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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4] 통합진보당 사태와 새로운 노동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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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사태와 새로운 노동자당

 

 

양효식

 

 

 

 

    1. 통진당 사태 - 평가와 전망

   1)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최종 파산 → 국민정당으로 ‘새로나기’
   2) “재창당 수준의 혁신” - 야권연대에 더욱 목을 매다
   3)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안정화 구도도 함께 파탄 나고 있다

 

     2. 야권연대와 단절하는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

   1) 야권연대에 문을 열어놓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로는
      보수우익의 공세에 맞선 투쟁조차도 일관되게 수행할 수 없다
   2) 야권연대 구도를 돌파할 대안 정세구심과 대안 지도력의 문제
   3) 계급적 독자성은 일차적으로 정치 강령의 문제다

 

     3. 새로운 노동자당 - 전망과 과제

   1) 계급적 독립을 수복하기 위한 대적 투쟁
   2) 혁명정당 건설투쟁을 다시 전진시키기 위한 전술
   3)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

 

 

 

 

 

1. 통진당 사태 - 평가와 전망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는 수면 아래서 진행되고 있던 당의 성격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모두들 전망하듯이 이번 사태를 경과하면서 통진당은 그 나마 남아 있던 노동자 정당의 흔적마저 지워버리고 완전한 ‘국민정당’으로 넘어갈 태세다. 지금 수면 위에서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는 당내 파벌 간 쟁투와 권력 이동은 사실 이러한 변화의 외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은 연초에 민노당이 국참당과 통합하여 통진당을 결성했을 때,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에서 공공연한 부르주아 정당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정당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자본가 정치세력인 국참당과의 통합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민주당과 다를 바 없는 완연한 부르주아 정당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고 봤던 것이다. 민주당과는 달리 통진당이 민주노조운동에 기반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로서의 민노당에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고, 아직은 공식적으로 민주노총에, 즉 조직 노동자들 사이에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통진당 사태로 인해 그러한 역사적 뿌리가 지워져버리고 노동자 지지 기반도 대거 떨어져나갈 상황이다. 물론 민주노총 지도부를 비롯한 통칭 ‘우파’ ∙ 국민파 관료들이 당장 통진당을 포기하고 독자적 길을 모색할 것 같지는 않다. 조합원들의 이탈을 부추기거나 방치할 것 같지는 않고, 자신들이 단속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아직 이탈을 막고자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총선에서 통진당과 야권연대 지지에 앞장섰던 그들로서는 자신들도 이번 통진당 사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고, 따라서 조합원 대중들 사이에서 그 권위와 신망이 급격히 실추되고 있는 상황이다. 통진당 사태가 안고 있는 거대한 파장과 폭발력을 놓고 볼 때 향후 민주노조운동 내에서 통진당 배타적 지지나 야권연대 대세론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적 다수파의 지위조차 결정적으로 흔들리는 상황까지 예상된다.

 

  통진당이 설사 분당 사태로까지 가지 않더라도 노동자들 사이에서 더 이상 ‘통진당으로는 안 된다’는 정서와 논리가 확산될 수 있는 토양이 광범위하게 형성될 것이다. 통진당이, 예컨대 노동자계급에 대한 장악력을 가지고 다른 대안적인 노동자 정당이 들어서는 것을 차단하는 데 그 동안 성공해 온 서유럽 사민주의 정당들 같은 지위로 안착할 가능성은 이제 결정적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제 남은 가능성은 국민정당, 즉 공공연한 부르주아 정당으로 안착하는 길이겠지만, 민주당의 존재로 인해 그러한 여지마저도 극히 협소한 조건에서 결국 예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민주당의 위성정당화와 나아가 흡수통합의 길이다.

 

 

1)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최종 파산 → 국민정당으로 ‘새로나기’

 

  이와 같이 통진당 사태는 민노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최종 파산을 확인사살 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이번 통진당 사태는 한편으론 이러한 파산을 딛고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착수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정치지형이 형성되고 있음을 뜻한다. 통진당이 국민정당화하면서 퇴거한 자리에 노동자 정치운동의 공백 상태가 생겨났고, 이것이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을 그 어느 때 보다도 긴급한 일정 위에 올려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통진당 사태의 본질과 함의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이번 사태를 계기로 신 당권파가 밀어붙이고 있는 “재창당 수준의 혁신”과 이에 따른 당내 권력 이동에 대해 기존 당권파는 ‘쿠데타’로 간주하여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지만, 무대 위 배우들의 행위 그 배후에서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는 당의 질적 변환, 즉 부르주아 정당으로의 ‘새로나기’에 대해서는 당권파 입장에서도 -- 그것에 대해 그들이 의식하든 못하든 -- 저항하거나 반대할 수 없다. 아니,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참당과의 통합부터 총선 야권연대까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대연합 ‘공동’정부로 나아가기 위한 이 모든 포석이 애초부터 당권파 자신들이 발기한 사업이고 자신들이 가장 앞장서서 밀어갔던 전략적 행보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의회주의를 통한 제도권 진입 야망에 눈이 멀어 그러한 민주대연합 전략노선이 결국은 자신들을 삼켜버리고 있는 이번 사태로까지 이어질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뿐이다. 

 

  당권파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자본가계급과 손잡는 민주대연합을 위해서 언제든 희생시킬 수 있는 하위 전술이다. 민주대연합은 전략 목표이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그 목표를 위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수단이 목표와 충돌할 때는 내다버리고 다른 수단을 채택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당 중심의 야권연대 연립정부로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당의 성격 변화도, 즉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버리고 국민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 당권파의 민주대연합 전략노선이다.

 

  다만 그 과정을 자신들이 주도하고, 결과물의 최대수혜자도 자신들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당내 ‘패권주의’와 ‘비민주성’은 당권파가 결코 놓아버릴 수 없는 자기 권력 근거다.  이 권력 근거가 이번 사태로 철저히 해체될 상황이다.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에서 공공연한 부르주아 정당으로의 이행을 완성하고 민주당 중심의 민주대연합정부 전략을 일관되게 밀고 갈 최적의 주체가 누구여야 하는가를 이번 사태가 정리정돈해 준 것이다. NL 당권파보다는, 당 행사에서 애국가를 불러야 한다는 국참당계가 미션을 수행할 최적의 주체다!

 

  당내 패권주의와 비민주성에 대한 단죄와 청산은 이러한 정리정돈을 위한 매개이다. ‘재창당 수준의 혁신’의 방향은 단순히 당내 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을 명분으로 한 ‘혁신’의 실 내용은 국참당계 중심의 당내 세력 재편을 통한 국민정당/공공연한 부르주아 정당으로의 이행의 완성이다. 그리고 야권연대 강화를 위한 이러한 최적의 ‘내부 정비’를 통해 민주대연합 연립정부로 거침없이 내딛는 것이다. 

 

  결국 통진당 사태의 본질은 이러한 이행을 더욱 더 순탄하게 하고 가속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궁정쿠데타다. 기존 당권파가 이행에 반대해서가 아니다. 워낙 상식 이하의 패권주의와 비민주성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 있어 더 이상 믿고 맡길 수가 없기 때문에 당권 경질이 불가피한데도 평화적 당권 교체에 완강히 저항하니 ‘혁신 비대위’ 등의 기습적인 정변이 동원된 것이다. 이것이 사태의 본질이고 전말이다.

 

 

2) “재창당 수준의 혁신” - 야권연대에 더욱 목을 매다

 

  이러한 이행과 그 이행의 촉진을 위한 당내 권력이동 정변에 대해서는 통진당 밖으로부터도 강력한 지원과 엄호사격이 쏟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겨레 같은 자유주의 언론과 ‘진보진영’의 자유주의 인사들이 여기에 앞장서고 있다. 그들은 당권파의 비민주성과 회의장 폭력사태를 빌미로 “진보정치의 재구성이 절실하다”면서 사실상 부르주아 정당으로의 신속한 이행을 채근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을 가장 숨김없이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 김기원 교수의 5월 17일자 한겨레 칼럼 <개혁적 진보는 살아 있다>이다. 김기원은 지난 희망버스 운동에 대해서도 정리해고 철폐는 사회주의에서나 가능하므로 비현실적인 구호라며 비난했던 자이다. 그는 이번 통진당 사태에 대해서도 “시장과 국가의 질 향상, 즉 공정한 시장경쟁과 민주적 효율적 국가를 추구”하는 ‘개혁적 진보’를 강화시키는 것이 통진당 혁신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정리해고 철폐 요구를 사회주의와 엮어서 함께 “비현실적”이라는 악선동을 펼쳤던 것에 이어서 이번에는 통진당을 아예 건전 국민정당으로 육성, 강화시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김기원의 주문이 뜬금없는 별종 같은 제안이 아니라 사실 기존 당권파든 신 당권파든 통진당 제세력이 모두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정리해고 철폐 요구를 버리지 않고서는, 비정규직 철폐 요구를 구부리지 않고서는 민주대연합 정부로까지 이어지는 일관된 야권연대의 길을 갈 수가 없다는 것을 김기원만이 아니라 통진당 제세력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기원이 무슨 영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의 주장이 통진당 입장에서 특별히 새로운 것도 아님에도 여기서 인용한 이유는 그가 정리해고 철폐 요구에 대한 비난에서부터 ‘개혁적 진보’로의 통진당 혁신 방향까지 이번 사태를 거쳐 통진당이 기착할 종착점을 아주 노골적으로 표현해주는 미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가 최종 마무리되고 나서 통진당이 마침내 도달할 정체성은, “정리해고 ∙ 비정규직 철폐”는 비현실적 요구라며 가장 ‘솔직하게’ 반대하고 나설 세력이 주도하는 공공연한 부르주아 정당일 것이다.

