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어떤 사랑’

‘어떤 사랑’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소재로 한 연극

-소극장 공연,, 갈등구조를 통해서 들여다보는 인간문제

세상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현실이라 해서 알기 쉬운 것도 아니요, 가상현실이라 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같은 현실을 두고도, 권력자와 언론종사자들이 계획적으로 담합을 하여 왜곡된 정보를 발신하면 대중은 꼼짝없이 속게 된다. 그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왜곡된 상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혜안 있는 작가에 의해서 어떤 문제를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전달받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진실에 접근하도록 도와주는 지름길이 된다.

1986년에 일어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참혹한 '체르노빌원전사고'만 하더라도 한편의 연극 '어떤 사랑'은 그 어떤 뉴스속보 보다도 더 큰 울림과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피폭자 가족과 담당 의사와 주변인들이 겪는 갈등구조와 인간문제를 통해서 우리는 원전사고에 대한 진실에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원전문제 심각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원자력 발전소를 설치하려는 당국에서는 원전이 아무런 위험이 없는 유용한 에너지임을 강조한다. 이뿐만 아니라 지역발전을 위한 예산과 제도적인 뒷받침으로 인한 혜택만 차고 넘치게 해주겠다는 장밋빛 약속에 열을 올린다. 우리나라는 1978년 고리 1호기의 상업운전이 시작된 이래로, 총 23기를 가동하여 세계 5위의 원전국가가 됐다. 그런데 원자력은, 단순히 전기를 가져다주는 고마운 자원으로만 인식하기에는 마(魔)의 얼굴을 가진, 너무나 끔찍한 재앙(災殃) 에너지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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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이 재앙에너지라는 것은,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일본 후꾸시마 원전사고를 통해서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축소 왜곡하거나 많은 것을 비밀에 부친 채 원전에너지로 산업기반시설을 가동시키려고만 하는 원전마피아가 득세하는 나라는, 수천만명의 인파가 모여있는 장소를 향해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를 질주시키고 있는 것처럼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는 거다. 이들은 당장의 편리함에만 매몰되어 탈 원전에 대한 고민이나 에너지 해결책을 강구하려 하지 않는다.

최근의 예를 보면, 민주주의가 발달하여 국민의 권리가 신장된 나라일수록 개선의 여지를 보이며 탈 원전을 향해서 가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처럼 권위주주의 체재가 강한 나라에서는 원전반대의 목소리가 씨알도 먹히지 않고 있다. 원전문제야 말로 각종 이권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그들만의 성역이라서 그렇다. 우리나라가 원전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심각하고도 무지한 국가라는 것은, '원전마피아'들의 전횡으로 인한 부정부패와 잦은 사고와 함께 그런 문제점들을 계속해서 축소, 은폐하고 있는 점이다.

그럼 체르노빌원전사고를 소재로 한 ‘어떤 사랑’이라는 연극을 통해서 원전문제를 들여다 보자. '어떤 사랑'은 이번이 세 번째 앙코르 무대인데 극단 ‘경험과 상상’ 팀이 대학로 <혜화>예술극장에서 류성 씨 연출로 이정아, 김효진, 이승구, 조옥현, 정윤희, 박종욱, 김민중, 유정숙, 김지영, 조석준, 홍정연 등 13인의 출연진이 5일 간 공연한다.

이 극의 시공간적인 배경은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난 2년 후인 1988년 모스크바 인근의 병원이다. 크게 세 군상(群像)이 등장한다. 1집단은 피폭자와 그 가족, 제2집단은 병원으로 대표되는 당국, 3집단은 피폭자를 경원시 하는 제 3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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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첫 부분에서 병원장은 환자문제로 고민하는 의사 안젤리나에게 피폭으로 인한 병증을 축소왜곡하고 사무적인 관점에서 일을 처리하도록 부추긴다. 피폭자들의 피해현상이 힘없는 현장 종사원들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길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고로 병원장이나 의사가 불가항력적인 대재앙 앞에서, "병원을 떠나지 않고, 환자들 곁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할 지경이다.

