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기타 카페, 미사리에서 강촌 라이브 카페까지~

 

  

나는 전철 족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자나 깨나 두발로(!) 족인 것이다. 웬만한 곳은 걷고, 정이나 먼 곳이면 버스나 전철을 탈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다. 전철족이기 때문에 볼 수 있고 겪을 수 있는 그런 일에 가끔 맞닥뜨리게 되는 일이 적잖게 생긴다.

  

일요일이었다. 6호선 전철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갈 목적지는 석계역, 차를 탄 곳은 망원역이다. 망원역은 비교적 출발점에 가까운 지점이기 때문인지 일찌감치 빈자리를 찾아 앉을 수가 있었다. 방금 끝난 철학 강좌에서 받아 쓴 ‘강의노트나 읽으면서 가야겠군.’하고 노트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난 데 없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7080 라이브 카페’ 어쩌구저쩌구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통기타 반주소리에 맞춰 부르는 노래가 차안 가득히 흘러넘치고 있었다. 흔히 있는 전철 안 잡상인이었다. ‘난 해당 사항 없는 사람이니까........’하고 하던 일에나 집중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내 앞에서 멈추는 소리가 났다.

  

‘이상하다. 뭐지?’하는 순간, 분홍색으로 된 CD 하나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어? 아저씨~’

안 산다는 말을 되도록 빨리 한마디 던질 요량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 아저씨 얼굴은 싱글벙글인 데다가 입은 흥얼거리기에 너무 바쁜 모습이다. 그 모습이 하도 재밌고 웃기게 생겨서 나도 모르게 귀밑까지 찢어지게 웃고 말았다. 걸렸다. 마주보고 웃었으니 내 비위 장으로는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상품권도 받나요?”

언제부턴가 현금이나 카드결제 대신에 문화상품권도 받게 되면서부터 동생은 책을 사보라면서 자신의 가게에서 받은 상품권을 간간이 내게 주는 것이었다. 퍼뜩 그 생각이 났다.

 

“아, 그럼요! 받죠오~”

 

상품권도 받는다는 말에 CD는 꼼짝없이 사게 된 거 이왕이면 나도 한 건 하자 싶었다. 전철을 타다 보면 가끔은 정말 말을 붙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고 특이한 사람이 없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난

 

“저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하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아, 그럼요! 되죠오~”

“아저씨 상품권 여기요!”

CD를 받아들고 카메라를 찾아서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이 일 얼마나 되셨어요?”

“3년요!”

“사는데 지장은 없으시고요?”

“저축도 하면서 살아요!”

“네에~ 많이 파시나 봐요?”

“ㅎㅎㅎ.........”

“즐거우시고요?”

“그럼요~”

 

스치듯이 금세 지나가면 그만인 아저씨를 향하여 부지런히 질문을 던졌다. 이름 하여 ‘미사리 카페에서 강촌 라이브 카페까지’ 여기다 ‘통기타 70.80 카페’라고 쓰여 있는 CD 장수 다. 이 CD가 잘 팔린다는 것이다. 게다가 저축까지 하면서 산다니 듣는 입장에서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저씨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그러는지, 옷 입은 모양새로 봐서는 영락없는 b-boy 스타일이었다. 생업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인지도 모른다. 아저씨가 명랑하고 흥미롭게 보여서 나쁠 건 없다. 궁색하고 답답한 모습을 하고서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가는 장사 공치기 십상이니까 말이다.

  

전철 안은 아차 하면 혼잡하고 비좁은 상황이 돼버린다. 이 틈을 비집고 존재감을 들어내야 물건 하나라도 판매할 수가 있을 것이다. 승객들은, 차 안에서 상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니 단 몇 초 이내에 관심을 끌지 못하면 장사 공치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전동차 안에서도 이런 진풍경이 벌어지는 걸까?

 

 

케이스에는 CD가 6장이 들어 있었다. CD 하나에 18곡이 실려 있으니까, 모두 108곡 쯤 된다. 미사리에 가면 카페가 많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강촌도 이에 뒤지지 않는 그 어디인 곳인가 보다. 오늘 집에 가면 나도 한번 미사리에서 강촌 라이브 카페까지 음악으로나마 섭렵해 볼까 싶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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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0 10:31 2010/05/2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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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이는 잊어버리세요!

