 담당한다는 의회주의 양날개론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될 수가 없다.

 

  97년 2월 민주노총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98년 지방선거, 98-99년 당건설, 2000년 국회의원 선거 참여 등의 일정들을 구체화했다. 그리고 민주노총, 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 등이 주축이 되어 민노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민승리 21을 결성하여 권영길을 97년 대선후보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전국연합은 대선 한 달을 남겨놓고 정권교체, 민주정부 수립을 구실로 사실상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보정치연합에는 이미 혁명을 공개적으로 포기한 노회찬 등이 있었는데, 이는 진보정당운동의 주요한 이론적 대변자들이었고 선구자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진보정당” 운동으로부터도 너무 멀리 나아가버렸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론을 주창하던 세력들과 심상정 등의 중앙파에 의해 노동운동을 계급협조주의로 이끌어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98년 2월에는 정리해고 도입을 노사정 합의로 진행했다. 당시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물리적 투쟁이 아닌 대타협이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했다고 고백했다. 노사협조주의로 점철된 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정치세력화 운동에 반대해서 전투파들은 97년 전국현장조직 대표자회의를 만들어서 전국적으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갔지만 역부족이었다. 전투파들은 노동조합 장악에도 불구하고 국민파, 중앙파와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더해져 세력이 위축되면서 2004년에 해소했다. 노동자운동이 정치운동으로 발전한 상황에서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전투적 노동운동 진영은 스스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사회주의 세력들은 소규모 써클로 머물러 있었고 전투적 노동자 운동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끌 수 없었다.

 

  이처럼 국민승리 21이라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첫 단추는 개량주의자들, 김대중 “비판적” 지지론자들, 노사협조주의를 주창한 노동조합 관료들이 끼웠다. 이렇게 시작된 정치세력화의 15년 결과가 지금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정치세력화의 주도자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이 올곧게 표출될 수 있는 방법은 그러한 당의 노동계급적 성격을 보다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민주정부” 10년의 시기에 노동운동의 전투적 부위는 거의 전멸하였고, 노사협조주의적인 노조관료들에 의해 현장은 장악되어 가고 있었다. 현장이 망가지는 것과 동시에 “진보정당”의 노동자 당원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성격은 더욱더 우향우되어 갔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심지어 민노당을 통한 정치운동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정당에 가입하는 편을 택하기도 했다. 2012년 3월 5일에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민주노총 조합원 1000명의 입당원서와 함께 1만5천명의 지지서명을 가지고 민주당에 입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민주노동당의 결성과 분당

 

  98년 6·4 지방선거에서 국민승리 21은 기초단체장 3명, 광역의원 2명, 기초의원 17명을 당선시킴으로써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민노당을 창당하는 바탕이 되었다. 선거에서 비판적 지지만 하면 되었던 민족주의 세력들, 1국 1당을 원칙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들은 2002년을 경과하면서 “전술적으로” 민노당에 대거 입당하였다. 이로써 언론에 오르내리는 방식으로 지구당 장악과 당권 장악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민주노총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내내 정리해고제, 비정규직법, 공기업 구조조정, 노동탄압 공격을 당했다. 이에 맞서 투쟁을 전개한 한국통신 비정규직, 발전, 두산중공업, 한진중공업, 세원테크 등 수많은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해고를 당하거나 분신으로 항거해야만 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이야기는 이명박 정부 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민주정부”때 시작되었다.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의 심화, 노동조건의 악화는 노동조합 조직률을 떨어뜨렸고 악순환은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총선에서 민노당은 10석을 차지하였다. 노무현 정권에 맞서 투쟁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열망이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민노당은 열우당의 2중대 역할로 한정함으로써 2007년 대선에서 창조한국당보다 못한 5위를 차지함으로써 패배하고 이듬해 총선에서 분당이라는 변수가 작용하지만 의석수가 5석으로 줄어들게 된다. (2004년에 비해 2012년 총선에서의 13석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과의 연합으로 팔아버린 대가로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민노당이 열우당이나 민주당의 2중대가 된 것이 선거 패배의 원인이다. 특히 200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의 70만 표(3%)는 이명박의 압도적인 승리 예측 속에 나왔기 때문에 2002년 노무현과 이회창의 박빙 때 나왔던 95만 표에 비해 훨씬 적은 득표율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민노당 내에서는 당 대표인 심상정과 당을 실제 장악하고 있는 민족주의 세력 사이의 논쟁이 진행되었다. 특히 민노당 사무부총장이 핵심당직자와 당원명부를 북한에 넘겨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심상정 대표를 위시한 세력들은 종북 노선 청산을 주장하면서 2008년 2월 민노당 당대회에서 “일심회 관계자 제명 안건”을 상정했으나 투표에 의해 상정 자체가 무산되었다. 이로써 민노당 일부는 분당해서 진보신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종북 노선 청산 요구는 사실상 민노당을 탈당하기 위한 노회찬, 심상정 등 핵심 인사들의 선동 구호였다. 이 요구 때문에 노심조가 지난해 말 진보신당 탈당할 때, 당 유지를 원하는 진보신당 당원들로부터 민노당이 종북 문제 해결되지 않았는데 다시 투항한다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의 “진보정당”들

