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고 있었던 일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

-빛나지 않은 순간들과 함께 감사하기

 

호박고구마 한입을 입에 넣었다. 따끈하고 달콤하고 자연스러운 맛이다. 위로 받았다는 느낌이다. 짧지만 강한 인상, 뭔가에 허전했었는데 채워진 기분이다. 잠시 무장해제 된 기분이다. 자연의 맛은 이런 것인가. 달콤 따뜻, 위로와 충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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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 인(人) 중에는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푸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나는 따뜻한 고구마 한입을 지금 원했는가 말이다. 내게 내재돼 있는 그 많은 생각들은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고구마 한입에 순식간에 녹아버린다. 잠시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이 번져온다.

일요일인 줄도 모르고 나갔다온지 벌써 나흘 전이다. 날짜 가는 줄도 모르고 산 사람처럼 뒤늦게 고마운 마음이 문득 인다. “언제 가능한지 점심이나 먹게 나와 달라” K님, K님은 미리부터 작정을 하고 전화를 하는 것이라서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지목해서 나와 달라 청한 것이어서 그냥 넋 놓고 있다가 지내다가 뒤늦게 감사를 표시한다. 고마워요 K 선생님.

근데 “박기자는 까다롭다”고 한 마디 한다.

갈비 먹을까? 회 좋아해?

“아 그냥 6.7000원 짜리 식사가 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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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같으면 명동성당으로 가서 4000원 짜리 뷔페식도 좋은데 그럴 수도 없다. K님을 마중하고서 명동 안으로 들어오는 도중에 식사를 하자시기에 잘 알지도 못하는 집에 들어갔다. 나는 ‘묵사발정식’이라는 걸 시켰는데 “어 이거 봐라” 묵사발 정식이 나온 순간 점심 잘 먹기는 애 저녁에 글렀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다.

김으로 뒤덮인 묵사발은 금방이라도 넘쳐날 것 같았다. 짐작이 확 갔다. 먹을 만하면 묵사발을 미리 좀 덜어서 k선생께 드리려고 그릇 하나 더 달라고 나서 보니, 김 밑에 묵, 묵 밑에 얼음이 쫙 깔려있었다. 얼음을 먹을 순 없다. 생각끝에 얼음을 덜어내고 나니 짐작한대로 보잘 것 없는 음식 그 자체였다.

반찬은 솔잎처럼 가느다란 부추 변종, 달기만 하고 맛이 형편없을 장아찌 한 조각, 오뎅 조림이었다. "먹을 게 하나도 없구나!” 이왕에 시킨 거 돈만 아깝게 됐다 싶어서 두어 숟가락 억지로 먹고 그냥 일어났다. 이런 나를 보고 ‘까다롭다’ 기어코 한마디 하는 K님, 뭐 괜찮다. 그래 보이니 그렇다 한 것이겠지. 빠리바게트에 가서 에그 파이와 호두파이를 각각 두 개씩 커피와 함께 먹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의뢰한 글이 걱정돼서 전화한 모양이다. g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럼 그렇지 막상 시작하니까 막히는 것투성이다. 그래서 참고 서적이 없을까 책을 손에 들게 된 것이다. 다시 깨달은 사실, 말로는 쉽다. 난 금방 할 수 있어. 하지만 일을 시작해보면 녹록치 않다는 것, 아니 태산준령이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나의 한계를 잘 알게 된다. 그럴수록 미리미리 열심히 도전하는 것만이 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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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을 어제 치과에 오며가며 읽었고, 터미널 금동상사에 들렸다. 옆방에 가서 책 몇 권을 찾아들고 왔다. 뭔 바람이 불어서 책 뭉텅이에서 ‘빙엔의 힐데가르트’와 ‘우리말의 비’밀을 찾아들고 박봉우 시집을 읽었다.

시집은 자칫하면 절판됙 쉬운 건데 나에게 건넨 사람의 성의가 고맙게 느껴져서 내친 김에 전화 통화까지 했다. 고맙다. 힐데가르트에 대해서 심기일전하고 다시 한 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갑다. 우리말의 비밀을 읽으면서는 특별한 낱말에 담긴 듯을 익혀두겠다.

