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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2호(통권10호)] 왜 지금 ‘당 건설 공동전선’인가? - ‘공동행동’의 필요와 당위와 역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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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당 건설 공동전선’인가?
 

 - ‘공동행동’의 필요와 당위와 역사성-

       

                                                    
고민택

 


  노동자혁명당추진모임(이하 노혁추)은 <혁명> 창간호를 통해 노혁추가 현 시점에서 왜 “가칭) 노동자 독자 정당 건설 공동행동”(이하 제안)을 공개적으로 제안하는지 이미 충분히 밝혔다고 생각한다. 또한 맑스코뮤날레 2차 포럼에서 발표한 발제문을 통해서도 그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하고 있다.
  더 길게는 이번 제안은 노혁추 결성에서부터, 특히 총선방침을 제출한 시기부터 밝혀왔던 일련의 정세인식과 그에 따른 정치활동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즉 이번 제안은 객관적으로는 ‘통진당 사태’에 대해 노동자계급이 취해야 할 올바른 정치방침 또는 구체적 전술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며, 노혁추 내적으로는 조직을 결성하면서 스스로 상정한 ‘당 건설 추진체’로서의 임무와 역할을 다하고자 하는 맥락과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번 제안을 처음 접한 동지들은 물론이고 좀 더 폭넓은 이해를 원하는 동지들은 수고스럽더라도 노혁추 블로그(http//blog.jinbo.net/wrp)에 접속하여 <여기에> 란에 올려놓은 글들을 함께 읽어 보기를 당부한다. 그래야만 이번 제안에서 노혁추가 말하고자 하는 정치적 맥락과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좀 더 정확하고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제안에 대한 동의여부는 그런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문제제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는 지금의 제안이 과연 노혁추 결성 초동 주체들이 ‘사노위 정치적 해산 선언’을 주장하고 노혁추를 결성하면서 밝힌 당 건설 노선과 일치하는가, 올바르고 타당한 정세 분석에 기초하고 있는가, 실현 가능성이 있는가? 등에 대한 의문 내지 질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성적 판단을 하기에 앞서 정서적으로 선뜻 내켜하지 않는 반응도 나올 수 있다. 또한 심정도 심정이지만 현장은 현실적으로 그 동안 오랜 시간에 걸쳐 이미 정파적 판단과 분립이 고착되어 있으며 동시에 설령 어떤 형태, 어떤 수준에서든 공동전선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역사적으로 공동전선에 대한 운동 경험과 축적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판단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번 제안이 혁명세력/사회주의세력이 그동안 주장해 온 ‘정치적/혁명적 순수성’ 또는 ‘정치적/혁명적 원칙과 기조’만 의심받게 되고, 의도와 무관하게, 결국 또 다른 의회/개량주의(사민주의) 정당을 강화, 정당화시키는 결과만 낳게 될 것이라고 전망할 수도 있다고 본다. 
  또한 이번 제안이 아무리 대의에 입각하고 있으며, 정세적으로도 절실하기 때문에 객관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 공동전선을 성립시키고 주도할 수 있는 확고한 의지와 최소한의 정치력을 담보하고 있는 정파가 뚜렷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 때문에 공동전선 자체가 아예 성립조차 되지 않을 것이라고 비관적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덧붙여 이와 같은 정황에 대한 판단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 독자 정당 창당’과 ‘혁명정당/사회주의정당 건설’ 문제를 별개의 사안/개념으로 보거나 적어도 단계적으로 접근/사고하면서 지금 노동자계급이 마주하고 있는 일반적 과제는 전 세계 차원에서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 또는 ‘노동자 독자 정당 창당’이 아니라 ‘혁명정당/사회주의정당 건설’이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반대로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또는 ‘진보좌파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조직이나 활동가들의 입장에서는 혁명 또는 사회주의를 말하는 세력과는 서로 어차피 같이 할 생각도, 가능성도 없다는 판단 아래 역시 제안의 실효성에 의문을 품거나 부정적으로 바라 볼 수 있다. 또한 그게 아니라도 매우 현실적으로 혁명세력/사회주의 세력이 소수라는 점을 이유로 그들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노동자 독자 정당’의 정체성을 아예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내지 ‘진보좌파정당’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구체화 할 것인가‘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자 할 수 있다.
  또한 민주노조운동에 기반하고 있는 활동가층에서도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어떤 당이든 간에 지금 과연 ‘노동자 독자 정당 창당’을 말하거나 추진할 수 있는 대중적 동력과 기반이 있는가, 이제까지의 역사적 경과와 경험으로 볼 때 정파들에게 당 건설을 추동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금 당 문제보다는 투쟁조직화나 대선 대응이 더 시급한 문제 아닌가?(우리의 제안은 이 문제를 중요하게 포함하고 있지만) 등의 질문이나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이렇다고 할 때 ‘제안서’만으로는 제안이 갖는 정치적 맥락과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제안이 갖는 정치적 맥락과 의미에 대해 좀 더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설득을 하고자 하는 노력과 시도이다. 그러나 손바닥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듯이 우리가 우리 바깥의 생각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 소통과 논쟁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우리도 미처 보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한 새로운 문제제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한다.
  다만 한 가지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제안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출발지점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출구, 즉 최종 결론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 물론 우리로서는 우리의 의도와 목적을 분명히 갖고 있다. 공동전선을 함께 한다면 어느 누구라도 당연히 그래야 하며 그럴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더라도 이는 동상이몽이나 오월동주와는 다르다.
  그 무엇보다 지금은 각자 의도나 생존전략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도 그 이전에 전체 노동자계급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 즉 “자본가 정당과 단절! 야권연대 반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복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속에서 각자 의도나 생존전략만을 앞세운다면 너나 할 것 없이 자멸 내지 고사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한 태도는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무능/편협/오만한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대중이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오히려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될 뿐이다. 이것이 현재 엄존하는 객관적/대중적 압력이다.
  물론 대중들이 아직은 이를 직접 요구하거나 행동으로 보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의 책임도 의무도 아니다. 대중이 직접 그런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객관적/대중적 압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파나 활동가라면 당연히 스스로 인지하고 느껴야만 하는 압력이다. 대중을 핑계 삼아 이를 외면하는 것은 스스로 꽁무니주의 내지 대기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니다.  
  다음으로 제안이 특정 개별 사안(현안)에 대한 공동전선을 넘어 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능한 설정/전술인가. 이점은 차치하더라도 이를 통해 단일한 정치적 결론을 낸다는 것은 객관적/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 분명한데 결과적으로 대중에게 정치적 무책임을 드러내고 더 큰 실망을 안겨 주게 되지 않겠는가. 공동전선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출발부터 매 사안마다 부딪쳐야 하는 숱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정치력이 존재하는가? 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공동전선의 기승전결이 도대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가 머리 속에서 그려지지 않을 수 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누구도 여기에 대한 답을 미리 갖고 있을 수 없다. 지금은 오직 원리와 원칙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구체적 과정은 참여자 사이에서의 논의와 논쟁을 통해서만 계속해서 만들어 갈 수 있다. 이 또한 대중들에게 정치력을 시험받고 검증받는 중요한 정치적 과정이다.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한 과정들이 펼쳐질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 우여곡절, 좌충우돌이 있겠지만 이를 풀어나가는 것 역시 대중적 차원에서 새로운 경험을 축적하고 지도력을 검증받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필요조건

 

  지금 정세는 큰 틀에서는(객관적으로는), 즉 노동자계급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통진당 사태’로 인해 최종 파산에 이른 노동자정치세력화와 관련하여 ‘새로운 노동자당’을 건설할 필요성이 대중적 차원에서까지 전면적으로 등장한 상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그러한 정세 속에서 크게 두 가지 쟁점이 놓여 있다.
 
  하나는 경로, 즉 전술 문제다. 여기서의 핵심은 통진당 및 야권연대(민주대연합)를 노동자계급과 철저히 분리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전선을 대중적으로 힘 있게 형성할 때만이 비로소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 문제가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지 못하면 주어는 계속해서 통진당이 될 수밖에 없다. 만약 ‘통진당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통진당과 야권연대를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문제가 훨씬 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통진당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분리시키지 못하면 그 때도 마찬가지다.
  혁명세력/사회주의세력의 일차적 과제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혁명세력/사회주의세력만의 힘으로 그를 현실화하기 어렵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이 형성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다. 그러나 필요조건을 건너뛰고는, 즉 각개약진 방식으로는 성공할 길이 없다. 지금으로서는 ‘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일차적 관건이다. 그에 따른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 곧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하나는 어떤 당을 건설할 것인가의 문제다. 여기서의(새로운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 안에서의) 핵심 쟁점은 또 다른 의회/개량주의 정당인가, 혁명/사회주의정당인가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이 점이 바로 지난 민주노동당 창당 시절, 그 뒤의 민주노동당 분당 시기, ‘진보대연합/민주대연합’이 주되게 거론됐던 당시에 비해 객관적, 결정적으로 달라진 지형이다. 대중적 공간에서 공공연하게 공식적으로 혁명/사회주의정당 건설을 주장할 수 있는, 대중적으로 검증받을 수 있는 정세가 객관적으로 도래한 것이다.
  물론 결과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또 다른 의회/개량주의 정당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될지 혁명/사회주의세력의 대중적 진출을 여는 계기로 작용할지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숙명론(패배주의)적 태도를 먼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나쁜 경우라도 그것을 하지 못했을 경우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대중적, 정치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으며 남길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강조해서 말하지만 ‘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 전술’은 노혁추의 당 건설 노선의 변경(폐기)은커녕 그것의 구체화/현실화이다. 즉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다. 우리의 전술은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노혁추의 입장에서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냥 한 번 해보자는 차원이나 임기응변이 아니다.

