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후 잡설>아쉬움의 정동영, 영광의 정동영,-③

-부조리의 토양에서 피고 지는 야합과 패거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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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선임기자 박정례]= 지금도 눈에 선하다. 20년 전 일이다. 어느 방송이었든가 딱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TV를 켜는 순간 풀 샷으로 잡은 영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띄는 화면 속의 인물은 이제 막 정계에 얼굴을 내민 신진 정치인 정동영이었다. 필자가 뉴스를 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본 기자의 뇌리에 찍힌 인상은 길고도 강했다. 정동영이라는 인물에게 관심을 갖는 계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날의 최고 사냥꾼은 단연 촬영기자였다. "당신, 잘 나가던 방송인이었지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나의 취재원 일뿐이오." 입장이 뒤바뀐 기자와 취재원의 처지가 어떤 것인가를 그처럼 대비시켜 주는 장면은 일찍이 없었다.

 

취재 대상 일 순위 정치인

대변인, 당의장,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대변인으로서의 첫날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예식에 다름 아니었다. 김대중이라는 노(老) 정객의 편에 서서 이제 막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려하는 고독한 전사, “오늘 우리 '국민회의'에서는 당직 인선을 단행하게 됐습니다. 대변인에는 저 정동영입니다...." 영상기기에서 쏟아지는 굉음소리를 가르며 정동영은 대변인 성명을 낭독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여전히 취재를 다투며 셔터를 내리눌렀다. '타다닥 찰칵찰칵' 

 

기약 없이 계속될 것 같던 길이었다. 그러나 반전의 시간은 의외로 빨리 찾아온다. 시작도 끝도 모를 만년 야당의 생활이 끝났던 것이다. 김대중 총재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른다. 55년 만의 수평적 정권교체였다. 정동영도 그렇고 야당의 다른 의원들도 여당의원으로의 신분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노무현 대통령 시대까지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동안 여당의원으로서 꿀맛 같은 기간을 보낸다. "지내놓고 보니 15cm는 족히 땅위에서 붕 떠서 지낸 세월이었던 것 같다."고 정동영은 술회했다.

 

17대 선거가 찾아왔다. 민주당 의원들은 대부분 새로 창당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 갈아타 있었다. 정동영도 새당에 둥지를 튼다. 특히나 천정배와 신기남과 정동영 트리오는 <천.신.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열우당 창당을 앞장서 선도한다. 이중 정동영은 열우당의 당의장 직함을 갖고서 총선을 지휘하게 된다. 정동영에게 설화(舌禍) 사건이 터진 것은 이 때였다. 젊은이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는 과정에서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당의장 사퇴는 물론 22번으로 올라 있는 비례대표후보 직 마저 내려놓는다.

 

정동영의 정치신조는 책임정치의 구현이었다. 큰 책임만 두 번이다. 2004년에 치룬 17대 총선이 첫 번째이고 2006년 지방선거가 두 번째였다. 선거 참패로 인해 또다시 대표직을 사퇴한다. 열우당은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대책 없는 추락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초지종은 정세균 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

 

정동영에게는 꿈이 있었다. 상향식 공천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자 후임자들은 정동영이 확립하려던 전통을 서둘러 파괴한다. 선거공학적인 계산과 패거리정치라는 맹독이 뿌려지기 시작한 거다. 염치도 체면도 다 팽개친 패권정치, 정동영의 상향식 공천을 뭉개고 담합과 야합의 공천이 대세로 자릴 잡는다. 그 결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쌓아온 야당의 전통은 간 데 없고, 독재에 맞설 때마다 빛을 발하던 야성(野性) 또한 자취를 감춘다.  

 

이는 필자의 워딩이 아니다. 뜻있는 사람들이 야당을 향해서 너 나 없이 내뱉는 쓴 소리다. 소신 없는 정치인들은 거짓과 위선을 장착하고서 매사에 개기고 뭉개고 뒤집으며 60년 동안 일궈온 전통을 일거에 군내 나는 묵은 지 취급을 해버린다. 정도를 걷는 사람은 뒤로 처지고, 분장(扮裝)에 능한 사람은 각광을 받는다. 계속되는 편법과 꼼수는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이내 제 2의 천성으로 굳어졌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관성은 관성을 낳고 특정 집단의 형질을 형성한다. 야합과 패권정치는 결국 그렇게 부조리한 토양에서 피어났다

 

영광의 정동영, 

아쉬움의 정동영

 

정동영의 선전(善戰)은 그런대로 이어진다. 2007년도에는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로 확정되는 시기까지다. 100년 정당을 표방하고 창당한 열우당이 4년 만에 막을 내리고 새롭게 결성된 통합야당에서였다. 하지만 그가 나선 17대 대선은 대패(大敗)로 끝난다.