어머니, 나이는 잊어버리세요!

  

 카네이션 꽃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다가오는 어버이날을 맞는 거리의 모습이다. 특히 전철역이나 동네 초입에는 꽃을 파는 가판대가 분주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들이 형성해 놓은 5월의 기호들이 지금 철을 잊지 않고 목청껏 깜빡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잊고 지내던 기억이 솟아나고 가라앉았던 생각이 다시 일어난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인정의 끈은 이처럼 서로 화답하며 이어지는 것인가 보다.

 

덩달아서 해마다 이만 때쯤이면 나에게도 크고 작은 감회가 뒤따르고 나부낀다. 공교롭게도 바로 얼마 전에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을 찾아뵈었던 차다. 귀향의 잔상은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나를 뒤따르고 있었다. 이와 함께 1호선 대방역사 안에서 맞닥뜨린 꽃집은 특히나 강한 인상으로 다가 왔다.

  

그날은 김광수 경제연구소에서 주최하는 10주년 기념세미나가 있는 날이었다. 장소는 전문건설인회관이었다. 제 시간에 도착해야하는 것에 여부가 있겠는가. 공동대표로서 맡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지 않게 도착해야한다는 생각만을 앞세운 채 걷고 있었다. 그러니 목적지를 향한 다급한 발걸음만을 내디디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빨리 2번 출구를 찾아야지.”하며 움직였다. 그런데 역사 안에 있는 꽃집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꽃 잔치가 또 있을까?’ 꽃바구니와 꽃다발이 층을 이루며 놓여있고, 코사지로 만들어진 카네이션도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안되겠다 싶었다. 잘 살자고 사는 세상인데, 이곳에서 발걸음을 잠시 멈추지도 못하고 목적지만을 향해서 또닥거리며 가는 난 뭔가 싶었다.

  

걸음을 멈추고 “이 꽃 얼마에요?” 하고 물었다. 지나가던 젊은이들도 덩달아서 관심을 보였다. 한 사람의 멈춘 발길은 또 다른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꽃집은 사람으로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이 틈에 꽃 한 송이를 사들고 역사를 빠져나왔다. 역사 밖에도 꽃을 파는 좌판이 꽤나 여럿 눈에 띄었다.

  

아하! 5월이구나!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그리고 석가탄일이 들어있는, 5월이구나. 이 순간 5월의 꽃들은 귀향의 잔상에 힘겨워하는 내게 잠재의식으로부터의 자유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먼저 어머니의 모습이다. 오래 전에 군산을 떠나온 후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물게 찾아가는 귀향이었다. 물론 어머니는 서울 나들이를 겸해서 아들, 딸네 집을 자주 오셨다. 그러니 1년 내내 어머니의 얼굴 한번 못 보고 지낼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 같은 패턴도 바뀌기 시작했다.

  

전에는 그렇게 어머니가 서울 나들이를 자주 하셨을망정 지금은 아니다. 어느덧 고향에 칩거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어머니 역시 세월과 나이는 속이지 못하고 그리도 처연하게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수순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푹 쉬고 월요일에 갈 거지?”

“어머니, 저 겸사겸사 왔어요. 오늘 밤밖에 못 자요. 낼은 전주에서 볼일 봐야 돼요.”

 

딸이 찾아 온 것은 금요일 오후다. 딸애가 주말은 이 어미랑 같이 보내주겠지. 오늘은 저녁 먹고 이야기나 하자. 그리고 내일은 같이 꽃구경 가고, 일요일에는 성당에 가는 거다. 나란히 앉아서 같이 미사를 보자. 그 다음부터는 딸네미가 일찍 떠나든 조금 늦게 떠나가든 상관 안 할란다. 이런 어머니의 희망사항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볼일 보러 온 김에 들렸다 하지 않은가?

  

“볼일 보러 왔다고?”

“네에~ 안 뵈면 서운하니까 들린 거예요.”

“그렇구나........”