 

  노혁추의 당 건설은 노동자혁명당을 건설하는 노선이다. 혁명적 강령의 기초 위에서 당을 건설하는 노선이다. 노동자운동의 현 개량주의 지도력에 맞서 혁명적 지도력을 세우는 것을 통해 당을 건설하는 노선이다. 그 때문에 정세 대응에서 기권하지 않고 전국전선을 수립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서 계급투쟁 지도력을 세우고자 투쟁하는 당 건설 노선이다.
정세와 무관하게 중장기적으로 우리 조직의 외연을 확장하여 당 건설 토대를 구축하겠다는, 전국전선보다는 내 영역에서 쪽수를 늘리고 토대를 차분히 구축해서 당을 건설하겠다는 식의 대기주의 · 종파주의에 반대하는 당 건설 노선이다.

 

 

 
이유

 

  그러나 현실적으로 공동전선이 성립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무엇보다 노혁추 단독으로는 공동전선을 이끌어 낼 만큼의 정치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이것이 곧 공동전선을 제안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제안을 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
 
  첫째, 제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도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결국 전체 노동자계급이 당면한 과제를 중심으로 전술을 사고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조건을 우선시 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바로 ‘당 건설 추진체’를 자임했던 애초의 자신의 임무와 역할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다. 노혁추를 하나의 써클로 후퇴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가능성이 낮다는 것과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지금은 여전히 통진당과 야권연대를 대체할 수 있는 그 어떤 새로운 정치력도 형성되어 있지 않다. 아니 끝내 누구도 절대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함으로써 통진당과 야권연대를 다시 부활시킬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반대로 말하면 누구에게나 아직 기회는 열려 있다. 즉 세력은 대단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지금 누구도 자신의 세력만으로 전체를 주도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은 없다.

 

  셋째, 지금 정세는 역동적/유동적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하루하루 급변하고 있다. 지배계급조차도 자고나면 입장과 태도가 달라질 만큼 예측 불허의 정세가 이어지고 있다. 혁명세력이 개입할 정치적 공간은 널려 있다. 교과서적 추상이 아니라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현안을 매개로 혁명적 원칙과 전술을 제시할 수 있는 쟁점들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통진당만이 아니라 그 바깥의 의회/개량주의 세력의 취약성과 무능함도 함께 드러나고 있다. 그들로서도 어떻든 응답을 (하게) 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쟁점을 이어갈 수 있다.

 

  넷째, 설령 우리의 제안이 어려움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안이 틀려서가 아니라, 즉 대의에 입각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파적 속사정이 달라서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적어도 대의를 거스르지 않고자 하는 세력이라면, 더 정확하게는 객관적으로 대의를 앞서 제출해야 할 위치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세력이라면 누가 제안을 했든 간에 관계없이 진지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그 속에서 얼마든지 스스로 판을 열 수도 있다. 노혁추의 입장에서는 본래의 취지만 달라지지 않는다면 거기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공동전선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남을 수 있는데 그것은 어쨌든 공동전선이 결국 의회/개량주의(사민주의)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이 더 높다는 판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먼저 이에 대해 말하기 전에 두 가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공동전선 전술을 제안하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그 공동전선 속에서 또는 공동전선을 통해 혁명/사회주의정당 건설 투쟁을 대중적으로 펼치기 위함이다. 우리로서는 최종(결과)적으로 공동전선 전체가 또는 공동전선의 보다 큰 부분이 혁명/사회주의정당으로 귀결될 수 있도록 최대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미리부터 불가능하다거나 어렵다고 스스로 선을 그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앞서 말했듯이 이 공동전선은 의회/개량주의(사민주의) 정당과 혁명/사회주의정당 사이의 정치투쟁의 장(공간)이 될 것이란 것만은 분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공동전선의 성격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이 공동전선이야말로 통진당과 야권연대를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며 가장 유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노동자 독자 정당 창당’ 과제와 ‘혁명/사회주의정당’ 건설 문제가 각각 병렬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어쨌든 이 공동전선이 성립된다면 그것은 바로 전자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공동전선은 계급협조 야권연대에 대한 반대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인정하는 이외의 그 어떤 전제조건도 필요치 않으며 달아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이 공동전선이 혁명/사회주의 조직 사이의 공동전선이 아니라 의회/개량주의 세력과 함께하는 공동전선이라는 점 외에도 또 다른 현실로 혁명/사회주의 세력이 이 공동전선에 적극적으로 임할 가능성이 지금의 단면만 놓고 보면 높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이와 연동하여 의회/개량주의 세력에 비판적인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현장활동가’들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혁명/사회주의 조직이나 ‘현장활동가’들의 이러한 태도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하다는 것은 일단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바로 이 현실을 바꾸지 않고는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사실상 자신이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할 수 없다. 혁명/사회주의 세력마저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활동에 나서지 않고 굴복한다면 결코 의회/개량주의 세력으로부터 지도력을 빼앗아 올 수 없다. 이것이 백배 천 배나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사실/현실이다. 즉 이 공동전선은 바로 의회/개량주의 세력에게 비판적인 노동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정치 공간을 제공하고 이 속에서 주체로 세우기 위한 운동이나 다름없다.

 

 

역사성

 

  이제 문제를 좀 더 근본적으로 제기해 보자. 지금의 현실은 그저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냥 지금과 같은 상태/결과에 도달한 것이 결코 아니다. 지금의 현실은 지난 운동의 역사적/필연적 산물/결과이다. 단지 한국만의 상황도 아니다. 세계적인 현상이다.
 
  볼세비키 운동 이후로 혁명세력은 계속해서 실패해 왔다. 러시아 혁명과 코민테른 운동 이후로 혁명적 운동의 전통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크게 보아 그 후의 운동은 사민주의(개량주의 정당/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의 득세, 스탈린주의 인민전선(자본가정당과의 연합으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전망 제거)의 잔존, 혁명/사회주의 세력이 보인 소정파(써클), 종파, 대기주의(노동자계급에 대한 지도력 상실)로의 전락에 의해 얼룩졌다. 아직도 이 현실은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국은 온전한 의미의 혁명세력이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조차 없다. 최고로 잘 나갈 때조차 현장조직의 ‘배후 세력’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출범 이후에는 굴욕적이게도 민주노총/민주노동당의 투쟁부대 역할을 넘어서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사회주의 정파는 계속해서 후퇴를 거듭했으며 현재는 지리멸렬 한 채로 생존하기에도 허덕이고 있다. 2천년대 중반 이후에나 그나마 ‘사회주의’를 말하기 시작했으며, 당 건설, 강령 건설도 최근에서야 시작한 단계일 뿐이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이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조직하지 못한 결과다. 그 책임의 거의 대부분은 혁명/사회주의 세력 자신에게 있다. 대중투쟁이 미약했던 탓이 아니다. 대중들의 투쟁은 늘 있어왔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이 대중에게 빚졌으면 빚졌지 대중은 혁명/사회주의 세력을 볼 기회조차 제대로 대면한 적이 별로 없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대중적 차원에서 민주노총과 진보정당, 즉 개량주의 지도부와의 전면적인 정치투쟁을 펼치지 못했다. 그들 지도부와의 지도력 다툼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지도력 다툼 자체를 대중적 공간에서 벌이지를 못했다. 그와 같은 개념 자체가 없었다. 단지 ‘추상적/원칙적 비판’에 머물렀을 뿐이다. 따라서 과거는 물론 현재도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대중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대중을 향한 전국적 차원의 직접정치를 제대로 시도한 바가 없다. 결과적으로 의회/개량주의 세력에 대당할 수 있는 대안 세력(지도력)으로서의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대중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부끄럽지만 ‘골방 좌파’라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에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당 건설과 강령 건설의 문제를 계속해서 지연, 유보시켜왔다. 개량주의 지도부와의 전면적인 정치투쟁이나 전국적 차원에서의 대중을 향한 직접정치를 하지 않는데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때문이며 대중의 압력을 받지도 않은 때문이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은 당면 시공간을 구체적 물질운동이 형성되고 펼쳐지는, 따라서 대중의 의식과 행동에 매일매일 시시각각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계급투쟁의 장으로 대하지 않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대해왔다. 너무 먼 과거의 역사만을 말하거나 반대로 너무 먼 미래만을 말할 뿐이었다. 사회주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면 정세에 대해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전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기서의 전술이란 전략의 하위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개별 투쟁에 대한 즉자적인 대응 방안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의 전술이란 무엇보다 ‘전국적인 정치전술’을 일컫는 것이다. ‘강령/전술/조직’의 통일 차원에서의 전술을 말하는 것이다. 이 차원의 전술이야말로 노동자계급 정치의 핵심 요체다. 노동자계급을 이러한 전술을 통해 단련하고 훈련/축적시키지 않으면, 혁명/사회주의 세력 스스로 그를 통해 대중적으로 검증받지 못하면 노동자계급 정치, 혁명정치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얘기를 이어가 보자.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공동전선에 대해 위와 같은 우려가 나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지난 운동이 낳은 유산이며 아직 그 유산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고리를 끊지 않고는 혁명운동은 진전은 고사하고 지금보다 훨씬 더 후퇴할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혁명/사회주의 세력이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이 존재해야 할 이유도, 임무와 역할도 거기에 있다. 이것은 강령을 건설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아니 당과 강령을 건설하는데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불가결한 경로다.
  공동전선이 목적하는 바의 대의와 그 필요성(중요성)을 먼저 사고하지 않고 왜 ‘정치공학적’, ‘종파적’ 사고를 앞세우는가? 두 가지만 말하겠다. 하나는 공동전선이 의회/개량주의 정당을 강화시켜 줄 가능성보다는 공동전선을 하지 않았을 경우가 오히려 더 의회/개량주의 정당을 강화시켜 줄 가능성이 더 높다. 공동전선을 하든, 하지 않든 의회/개량주의 정당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게 되어 있다. 이들을 공동전선으로 불러들여 그 속에서 정치투쟁을 벌이지 못한다면 그들은 오히려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노동자계급을 또 다시 맘껏 휘두를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스스로의 정치적 긴장도, 대중으로부터의 정치적 강제도 훨씬 덜 받을 것이기 때문에 ‘준비와 태세’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주저한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자신이 정치투쟁을 벌일 준비와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둘째는 대중의 변화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는 것이다. 대중을 고정된 상태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혁명을 말할 수 있는가? 위기가 혁명을 저절로 가져다주지 않는다. 혁명이 단지 의식의 산물일 수 없지만 의식적 개입 없이는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혁명적 지도력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기다린다고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정치투쟁의 결과로써만 쟁취할 수 있다.