 

  민노당을 통한 정치세력화가 진행될수록 노동자 투쟁에 대해 상급노조는 투쟁의 주체가 아니라 중재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2000년대 내내 그랬다. 특히 투쟁사업장들은 노사정위원회 입성을 위한 방해꾼으로 여겨졌다. 2005년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에는 “과격한 투쟁은 비판만 받고 쟁취한 것이 없다”며 노사정위원회 복귀 시도를 지속적으로 진행했고 이에 맞선 전투적 노동자들이 단상점거투쟁을 전개하면서 가까스로 막아냈다. 이러한 노동조합 운동의 노골적인 노사, 노정 타협주의 흐름 속에서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7년 4월에 금속노조 관료들이 3년째 진행되고 있던 하이닉스 비정규직 투쟁을 지속적으로 조직하는 대신 노동조합 깃발을 내리면서 보상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합의에 대해 반대한 동지들이 대중적인 반대 흐름을 조직해 나가기도 했었다.

 

  지금의 장기투쟁사업장들이 노동조합으로부터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이유는 자본의 힘이 노동계급을 완전히 압도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중재 같은 것조차도 예외적인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 자신의 힘을 동원할 생각조차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 내내 진행되었던 운동의 우경화 흐름은 이명박 정권 들어와서 더욱 더 악화되었다. 상급노조뿐만 아니라 “진보정당”들은 노동과 자본의 투쟁에 있어서 독보적인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기에 이르렀다. KEC 공장점거 파업과 현대차 비정규직 공장점거 파업 해제를 위한 중재를 진행함으로써 파업을 최종적으로 파괴하는 역할을 맡았다. 공장점거를 푸는 순간 자본측의 성실교섭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징계와 해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희망버스 때 한진 중공업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국회 환노위 권고안은 대중적 투쟁을 파괴하는 데 교과서적 모범을 보여주었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더 이상 끌기 싫어하는 투쟁을 정치권에서 권고의 형태로 정리시켜 줌으로써 투쟁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진보정당” 정치인들은 정치적 해결 운운하며 성과로 챙긴다. 이명박 정권 내내 노동조합과 정당의 분업체계가 노동자 투쟁을 파괴하기 위해 작동했다.

 

  반한나라당, 반이명박을 위한 야권연대는 야당들의 이러한 공동의 행동들로부터 무르익었다. 노동자 집회에 공공연히 참여해서 발언하는 민주당이 이제 이상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민주당이 노동계급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자본가 정당이 아니라 더 나쁜 자본가 정당에 비해서는 친구라는 인식이 민주노총과 “진보정당”들에 의해 심어지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을 사실상 민주당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 이명박 정권에서 진행된 “진보정당”들의 야권여대의 최종적 결말이다. 그래서 지난해 내내 전개된 민노당, 국참당, 진보신당 사이에서 진행된 통합의 방식과 대상에 대한 논쟁은 각 당의 대의원대회 결정을 무시하면서까지 진행되었지만 본질적으로 야권연대를 둘러싼 각 세력 사이의 이전투구에 불과했다. 정치적 내용과 입장을 가진 투쟁이었다면 명료하게 진행되었을 것이지만, 명망가들 중심의 이합집산에 머물렀기 때문에 매우 소란스럽게 진행된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국참당에 대한 태도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본질적이지 않았다.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조차도 반대하는 흉내만 내면서 마지못해 따라가는 형식을 취했다. 민노당이 노동자들과 적대전선을 형성했던 열우당 후신인 국참당과 함께할 만큼 노동계급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할 따름이었다. 통합진보당은 노심조 세력과 민노당, 국참당이 함께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진보신당은 탈당한 노심조 대신에 총선을 앞두고 사회당과 함께 했지만 4.11총선 결과 국회의원 한 석도 얻을 수 없었다.