 

이유는 많았다. 노무현 정권은 집권 내내 순탄치 못한 여정을 이어갔다. 당시의 프레시안, 중앙일보 보도내용 등(2016.12.6)을 보면 “불과 1주일 전 14%에서 ‘노 대통령 국정지지도 5.7%로 최저치 갱신’”이라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 기사는 부제목으로 ‘바닥 모르는 하락추세...임기 말 YS보다 못해’로 참여정부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로 김영삼 대통령이 임기 말 지지율은 8.4%다.

 

한편, 언론에서는 참여정부의 몰락과 지지율을 보며 노 대통령이 '탈당 불사'를 말했다가 '당 사수' 발언을 하는가 하면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연이은 실언을 하는 바람에 ‘불신감을 갖게 되지 않았나?’하는 해석을 내놨다. 지지층으로부터는 외면을 당하고, 국민들과는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타협과 상생은 실종되고, 오기와 자만심만 성하여 정치는 상대편들과 접점을 찾지 못하는 노무현 정권이었다.

 

2007년 대선은 누가 뭐래도 참여정부에 대한 심판과 민심이반 속에서 치러졌다. 그 조짐은 제4회 지방선거 때부터 나타났다. 결과는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울 정도의 참패였다. 당시 열우당은 광역단체장 16개 중 단 한군데만 당선했을 뿐이다. 기초자치단체장도 230명 중 19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쳤다. 이런 모습을 보며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개나 소나 내보내면 다 당선됐을 것이다.”고 열우당을 호기롭게 비아냥거렸다.

 

앞에서 필자는 2004년 총선 때 그랬던 것처럼 2006년도의 지방선거에서도 정동영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을 내려놓았다’고 말했다. 이때를 기해서 당은 급속히 와해 모드로 접어들고 많은 사람들이 ‘열우당을 떠났고, 의원들 또한 탈당러시를 이루느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유권자들은 그처럼 열우당에 냉소적이었다. 정동영은 열우당의 온갖 실정을 등에 지고 싸웠고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선거를 치르고 있었다. 예정된 독배였던 것이다. 내부의 적과 바깥의 적으로부터 동시에 얻어맞는 형국이었다. 죽어라. 죽어라! 안팎이 나서서 정동영을 패대기 쳤다. 전자는 실패한 대통령에 대한 콤플렉스와 내부 모순을 정동영이 뒤집어쓰고 죽기를 바라고, 후자는 노무현 정부를 심판하기 위해 단호하게 돌아선 유권자들이었다.

 

후보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 대를 잠깐 보자. 애시 당초 친노들은 대통합민주신당에 맹비난을 퍼붓던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열우당에 그대로 남아 당을 계속 꾸려나간다 한들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으련만 열우당 세력들은 이내 신당에 얼굴을 디민다. 앉아서 폭삭 망하느니 큰판에 뛰어들어 실리라도 챙길 작정이었던 모양이었다.

 

열우당 잔류 세력들은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몰려오고, 이해찬과 한명숙과 유시민이 곧 바로 대선 판에 뛰어든다. 하지만 며칠 못가서 한명숙과 유시민은 후보를 사퇴한다. 사퇴의 변이란 “이해찬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언론에서는 초장부터 이들의 중도 사퇴를 예견하고 있어서인지 “완주를 할 거냐?”고 묻는 기사가 보도되고 있었던 터다.

 

2007년 대선은 이와 같이 정동영의 패배로 끝났다. 5.7% 밖에 안 되는 임기 말 노무현의 지지율이 말해주듯이 참여정부의 온갖 실정과 실책 속에서 치룬 선거였다. 기가 막힌 사실은, 현직 대통령의 형님과 차기 대통령이 된 이명박의 형님 간에 맺은 밀약(위키리크스 폭로문건)이다. 이로 인해서 이명박의 BBK 사기사건과 온갖 비리혐의가 조사도 못해보고 덮인 사실(2007년 12월 12일 수요일자 시사인의 “노무현과 이명박 통했을까?” 등 수많은 기사 참조)과 현직 대통령과 친노들이 합세를 해서 이명박의 승리를 위해 헌신을 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선 기간 중에 이들이 벌인 ‘정동영 돕지 않기’, “내가 정권재창출할 의무가 있냐?”는 대통령의 언행, 형님들 간의 밀약으로 ‘BBK 주가조작 혐의 덮어버리기’ 등은 ‘정동영 죽이기’의 1라운드에 불과했다. 이후 정동영에게는 수많은 불운이 이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아쉬움을 토로하게 만든다. ④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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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8 14:38 2016/05/2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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