 

  혁명/사회주의 세력이라면 조합/현장 활동가들의 뒷꽁무니를 추수하며 아무 정치적 책임도 따르지 않는 배후정치로 도망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모처럼 새롭게 일고 있는 조합/현장 활동가들의 움직임을 정치적으로 상승/진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왜곡/후퇴시키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현 시기 노동자계급의 당 건설을 주장하는 정치조직이라면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책임 있게 자신의 계획과 전술을 계급 앞에 제출하고 검증하는 실천을 조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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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2호(통권10호)] <자료> 공동전선의 원리와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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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공동전선의 원리와 적용

 

 

 

 

    1. 공동전선의 원리   

 

1.1 공동전선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그리고 제국주의와 각종 반동에 맞선 투쟁에서 혁명 전위와 여타 피착취 ․ 피억압자 조직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일련의 전술 원리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원리들이 적용되는 영역은 다양한데 크게 볼 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노동자 공동전선으로서 부르주아지에 맞선 구체적 투쟁에서 계급의 통일단결과 계급적 독립을 이루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른 하나는 반동에 맞선, 특히 현 시대에 제국주의에 맞선 비(非) 프롤레타리아 피억압계급들과의 동맹 또는 블록이다. 공동전선은 공동의 직접적 목표나 통합조정된 전술에 대한 협정을 맺지 않은 채 우연히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행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공동전선은 원래 군사 용어인데, 서로의 군대를 하나로 섞지 않고 또는 깃발을 서로 혼동되게 함이 없이 특정의 제한된 과제를 두고 공동의 적을 패배시키기 위해 투쟁 전선들을 결합시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1.2 혁명정당의 전략적 목표는 공산주의 사회의 수립이다. 이를 이루어낼 유일한 방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서이다. 즉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와 노동자민병대에 의한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서이다. 이를 위해서는 독립적인 혁명정당이 절대 필수불가결하다. 이러한 당만이 부르주아지로부터의 완전한 계급적 독립을 구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는 혁명적 중핵을 가장 광범위한 피착취 대중의 신뢰를 획득한 대중정당으로 변모시켜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의 대다수는 비(非)혁명적, 심지어 반(反)혁명적 조직을 지지하고 있다. 이런 조직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 혁명가들의 임무이다.

 

1.3 선전만으로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에 불충분하다. 개량주의 조직 또는 중도주의 조직이 노동자의 이해를 위해 싸우거나 제대로 방어해낼 수 없다는 것을 실천 속에서 입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혁명정당은 일련의 전술을 배치 운용하여 혁명정당이 유일하게 일관된 노동자계급 정당임을 계급투쟁 자체에서 대중에게 입증해 보여야 한다. 동시에 혁명정당은 대안 지도부로서 자신의 면모와 능력을 입증시킬 방법, 실제 대중투쟁을 이끄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 과정에서 혁명정당은 독자적인 주도력을 보여주어야 할 뿐 아니라, 자기 조직역량을 여타 노동계급 대중조직들과 충실히 결합 조정시킬 수 있는 능력 또한 보여주어야 한다.

 

1.4 공동전선은 계급투쟁에서 하나의 전술로서, 피착취 ․ 피억압 대중들의 단결투쟁을 그들 간의 정치적 차이 ․ 분화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가장 폭넓게 만들어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단결의 목적은 자본가들과 자본가 정부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그 동맹세력이 자본주의 타도라는 목표를 보다 앞당길 수 있기 위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조건을 확보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그러한 단결의 목적이다. 이런 점에서 공동전선은 일차적으로 계급투쟁의 필요로 인해 제기된다. 바로 이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의 적에 대해 공동행동이 호소, 촉구될 때 단순히 거기에 반응하는 것을 넘어 언제나 스스로 앞장서서 그러한 공동행동을 촉구하고 제안해야 한다.

 

1.5 올바른 공동전선 정책을 펴면 노동자계급 내부의 개량주의, 무정부주의, 전투적 노조 만능주의(생디칼리즘), 중도주의(중앙주의), 그리고 각종 부르주아 ·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강령들의 한계를 폭로할 수 있다.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동요하거나 일관되지 못한 일체의 지도부를 혁명적 사회주의 지도부로 대체할 수 있다. 매 단계에서 공동전선은 혁명조직으로 노동자들의 충원을 더욱 늘어나게 해 주고, 혁명조직이 대중조직에 더욱 더 깊숙이 뿌리내릴 수 있게 해줄 것이다.

 

1.6 이 두 가지 점을 고려하여 공동전선 전술은 독립적인 혁명조직의 유지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 혁명조직은 국가권력 장악과 자본주의 타도를 위한 이행강령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이러한 혁명조직은 공동전선에 스스로를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대오로 참가해야 한다. 다른 한편, 광범위한 비(非)혁명적 대중 -- 미조직 대중과 타 정치세력에 의해 조직된 대중 모두 -- 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공동전선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공동전선의 필요는 그러한 광범위한 비혁명적 대중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1.7 그 때문에 공동전선의 핵심 초점은 어떻게 혁명정당과 노동자계급 간의 관계를 올바로 세워낼 것인가에 있다. 혁명정당과 노동자계급 간의 이 관계라는 것이 상시적이면서도 변화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공동전선이 펼쳐지는 영역 -- 즉 계급투쟁 -- 도 마찬가지로 상시적이므로 공동전선은 정확히 말하면 어디서나 필요하고 도처에서 제기되는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런 또는 저런 형태로, 이런 무대 또는 저런 무대에서 반복적으로 배치 운용되는 보편적인 전술인 것이다.

 

1.8 공동전선은 권력 장악에 이르기까지 줄곧 한 파트너와 행동을 계속 같이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공동전선을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데 그렇더라도 그러한 반복된 사용이 프롤레타리아 전위정당의 총괄적인 전략 체계 내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전술이지, 그 범위를 넘어설 순 없다. 이 전략에는 반드시 전위정당의 독자적 행동이 포함된다. 공동전선은 폭넓게 다양한 형태로 전개할 수 있는데, 그런 만큼 끊임없이 체결됐다가 파기되곤 한다. 공동전선을 위해 노동자계급 전위가 자신의 요구강령을 대중조직의 각종 비혁명적 지도부가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이는 혁명강령 자체를 수동적 선전의 영역으로 떨어뜨리고, 선동을 당면요구 수준으로 제한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1.9 공동전선은 차별화된 통일이다. 공동전선은 엄밀히 제한되고 미리 규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하는 공동행동이다. 공동전선은 또한 공동전선 파트너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동반한다. 공동행동 없이는 자본가계급의 공격을 분쇄하거나 새로운 성과물을 쟁취할 수 없고, 한편 파트너에 대한 비판 없이는 쟁취한 성과를 유지할 수도 혁명을 전진시킬 수도 없다. 공동전선 전술을 적용하는 데서 범하는 오류는 모두 이 차별화된 통일을 포기하고 혁명조직의 임무와 계급의 임무를 형식적으로 동일시할 때 일어난다.

 

1.10 초좌익주의 오류는 혁명 강령을 한결같이 공동전선 요구안과 대립시키는 데서 비롯한다. 초좌익은 개량주의/중도주의 지도부가 공동전선을 거부할 수밖에 없게 최후통첩을 던지고는 그들을 폭로할 수 있다는 헛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 현실에서 그러한 ‘폭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량주의 지도자들이 폭로되는 것은 이들이 혁명적 전술 또는 전략을 실행에 옮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대중의 당면한 이해를 위해 투쟁할 능력과 의지가 없어서이다. 종파주의자는 자신이 기회주의적 유혹에 굴복할까봐 두려워 실제 계급투쟁의 지형 위에서 평가받기를 회피한다.

 

1.11 다른 한편, 기회주의자는 투쟁강령을 출발점으로 삼길 기피한다. 심지어는 계급투쟁의 객관적 필요가 제기하는 단일 요구조차도 회피하려 한다. 이른바 현재 대중의 의식에서, 더 나쁘게는 대중조직 지도부들이 받아들일 만한 수준에서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공동전선을 위해 혁명가들이 제출하는 제안의 범위는 ‘완전한 강령’은 아니겠지만 개량주의 지도부들의 소심한 제안은 물론이고 대중의 일반적 의식보다도 상당히 앞설 것이다. 공동전선의 목적은 대중(특히 그 선진 부위)의 현재 의식을 해당 시기의 긴급한 과제(적들이 가하는 공격의 성격에서 제기되는 바의 과제)에 연결시켜 주는 것이어야 한다.

 

1.12 공동전선은 전략이 아니다. 현재의 투쟁에서 권력 장악까지 망라하는 공동전선 강령 같은 것은 없다. 혁명 조직은 해당 공동전선에 걸맞게 혁명 강령 중 특정 부분을 골라 제출한다. 실제 투쟁에서 더 광범위한 세력을 결집하는 데 필수적이라 판단되는 그러한 부분을 제출한다. 공격의 성격과 계급 역관계에 대한 판단을 내린 뒤에 혁명조직이 제출하는 구체적인 슬로건과 요구는 투쟁 속의 단결을 이끌어내 적의 공격을 격퇴시키고 새로운 전진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요구는 구체적이고 정확해야 한다.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아무 관계도 없는 일체의 작위적인 요구나 이데올로기적 겉치레를 피해야 한다.