 

 

통진당 사태 - 의회주의 진보정당 운동의 파산

 

  통진당 사태의 핵심은 의회주의 “진보정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처참한 몰골을 드러냈다는 데 있다. 통진당은 한편으로 자본가계급의 하위파트너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유지시켜야만 하는 모순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서구의 사민주의 정당들이 100년 역사 동안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을 한국에서는 민노당 이후 10여년의 짧은 시기에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구에서처럼 독자적으로 정권을 잡거나 자본가 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다면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의 폭과 깊이는 훨씬 넓고 깊어질 것이다. 통진당 결성 과정과 민주노총의 통진당 배타적 지지로부터 발생한 분쟁들은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의회주의, 개량주의 정당이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고 결정적인 시기에 노동자계급을 공격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인류에 대한 학살이 자본주의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어버린 제국주의 시대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개량이냐 혁명이냐의 문제가 곧바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 속에서 개량주의 정당들은 개량의 축적이 사회주의를 앞당긴다면서 노골적으로 자본가들과 협력한 대가로 떡고물을 받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이러한 개량주의 정당의 발전 과정은 시대와 국적을 불문하고 노골적인 부르주아 정당으로의 귀결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었다.

 

  통진당 결성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민노당 강령에 있는 사회주의라는 말조차도 삭제했다. 개량주의적, 의회주의적 수사에 불과했지만, 그마저도 거추장스러운 듯이 빼버린 것이다. 그래서 강령적으로는 부르주아 정당의 충실한 세력으로 인정받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통진당만의 문제가 아니라 진보신당의 경우에도 빠르든 늦든 불가피하게 나타날 문제일 수밖에 없다. 진보신당은 선거 시기에 이미 야권연대를 진행한 바 있고, 지난해 말 진보신당 당 대표 출마 시 홍세화 후보가 야권연대 지속 의지를 밝혔고, 4.11 총선에서 통진당과 민주당에게 야권연대에 끼워줄 것을 애원하기도 했었다. 진보신당에게 있어서 통진당이 미끄러진 길에서 발을 빼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야권연대로 표현되는 자본가정당과의 단절이다. 

 

  통진당과 진보신당의 강령은 본질상 자본주의의 개선과 수리에 있다. 고통이 덜한 “합리적” 자본주의가 노선이다. 이러한 노선은 자본가계급을 필요로 하고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협조와 화해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노선은 국가권력에 대해서도 수리, 개선하는 것이다. 억압기구에 대한 해체와 폐지가 아니라 적당한 수준에서 유지하는 것이다. 일례로 경찰, 검찰과 같은 억압 기구들의 해체와 자본가 군대의 해체를 요구할 수 없다. 이러한 요구들은 통진당과 진보신당의 개량주의, 의회주의의 한계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도로 민노당이 아닌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자!

 

  통진당도 진보신당도 아니라면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어떻게 진행되어야하는가의 문제가 곧바로 제기된다. 국민승리 21부터 진행된 90년대 후반 이후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에 사회주의 진영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운동 세력 자체가 미약하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 개량주의 세력과 하나의 당에서 함께할 수 없었다. 전투적 노동자 운동진영이 민주노총 내 노사협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당 운동에 함께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극히 당연했다. 그리고 취약한 사회주의 세력은 둘째 치더라도 당시에도 사회주의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불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전과 선동은 비밀리에 주로 소규모적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간단히 말해 써클적 활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물론 국가보안법에 의한 사회주의자 탄압과 기소, 재판이 진행되고 있지만 공개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노동계급 운동의 후퇴와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 운동의 파산에 직면한 사회주의 세력들의 자기반성인 동시에 긴급한 대응이기도 하다.

 

  통진당 사태는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빠르든 늦든 민노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운동의 파산의 실례로 인식하게끔 작용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건강한 세력이 통진당에 함께해서 바꿔나가자고 하고, 어떤 이들은 노동에서 탈피해서 국민정당화로 나가자고 한다. 이러한 훈수에 대해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의 대답은 노동자들이 통진당과 같은 의회주의 정당으로부터 단절하고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정치세력화에 나서도록 적극적으로 호소하는 것이어야 한다. 통진당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을 배신한 사실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열망이 비아냥과 환멸로 돌아서게 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도로 민노당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도로 민노당은 노동자들에게 비극 대신에 소극을 선사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문제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이제 새롭게 건설될 노동자 정당은 의회주의, 개량주의에 기반한 “진보정당”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정당 이외에 다른 것 일 수 없다. 한 사업장의 노동자 투쟁조차도 전제 자본가계급에 맞선 노동자계급 투쟁을 조직하고, 의회에서의 잡담이 아니라 노동자 투쟁을 선동하고 투쟁을 조직할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이 사활적인 과제로 다가온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영원불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역사발전법칙을 수용한다면, ‘진보’는 엄밀히 말해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적 투쟁 과정에 가정 적합한 용어다. 사회체제의 변동은 언제나 치열한 계급투쟁을 동반했고, 점진적 변화의 합에 의한 변동 사례는 역사적으로 발견되지 않았다.

