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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6/12/28

[회고록] 관악에서의 지난 1년에 대한 회고(1) - 선관위

기숙사 밖을 잠옷 차림으로 나갔다가 얼어 죽을뻔 했다. 정말로 겨울이라는 것을 실감케하는

 

순간이었다. 이 쌀쌀한 날씨만큼 올해 관악도 전반적으로 쌀쌀했다. 단지 날씨뿐만 아니라

 

여러 환경적인 면에서 그렇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서울대에 입학했다. 합격 통지를 받아들고 온 가족이 기뻐했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활동'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워낙 정치적

지향성이 강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실제적으로 한 것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다가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49대 총학생회 재선거 선거관리위원이었다. 학생회관에

서 공고에 있는 연락처를 보고 바로 연락했다.(아님 바로 총학실로 갔던가? 이것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첫 회의가 소집되고 선관위원들의 면면을 보았다. 4명은 재학생, 4명은 신입생이었다. 인사

를 하고 3, 4월에 정말 열심히 선관위 일을 했다. 이것만큼은 자부할 수 있다. 다른 7명보다

도 말이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아픔도 많이 겪었다. 3월에 수습 시험을 통해 들어간 '교지관

악' 활동을 게을리 해버리고 만 것이다. 수습 교육을 몇 번 빠지자 당시 교지관악 편집장이었

던 김지산씨(이 분은 원래 성을 밝히지 않는다. 아마도 여성주의적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나

는 굳이 그렇게 써주지는 않겠다.)는 나더러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빠

진 교육을 보충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그만 둘 것인가. 사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전자를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을 강요받을 그 당시에는 무척 힘든 상황이었다. 아마 그 때가 투표율 저조로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담배에까지 손을 댔으니 말이다.(사실 나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특히 동갑내기 녀석들에게. 그런 내가 지금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그러한 요구에 자제력 같은 것을 별로 없었던 그 시절

에는 속으로 화가 났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선거에 올인했다.

 

 

  투표 마지막 날은 정말 절망적이었다. 전날까지 누적 투표율이 약 43%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50대 총학 선거는 총 누적 투표율이 이것도 안 되니 그것보다는 낫지만)

그 이유를 따지기에 앞서 자신을 책망했다. 선관위가 홍보를 못 한 것일까?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걸까? 이러한 고뇌 끝에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종 행동을 택했다.

 

 

  그것은 바로 '마임'이었다.(혹시나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 중에 본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

겠다.) 그것이 투표율을 얼마나 올릴 수 있을 지, 영향이나 끼칠 수 있을 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달리 선택의 방법은 없었다. 우리 반 애들에게 연락을 해서 도움을 줄 친구들을

구했다. 그리고 중도, 자하연, 해방터 등에서 '불나비', '희망은 있다' 등등의 마임을 하면서

투표를 독려했다. 정말 이 때는 미쳤었다. 선거 성사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대학

시절 처음의 좌절의 기억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이 글을 빌어 그때 도와준

한길반 학우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날 기적이 일어났다. 투표율 50%를 넘은 것이다. 이 당시에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뻤다.(이후에 생각이 바뀌긴 했지만) 그리고 문득 다른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 날에 각 선본의 후보들이 밤 늦게까지 투표를 독려했다. 그러나 제49대 총학

재선거에 출마한 세 선본 중 한 선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직접 밝히지는 않겠다.

다만 이후에 나와 인연을 맺다가 지금은 거의 인사도 안 하게 된 조직이다. 제25대 

사회대 선거에서는 My 머시기로 출마한 선본이다.) 게다가 그 한 선본은 바로 내가 투표한

선본이었다. 인간적인 배신감과 경멸감을 느꼈다. 아마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그러한 감정을 느낀 대상이었던 것 같다. 동시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투표를 독려하는

황라열씨의 모습에서는 존경심마저 들었다. 그리고 개표장에서 수락 연설을 통해서

(나는 개표장에서 투표 기간에 죽도록 한 '불나비' 마임을 선관위 새내기 발언 시간에

또 하였다.) 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무관심을 돌리겠다고, 학우들의 지지를 받는 학생회

를 만들겠다고 말을 했을 때는 정말 울뻔했다.(물론 이에 대한 판단도 나중에 바뀌니

오해 마시길)

 

 

  개표가 끝나고 총학생회가를 불렀다. 사실 이 때 총학생회가를 알 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물쩡어물쩡 따라 부르는 총학생회가는 정말 감격적이었다. 나는 이 순간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학 졸업 전까지는.