 

  이와 같이 통진당 안팎에서 앞 다투어 주문하고 있는 ‘재창당 수준의 혁신’과 ‘진보 재구성’의 내용을 보면, 통진당 사태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더욱 더 확증시킨다. 한편, 혁신을 요구할 자격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 그 자신이 혁신의 대상인 민주노총이 지금 조건부 지지 철회를 내세우며 통진당에 요구하고 있는 이른바 ‘노동 중심’의 혁신 방향을 통진당이 수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우리의 평가를 변경시키지 않는다. 구 민노당 체제에서든 현 통진당 체제에서든 현장활동가들과 평조합원들의 주도성을 담보할 수 있는 구조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고, 노동자들을 표 찍고 돈대는 기계로 전락시키는 의회주의가 계속 지배하는 조건에서 ‘노동 중심성’은 당 내에서 단지 노조관료들의 권한과 위상을 강화시켜 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부르주아 정당, 국민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것과 이러한 종류의 ‘노동 중심성’과는 전혀 충돌할 일이 없다.  

 

 

3)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안정화 구도도 함께 파탄 나고 있다

 

  거대한 파장을 안고 있는 통진당 사태는 지금 전 세계 대공황과 자본주의 체제 위기 심화를 배경으로 해서 전개되고 있음을 상기하자. 남한의 경우도 지금 유럽 재정위기 격화로 인한 유럽계 자금 이탈이 본격화하면서 세계공황의 한 가운데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고 있다. 증시폭락, 환율급등, 공공부채 ∙ 가계부채 위기 폭발, 은행 도산 등 금융공황 국면을 거쳐서 산업공황으로 폭발할 내적 조건이 남한 경제에도 무르익어 있다. 수백조원대로 쌓여가는 대기업 사내유보금은 투자 대비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생산적 투자처가 없다는 것, 그래서 자본의 과잉축적 ∙ 과잉생산 위기가 수면 아래서 내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금융공황을 계기로 이 실물경제 위기가 폭발한다면, 작년부터 중소업체 중심으로 발생하고 있는 기업도산과 직장폐쇄는 작은 예고편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한 구조조정, 정리해고, 긴축, 민영화 등 자본의 위기 전가 공격도 전면화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위기와 함께 정치위기도 격화되고 있다. 그 동안 미국과 함께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부르주아 지배체제를 유지해 왔던 유럽이 뒤흔들리고 있다. 총파업과 전투적 가두시위 등 대중투쟁이 일상화하고 있고, 그와 함께 선거에서도 기존 양당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좌우 양극화가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한 축을 담당해 왔던 기존 사민주의 정당을 대신해서 그보다 왼쪽에 있는 세력들이 선거에서 약진하고 있다. 프랑스 대선 1라운드에서 좌파전선의 멜랑숑 돌풍이나 그리스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SYRIZA)의 제2당 부상은 모두 자본주의 정치위기가 격화되고 있는 사례들 중 일부이다. 결선에서 승리한 프랑스 사회당 올랑드 후보가 긴축 반대를 전면에 내건 것도 대중투쟁의 고양과 그 여파로 인한 사회 전반적인 좌경화 물결의 압박을 받아 그 동안의 ‘사회자유주의’ 노선(블레어의 제3의 길, 슈뢰더의 신중도 등 신자유주의의 사민주의적 버전)을 뒤로 물리고 좌클릭 몸짓을 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에서도 자본주의 정치위기는 아직 초기적인 형태지만 이미 불거지고 있다. 이번 통진당 사태로 다시 확인되고 있는, ‘민노당을 통한 의회주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최종 파산’이 바로 자본주의 정치위기의 한 발현이다. 이 파산과 함께 부르주아 지배체제 안정화 구도도  파탄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통진당 사태를 계기로 현재 보수우익의 이념공세가 통진당과 야권연대를 겨냥해 광란적으로 펼쳐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총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서유럽처럼 남한에서도 의회주의 ∙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을 통해 노동자들을 체제내화 시켜내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안정화에 관건이 아닐 수 없다. 객관적으로 민주노동당에게 그런 배역이 주어졌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국참당과의 통합, 민주당과의 야권연대 강화 등을 거쳐서 이번 통진당 사태에 이르면서 그러한 역할도 끝장났다. 서구 사민주의 정당처럼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으로 안착하지도 못한 채 파산해버리고 국참당계를 중심으로 공공연한 부르주아 정당으로 넘어가면서 노동자들의 지지 기반이 대거 떨어져나가는 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민주노총이 설사 통진당 사태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무시하고 현재 조건부 지지철회에서 다시 지지 회복으로 입장을 선회한다 하더라도 대중적 수준에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다시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민노당 운동의 최종 파산과 함께 제도권 노동자 정당을 통한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안정화 가능성도 날아가 버리고 있는 것이다. 통진당이, 예를 들어 압도적인 조직노동자 기반을 가지고서 대안적인 노동자 정당을 허용치 않는 서유럽의 사민당, 노동당, 사회당 같은 지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이제 결정적으로 닫혀 버렸다. 이번 사태 이후로 노선적으로도 더욱 우경화하고 노동자 지지 기반도 대거 날아가 버린 통진당에게 남은 길은 민주당과의 야권연대에 더욱 목을 매고 민주당의 부속 정당 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심지어 흡수통합의 길로 빨려드는) 것뿐이다.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안정화를 도모하는 총자본의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전락하여 노동자들의 체제내화에 별 역할을 할 수가 없는 통진당은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는 정당이다.

 

  야권연대/민주대연합 전략이란 것도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을 통해 노동자 대중을 자본가 야당의 지지부대로 만들어 안정적인 부르주아 양당체제(한국에서는 보수정당 대 민주대연합블록)를 구축할 수 있을 때 총자본에게 의미가 있는 것인데, 민주당의 부르주아 위성정당(민주당 별관)으로 전락해버린 통진당의 경우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러한 민주대연합 전략을 실행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고 공공연한 부르주아 정당만 있는 미국식 양당체제 같은 것이 안착될 여지도 없다. 남한의 민주당이 미국 민주당처럼 노동조합운동의 자발적 지지를 끌어낼 정도의 헤게모니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계급적으로 별 의미를 갖지 못하는 한국노총이라면 모르겠지만 민주노조운동에 관한 한 민주당이 그럴 수 있을 가능성은 없다. 어쨌든 이와 같이 노동자들, 특히 조직노동자들의 체제내화가 차질을 빚으면서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안정화 구도도 깨지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 경제가 조만간 세계공황의 한 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면 지배체제의 불안정과 정치위기 또한 전면화할 것이다. 그리고 개량주의의 물적 토대가 문제가 되면서 현재 유럽의 계급투쟁 상황이 더는 먼 나라 얘기가 아닐 것이다.

 

 


  2. 야권연대와 단절하는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

 

 

1) 야권연대에 문을 열어놓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로는 보수우익의 공세에 맞선 투쟁조차도 일관되게 수행할 수 없다

 

 이러한 정세 조건과 이를 배경으로 민노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최종 파산 및 국참당계를 중심으로 한 통진당의 국민정당화는 이 글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식 무대에서 노동자 정치운동의 공석 상태를 낳고 있다. 객관적으로 이것은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을 긴급한 일정 위에 올려놓고 있다.

 

  현재 통진당 사태가 당장은 선진노동자들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정치 기피증과 냉소주의를 더욱 부추기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새누리당과 조중동 등 보수우익 세력들의 전방위적인 이념공세와 공안몰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노동자들 사이에 정치적 위축감이 조성될 수 있다. 이를 빌미로 야권연대/민주대연합에 대한 반대전선을 뒤로 물리고, 이른바 반‘파쇼’ 전선, 반새누리당 전선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노동운동 진영 일각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반MB 야권연대 강화론에 다름 아닌 이러한 주장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위축을 타개하는 방향이 아니라 또 다시 노동자운동을 민주당과 야권연대의 꽁무니부대로 전락시켜 보수우익의 공세에 맞선 대항을 오히려 봉쇄하는 방향이다. 야권연대에 반대하는 전선을 명확히 하는 대안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정치투쟁의 전면화를 통해서만이 보수우익의 공세에 대항하는 실제 전선도 형성할 수 있다.

 

  통진당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지도부를 비롯한 각급 노동조합 관료 등 야권연대/민주대연합 지지 세력들은 자본가계급의 한 분파와 손잡는 그들의 계급협조 노선으로 인해 반새누리당, 반MB 투쟁조차도 일관되게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총선 전후로 계속 폭로되고 있다. 현재 보수우익의 공세에 대해 민주당은 물론이고 통진당과 민주노총 지도부가 보이고 있는 수세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라. 야권연대와 단절하지 않고서는, 따라서 야권연대에 대당하는 새로운 대안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명박정권과 새누리당에 반대하는 일관된 비타협적 투쟁을 담보할 수 없다. 설사 ‘변혁적’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내건다 하더라도 또 다른 형태의 야권연대/민주대연합/인민전선에 문을 열어 놓고 추진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면 ‘변혁’은 고사하고 반MB/반새누리당 투쟁조차도 일관되게 수행할 수 없다.