두 번째, 체르노빌 피폭자 가족의 비극이다. 루드밀라는 방사능 피해자이자 원전사고를 수습하다가 중상을 입게 된 소방관의 아내다. 남편은 부상정도가 너무나 심해서 타인이 접근하면 방사능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괴물같은 존재이지만, 남편의 '손을 잡아주고, 키쓰해주고, 위로해줄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여 마지막까지 남편의 곁을 지키며 인간 최고의 휴머니티를 발휘한다. 이런 루드밀라의 과거를 알지도 못한 채, 또 알고난 후에도 루드밀라에게 관심을 갖는 세르게이에게 주변 사람들이 나서서 체르노빌 출신의 피폭자인 그녀를 멀리하라고 충고를 한다. 하지만 아프카니스탄 주둔장교였던 세르게이는 다리 부상을 입고 상이군인으로 지내는 자기 처지를 통해서 '사람을 조건과 이해타산으로만 선택하지 않는다.'

모스크바의 유명한 불꽃놀이 축제 날, 둘은 첫 데이트를 하고 루드밀라의 제안으로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그런데 루드밀라에게서는 특이한 점이 있다. 관계 외에는 키스나 애무 등 일절의 다른 애정표현을 허락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런 루드밀라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만남을 이어가는 가운데 세르게이는 어느 날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이때부터 루드밀라는 소식을 끊고 그의 곁을 떠나 종적을 감춰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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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는 루드밀라의 소식을 찾아 헤매는 가운데 피폭자들의 병원을 찾는다. 의사가 환자의 비밀에 대해서 선뜻 말해줄리 없지만, 세르게이는 담당의에게 “루드밀라는 임신한 상태이고, 그 아이의 아빠가 자신인 이상, 아이를 위해서라도 루드밀라에 대한 최소한의 것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고 반문한다.

세르게이는 담당의 안젤리나의 도움으로 루드밀라의 과거에 대해서 알게 된다. 루드밀라는 방사능을 보유한 사람이고, 이 때문에 장기(臟器)가 굳은 아이를 낳았었다는 사실과 남편과 늘 함께라는 상상을 하면서 아직도 루드밀라 자신이 임신할 수 있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루드밀라에게서는, 생명을 존중하고,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싶은, 보편타당한 모정을 갈구하는 희망이 살아 있었다. 아니 그 꿈을 멈추지 않고 추구하고 있었다.

한편, 또 다른 피폭자 가족인 빅토르와 그의 아내 이야기다. 국가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빅토르지만 그의 가족을 경원시 하는 이웃에게 빅토르의 아내는 “이러면 안 되잖느냐?”면서 호소한다.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화사한 봄철에는 남편에게 꽃을 보여주고 싶어서 꽃다발을 한 아름 사들었으나, 그를 피하는 이웃을 만나면서 상처만 입는다. 하는 수 없이 병원으로 가보지만 피폭으로 인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남편은 거의 실성한 상태에서 절규의 단말마를 토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 빅토르는 군복을 갖춰 입고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사람들은 수근 거린다. 빅토르의 아내는 남편의 장래 식에도 오지 않고 연금을 수령해서 두 아이들과 떠났다고.

장면은 바뀌어, 모스크바 불꽃놀이 광장이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루드밀라가 세르게이와 만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났어요. 안아 보세요.”하고 루드밀라는 유모차에서 아이를 안아 올려 세르게이한테 건네준다. 두 사람으로 인해 탄생한 생명이다. 아이는 잠시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아이는 짧은 조우를 한다. 루드밀라는 세르게이로부터 아이를 건네받아 다시 유모차에 앉히며 분연히 작별을 고한다.

루드밀라는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길 원했다. 생명을 잉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를 양육하며 아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이길 원했다. 이러한 권리가 타자로부터 가해지는 폭력과 재앙에 의해서 짓밟히길 원치 않으며 그 어떤 권리에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러시아가 배경이다 보니 오래 전에 봤던 영화 ‘닥터 지바고’의 이별 장면이 겹친다. 지바고가 가족과의 생이별을 하는 장면, 전차 안에서 차창 너머로 라라를 발견하고서 급히 내려 라라를 부르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장면을 보았을 때처럼 가슴 짠하고도 슬픈 감정이 일어난다.

