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아렌트의 제자가 쓴, 아렌트 읽기.를 읽기 시작했다.
*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
* 칸트의 정언명법을 암송할 수 있던 나치의 학살자(공무원?)
* 무사유성(thoughtlessness)
"가령 내가 이 것을 했다고 쳤을 때
나는 이것을 한 나 자신과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가 있을까?"
무서운 질문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항상 품고 있어야 할 질문..
무사유와 야만이 온화함이라는 포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금.
친구와 대화하다가,
자신의 행위가 무언지 알면서도(음, 사유하면서도) 행동하는 악함에 대해서 얘기가 나왔다.
목표만 보고 가는 이들이 무시하는 것들..
왜 누군가는 그런 상황을 선택의 기로라고 파악할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누군가는 선택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파악한 후라면 자신의 행위가 의미하는 걸 알지만 선택하는 거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아는 것일까.
아는 것이란 무언가.
또 다른 대화.
내가 인간의 배려의 문제, 무사유로 인한 악함(상처주기)(-개인적 경험과 학교에서 아이들의 성장을 봤을때. 왕따는 한 인격체의 삶에 커다란 상처를 남길 수 있다. 무사유에서 발생하는 상처주기라 할 때 나는 가장 흔한 상황으로 왕따를 떠올린다)에 대해 저항하며 살고 싶다고, 관심과 사랑을 기반으로 사유하는 삶을 살고 싶다 했을 때
친구는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니가 상처주지 않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멈칫했다.
할 수 있는 말은 이 것뿐이었다.
그러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고. 그러고 싶다고.
그저 선량하고 착한 사회를 꿈꾸지는 않는다.
다양한 존재들과의 관계맺음 속에서 무지가 만드는 상처들도 분명 존재할 거다.
하지만 그걸 당연하다고 인식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른 기억.
내게 지독한 기억을 남긴 이가
자신도 상처받은 자라고 우리는 쌤쌤이니까 침묵을 요구했을 때,
세상이 빙그르르 돌았었다.
상처가 없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선택권을 가진 자가 자신의 '피해'를 동급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상황에 대한. 놀람.
철학을 했다는 그의 사유세계에 완전히 쇼크를 받았었다.
그때 느꼈다. 성취욕망이 강하면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자신의 욕망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훨씬 강렬하게 피해로 느껴지는가 보다고. 어쩌면 애초에 양보하기 시작했던 것이 내가 범한 실수였는지 모른다.
살다보면 빚지는 사람은 계속 빚지는 일이 발생하듯(이건, 사회 구조적인 문제도 있어서 좋은 예는 아니겠지만)
양보하는 사람은 계속 양보하게 된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부터 폭력이 발생하는게 아닌가 싶다.
자기 사유의 부족으로 말미암은.
음.. 어쩐지 화풀이를 하고 난 느낌인데..
아렌트 읽기는 저항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읽기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