 

1.13 공동전선에서 내걸 투쟁요구들의 성격은 도식적으로 범주화할 수 없다. 구체적인 공동전선 제안이라면 당연히 오직 한 유형의 요구 -- 예를 들어 당면한 경제적 요구, 민주적 요구, 이행적 요구 -- 로만 성립할 수 있다. 특정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일련의 결합된 행동을 목표로 하는 몇 가지 요구안을 가지고 공동전선을 제기하고 체결할 수 있다. 심지어 단일 요구를 가지고 체결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공동전선은 파업이나 무장행동 같은 단일 행동일 수도 있고, 그보다 길게 지속되는 행동 캠페인일 수도 있다. 공동전선 제안은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요구를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즉 개량주의 지도부가 그 요구를 거부할 경우 그 영향 하에 있는 대중을 전취하고 그 지도부를 폭로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그러한 구체적인 행동 요구가 공동전선 제안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전선 요구안에 혁명적 요구들이 많이 빠졌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혁명적 정세에서, 예를 들어 소비에트 같은 요구를 공동전선 요구안에 집어넣는다면 그것은 수동적 선전주의와 종파주의의 표시일 따름이다. 반면, 계급투쟁이 대대적으로 솟구치는 조건에서는 공동전선의 최고 표현인 소비에트 유형의 투쟁기관 건설이 필수불가결한 요구가 된다.

 

1.14 요구들은 반드시 명료하고 정확한 투쟁방법(예를 들어 시위, 파업, 정방대 등) 및 조직형태(예를 들어 파업위원회, 소비에트 등)와 함께 제기되어야 한다. 따라서 공동전선은 그 공동전선이 대항하고자 하는 적의 공격의 성격에 따라 형태와 지속 시기가 다양할 수 있다. 일련의 다양한 또는 반복되는 행동을 통합 조정하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만든 위원회 같은 조직들도 공동전선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공동전선은 행동 그 자체(예를 들어 시위)를 넘어, 행동의 준비와 사후 평가까지 포함한다.

 

1.15 공동전선은 요구를 공유하고, 공동전선 파트너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포기함이 없이 규율 있게 그 요구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자에게 열려 있다. 공동전선은 그 공동투쟁의 목표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자라면 그 누구와도(‘악마와도’) 체결할 수 있다. 원칙 있는 공동전선인지 아닌지는 블록 파트너의 신뢰성 여부가 아니라 목표와 투쟁방법이 원칙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 혁명가들이 적진의 분열을 활용할 수 있다면, 그리고 개량주의자들을 그들 자신의 강령과 충돌하도록 몰아갈 수 있다면, 이것은 원칙 있는 공동전선이다.

 

1.16 공동전선에서 인정되는 ‘비판의 자유’에는 블록 파트너가 공동전선의 과제들을 수행하는 데서 보이는 동요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들의 정치적 태만과 협정 불이행에 대한 비판도 포함한다. 따라서 혁명과 개량주의 사이의 중요한, 결국엔 결정적이기까지 한 차이들을 제쳐두면서까지 하는 공동의 선전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공동전선과 관련된 공동 출판물(예를 들어 파업위원회 회보, 시위를 조직하기 위한 전단 등)은 오직 공동전선의 요구와 목표를 선전·선동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공동행동과 비판 사이의 관계는 미리 정해진 공식 같은 것은 없다. 공동행동 전이든 그 진행 중에든 종료 뒤든 파트너를 비판할 권리를 한 순간도 놓지 않는다. 이러한 권리를 언제, 어떤 형태로 행사할 지는 주어진 상황에 따른 구체적 판단에 달려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비판의 수행은 의무이다.

 

1.17 공동전선은 대중(평당원, 평조합원)과 지도부 모두에게 제기해야 한다. ‘오직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이라는 사상은 자멸적이고 초좌익적인 함정이다. 이런 직접적이고 일방적인 호소로 노동자들이 자신의 지도부를 쉽게 포기할 수 있다면, 애초에 공동전선 같은 것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도부를 향해 공동전선 호소를 하는 목적은 이들을 행동에 나서게 하여, 대중에게 연설조의 폭로가 아니라 이들 지도부의 행동에 대한 대중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이들 지도부의 한계가 치명적인 것임을 입증시켜 보이기 위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공동전선은 개량주의 지도부들과 정식으로 협정을 맺기보다는 제안 단계에 머물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공동전선이 개량주의 조직에 속한 평회원들을 상대로 한 선동과 대중적인 선전 캠페인 수준에 머문다.

 

1.18 급진화된 노동자들을 개량주의 지도부로부터 떼어내는 데 일부 성공을 거둔 경우에도 공동전선은 아직 뒤에 남아 있는 노동자들에게 그 완전한 효력과 힘을 잃지 않는다. 개량주의 지도부가 혁명가들과 공동으로 행동하기를 거부한 경우에는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때는 그 지도부에 대한 규탄과 평회원들을 향한 행동 제안을 결합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그 지도부에 대해 행동에 나서도록 압박을 조성해야 하는데, 이것이 성공하면 훨씬 더 많은 층을 행동으로 끌어내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1.19 공동전선을 깨는 것은 공동전선을 결성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할 수 있다. 공동전선이 그 취지에 맞게 진행되고 목표가 달성될 경우(또는 실패로 결론 날 경우) 해산하거나 재설정되어야 하며 참가한 세력들 사이에서 평가를 조직하고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 공동전선이 단지 외교적 또는 문필적 의례로만 유지되어 파트너들이 행동할 의무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 또는 파트너들이 약속을 이행치 않거나 계급의 적과 타협하는 방식으로 공동전선의 목표를 사보타지 내지는 훼손하는 경우, 파트너들이 진지하게 공동전선을 다른 대중적 세력들에게 확장하는 것을 거부하고 종파 수준의 규모로 공동전선을 제한하는 경우, 이 모든 경우에선 공동전선의 파기가 불가피해진다. 그렇더라도 가능한 한 평조합원 지도부와는 공동투쟁을 지속하여 공동전선 자체의 독자적인 지도력을 세우고 비(非)혁명적 조직으로부터 건강한 평회원들을 공동전선 대오로 획득해야 한다.

 

1.20 지금까지 기술한 사항들은 원칙 있는 공동전선이라면 핵심적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공동전선이 끝까지 원칙을 잃지 않고 성공적으로 될 것임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오직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만이 공동전선 제안의 올바른 기초가 될 수 있다. 어떤 공동전선 요구들이 허용될 수 있고 필요한지, 또 어떤 세력에게 이런 요구들을 제안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수년간 계급투쟁에 개입하면서 축적한 지도력과 경험이 필수적이다.

 


 2. 노동자 공동전선

 

2.1 노동자 공동전선의 목표는 자본가계급에 맞서 노동자계급이 최대한의 행동 통일을 이루도록 하는 데 있다. 계급적 독립의 관철이 노동자 공동전선의 핵심이다. 그 지도적 원리는 혁명 조직이 대중적인 노동자 조직의 개량주의 · 중도주의 지도부들에게 ‘자본가계급과 단절하라!’며 계급적 과제를 제기하고 도전장을 던지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단결은 자본가계급 및 자본가 국가, 자본가 정당과의 분립을 의미한다. 노동자 공동전선의 원리는 위에서 언급한 원리를 노동자계급의 단결투쟁 -- 방어적인 것이든 공세적인 것이든 -- 에 적용한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공동전선의 원리는 가장 제한적이고 방어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전체 부르주아 질서를 겨냥한 공세적인 행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어느 경우에든 노동자 공동전선은 개량주의 · 중도주의 지도부들에 대한 도전을 포함한다. 준(準)혁명적 · 혁명적 상황에서 그러한 도전은 이들 지도부들에게 ‘자본가계급과 단절하라! 노동자정부를 위한 투쟁에 나서라!’라는 계급적 과제를 제기하는 도전으로 발전할 수 있다.

 

2.2 노동자 공동전선 원리는 노동조합에서 광범하게 적용된다. 정말이지 노동조합은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에서 ‘공동전선’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그리고 자본주의에 맞서서 노동자들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공동전선이다. 노동조합은 그 본성상 가능한 한 가장 광범위한 임금노동자 층을 포괄해야 하는 공동전선이므로 혁명가들은 노동조합에 당의 꼬리표를 붙이거나 노동조합을 당 지도부에게 기계적으로 종속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노동조합은 조직적으로 자주적인 기구이어야 하며, 또 그렇게 유지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노동조합이 상대적으로 덜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에게도 ‘사회주의의 학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원칙 있는 태도는 노동조합을 비정치적으로, 중립적으로 묶어 두려는 시도와 어떤 공통점도 없다. 혁명정당은 공공연하고 정직하게 지도력을 건 투쟁을 전개하고 이 속에서 조합원들의 신뢰를 얻는다.

 

2.3 혁명적 중핵은 노동조합에서 지도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도상에서, 혁명적이진 않지만 전투적이고 민주적인 세력들과 한시적 동맹, 즉 공동전선을 결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때 공동전선의 과제는 노동조합을 계급투쟁에 복무시키고 노조관료에 대한 평조합원의 민주적 통제를 확립하고 나아가 궁극적으로 관료층 자체를 없애는 데 있다. 이러한 공동전선은 중요한 정세적 전투와 관련된, 일회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노동조합의 민주화와 더 전투적인, 나아가 혁명적인 전술의 승리를 위한 보다 체계적인 캠페인을 만들어나갈 필요도 있다. 이러한 평조합원운동을 위해서 요구안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미리 확정할 수 없다. 모든 상황에 두루 맞는 고정된 요구안 같은 것은 가능하지 않다.  