모스크바 광장에서의 세르게이와 루드밀라의 이별 장면에서도 비슷한 안타까움을 느끼며 또 하나의 이별과 슬픔의 데자뷔를 본다. “아이의 아빠로서 책임을 져야한다.”면서 루드밀라를 찾아 헤매던 세르게이의 비장한 절규가 눈에 선하다. 이와 맞물려서 아이가 기형아든, 병력을 갖고 태어나든 상관 없이 혼자 감당하고 싶어 하는 루드밀라의 의지를 보면서 비장미마저 느낀다. 이런 루드밀라가 안타깝고 야속하지만 세르게이는 짧은 조우를 끝내고 떠나는 모자에게 축복을 빌어줄 수밖에 없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그 어떤 꽃이 있으랴!”고 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세상은 희비극을 번갈아가며 떠안고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선과 악, 음과 양, 하늘과 땅처럼 이쪽의 끝에는 반드시 저쪽이 있다. 맞서고 대립하지 않는 것들이 도대체 없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어느 한 쪽이 없으면 혼자서 성립할 수 없다. 인간이 살면서 보고 느끼고 껴안고 수용해야 할 모순과 숙명은 그 얼마인가.

아무리 다가가 껴안고 보듬고 치유하며 화해해야만 해결의 실마리가 플리고 긍정적인 세상이 열린다지만,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하는 재앙만은 경계하고 막았으면 한다. 인간의 폭력성과 욕심으로 저지르는 인재와 재앙만은 기필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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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3 21:02 2015/07/13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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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민중 주저 말고 일어서야!

호남민중 주저 말고 일어서야!

-호남을 생각하며 피끓는 심정으로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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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짓는 소리가 난다고 할 일 못하겠습니까? 너 해라 나는 나의 일을 하련다. 너 얼마든지 짖어라 나는 내 할 일 한다. 친노들 콘셉트는 이거 아닙니까?

전두환 일당은 권력을 쥐기 위해 총칼을 휘두르고 살상도 서슴지 않았는데, 뒤집어 생각해봅시다. 아닌 말로 문죄인이 총칼을 휘둘렀습니까?

경선 룰을 하루 전에 바꾸고, 모바일 꼼수를 부리긴 했지만 만인을 엑스트라로 동원하여 들러리 서게 하고 각종 매스컴이 중계하는 가운데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월계관을 썼는데 뉘라서 그 자리를 내주고 뉘라서 그 달콤한 권력의 자리를 내려온단 말입니까?

현실을 직시합시다. 당했으면 이후를 생각해서 힘을 기르고 대비를 해야 합니다. 소를 잃었으면 이후로는 다시 잃지 않도록 외양간을 고치고 방책을 세워야지요.

되지도 않을 거 보채지 말고, 먹히지도 않는 개소리 하지 말아야죠. 지성인이라면, 배운 사람들이라면, 바보 멍청이가 아니라면, 그런 헛소리와 마이동풍 짓 말고, 자기 힘을 길러 실력과 힘으로 상대를 누르고, 꼼수를 못 부리도록 영리하게 차단했어야죠.

 

몇 년 전에 관타나모에 갇힌 죄수들의 참혹한 고문과 인권 침해에 관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했습니까? 행위의 쾌락의 농도는 더 세고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합니다. 가해자에게 있어 피해자의 고통과 울부짖음을 보는 것은 일종의 오락이었고 게임이었고 특수한 공간에 근무하면서 무료함을 달래는 심심풀이에 불과했습니다. 웃고 떠들고 사진 찍고 야단 법석이었지요.

이른바 예일대의 밀그램 실험과 스탠퍼드 대학의 감옥 실험에 대해서입니다. 전자는 선생과 학생 그룹으로 나누어 학생이 틀린 대답을 할 때마다 벌칙으로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이었는데 65% 이상이 최고전압을 사용하더랍니다. 0.1%의 사람만이, 최고 강도의 전기충격 벌칙을(450볼트) 사용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지요.

스탠퍼드 대학의 감옥실험은 어찌 된 줄 아십니까? 죄수와 간수 두 그룹으로 나눠 실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70명 중에 24명을 엄선하고, 죄수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1일 15달러의 일당까지 지불하고 실험에 들어갔습니다.

