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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4호] 당 건설 투쟁의 기조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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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건설 투쟁의 기조를 밝힌다

 

 

고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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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이하 노혁추)은 지난 10월 29일 출범 총회와 출범식을 치렀다. 이날 출범 총회에서 ‘강령초안’과 ‘당 건설 투쟁의 기조와 방향’을 확정했다. 강령초안은 이미 블로그를 통해 공개했으며, 이 글은 ‘당 건설 투쟁의 기조와 방향’을 재구성한 것이다.

 

 

우리 자신을 말한다.

 

  노혁추는 당 건설 추진체다. 노혁추는 사회주의자의 당면 과제, 일차 목표가 객관적으로 노동자혁명정당 건설이어야 한다고 확신하며, 당 건설을 추동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과 임무로 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노혁추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된 사회주의 당 건설 운동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4~5년에 걸친 당 건설 시도와 경험을 거울삼아 당 건설 투쟁을 새롭게 재구성, 재편하고자 한다는 측면에서는 지난 운동과의 단절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노혁추는 한 정파(써클)로서의 유지나 자기 복제를 통한 조직 확대 위에서 당을 건설하고자 하지 않는다. 조직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것은 과정적으로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있을 뿐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자체는 아니다. 노혁추는 ‘과정으로서의 전술’이 아닌 ‘계획으로서의 전술’에 입각하여 지금, 여기에서 당 활동을 펼쳐 보이는 것을 통해 미래 어딘가에 당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래야 한다고 보는 기존 습성을 깨 나가고자 한다.
  우리는 정세 고양기 또는 혁명적 시기 이전에는 혁명 강령이나 혁명적 전술이 의미 없거나, 불필요 내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오랜(잘못된) 관념을 거부한다. 혁명 강령이나 혁명적 전술이 구체적 정세와 반드시 일대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정세를 핑계로 그것과 혁명 강령이나 혁명적 전술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노선과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이다. 혁명주의와 개량주의의 결정적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노혁추는 작지만 단지 작기만 한 조직이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총괄적, 역사적, 핵심적 경험을 담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노혁추는 경험 없는 ‘신생 조직’이 아니며, 과거 활동의 최종 결과로 ‘소정파’로 남아 있는 세력과도 다르다. 우리는 노혁추 같은 조직, 즉 당 건설 추진체가 객관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그런 역할을 감당하고자 나선 조직이다. 노혁추는 또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단 하나의 조직이다.
  또한 노혁추는 87년 이후 한국 노동자대중투쟁과 일상적, 전국적 차원에서 결합한 운동적 자산(부채 포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작은 조직이라는 것 때문에 선전 조직의 역할 밖에 할 수 없다거나 현장(노동자)과의 결합력이 미약하다고 말하는 것은 현상만을 보는 단견일 뿐이다. 노혁추는 기존 현장(활동가)과의 친밀 관계에 기대서가 아니라 오히려 명확한 정치 활동을 통해 기존 운동 관계와 습성을 발본적으로 바꿔 나가려 하고 있다.
  기존 노동조합은 전투적으로 전면 재편되어야 한다.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의 대중투쟁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지가 오래다. 현장활동가들 역시 ‘진보정치’와 ‘조합주의’ 그늘에 갇혀 있다. 그 반면에 계급투쟁의 양상과 조직화 경로가 기존 공식 노조 질서와 체계에만 의존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맹아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본래적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분출할 가능성이 점점 더 현실화 되고 있다. 이는 세계적 현상이며 오히려 한국에서는 지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현실에서 현재의 조직 상태 그 자체는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지금(까지)의 조직 상태가 어떠하든 문제는 지금부터 다가오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혁명적 태세와 준비를 갖출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노혁추는 혁명 조직이다. 물론 아직 선언 수준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혁명 조직으로 규정하고 나아가 이를 공개적로 표명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는 그 자체로 답해야 하는 문제이다. 선언을 하고 안 하고는 중요치 않다거나, 하거나 안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수 있느냐고 말하는 태도에는 이유가 뭐든 할 수 없는 사정이 있거나, 더 나아가 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이다. 또한 혁명 조직임을 표명하는 것과 실제로 혁명 활동을 할 수 있느냐, 하고 있느냐, 더 근본적으로 무엇이 혁명 활동이냐 등을 대립시키는 것은 표명 여부와 실제 현실(활동)을 분리시키거나 그것들을 전혀 별개의 문제로 바라보는 태도가 있는 것이다.
  노혁추는 객관적 정세가 조직들로 하여금 자기의 총체성과 정체성을 밝힐 것을 요구, 강제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규정(표명) 여부와 실제 현실 사이에 만리장성은 없으며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판단한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사회주의 활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스스로 혁명 조직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데 혁명 활동을 해야 할 이유가 없고, 혁명 조직임을 표명하지 않는데 그에 따른 책임을 질 필요도, 무엇이 혁명 활동인가를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노혁추가 혁명 조직임을 표명한 것을 두고 노혁추가 실제로 혁명 조직이냐 아니냐를 따지거나 노혁추가 말대로 혁명 조직으로서의 역할과 임무를 감당해 낼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문제의 핵심은 객관적 정세에 조응하기 위해서는 그게 누구든 혁명을 피하거나 우회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노혁추는 그것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실천을 해 나가겠다는 것을 내외적으로 밝히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정치활동을 해나가겠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야말로 만리장성이 가로 놓여 있다.  