 

2.4 노동조합에서 혁명정당은 자신의 강령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즉 (공장평의회, 소비에트, 노동자 민병대와 더불어) 노동조합을 혁명의 도구로 재편하는 투쟁을 펼쳐야 한다. 그러나 평조합원운동은 공동전선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혁명정당이 평조합원운동을 발의, 주도하는 경우에도 그 운동의 구체적 행동강령이 어떠해야할지는 계급투쟁의 객관적 조건, 대중의 가장 전투적인 부분의 의식 발전 수준과 방향, 현 지도부의 정치적 성격, 혁명 전위의 자체 역량 등에 달려 있다. 당의 목표는 전투적인 평조합원들을 당의 강령 쪽으로 획득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필시 당은 좀 더 제한된 수준의 당면행동 요구안을 받아들이거나 심지어는 스스로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때 당은 자기 한계의 이러한 기초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공동전선 파트너에 대해서도 비판할 자유를 견지해야 한다. 당의 노동조합 방침은 공동전선의 행동과 구분되어야 하며, 결코 같은 것이 되어버려서는 안 된다. 공동전선과 당의 노동조합 프락션(파견망)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당의 노동조합 프락션은 당원과, 당의 노동조합 강령 전체를 받아들이고 당의 규율에 따라 행동하는 자로 구성된다.

 

2.5 단결에 대한 촉구가 가장 강하게 제기되는 노동조합에서 혁명가들은 이것을 존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단결을 위한 투쟁에서 선봉에 서야 한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고용주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의 단결을 강조하며, 부르주아지와 함께 하는 단결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투쟁의 단결을 주장한다. 노동조합 관료와 개량주의 지도부들은 행동하지 않는 단결, 굴복하는 단결, 고용주 및 부르주아지와 함께 하는 단결을 강조한다. 투쟁하는 단결로 가는 도상에서 계급의 전위는 선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혁명가들은 또한 노동자 공동투쟁이 승리하려면, 조합관료가 투쟁을 배신할 때 이들 관료와 ‘분리’하는 것이 불가피함을 지적해야 한다. 배신적인 지도부와의 불가피한 분리는 심지어 노동조합 자체의 분열로 이어질 수도 있다. 혁명가들은 노동조합의 분열을 좋아하지 않으며, 소규모의 무기력한 ‘적색노조’를 만들어 거기서 정치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분열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반대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노동조합이 파멸적인 배신을 때리고 테러와 축출을 자행하는 것에 대해 평조합원의 상당 부분이 이에 대해 항의하고 나서지 못하더라도, 이 경우 ‘공동전선을 깨고’ 새로운 노동조합 결성에 나서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2.6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분명한 조건이 있다. ① 기존 노동조합의 상당 부분 조합원들이 새로운 노동조합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대중투쟁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② 분열과 단결 파괴의 책임이 개량주의 관료 및 이들의 배신, 그리고 전투적 노동자들에 대한 단속과 탄압에 있다는 것을 계급 전체에게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 ③ 새로운 노동조합이 모든 노동자 투쟁에서 다른 노동조합들과의 공동전선을 결성하겠다는 열의를 보여야 한다. ④ 혁명가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이 노동자 내부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이해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에 기초하여 노동조합들을 재통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⑤ 새로운 노동조합이 협소한 직종적인 또는 순전히 경제적인 관심사를 뛰어넘어 계급투쟁의 더 폭넓은 정치적 측면들을 받아 안고서, 초과착취 당하며 각종 차별로(비정규직 차별로든 여성 차별로든 인종 차별로든) 억압당하는 미조직 계층을 조직하겠다는 방침을 내야 한다.

 

2.7 요약하자면, 노동조합에서 혁명가들의 공동전선 방침은 노동조합을 질적으로 재편시키기 위한 투쟁이어야 한다. 즉 자본주의의 안전판 구실을 하고, 자본가와 자본가 국가를 대리하여 통제하는 관료가 지배하며, 조합원 가입 자격도 노동귀족으로 제한되는 그러한 노동조합에서 계급의식적인 다수 프롤레타리아트를 포괄하는 조직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조합은 고립적이고 부문적이며 경제적인 계급의식(맹아적 또는 잠재적 형태의 계급의식)을 정치적이며 실로 혁명적인 계급의식으로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전위 투사들을 조직하는 혁명정당의 개입이 필요하다. 즉 혁명정당이 노동조합에서 다양한 형태의 공동전선을 활용하여 노동조합을 사회주의적 의식의 학교로, 혁명적 계급투쟁의 도구로 변모시키기 위해 개입하고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2.8 총파업 시에 혁명가들은 대중이 자신의 투쟁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서 관료들의 배신을 넘어설 수 있는 평조합원 파업위원회의 구성을 요구해야 한다. 혁명가들은 격렬한 계급투쟁 시기에 더 민주적이고 더 전투적이며 더 광범위한 대중조직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 노동자평의회는 여기서 나온다. 여기에서 혁명가들은 대중총회에 의한 대표자 선출 및 소환제를 위해 투쟁할 것이며, 노동자평의회의 외연 확대와 중앙집중화를 위해, 그리고 나아가 노동자평의회의 무장과 병사들의 전취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2.9 초좌익 등 노조 기권주의자들은 노동자 공동전선을 노동조합으로 국한시켜 왔다. 그러나 노동자 공동전선은, 노동자당을 자처하며 실제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상당 부분을 조직하고 있는 정당들한테도 마찬가지 효력을 가지고 적용할 수 있다. 특히 계급투쟁 고조기에는 그 효력이 노동조합 차원에서보다 훨씬 더 크다. 노동자 공동전선의 목적은 개량주의 지도부들을 노동조합 사무실이나 의사당, 연회장, 또는 계급의 적과의 은밀한 회합 등에서 끌어내 가두로, 파업대오로, 나아가 혁명적 상황이라면 바리케이드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개량주의 지도부들이 자본가계급의 하수인임이 입증될 것이라는 사실이, 또는 이들이 평조합원 위에 군림하여 전횡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이, 심지어는 이들이 혁명 전위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을 살해했다는(예를 들어 독일사민당 지도부가 로자와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한 경우처럼) 사실이 결코 이들 지도부에게 공동전선을 제안하는 것에 대한 반대 논거가 될 수 없다. 결정적인 것은 이 배신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의 신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에 대한 통제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꾸로 말해 이것은 혁명정당이 아직까지 이들 대중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이들 사이에 조직된 지도력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2.10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단결은 이와 같이 ‘지도부(지도력) 없이’ 또는 ‘아래로부터만’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식의 시도는 공동전선을 통해 대처하고자 한 바로 그 문제를 건너뛰는 것이다. 그러나 건너뛰겠다고 해서 개량주의 지도부의 영향 하에 있는 노동자들을 그 지도부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 개량주의 지도부에게 실천 행동을 제안해야 한다. 공동전선 전술은 여러 단계를 거친다. 그 첫 단계가 공동전선을 제안, 촉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량주의 지도부들에게 그들의 습관적인 계급협조를 포기하고 계급의 적과 싸울 것을 계급적 과제로 제기하며 도전장을 던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제안은 거부될 것이다. 이 경우 공동전선은 개량주의 지도부들이 투쟁할 의지도 능력도 없음을 선동적으로 폭로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 투쟁이 고양되고 혁명정당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상황에서는 개량주의 지도부들이 공동전선 결성을 놓고 협상할 수밖에 없다고 느낄 것이다. 개량주의자들과의 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은 가능한 한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합의한 행동의 범위, 개량주의자들의 주저와 비겁함 때문에 생기는 행동의 한계, 그리고 그 지도부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필요성 등을 대중에게 정확히 말해 줘야 한다. 혁명정당은 자체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전술과 조직과 민주적 책임을 위한 실천 방안들을 제의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개량주의자들의 배신을 미연에 방지하고, 배신이 일어나더라도 투쟁에 미치는 교란 효과를 최소화하고, 배신한 지도자들에게 최대한의 불명예를 안김으로써 그들의 지지자들을 혁명적 지도력 쪽으로 대거 결집시킬 수 있다.

 

2.11 노동자 공동전선은 자본가계급의 정당이나 그 대표자들과 맺는 모든 블록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전선이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타 계급 출신의 동조적인 개인이나 조직된 세력이 지지할 경우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종적 또는 민족적으로 억압받는 집단들의 완전하고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며 국가 탄압이나 파시스트의 공격에 맞서 투쟁할 때 이들 피억압 집단들 내부의 부르주아 세력이(예를 들어 유럽에서 흑인 부르주아지나 이슬람 부르주아지) 이 투쟁에 협력하겠다면 그들 부르주아 세력과도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공동 행동을 한다고 해서, 예를 들어 반파시즘 노동자 공동전선에 흑인 부르주아지나 이슬람 부르주아지를 위해 특별히 무슨 ‘예약석’ 같은 것을 따로 놓아두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노동자계급은 소부르주아지나 무소속(‘독고다이’) 부르주아 명망가들로부터 불확실한 동맹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의 독자적인 요구 -- 당면한 요구든 역사적인 요구든 -- 를 뒤로 돌리거나 낮춰서는 안 된다.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가 아닌 나라들에서 자본가계급 정당은 어떤 체계적인 진보적 행동도 할 수가 없다. 혁명가들은 이들 자본가 정당이 노동자 조직의 공동전선에 참가하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혁명가들은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이 자본가계급의 정당과 함께 하는 정부, 즉 인민전선/민주대연합 정부에 대한 어떠한 지지도 거부한다. 만약 대중적 노동자 조직과 자본가 정당 사이에 인민전선 또는 조직된 사이비 공동전선이 구성된다면, 혁명가들은 자본가 정당을 축출하기 위한 전술을 펴야 한다. 자본가 정당은 대중투쟁을 방해하거나 배신하며, 개량주의 지도부들은 자본가 정당의 지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구실을 끊임없이 내세워 사활적인 투쟁을 회피하려 한다는 사실을 노동자들에게 입증해 보임으로써 말이다.