 

<감사한 일>

-달고 따뜻하고 고구마

-K 선생을 만난 일

-내게 시집을 준 P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손에 책을 든 일(빙엔의 힐데가르트)

-g님과 통화 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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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7 13:50 2015/05/27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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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끊기

페이스북 끊기

-시원섭섭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일

 

페북을 접었다. 로그 아웃 방법으로. 컴에서 로그아웃을 할라치면 로그아웃을 못하게 하는 장치들이 반복해서 자꾸 뜨는 것이어서 로그아웃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전에도 경험을 하면서 "얘네들은 정말 끈질기구나"를 느낀 적이 많았다. 다시 하지 않고는 베겨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기술이 말도 못하게 발달돼 있다.

그런 기억 때문에 폰에서 나가기를 했더니 복잡하지 않고 좋았다. 결행하고 나니 시원하다. 이후부터 나를 재촉하거나 폰을 열도록 하는 유도음이 없어서 무척 조용해졌다. 하루에 수시로 보던 액정 화면이었다. 3월과 4월에는 특히나 자주 들여다보던 페북이다.

 

그런데 왜 나는 페북을 접기로 했을까?

시끄럽고 귀찮고 정서 안정에 좋지 않아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까지도 억지로 봐야하는 페단에서 자유로워졌다. 지저분하고도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것들을 보지 않아도 된다.

어떤 때 페북을 열면 보고 싶지도 않은 영상이 클릭을 하지 않아도 어지러울 정도로 마구 돌아간다. 그런 것일수록 대게가 희안한 내용이다. 스토리도 없고 앞뒤가 연결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기상천외한 것, 사람의 헛점을 찌르는 돌발영상, 대게 이런 것들이 주를 이룬다. 사람마다 취향이 각각이라서 올리는 사람 마음이겠지만 말이다.

또 실갱이 하기 싫어서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쟁점에서 그렇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액션을 취하고 있을 때는 행여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열심히 했다. 방어를 하고 옹호를 해야하니까 적극적으로 추이를 지켜보면서. 그런 경우 생각이 같은 내용이 있으면 어김없이 좋아요를 누르고 옹호하는 댓글을 빠짐없이 달았다.

반대로 싫어하는 정치인이나 반대 의견을 드러내야 하는 입장일 때는 또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공격하는 내용이나 반박 댓글을 쓴다. 그러니까 페북에서는 크게 직접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학 묻는 난에 직접 글을 쓰거나 공감이 가는 글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남이 쓴 글에 댓글을 쓰는 것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좋아요를 누르는 일에도 정말 관심이 있어서 좋아요를 누르는 경우와 인사치레로 누르는 경우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응원하기 위해. 정말 좋아요를 눌러줄만큼 가치가 있어서, 인사치레, 품앗이 개념으로 등등 수많은 이유로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쓴다, 그런데 어떤 글이든 이런 관계맺기가 되면 이들과 마치 일심동체나 되는 것처럼 싫든 좋든 서로 연결이 되기 시작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어떤 글에 나말고 또 다른 사람들이 좋아요와 댓글을 썼다면 빠짐없이 이를 알려주는 신호가 울린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지. 그때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쁜 중에도 폰을 열어 보면 시덥잖은 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젠장...그래 너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니야

비슷한 일이 하루 종일 반복된다. 그야말로 페북을 하면서 지내게 된다. 헌데 이것뿐이 아니다. 상대로부터 전화도 결려 온다. 응원을 부탁하는 전화다. 댓글을 달아달라거나 상대방을 공격해달라는 부탁을 해온다. 하는 수 없이 댓글도 달고 공격도 하고 지지하는 글도 쓴다.

그런데 이런 요청을 해온 당사자가 정작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남에게는 전혀 성의표시도 하지 않는다. 자기 글에 댓글이 안 달리거나 잠시만 이 안 보이면 금단증세를 보이면서까지 갖은 수단을 다해서 좋아요 수나 댓글 수를 늘리려고 혈안이면서 남을 배려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한사람 두 사람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고개가 가로 저어졌다. 나 아는 사람 하나. 젊은 사람이 너무 이기적이구나 싶었다. 전화를 걸어와서도 따발총 쏘듯이 자기 말밖에 할 줄 모른다. 여러 번 완곡하게 숨 좀 쉬어가면서 말하라 요청을 하기도 했다. 불편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페북에 대한 흥미가 점점 떨어졌다. 페북을 열기위해서 더 이상은 신경쓰지 말자고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트위터를 끊었듯이 페북을 중단하기로 마음 먹게 됐다.