 

 

 
개량주의, 노조 관료 지도부에 대한 정치투쟁

 

  지금 한국의 현실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일차적. 직접적 세력은 진보정당과 노조 관료 지도부다. 역으로 말하면 공식 노조(조직노동자)는 물론이고 그나마 투쟁하는 노동자들조차도 대부분 진보정당과 노조 관료의 지도력에 갇혀 있다. 그로 인해 현재 지배세력에 맞선 투쟁을 진보정당과 노조 관료 지도부가 최일선에서 주도하는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따라서 당 건설 투쟁은 곧 개량주의, 노조 관료 지도부가 독점하고 있는 지도력을 무너뜨리고 혁명적 지도력을 건설하겠다는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지만 지금 한국의 계급투쟁 정세와 정치지형도 거대한 변화를 앞두고 있다. 지난 87년 정세와 같은, 그러나 그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정세의 역동성과 휘발성이 자라고 있다. 민주화는 더 이상 대중의 직접적 요구도 주요한 관심사도 아니다. 민주가 대중이 처한 사회경제적 고통을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 필요한 하나의 과정인 것은 맞지만, 자본의 독재가 오히려 노골화되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자본주의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 그 자체를 해소하지 않고는 민주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노동자계급 사이에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현실은 진보대통합 심지어 민주대연합과 같은 퇴행이 노동자계급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진보정당의 주요 지도부와 노조 관료층은 자본가정당과의 단절은 고사하고 오히려 자본가정당과 아예 한 몸이 돼가고 있다. 이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과 정치의식이 꼭 낮기 때문만이 아니다. 비록 노동자계급의 의식이 당장 혁명에 떨쳐 일어날 정도는 아니지만 진보정당과 노조 관료 지도부를 대체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이 부재하다는 현실이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그들 지도부에 대한 의존과 기대를 갖게 하는 보다 중요한 원인이다. 즉 노동자계급이 보이고 있는 그들 지도부에 대한 의존과 기대를 일시적이며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지 않고 반대로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과 정치의식이 낮은 것을 원인으로 보면서 진보정당과 노조 관료 지도부의 태도를 오히려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이다.
  실제 현실이 그것들을 증명하고 있다. 촛불투쟁, 희망버스투쟁, (반값)등록금투쟁은 물론이고 심지어 전통적인 노동자투쟁인 지난 ‘쌍차투쟁’이나 ‘현대차비정규직투쟁’ 그리고 ‘재능투쟁’과 같은 장기 투쟁사업장에서 진보정당이나 노조 관료 지도부는 한 번도 대중을 앞서나간 적이 없다. 그렇긴커녕 오히려 반MB를 앞세워 야권연대의 틀에 가두는 데 골몰했을 뿐이다. 현실은 그들 지도부가 노동자계급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볼모로 삼아 노동자투쟁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생생이 보여주고 있다.
