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후 잡설>정동영, 그 굵고도 화려했던 이름-②

-정동영의 '반전' 있기나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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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방송인에게는 대중적인 인기가 뒤따른다. 박정희 독재 18년에 이어 신군부독재가 또다시 13년간이나 계속되던 시절, 방송뉴스의 메인 앵커의 중요성은 여타의 방송인들하고는 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방송이 국민 편에 서서 정부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소리를 내면 한여름에 소나기라도 맞은 양 시원해 하며 뜨거운 호응을 보내고, 개념있는 앵커에게는 아낌 없는 박수를 보내주는 것은 인지상정이었을지 모른다.

국내외를 아우르는 사건사고 속에서 정동영이 전해주는 뉴스는 때마침 전파의 신속성만큼이나 스피디하고 역동적인 인물상(相)을 부각시켰다. 삼풍백화점 붕괴현장은 그중 하이라이트였다. 부의 상징이었던 삼풍백화점, 보통건물과는 확연히 다른 그 분홍색의 삼풍백화점이 속절없이 무너지던 날 사람들은 경악했고, 백척간두의 위험에 처한 것처럼 충격과 놀라움에 휩싸였다. 그 때 붕괴 현장으로 달려간 MBC앵커는 정동영이었고, 그의 현장중계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붕괴현장에 갇힌 사람들을 조속히 구제하도록 견인차 노릇을 하려는 듯이 당국을 향해서는 간청과 독려를, 건물더미에 묻혀있는 피해자들에게는 “반드시 구제될 테니 힘내라!”며 중계에 몰두했다. 그의 모습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휴머니티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TV방송국이라야 3개밖에 되지 않은 시절, 신군부세력은 자신들의 지배논리를 주입할 수 있는 매체들을 길들이려고 혈안이었다. 땡전뉴스라 부르는 9시뉴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국민들은 약자를 대변하려고 노력하는 방송과 방송인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보냈다. 이런 기저에서 정동영은 앵커로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는 점이다. 중앙일보 등 복수의 매체에 의하면 “깔끔한 용모와 신뢰감 있는 앵커멘트로 시청자들의 호감을 샀다.”며 방송 생중계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고 논리적이고 상황판단이 빠르다.”는 것이 정동영에 대한 세간의 평이라 했다. 또한 “성취욕이 유난히 강해 별명이「악바리」로서 대학시절 유신반대운동으로 옥고도 치렀다”는 점을 짚어 전했다.

또 다른 신문의 기사에서는 "방송사 명앵커 출신으로 깔끔하고 도회적인 이미지만큼이나 매끄러운 언변의 소유자. 지난해 대선 전까지 2년 동안 제1야당의 ‘입’으로서 ‘중산층 공략’을 통한 국민회의의 이미지 변신을 주도해 대선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고도 보도했다.

정동영을 두고 “악바리 근성이 있다.”고도 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정동영이 축구와 등산을 좋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몸을 많이 쓰는 취미를 갖고 있는데다 운동신경이 꽤나 좋은 때문에 알려진 에피소드 때문인 것 같다. 정동영은 기자 초년병 시절에 한.일 기자축구대회에서 결승골을 넣은 당사자라는데 커다란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또한 마포에 있는 경서중학교에서 언론인 단합대회가 열린 자리에서 볼을 모는데 정신이 팔려 상대방이 달려드는지도 모르고 해딩을 하다가 현장에서 사고가 터진다. 순간적인 뇌진탕이었다. 정신을 잃은 정동영은 병원에 실려 가서 6시간 만에 깨어났다.

그러나 병원에서 일주일의 시간이 경과했을 때 5.18소식을 듣게 된다. 정동영은 아픈 몸을 돌보지 않고 곧장 회사로 달려가 광주 취재를 자원한다. 위험하다고 말리는 사측을 설득하여 카메라 기자 한 사람과 동료 기자를 배정받아 셋이서 광주로 향했다.

 

알려지지 않은 진실

보도되지 못한 정동영의 5.18 리포트

성치 않은 몸을 끌고 광주에 간 이유에 대해서 “광주가 어려움에 처하고 사상자가 막 생겨나고 하니까 ‘가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가게 됐어요. 그런데 광주에 쉽게 접근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막혀있었으니까. 고속도로가 차단되고 차량통행이 안되고 막 그래요. 정읍을 지나서 장성까지 갔을 때 비아고개라는 곳에서부터 군인들이 바리게이트를 치고 검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못 들어간다.’고 통제를 하는 바람에 그냥은 갈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그의 인터뷰 내용이다.

MBC 광주특별취재팀은 차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가기로 결정을 한다. 길도 없는 논두렁 밭두렁과 들판을 가로질러 밤을 새워서 광주로 들어갔다. 20일 서울을 출발해서 21일 날에야 도착하게 된다. 그때는 군인들이 철수한 뒤였다. 이른 바 ‘시민공화국’ 시절, 그야말로 1주일의 시민공화국 기간에 정동영 팀은 광주 취재를 하게 됐다고 한다. 그가 목격한 광주는, 대한민국 전체가 계엄 하에 살벌한 분위기였는데 ‘자유와 민주주의가 흐르는 홀로 평화로운 섬’ 같은 상태였다.

5.18이 발생한 당일 날의 취재는 아니었지만, 일단 군인들이 저질러 놓은 만행과 참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착 한 5월 21일 당시에도 공수부대원들은 외곽에 있었고, 이들이 광주에서 저질러 놓은 흔적들을 확인하며 취재로 들어갓다. “광주 도청 앞에 상무대라고 하는 건물이 있었는데 관을 태극기로 덮어서 사망자의 시신을 안치해놓은 안치소가 있었어요. 수많은 시체가 안치돼 있어서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울부짖는 소리며 통곡하는 그 장면이 너무 가슴 아팠고 참혹하고 그랬어요.”