 

  쌍용차와 같은 노동계급의 투쟁들, 장기투쟁 사업장과 비정규직 투쟁들은 자본가계급과의 화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만들어내고 있는 폭력적인 계급대립인 것이다. 자본가계급은 각각의 투쟁들에 대해 청와대와 검찰, 국정원 등 자본가 기구들을 동원해서 계급적으로 대응하고 있는데, 이에 맞선 노동자들은 자본가 야당과 “진보정당”들에 의해 타협을 설교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종지부를 찍지 않는다면 노동자 투쟁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사회주의 혁명정당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계급적 입장을 대변하고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적 투쟁 속에서 건설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을 위해서 작지만 거대한 발걸음을 내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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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4] <자료> 노동자정부 전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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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노동자정부 전술에 대하여1)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서는 노동자정부 전술을 놓고 많은 논의가 전개되었다. 논의의 초점은 개량주의 정당과 공공연한 부르주아 정당 간에 정부 구성을 놓고 경합하는 나라들에서 어떤 전술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에 놓여 있었다. 어느 당이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두고 코민테른은 노동자정부 슬로건이 “공동전선 전술로부터 불가피하게 따라 나올 수밖에 없음”을 승인했다.

 

  심지어는 이와 다른 경우의 나라들에서도 그 슬로건은 “일반적 선전 슬로건으로서 어디서나 실천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노동자정부라면 노동자 조직들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하고, 자본에 맞서 노동자들의 이해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노동자 조직들을 무장시켜야 한다는 등의 주장은 공산주의적 선전의 기본 구성부분이라는 것이다. 이 슬로건을 어떻게 전술로 사용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였는데, 4차 대회에서는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정립해내지는 못했다.

 

  그 후 이 문제에 대한 과학적 논의는 5차 대회에서 궤도를 이탈해 버렸고, 그 뒤에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이 부르주아지와의 공공연한 연합(인민전선)을 위해 그 슬로건을 기각시켜버리면서는 논의 자체가 중단되어 버렸다.

 

  그러나 4차대회의의 심의안과 테제들에는 혁명주의자들에게 진정한 “노동자정부”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특징들이 무엇인지가 나타난다.

 

“노동자정부의 최대 임무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시키고, 부르주아 반혁명 조직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생산 통제를 도입하고, 주요 과세 부담을 부자들에게 넘기고, 반혁명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노동자정부가 가능한 경우는 오직 대중들의 투쟁 속에서 탄생하는 경우, 그리고 투쟁을 수행할 수 있는 노동자 조직들 - 노동대중들 중 가장 억압받는 부분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들 - 의 지지를 받을 경우일 뿐이다.”

 

  이것이 혁명주의자들이 쟁취하고자 하는 정부 유형을 묘사한 것이라면, 비혁명적 노동자 정당들에 대한 공동전선의 일환으로 노동자정부 슬로건이 제안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그 슬로건은 대수학적 성격[백지수표의 경우처럼 거기에 누가 무엇을 써넣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즉 세력들의 역관계와 투쟁에 의해 내용이 결정된다는 의미에서]을 가진다. 혁명주의자들에게 이 정부는 부르주아지와의 혁명적 전쟁을 선포하는 정부이다. 그러나 개량주의자들에게 이 정부는 부르주아 체제를 관리하는 정부일 것이다.

 

“진정한 노동자정부의 구성, 그리고 혁명적 정책을 추구하는 정부의 존속은 결국 격렬한 투쟁으로 이어지며, 종국에는 부르주아지와의 내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노동자정부 수립” 슬로건에 혁명주의자들이 부여하는 내용이라면, 그 슬로건이 공동전선으로서 제안될 수 있으므로 개량주의자들 및 개량주의 지도력의 영향 하에 있는 노동자들은 그 슬로건에 비혁명적 내용을 부여할 수 있고, 아마 그렇게 할 것이다. 따라서 4차 대회는 그러한 ‘노동자정부’ 레테르가 붙여질 가능성이 있는 5가지 정부 유형을 식별하여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첫 번째 가능성은 “자유주의 노동자정부”였다. 사회주의를 공언조차도 하지 않는 노동당 정부가 이 경우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들어섰던 노동당 정부가 그 사례였고, 영국에서도 곧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다면 이런 경우일 공산이 컸다. 두 번째는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정부”인데, 독일에서 존재했던 사민당 정부가 여기에 속했다. 이 두 경우 모두 “부르주아 노동자당 정부”였으며, 현실에서는 부르주아지와의 은밀한 연합이었다.

