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잡담
분류없음 2015/04/11 10:12생활의 잡담 2 - 오늘은 하소연
이 곳에서 한국의 웹페이지에 접속하면 로딩하는 데에 한참 걸린다. 아마도 플래시 따위로 도배된 광고페이지 때문인 것 같다. 심지어 최근에는 프레시안도 잘 안 열린다. 이런 느림에 비하면 한국에서 인터넷하던 시절이 그립긴 그립다.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을 쓸 적엔 거의 모든 페이지들이 "뚝딱" 열렸다. 반면 여기에서 한국 웹페이지를 열면 "뚜우---우---욱--따---악" 열린다. 그나마 진보넷은 "뚜욱따악" 열리는 편.
엑티브엑스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봤다. 대학졸업증명서 따위를 다운로드받으려면 엑티브엑스를 깔아야만 하는데 문제는 엑티브엑스가 이 나라에서는 취급불가능한 프로그램이라는 점. 학교 컴퓨터나 직장에선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집에서 쓰는 랩탑에 그나마 설치할 수 있는데 이것도 종종 이 나라에서 주로 쓰는 다른 프로그램들과 충돌을 일으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장학금으로 간신히 마련한 이 랩탑도 이젠 너덜너덜해졌다. 멀티컬쳐럴 랩탑이 필요해)
제일 큰 문제는 은행업무였다. 엑티브엑스를 풀면 다음 단계의 허들이 있다.
오늘 인터넷뱅킹을 할 일이 있어 S은행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화이어폭스나 구글크롬에선 아예 열리지도 않는다. 잘 쓰지도 않는 인터넷익스플로어로 접속했는데 접속하자마자 뭘 후다닥 자기가 알아서 보안프로그램을 깐다. 또 뭘 더 깔라고 해서 찬찬히 읽어보니 안 깔면 아예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동의.
엑티브엑스에 버금가는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데만 십 분이 넘게 걸렸다.
- 공인인증서를 클릭했더니 이미 만료가 되어 재발급받으란다.
- 재발급받는 과정에서 해외거주자 인증을 하라고 해서 클릭했더니 바로 인증해줬다. 오호라, 진전이 있긴 있구만 제법이야. 고마워. (뒤에 일어날 일을 전혀 모른 상태였다)
- 재발급받았다. 아싸.
- "이체"를 눌렀다.
- 일 년 이상 이체서비스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으로 "장기미사용정지"되었단다. 그것을 해지하란다.
- "해지신청"을 눌렀다.
-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 본인확인을 해야하니 010 혹은 011로 시작하는, 한국에서 쓰던 전화를 이용해 ARS 서비스를 통해서 본인인증을 하란다. (나는 더 이상 그 전화번호를 쓰지 않는다구. 그리고 여긴 한국 밖이란 말이야)
뭐지? 미로를 간신히 간신히 풀어 나왔는데 다시 입구로 돌아간 느낌? 몇 시간 동안 낑낑 산에 간신히 기어올랐는데 이 산이 아니야, 뭐 그런 기분? 느낌 탓인가? 기분 탓인가?
정리해보자.
은행 보안에는 은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개인)가 담당해야 하는 몫과 은행의 유무형 자산 (예, 서버)를 관리하는 회사가 담당해야 하는 몫이 각각 있다. 현행 인터넷뱅킹 서비스 과정에 얽혀 있는 보안 시스템에는 이 두 진영이 각각 책임져야 하는 역할이 단단히 혼재되어 있다. 회사는 서버에 침입하여 회사와 고객의 자산에 흠집을 내는 제3자들을 막아내는 역할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회사와 계약을 맺은 개인들의 몫이다. 본인 인증을 위해 본인들이 쓰는 개인전화를 통해 일률적인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자본주의-자유경쟁 시스템 하에선 온당치 못한 일이다. 개인전화를 쓰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청각장애인-시각장애인의 경우 그 서비스를 제공받는 과정에서 배제될 수 있다. 이것은 평등하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 공급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은행은 애초 개인(법인) 고객을 유치하여 계약을 맺을 때 최소한의 정보만 수집해야 한다. 따라서 기본패스워드 이외의 보안의 영역에 대해선 그 개인고객들이 책임진다는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 약속이 필요하다. 개인 고객들이 기본 패스워드 (비밀번호) 만으로도 인터넷뱅킹 서비스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서버와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은행(회사)의 역할이다. 그것이 구축되면, 구축된다면 개인이 자기 패스워드를 유출하든 말든 그것은 그 개인고객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은행이 애초에 당사자들이 져야 할 책임 - 예를 들어 천하의 북한 해커가 쳐들어와도 막아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 - 을 지지 않으려고 지랄하다보니 개인들이 져야 할 책임과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같이 늘어났다. 공인인증서 비밀번호, 계좌비밀번호, 계좌이체비밀번호, 보안카드번호, 계좌번호 ... 이것이 대체 뭣하는 짓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러다간 입력해야 할 비밀번호가 계속 늘어나고 이 비밀번호들을 관리해주는 에플리케이션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결국,
한국의 은행이 정상업무를 재개하는 월요일 오전 9시까지 기다려야 한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또 다시 "영업점으로 방문해주세요"라는 말을 듣고 거품물고 쓰러질지 그것은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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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ed from 꽃을물고뛰는개 2015/04/12 17:08 DELETE
Subject: 생활의잡담
생활의 잡담 3 - 꽃개님의 [생활의잡담2] 에 관련된 글이자 트랙백 어트게 하는 건지 리뷰하기 위해 하는 포스팅 이 나라에 처음 와서 이 나라 은행에 구좌를 개설하고 인터넷뱅킹을 안내받았을 때 나는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 인터넷뱅킹 따위는 하지 못할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인터넷뱅킹이 너무 간단했으니까. 오로지 비밀번호 하나로 승부하는 인터넷뱅킹,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답은 더 간단한 데 있었다. 이 나라 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