그래 결정봤다. 페북 로그아웃. 조용히 살자! 남들이 일방적으로 배설해 놓은 쓰레기 같은 글을 보며 시간 낭비는 말자. 2015. 5. 21일 페북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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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2 22:59 2015/05/22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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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스케치.. ‘임을 위한 행진곡’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산자여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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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 들끓었다. 시국과 맞물려서 각종 이슈를 뿜어내는 광주, 5.18광주는 그렇게 전야제와 함께 보훈처가 주관하는 공식기념식을 끝으로 정점을 이룬다. 그런데 올해도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로 기념식은 둘로 쪼개져 개최되고 있었다.

5월 광주는, 5.18과 관련한 행사로서 창작가요대회를 비롯해서 휘호대회, 청년대회, 사진전, 음악회, 강연회, 주먹밥만들기, 문학제와 전야제를 비롯한 각종 퍼포먼스 등 수십여 가지 프로그램이 골고루 마련돼 있다.

이 한복판에서 수많은 개인과 단체들은 저마다 교육과 연수 혹은 단합대회를 겸한 목적성 프로그램을 접목하여 의미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가령 천주교 광주대교구에서는 국립5,18민주묘지를 100일 도보순례지의 경유코스로 포함시켜서 미션을 완성할 때마다 인증 스탬프를 찍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평화나눔’이라는 서울지역 대학생 동아리는 열사들의 묘 앞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기와 즉석 토론, 단체 메시지 낭독 등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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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헌화 봉사와 방명록과 추모리본에 글쓰기와 음료수봉사 등 해마다 내방객들의 편의를 위해 애쓰는 봉사단체들의 소임 또한 열심이었다. 이들 중에서 ‘그날’이라는 잡지와 함께 ‘천상의 열사에게 천 송이 국화꽃은’이라는 캐치프레이를 내걸고 12년 째 꽃과 생수 봉사를 하고 있는 단체가 있어 눈길을 끌고 있었다. 모임 이름은 ‘그날’이다. 이들은 5.18 당시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주변인들을 지켜보면서 나름대로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날 회원들은 1500송이의 국화꽃을 마련하여 방문객들의 손에 헌화용 꽃을 쥐어주던 봉사 첫해의 기억부터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국립5.18묘지를 오며가며 지켜본 소중한 인연들을 갈무리해뒀다가 이번에 드디어 잡지에 담은 것이 ‘그날’이다.

잠시 ‘그날’을 소개한다. 35년 전 그날 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그는 당시 진압군으로서 광주에 도착했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경험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가슴속에는 숨기고 품어뒀던 짐 덩어리가 있었다. 그 실상을 비로소 ‘그날’에 쏟아내 증언하며 양심고백과 함께 참회의 변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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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당시 시위자로 참여한 한 청년(새정치민주연합 이개호 국회의원 전남영광,함평, 담양, 장성)이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어 당시의 들끓었던 심정과 함께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을 때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 놓아 부른다는 피 끓는 심정을 담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남겨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또 있다. 당시 MBC기자로서 5.18광주 취재기자였던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의 5.18에 관한 인터뷰다. 정 전장관은 교통이 두절된 상태에서 동료기자 3명과 함께 전남 장성에서부터 걸어서 광주로 진입한 사람이다. “정동영입니다. 시장물가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 광주시 한복판 대인시장에를 나가봤습니다. 어제 KBS에서 시내에서 오이 3개를 천원이라고 했다면서 터무니없는 보도를 비난하는 상인이 많았습니다” 패기 넘치는 한 젊은 앵커의 육성을 타고 번지는 당시의 현장 상황이다.

5.18광주, 20여 그날의 회원들(회장 박춘림)이 자비를 털어서 꽃과 생수와 함께 자신들의 이야기를 수록한 ‘그날’을 나눠주고 있었다. 35년 전 금남로에 솥단지를 걸고 주먹밥을 나눠주면서 대동정신을 구현하던 그날의 광주시민들처럼 말이다. 남은 자들은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는 외침을 잊지 않고 있었다.

 

*필자 박정례/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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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9 21:25 2015/05/19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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