 

  코민테른은, 혁명적 공세를 피하기 위해 부르주아지가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이러한 정부들이며, 혁명주의자들이 이러한 정부들에게 어떠한 정치적 지지도 줄 수 없지만, “그러한 정부조차도 객관적으로 부르주아 권력의 해체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데 일조할 수 있음”을 승인했다.

 

  이는 그러한 정부가 노동자들의 대표체로서 권력에 오르면 애초 하려고 했던 것보다 더 나아가도록 강제되며, 그럼으로써 지지 노동자들의 기대와 요구 수준을 끌어올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러한 정부는 필요하면 어디서든 부르주아지와 한 편이 되는 것이 필연적이므로 개량주의 정당에 대한 대중의 환멸을 또한 가속화시킬 수 있다.

 

  세 번째 가능성은 노동자 ․ 빈농 정부였고(당시 동유럽 나라들에서 가능했던 정부), 네 번째는 혁명주의자들이 참가할 수 있는 노동자정부(즉 노동자 공동전선의 정부적 표현)였다. 이 두 경우 모두 혁명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부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혁명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을 아직 인정하지 않는 노동자들, 즉 사민당 소속 노동자들, 기독교 정당 소속 노동자들, 무당파 생디칼리스트들 등등과 함께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일정한 조건에서는 그리고 일정한 보장이 갖춰진다면, 공산주의적이지 않은 노동자정부를 지지할 태세가 되어 있다. …… 이 세 번째와 네 번째 유형의 정부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참가할 수 있다. 이들 정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대표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가는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이행 단계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부가 구성되는 곳에서는 그러한 정부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다섯 번째 가능한 노동자정부 형태는 혁명주의자들 자신이 정부를 구성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단 하나의 “순수한” 노동자정부 형태였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것이었다.            
노동자정부들에 대한 코민테른의 유형 분류는 오늘날 다소 시대착오적인 지점이 있다. 구래의 “자유주의 노동당”과 사민주의 정당은 하나로 수렴되었고, 그에 따라 두 유형의 “부르주아 노동자 정부들”도 하나로 “융합”되었다.

 

  또한 4차 대회에서 채택된 노동자정부에 관한 테제에는 이미 1922년에 발전하기 시작한 코민테른 내부 투쟁의 흔적을 띠고 있는데 이것이 나중에 코민테른의 타락을 수반하였다. 예를 들어 지노비예프는 노동자정부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동일시하고자 하였다. “노동자정부”는 단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동의어”일 따름이라는 그 같은 해석은, 노동자정부 슬로건이 공동전선 제안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지점을 그 슬로건에서 제거해버리는 해석이다. 지노비예프의 사용법으로 보면, 그 슬로건은 오직 최후통첩주의적으로만, 예를 들어 사민주의 정부를 겨냥하여 최후통첩주의적으로만 제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최후통첩주의는 그 기회주의적 대립물로 쉽게 전화될 수 있다. 스탈린과 부하린이 “노동자 ․ 농민 정부”를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역사적으로 퇴물이 된, 따라서 반동적인 개념과 동일시했을 때 바로 그랬다.
  이것은 결정적인 점, 즉 그러한 정부는 강령적으로 볼 때 부르주아 정부라는 점을 모호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중국에서 그러한 정부의 구성을 강령적으로 필수적인 혁명 단계라고 내세웠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러한 정부는 트로츠키가 설명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 혁명의 길에 놓인 주 장애물”이며, 따라서 노동자정부 전술에 대한 부정이다.