 

 

2) 야권연대 구도를 돌파할 대안 정세구심과 대안 지도력의 문제

 

  이와 같이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의 대전제이자 대원칙은 야권연대와의 단절이다. 현 계급투쟁 정세에서 야권연대와의 단절은 그 어떤 새로운 노동자당 프로젝트에서도 절대적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노동자투쟁들과 개별 투쟁전선들이 민주노총의 야권연대 구도를 벗어나서 전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야권연대에 대당하는 대안 정세구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에 대한 기획을 담고 있지 않은 그 어떤 새로운 노동자당 프로젝트도 정세적으로 대안이 될 수 없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각급 노조관료들을 통해서 노동자운동에 행사되고 있는 야권연대의 정세적 규정력에 대당하는 대안 지도력이 되지 못하는 그 어떤 새로운 노동자당 프로젝트도 정세와 계급투쟁에 무가치하며 따라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야권연대와 단절하는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는 이와 같이 정세적 대안 지도력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계급적 독자성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프로그램, 즉 강령의 문제이다. 강령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는 제1의 담보물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또 미래의 어느 시점에 결정적인 정세가 도래할 때나 명확히 하면 되는 문제도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당면 투쟁전선을 포함하는 정세 대응 프로그램의 문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폐지부터 재벌 문제, 정부 구성 문제(야권연대/민주대연합 연립정부냐 야권연대와 단절하는 노동자정부냐)까지 이들 사안에 대한 노동자계급 자신의 프로그램을 갖고 대(對) 자본 ∙ 대 정권 전선을 치느냐 아니면 자유주의 자본가 정치세력 주도의 야권연대와 제도정치권의 프로그램에 휩쓸리고 결국 그 꼬리로 전락하느냐의 문제다. 따라서 “비정규직 ∙ 정리해고 없는 세상” 슬로건을 비현실적 요구라며 비난하는 악선동에 정면으로 맞서서 그 요구를 “재벌 몰수 ∙ 국유화”와 “노동자정부” 요구로까지 연결시키는 그러한 정치 프로그램을 내걸고 투쟁하는 당만이 진정한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를 구현할 수 있다.

 

  자본가 정당과 함께 하는 야권연대 연립정부(민주대연합 정부)는 정리해고 ∙ 비정규직 철폐 요구를 사회주의에서나 가능한 요구라며 기각할 것이다. 따라서 야권연대에 대한 정치적 태도 문제를 회피하면서 정리해고 ∙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일관되게 밀고 갈 수 없다. 그 요구를 “비정규직 차별 축소”, “정리해고 요건 강화”로 구부리지 않고 일관되게 밀고 간다면 “노동자정부” 요구를 비껴갈 수가 없다. 정부 문제에 대해서, 정치투쟁 요구에 대해서 기권하면서 정리해고 ∙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비타협적으로 전개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리해고 ∙ 비정규직 철폐 요구는 고립적인 요구로서가 아니라 일련의 정치 프로그램의 한 부분으로서 배치되는 요구여야 한다. 이러한 정치 강령을 배제하는 종류의 새로운 노동자당 프로젝트는 현실가능성을 핑계 대며 “비정규직 차별 축소”, “정리해고 요건 강화” 등 야권연대 공약 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결국 현재의 진보신당처럼 조직적으로는 독립적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정치 내용에서는 결코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라고 할 수 없는 당을 또 하나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진보신당 세력이나 또는 그 좌익을 구성하는 좌파노동자회처럼 비정규직 ∙ 정리해고 철폐 요구를 이러한 정치투쟁의 요구들과 연결시키기를 회피하는 방식으로 추진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면, 말로는 아무리 비정규직 ∙ 정리해고 철폐에 동의하는 체 하더라도 결국 강령에서는 야권연대 세력들의 공약과 다를 바 없는 당이 될 것이다. 그래서 조직적으로 아무리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형식을 취한다 하더라도 정치 내용에선 결국 민노당/통진당과 마찬가지로 계급적 독립의 과제를 배신하는 당에 불과할 것이다.

 

 

3) 계급적 독자성은 일차적으로 정치 강령의 문제다

 

  이와 같이 새로운 노동자 정당이 계급적 독자성과 정세적 대안 지도력을 담보하는 당이어야 한다면, 건설될 당이 어떤 성격의 당이어야 하는지가 분명하다. 그 당은 반드시 위와 같은 혁명적 정치강령을 가진 혁명적 노동자 정당이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새로운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 혁명정당 대신 또 다른 진보정당이나 애매모호한 ‘좌파정당’으로는 조직 형식만이 아니라 정치 내용에서까지 일관되게 계급적 독자성을 견지할 수 없다.
  야권연대에 반대하고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를 열망하는 노동자들은 새로운 노동자 정당이 또 다른 의회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 건설로 귀결되지 않도록 전면적인 정치투쟁에 나서야 한다. 혁명정당 대신 초기 민노당을 복원하는 수준으로, 또는 좌파 사민주의 정당 정도로 귀결된다면 민노당 파산의 궤적을 -- 이번에는 압축적으로 급속히 -- 되풀이 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야권연대 구도로 다시 빨려들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이 혁명정당 창당으로 귀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은 그냥 당위가 아니라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이 성공하기 위한 유일한 담보 조건이다.

 

  계급적 독자성을 담보하는 새로운 노동자 정당은 당연히 ‘노동 중심’이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가 말하는 ‘노동 중심’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현재 <노동정치 제안자 모임>을 추진하고 있는 중앙파 세력들이 주장하는 ‘노동 중심’도 계급적 독자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이 노동 중심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하지만, 지금까지 야권연대에 맞서 계급적 독자성을 위한 그 어떤 정치투쟁, 정치선동도 수행하지 않아 왔다. 야권연대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담보할 그 어떤 정치 프로그램도 발전시켜 본 바도 없고, 그럴 의지도 보인 바 없다. 오직 민주노총 내 ‘우파’/국민파에 반대한다는 범좌파 블록으로서의 종파적 정체성 이외에 그 어떤 계급적 독립을 위한 투쟁도 회피로 일관해 온 이런 세력이 중심이 돼서 새로운 노동자당이 만들어진다면 그 당은 시작부터 야권연대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한편 상층 노조관료 중심이 아닌 설사 건강한 의미의 노동 중심이라 하더라도 정치투쟁의 프로그램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을 최소강령 수준으로 제한해서는 통진당과 민주노총의 야권연대 전략구도를 돌파할 수 있는 대안 노동자 정당이 될 수 없다. 특히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체제 위기 정세에서 비정규직 ∙ 정리해고 철폐 요구를 노동자통제 하에 재벌 몰수 ∙ 국유화와 노동자정부 같은 정치투쟁의 요구와 결합시키는 이행강령에 반대하고 최소강령 수준으로 제한하는 정치세력화라면 아무리 노동 중심으로 조직상의 독자성을 갖추더라도 결국 내용적으로 계급적 독자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정치투쟁의 계기에서 야권연대 계급협조에 문을 열어놓을 것이다. 진정한 노동 중심성이라면 계급적 독자성을 일관되게 견지할 수 있는 정치적 프로그램(강령)으로까지 이어지는 혁명적 노동 중심성이어야 한다.

 

 

 
  3. 새로운 노동자당 - 전망과 과제
 

 

1) 계급적 독립을 수복하기 위한 대적 투쟁

 

  민노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최종 실패했다. 이번 통진당 사태는 이미 민주대연합/야권연대로 만신창이가 되어 온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최종 파산을 확인시켜 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로써 공백 상태로 남게 된 자리는 어떤 식으로든 메워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의 필요성과 의제가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고,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그 백지수표를 어떤 내용으로, 어떤 방법으로 채울 것이냐이다. 즉 어떤 강령 ∙ 노선으로 당의 정치적 토대를 구축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정세 현안과 계급적 투쟁 과제들을 당 건설투쟁의 과제로 받아 안는 방식으로 주체들의 결집을 이루어낼 것인가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러한 정치적 내용과 건설 경로의 문제를 제껴버리고, 오로지 그 공석을 차지하는 데 어떤 세력 조합이 최적의 조합이 될 것인가, 어떻게 판짜기를 해야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나 관심을 두는 정치공학적인 접근방식은 냉소주의자들한테나 맡겨두자.

 

  이 공백 상태는 누가 먼저 차지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자본가 정치세력과 손잡는 통진당 결성 및 야권연대로 인해 무너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다시 세우는 문제이다. 자본가 정당과 단절하고 말 그대로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를 다시 이루어내는 문제이다. 그래서 공백을 메우는 것은 끼리끼리 모여서 새 당의 깃발을 들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팔아넘겨진 계급적 독립을 수복하기 위한 대적 투쟁을 조직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파산과 실패의 전철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지난 정치세력화에 대한 교훈을 철저히 새기는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강령 ∙ 전술 ∙ 조직의 무기를 가지고서 대적투쟁에 나서야 한다. 초기의 민노당을 다시 복원하는 방식으로는 계급적 독자성을 회복하는 당면 목표에서조차도 실패하고 말 것이다. 민노당이 창당하던 1990년대 말과 비교할 때 지금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팔아먹기 위해 뛰고 있는 세력이 노동운동 내에 그 때보다 몇배, 몇십배는 더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2) 혁명정당 건설투쟁을 다시 전진시키기 위한 전술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염원하는 모든 노동자들과 손 붙잡고 마땅히 혁명주의 세력들도 이러한 공백을 메우는 데 나서야 한다. 혁명정당 건설의 과업을 자임하고 있는 혁명주의 세력들은 현재 모든 투쟁의 계기에서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혁명정당 건설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 정치 내용과 방법∙경로 면에서 당 건설투쟁의 구체적 전술을 내오지 못해 왔다. 이미 통진당 결성과 야권연대로 인해 지금까지의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파산하면서 객관적 일정에 올라 있는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이 이번 통진당 사태로 더 급물살을 탈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혁명주의 세력들은 그 동안 교착 상태에 있는 혁명정당 건설투쟁을 다시 전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술을 이제 이러한 지형 위에서 수립해야 한다. 그러한 전술 수립의 객관적 조건이 숙성되고 있다.
 
