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후 잡설>정동영과 정세균-①

-전북의 대표적인 두 정치인

 

기억 한조각이 떠오른다. 글의 타이틀을 <총선 후 잡설>이라 정하고 보니 더욱 그렇다. 몇 해 전에 한 경제연구소와 인연을 맺은 적이 있는데 필요한 인물이라 여겨서인지 연구소 측에서 입사 제의를 해왔다. 시체 말로 “‘나이 지긋한 아줌마에게 입사 제의를 해오다니(...)” 아무리 따져 봐도 뜻밖의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무튼 중간 역할을 하시는 분이 “연구소에 들어가면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묻는 것이어서 망설이지 않고 “잡일이요.”하고 대답했다. 잡일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연구소에 들어가 뭔 폼을 잡을 일이 있겠나.”싶었기 때문이다. 예 컨데 연구소에 소용되는 사람이 되려면 남들이 싫어하는 잡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하나 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나 생각했다. 근사한 직책을 입에 담지 않아서인지 필자의 말에 상대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잡일이 얼마나 중요한데요.”라는 말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렇다. 이번 글은 잡다한 잡설이기 십상이다. 총선 내내 고군분투하는 정치인들을 지켜보면서 느낀 점을 표출하는 면에서도 그렇고, 스치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유롭게 쓰고 싶은 마음에서도 그렇다. 생각은 때로 핑퐁처럼 들쭉날쭉 튀어 오를 것이다. 말 주머니 안에는 <총선 후 잡설>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다양한 감정과 남들이 하찮게 여길지도 모르는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잡설이 담길 것 같다.

잠깐 우리 역사의 단면 하나, 구한말 고종의 왕비인 중전 민씨와 대원군에 대한 역사 한 토막이다. 두 사람 간의 권력투쟁에서의 승자는 민씨였다. 대원군은 축출되어 구금되었고 끝내는 청나라로 끌려가는 등 끝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중전 민씨의 생애도 파란만장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후궁을 몰아내는 일에서부터 자신의 자리보존이나 눈앞의 적인 시아버지를 제압하는 데는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너머를 보는 눈은 한계점 투성이다. 궁중 안 암투를 넘어 국가경영이나 저 넓은 영역인 국제간의 역학관계에서 배태되고 야기될 수 있는, 결과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은 없었던 것 같다. 이는 하나마나 한 얘기다. 중전 민씨가 자격 있고 유능해서 나랏일에 관여했겠나. 실세 왕비였기 때문에 감 놔라 대추 놔라 국정을 농단한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아무튼 구한말 중전 민씨의 전횡은 자신과 조선을 넘어 자손만대에도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일제(日帝)는 공권력과 현장 칼잡이 격인 사무라이 부류의 낭인들을 동원하여 그녀를 살육한다. 조선의 왕비, 중전 민씨는 그렇게 망국의 한을 천추에 남기면서 시아버지 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필자는 이지점에서 “저 여인은 과연 우리 역사에 어떤 이로움을 끼쳤을까?”하는 질문을 던져봤다. 중전 민씨의 이야기가 오페라 ‘명성황후’라는 상업적 볼거리로 재탄생하여 흥행을 위한 피알 차원에서 과대포장 되어 광고시장을 누비는 것과 역사적 실제 사이의 괴리를 느끼며 한없는 형용모순에 빠졌다. 그때마다 호화롭고도 세련된 의상을 걸치고 명성황후를 연기하는 성악가의 포스에 무조건 박수를 치는 예술의 향유자이기를 사양하고 싶었다. 그들이 주입해주는 비련의 왕비를 동정하는 것 말고, 결이 다른 이성적 질문하나라도 스스로에게 던져보려 애를 썼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다. 오래전부터 더민당의 정세균 씨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대입하여 보곤 했다. “저 사람은 국회의원 20년 하면서 호남의 위상과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과연 어떠한 공헌을 했을까?”라고 말이다.

정세균의 장점이라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겨주며 대안관계가 원만하다는 평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타인에 대한 접근성과 적응력이 좋다는 말이 되겠다. 이런 경우의 또 다른 얼굴은 처세술이 탁월하다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정세균은 그렇게 두루 원만해 보이는 인상과 관리형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당이 과도기에 있을 때마다 임시 대표직이 거론되고 실제로 그 일을 맡게 된다. 열린우리당 시절 위기상황에서 두 차례 ‘구원투수’ 성 임시대표를 맡은 것을 기억하자. 이런 저런 일로 관록이 쌓인 그다. 2008년도에는 정식으로 임기 2년의 당대표로 등극한다.

양지와 음지, 빛과 그늘, 익숙한 말이다. 진부하기도차 한 이 평범한 말을 빌어 정세균 씨가 잘 나가던 때의 그늘은 무엇인지 궁금하기에 묻고 싶다. 그가 잘 나가기 위하여 짓밟았던 인물, 철저히 형극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불쌍하고 불쌍한 야당사에 그는 과연 어떤 해악을 끼치고 어떤 공적을 더했을까. 망조 들어 패망하는 나라에는 항상 원인제공자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의 야당에 김대중의 그 빛나던 야당이 존재하는가?

때마침 정세균과 같은 때에 정치를 시작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이번 20대 총선에서 등원하게 됐다. 이들에 대해 언급해보려 한다.