 

  코민테른 테제에 담긴 그 같은 느슨한 정식화들에 내재하는 위험은 세 번째 및 네 번째 노동자정부 유형과 관련하여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들이 포함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 코민테른은 공산당원들이 그러한 정부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엄격히 규정해 놓았다. 일단 코민테른의 동의가 절대적 전제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정부에 들어간 공산당 소속 각료들이 가장 엄격한 당 통제 하에 있어야 하며, 노동자 혁명 조직들과 가장 긴밀한 접촉을 맺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산당 소속 각료들이 절대적 독자성과 비판의 권리를 허용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은 경우에든 혹은 여타 이유들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이 이러한 노동자정부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경우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구체적으로 적시되지 않았다.
  4차 대회가 있은 지 일 년도 안 되어 문제가 터졌다. 독일 내에서 사민당과 독립사민당이 장악한 지방정부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지, 그리고 그 지방정부들에 공산당원들이 들어간다면 어떤 조건으로 들어갈지를 놓고 분열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독일공산당은 파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노동자정부 전술의 올바른 사용법은 러시아에서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사이의 몇 달 간에 볼셰비키가 보여준 실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볼셰비키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넘길 것을 요구했을 때 사실상 그것은 노동자들 자신의 투쟁조직들에 바탕을 둔 정부, 즉 나중의 용어법으로 말하면 노동자정부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볼셰비키는 그러한 정부를 구성할 실제 세력이 누구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미리 규정해 놓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 요구는 “대수학적”이다. 정부 구조의 차원에서 요구되고 있는 모든 것은 그 정부가 소비에트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부의 정치적 임무들에 대해서는 아주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즉각적인 평화,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 모든 은행의 국유화, 토지를 농민에게, 이러한 조처들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한 국가 무장력 (즉 소비에트 민병대)의 사용 등.


  이러한 조처들이 최소한의 필수적 요구들이라는 인식을 노동자들이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볼셰비키는 마침내 이러한 인식 쪽으로 노동자들을 획득함으로써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에 대해 이러한 강령(프로그램)을 채택하도록 훨씬 더 큰 압력을 조성해내는 데 성공했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압력과 함께 “부르주아지와 단절하라!”라는 요구를 결합시켰다. 그러나 멘셰비키는 그 강령을 실행하는 것도, 부르주아지와 단절하는 것도, 자신의 근거를 소비에트에 두는 것도 다 거부하였다. 볼셰비키가 조성해낸 압력은 이러한 과정에서 소비에트 내 멘셰비키의 다수파 지위를 급속히 파괴해 나갔다.

 

  권력이 실제로 소비에트로 넘어갔을 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소비에트 정부는 스스로의 근거를 소비에트 권력에 두고 필수적 조처들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정당들, 즉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로 구성되게 되었다. 볼셰비키는 권력 장악에서 소비에트의 역할을 물신화시키지 않았다. 7월의 날들 이후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에서 내쫓기고나서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요구를 접어버렸다. 대신에 레닌은 공장위원회를 노동자정부의 권력 기반이 될 수 있는 조직 형태로 보기 시작했다. 코르닐로프 사태 이후 소비에트가 다시 민주화되고 나서야 소비에트는 다시 볼셰비키 선전의 중심에 자리하게 되었다.

 

  코르닐로프 쿠데타 동안 볼셰비키는 반동에 대항해 “부르주아 노동자정부”를 무조건적으로 무장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볼셰비키의 목적은 혁명이 진전되기 위해 필요한 군사적 준비를 가능케 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계속해서 멘셰비키를 권력에 있게 함으로써 그들의 파산과 계급적 배신이 노동자계급의 다수에게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지는 정확히 케렌스키(당시 부르주아 노동자정부[임시정부] 수반)에 대한 “교수형 집행인의 올가미”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것은 실제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부 형태가 되었던 또 다른 노동자정부를 위한 길을 닦았다.

 

볼셰비키의 노동자정부 전술 사용법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노동자들의 필요에 답하면서 동시에 노동자계급 국가권력에 대한 필요를 제기하는 즉각적 조처들로 구성되는 “행동강령”을 내거는 것.

 

  2) 이 강령(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정부로서 노동자정부가 제기된다. 처음에는 대수학적으로. 그 정부의 정확한 구성은 미리 규정되어 있지 않다.

 

  3) 노동자 정당들에게 부르주아지와 단절하여 이러한 노동자정부를 구성하라고 요구한다. 단 정부의 방어와 지지를 노동자들의 독자적 투쟁조직에 의존할 것을 분명히 하면서.

 

  4) 개량주의자들이 대중의 지지를 아직 잃지 않고 있는 한 혁명주의자들은 반동에 대항해 개량주의자들을 방어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어떠한 정치적 지지도 주지 않고 완전한 독자성을 유지한다. 
     