바로 둘째 날에 못 견디겠다며 폭동이 일어났답니다. 교도소 준칙을 준수하도록 그토록 일렀건만 교도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권위적인 행동과 가혹행위를 하는가 하면 폭력적이 됐으며, 교도관의 1/3은 진짜로 잔학한 경향을 보였고,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답니다. 이 실험은 2주간 즉 14일 예정이었으나 6일 만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실험들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뒤집어 생각해보기를 통해서 교훈을 찾고, 행동목표를 잡아야겠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노예 보다 못한 수준이라 할 수 있고, 실질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고 나서 하던 얘기를 계속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전두환 일당은 권력을 쟁취하기위한 목적을 당성하기 위해 무력과 살상무기를 사용하기로 목표를 정하고 광주시민들을 학살하더니 그 여세를 몰아 계엄령을 선포하더니 체육관선거를 통하여 목적을 이뤘습니다.

이를 성공한 쿠데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성공했으니 살상(殺傷)의 책임은 묻지 마라(?) 지들은 지들이 한 일이니까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지들 머리에서 나온 지들 방법으로 했으니 잘못을 아예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 부분에 관한한 양심과 도덕과 규범이 마모되고 작동하지 않으니까 당연할 밖에요.

둘째, 날만 새면 민주화의 화신처럼 굴던 김영삼은 하루아침에 노태우 민자당으로 투합해 들어가서 3당 합당을 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무조건 구국의 결단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대통령도 자기가 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뿌린 자가 거둬야 하니까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군 뿌린 게 없고 누군 뿌리지 않았단 말인가?

 

떳떳이 도전했어도 대통령에 당선됐을 법하지만 김영삼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적에게 투항하고, 하루아침에 적과 동침하는 선택을 합니다. 이후 자기 합리화를 하려다보니 수십 년 동안 적이라 생각하고 맞서 싸웠던 집단을 찬양하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부지런 했으며 오로지 성실과 피나는 노력으로 자기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국민을 대할 때는 늘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불렀던 겸손하고 진실한 한 사람을 깎아내리기 시작합니다.

셋째, 노무현은 김대중 밑에서 김대중의 공명정대한 법집행과 김대중의 절대적인 지지자들에 의해서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대북송금특검을 했고, 민주당을 탈당하여 지들만의 열린우리당을 창당해서 나가기에 이릅니다. 모든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했으며, 아파트분양원가공개의 약속을 파기하여 부동산값을 폭등시켰고, 재벌의 마수가 국민들의 뇌 속에까지 파고들어 황금만능주의 가치관을 심는데 지대한 공로를 끼쳤습니다. 황금은 그 어떤 도덕률도 작동하지 못하도록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마약이 됐으며 오늘 날의 우리 국민들은 황금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채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나라에서 법이, 도덕이, 상식이, 경우가 제대로 작동하나요? 하루 자살자 수가 43명으로 세계 1위입니다. 노인자살률, 40대 자살률도 1위입니다. 안 좋은 것에서 세계 1위를 하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작은 나라에서 1위하는 것도 많습니다. 벼락치기 경제개발에 의해 등 따시고 배부르니까 아무 말 마라. 이게 절대 선이다. 하지만 몇 년 전엔 성인 행복지수가 세계 47위더니 엊그제 조사에서는 이라크 보다 못한 117위랍니다. 그깟 알량한 경제개발이 뭐랍니까?

박정희와 박근혜 이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이명박은 다 영남사람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문죄인과 친노 일파들이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우려먹으며, 무엇을 자행하는지, 무엇을 전수받았는지 똑똑히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박정희와 박근혜는 재론할 필요가 없고, 전두환은 권력 장악을 위해서 살상을, 이러한 민자당에 김영삼은 합당이라는 이름으로 투항을, 살인집단에게 면죄부를 주려했지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해괴한 논리로 이 일을 유야무야 시키려 했지요. 그러나 국민의 저항을 받아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은 광주학살 책임자로 법정에 서고 사형언도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노무현은 이런 자들에게 연정하자고 애걸복걸 구걸 동냥 짓을 하며 달아들었습니다. 이 자들한테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날의 문재인이 탄생한 배경을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취할 것은 게걸스럽게 취한다. 취할 대상은 호남이다. 호남을 숙주로 삼고 빨대 꽂아 빨아먹을 수 있는 데까지 다 빨아먹자. 통통하게 살 찔 때가지 뒤돌아보지 말고 빨아먹자. TV 앞에서는 왕방울 만 한 눈을 크게 치뜨고 유능한 야당대표인척 연기만 잘 하면 거대 정당의 한 축으로서 차선권력은 내 것이고, 친노는 영원하다.