한미FTA 투쟁에서도 이 점은 또 다시 그리고 더욱 노골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노동자계급이 한미FTA를 반대, 폐지하기 위한 투쟁조차 ‘국익론’이나 ‘애국주의’로 끌고 가면서 야권연대, 선거심판에 가두는 한편 한미FTA 반대, 폐지 투쟁 동력을 노동자계급이 당면한 또 다른 요구들로 확장, 강화시키려는 대신 단일 투쟁으로만 부각(제한)시키고 있다. 그와 함께 실제로 한미FTA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야권연대에 의존하는 단순 집회나 가두 투쟁만이 아니라 총파업투쟁을 조직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명백함에도 이에 대해서는 시늉 정도에 그치고 있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와 이른바 ‘안철수 현상’에서 보듯이 진보정당 또한 기존 제도 정당과 다르지 않다는 대중의 인식과 판단이 확산되고 있다. 이 점은 한편으로는 진보정당의 한계가 대중들에게 폭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에 대한 정치적 대체가 급진적, 혁명적 방향이 아니라 현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정치체제를 유지, 강화시키는  또 다른 왜곡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심각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혁명 세력이 진보정당과 노조 관료 지도부에 대한 전면적인 정치투쟁을 펼쳐야 하는 또 하나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동시에 이른바 ‘좌파세력’ 일부에서조차 민주대연합은 반대한다면서도 진보대통합은 지지하거나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의 논리와 현실 인식은 진보대통합을 민주대연합과 대립하는 것으로 본다는 데 그 한계가 있다. 물론 그것들 사이에 일부 수순적, 전술적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보대통합을 강조할수록 민주대연합은 더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 내의 수권정당(론)을 버리지 않는 한 진보대통합은 결코 민주대연합을 잠재울 수 없다. 오직 사회주의 전면화와 혁명 지도력의 등장만이 그 둘 모두를 대체할 수 있다.
  이제 그들 모두를 향해 ‘자본가정당과 단절하라’는 정치폭로와 함께 혁명 세력 스스로 대안적 지도력으로 나서기 위한 투쟁을 전면화해야 한다. 개량주의 세력의 주요 지도부와 이들과 짝을 이루는 노조 관료 지도부는 더 이상 설득이나 재편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이 노동자계급과 맺고 있는 동맹을 허물어뜨리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

 

 

대중 투쟁(행동)과 강령과의 결합  

 

  ‘촛불투쟁’, ‘희망버스투쟁’, ‘(반값)등록금투쟁’, ‘점거 운동’에서 보듯이 계급투쟁의 양상과 경로가 새롭게 등장, 형성되고 있다. 사실 그 전 쌍용자동차투쟁, 현대차비정규직투쟁도 전통적인 민주노조운동과는 그 맥락이 다르게 일어난 것이며,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 투쟁의 기운이 공식 노조 질서와 체계 바깥에서, 즉 광의의 노동자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 층으로부터 직접 올라오고 있다.