 

2.12 노동자 공동전선 전술은 개량주의 정당에게 자본가계급과 단절하고 노동자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에 나서라고 요구를 거는 데까지 확장될 수 있는 전술이다. 이 요구는 첨예한 정치적 위기 순간에 주요 당면 슬로건이 될 수 있다. 무엇이 진정한 노동자 정부인가? 부르주아지를 무장해제하고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며, 은행과 대규모 독점자본 같은 자본가 권력의 핵심 고지들을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장악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결정적인 조치들을 취하는 정부가 바로 진정한 노동자정부다. 명백히 이러한 조치는 선거나 의회정치 지형 위에서 실행 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개량주의 영향 하의 노동자들에게 혁명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선거로 당신들의 당이 집권하면 당이 그러한 조치를 취하도록 강제하라. 만약 당신들의 당 지도부가 사적소유를 위협하는 진지한 조치를 취할 경우 자본가계급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올 내전 선포에 대비하여 당신들의 노동조합과 당신들의 당을 전시체제로 돌입시켜야 한다. 우리는 당신들 당의 선거 승리를 비판적으로 지지할 것이며 자본가계급의 공격에 맞서 당신들의 당을 방어할 것이다.”
의회 승리와 독립적인 대중동원이 결합하면 그것으로 충분한다고 믿는 중도주의 영향 하의 노동자들에게 혁명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대중투쟁을 선거 일정과 의석 확보에 종속시킴으로써, 헌법의 외피 하에 무장한 사람들의 특별기구인 국가의 진짜 핵심을 공격하지 못하고 만다면 이는 자살행위다. 부르주아 장교단과 최고사령부의 수중으로부터 병사와 무기를 전취하지 않는 ‘노동자정부’는 진정한 노동자정부가 아니다. 노동자민병대를 무장시키고 경찰력을 무장해제하여 해산시키지 않는 ‘노동자정부’는 진정한 노동자정부가 아니다. 이런 정부를 진정한 노동자정부로 대체하지 않는다면 반혁명 쿠데타에 의해 전복 당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3. 공동전선과 선전그룹

 

3.1 선전그룹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소규모 조직들 간의 블록을 정말로 ‘노동자 공동전선’으로 볼 수 있는가? 그렇다. 다만 그 블록이 행동을 위해 더 폭넓은 세력의 결집을 지향하고, 대중적 노동자 조직들을 주어진 투쟁 목표 쪽으로 전취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한에서만 그렇다. 물론 그러한 블록이 이후 전취될 대중조직의 골간 단위나 좌익적 · 전투적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러한 블록은 자신이 공동전선의 작은 맹아일 뿐이라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어야 하며, 대중조직의 지도자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는 계급 행동의 단결에 대한 요구와 대립하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공동전선의 소형 모조품을 만들어내는 데 따르는 종파주의적 유혹과 기회주의적 유혹이 있다. 기회주의적 유혹의 귀결은 혁명적 그룹의 독자적인 목소리와 행동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종파주의적 유혹의 위험은 이런 취약한 ‘공동전선’을 대중적인 개량주의 또는 중도주의 조직 내에서의 현실 투쟁과 대립시키는 데 있다.

 

3.2 선전그룹들 간의 ‘혁명적’ 공동전선이라는 유치한 발상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것이 조직들 간의 영구적 동맹 형태든 공동신문 형태든 또는 선거블록 형태든 말이다. 특히 선거블록의 경우 혁명적 조직의 독립적인 노선을 숨기고 경시하거나, 중도주의 파트너에게 혁명적 신임장을 교부하거나, 완전한 혁명적 강령 대신 공동의 프로그램이나 요구안을 채택한다면 그러한 선거블록은 혁명적 조직을 기회주의로 전락시키는 길이 될 것이다. 선전그룹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지도력을 위한 투쟁을 수행하기에는 아직 매우 미약한 소수파로서 조직 활동을 대부분 대중투쟁 참여와 결합된 선전 임무에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빠지기 쉬운 커다란 유혹은 중도주의 조직이나 개량주의자 개인들, 또는 무당파 인자들과 장기 지속적인 또는 반(半)영구적인 블록이나 프론트 또는 캠페인을 결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혹은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상대적 고립의 산물이자, 이에 절망한 나머지 기회주의적 양보를 통해 장애물을 뛰어넘으려는 바람에서 비롯한다. 이런 유혹이 생기면 혁명적 강령이라는 ‘짐’을 내버리게 되고 그것을 선진부위에게 참을성 있게 설명할 필요도 포기해 버린다.

 

3.3 소규모 그룹한테는 자신의 대중 선전·선동과 자신의 선거 캠페인에 대한 대체수단을 찾는 것이 더 쉬어 보인다. 또 파업이나 시위 등에 독립적으로 개입하는 것보다 그에 대한 대체수단을 찾는 것이 더 쉬어 보인다. 이는 부지불식간에 혁명적 그룹의 정치활동에서 많은 부분이, 특히 당면한 부분적인 요구의 영역에서는 중도주의자, 전투적 조합주의자 등과 공동으로 수행될 수 있고, 심지어 그렇게 수행되어야만 한다는 견해로 발전한다. 따라서 부지불식간에 ‘나머지’ 강령은 장기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고, 강령에 대한 어떠한 강조도 수동적 선전주의, 심지어 종파주의로 간주된다. 이런 입장으로 빠져듦으로써 지금 여기서 대중에게 명확한 독자적인 혁명적 관점이 전달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도리어 중도주의 그룹과의 선전 블록에 의지하며 이를 공동전선이라고 가장함으로써, 최소 공통분모가 승리하게 된다. 선전 블록의 가장 우익적인 조직이 거부권을 가지거나, 아니면 아주 당연한 것처럼 혁명적 입장과 중도주의/개량주의 입장 사이의 ‘타협’이 블록 유지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로 받아들여진다. 혁명가가 중도주의 선전을 훨씬 더 많이 유포하면서 자신의 선전은 작은 비중으로 거기에 덧붙이는 수준으로 유포한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3.4 이러한 유혹이 커지고 유혹에 진 대가도 커지는 영역으로 노동조합이나 선거만한 것이 없다. 여전히 선전 단계에 있는 혁명적 그룹이 거대한 과제 앞에서 자신의 소규모 조직역량과 무력함을 가장 잔인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 이 영역들이다. 노동조합에서는 공동의 적, 즉 조합관료의 집권 분파 -- 그것이 사민주의자건, 스탈린주의자건, 부르주아 ·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건 -- 에 대항하는 반대파 분자들 그 누구든 그들과 블록을 형성하라는 압력이 자연히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반대파가 보다 전투적인 계급투쟁적 입장을 대표하거나 보다 확대된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면, 그들을 비판적으로 지지하고 그들과 연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시적 블록은 블록 파트너의 정치적 · 조직적 오류를 조금도 방어하지 않는 것을 비롯해 엄밀하게 공동전선 원칙에 입각하여 운용되어야 한다.

 

3.5 또한 중도주의/개량주의 동맹세력과의 대동단결론 식 논의는 일절 피해야 한다. 아나코 생디칼리스트(전투적 노조 만능주의자)나 조합주의자는 지도부에 대항하여 평조합원을 단결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며 그 이외에 다른 건 필요 없다는 주장 아래 바로 이런 강령 없는 무정형의 블록을 호소한다. 이 조합주의자들은 실제로는 노동조합 뒤에 자신의 정치조직을 숨긴다. 그러나 평조합원, 즉 조합원 대중이 언제나 그리고 자생적으로 올바른 방침을 알아차리는 것은 아니며, 노동조합은 지도부들(그리고 정말이지 조합 임원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목적은 숨김없는 혁명가로서 공개적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노동조합 지도력을 전취하는 한편 우리의 지도력을 민주적 통제와 소환 등에 따르도록 가져가는 것이다.
반(反)관료 운동으로 평조합원을 조직할 필요와 혁명조직이 노동조합에서 수행해야 하는 전체 과업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전자는 다양한 형태의 합법 공동전선 영역이다. 후자는 당의 노동조합 프락션의 임무이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거나 뒤섞는 것은 혁명적 원칙과 전술의 날을 무디게 하는 중도주의자임을 뜻할 것이다. 사업장 현장위원회 선거나 전국적 조합 선거를 위해 공동 후보나 공동 후보자명부를 제출하게 되는 경우에도 공동 선거공약이 가진 한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중도주의 후보들이 혁명가들에 의해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추천되는 것이 아니라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점은 노동조합 내 혁명조직의 프락션과 혁명조직의 노동조합 행동강령(또는 현장 행동강령) 지지자를 명확히 구분할 때 확고히 수립될 수 있다.