박정희의 천상천하유아독존, 전두환의 포악성, 김영삼의 무대뽀정신, 노무현의 좌충우돌 식 돌쇠정신, 문재인의 등치고 간 내먹는 야비함, 그들은 권력의 선배들로부터 배양된, 세상 천지에 존재하는 갖가지 방책과 비술을 전수받은 ‘우리가 남이가?’ 족속입니다. 그들은 집요함과 뻔뻔함과 쥐면 놓지 않는 짱게 정신, 좋아 보이면 물불 가리지 않고 빼앗아 취해버리는 저 만주벌판의 비적 질 정신까지 갖췄습니다.

결론은 경상도 노빠들은 자기 잘못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잘못을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남의 고충은 알려고도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고 지들 목적 이뤘으니 우리들의 방법은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뛰어난 방법 아니냐는 거죠.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파고, 갈급한 사람이 나서기 마련입니다. 경상도 족속들이 ‘호남, 너희들 그동안 많이 부족했지? 예산도 못 타내고, 높은 자리에 많이 앉지도 못하고 말이야. 그러니 이번에는 예산 많이 가져가도, 좋은 자리 많이 내줄게” 하고 양보해주고 배려해 주지 않습니다.

호남 사람의 인권과 권리신장을 위해서 누가 나서야 하나요? 다른 사람이 이런 일 해주나요? 대답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여유라고는 이제 없습니다. 멋 부릴 시간도 더 이상은 없습니다. 내가 목마르다는 사실은 나밖에 모릅니다. 그러니까 내 물은 내가 찾아 먹어야 합니다. 호남의 인권과 권리신장을 위해서 갈급한 사람은 호남사람들이니 우선은 호남사람들끼리 뭉쳐서 작은 것부터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꿈을 크게 갖는 것 하고 이일은 다릅니다. 1,2도 실천 못하는 사람이 날마다 천과 만을 운운하고 왼쪽 다리가 가려운데 엉뚱한 곳이나 긁고 앉아서 시간만 보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호남의 인권과 평등과 권리신장을 위해서 노력하는 그 어떤 단체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징기스칸이 둘,셋, 혹은 열이었습니까? 한 사람의 똑바른 징기스칸이 자기 뜻에 동조해주는 사람을 모아 세력이 커지고 끝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똑똑하고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 하나가 창업을 하여 회사를 키우고 난 후에야 기업공개를 하지 않겠습니까? 정치인이든 민중이든 나서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뭉칩시다.

호남이 애태우고 호남이 징징대고, 호남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즐길지언정 다른 이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 다고 믿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의 먹이이고 놀림감이고, 착취 대상일 뿐입니다.

앞에서도 죄수와 간수의 실험에서도 보았듯이, 학생과 교사의 실험에서도 보았듯이 입장이 다르면 여간해서 약자를 도와줄 인간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호남을 다른 지역 사람들이 도와줄 거란 순진한 생각은 당분간 하지 마시고 우리끼리 열심히 하는 것이 정신건강과 자립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실험인 것을 알고도 인간의 이중성과 선악의 양면 중에서 악성이 발휘되는데, 돈과 권력과 자리와 명예가 걸린 일에서 타도 사람들이 우릴 돕고 우릴 배려하겠습니까?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동정도 못 받고, 도움도 인정도 못 받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고, 단체의 발전을 위해서도 의타심을 배재하고 독립정신을 갖는 길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호남향우회가 결성되어 단결과 단합이 잘 되던 때는 다들 호남향우회를 부러워했습니다. 타도(他道) 사람들도 호남향우회를 복제해서 비슷한 조직을 만들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제 잘 뭉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방법도 몰라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이 모래알에 시멘트든 회반죽이든 어떤 접착제든 섞어서 서로 모이고 엉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다시 힘을 모으고 지혜롭고 현명하고 영리하게 결집된 힘이 나오도록 해야겠습니다. 호남인들, 심기일전 하십시오. 지금 우리가 못 살면 얼마나 못삽니까? 아무리 낮춰 잡아도 1970년대 기준으로 하면 중산층은 되지 않습니까?

