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돼지외

분류없음 2016/07/13 23:42

 

"개"와 "돼지" 사이 

 

안타깝게도 선택지엔 개와 돼지 뿐인지라 나는 "개"를 짝꿍은 "돼지"를 선택. 졸지에 소외당한 고양이 얘기를 잠깐. 사실 민중이 고양이 같았으면 쥐색히 같은 너그들응 벌써 다 죽었을 것이야. 뭐시 중헌지도 모름서도 알건 아는구나. 그래서 고양이를 뺐구나. 

 

 

Controlling person (s)  

 

대단히 다루기 힘든 직장동료가 하나 있다. 농담으로 "또 하나의 클라이언트" 라고 지칭하는데 이 양반과 함께 짝이 되면 신경이 배로 쓰인다. 다른 건 다 그렇다고 치는데 간혹 클라이언트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네 보호관찰관에게 당장 전화할거야!!!" 식으로 협박하는 등 포악 (hostile) 하게 군다. 대개 클라이언트들이 말을 안 들을 때 그렇게 행동한다. 그래놓고선 조금 있다가 또 잘해준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헷갈릴 수밖에. 클라이언트들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자기 기준에서 만만해보이는 동료들에게도 그런 식이다. 분명 controlling issue 가 있다. 한국어로는 뭐라고 번역하는지 모르겠다. 지배욕구? 이런 양반들의 공통점 가운데 완벽주의 (perfectionism), 거짓말, 현혹하기 (manipulation), 미루기 (procrastination), 아부하기 (kissing sb's ass) 등이 있다.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이론에서 배운 것을 복기하면 정말로 기가 막히게 딱 떨어진다. 사람을 미워해서는 답이 없다. 이 친구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더 심각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래도 정말 같이 일하는 게 너무 피곤하다. 가끔 시프트 파트너가 오프를 신청해서 이 친구와 짝이 되면 그야말로.... 암담하다. 다행히 (?) 이 동료에겐 아이가 없다. 아이를 낳을 계획도 없다고 한다. 다행이라고 할밖에. 

 

비즈니스 문화가 다르다보니 한국과 이곳의 일터 문화도 사뭇 다르다. 한국에선 다루기 힘든 상사, 동료 리스트에 "일을 시키고 자기 것으로 빼앗는 사람" 정도가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 같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을 동료에게 부탁해놓곤 매니저에게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보고한다. 하루이틀 겪는 일도 아닌지라 그러려니 하다가 살살 상황을 봐서 끼어들거나 치고 빠진다. 피곤하지만 뭐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일컫는 텀 (terminology) 들이 제법 발달해 있다. 당장 구글링을 해도 이런저런 용어들이 줄줄줄 나오고 대처방법도 나온다. 그런 기술만 가르치는 워크샵-세미나도 제법 많다. 아무래도 정의하기 (defining) 문화가 발달해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추측을 한다. 

 

 

젠더, 인종, 문화

 

몇몇 나라에서 온 남성들은 정말로 젠더평등 의식이 저열하다. 일다의 어떤 기사를 읽으며 맞아맞아 맞장구를 열 번 넘게 쳤다. 그렇다고 북미대륙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성들이 평등한 젠더의식을 갖고 있느냐. 그건 아닌 것 같다. 다만 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기본적인 기준을 알고 있기는 하다. 어릴 때부터 학습한 결과다. 원치않는 임신을 시켰을 때 혹은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를 했을 때 따라올 후과 (consequences) 와 책임을 잘 알고 있으니 콘돔 사용에 철저하고 사회 또한 콘돔 사용/ 안전한 성관계를 알리는 데에 인색하지 않은 편이다. 일종의 harm reduction 접근이다. 이에 반해 한국이나, 몇몇 중동의 국가들, 무슬림 국가들, 카톨릭 국가들에서는 성교육, 콘돔사용, 안전한 성관계 등을 아예 가르치려하지 않는다. "알게 되면 행한다", 즉 성 (sex) 을 알면 관계 (sexual activity) 를 한다는 지론이 그 바탕에 있는 것 같은데 참으로 무지하고 저열한 접근이다. 그 바탕엔 여성의 육체를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가부장지배담론이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그런 나라들에서 이민온 남성들이 자기네 나라에서 하던대로 이 나라에서 한다는 것. 안팎 바가지 타령을 안하려야 안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론 이 나라에서도 참 많이 성추행을 당하고 겪었다. 이른바 더러운 꼳휴를 전시하는 "바바리맨"은 일터에서 딱 한 번 본 것 외에는 길거리에서 본 적이 없지만 그 외의 경우는 제법 겪었다. 특히 무슬림 국가에서 온 남성들에게서, 그리고 술이나 마약 같은 것을 하고 꽐라가 된 백인/흑인 오징어들이 "나 아시안 여자들 정말 좋아해" 하며 접근하는 경우를 제법 겪었다. 한국 아저씨들은 뭐 아예 말할 것도 없고. 

 

일다의 저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가 혹은 나의 친구들이 겪는 성적 추행 (sexual harassment)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민자/ 레퓨지/ 유색인종 남성들이 놓인 처지에 공감하는 것이 그래서 때로는 어려울 때가 있다. 조금 더 확장하면 -- 간혹 흑인들이 아시안들을 얕잡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어떤 흑인은 "오늘 밤에도 개고기를 먹니" 하면서 빈정댄 적이 있었고 여기에서 태어난 어떤 흑인은 대놓고 나의 엑센트를 흉내내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은 그냥 보통의 일이다.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긴 하지만 아무래도 금방 잊기는 힘들다. 그들이 건넨 그 "느낌"을 잊어버리는 건 아무래도 힘들다. 그렇다고 BlackLivesMatter 를 지지하지 않느냐. 그건 결코 아니다. 그 둘은 전혀 다른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가끔 속이 부대낄 때가 있다는 거다. 

 

세상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사는 "개인" 으로서, 맑스가 언급한 "자유로운 개인"이 되고 싶은 "개인"으로서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선 할 일이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에 반대한다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고, 그런 앵무새 같은 말을 되뇌인들 변화는 다만 1도 오지 않기 때문이다. 

 

2016/07/13 23:42 2016/07/13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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