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이후 큰 병이 났다. 몸에 칼 안대고, 병원에 입원 안했으니 무지한 탓에 큰 병이 아니라고 애써 혼자 위안하고 잇었다. 그러나 난 지금 큰 병이 나서 된통 고생하고 있다.
여름 내내 무리를 거듭했다. 글을 쓴답시고 하루에 10시간, 때로는12~14시간을 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냥 이일저일 하면서 서성거린 시간도 있었지만 영감을 벼리기 위해서 온갖 독서를 병행하면서 말이다.
열, 열 두시간 나아가서 열네시간 씩 온전히 빵빵하게 자판을 두드리지 않은 날이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컴을 켜놓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며 시동이 걸릴 때까지 혹은 예열을 하기위해서 보낸 시간까지 여름내내 복더위를 견디면서 무척이나 노심초사했다.
그랬다.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8월 말까지 일단 끝내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교정과 교열을 볼 수 있다는 목표를 두고서 퍽이나 열심히 임했으니까. 마치 기계처럼 일했다.
"난 나이를 먹었으니까 성실해야 돼."
"난 그동안 인생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고 볼 수 있어. 그동안 못했던 걸 보충하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해!"
생각의 기저에는 이런 정신이 깔렸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같은 생각이 아니라도 선택의 여지 없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글을 사용해야 내년에 출마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시일이 촉박한, 그런 목적을 가진 글이었으니까.
내가 기일 안에 결과물을 내놓지 않으면 내년 선거에 차질이 오는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그러다가 드디어 병이 났다. 키보드 두드리고 마우스 움직이는 일을 오른 손이 거의 한다. 거기다 일평생 오른 손 잡이로서 온갖 일을 오른 손으로 하였으니 오른 손은 더 이상은 못살겠다고 신호를 한 두 번 보낸 것이 아니었다.
사실 컴퓨터를 하는데 있어서 자판 두드리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다. 마우스를 움직이는 일이 더 많은 노동을 요하고, 노동이 심했을 경우 어김없이 아픈 팔은 오른 팔이다. 이같이 오른 팔을 쓰기 위해 움직인 근육과 신경에 병이 났다고 말하고 싶다. 오랜 시간 작업하고 나면 어깨근육도 근육이지만 팔꿈치가 저리고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목도 오른 쪽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른 쪽 등줄기, 오른 쪽 팔꿈치에서 내리 손등으로까지 연결되어 온 근육과 온 힘줄이 금방이라도 화석처럼 굳어져서 다시는 원상복구 되지 않을 것처럼 아프고 딱딱한 것이어서 병원 가는 것을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의사가 근육주사를 팍팍 찔렀는데 그 순간 대상포진이 기다리고 있다가 오른 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동원되는 온 신경라인을 타고 준비 상태에 있던 바이러스 균이 급속도로 퍼졌던가 보았다. 난 그것도 모르고 근육을 풀려는 욕심에만 팔려서 근육주사에 더구나 상처부위에 찜질팩을 가했으니 잘 하는 짓이었다.
온몸에 열이 나고, 확산될 모든 준비를 갖추고서 대기하고 있던 바이러스균에 근육을 푼답시고 물리치료 용 찜질팩을 부착했으니, 기름에 불을 부은 격이 되어 상처는 성이 나서 순식간에 포도송이 같은 수포가 맺히기 시작했다. 등판에서 앞가슴까지 띠를 두른 것처럼...
피부과 병원 찾아가는 과정에서 고생과 시행착오도 많았다. 고생을 바가지로 했던 것이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9.18일엔 큰 행사 취재차 한강변에 가서 하는 수 없이 카메라를 들고 나섰고, 이어서 이사를 하느라 무리를 거듭했다.
베니는 내가 아프다고 한날 택시 잡아 타고 원자력병원 응급실로 입원하러 오라고 극 성화였지만 나에게는 일이 너무 겹쳤던 것이다. 이게 재수라면 재수 아닌가벼?
어쩐지 을지병원 의사는 날 볼 때마다 '입원하실래요?"를 거듭해서 묻는 것이었다. "왜 저러시나?"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남들은 이 정도면 다 입원을 했던가 보다. 하긴 1차 초이스 병원에서는 나의 경우 굉장히 심하기 때문에 병실이 있는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소견서 당장 써줄테니 어서 가라 말했다. 대상포진 이놈의 병은 발병 당시의 고통은 그야말로 세발의 피였던가 보다
그런데도 입원시기를 놓친거다. 행사와 이사 때문에, 글 다듬는 일 때문에
당하고나서 이제야 알았다. 겪으면서 이제야 실감했다.
올른쪽 젖꼭지에서부터 옷깃이 닿는 모든 곳이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아팠다.
의사는 이게 감각이상증이라고 불렀다. 정말 그런가보다. 아무 것도 닿게 하지마! 가까이 오면 너 죽는다(?) 신경도 상처도 근육도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수십년 간 참았던 거 이제 쏟아놓는 거야. 특히나 십년 이쪽저쪽 혹사한 네 오른 팔, 지금 넌 큰 병났지!
맞어 맞어 앗 뜨거! 컴 앞에 앉으면 상처가 번진 환부와 신경조직이 생난리다. 인간은 고생덩어리. 못말리는 모순덩어리 으헤헤ㅅㅅ
"10동안 무리했던 근육이야! 잠시만 쉬게 해줘." 일제히 아우성을 치면서 아무 것도 상처에 닿게 하지 말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낸다.
좋았던 벗님네들 모두 떠나가고
눈부심만이 내 방에 남아 나를 못살게 하네 못살게 하네!
이성부 시인의 시 한구절이다.
온 신경들이 일어나서 나를 못살게 하네 못살게 하네! 이 고통이 한달 째다
거울을 보면 진한 상처가 보인다. 이병은 다 나아도 검게 상처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미 각오하고 있다. 이 진한 상처가 본래의 내 살색 피부를 온전하게 돌려줄 것 같진 않다. 이번 병은 흔적과 흉을 꽤나 깊게 남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