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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8/24
    오랜만에 한국으로
    o-changmi
  2. 2007/08/23
    국민을 내버렸던 일본
    o-changmi
  3. 2007/08/15
    평화를 사랑하는 농업
    o-changmi
  4. 2007/08/05
    고향의 상실과 고향의 괴로움
    o-changmi

오랜만에 한국으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처럼 한국말을 얼마나 배워도 곧 잊어버린다.
  나이 때문에 그런지 기억력도 떨어졌다고 불안감이 나서 견딜 수 없다.
  여러가지로  고민함보다 한국에 가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유학시절 신세 많이 진 하숙집 아주머니와의 만남이 즐거움이다. 그 하숙집에는 불과 삼개월이었지만  한여름 열심히 공부한 생활이 그립게 생각난다.
  일한 교류라고 말하면 여러모러 있으니 저는 언제나 아주머니를 생각난다. 하숙은 아줌마에게는 사업의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외국인 유학생을 받아들이는 하숙집이 맡고 있는 역할은 좀 고장한 표현이지만 국제교류를 위해 보통이 아니다.특히 일본사람이 한국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저는 부엌에서 삼계탕 만들기를 도와준 귀중한 경험이 있거든!
 
  내년 아줌마 부처를 둘러싸고 많은 옛날의 유학생들을 서울로  모으고 ‘감사의 모임’을 계획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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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내버렸던 일본

<패전후 62년 – 더운 여름에>
일본사람이 그 전쟁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흔히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전혀 반성하지 않는 나라라고 지적되고 있습니다.
일본사람 개개인은 겸허하고 친절하는대 왜 그럴까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여름 한 TV 연속 다큐멘터리를 봤다. 보면서 실은 일본사람은  자기가 받은 피해,괴로음 조차 제대로 공언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살아남은 전 병사들이 많은 동료들의 비참한 죽음 (대부분은 아사 그리고 병사였다) 그리고 심한 학살현장을 많이 경험해서도, 터무니없는 전쟁에 대해 표현하지 못하는 채 살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전지에 가는 병사는 살아서 돌아오지말라는 교육을 받기 때문에 사회는 기적적으로 생환한 병사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전쟁을 미화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배제되지않은 채 남고 말았습니다.
  여기 와서 너무 늦었지만 이웃나라 사람에게 정성 어린 사죄를 하기 위해서는 일본사람 자신이 그 전쟁의 진상을 잘 아는 작업부터 시작해야한다고 동시에 책임을 밝혀해야 한다고  통감했습니다.
다음 문장은  제 일본판  2007-08-22 날짜  blog 내용이다.
http://blog.goo.ne.jp/194207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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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여름 NHK에서 방영된 다큐맨터리 ’’병사들의 전쟁’’을 보면서,일본사회가 일본사람이 입은 전쟁 피해를 경시해왔다고 생각했다.
세계 각지 전쟁터에서 구사일생한 병사들이 기아나 병으로 인해 즉은 병사들의 비참한 죽음을 증언했다. 그 이야기들은 전쟁을 모르는 저에게는 처음에 들은 이야기였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모두가 자기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가책을 느끼면서 전후 62년을 살아왔다.
 ‘살아서 사로잡히는 수치를 당하지 말지어다’라는 일제시절의 규정에 따라 병사들 전원에게 즉음을 구한 주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미군에 의한 공습,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은 이야기될 때가 많지만 병사들의 죽움에 대해서는 유가족,살아남은 병사들을 바롯해 국민 전체가 ‘터부’로 간주해온 경향이 있었다.
‘죽으면 야스쿠니신사로 가고 영령이 된다’다라는 논리가아닌 정서로 죽은 병사들의 실태와 전쟁 자체를 알려고 하지 않고 사실을 피해왔다.
비참한 전쟁을 직시하는것을 사회전체가 두려워했다는 일면도 있었다. 그레서 전쟁부터 교훈을 얻고 차세대에 바르게 전할 수 없었다.
 여든을 넘어 말하기 시작한 옛날의 병사들 이야기는 제가 어렸을 때 들은 용감한 것과 달리 믿을 수 없는 가엾는 이야기만이었다.
  지금 우리가 해야하는 것,또 생각해야하는 것은 죽은 병사들을 영령(英靈)이라는 애매한 호칭으로 부르지말고  병사들도 지난 전쟁의 희생자라는 시점을 가지는 것이다.
  코이즈미 전 수상 그리고 아베 현 수상은 나라를 위해 죽은 특공대(特攻隊) 병사들의 애국심에 의해 마음이 흔들렸다고 칭찬했는데 그들의 전쟁관은 말하지 못하는 죽은 병사들을 무시한 망언이다.
  식량도 없는 채 죽어버린 많은 병사들 대신 말하기 시작한 동료 병사들의 증언은 비참한 최후를 마친 전우에대한 애도심이 넘치고 전쟁을 모르고 전쟁을 안이하게 생각하는  세대에게 강한 염려를  표면한 것 같았다.
  병사들이 모두가 가족애와 고향에 가고싶다는 강한 마음을 품면서 죽어버린 사실을 증언한 목소리는 요즘 일본내애서 활발한 전쟁을 미화하는 세력의 거짓말을  꺾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나라 희생자와 이웃나라 희생자를 저울질하면 안된다> 
전쟁를 직접 경험한 세대가 사라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눈을 크게 열고 귀를 기울이고 전쟁 체험자들을 마주보고 싶다.
전후의 경제적인 부흥,번영은 전쟁희생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라는 속설을 그마두고 싶다. 전쟁희생자들을 무시한 위에 이루어진  외관만의 번영이니까.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저는 전후 일본정부가 특히 한국과 중국에대해 되풀이하여 발언해온 ‘반성’이나’사죄’는 일단 취소헤서  근본적으로 다시 출발하자고 싶다.
 외교적으로 할 수 없이 입에 발린 사과이기때문이다.
그것보다 먼저 일본사람으로서는 지난 전쟁의 전모,진실을 밝혀하고,동시에 그 전쟁책임을 추구하고 싶다.
자기 국민을 죽인 책임을 흐지부지한 채 이웃나라에대한 짐략이나 전쟁에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국내에서 벌리는 역사인식에 관한 논쟁은 국민의 희생 조차 직시하지않고 전쟁책임을 애매해온 곳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닐까. 학자들은 문제를 더욱 복잡화시켜서  국미들은 당황수럽다.
그러나 몇백만명이 되는 병사들의 유골이 지금도 해외에 방치되고 있는 사실을 보기만해도 일본이 국내적으로도 패전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명백하다.
국가가 수행한 전쟁에 의해 무고한 국민들이 쓰레기처럼 버림받은 사실을 보면 전쟁책임자들의 아를이나 손자가 ‘애국심’이나 ‘아름다운 나라’를 강조하고 호전적인 자세를 보이고있는 것은 우수꽝스럽게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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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하는 농업