  혁명주의 세력들은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를 열망하는 노동자들과 어깨 걸고, 객관적 일정에 오른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이 혁명적 노동자 정당의 창건으로 귀결되도록 투쟁해야 한다.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공동행동과 논의의 과정에 개입할 뿐만 아니라 이니셔티브를 발휘해야 한다. 혁명주의 세력들이 발휘할 선도력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야권연대에 반대하여 계급적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자 하는 모든 노동자들 속에서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을 제창하고 이 공동전선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다. 이 공동전선으로 모이는 데는, 자본가 정당과 단절하고 계급적 독자성을 담보할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을 위해 함께 투쟁한다는 조건 외에 어떠한 전제조건도 둘 필요 없다. 이 목적에 동의한다면 현존 개량주의 정치조직에 소속된 노동자들과도 함께 해야 한다. 공동전선은 당연히 상대적으로 광범위한 선진 노동자들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두루 포괄하는 틀이어야 한다.  

 


3)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 지형 위에서 혁명정당 건설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한 공동전선 전술은 처음에 이와 같이 ‘과도적 틀’(새로운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체)의 건설을 수반하지만, 그러한 과도적 조직 그 자체가 물론 목적은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토론과 공동행동의 과정을 통해 이 과도적 조직을 혁명적 강령 쪽으로 획득하여 이 과도적 조직이 혁명당 창건으로 귀결되도록 투쟁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을 비타협적으로 전개할 때만이 공동전선이 최종적으로 강령 ∙ 노선에 따라 갈라지더라도 공동의 틀에 참가한 많은 선진활동가들이 다시 새롭게 혁명정당 건설투쟁 쪽으로 함께 나아갈 것이다.

 

  혁명주의 세력들은 지금 펼쳐져 있는 이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 지형을 혁명정당 건설투쟁을 전진시킬 전술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 지형에 공동전선 전술로 개입하여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 운동이 노동자들의 계급적 독립을 위한 열망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에 진정으로 충실하게 부응하는 것은 공동전선에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위한 혁명적 이행강령이 최종 채택되도록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현 정세에서 혁명정당 건설투쟁을 전진시키는 유일하게 올바른 길이자,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을 진정한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라는 성공적 결말로 이끌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다.1)  

 

  혁명주의자들은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 공동행동에 참가하는 선진활동가 주체들 사이에서 새 당이 그 같은 혁명적 강령을 채택할 때만이 진정한 독자 정치세력화를 이뤄낼 수 있음을 설득하고 입증시킬 수 있다. 현 정세에서 오직 혁명적 강령에 바탕한 혁명정당 창건의 길 이외에 새로운 노동자 정당이 성공적으로 건설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기존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보다 왼쪽에 있는 좌파당, 또는 좌익 사민주의 정당 등으로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담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현 사민주의 정당들의 ‘사회자유주의’(사민당판 신자유주의) 대신 케인스주의를 선호하는 좀 더 좌익적인 부르주아 노동자당(사민당에서 왼쪽으로 떨어져 나온 프랑스 ∙ 독일의 좌파당 같은)으로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가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환상이다. 특히 현 자본주의 체제 위기로 인해 그러한 좌파 개량주의의 물적 토대가 더는 과거처럼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러나 물론, 결말은 물적 토대가 아니라 투쟁에 의해 결정된다. 공동전선의 최종 결말, 즉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에 성공하느냐, 아니면 민노당 복원 수준으로 귀결되어 결국 실패하느냐는 오직 투쟁에 의해서만 결정될 것이다.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이 혁명정당 창건으로 귀결될 수 있도록 함께 개입하고 투쟁하자!

 


 

<각주>

 

1) 공동전선으로서의 새로운 노동자당 전술에 대해서는  창간호의 다음 글 <현 시기 남한에서 노동자당 전술을 위하여>를 참조할 것. ‘노동자당 전술’이 혁명적 맑스주의 전통 속에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어떠한 전술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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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4] 현 시기 남한에서 노동자당 전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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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기 남한에서 노동자당 전술을 위하여

 


양효식

 

 


1. 들어가며

 

  과거 레닌은 사민당, 노동당, 사회당 같은 서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들을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이라고 규정하였다. 노동자운동의 상승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노동조합에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지만, 의회주의에 빠져들면서 노동자운동 내에서 자본가 지배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어버린 정당이 이들 정당이다.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이해를 위해 일관되게 투쟁할 것으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운동 내 자본의 마름 역할을 하는 정당이라는 점에서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이라는 모순적 규정이 내려지게 된 것이다.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은 그 정치 내용에선, 예를 들어 한국의 민주당 같은 부르주아 정당과 다를 바 없지만, 그러나 독립적인 노동자 정당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공공연한 부르주아 정당과는 달리 ‘은폐된 부르주아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으로서의 민노당이 그 동안 민주당에 대해 가졌던 차별성이 이것이었는데, 자본가 정치세력인 국참당과의 통합으로 결성된 통진당은 정치 내용은 물론이고 독립적인 노동자 정당의 형식마저 털어버림으로써 그러한 차별성마저 소멸되고 있다. 통진당 결성은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즉 공공연한 부르주아 정당으로 이행하는 시발점이다. 이후 총선에서의 야권연대에 이어 이번 통진당 사태는 그러한 이행을 결정적으로 재촉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태를 경과하여 “재창당 수준의 혁신”이 완료되면 통진당은 더 이상 은폐되지 않는 공공연한 부르주아 정당으로 ‘새로 나기’ 한 당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민주당의 위성정당으로, 나아가 흡수통합의 길로 빨려 들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민주당과 아무 차별성도 없어진 통진당이라면 더 이상 제도권에서 독자적으로 설 근거도 여지도 모두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2. 계급적 독립을 팔아넘긴 민주대연합/야권연대가 문제의 본질이다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을 둘러싼 논의와 움직임이 탄력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결과로 그 부르주아적 내용이 더 이상 외적 형식에 의해 은폐되지 않고 공공연해져 버림으로써 ‘저건 더 이상 노동자 정당이 아니다’ 라는 평가가 이제 소수 인자들 수준을 넘어 대중적으로 확산될 상황이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 도래는 진정한 노동자 정당의 건설을 가져올 계기로 자리매김 될 것인가? 잃어버린 계급적 독립의 과제를 떠안고자 하는 노동자계급 정치세력이라면 기존 민노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와 파산을 딛고 올바른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나아가기 위한 계기로 이 상황을 부여잡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시작되고 있는 새로운 또는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논의와 움직임은 대부분 기존 민노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와 파산의 교훈을 올바로 새기지 못한 채로 출발하고 있다. 실패와 파산의 원인은 민주대연합, 국참당과의 통합, 야권연대 등 자본가 정치세력과의 계급협조를 위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팔아넘긴 데 있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의 중심 과제는 노동자운동 내에서 계급협조의 고리를 끊어내고 잃어버린 계급적 독립을 되찾는 데 있다.
  이것은 단순히 지금 통진당 사태의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는 패권주의와 비민주성을 노동자운동 내에서 추방하고 자체 쇄신을 이뤄내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배반당한 계급적 독립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지금 막연하게 ‘혁신’이니 ‘재구성’이니 따라 외치는 것은 남의 깃발을 들고 흔드는 거나 다름없다. 그것은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며 국민정당화로 몰고 가고자 청산주의 캠페인에 나선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의 나팔소리에 따라 춤추는 어릿광대짓에 불과하다.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의 문제는 계급적 독립을 수복하는 대적 투쟁의 문제이다. 새로운 강령⋅전술⋅조직의 무기를 가지고서 적들에게 빼앗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투쟁을 조직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 문제를 단지 내부의 패권주의와 비민주성을 극복하는 조직운영의 문제나 조직 내부 질서의 문제로 제기하는 것은 파산과 실패의 원인을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방향에서 찾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민노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철을 되풀이 하는 식의 대안을 찾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현재 통진당 탈당을 준비하고 있는 <노동자연대 다함께>는 “전현직 민주노총 리더들이 노동계 정당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대안이다”라며, 그 당은 “공동전선적 모델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입장을 제기하고 있다. “당 모델보다는 공동전선 모델이 패권주의 폐해를 완화시키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기 때문이다.”(레프트21 82호, “통합진보당의 위기 - 올바로 보기”)  
 

 

  열우당 2중대 노선, 국참당과의 통합, 야권연대/민주대연합 등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팔아넘기고 노동자운동을 민주당 같은 자본가 정치세력의 꼬리로 전락시킨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단지 내부의 패권주의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다함께>는 새로운 노동자 정당이 “참여 세력의 정치적ㆍ조직적 독자성과 비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동전선적 모델”에 따른 연합체적인 당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위해 새 당이 필요한 것인가, “참여 세력의 정치적ㆍ조직적 독자성”을 위해 새 당이 필요한 것인가?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와 계급적 독립을 되찾기 위해 야권연대/민주대연합 같은 부르주아 정치를 철저히 일소하고 노동자계급 정치에 굳건히 바탕을 두는 노동자 정당을 제대로 다시 세워야 한다는 노동자들의 열망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잡탕 정당은 설사 당내 패권주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파산과 실패의 교훈을 올바로 찾지 못하고 계급적으로 또 다시 배신자적인 정당이 되어 민노당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것이다.