 

  이 같은 양상은 앞으로 더욱 빈번하게, 빠르게, 다양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기존 운동양식만을 고집하는 것으로는 그들을 앞서가기는커녕 대중이 분출하는 역동성과 에너지를 따라가기에도 벅찰 수 있다. 노동조합 운동의 배후 세력에 머물러 있으면서 벌어진 노동자투쟁에 대한 지지나 지원을 하는 속에서의 조직화만을 시도하거나, 또는 노동 쟁점과 현장 자체만을 배타적으로 중시하는 정치활동은 한계를 드러냈다.
  물론 여전히 노동 쟁점, 현장 자체는 중요하다. 그것들을 배제하거나 등한시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나 투쟁을 통한 정치화나 조직화를 시도하더라도 투쟁 그 자체만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는 정치화나 조직화를 지속하기도 상승시키기도 어렵다. 투쟁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제 계급세력의 논리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처에서부터 투쟁의 정치적 지향과 그 지향을 현실화 할 수 있는 구체적 전술을 놓고 투쟁 주체와 매 순간 소통하는 것에 이르기까지를 수미일관하게 이끌 수 있는 총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 총체성이란 결국 강령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지금 노동자투쟁이 급진화, 혁명화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단지 강령이 부재해서만은 아니다. 그러나 강령이 부재한 것이 다른 무엇들이 부족한 것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큰 문제다. 나머지 부족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물론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강령 정립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정치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방도와 정치적 방향이 제시되지 않는 속에서의 투쟁이란 아무리 투쟁이 거대하게 일어나더라도, 아무리 투쟁이 계속되어도 결국 제도와 체제 내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선거심판론이 계속해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과의 관계에서도 강령이 부재한 관계로 지금껏 그들과 정치적(총체적)으로 대당하지 못했다. 진보정당과 전면적인 정치투쟁을 벌이지 못한 숨겨진(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혁명 세력 자신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원인도 거기에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지금 강령이 뭐가 필요(중요)하냐’거나 ‘강령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주장이 있다. 물론 강령 자체의 올바름 여부 문제가 있으며, 강령을 실제 투쟁의 지침과 무기가 되게 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있다. 나아가 강령이 달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단결하기 어려운 현실도 있다. 그러나 ‘강령이 없어서 발생하는 문제’와 ‘강령이 있음에도 생기는 문제’는 전혀 다르다. 강령 없는 조직활동, 정치활동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 이 지점을 넘어서야 새로운 문제, 즉 지금보다 진전된 상황에 비로소 직면하게 된다. 당 건설 투쟁은 다름 아닌 강령 건설 투쟁이 되어야 한다.

 

  강령 건설 투쟁은 크게 세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는 대중화다. 대중화란 노동자계급에게 단지 강령을 전파하는 것을 넘어 대중 자신이 강령을 자신의 것으로 움켜쥐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 출발은 벌어진 대중투쟁을 강령과 결합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지겠지만 나중에는 대중 자신이 강령에 따라 투쟁을 조직하고 벌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는 내부화다. 내부화란 강령, 전술, 조직을 일치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강령, 전술, 조직은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다. 그들 사이에 긴장과 모순이 존재한다. 따라서 강령, 전술, 조직이 서로 분리된 채 제 각각 기능할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 그것들이 상호 유기적 통일체가 되도록 의식적인 노력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셋째는 현재화다. 현재화란 강령을 오늘의 정세에 부응하도록 계속해서 진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혁명 이론에 대한 탐구와 논의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강령은 죽은 화석이 아니다. 강령은 시공을 떠나 적용해야 할 교조도 아니다. 강령은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산물이다.     

 

  

2012년 정세전망과 당 건설 투쟁

 

  2012년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격동적인 정세가 펼쳐질 것이 충분히 예상된다. 2008년 10월 발발한 세계 금융위기가 초입 단계를 지나 이미 본격적인 세계공황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2012년은 더욱 그 양상이 증폭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자본의 위기 전가에 맞선 노동자투쟁이 빠르게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진화, 진전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공황의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총선과 대선까지 겹쳐 있어 정치적 격변마저 함께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2012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구호는 ‘민주연합/공동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정부’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 노동자계급은 노동자정부를 전면에 걸고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억눌렸던 모든 요구를 들고 나와야 하는 것은 물론, 그 이전 김대중, 노무현 자유주의 10년 정권을 담당했던 세력, 더 나아가 민주대연합/진보대통합을 말하는 온갖 개량주의 세력과 노조 관료에 맞서 전면적인 투쟁을 벌여야 한다. 노동자정부를 걸어야만 수미일관하게 그런 투쟁을 해 나갈 수 있다. 예컨대 ‘맞춤형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라든가, ‘한미FTA 찬성/반대’라든가, ‘이명박 심판/선거 심판’라든가 등도 노동자정부를 앞세운 노동자계급 자신의 요구로 갈아치워야 한다. 2012년 전체 정치(계급)정세를 ‘자본가정부냐, 노동자정부냐’의 대립 구도로 만들어 가야 한다.