 

3.6 혁명적 대표자들에게 제기되는 일반적인 전략적 문제 때문에 혁명적 후보는 지자체나 의회 선거 영역에서 각종 발표 및 출판의 자유를 보유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당면 정세에 초점을 맞춘 완전한 혁명적 입장(행동강령)을 내걸어야 한다. 그렇지만 특정 상황에서 비민주적 법률이나 규정으로 인해 소규모 혁명 그룹이 중도주의 또는 심지어 개량주의 그룹(또는 당)과 결합하지 않으면 후보 출마가 봉쇄될 수도 있다. 가능한 데서는 혁명적 공약의 완전한 분리가 유지되어야 한다. 모종의 공동 공약이 필요한 경우에도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서 자신들이 만족시킬 수 있는 범위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즉 ‘공산주의 후보명부’, ‘사회주의 후보명부’, ‘혁명적 후보명부’, ‘적색 후보명부’ 등 수사적 과장을 해서는 안 된다. 혁명가는 선출될 경우, 자신이 행동에 옮길 완전한 혁명적 공약을 제출해야 한다. 또한 블록 파트너에 투표할 것을 촉구하는 경우에도 이들 파트너를 충분히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선출한 노동자계급 유권자들에게 책임지는 의무를 분명히 하는 한편, 동시에 중요한 모든 쟁점에 대해 ‘공동전선’의 규율이 아니라 당의 규율을 따를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시 총괄적 원칙을 강조하자면, 제한적인 행동을 위한 한시적 블록을 위해 혁명 조직과 그 공약의 전체 프로필을 가리거나 모호하게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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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2호(통권10호)] <6월 재선거 이후>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그리스 계급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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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재선거 이후]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그리스 계급투쟁

                                  

                          
홍수천

 

 

  6월 17일 그리스 재선거 결과는 중도우파 신민주당이 2.77%라는 근소한 표차로 2위 급진좌파연합 시리자를 누르고 1위를 했다. 앞서 그리스 언론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부르주아 언론들과 유럽연합(EU) 각국 정부들이 한 몸이 되어 시리자가 승리하면 유럽연합에서 퇴출되어 그리스 경제는 완전한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며 그리스 유권자들을 집요하게 협박해댔었다.

 

  1위 득표 정당에 50석을 보너스로 얹어주는 비민주적인 선거제도 덕에 신민주당(29.66%)은 71석을 얻은 급진좌파연합 시리자(26.89%)에 비해 58석이나 더 많은 129석을 확보했다. 사회당의 33석(12.8%)과 민주좌파당1)의 17석(6.3%)을 끌어들여 의회 다수파를 형성, 친긴축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제 신민주당에게 문제는 의석수가 아니라 새 연정의 긴축 프로그램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저항이다.

 

  이 저항의 잠재적 규모는 시리자의 표가 지난 5월 1차 선거 이후 6주만에 16.8%에서 26.89%로 또 다시 대대적으로 늘어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리자 앞에는 투표에서 얻은 대대적인 지지를 현장과 거리의 힘으로 전환시켜야 할 과제가 던져졌다. 민영화와 실업, 임금 · 연금 · 복지 삭감에 반대하겠다는 시리자의 공약을 지지한 165만 명의 투표자들을 투쟁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 새 긴축정부가 긴축 프로그램을 실시하려고 할 때 곧바로 이 긴축정부를 끌어내릴 무기한 전면 총파업 조직을 위한 실질적인 캠페인으로 이들 165만 명의 반긴축 지지자들이 나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공산당(KKE)은 지난 1차 때 8.8%에서 이번에 4.5%로 표가 반토막이 났다. 25만9천표를 잃었다. 시리자와의 공동전선에 거듭 걸림돌을 놓고 유럽연합-IMF의 긴축 프로그램과 단절하는 정부를 구성하라는 요구를 끝내 거부한 그리스공산당의 종파주의에 대해 노동자 민중들이 환멸, 분노하여 응징한 결과이다. 또한 친긴축 정부가 들어서서 긴축 프로그램을 실시할 권리를 사실상 허용해주는 한편 ‘틈새’ 전략으로 자신들의 생존을 유지하며 수동적으로 “변혁”을 기다리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도 대중들의 분노를 샀다.

 

 

새 긴축정부 - 과연 시간을 벌 수 있을까?

 

  6월 선거 이래 그리스의 계급투쟁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유럽 · 미국의 제국주의자들과 그리스 지배계급은 공갈 협박과 비민주적 선거제도를 수단으로 또 하나의 긴축정부를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리자를 중심으로 결집한 반긴축 세력으로 인해 그들의 계산이 하마터면 완전히 뒤헝클어질 뻔했기 때문에 트로이카(유럽연합 · IMF · 유럽중앙은행)와 유럽의 제국주의 정부들은 당장은 유화적인 몸짓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 민중에게 신체포기각서나 다름없는 긴축 각서(memorandum; 지난 3월 14일에 체결한 ‘2차 그리스 구제금융 프로그램 양해각서’)를 재협상할 수 있다는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신민주당 대표 사마라스와 사회당 대표 베니젤로스는 이에 대해 짐짓 “강경”하고 “단호”한 척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속이 빤히 보이는, 짜고 치는 고스톱임을 누가 모르랴. 유럽연합(EU)과 바로 그 긴축 각서를 체결한 장본인이 바로 이들 정치인들과 이들 정당이다. 이들이 그 가혹한 긴축 조치들을 실시했고, 보호관세법을 폐지했고 전체 그리스 국민의 반 이상을 실업으로 내몰았다. 최저임금과 연금의 대폭 삭감과 대대적인 직장폐쇄를 통해 그리스 노동자들과 청년들에게서 생존권과 함께 미래를 빼앗아 갔다. 자본가와 부자들을 살리기 위해 노동자 민중을 공격한 이 정책에 대해 그들은 답해야 한다.

 

  시리자의 진출이 EU 지도부들을 놀라게 한 덕분에 이제 신민주당과 사회당은 각서의 세부사항을 놓고 흥정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트로이카와의 과거 협력을 숨기고 싶어 한다. 은행과 대기업이 구제 받으려면 노동자 민중들이 위기의 고통을 전담해야 한다는 데 동의해 준 것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 한다.      

 

  또한 그들은 분노와 저항으로 거듭 거리에 나선 수백만 대중(노동자와 청년과 중간계급 하층 서민들)이 결집하는 것을 막고 투쟁의 동력을 차단하고 싶어 한다. 시위와 광장점거, 24시간/48시간 총파업, 직장폐쇄에 맞선 작업장 점거와 노동자 통제 및 직접경영, 지역별 대중총회들의 확산 등을 통해 노동자 민중들의 저항이 강화되고 고조되어 가는 것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 한다.

 

  한 마디로, 새 긴축정부는 시간을 벌고 싶어 한다. 5월 및 6월 선거에서 EU와 IMF의 지시에 대해 반대표를 던진 투표자 다수 -- 주로 시리자에게 대거 투표한 좌파 유권자 -- 를 “재협상”과 “성장 정책” 따위의 말로 속여서 조용히 있게 만들고 싶어 한다.

 

  새 긴축정부는 운동을 약화시키고, 노동자 민중들의 저항이 하나로 통합되고 정치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EU의 ‘파트너’들을 설득하여 일부 양보를 얻어내길 바라고 있다. 계급의 취약 부위, 즉 상대적으로 덜 계급의식적이고 덜 전투적인 부분들을 사기저하 시키고, 그리고나서는 한 두 차례의 결정적인 전투를 통해 가장 전투적인 부문을 패배시키는 것이 저들의 계획이다.

 

 

이 위기는 자본주의의 위기다.

 

  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있기 때문에 새 긴축정부가 이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을 지가 의문시된다. 그리스 경제를 파탄내고 그리스 사회를 마비 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단순히 정권의 실정과 부패가 아니라, 2008년에 터져 나와 여전히 체제 전체를 휘감고 있는 자본주의 자체의 역사적 위기이다.   

 

  위기의 근본 원인은 그 모든 외견상의 역동성(신기술, 생산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쇠퇴하는 체제라는 사실에 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생산에 투자해서 거둘 수 있는 이윤율이 -- 그 이윤량은 여전히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 점점 더 하락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이윤 -- 즉 노동자가 생산한 부불(不佛) 잉여가치 -- 이 거액의 신기술 투자비용 대비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소유자들은 생산을 포기하고, 보다 높은 이윤율을 챙길 수 있는 부동산, 금융, 원자재, 국채에 대한 투기로 전환한다. 생산이 쪼그라들면서 체제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투기열풍이 가실 줄을 모른다. 결국 거품이 빵 터질 때까지는 말이다.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는 궁극적으로 이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그나마도 일시적인 해결책이다. “과잉” 자본, 즉 보다 취약한 자본의 파괴 -- 폐업, 즉 기업 및 은행의 도산 -- 와 노동자 대량해고 및 착취 강화 · 궁핍화이다.

 

  이에 더해 자본가들 간에, 자본가 국가들 간에 시장과 원료와 값싼 노동력을 위한 세계 재분할 투쟁이 격화되어 전쟁으로 치닫는 속에서 또한 과잉 자본의 파괴가 이루어진다. 지금 독일 같은 나라가 위기를 자국 노동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유럽연합의 약한 국가에게 전가시키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시에 우리는 지금 어디서나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계산서를 노동자, 청년, 주민대중들에게 떠넘겨 치르도록 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격이 자행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이 모든 것이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은, 자본주의 아래서 생산은 주민의 필요 충족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이윤 증대를 위해 조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자계급에게는 오직 단 하나의 해결책만이 있다. 사회주의혁명!

 

 

두 가지 가능성

 

  현 위기는 궁극적으로 오직 둘 중 하나의 방식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대다수 주민대중의 승리에 의해서든가, 아니면 자본주의 반동(즉 제국주의와 그리스 자본가들의 동맹)의 승리에 의해서든가.