“낼 은파로 가실래요? 공원부터 가실래요? 일찍 서둘러서 꽃구경 가요.”

 

         

 

며칠 전에는 눈까지 내렸단다. 해변 바람이 유명한 곳이다. 금강이 도도히 흐르는 항구 도시 군산, 쌀쌀한 바람기를 도시 가득 품고 있는 4월이었다. 변덕스런 날씨와 황사바람이 특징인 곳이다. 거기다가 전국적으로 유난히 긴 봄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 올 봄 날씨 말이다. 이런 추위 속에서 우리 모녀는 꽃구경에 나섰다.

 

어머니는 40여 년 전부터 자가용, 어머니 문자로는 승용차를 타던 계층이었다. 같이 길을 나서는 것도 오랜만이려니와 길을 가면서 그놈의 승용차 타령을 또 하면 어쩌나 싶었다. 마음이 살짝 불안해졌다. 이것이다. 내 맘 속에 어머니가 불편한 이유는 늘 이런 것이었다.

 

“내 몸 상태로 봐서는 누가 승용차를 척~ 대기시켜 놓고 꽃구경이든 강구경이든 해야 맞어.”

‘어머니, 장수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뭔지 아세요? 사는 날까지 그저 내 발로 돌아다니시는 분들이래요. 걷는 것 좋은 일이에요! 천천히 감당이 되는 속도로 걷고 또 걸으셔야 해요.’

  

“남도 아니고, 딸인데 좀 어떠냐? 이야기 좀 하고 살자!”

“딸이니까 더 문제예요. 남 얘기라면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릴 수도 있어요. 근데 어머니가 당한 일이다보니까 이 딸의 가슴이 쓰리고 아린 거예요.”

 

같이 살고 있는 아들 내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며,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차편이 마당하지 않다는 얘기, 이런 거, 안 들으면 몰라도 들으면 신경 쓰이고 속상한 거 투성이다. 어머니의 걱정과 푸념이 내게 전염될까봐 경계심부터 앞선다. 어머니와 부딪치는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은파유원지에서 내렸다. 벚꽃이 만개하다 못해서 앞섶을 풀어 헤친 풍장 꾼처럼 절정의 신명을 풀어내놓고 있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꽃비라고 했던가. 비교적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얘 저거 봐라! 꽃은 이쪽이 더 좋아!”

라이온스 클럽의 회원이던 아버지랑 같이 승용차를 타고 철철이 꽃구경하시던 어머니였다. 그 때 봐뒀던 눈썰미로 꽃이 탐스러운 쪽을 가리키며 어머니가 말했다.

 

여기서 잠깐 군산 이야기를 하자. 군산은 벚꽃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의 벚꽃 이야기를 하자면 아주 길다. 군산의 벚꽃 이야기는 일제시대 까지 거슬러 가야 하니 말이다. 그 당시에 군산은 드물게 계획된 신도시로서 도시 계획의 일환으로 시내 곳곳에 벚꽃이 심어졌다. 여기다가 70년대에는 백리나 되는 전군도로(전주~군산)의 가로수를 온통 벚꽃 길로 조성하게 되었다. 덕분에 해마다 봄이 되면 전군도로 백리 길마저 온통 꽃 천지였다. 황홀하게 핀 벚꽃사태로 흥겨운 도시 그것이 군산이었다.

  

군산공원이며 은파유원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특히나 공원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툭하면 달음박질 쳐서 올라가 놀던 곳이 벚꽃동산이었다.

 

호수와 어우러진 은파유원지도 물안개 속에서 갖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호수 가에 벚꽃이라? 자연히 내 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걷고 싶었고 호수가로 다가가고 싶었다. 어머니를 돌아보니 벤치를 찾아서 덥석 앉으시는 것이었다.

 

“어머니? 왜 안 걸으세요?”

“여기서도 잘 보인다. 나, 앉아서 그냥........ 사람 구경이랑 이것저것 할게.......”

“그럼, 저어~기까지......., 전 좀 걷다가 올게요.”