8월 12일, 가까이에 있는  호숫가 밭에서 메밀 씨를 뿌렸다.
우리 시민단체(식과 농의 안전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클럽)가 빌린 약 400평의 밭에서 메밀을 재배하고 11월에는 메밀가루를 만들고 ‘’메밀 축제’’에서 시민에게 판매할 예정이다.
 저는 메밀국수는 잘 먹지만 씨를 뿔리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 날 저는 소비자에서 생산자에 갑작스럽게 변신한 셈이다.
회원 남녀노노만 11명이 모였다. 작업를 앞두고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 저도 실제로 종파를 해보았다. 손으로 직접 뿌릴까 생각했는데 실은 소형자동 파종기로 30센티 간격으로 밀어내면 됐다.
쉬은 작업인 줄 생각했는데 한여름 염천하에서 하는 작업은 예상보다 힘들었다.
실은 제가 메밀과 보리를 정확히 구별 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인 줄 깨달았지만  농업에 대해 아니 일반상식도 없는 제가 모종을 키우고 가루를 만들고 메밀국수를 먹는 것을 상상할 만 해도 즐거웠다. 홋수강에 번무한 갈대 사이에서 부는 상쾌한 바람을 나무 그늘에서 쐬면서 먹은 도시락도 맛이있었다.
 한 회웍에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 밭은 시의 ‘경관 조례’로 시내의 경관을  유지하기 위해 휴경지를 갈고 싶은 사람이나 단체에게 시가 알선해 무료로 빌려준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은 8월 중순에는 우란분재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는 사람이 많아서 제가 수강중인 ‘일본어를 가르치는 교수법 강좌’도 농업지원 봉사활동도 여름휴가중이다. 예년에 비해 너무 더운 여름 때문인지 독서도 잘 못하는 채 전후 62년째를 맞이한 금년 여름, NHK TV에서 전쟁과 평화에 관한 예년보다 훨씬 수일한 작품이 매일 같이 방영되는 것이 는에 띄었다.
전쟁,히로시마,나가사키,물론 피해와 가해를 막론하고 비참한 과거를 의도적으로 감추고 없애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현재,이렇게 전쟁에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야하는 움직임을 보며 지난 참의선거에서 평화 헌법을 파괴하려고 하는 여당 자민당의 참패와 함께 조금씩 일본사회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친해하는 한국사람 여러분!
요즘 일본 방위성 장관이 ‘’ 원자폭탄 투하는 할 수 없었다’’라는 발언했기 때문에 파면 당했다는 것이 아시죠. 핵무기폐절을 세계에대해 호소해야하는 일본 정치가로서는 물상식하기 짝이 없다고 많은 국민들이 화가 나서 비판했습니다. 그 장관은 미국에서는 두개의 원폭 투하가 이른 전쟁 종식을 이루었다는 미국측 견해를 소개했다고 변명했습니다.
이 발언과 그를 두둔한 수상의 자세(두 사람은 일본 핵무장 농자다)가 이번의 선거 패배의 원인의 하나로  논편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때 제가 생각난 것은 한국에서도 미국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지않은 사실이었습나다. 물론 지난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인 함세웅 씨가 히로시마에 오시고 희셍자를 추도한 모습이 가슴에 남아있지만.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좋은 핵무기와 나쁜 핵무기에 대해.
‘패전’이 아닌’종전’라고 사실을  애매하게 표현하는 우리나라 일본사람의 감각에 위화감을 느끼지만 전쟁의 피해자는 언제나 민중이라는 공통의식을 전세계의 사람들이 공유하기 정말 바람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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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상실과 고향의 괴로움