중산층들이 모이면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그때에 비하면 우린 중산층입니다. 자부심을 갖고 자존심을 갖고 기죽지 말고 호남 발 신당을 추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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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5 12:38 2015/07/05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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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심리학을 읽고 한마디

유쾌한 심리학을 읽고 한마디

-문화, 오랜 실험 끝에 탄생한 진정한 인간의 모습

 

휴식이라고 다 똑같은 휴식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수면활동은 배고픔, 목마름, 고통회피 등과 같이 기본적인 욕구에 속한다

인간은 수면활동을 통하여 행위를 활력있게 촉진시키고 강하게 만든다. 수면활동이 다른 행동과 다른 점은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점이다

다만 잠이 부족하면 운동속도가 떨어지고, 판단에 장애가 생기고 주의 집중이 곤란해진다.

잠자는 것이 깬 채로 휴식하는 것이나 피로를 회복시켜주는 점에서 똑같다고 주장할지는 모르지만 수면 휴식에는 특유의 기능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오래 전 미국 뉴욕의 유명한 DJ 피터 트립은  200시간 수면하지 않고 자신의 정규방송을 감행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를 두고 심리학자와 의사들이 트립의 비 수면에 대해서 연구를 하려고 발빠르게 달려와 근처의 호텔에 심리실험실을 설치하고 주시하며 지켜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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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자 2째날 트립은 비수면 상태에서 심한 피로를 느끼고, 3일때 되던 날 착시현상(자신의 신발에서 거미집을 보았고, 테이블 위의 얼룩이 살아있는 곤충이라고 주장함)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100시간 즉 4일째 되던 날부터는 주의집중과 정신력이 요구되는  심리검사를 받지 못하고 심지어 알파벳도 말하지 못했다

5일째 되었을 때는 잠 들지 않도록 각성제를 요구하며  성격파탄증세와 더욱 기묘한 환각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코트를 털복숭이 벌레로 생각하고 과학자의 넥타이가 춤을 추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6일째(150시간)엔 방향감각을 잃고 사람 구분을 못했으며 어디 있는지도, 자신이, 인간의 한계를 검사하기 위한 거대한 음모의 희생자라는 망상까지 보였다.

마지막날 아침, 신경학자가 그를 검사할 때 그는 이 의사가 자신을 생매장 하는 사람이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트립을 잡아다가 억지로 마이크 앞에 앉혀 방송을 계속하도록 하자 잠시 놀랄 정도로 방송을 잘 하는 등 한동안 정상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트립은 그후 13시간 동안 잠을 잔 후 정신적인 인지능력과 방향감각을 찾고, 고통에서 빠져나오고 이후 3개월 동안 간간히 침울한 상태를 겪다가  정상적인 수면을 취해나가는 동안 정상으로 돌아왔다.

 

*우리나라의 대법원에서는 1997년 7월 '잠 못잔 상태에서의 진술은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일본의 경우도 밤 12시가 넘어 진행된 조사내용에 대해서는 법원에서 증거능력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최소 6시간 이상 8시간의 수면을 취할 것을 권한다.직장인의 35%는 졸음 때문에 업무능력이 떨어지고, 잠 부족으로 초래하는 생산성 저하 비용은 심각하다고 말한다.

  

옛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 미국 스리마일 섬의 원전사고, 알래스카의 기름유출사고, 우주선 챌린저호의 폭발사고 등은 잠을 잘 자지 못한 사람의 실수에서 비롯된 사고라고 본다

수면의 리듬을 깨는 교대근무도 수면의 질을 떨어뜨리고 인간을 황폐하게 만든다. 그런데 왜 인간은 잠을 밤에만 몰아서 자는 걸까? 걱정 마시라. 이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풍습이 남미와 유럽(특히 스체인) 등지에서 실시하는 '시에스타'라고 부르는 낮잠 문화이다. 나른하게 늘어지는 긴 오후, 잠시 오수를 즐기는 것은 나쁘지 않다.

 

낮잠을 즐기는 명사들의 이름을 위 사진에 실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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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4 14:32 2015/07/04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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