 

          

 

 보폭을 정리하며 발을 뻗었다. 순간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바람에 나부끼며 떨어지는 꽃잎을 머리위에서 맞게 되었으니 맵맴거리며 돌고 싶어졌다.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한 장면 찰칵, 어머니에게 사진 한 장 찍어드려야지 싶었다. ‘어어?’ 그런데 도시 반기는 것 같지가 않다. 얼굴도 들지 않으신다. 사진 찍기 좋아하고, 나들이 좋아하시는 어머닌데...... 셔터를 누르는 걸 알면서도 왜 저러실까? 한참 동안 기다려도 여전히 그냥 계신다.

 

봄볕에 몸단속을 잘도 하셨다. 모자 쓰고, 장갑 끼고, 추울까봐 가볍게 숄까지 두르셨다. 나를 보시더니 어서 걸으라고 손짓을 하신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다시 숙이고 생각에 잠기는 모양새다. 그러고 보니 예전과 달라 보인다. 힘이 없어 보였다. 어깨를 축 쳐지게 늘이고 그저 앉아계신다. 뒷걸음질 치면서 어머니를 다시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호수 한 바퀴를 날을 듯이 금방이라도 다 걸을 것 같았는데, 왠지 걸음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자꾸만 어머니 쪽으로 고개가 간다. 햇볕을 즐기며 생각에 잠기는 듯한 모습이다. 온 몸을 이완시키고 있는 벤치위의 어머니, 편안해 보여서 그리 나쁘지는 않다. 그냥 그렇게 계시라고 비켜줘야 할 것 같았다.

 

서울로 돌아왔다. 헌데도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서 떠나지 않고 밟혔다. 시시 때때로 내 곁에서 맴돈다. 그때 마다 애써 무시하며 지냈다. 그러나 보자. 다시 생각해보자. 군산을 찾아가서 어머니를 만난 그 잔상이 왜 나를 놓아주지 않고 내 곁에서 서성거리는 거야.

 

그때 나는 어머니 곁에 다가가 앉지 않았다. 어머니 혼자서 따스한 햇볕을 마음껏 즐기시라는 이유였지만 알고 보면 은근슬쩍 어머니와 거리를 두는 행동이었다. 그래, 어머니가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어머니 그러네요. 이제와 생각하니 꽃구경이니 산보니 보다 어머니 곁에 다가가 나란히 앉았어야 했어요. 그 봄볕을 같이 맞고 어머니가 하시는 몇 마디 말에 다소곳이 귀를 기울여 줬어야 하는 것이었어요. 전 어머니의 소박한 바람을 외면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거예요.’

 

그러나 어머니, 마음을 다해 말할 게요. 봄날이 어머니의 어깨위에 걸쳐 있네요. 그것은 오랜 세월의 겹인가요. 그러니 어머니, 저랑 같이 은파 유원지를 찾은 그날로 돌아가서 말하겠습니다. 나이는 잊으시고 아름다운 꽃그늘 밑에서 봄볕을 만끽하셨기를 바랍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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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3 13:21 2010/05/1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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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여강(麗江) 순례기 ~~

여강(麗江) 단상 ~~

 

4월은 꽃밭인가. 그런가, 정말 그런가. 3월부터 아니, 2월 초입부터 들려오는 꽃소식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지난겨울은 그리도 춥지 않았던가. 그 추위 속에서, 꽁꽁 얼어붙고 움츠러들고 주름살이 깊었던 우리네 마음이며 살림살이다.

 

삽질 한파 소식이 여린 마음을 지닌 가슴마다에 장송곡처럼 울리고 있었다. 이, 얽힌 매듭처럼 촘촘하고, 강산을 회치듯이 훼손하는 포크 레인을 앞세운 정교한 시나리오에 우리들은 무력하기만 하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슴은 안타까움에 쓰라리다. 이렇듯 조여 오는 시대의 아픔 속에서 피어난 봄꽃은 우리에게 위안과 치유를 주는 것일까. 정말 그런 것일까.