 

  진보정당은 노동자정부를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할 수 없다. 노동자정부를 말하기 위해서는 ‘진보정당이 아닌 사회주의 혁명정당’을 동시에 말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요구는 진보정당(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파산했다. 노동자정부는 오직 사회주의 혁명정당건설 투쟁과 함께할 때만이 비로소 그 현실성과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현 시기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 투쟁으로만 되살릴 수 있다.

 

  99%는 ‘야권연대’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다. 99%가 ‘선거심판’에 의존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대중 자신의 직접 투쟁, 직접 행동만이 99%를 현실화할 수 있다. 99%는 다름 아닌 반자본주의다. 2012년을 반자본주의 투쟁의 원년으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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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4호] <출범 축시> 혁명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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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온다

 

 

임성용 시인

 

 

 

   혁명이 정말
   오기는 오는 것인가
   혁명이 정말
   사랑보다 깊은 것인가 
   오지 않는 혁명을 말하면서도
   언젠가 오고야말 혁명은 믿지 못하는 그대여
   혁명이 너무 무겁다고 머리 돌리는 그대여
 
   혁명은 온다
   그것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어도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 다시 몰아치듯
   산 넘어간 노을이 바다 건너 더욱 붉게 타오르듯
   사라진 모든 것들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오고야말 혁명을
   우리가 앞서 숙명적으로 맞으러 가면 된다
   중구난방 기다리고 앉아 있기 전에
   우리가 한 발 먼저 혁명 앞으로 다가서면 된다
   이런 당연한 마중도 없이 준비도 없이
   어찌 혁명이 온단 말인가
 
   실연뿐인 상처를 핥고 있는 그대여
   좀 더 불온하게, 좀 더 처절하게
   이별을 할 바에는 확실하게 하라
   혁명보다 깊은 사랑을 간통하라
   한 번 뿐인 생이 다하는 날까지
   우리에겐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다
   멀쩡한 팔다리에 남아있는 힘이 있다
   마지막 살아 있는 목숨이 있다
 
   혁명이란 별 것 아니다
   혁명이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존재하게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낡은 나사못처럼 버려진 혁명, 너를 안고
   이미 내려친 망치질을 멈출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임성용 시인 약력

1965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구로, 안산공단에서 공장노동자로 일했다.
1992년부터 노동자문예<삶글>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으며, 2002년 제11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하늘공장>이 있다.
최근에는 제1회 '노동자시인 조영관 문학창작기금'수혜자로 선정되었다.

 

 

 

[편집자] 임성용 시인이 노동자혁명당(추) 출범을 축하하며 출범식에서 직접 낭송해 주신 축시를 <혁명>지에 싣기 위해 다시 축약한 형태로 보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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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4호] 혁명강령으로 출발한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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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강령으로 출발한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

 

노동자계급의 무기로 거듭나야 한다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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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29일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이하 노혁추)이 공식출범했다. 작지만 뜨거웠던 이날의 출범식이 역사적이었던 까닭은 자본주의의 끝 모를 위기 속에서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혁명’에 대한 전망과 계획을 공산주의 강령과 노동자혁명당 건설이라는 목표에 담아 공개적이고 공세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일이며, 자본주의 체제를 일소하는 공산주의 노동자혁명을 통해서만 노동해방이 가능하다’는 공산주의 강령을 채택하며 출발한 노혁추는 앞으로 자본가계급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혁명 강령과 혁명당이라는 무기를 제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다.