  5) 개량주의자들이나 중도주의자들에 의해 구성된 정부지만 소비에트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우 혁명주의자들은 반동에 대항해 그 정부를 무조건적으로 방어할 것이다. 그러한 정부가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한 혁명주의자들은 봉기에 의해 이 민주주의를 침해하지 않을 것이다.

 

  6) 이 전 과정에 걸쳐 혁명주의자들은 자신의 강령 및 조직 상의 독자성을 지켜나간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전위 및 그 배후의 노동자 다수가 혁명의 필요를 인식하는 쪽으로 획득되자마자 혁명주의자들은 국가권력 장악에 나서야 하는 바, 혁명주의자들은 이러한 자신의 목적의식을 지켜나간다.

 

  오직 현실 사회세력들의 충돌만이 노동자정부 요구에 정확한 “산수학적” 내용을 부여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17년에 소비에트 2차 대회 이전의 올바른 슬로건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였던 데 비해 2차 대회 때는 “볼셰비키 ․ 사회혁명당좌파 정부 수립”이 올바른 요구였다.


  개량주의자들에게 소비에트에 바탕을 둔 정부를 구성하라고 하는 요구가 노동자정부 전술 사용의 중심 요소이긴 하지만, 그 요구는 언제나 정치 강령(정치적 프로그램)에 종속되어야 한다. 소비에트가 대의체인 한 소비에트는 혁명주의가 다수파일 수 있는 것만큼이나 반동이 다수파일 수 있다.
  소비에트의 존재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이는 1918년 11월 독일혁명에서 부정적으로 입증된 바 이다. 거기서 권력은 노동자 ․ 병사 대표자 평의회의 수중에 있었다. 1917년 2월의 러시아에서처럼 그 평의회들은 권력을 그들의 개량주의 지도자들에게 건네주었다. 사민당 지도자들인 에베르트와 샤이데만이  막스 폰 바덴 공과 연합하여 왕정을 구해내려 한 그들의 시도가 실패하고 난 뒤에  선포한 정부는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공화주의 정부였다. 그것은 그 형태에 있어 노동자정부였다.
  그러나 그것의 정치적 내용은 부르주아 노동자정부,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공세를 봉쇄하고 종국에 파괴하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은밀한 연합이었다. 사민당 지도자들은 평의회에서 그들이 받고 있는 지지를 이용하여 그들의 권력 기반을 국회와 바이마르 헌법을 통해 의회적 기구로 이전시켰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그들 정부의 형태를 그 내용에 조응하도록 바꿔놓는 데 성공했다. 이제 부르주아지와의 공공연한 “인민전선” 연합을 이룬 개량주의자들은 1919년 한 해 내내 그들의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전위세력을 테러하고 말살해 나갔다. 여기서 혁명적 전위세력이 노동자 다수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상황을 교묘히 이용했다.

 

  1920년 3월의 카프 폭동은 개량주의가 계급들 사이를 오가면서 책략을 부릴 그 능력이 절대적 한계점에 몰리게 될 때 어디까지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 주었다. 부르주아 군대가 개량주의 지도자들인 에베르트와 샤이데만과 노스케를 버렸을 때 당시 행동에 나선, 그리고 부분적으로 무장한 노동자들에 의해 이들은 계속해서 권력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레기엔이 쿠데타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노동자정부”를 제안했을 때 (그가 의도한 것은 ‘부르주아 노동자정부’ 였다.) 에베르트 등 이들 사민당 지도자들은 그 제안이 자신들을 노동자계급으로부터의 너무 큰 압력 하에 놓이게 할 것임을 눈치 챘다. 그러한 상황에서 노동자평의회를 정부의 기초로 공공연히 선포하는 것은 사민당 스스로가 볼 때도 자신들이 실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기대치만 노동자들 사이에 조성해 놓는 꼴이 될 것이었다. 이러한 전망에 직면하자 사민당은 부르주아지와의 새로운 연합을 이루는 쪽으로 선택하였다.

 

  일단 새로운 정부가 권력에 확고히 안착하자 국방군이 동원되어 노동자평의회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레기엔의 제안 당시에 공산당은 그러한 ‘노동자정부’의 구성을 원리적으로 반대했고, 거기에 맞서 혁명의 필요성을 들이밀었다.

 

  이것은 사민당이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고리에 걸린 사민당의 고리를 풀어주는) 꼴만 된 종파주의적인 대응이었다. 이때에 노동자정부 전술을 올바로 사용했다면, 그것이 가져다주었을 효과는 분명하다. 그러한 노동자정부의 정치 프로그램, 즉 다음과 같은 조처들을 관철시켰을 것이다. 무장한 노동자 평의회의 법제화, 자유의용군의 해산,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즉각적인 동맹,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전쟁 배상에 대한 반대.

