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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상실과 고향의 괴로움

 저에게는 고향이라는 곳 있는가”
이거 도회에 사는 많은 사람이 품는 의문이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졸업할 때 까지 도쿄 신주쿠에 살았다. 그 동안 네번 이사했지만 소년시절을 지낸 주택 부지에는 빌딩이 건축되고 그 시절을 생각내는 실마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다. 우현히 근처를 들렀다가 흔적이 없기에 당황할 뿐이다.
 
도회지에 그것도 대저택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상상하지 못 하겠지만 경제 발전에  따라 지방에서 대도시로  끌어당긴 서민들은 집합과 이산을 되풀이하면서 도회지를 헤매고 깨달았을 때 인간관계도 혼란한 채 노년기에 접어든다.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있었지만 없어졌다고 해야한다. 그래서 뜨겁게 고향을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부럽다.
 
 
제 아버님은 소년시절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에 살고 센다이로 이사했다. 진학을 위해 상경,졸업한 후 기사로서 일본광학회사(현 니콘)에 입사하고 패전후 통상산업성에 근무했다.
왜 민간기업에서 관청근무가 되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일본의 국가가관의 만주화와 관계가 있었다고 추측된다. 아버님의 무덥은 센다이에 있고 집에는 아바지의 여동생인 고모가 혼자서 계신다.
 
그래서 저에게 고향이라는게 있으면 센다이가 해당할지도 모른다. 센다이는 동북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데다가 문교도시로 누구도 인정하는 아름다운 도시다. 어렸을 때 저는 여름방학 마다 동생들과 함께 어버지의 고향에서 여름을 지넀다.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우리들을 귀여워해주셨다. 행복한 소년시절의 기억이 제 마음애 남아있는 도지다.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 미나미코이쯔미
 미야기 형무소로 이어지는 버스 가는 길과 이은 고요한 주택지는 옛날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처의 거리를 걸어서 놀라고 말았다. 생선가게,채소가게,약국 등 일상생활을 위해 필요한 상점이 거의 업었다. 헌 간판은 보이지만 영업하지 않는 상태다. 상점가로 부르지 못하는 길거리였다. 옛날에는 규모는 적지만 충분히 장볼 수 있었고 저녁에는 손님들로 활기가 있는 기억이 남아있다.
 
 
센다이시가 정령지정도시가 되고 이 근처는 와카바야시구로 불리게 됐고 인구도 13만명을 넘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뜸하고 편의점 하나만 있는 어이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자방은행의 유일한 지점이 얼마전에 폐쇄되고 대신 공터에 ATM가 놓여있었다. 옛날에는 기다리면 곧 오는 버스도 낮에는 한시간에 한대만. 고모님은 요즘 발이 아프시고 집에서 디니기가 어럅게 됐다고 하쎴다.
젊은이들은 이 불편한 도지를 떠나고 남아있는 노인들은 장보기 조차 할 수 없는 부평한 생활응 감수해야한다.새롭게 개통한 도로에 인접해 개점한 대형 슈퍼마켓은 번창해도 차를 운전하지 못하는 나이 드신 분들은 저기 까지 혼자서 못 간다. 이게 과소지 농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의 진보에서 버림받던 네 고향의 사람들. 급격한 도시개발에 의해 파귀해버린 제 소년시절의 고향과 인간관계. 고향의 상실감에 빠지면서 아버지의 고향을 제 고향이라고 말하는 것에 좀 의문을 느끼면서 일본 각지에 번영의 은혜과 끊어지게  살고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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