 

  새 당과 관련하여 지금 필요한 공동전선은 ‘당을 참칭한 공동전선’이 아니라 정확히 ‘당 건설을 위한 공동전선’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폭넓게 문호를 개방하는 공동전선조차도 최소한 야권연대와 단절하고 계급적 독자성 회복의 과제를 전제조건으로 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있어도 공동전선의 최종 결말이 진정한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로 귀결될 것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최종 결말은 오직 투쟁에 의해서만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다함께>는 아예 새 당 자체가 공동전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마저도 “참여 세력의 정치적ㆍ조직적 독자성과 비판의 자유를 보장"하기만 하면 되는 수준이다. 야권연대와의 단절과 계급적 독립의 과제는 거론조차 없다. 무엇을 위한 새 당인가? 결국 공동전선이라는 허울 아래 <다함께>가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제안하는, “전현직 민주노총 리더들이 새롭게 만드는 노동계 정당”이란 계급적 독립의 과제를 내팽개치고 또 다른 계급협조 야권연대를 추구하는 제2 민노당에 불과할 것이다.

 

 

3. “혁명정당 건설”과 정치 기권주의의 문제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은 혁명정당 창건으로 귀결될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 혁명정당만이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와 계급적 독자성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새 당 건설이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의 창건으로, 즉 구 민노당을 복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귀결될 경우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는 실패하는 것이다. 그 경우 이름만 새 당일 뿐 ‘민노당 복원’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량주의 ∙ 의회주의 정당은 제도권 진출과 국회 입성에 목을 매면서 민노당의 전철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고 결국은 야권연대 같은 자본가 정당과의 연합으로 빠져들 것이다. 이 과정은 민노당이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압축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렇게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의 창건으로 귀결되면 계급적 독립의 과제는 또 다시 배신당하는 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심지어는 현재 프랑스 ∙ 독일의 좌파당(좌파 사민주의 정당) 같은, 초기에는 보다 좌익적인 외관을 띠는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이라 하더라도 혁명적 강령을 거부하는 한 계급협조 야권연대 전략구도 속에 빨려 들어갈 것이라는 점에서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에 기반을 두고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노동자 정당의 외관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노선과 정책을 펴며 결정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구원투수 역할을 하는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의 계급적 모순으로 인해 그러한 좌파당 역시도 민노당처럼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팔아넘기는 당일 수밖에 없다.      

 

  성공이냐 실패냐, 즉 계급협조 야권연대와 명확히 단절하고 계급적 독자성을 세우느냐 여부는 오직 투쟁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이 혁명적 노동자당 창건으로 귀결될 것이냐, 아니면 개량주의 노동자당 창건으로 귀결될 것이냐는 오직 정치투쟁에 의해 결판날 것이다.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새로운 노동자 정당이 개량주의 정당으로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 같은 것은 없다. 예를 들어, ‘개량주의의 물적 토대’를 이유로 대중적 노동조합운동 차원의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필연적으로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개량주의의 물적 토대가 있는지 없는지, 취약한지 굳건한지에 대한 논의 이전에 이러한 견해의 바탕에는 계급투쟁에서 정치의 우위를 부인하는 정치 기권주의가 깔려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이러한 정치 기권주의는 좌파 개량주의자들이 말하는 ‘남한에서 혁명정당 불가론’을 강화시켜 준다. 좌파 개량주의자들은 현재 남한의 자본주의 발달 수준과 노동자계급의 상태, 그리고 정치 지형 등을 고려할 때 사민주의 정당 수준을 넘어서기는 불가능한 것 아니냐, 또는 조직 노동자들이 혁명전위당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프랑스 ∙ 독일의 좌파당처럼 좌파 사민주의 정도만 돼도 괜찮은 것 아니냐며 혁명정당 건설에 반대하고 있다.

 

  과거 레닌이 제국주의 나라들에서 노동귀족의 형성 등 개량주의의 물적 토대를 확인했지만, 이것이 혁명정당 건설과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는 데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낳는다고 주장하진 않았다. 당시 노동귀족이 제일 강했던 독일에서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압도적인 장악력을 가진 기존 사민당을 넘어 혁명적 공산주의 정당으로 노동자운동의 대중적 선진부위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이것은 개량주의(당시 사민당)를 겨냥한 혁명적 전술의 승리이며, 계급투쟁에서 정치의 우선성을 증명하는 주요 사례이다. 물적 토대가 무매개적으로 계급투쟁의 결말을 결정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의 영역, 특히 당 건설투쟁의 영역에서 정치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는 ‘혁명주의’ 세력은 개량주의를 강화시켜주는 무정부 조합주의(아나코 생디칼리즘)로 전락한다.  

 

  안타깝게도 “혁명정당 건설”을 주장하면서도 이러한 정치 기권주의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 동지들이 많다. 아무리 “혁명정당 건설”을 내걸어도 그 경우 혁명정당 건설은 언제나 추상적 선전의 영역에 머물 뿐 구체적 당 건설투쟁 전술로까지 나아가는 것은 영원히 미래의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투쟁 기권주의는 그냥 기권으로 끝나지 않고 대중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 개량주의 정당으로 귀결되는 데 사실상 일조한다.

 

  한편 정치투쟁 기권주의는 대기론으로도 나타난다. 개량주의의 물적 토대가 공황으로 인해 약화되거나 소멸되고 그래서 개량주의 세력이 무력화되면 그 때 노동자들이 혁명정당 건설 쪽으로 옮겨올 가능성이 만들어질 것이다. 따라서 불필요하게 지금부터 개량주의 세력을 겨냥한 ‘인위적인’ 정치투쟁을 펴는 것은 오히려 대중적으로는 고립될 것이므로 지금은 경제적 생존권 투쟁으로 제한하고 여기에 집중해야 할 때다.... 등등. 설사 이러한 수동적 대기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예컨대 적극적으로 비정규직 ∙ 정리해고 철폐투쟁을 개량주의 주도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총파업투쟁으로 조직하겠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인 정치투쟁에서 기권하고 최소강령 수준으로 투쟁을 제한한다면 결코 개량주의 지도력에 대한 그 어떤 도전도 되지 못할 것이다. 경제위기와 세계공황이 노동자계급 지도력 문제를, 혁명정당 건설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그러한 정세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주체의 전술이 필요하다. 정세 대응 프로그램을 위한, 정치강령을 위한 투쟁, 지도력을 둘러싼 정치투쟁이 필요하다.

 

 

4. 개량주의를 겨냥한 공동전선 전술
  
  새로운 노동자 당 운동에 기권하지 않고 이것이 혁명적 노동자당 창건으로 귀결되도록 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정치투쟁 전술이 필요하다. 혁명정당 창건으로 귀결되는 것에 반대하는 개량주의를 겨냥한 혁명적 전술이 필요하다.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을 주장하면서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을 지향하는 개량주의 세력의 계급적 모순을 활용하는 노동자 공동전선 전술을 운용해야 한다. 당 건설투쟁 영역에서 공동전선 전술이 ‘노동자당 전술’이다.

 

  자본가 정치세력과 손잡은 통진당 결성과 야권연대로 노동자 정치운동의 공백이 생겨났다. 나아가 이번 통진상 사태로 그 공백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진보신당 세력을 비롯하여 통진당 왼쪽에 있는 다양한 ‘좌파’ 세력들은 이렇게 통진당이 퇴거해버린 공간으로 이동할 기회를 지금 보고 있다. 한편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고 보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에 의해 새로운 당 건설을 위한 발의와 이니셔티브가 나오고 있다. 혁명가들은 혁명정당 건설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해 이러한 운동에 가장 원칙적이면서 비종파주의적인 방식으로 개입해야 한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레닌과 트로츠키가 발전시킨 노동자당 전술에서 우리는 종파주의적 함정과 기회주의적 함정을 모두 피하면서 이러한 운동에 개입할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노동자당 전술은 대중적 사민주의 정당이 아직 없는 나라들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지도력 획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애초 제출되었다. 당시 미국 같은, 노동자계급의 독자 정치세력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취약한 나라들에서 노동자계급의 선진부위를 혁명정당 건설 쪽으로 획득하는 데 그 전술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 조직들, 일차적으로 노동조합들은 부르주아 정당과 단절하고 노동자 정당을 결성하라!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을 비롯한 각종 노동자 조직들에 이러한 요구를 걸어야 한다.