 

  이 모든 것이 실행되었다면 레기엔의 길에 장애물을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공산당이 노동자 정당들로 구성된 정부라는 사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반동에 맞서 그러한 정부를 무조건적으로 방어하는 태도를 취했다면 이것은 공산당으로 하여금 사민당 소속 대중들과 더 긴밀히 접촉할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개량주의자들에 대해 부르주아지와의 연합을 구성하지 말라는 압력을 더 강화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량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와 연합을 해버렸을 경우 노동자들은 개량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을 해산시키고 무장 해제시키려 하자마자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독자적 행동을 취할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에서보다 자본주의 선진국들에서 개량주의가 노동자계급에 대한 더 큰 장악력을 가지고 있고, 그 중 독일의 개량주의는 이 점에서 선두주자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혁명가들로서는 독일의 경험이 제공하는 교훈들을 학습하고 숙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정부의 방어와 정부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구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개량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정부와 관련하여, 그것이 형태상 부르주아 입헌정부(즉 부르주아 노동자정부)건 혹은 형태상 노동자 조직들에 기반한 정부(노동자정부)건 혁명주의자들은 반동에 대항하여 (필요한 경우) 무장을 하고 그 정부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치적 지지는 오직 혁명의 길을 취하는 노동자정부에게만, 즉 ‘진정한’ 노동자정부를 규정하는 핵심 조처들을 실행에 옮기는 정부에게만 주어질 수 있다. 코민테른과 제4 인터내셔널이 그랬듯이 우리도 부르주아 노동자당들이나 중도주의자들이 그러한 정부를 구성할 수 있음을 입증시켜 보일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행강령>>이 설명하는 것처럼, “완전히 예외적인 환경들(전쟁, 패전, 재정 파탄, 대중들의 혁명적 압력 등등)의 영향 하에 스탈린주의자들을 포함한 소부르주아 정당들이 그들 스스로 하고자 했던 것 보다 더 멀리 나아가 부르주아지와 단절하는 길로 가게 되는 이론적 가능성을 미리 무조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사민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와 단절한 “진정한 노동자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 이러한 만에 하나의 이론적 가능성을 트로츠키가 승인한 것을 가지고서 그의 아류 지지자들은 자기들 멋대로 왜곡시켰다. ‘그러한 사민당과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을 포함하는 정부가 노동자정부이다’ 라는 식의 명제로 둔갑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사회당-공산당 정부가 부르주아 노동자정부라는 의미에서가 아닌 어떤 다른 의미로의 노동자정부인 것처럼 말한다든가, 또는 영국 노동당에 의한 노동자정부 구성이 그 자체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한다든가 하는 것은 가장 비겁한 기회주의이다.

 

  우리는 그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정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코민테른 4차 대회 테제의 정신은 아주 분명한 것이었다: “노동자정부”란 다음과 같은 것을 실행하는 정부를 가리킨다. 부르주아지를 무장 해제시킨다. 생산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통제권을 제거하기 위한 조처들에 착수한다. 이러한 정책들을 강행하고 정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을 그들 자신의 조직들을 통해 무장시키며 이들 조직에 정부 스스로가 책임을 진다.

 

  우리가 노동자정부 “요구”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공동전선의 원리들에 맞춰서 혁명주의자들과 비혁명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지키거나 강화시켜내기 위해 정부 수준에서조차도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제안이 곧 노동자정부 “요구”에 담긴 실천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량주의자들과 중도주의자들에 의해 구성되는 여타의  모든 정부 형태들은 “부르주아 노동자정부”로 지칭되는 것이 정확한 용어법이다. 명백히, 노동자정부를 직접적인 요구로 제기할 지 여부는 정세 조건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권력 문제가 제기되는 혁명적 위기의 경우들이 아니라면 혁명주의자들은 ‘노동자정부’를, 진정한 혁명적 노동자정부에 관한 선전으로 제기하는 한편, 이와 동시에 정부를 구성한 개량주의 정당들에게 부르주아지와 단절하고 노동자의 이해를 위한 구체적 조처들을 취하라고 요구한다.  

 

 

 


 

<각주>

 

1) 이 자료 글은 해외 좌파 잡지 <Permanent Revolution> 1호에 실렸던 글 ‘The Workers' Government’를 번역한 것이다.

http://www.permanentrevolution.net//?view=entry&entry=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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