 

 

혁명 강령이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이미 막다른 길목에서 마지막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 위기와 고통을 노동자계급에게 전가하여 노동자들의 삶을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자본주의 근본모순은 공산주의혁명 이전에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자본주의 모순이 사라지지 않은 한 억압받는 노동자계급의 저항과 투쟁의 물결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수많은 투쟁들이 자연적으로 혁명적인 투쟁과 노동자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바로 노동자 투쟁을 혁명의 길로 일관되게 이끌어갈 실천의 지침인 혁명 강령이 노동자계급 속으로 깊이 뿌리내릴 때에만 비로소 혁명을 향한 진정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혁명 강령이란 노동자계급 투쟁의 궁극적 목표인 공산주의 혁명을 이론적으로 밝혀줄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의 역사와 발전에 대한 세세하고 구체적인 분석이자,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을 자본주의 물질적인 토대에 근거하여 철저하게 분석한 것이다. 또한 강령은 노동자 계급이 실현해야 할 공산주의라는 목표로부터 규정 받고, 이러한 목표의 일부를 이루는 전략전술들을 동시에 일관되게 정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전술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나오는 실제 조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필요에 완벽하게 부응해야 하고, 강고한 계급투쟁의 현실로부터 그 풍부함을 이끌어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강령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행동의 지침이자, 노동자계급 전체의 실천의 결실인 것이다. 따라서 혁명 강령은 신비스런 기원을 가진 것도 아니고 변하지 않은 규칙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투쟁의 산물이며 투쟁의 무기다.

 

 

혁명 강령을 방어하는 혁명당의 역할

 

  그런데,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들이 일상적 투쟁의 과정에서 얻게 된 계급의식은 혁명적 의식으로 진전될 수도 있지만, 투쟁의 시기가 지나면 다시 되돌아가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에게는 계급의 모든 역사적·이론적인 성과들을 온전히 담아내는 강령을 가진 조직인 혁명당이 필요하다. 따라서 혁명 강령 없는 혁명조직(당)은 존재할 수 없으며, 이 때 당은 투쟁하는 노동자계급과 조직적으로 함께 해야만 혁명적으로 유지될 수 있고,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항상 노동자 계급투쟁에 복무해야 한다.

 

  혁명당이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을 바꾸고 혁명으로 이끄는 일은 당이 제공하는 신비하고 마법 같은 묘책이나 환상에 있지 않다. 단지 혁명당의 명확한 정치적 지향이 명백하고 보편적인 용어로 노동자들의 실제 필요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러시아혁명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어보라.

 

“선원 코린은 그의 회고록에서, 스스로를 사회혁명당 당원들로 생각하는 뱃사람들이 어떻게 현실에서 볼셰비키의 강령을 방어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어떻게 이러한 허약한 조직과 미미하게 배포된 당 출판물로, 볼셰비키의 생각과 슬로건이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었는가? 설명은 매우 간단하다 : 계급과 시대의 예리한 요구에 상응하는 이러한 슬로건들은 그들 자신을 향한 수천의 채널들을 만들어낸다.”

 

“붉게 달아오른 혁명적 매체는 사상의 뛰어난 전도체이다. 볼셰비키 신문들은 큰 소리로 읽혔고, 세세한 부분까지 읽혔다. 가장 중요한 기사는 외어졌고, 인용되고, 다시 복사 되었으며, 가능한 곳에선 어디든 다시 인쇄되었다. 볼셰비즘의 성공에 대한 일상의 설명은 대중들의 욕구와 맞아떨어지는‘슬로건의 단순함’이란 표현으로 요약 설명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들의 투쟁에서 그들의 요구와 필요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경험에 의해 인도되었다. 볼셰비즘은 대중의 독립적 경험에 대한 귀족주의적 냉소에 절대 오염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이러한 경험을 그들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것이 그들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 뛰어난 지점 중 하나였다.”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2권.