 

  노동자당 전술은 대중적인 사민주의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또는 형식적으로 존재하더라도 노동자들에 의해 정치적 파산 선고를 받고 그 대중적 영향력이 무너지고 있는) 조건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공동전선 전술로 적용된 것이다. 당시의 서유럽처럼 노동자계급 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대규모 사민주의 정당이 존재하는 나라들에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공동전선은 실효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들 다수가 그러한 사민당 ∙ 노동당을 통해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최근까지 민노당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대표하고 있다고 노동자들이 보고 있어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움직임이 힘을 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레닌과 트로츠키도 대중적인 사민주의 정당이 안착해 있는 나라들에서는 노동자당 전술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
 

 

  
5.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공동전선으로서의 노동자당 전술

 

  1930년대에 트로츠키는 이행강령을 정립하면서 체계적으로 노동자당 전술을 개념화했다. 노동자당 전술은 초기 코민테른이 사민주의 정당을 향해 적용했던 공동전선 전술의 변형판이다. 즉 그러한 사민주의 정당이 안착해 있지 않은 나라들에 맞춰 변형 적용한 공동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적인 사민당 ∙ 노동당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공동전선 전술로 설계된 것이 바로 노동자당 전술이다.
  대중적 사민주의 정당으로 안착하진 못했지만, 개량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치조직들이 존재하는 지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현 단계 남한에서 펼쳐져 있는 노동자운동의 정치 지형도 그러한 경우인데, 노동자당 전술은 바로 그러한 정치 지형 위에서 개량주의 세력을 향해 적용한 공동전선이다. 따라서 이러한 노동자당 건설투쟁을 위한 공동전선도 여타의 모든 노동자 공동전선처럼 해당 공동투쟁을 위한 요구 이외에 다른 전제조건을 달지 않았다. 즉 강령적 지향과 조직 소속이 어떠하건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지와 단절하는 노동자계급 독자 정치세력화/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 건설’에 동의하는 모든 노동자들을 포괄해야 했고, 따라서 이 조건 이외에 어떠한 강령적 전제조건도 걸지 않았다. 이는 당연한데, 상대적으로 폭넓게 선진노동자들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포괄하는 공동전선이 되지 못한다면 공동전선을 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개량주의 조직에 속하거나 개량주의 조직의 영향 하에 있는 노동자들과도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 ‘계급적 독립’에 동의하면 다 같이 공동전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들은 항상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을 주장해야 한다고 했다. 즉 공동전선의 전제조건은 아니지만, 새로운 노동자당은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위한 이행강령에 바탕한 당이어야 함을 끊임없이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가들은 먼저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 공동전선’의 결성을 위해 투쟁하고, 결성되면 그 공동전선을 활용하여 강령을 둘러싼 투쟁을 노동자계급 선진부위 앞에서 펼친다는 계획이다. 강령을 둘러싼 투쟁은 강령 토론 ∙ 논쟁을 조직하는 것만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전진을 위한 공동행동 속에서 어느 강령이 일관되게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지를 실천적으로 입증하는 것을 포함했다. 

 

  이 공동전선 사업의 최적의 결말은 새 당의 다수파 지위와 지도력을 전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개량주의자들이 새 당의 다수를 장악하는 것으로 결말난다 하더라도 혁명주의 세력은 공동전선을 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훨씬 더 확대 강화된 조건에 있게 될 것이다. 혁명가들은 계급적 독자 정당 건설 투쟁에 참가하지 않았을 경우에 비해 혁명정당 쪽으로 의미 있는 세력을 획득할 수 있는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있게 될 것이다. 개량주의 정당의 형성이 노동자당 전술의 목적인가? 아니다. 반대로 그 전술은 혁명적 강령을 위한 투쟁을 노동자계급 독자 정치세력화 운동 속으로 가져감으로써 개량주의 정당의 형성이라는 그러한 사태발전을 차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거슬러 올라가 맑스와 엥겔스도 19세기 당시 조건에서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지형 위로 오르도록 부추기고 고무하기 위해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자계급 정당의 형성을 위해 노동조합에서 개량주의 세력들과 나란히 투쟁하는 한편, 이들 세력을 정치적으로 추수하는 것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노동자 정당 건설투쟁에 혁명적 지도력을 공급하고자 했다. 이 방법이 1920년대 초 코민테른에 의해 전술로 발전되었고, 나중에 이행강령과 연결되어 체계화된 노동자당 전술로 정립되었다.

 

  레닌은 1920년대 초에 미국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노동자당 전술을 권유했다. 선진 노동자들과 투쟁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코민테른 미국 지부는 이 전술을 내내 잘못 적용했다. 미국 지부에서 그 문제를 둘러싸고 맹렬한 분파 투쟁이 휘몰아쳤지만 어느 쪽도 레닌의 전술을 제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한 분파는 소부르주아 자영농민들의 인민주의 운동과 손잡고자 계급적 독립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는 쪽으로 가버렸다.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초창기 지도부인 제임스 캐넌이 이끈 다른 한 분파는 개량주의 정당의 형성을 혁명당 창건으로 가는 필수 단계(‘전술당’)로 봤다. 어느 쪽도 새 당의 건설을 위해 혁명적 이행강령에 바탕한 독립적인 노동자계급 전망을 제출하지 못했다.

 

  트로츠키는 양쪽 모두 기회주의라고 옳게 비판했지만, 그러나 그의 최초 결론은 일면적이고 비변증법적이었다. 그는 노동자당 전술을 캐넌의 입장(혁명정당으로 가기 위해 개량주의 정당 형성을 필수 단계로 상정하는 일종의 ‘전술당’ 노선)과 동일시했다. 따라서 트로츠키는 그 전술을 기회주의라며 통째로 거부했다. 즉 먼저 새로운 노동자당을 창건하는 데 노동자 투쟁의 대중적 고양이 필요하다면 ‘개량주의 단계’는 불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면 혁명당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니까. 한편 대중적 고양이 없다면 개량주의 지도자들이 새 당을 지배할 가능성이 크므로 결국 기회주의적인 전술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전술은 불필요하거나 아니면 기회주의이다. 

 

 

6. 이행강령과 노동자당 전술

 

  1938년에 트로츠키는 제3의 옵션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서 그 같은 이분법을 극복했다. 대중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 개량주의 지도력을 타격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도록 이행강령과 공동전선 전술의 결합을 더욱 구체화하는 가운데서 제3의 옵션을 찾아낼 수 있었다. 트로츠키는 당시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가 지배하는 국제 노동자운동에서 혁명가들이 고립 상태를 극복하는 데 이행요구 투쟁이 필수라고 보았다. 이행강령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구는 그 어느 요구든 노동자계급과 노동자운동 현 지도부에게 공동전선 요구(예를 들어 정리해고, 직장폐쇄에 맞선 ‘노동자 생산통제’)로 제안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노동자 정당 건설’도 그렇게 공동전선 요구로 제안될 수 있다. 그런데 개별적으로 이러한 요구들을 노동자 공동행동을 위한 제안으로 제기하는 것은 전체 이행강령에서 다른 요구들은 내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행강령 중 단 하나의 요구나 슬로건도 버리지 않고서 특정 요구를 건 공동전선을 할 수 있다.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공동전선을 한다고 할 때 그 목적이 정치조직들의 단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들 속에서 정치적 계급의식을 일깨우고 그러한 대중적 정치세력화 운동을 혁명적 강령 쪽으로 획득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트로츠키는 노동자당 전술의 실행을 위해 이행강령이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거듭 강조했다. 이행강령 가운데 어느 시점에는 당면 요구가, 어느 시점에는 이행 요구가 정세와 국면에 따라 공동전선 요구로 각각 제기될 수 있다. 혁명적 코민테른 시기에 제출된 <전술에 관한 테제>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매 행동, 심지어는 가장 사소한 일상적 요구를 위한 행동조자도 혁명적 각성과 혁명적 교육을 가져올 수 있다. 혁명의 불가피성과 공산주의의 역사적 중요성을 노동자들에게 확신시켜 줄 것은 바로 투쟁의 경험이다.” 이와 같이 가장 사소한 생활 요구 투쟁이라도 그 투쟁을 혁명 및 공산주의와 연결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혁명가들의 임무다. 따라서 그 어느 공동전선에서든 혁명가들은 투쟁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전략∙전술을 조금도 구부리지 않고 투쟁할 것이다. 또한 개량주의자들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 수준으로 투쟁을 제한하는 무원칙한 타협을 철저히 배제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혁명가들은 노동자당 건설 공동행동에서 혁명적 강령만이 일관되게 계급적 독립과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를 담보할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모든 공동전선이 그렇듯이 노동자당 건설 공동전선도 단지 선동적 결과물만이 아니라 조직적 결과물도 이루어내야 한다. 노동대중들 속에서 조직적 거점을 수립할 수 있는 매 기회들을 남김없이 사용해야 한다.(모든 각 정치조직의 노동자들과 무소속 노동자들로 구성된 공장위원회, 평조합원 공동행동 조직 등). 아래로부터 노동자계급 투쟁기관들을 강화하는 투쟁에 공동전선이 복무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개량주의자들이 선호하는 관료적 조직 형태들에 도전할 계급투쟁 구조를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신속한 승리를 쟁취하고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대담하게 투쟁을 밀어부칠 수 있게 해 줄 무기한 총파업 같은 전투적 투쟁방법을 공동전선이 채택하도록 투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본의 권력에 도전하고 나아가 노동자계급을 권력 장악으로 이끌 이행강령이 새로운 노동자당 운동에 대한 혁명적 개입을 위한 지침이 되어야 한다. 창당대회라면 이행강령이 통으로 제출되어야 하지만, 공동전선 과정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직면한 구체적 정세와 과제에 따라 이행강령의 각 요구와 슬로건은 강조점과 비중이 달라질 수 있다. 창당의 전제조건과 당 건설 공동전선의 전제조건은 당연히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공동전선에서 개량주의에 맞선 투쟁은 운동 첫날부터 일어난다. 특히 개량주의 정치인들의 의회 물신주의에 맞서 혁명가들은 현장과 거리에서의 계급투쟁을 강조할 것이며, 이로써 공동전선 제1일부터 투쟁은 불가피하다.