기자의 눈에 광주는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상태였다. 평온한 가운데 질서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신군부 측에서는 26일 또다시 갑자기 탱크를 몰아 광주시로 진입해 온다. 자정 무렵을 넘어 그게 5월 27일로 넘어가는 새벽으로 연결된 일이었다. “아~ 그 새벽에 계엄군이 새벽에 광주에 진입하고 있었어요. 도청 앞에 가 보려고 했는데 숙소에서 들으니 뭐 이게 다 캄캄한 밤중에서 새벽쯤까지 벌어진 일이었을 겁니다. 콩 볶는 소리가 났어요. 총소리죠. 아마 수천, 수만 발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정동영이 당시의 광주를 보며 보낸 1,2차 송고 내용 전문

“광주에서 정동영입니다.”

“네 저희들은 잘 있습니다. 아니 뭐 교대도 좋습니다만 여기 있으니까 마음은 편합니다. 총탄이, 늘 머리 위로 계속 총성이 나고 해서 그렇지요 마음은 편합니다. 어제하고 오늘하고 완전히 세상이 다릅니다. 어제까지는 일단은 학생들이 장악을 한 생태에서 시민들은 전혀 불안감이나 이런 건 없었어요. 광주 시내의 표정이라든가 이런 건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만발하는 도시였고 황금동 같은 데나 금남로 큰 네거리에서 ‘계엄령 해제 전두환 나가라’는 플래카드가 또 나부끼고 말이죠.

사람들 말하는 데는 전혀 거리낌이 없고 그런 데서는 완전히 자유 천하였는데요.

오늘 되면서 일단 상황은 완전히 180도 바뀌었죠.

어제 밤에 3시경부터 7시까지 지금도 현지에선 간간히 들립니다. 총성이 수천 번이죠. LMG 클레모어 50 수류탄 투척하는 소리 자동화기 소리해가지고 완전히 전쟁터 공포분위기였기 때문에 시민들이 아침에 나와서 생사 확인하고 말이죠.”

 

시장물가 현황

“다음은 시장물가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오전 광주시 한복판 대인시장에를 나가봤습니다. 무 한 개에 150원에 200원, 5.18 이전보다 50원 정도가 올랐고, 배추한단에 300원 100원 정도 올랐습니다. 양파 2개에 100원, 배정도 올랐고 오이 1개에 80원에서 100원, 어제 KBS에서 시내에서 오이 3개를 천원이라고 했다면서 터무니없는 보도를 비난하는 상인이 많았습니다.”

이 내용은 계엄군이 다시 광주에 들어와 통신이 복귀된 27일의 모습을 현장 스케치 형식으로 본사에 송고한 내용이다. 하지만 끝내 보도되지 못한 기사내용이다. 군사독재 정권의 언론왜곡과는 달리 <광주의 진실>이 담겨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광주의 현장에서 그때 보도되지 못했던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 이나마 정동영이 악바리 근성을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기록에 남지 않을 일이다.  

정치인의 길로 나선 정동영

15,16대 총선, 연이은 전국 최다득표

4.29 재보선도 재보궐 62년 사상 최다 득표

정동영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를 하여 전국 최다득표를 얻는다. 89.9%, 이어 16대 총선에서도 88.24%로 다시 한 번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한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국민들은 신군부를 향해 날선 멘트를 날리는 40대 초반의 앵커에게 전국 최다득표의 영광을 안겨줬다. 첨언하자면 2009년도 4.29 재보선에서 얻은 5만7423표(득표율 72.27%) 또한 재보궐 선거 62년 사상 가장 많은 득표라고 한다. “15.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이어 3관왕의 금자탑”이라는 <데일리 중앙>의 제목의 기사 제목과 내용이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YS와 DJ는 인재영입에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 정동영은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피 수혈에 걸 맞는 사람이었던가 보다.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다 들어주겠다. 전국구든 지역구든 원하는 자리를 주겠다.”며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당시 정동영 MBC 앵커를 영입하며 이렇게 제안했다고 한다.

고심 끝에 정동영 은 정계에 입문했고, 천정배,· 신기남 , 김한길, 정세균 등도 함께 영입되어 모두 여의도에 입성에 성공한다. 잘 아시다시피 정동영의 지역구는 전주(덕진)이고, 정세균의 지역구는 무.진.장(무주,진안,장수)다. 그런데 지금까지 정동영이 국회의원을 지낸 기간은 11년인데 비해 정세균은 20년이다. 똑같이 15대 국회 때 영입된 인물인 정동영과 정세균이 국회에 머문 기간이 각각 11년 대 20년이라니(...)

이 점에서 정동영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이 익히는 대목이다. 정동영의 드라마는 누가봐도 부러워할 만한 영광의 순간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생 드라마에 있어서는 갈등구조가 없으면 재미가 없는 것인가 보다. 그에게 슬픔과 불운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덩달아 부침(浮沈)이 계속됐다. 이 지점에서 자발적인 그의 발걸음은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는 오랫동안 낮은 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길을 찾아 헤매는 영웅들의 영웅여정에서 보듯이 길을 찾아 헤매며 고생은 해도  끝내는 목적지에 다다를지 어떨지 아직은 모른다. 이제 그가 첫 선거구였던 전주(병) 덕진에서 다시 당선됐다. 4선이다. 정동영의 터닝포인트가 궁금하다.  그의 인생에 어떠한 반전이 찾아올 것인가. ③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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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6 20:15 2016/05/2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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