 

  러시아 혁명의 사례에서와 같이,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존재하는 요구와 필요를 명백하고 간단하게 표현했고, 투쟁의 경험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이고 역사적인 열망들을 감안하여 전체 운동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계급의 혁명적 경향들을 가속시킬 수 있었다. 계급의식을 바꾸고 혁명으로 향하게 하는 일, 이것은 신비스럽거나 불가사의한 이상이 아니다. 현재의 조직 상황이 허약하고 작더라도 명확한 정치적 지향이 있다면 즉시 가능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혁명적 이론과 노선을 실천의 무기로 만들어내야 할 의무가 혁명조직에게 있는 것이다.

 

 

혁명당 건설과 혁명 강령 채택의 의미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은 이와 같이 노동자계급의 강력한 무기인 혁명당을 건설하기 위해, 아직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필요에 완벽하게 부응하지는 못하지만, 강고한 계급투쟁의 현실로부터 풍부함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현 상황에서 가장 원칙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의 역사적·이론적 성과들을 담아 강령초안을 마련하고 실천적 결의로 채택하면서 출발하였다. 이것은 혁명당과 혁명 강령 건설이 멀리 떨어져 있는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장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계급의식의 정치적 표현이어야 함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건설할 혁명당은 반드시 전체 노동자계급의 해방이라는 공산주의 강령을 방어하면서 건설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지배체제 하에서 당분간 노동자계급 내 소수일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하지만 혁명당이 방어하는 공산주의 강령은 전체 노동자계급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업이기 때문이며, 그 때문에 우리가 건설하려는 혁명 강령은 노동자계급의 혁명투쟁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은 단절되고 짧은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비록 혁명적 계급운동의 대대적인 출현 속에서 혁명당 건설을 전면화 시키면서 출발하지는 못했지만, 혁명당 건설을 위한 험난하면서도 거침없었던 고난과 각성의 과정을 겪으면서 혁명 강령 건설과 강령에 입각한 정치활동을 분명한 목표로 삼았기에, 강령채택을 기반으로 혁명당 건설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 건설운동에서 질적인 전환이었다. 한국사회에서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명확한 정치적 지향을 가진 혁명세력들이 형성된 시점이 바로 즉각적인 혁명당 건설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자 당 건설 운동의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인식했었기에, 각각의 정파와 써클 속에 갇혀 있던 정치적 지향들을 강령적 수준으로 통일시키면서 강령에 입각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5년 이후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 사노련, 사노위, 그리고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으로 이어지는 혁명당 건설을 위한 과정은 바로 그 과정의 일부이자, 구체적 발현태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 혁명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이때에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객관적 정세가 명확한 정치적 지향을 갖는 혁명당 건설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에 부응하는 일이기도 했다.

 

 

노동자혁명당 강령의 원칙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노동자혁명당의 강령이 방어해야 할 혁명적 원칙들은 무엇인가? 이 원칙들은 노혁추가 채택한 강령 초안의 내용을 대부분 규정해 주고 있다.

 

  그것은 첫째, 혁명 강령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체제인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그 모순을 밝혀내고 총체적으로 판단하여 계급투쟁의 동학,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또한 자본주의가 더 이상 생산력 발전을 위한 체제이기를 멈추고 이제 생산력 발전에 족쇄가 되는 시대, 즉 자본주의 쇠퇴의 시대에 진입함에 따라 공산주의가  현실의 일정에 오르기 시작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서는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끝 모를 위기의 본질과 자본주의 쇠퇴가 만들어 놓은 물질적 조건(생존권 위협과 생활수준의 급격한 하락 등)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계급의식과 조직의 상태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를 밝혀냄으로써, 노동자계급에게 새롭게 창출되는 운동과 계급투쟁의 부활 속에서 다시 한 번 혁명적 전망을 가질 수 있도록 계급의식을 자각케 하는 일이다.