 

  현장과 거리의 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기회들을 남김없이 붙잡아야 한다. 혁명가들에게 전술은 노동자계급 선진부위에 맞춰진다. 개량주의와 충돌하며 그 왼쪽의 대안을 찾는 선진 노동자 주체들을 기준으로 전술 수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역사상 독자 정당을 위한 노동자운동은 모두 처음에 계급의 선진부위의 운동이었다. 새로운 노동자당이라는 사상이 광범위한 노동자들에게 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혁명가들은 현장과 거리에서 자본가들에 맞선 전투를 떠맡을 태세가 되어 있는 선진 투사들한테, 계급 대중에게 전투적 지도력을 공급할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한테 공동전선 전술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게 해서 선진 노동자들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개량주의의 장악력을 끊어내고 보다 광범위한 계급 대중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공동전선의 모든 투쟁사업들을 배치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노동자당 전술의 목적은 혁명적 강령을 중심으로 노동자계급 선진부위의 정치적 조직화를 일궈내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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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4] 야권연대와 단절하는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을 본격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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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연대와 단절하는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을 본격화 하자

                                                       
                                                                       

 고민택

 

 

 

  통합진보당은 지난 총선 때까지 자본가정당과 단절하라는, 야권연대에 반대한다는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주장을 묵살하고 끝내 통진당 결성을 감행했으며 야권연대를 막무가내로 추진했다. 지금의 사태가 터진 뒤에도 통진당은 여전히 야권연대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사태를 이 지경으로까지 만들어 놓고도 아직도 야권연대가 흔들릴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여기에는 당권파, 비당권파의 구분도 없다. 이석기 당선자는 현 사태에 대해 “야권연대를 흔들려는 음모”라는 주장을 하고 나오는가 하면, 강기갑 비대위장은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에게 달려가 사과하며 기다려 달라고, 야권연대를 깨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민주노총

 

  문제는 민주노총이다. 자본가 정치세력인 국참당과 통합하는 통진당 결성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기는 고사하고 끝내 총선에서 통진당을 지지했다. 민주노총은 단순히 야권연대를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넘어 김영훈 위원장 자신이 총선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지원유세에 적극 참여하기까지 했다. 통진당 사태가 터지고 나서도 민주노총은 달라진 것이 없다. 민주노총 중집은 통진당에 대한 ‘조건부 지지철회’를 결정했다. 통진당을 전면 부정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민주노총도 통진당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야권연대를 포기할 생각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 위 강기갑 비대위장의 행태에 대해 어떤 비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민주노총은 강기갑 비대위를 지지하는 것이 마치 더 진보적인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통진당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정도를 넘어 지금 노동자계급 전체를 아예 수렁으로 빠뜨리고 있다. 이번 사태가 터지지 않았더라도 ‘묻지마 야권연대’로 인해 노동자계급은 이미 커다란 어려움에 빠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번, 천 번을 양보해 만약 이번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통진당에 대한 비판과 통진당을 둘러싼 쟁점은 운동진영 내부의 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터지지 않았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즉 싫든 좋든, 인정하든 부정하든 객관적으로 통진당이 노동자계급 내에서 어쨌든 다수를 대변하는 세력이라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불가피함이다.

 

 

통진당이 노동자계급 전체를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통진당은 적어도 지금과 같은 사태는 발생시키지 않았어야 한다. 아니 사태가 터진 뒤에라도 내부 선거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 ‘부실이든, 부정이든’, 진상조사가 ‘사실이든, 과장됐든’ 외부로 알려진 상황에서는, 나아가 그것이 통진당 내부 문제를 넘어 전체 노동자계급의 문제, 전 사회적 문제로까지 번진 마당에서는 그것이 누구의, 어떤 의도 때문이든 간에 먼저 모든 것에 앞서 최소한 노동자계급이 입을 피해와 타격을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모든 처리를 해 나갔어야 하는 것이 천 번, 만 번 마땅한 일이다.
 
  부르주아 정당조차도 이런 상황에서는 지배계급 전체의 이해와 이익을 우선적으로 지키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이 결코 부르주아 정당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배세력은 통진당을 비판할 자격조차 없다. 그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행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다만 그렇더라도 지배계급과의 전선을 치는 것은 그 자체로 해야 한다. 또한 통진당에 대해서도 잘못을 덮으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게 아니라 기왕에 벌어진 일에 대해, 터진 사태에 대해 적어도 부르주아 정당보다는, 부르주아 정치체제 내의 수준에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정당하게, 조금이라도 더 질서정연하게, 조금이라도 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는 태도와 노력을 보여 주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 이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 통진당은 지배계급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온갖 소부르주아 세력에게도 동네북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자신들끼리도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그로 인해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씻기 어려운 고통과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통진당 사태로 인해 발생한 공백과 쟁점을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혁명주의 세력이 매울 수 있는 준비와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커다란 문제다. 그 때문에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음에도 우왕좌왕 하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워낙 많은 쟁점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고, 나아가 지배세력이 온갖 정보력과 지배력을 동원하여 그야말로 매일매일 이슈를 만들어 내고 이슈를 주도하고 있어 거기에 대응하기에도 힘겨운 측면이 있다. 나아가 혁명주의 세력이라고 해도, 통진당의 노선과 성격 등에 대해 비판하고 개입하는 것과는 별개로, 벌어지고 있는 행태나 추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확인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바깥에서는 오히려 알 길이 없어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굼뜰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안고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더는 기다리지 말고 선제적 방침을 갖고 투쟁에 나설 때다.

 

  지금도 이런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으며 달라질 가능성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통진당 사태는 계속 진행 중이고 장기화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형국이 계속된다면, 아니 그렇게 되도록 방치한다면, 여전히 사태의 본질과 정곡을 정확히 꿰뚫지 못하고 우왕좌왕 한다면 지배계급이 지속적으로 이 사안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태를 하루 빨리 막아야 한다. 이제 그럴 수 있는 정도로는 사태가 충분히 드러났다. 더는 사실 확인이나 추이를 지켜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이제는 노동자계급, 특히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선진노동자들을 포함해 혁명주의 세력이 선제적인 방침을 갖고 전면적이고 대대적인 투쟁에 나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는 시선과 관심을 지배계급이 벌이는 행태와 통진당 내부 사정으로 인해 어지럽게 발생하는 것들에 두어서는 안 된다. 지금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우익 세력이 통진당 사태를 맞아 가장 일차적으로, 가장 최우선적으로 의도하고자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듯이 바로 연말에 치를 대선을 겨냥해 야권연대를 깨거나 약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보수우익 세력은 통진당을 향해 융단폭격 하듯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런데 주로 통진당 내 당권파(지금은 구당권파)를 집중 겨냥하여 공세를 가하고 있다. 당권파야말로 바로 통진당 결성과 야권연대를 이끈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당권파가 저지르고 있는 행태가 지배계급에게 계속해서 명분과 주도권을 충분히 쥐도록 하고 있어서다. 지금 지배계급은 당권파를 집중 타격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고 있다. 이 점은 국면이 바뀌기 전까지는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보수세력이 단지 당권파만을 타격하는 것은 아니다. 당권파를 향해 ‘종북’, ‘주사파’ 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노동자계급과 혁명주의 세력에게까지 위협을 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보수우익 세력은 ‘진보정당’ 자체에 대한 공격에서는 짐짓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번 기회에 ‘진보정당’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지금보다 더 순치, 순화시키려는 태도를 노골화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이 곧 당권파가 비당권파보다 덜 순치, 순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점에서 그들 사이의 차이는 거의 없으며 있더라도 별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당권파와 비당권파가 벌이고 있는 투쟁은 최소한의 의미라도 있는 노선 투쟁이 아니라 오로지 정략만 난무하는 패권 다툼에 불과하다. 이번 사태가 결과적으로 어떻게 끝나든 간에 그 최종 도착지는 개량주의 정당이라는 외투마저 벗어 버린 완연한 ‘국민정당’으로의 변신일 것이다. ‘국민정당’이라고 꼭 하나의 모습인 것은 아니다. 그 속에도 수많은 양태와 유형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야권연대와 단절하는 투쟁을 다시 시작할 때다

 

  야권연대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다. 적어도 연말 대선 때까지는 어떤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라도 계속해서 정세적 규정력을 가지고 노동자운동을 뒤흔들 것이다. 민주당 내에서 야권연대에 대한 회의론과 부정적 견해가 아무리 나온다 해도 야권연대 자체를 완전 폐기하는 데까지 나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야권연대가 아니고도 대선에서 확실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할 수 있지 않고서는, 반대로 야권연대를 통한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에서는 야권연대는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민주당이 독자적으로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지금으로서는 무망하다. 비록 ‘안철수’ 변수가 있긴 하지만 최소 수준에서라도 야권연대가 진행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민주당이 야권연대를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통진당 변수다. 즉 통진당은 어떤 경우에도, 특히 상황이 지금과 같이 악화된 조건에서는 더욱 더 야권연대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 야권연대를 포기하지 않도록, 아니 포기할 수 없도록 통진당은 알아서 모든 짓을 다할 것이 분명하다. 통진당에게는 이제 와서 스스로 야권연대를 깨야 할 그 어떤 명분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 같은 상황은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도 분명하다. 심지어 통진당이 깨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 경우에는 깨진 두 세력 모두 더 경쟁적으로 민주당과의 야권연대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이미 지배계급의 한 부분으로 두 발을 모두 담근 상황에서는 그 길밖에 취할 방법이 없다.