 

        

 

아니다. 밑도 끝도 없는 언설을 펼치고 있는 나의 주장은 도시 타당하지 않다. 봄이 어김없이 환희와 위로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 온 것은 맞다. 하지만 문제를 듬뿍 안고 있는 인간들이 문제다. 멀쩡한 강과 산을 파헤치다 못해서 송두리째 뒤엎는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 우리에게, 봄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시대, 이 야만의 대한민국에 찾아 온 것이 다.

 

        

 

        

 

우리는, 수 십 년 동안 눈앞의 개발 이기에만 눈이 뒤집혀 이윤창출에만 혈안이 되어 살아온 토건장이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잘사는 것이 무엇인지....’ 잘살게 해주겠다는 말에 혹해서 거짓과 사기와 반칙을 밥 먹듯이 자행하며 살아온 건설회사 사장 출신이었던 사람을 5년 동안 우리를 대신하여 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으로 뽑았다.

 

어김없는 이 모든 사실이 천추의 한이 될지도 모른다. 작금의 문제가 벌어지도록 한 것은 우리들의 투표로 인해 빚어진 일이기에 국민들은 파괴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말의 가책과 책임으로 포크레인과 삽질이 트레이드마크인 대통령이 명명백백, 빽빽하게 저지르는 상식을 초월한 짓거리에 가슴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어찌하여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의 자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가, 우리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서 강산이 토막 나고 할퀴고 파헤쳐져 수 천 년 동안 걱정 없이 잘 살아오던 동식물들이 멸종할지도 모르는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한가. 지금 빠르게 속력을 내고 있는 삽질에 사라지고 멸종하는 천연기념물들의 주검이 구체적인 사실로 나타나기에 안타까워서 그럴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댓가를 바야흐로 톡톡히 치르고 있다. 어느덧 봄이 한창인데 토건족 대통령은 줄줄이 사탕처럼, 조기 두름처럼 엮어 시리즈로 이 나라 이강토를 포크레인과 삽질로 토막 나고 파헤쳐지면서 잘도 분탕질하는데 여념이 없다. 이런 작태에 하루가 다르게 훼손되는 4대강을 보면서 속앓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4대강 사업은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깊이 파고 강변에 콘크리트 제방을 깔고 담을 쌓는 것이다. 이로 인해 수 만년 생명을 품고 흐르며 우리 삶의 터전이 되어 왔던 한반도의 핏줄이나 마찬가지인 강물이 거대한 인공수로가 되는 것이다. 복에 겨워서인가. 본래 자연이었던 강을 인공수로로 만드는 나라가 어디 있다냐.

 

물도 강도 못 가졌거나 부족한 나라에서 궁여지책으로 수천 년 전에 벌리던 토건사업이 운하(運河)였던 것이다. 아니면, 지금 토건장이 대통령이 따라하고 있는 미국이나 독일 같은 나라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그 시행착오와 오류를 인정하고 인공으로 쌓았던 댐과 보를 허물어 다시 자연 상태로 되돌리고 있는 것이 대세요.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의 토건장이 대통령은 좋은 것은 못 배우고 어디서 나쁜 선례만 본떠다가 우리 강토에 대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강(麗江)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 고장 사람들은 예로부터 금모래 은모래 반짝이는 남한강이 하도 아름다워서 오직 흥에 겨웠으면 여강(麗江)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을까. 나는 지난 주말 ‘나눔문화’의 ‘여강 순례 길에서 이 모든 것을 똑똑히 보고 말았다. 지금 잘 살아있는 강을 살린다면서 하는 삽질은 4대강 죽이기 사업이고, 한반도는 이것으로 인해 대재앙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첫째, 대규모 준설로 강물의 흐름이 크게 바뀌어 홍수피해가 커질 것이다. 삽질장이 대통령은 지금 강의 본류를 준설하고 있지만, 홍수피해는 주로 강의 지류에서 일어났었다. 하여 강 본류의 준설은, 여름철 폭우로 인해 강물을 범람하게 할 것이고 주변 마을은 물론 서울과 부산까지 위협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경고를 한다.