 

정동영과 정세균

 

정동영과 정세균은 둘 다 전북 출신 정치인이다. 전북 출신 정치인이 어디 한둘일까만 유독 이 두 사람을 거론하는 이유가 있다. 전북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자 라이벌이기 때문이고, 둘 다 오늘 날의 전북정치의 위상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야당정치사에 광주전남 정치인들이 중심인 것 같지만, 김대중 대통령 이후 실질적으로 굵직한 인물은 거의 전북 출신들이었다. 대통령후보를 배출한 곳도 전북이요, 당대표를 제일 많이 역임한 지역도 전북이다. 사족이지만 국회의장도 전북에서 배출했다.

헌데 어째서 오늘 날의 전북정치와 전북의 위상은 바닥권일까? 이점에 대해서 20년 동안이나 잘 나가는 정치인인 정세균 씨가 책임이 없다고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마침 정동영은 “전북 정치를 변방에서 중심으로 끌어올리고 호남 발전을 위해서 온힘을 기울이겠다.”며 하방정치를 약속을 했다.

정세균은 어떨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종로에서 6선 고지에 이르더니 당대표와 국회의장과 대선출마 중 어떤 패를 골라잡을지 즐거운 고민에 빠져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김종인 이후 당의 얼굴이 고민되는지라 작금의 더민당 사정은 간단치 않다. 더민당의 최대 지주인 문재인은 자신의 대선가도를 공고히 해줄 사람을 찾기 위해 고민이 깊을 것이다. 임시대표 체재를 8월 말까지 유지하기로 했지만 그 안에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는 일이 급선무인 셈이다. 이런 와중에 정세균이 당대표로 거론되기 시작한다. 정세균 자신도 대표직을 향해 입질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동영을 보자. 그는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된다. 이전에는 당 대표를 두 차례 역임했고 이제 4선의원이 됐다. 반면에 정세균은 2개월여 임시 대표직 수행을 포함하여 열우당이 해체되기 직전과 2008년 민주당의 당대표까지 합하여 세 번의 당대표 직책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자타가 공인하는 6선의원이 된 마당이다.

정동영과 정세균의 정치 스타일은 걸어온 길만큼이나 대조적이다. 둘의 정치 역정에서 눈에 띄는 확연한 차이는 전자가 풍운아적인 행보라면 정세균은 안정적이고도 권력 친화적인 행보라 할 수 있다. 오랜 기간 주류 권 안에서 놀았다는 얘기다.

이들의 고향은 각각 전북의 순창과 진안이다. 두 곳 다 산간지방인데 정세균의 고향은 북의 ‘개마고원’과 함께 남에서는 ‘진안고원’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면적의 82.4%가 산으로 이루어진 고장으로서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전라도] 편에서 ‘사돈의 팔촌에 정승 하나 없다.’ 할 정도로 산이 높은 오지다. 아무튼 정동영의 순창이나 정세균의 진안은 지금껏 개발이나 산업화의 물결을 타지 못해서 당장 가보더라도 순박할 정도의 옛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고장이다.

산골 출신이라서 그런지 이들은 학구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둘 다 대처로 진출하여 고교를 졸업했다. 하긴 정동영은 좀 더 일찍 부친의 선택에 힘입어 10세 때인 초등부터 전주로 나와 다니게 된다. 정동영은 이후 전주고를 거쳐 서울대 역사과를, 정세균은 신흥고를 졸업하고서 고대 법대를 나왔다. 정세균의 학력에선 특기할 점이 눈에 띈다. 먼저 진안의 능길초등학교를 나와 정규 중학교가 아닌 주천고등공민학교라는 곳을 다닌 점이고 이후 고교는 세 군데를 거친다. 무주의 안성고교를 거쳐 전주공업고등학교로 다시 전학을 한 다음 대학에 진학할 목적으로 인문계인 전주 신흥고로 또 전학한다. 그는 더 나은 길을 찾아서 어려서부터 이주를 자주 한 점이 두드러진다.

전자인 정동영은 MBC 간판앵커라는 직업의 특성 상 방송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반면에 정세균은 종합상사 무역업 출신으로서 대중적인 명성과 상관없이 정치를 시작했다. 둘 다 1996년도에 김대중 대통령의 인재영입 케이스로 국민회의에 들어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정동영은 당선 되는 순간부터 화려한 출발을 한다. 그를 향해서는 카메라세례가 늘 뒤따랐다. 국민회의 대변인으로 지목됐을 때도 역시 그랬다. 헌데 당시의 야당의원들은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고 할 정도로 김대중 선생을 지지하는 열성 지지자들에 힘입은 당선이 많았다. 의미 있는 의석수를 획득하지 못하면 김대중 선생이 망할까봐 호남 유권자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박한 심정으로 투표장으로 달려갔기에 말이다.

정동영이든 그 자신 상대후보를 40% 이상 차이 나게 누르면서 당선됐다고 자부하는 정세균이든 독재정권에 맞서는 민주시민과 김대중을 지키고자 하는 열성당원들의 수혜자가 아니라고는 말 못할 것이다. 필자만의 독특한 생각인진 모르나 호남 정치인들은 대통령 당선이라는 장벽은까지는 높았을지 모르나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이 되어 전국적인 지명도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는 적지 않게 누렸다고 본다.

그러나 정치의 얼굴에는 현재, 과거, 미래의 얼굴이 있으며, 그 속에도 천의 만의 얼굴로 변종 변형을 이룰 수 있는 세계고, 그 결과에 따른 공과(功過)에 대해 다각도로 엄중한 평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북 출신 정동영과 정세균에 대해서도 엄중하면서도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 그들에 대한 공과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②에서 계속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05/21 21:44 2016/05/21 21:44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8434pjr/trackback/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