 

  지금 노동자계급이 야권연대에 반대하는 투쟁을 다시 시작하고, 다시 본격화해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즉 단지 야권연대가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는 예상과 전망 때문만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에게 야권연대에 대당할 수 있는, 최소한 대당하기 위한 정세 구심을 형성해야 할 필요가 총선 전보다도 훨씬 더 절박해졌다는 점이다. 아무리 통진당과 야권연대를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그 반대를 노동자계급 또는 혁명주의 진영 자신의 투쟁의 결과로 만든 것이 아니라면 설령 야권연대가 깨지거나 균열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정치적 효과는 결코 노동자계급이나 혁명주의 진영에게 돌아올 수 없다. 그것은 당연히 야권연대를 실질적으로 깨거나 약화시킨 세력, 지금으로서는 보수우익 세력의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한편 야권연대에 문제가 발생한다하더라도 통진당이 다시 지난 시절의 ‘진보정당’으로라도 되돌아 올 가능성은 없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나아갔다. 아니 설령 돌아오고 싶어 하더라도 그것을 허용해서도 안 된다. 그러려면 야권연대에 대당하는 정세 구심을 시급히 건설해야 한다. 오직 이를 통해서만이 야권연대를 저지할 수 있는 가능성과 동력을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통진당이 어떻게 되더라도 바로 그로 인해 발생한 공백을 노동자계급이 메울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메워야 한다. 지배계급이 그 공백을 다 차지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총선 전과 달리 야권연대 반대 투쟁을 다시 시작하고, 다시 본격화 할 수 있는 새로운 국면이 열린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통진당과 민주노총 관료 지도부를 제외하고는 야권연대 반대를 한 목소리로, 보다 많은 노동자계급이 힘 있게 낼 수 있는 공간이 창출됐다. 그 공간을 지금까지는 지배계급이 가져가고 있지만 노동자계급에게도 아직 기회는 열려 있다. 민주노총 관료 지도부조차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긴 하지만, 공공연하게 통진당을 더는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 민주노총이 ‘조건부 지지철회’를 결정한 또 다른 배경이자 또 다른 이면이다. 그러나 통진당과 민주노총 관료 지도부에게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시간을 허용하는 것은 그것이 단지 낭비여서만이 문제가 아니다. 언제든지 야권연대는 다시 살아 날 수 있으며 그 때가서야 대처한다면 이미 또 늦기 때문이다.

 

  또 하나 짚어야 할 맥락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야권연대 반대를 말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야권연대에 대당하는 정세 구심을 형성하는 투쟁에 지금도 나서지 않고 있는 세력이 보이는 태도다. 이런 태도는 한 마디로 정세와 동떨어져 각자의 조건과 처지를 우선적으로 사고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다. 그 각각의 이유와 주장도 각양지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 크게 두 가지 공동점이 있다. 하나는 하나 같이 무기력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야권연대에 대당할 수 있는 정세 구심을 형성할 수 있는 동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강변하고 있다. 진보정당이 그러듯이 문제의 책임을 대중에게 돌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하나는 각자 내세우는 논리와 판단은 제 각각이지만 그 논리와 판단을 관통하는 것은 조직 보존주의다. 조직 보존을 우선함으로써 정세 대응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꾀하려 하지 않고 협소한 운동주의나 추상적 대기주의 그도 아니면 막연한 준비론으로 모두 후퇴하고 있다.

 

  야권연대가 노동자계급에게 가장 심각한 폐해를 가져다주는 직접적 원인이자 주범이라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하다. 개량주의, 의회주의를 반대하는 현재적 실체는 다름 아닌 야권연대 반대 투쟁, 야권연대와의 단절을 위한 투쟁일 수밖에 없다.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이든,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이든 그를 위한 투쟁도 역시 야권연대에 대당하는 정세 구심을 형성하는 것과 관련지어야만 비로소 그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 진정한 총파업 조직화든, 무슨 반자본주의 공동투쟁체 건설이든, 이러저러한 활동가모임이나 활동가대회 등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그것들을 말하려면 야권연대 반대 공동대응을 가장 우선적으로 조직하고 펼쳐야 한다. 통진당이 저 지경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조차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노동자계급 대부분은, 적어도 조직된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야권연대 영향력 아래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들을 이렇게 되도록 방치하고 나서 딴 데 가서 논다는 것은 허공을 향해 소리 지르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이래가지고는 야권연대에 반대하는 대선 투쟁을 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대선 투쟁을 우회해 가지고는, 야권연대에 맞서기 위한 대선 투쟁전선조차 형성하지 못한다면 운동은 훨씬 더 후퇴할 것이 자명하다.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을 힘차게 펼치자

 

민주노총 중집은 통진당에 대한 ‘조건부 지지철회’와 함께 당일 회의에서 “대중적인 제2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중단 없이 추진하며, 이를 위한 특별기구를 설치하기로 의결”했다. 물론 이 결정을 둘러싼 해석과 정치적 의미나 맥락은 당연히 하나가 아니다.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제2 노동자 정치세력화 특별기구 설치’와 관련해서도 “그동안 민주노총의 정치위원회가 존재했지만, 단순히 한 위원회에서 논의하는 것을 넘어서 전 조직적으로 많은 전현직 간부들의 견해를 총 망라하는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특별기구를 설치할 것”이라며, “이를 전 조직적으로 가동시켜, 새로운 정치세력화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고 밝혔다. <참세상> 기사). 그런데 이 결정은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사안이라기보다는 민주노총 중집회의 결과 중 ‘현 통합진보당에 대한 입장’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내용과 긴밀히 연결, 결합되어 있다.

 

“△통합진보당이 공당으로서 절차적 정당성과 자정능력이 훼손되고 있는 점에 대해 깊은 유감 표명 △통합진보당이 노동중심과 민주주의에 기초한 진정한 진보정당의 길에서 일탈하였음을 확인하고, 이에 대해 깊은 우려 표명 △통합진보당이 혁신비상대책위를 중심으로 당원들의 중지를 모아 신속히 혼란을 극복할 것을 강력히 촉구 △진정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전조직적 논의에 착수하고, 통합진보당이 현재의 혼란을 극복하고 노동중심 진보정당으로 거듭나 이 논의에 함께 하기를 희망”


  따라서 앞으로 ‘제2 노동자 정치세력화 추진’ 결정이 어떤 양상으로 어떻게 펼쳐질 지는 지금으로서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을 민주노총에게만 맡겨둬서는 안 된다. 비록 민주노총의 결정이 통진당 사태 때문에 ‘임기응변 식’으로 제출한 측면이 강하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 자체는 어쨌든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을 펼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민주노총은 지난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줄 곧 ‘진보대통합’, 실은 ‘도로 민노당’을 만들기 위한 것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조차 이루지 못했다.(물론 그렇다고 그것을 성사시켜야 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가정당과 통합하는, 즉 통진당이 결성되는 상황만 불러들이고 말았다. 만약 이번 통진당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위와 같은 결정이나마 나올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알다시피 총선 전에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에서 의결되지 않았음에도 중집 결정을 통해 총선 방침을 사실상 ‘묻지마 야권연대’를 지지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강행했다. 비록 형식논리로는 민주노총 ‘정치방침’은 결정하지 않은 모양새를 취했지만 역시 이번 사태가 없었다면 총선 방침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는다.

 

  통진당은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빠르게 ‘국민정당화’의 길로 접어들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민주노총 관료 지도부가 적당히 얼버무리려고 해도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 그 자체까지 완전히 묵살하기는 쉽지 않은 지형이 통진당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 민주노총 중집에서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특별기구 설치’를 의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미 일부는 이런 상황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거듭해서 말하지만 민주노총에게만 맡겨둬서는 용두사미로 끝나거나 혼란(분란)만 일으키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다고 지난번에 시도했던 것과 같은 이른바 ‘선언운동본부’ 정도만의 운동과 대응 가지고는 그 한계가 너무나 뚜렷하다.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은 ‘선언운동본부’와 같은 상층 중심의 운동이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 또한 그 연장에서 이른바 ‘범좌파정당’과 같은 대안으로는 또 다른 의회주의 정당을 다시 만드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아니 그 조차도 만들기가 어려울 수가 있다. 설령 만들어진다 해도 통진당 보다 나을 것이라는 어떤 근거도 없다.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니 최소한 운동을 일관되고 끈질기게 가져가기 위해서는(그런데 이러지 않고 조금이라도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적어도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최소한 야권연대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망라하여 공동대응을 펼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단지 조직 문제만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정세 대응을 대중적으로 펼치는 사업과 투쟁을 최우선으로 결부시켜야 한다. 셋째는 공동대응 안에서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놓고 치열한 노선 투쟁을 벌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은 일차적으로는 투쟁하는 노동자, 선진노동자의 자기 요구와 주장을 우선적으로 조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특히 아래로부터의 평조합원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함께 진행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야권연대 반대와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긴밀히 연결, 결부되어 있다. 아니 목적의식적으로 연결, 결부 되도록 해야 한다. 비록 통진당 사태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계급과 혁명주의 진영이 투쟁한 결과와 직접적으로는 닿아 있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지금 지배계급이 그 공백을 차지하려고 대거 나서고 있지만 더는 이런 상태가 지속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통진당 사태가 낳은 정치 공백을 투쟁하는 노동자, 선진노동자 그리고 혁명주의 진영이 나서서 채워야 한다. 그럴 때에만, 그럴 수 있어야만 통진당 사태는 위기가 아니라 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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