 

둘째, 댐 설치는 식수대란을 불러올 염려가 크다. 특히 강의 곳곳을 10개의 보로 막게 되는 낙동강은 전기라는 인공의 방법을 쓰지 않으면 흐르지도 못하는 강이라서 물이 상류에서 바다까지 흐르는데 걸리는 시간은 20일에서 200일까지 걸린다고 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이는 만고의 이치다. 낙동강은 비가 오면 흙탕물이 되고 비가 그치면 시퍼런 녹조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셋째는, 한반도의 지형과 생태계 자체가 바뀌게 된다. 독일의 라인강은 운하건설로 현재 운하 건설 전에 살던 동식물들이 대부분 멸종되었다고 한다.

 

4대강 사업은 인재(人災)가 될 것이다. 한 번 시행하면 복구가 불가능한 이 사업이 우리 땅엣 펼쳐진다니 앞으로 닥칠 비극이 두렵기만 하다.

 

4대강 사업에 들어붙은 업체는 현대건걸, 삼성, 대림건설, GS건설 등 4개 건설재벌들이다.

 

그렇다. 포크레인 세력들은 여리고 약한 사람들의 절규에 귀를 막고 난폭한 음주 운전자처럼 정신 나간 질주를 거듭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도 한국, 그것도 바위늪구비에서만 집단 서식하는 멸종위기 2종인 단양쑥부쟁이는 그 마지막 쉼터를 잃고 있었다.

 

     

 

     

 

습지와 야산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표범장지뱀’ ‘삵’ ‘수달’ ‘수리부엉이’도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세계가 비록 평화로울지라도 지금 우리가 편치 못한 이유가 여기 있고, 아름다운 꽃을 보고도 진정으로 반길 수만은 없는 처지가 이 모든 것이다.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이철제, 김종도 등 여주 민중미술인인 40여명은 때마침 신륵사 입구에서 펼친 설치미술전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살다’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모든 살아있는 것은 사람이다. 4대강의 삽질로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절규하며 온 몸으로 현장 미술작업에 여념이 없었고 ‘나눔문화’에서는 순례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 여강을 감싸 안으며 따뜻함 마음을 모아서 바치는 고천문을 올리고 있었다.

 

목졸린 강물이 바둥거리는 소리와 죽음의 행진곡인 포트레인 삽질 소리에 피눈물로 절규하는 4대강을 젓줄 삼아 목숨을 이어가는 강, 바람, 금모래, 은모래, 흰목물떼새, 해돋이 산길, 여강길, 누치, 빼어난 경관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이 댐공사로 지형변화를 일으켜 제명위기에 놓여 있으니 이를 지켜달라는 하늘에 바라는 발원문을 목 놓아 부르짖고 있었다. 머리에는 지혜를, 가슴엔 사랑을, 손에는 나눔을 실천하는 ‘나눔문화’ 다운 따뜻하고도 진솔한 발원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현재 남한강에는 우리나라에서만 사는 고유어종이 다수 서식하고 있고 특히 꾸구리는 차고 깨끗한 물에서만 사는 어종이라고 했다.(김익수 전북대 명예교수, 생물학) 이처럼 물이 차고 깨끗한 여강인데 무슨 물을 살린다고 파헤치느냐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찾아온 계절이 거저 주는 선물을 받지도 못하고, 꽃이 주는 부드러움과 위로의 메시지도 순수하게 느끼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지금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귀도 없고, 흐드러지게 핀 봄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눈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자. 움츠렸던 새잎들은 강철 같은 의지로 빛나고, 물을 머금은 얼굴은 산천을 연초록으로 물들게 할 것이다. 서로 앞 다투어 봄을 알리느라 하루가 다르게 훈풍을 몰고 온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조건도 없이 주고 있다. 이러한 피조물, 봄꽃들이 피어 한 시절을 풍미하고 있다. 꽃은 꽃을 부르고 자연은 자연을 부른다. 우리도 하면 된다. 자연의 마음으로 꽃의 마음으로 강의 마음으로 사람을 부르고 사람다운 마음이면 된다.

  

그래, 그렇다. 강물이 강물답게 흐르도록 가만히 놔두면 좋겠다.

 

강물은 흘러야 한다.

'당신들은 어찌 이곳을 흩트리려 하십니까?'

 

 

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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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6 01:25 2010/05/06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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