 

  사마라스 정부(신민주당 주도의 새 연립정부)는 이번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적’ 국민 위임을 내걸고 후자의 길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사마라스의 ‘민주주의’ 뒤에는 이미 시위자들과 청년들,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겨냥하여 잔인하게 사용된 바 있는 억압 국가기구가 버티고 서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무대 옆에서 대기하다가 운동 진압을 위한 ‘민주적 수단’만으로 충분치 않으면 즉각 투입될 수 있는 것이 이들 경찰, 군대 등 국가기구이다. 여기에 더해 지금 세가 불어나고 있는 파시스트 돌격조들이 이미 이주자들과 홈리스 생활자들, 급진 청년들과 좌파를 표적으로 삼아 공격에 나섰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지금 허비할 시간이 없다. 노동자계급이 지금 희망의 계급이다. 좌파는 대중에게 희망의 푯대이다. 신민주당의 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좌파 투표의 대대적인 증가, 특히 시리자의 거대한 진출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최근의 공격을 역전시키는 반격을 조직하고 해고와 실업의 위협을 걷어내고 EU와 IMF의 강요를 거부하는 단호한 행동 없이는 이러한 전투적 분위기도 탕진될 것이다.

 

  명백히 지난 5월 선거와 6월 재선거 사이의 시기는 어느 당이 통치할 것인가 만이 아니라 어느 계급의 이익을 위한 통치일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했다. 비록 사마라스가 승리했지만, 그의 정부에 맞선 방어적 투쟁은 불가피하게 다시 한 번 권력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현재 시리자 대표 치프라스가 사마라스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정부 정책에 대해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모습은 치프라스와 시리자 다수분파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비쳐주는 불길한 조짐이다. 새로운 선거와 신민주당의 ‘실패’를 기다린다면 이는 재앙이 될 것이다. 지금 거대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는 시리자는 스스로를 계급투쟁 정당으로, 직접행동 정당으로 재편할 수 있고 재편해야만 한다. 만약 좌파가 전투적인 공동행동을 밀어가는 데서 비종파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동시에 개량주의로 퇴보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면 그러한 재편이 가능해질 수 있다.

 

  당 강령의 핵심에 노동자정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새겨 넣어야 한다. 즉 정치총파업 속에서 형성되는 사업장별 지역별 파업위원회들과 정방대 등 투쟁기관들에 바탕을 두고 대중봉기에 의해 권력에 오르는 그러한 노동자정부만이 진정으로 대중의 처지를 개선시키고 참호로 둘러싸인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결정적으로 깨뜨리는 프로그램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혁명정당

 

  수년간 그리스는 혁명적 사태전개를 거쳐 오면서 거듭 반복해서 준혁명적 상황들을 맞았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첨예한 혁명적 상황으로 귀결되지 못한, 그리하여 그 어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도 결과하지 못한 이유는 다름 아닌 그리스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 -- 진정한 혁명정당의 결여 -- 에 있다.

 

  그러한 정치세력의 창출이 모든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 청년들 그리고 급진적인 반자본주의 좌파 활동가들 앞에 놓인 핵심 과제이다. 최근 몇 년간 그들은 제국주의와 긴축 정부의 공격에 맞서 거듭 싸워 왔다. 그러나 거기서 실종되어 있는 것은 조직된 혁명적 노동자당이다. 권력 장악에 이르는 도상의 핵심 지점들을 표시해 주는 이행요구 프로그램에 바탕을 둔 노동자혁명정당이다.

 

  이러한 당을 만드는 투쟁이 진공 속에서 이루어질 순 없을 것이다. 150만 명 이상이 이번 선거에서 시리자에게 투표했다. 수만 명은 아니더라도 수천 명이 시리자의 대열을 늘릴 것이다. 한편 그리스공산당은 그 기회주의와 종파주의가 뒤섞인 모습으로 인해 신임을 완전히 잃었다. 급진적이고 공공연한 반자본주의 좌파는 최근 몇 년간 투쟁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을 이해하지 못하고 끌어당기지 못했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혁명가들은 이제 그리스 노동자계급의 대다수가 오늘 희망을 걸고 있는 곳에, 즉 시리자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리자를 민주집중제에 기반한 계급의식적인 정당으로 되게 하기 위한 캠페인을 펼쳐야 한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시리자를 개량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벗겨낼 조직된 캠페인에 착수하여 시리자가 혁명적 강령과 조직구조를 채택하도록 투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투쟁은 노동조합에서 관료층에 맞선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 노동총연맹(GSSE)과 공공노조연맹(ADEDY)의 상층부는 사회당을 매개로 끊임없이 “정부와의 협력”을 모색한다. 노동조합들을 횡적으로 관통하는 평조합원 반대파 운동을 구축해서 노동조합을 부문적인 경제적 방어 기관에서 전 계급적인 투쟁 기관으로 재편하는 투쟁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공동전선 결성을 위한 투쟁

 

  기존 정당들과 조직들에 대한 비판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리 옳고 필요한 비판이라 하더라도 결코 그리스 노동자계급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최선진 부위를 설득하는 데도 충분치 못할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를 비롯해 모든 피착취 피억압자들을 하나로 묶어세우고 이끌 당을 원한다.
  따라서 혁명가들은 혁명적 조직, 반자본주의 조직, 사회주의 조직, 아나키즘 조직들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개량주의 조직들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노동자 조직들의 공동전선 창설을 위한 가장 일관된 투사여야 한다. 그러한 공동전선이 결코 정치적 차이를 묻어버리는 것을 뜻하지 않지만, 정부와 자본가들에 맞선 투쟁에서 행동 통일에 가장 우선순위를 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공동전선을 통해서만이 운동의 현재 약점과 현 지도부들의 방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동전선을 모든 수준에서 제안해야 한다. 일부 도시와 지역에서는 특정 투쟁을 위한 공동행동이 조직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폐쇄에 맞선 투쟁과 점거한 농장을 방어하는 투쟁에서는 즉각 공동전선이 가동되어야 한다. 공동행동이 파시스트의 공격에 맞선 정방대 조직들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노동자 조직들에게 그들 회원 및 지지자들이 그러한 공동전선에 적극 참가하도록 조직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요청과 촉구가 이들 조직의 지도부만이 아니라 평회원들에게도 다가가도록 해야 한다. 공동전선이 단지 당 또는 노동조합 등 조직 지도부들 간의 협정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공동전선의 목표와 투쟁방법은 운동 전체에 걸쳐 두루 공개적으로 널리 토론되고 민주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지도자들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통제가 가능해 질 것이고, 또한 누구나 -- 기존의 미조직 노동자들과 실업노동자들, 그리고 아직 조합원이나 좌익정당 당원이 아닌 자들을 포함하여 -- 능동적으로 가담하는 것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공동전선이 중심이 되어 모든 작업장에서, 모든 지구에서, 모든 대도시와 중소도시, 그리고 농촌공동체에서 정기적인 대중집회를 열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노조들 간의 분할이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열,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사이의 분립도 행동 속에서 극복될 수 있고, 지역 수준에서 실업노동자와 청년, 여성, 이주자뿐만 아니라 소상인과 농민, 하층 중간계급들도 인입될 수 있다.

 

  사업장 현장과 지구의 총회에서 실행위원회를 선출해서 대중들에게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고, 실행위원회 위원들을 필요할 경우 언제든 즉각 소환, 대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그러한 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질, 즉 과단성과 민주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위원회들이 처음에는 실제적이고 지역적인 문제들을 중심으로 구성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지역 수준에서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대부분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요구들과 제안들, 해결책들에 대해 그 초점을 정확히 잡아서 지역, 광역, 전국 수준에서 각각 처리되어야 할 것이다. 총회와 대표자평의회가 투쟁의 중심이 되어 기존 국가기구와 대자본에 맞서는 대항력을 형성할 수 있고, 형성해야 한다. 이미 등장하고 있는 자주적 조직의 요소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 평의회로, 이중권력 기관으로 발전해야 한다.

 

 

대표자평의회들의 전국적 네트워크

 

  단지 모든 구역들에서 그러한 기구가 창설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가능한 한 빠르게 전국 대표자회의를 소집해서 한 데 모여야 한다. 그래서 이 전국 대표자회의가 전체 운동을 대변하고 운동의 전투 전략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대표자회의가 그리스 혁명이 직면한 다음가 같은 핵심 과제들을 놓고 의견 일치를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정부의 계속되는 공격과 트로이카의 긴축 강요에 맞선 무기한 전면 정치총파업의 선언과 조직.

 

둘째, 대중의 고통과 궁핍화를 종식시키고, 그리스 국민의 경제 ․ 정치 생활을 옥죄고 억누르는 자본가들의 통제권과 장악력을 해체해 들어가는 조치들을 중심으로 노동자계급을 결집시키기 위한 비상 프로그램(즉각적인 행동 강령)의 확정.

 

셋째, 노동자 민중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현 긴축정부를 타도하고, 평의회들과 투쟁하는 노동자조직들 및 노동자정방대 ․ 민병대들에 기반하여 비상 프로그램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노동자정부의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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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혁명은 유럽과 나아가 전 세계의 계급투쟁을 확대 심화시킬 열쇠이자 동시에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 되었다. 그리스 노동자계급과 청년층, 이주자 그리고 주민대중과의 연대가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의 계급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세력들과 우리가 함께 나누어야 할 당면 임무다.

 

  국제주의자로서 우리는 그리스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또한 우리의 투쟁이라고 본다. 그리스 민중의 궁핍과 참화를 불러온 자본주의의 위기는 일국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고, 오직 국제적 저항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우리에게 이것은 유럽혁명과 나아가 세계혁명을 통해 자본의 독재와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의 상황은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계급투쟁의 앞에 놓인 길을 여는 열쇠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 상황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 판단을 제시하여 그리스 노동자들과 청년들, 좌익조직 성원들과 토론하고, 그리하여 어떻게 전 세계적인 연대와 저항을 만들어나갈지에 대한 공동의 인식에 도달하고자 한다.    

 

 


 

<각주>

 

1) 작년에 시리자에서 오른쪽으로 떨어져 나간 민주좌파당은 이번 재선거에서 신민주당 주도 연정에 참가하기 위해 기존의 중간자적인 태도를 바꿔 시리자를 집중 비난하는 선거 캠페인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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