 저에게는 고향이라는 곳 있는가”
이거 도회에 사는 많은 사람이 품는 의문이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졸업할 때 까지 도쿄 신주쿠에 살았다. 그 동안 네번 이사했지만 소년시절을 지낸 주택 부지에는 빌딩이 건축되고 그 시절을 생각내는 실마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다. 우현히 근처를 들렀다가 흔적이 없기에 당황할 뿐이다.
 
도회지에 그것도 대저택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상상하지 못 하겠지만 경제 발전에  따라 지방에서 대도시로  끌어당긴 서민들은 집합과 이산을 되풀이하면서 도회지를 헤매고 깨달았을 때 인간관계도 혼란한 채 노년기에 접어든다.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있었지만 없어졌다고 해야한다. 그래서 뜨겁게 고향을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부럽다.
 
 
제 아버님은 소년시절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에 살고 센다이로 이사했다. 진학을 위해 상경,졸업한 후 기사로서 일본광학회사(현 니콘)에 입사하고 패전후 통상산업성에 근무했다.
왜 민간기업에서 관청근무가 되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일본의 국가가관의 만주화와 관계가 있었다고 추측된다. 아버님의 무덥은 센다이에 있고 집에는 아바지의 여동생인 고모가 혼자서 계신다.
 
그래서 저에게 고향이라는게 있으면 센다이가 해당할지도 모른다. 센다이는 동북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데다가 문교도시로 누구도 인정하는 아름다운 도시다. 어렸을 때 저는 여름방학 마다 동생들과 함께 어버지의 고향에서 여름을 지넀다.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우리들을 귀여워해주셨다. 행복한 소년시절의 기억이 제 마음애 남아있는 도지다.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 미나미코이쯔미
 미야기 형무소로 이어지는 버스 가는 길과 이은 고요한 주택지는 옛날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처의 거리를 걸어서 놀라고 말았다. 생선가게,채소가게,약국 등 일상생활을 위해 필요한 상점이 거의 업었다. 헌 간판은 보이지만 영업하지 않는 상태다. 상점가로 부르지 못하는 길거리였다. 옛날에는 규모는 적지만 충분히 장볼 수 있었고 저녁에는 손님들로 활기가 있는 기억이 남아있다.
 
 
센다이시가 정령지정도시가 되고 이 근처는 와카바야시구로 불리게 됐고 인구도 13만명을 넘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뜸하고 편의점 하나만 있는 어이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자방은행의 유일한 지점이 얼마전에 폐쇄되고 대신 공터에 ATM가 놓여있었다. 옛날에는 기다리면 곧 오는 버스도 낮에는 한시간에 한대만. 고모님은 요즘 발이 아프시고 집에서 디니기가 어럅게 됐다고 하쎴다.
젊은이들은 이 불편한 도지를 떠나고 남아있는 노인들은 장보기 조차 할 수 없는 부평한 생활응 감수해야한다.새롭게 개통한 도로에 인접해 개점한 대형 슈퍼마켓은 번창해도 차를 운전하지 못하는 나이 드신 분들은 저기 까지 혼자서 못 간다. 이게 과소지 농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의 진보에서 버림받던 네 고향의 사람들. 급격한 도시개발에 의해 파귀해버린 제 소년시절의 고향과 인간관계. 고향의 상실감에 빠지면서 아버지의 고향을 제 고향이라고 말하는 것에 좀 의문을 느끼면서 일본 각지에 번영의 은혜과 끊어지게  살고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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