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활동가의 생활에 대한 단상

활동가의 생활에 대한 단상 | 성찰하기 2005/02/21 12:08
http://blog.naver.com/flag20/40010664798

새벽길님의 블로그에 있는 서준식 선생에 대한 글을 보고.

 

서준식 선생에 대한 선명한 기억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98년도쯤이었던거 같은데, 학교에서 열린 강연회에서였다.

서준식 선생의 강연 막바지 무렵에 들어갔는데, 이 말이 머리속에 깊게 남았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쉬운 방법이 있다. 국보법 폐지를 원하는 사람들 모두가 국보법을 어겨서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다. 교도소에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때까지 국보법 위반자가 넘치게 만들면 국보법은 폐지된다. 운동가는 몸으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 모두 기꺼이 감옥에 가자.'

 

두 번째는 2000년도쯤이었나, 나름대로 이것저것 힘들어하고 있을때, 서준식씨가 한겨레에 기고한 '운동가여, 가난해지자'(정확한 제목은 아닐 것이다.)라는 글을 보았다.

대략 그 요지는 새벽길님의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읽다가 슬몃 눈물이 고였던 기억이 난다. 용기와 힘을 얻었고...

 

기억을 뒤로 하고, 그 주장을 곰곰히 생각해본다.

서준식 선생은 주장한다.

운동가는 기꺼이 가난해야 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수준에 운동가의 생활을 맞추지 못하면 그 운동가의 운동은 정당성이 없다고(까지) 말한다.

사회운동은 국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 안된다. 그것뿐만 아니라, 자발적 회원(여기서 회원은 활동가가 아닌 일반 회원을 의미하는 것이겠다.)이나 후원회원의 후원회비에 의지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 구조가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고난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게 참 이해받기 어려운 부분인데 진보운동하고 체제 내 운동하고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참여연대가 정부 지원이나 기업 지원은 받지 않지만 매우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후원금을 받는데 시민들의 후원금 역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다. 시민들의 의식 자체가 왜곡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시민들을 향해 지금 변혁을 이야기 하거나 혁명을 이야기하거나 자본주의 없애야 한다고 얘기하면 시민들이 좋아하고 후원금 주고 하겠는가. 진보운동이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진보운동이 무슨 사업 아이템이 낡아서나 운동 방식이 잘못돼서라거나 고집이 세서 가난하다는 얘기는 모함이고 악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시민운동이 잘되는 이유는 잘될 수 밖에 없는 운동이기 때문이고 진보운동이 어려운 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새벽길 블로그에서 인용)

 


내가 2000년 무렵에 감동받고 용기를 얻었던 내용이지만, 지금 냉정하게 살펴보면 문제가 많은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운동은 기꺼이 가난해야 한다'

나는 이 명제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말일 수 있다. 운동은 '수익'이나 '부'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운동이 진정성이 있다면 운동은 언제나 (상대적으로)가난할 수 밖에 없고, 운동가도 그렇다.

그리고 시혜를 위한 활동이 아닌 이상, 재산축적이나, 부의 추구를 배제하는 것이 소외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운동가의 윤리임은 당연하다.  기아자동차 사태를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운동 윤리의 문제가 아닌, 일반적/상식적 윤리에 어긋나는 위법행위니까.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한가?

운동가에게 경제적 고난은 당연한 것이고, 명예로운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운동가의 삶은 충분히 자존을 누릴 수 있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닌 엄중한 생활의 문제다.

운동가가 땅을 파먹고 살지 않는 이상, 생활인으로서 운동가의 삶은 그 자체로 존엄하며, 이를 보장하지 못하는 이상, 운동의 미래는 없다.

 

내가 보기에 운동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을 안정적으로 보장받는 방식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커뮤니티로부터의 지원이다.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지역공동체의 조직, 문화가 발전한 중남미를 비롯한 제 3세계 사회운동의 경우에, 이런 커뮤니티를 통해서 극심한 빈곤에도 불구하고 운동가의 생계보장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는 복지국가의 지원이다. 사회운동이 활성화된 유럽의 몇몇 나라들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직업운동가들은 무상교육, 무상의료, 노후생활 보장의 복지국가 시스템에서 생활의 위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활동을 한다. 거기에는 자본주의와 국가 시스템을 부정하는 극좌 경향 운동권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개발과 경제성장은 커뮤니티를 파괴시켰고, 지역 커뮤니티에 기반한 대중운동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복지국가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한국의 운동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서준식 선생의 주장이 정당성을 상실하는 지점은 여기이다.

아직도 서준식 선생과 유사한 주장이 운동권 사회에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주장을 지난 번 윤종훈 회계사의 사직 파동 때 들을 수 있었다. 흔히 정파적인 갈등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듣기로 그러한 주장은 정파의 구분 없이 다양한 개인/집단으로부터 활발하게 제기된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윤종훈 회계사의 사직을 비판하는 운동가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땅을 파먹고 사는가? 그건 아닐테고 아마도 '변형된 커뮤니티 지원시스템'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변형된 커뮤니티 시스템은 내가 보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운동 집단 커뮤니티.

굳이 특정 정치세력을 지칭하지 않아도, 대략 알 수 있는 것이다. 집단적 훈육과 집단적 생활지원, 집단적 전망을 공유하고 있는 운동권 커뮤니티를 통한 것이다.

둘째는 (직설적으로 말해서) 가족 등쳐먹기. 특히 남성 운동가들의 경우 부인 등쳐먹기.

(물론 정말로 순수하게 개인의 남는 시간을 쪼개서 온갖 아르바이트 뛰고, 건강을 망쳐가면서 운동하는 분들도 있다.)

 

예전에 나를 감동시켰던 서준식 선생의 이상주의적 주장에 더 이상 감동할 수 없는 것은 '운동가도 동시대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생활인'이라는 자명한 사실에 더 이상 눈감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운동가는 동시대인과 같은 모순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다를 것 없는 존재이며, 그것을 인정할 때만이 운동가는 타인으로부터 존경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가족을 희생시키고, 기이한 집단 문화속에 젖어사는 운동권들이 소외된 노동 속에서 가족과 자신의 부양을 위해서 헌신하는 다른 사람(이른바 대중)들로부터 어떤 공감대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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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22 22:30 2006/01/22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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