 

  둘째,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연성을 인정하며, 노동자평의회로 조직된 전체로서의 노동자계급만이 모든 권력을 갖는다는 원칙이다. 이것은  공산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으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평의회 권력의 창출과 강화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에 혁명의 시작과 함께 사회의 모든 권력을 노동자계급이 집단적으로 행사하는 노동자평의회 권력을 수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며, 노동자평의회가 모든 정치와 경제와 산업을 장악하고 노동자평의회가 전 사회에 걸쳐 모든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은 먼저 자본가 국가를 타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은 자본가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무장력과 무장봉기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 자본가 국가를 타도하는 길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조직력과 무장력에 의존하며, 노동자계급의 자립적 조직인 노동자평의회와 혁명정당을 건설해야만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셋째, 이른바 ‘현존 사회주의’라고 불리어 온 스탈린주의 체제들을 사회주의로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 · 억압 체제, 노동자혁명에 의해 타도되어야 할 또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단호히 지지하고, 그리고 혁명 패배의 교훈과 이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의 조건을 찾아내고자 하는 후세대 혁명가들의 의무이자 과제인 것이다.

 

  넷째, 노동자계급의 혁명은 국제적이어야 한다. 세계혁명은 세계혁명당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세계혁명이 진행되기 전에 혁명적 공산주의 진영을 다시 규합하고 강령을 통일하여 세계혁명당(인터내셔널)을 반드시 건설해야 한다는, 세계혁명과 노동자국제주의에 대한 확고하고 구체적인 원칙을 강령에 담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 혁명당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세계혁명당 건설에 복무해야 하며, 세계적인 강령통일을 과제로 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위의 원칙에 바탕을 둔 ‘노동자계급 권력 장악을 위한 이행요구’를 실천 지침으로 제시하고 있다. 헤어날 수 없는 위기에 빠진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인 행동으로 혁명적으로 타도할 때만이 폐절시킬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위한 12 항목의 이행요구는 바로 쇠퇴하는 반동적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계급이 현실에서 투쟁으로 즉각 쟁취해야 하는 요구들이자, 이 요구들을 전진시켜 권력 장악과 자본주의 철폐로 이어지게 하는 행동 강령이다.

 

 

결론

 

  일찍이 마르크스는 임노동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공산주의에서의 노동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했다. 이른바 비인간적인, 자유가 없는, 소외된 노동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에서부터 더 나은 세상의 가능성, “삶에 대한 선언으로서의, 따라서 삶의 향유로서의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악이 존재하는 한 계속 살아남아 노동자계급에게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밝혀주고 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혁명적 가치를 계승한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공산주의 강령을 전면에 걸고 투쟁하는 노동자계급과 함께 썩어가는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고자 나섰다.

 

  노혁추 출범식에 축시를 낭송한 노동자시인의 시 구절처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혁명이고, 용서할 수 없는 착취계급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 노동자의 계급의식이다. 오랜 침체기를 지나오면서 고통과 절망이 지배했던 노동자계급의 현실 속에서 혁명의 가능성은 더 나은 세상,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으로 부활하고, 세계적으로 새로운 계급투쟁의 장이 열리고 있는 것은 공산주의 혁명의 현실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과업이고, 노동자계급의 행동 중에 가장 의식적이고 총제적인 행동이므로 단순한 분노와 직접행동만으로는 혁명으로 나아갈 수 없다. 분노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좌절은 혁명에 대한 자신감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이렇듯 노동자계급이 역사와 혁명의 주체로서 새로운 사회를 스스로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혁명의 현실성을 담은 것이 바로 공산주의 강령이다. 혁명의 성공은 노동자혁명당의 강령과 그것을 행동에 옮길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계급의식에 달려있다.

 

 

  쇠락해가는 자본주의, 야만이냐 혁명이냐의 시대, 노동자계급의 시대적 필요에 부응하는 혁명당 건설에 즉각 착수하자!
 

 

  노동자계급에겐 무기가 되고 자본가계급에겐 실질적 위협이 되는 공산주의 혁명 강령을 건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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