 

 

  그렇게 나의 3, 4월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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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캐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를 보고 나서

  이 영화는 물론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배경과 설정은 정말 근대스럽다. 남자 주인공은 신

분이 대장장이이다. 그는 그가 살고 있는 왕국(왕국이 아닐지도..)의 공주(왕국이 아니라면

그 영토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딸)를 좋아한다. 이 시대는 근대와 전근대 사이이기 때문에

물론 그는 함부로 이 공주를 넘볼 수 없다. 하지만 여러 고난에서 공주를 구하기 위해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공주에게 호감을 산다. 그리고 공주는

원래 약혼하기로 되어있던 '준장'(아무래도 섬이다보니 이런 신분도 꽤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듯하다.)을 내팽개치고 결국은 남자 주인공과 함께 하는 길을 택한다. 이는 자유/평등/형제애로

대표되는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전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신분을 초월한 자유연애, 집단에서

의 위치보다 개인의 위치가 좀 더 중시되는 시대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생각할 건 딱 이 것뿐인 듯하다. 이 영화의 나머지는 스펙터클한 전투씬, 대항해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어드벤처적 요소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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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평] 김전일을 보면서 느끼는 것

0. 소년 탐정 김전일은 총 148화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이다. 100화를 넘게 보면서 나름대로

 

많은 것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아래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1-1. 주술적 요소를 인간 세계에서 분리

 

  이건 사실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에서 종교가 세속화된 과정을

상기해보면 곧 이해가 가능할 것 같다. 미신이나 귀신 따위가 인간

세계에 있지도 않고, 영향을 주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여러 살인사건들이 일어난 장소를 살펴보면 살인귀의 전설이나

여러 미신들의 이야기가 존재하거나 만들어진 곳이다. 그리고

김전일의 일행은 살인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런 이야기에 근거해

서 어떤 초인간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존재가 그러한 사건을 일으

킨다고 두려움에 떨게 된다. 하지만 김전일은 항상 이러한 것들을

믿지 않고 그러한 이야기나 전설을 빙자하여 내부의 누군가가

살인사건을 행하고 있음을 '신념'으로 보일 정도로 항상 사고한다.

이를 보면 김전일은 철저히 '과학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2.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아이러니

 

  소설 '뫼비우스의 띠'를 보면 앉은뱅이와 곱추는 원래 그 사회

내에서 핍박받는 '피해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핍박을 직접

적으로 가한 존재에 대해 '가해'를 하는 '가해자'로 변하게 된다.

이는 바로 앞면이 뒷면이 되고 뒷면이 앞면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

라는 제목을 상징하는 내용이다. 김전일의 대부분의 작품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밀실 살인, 연쇄 살인, 내부 살인

이라는 김전일 추리 사건의 큰 특징 하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의

가해자는 김전일의 추리와 추궁 끝에 자백을 하게 된다. 가해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가해자가 죽인 여러 '피해자'들은 바로 가해자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을 죽인 '가해자'들이다. 살인사건을 일으

킨 사람을 무작정 욕할 수만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살인은 정당화 돼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 김전일은 살인이

옳았다고 주장하는 가해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과연 하늘 나라에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이 살인을 한다고

편해질까요? 당신이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했던 사람들을 죽임으로

써 당신도 그들과 똑같은 부류가 된 것일 뿐입니다."

 

 

 

 

 

1-3. 항상 정의는 승리한다 

 

  사실 이 명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김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역시 김전일

은 창작물의 장점을 발휘하여 언제나 범인을 밝혀내고야 만다.

이러한 모습은 보는 사람의 가치체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비록 현실은 부패하고, 모순과 부조리가 판치고 있지만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이데아)은 김전일에 나오는 것처럼 정의가 죽지 않

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으며 가해자도, 피해자도 함께 잘 살 수 있

는 세상이라는 것이고 이는 아까 말한 명제에 대한 신념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리고 이 명제와 현실과의 괴리에 대한 자각을 함으로

써 현실에 대해 더욱 더 비판적인 인식을 갖게 되고, 현실 변혁

적인 입장을 강화시키는 하나의 동인으로써 작용할 수도 있다.

 

 

 

 

2. 결론

 

  김전일과 나는 비슷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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