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를 위시한 단일화 주창자들에게

-47일 서울.부산 재보궐선거에 부쳐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운이 좋으면 쇠 나무에서도 꽃이 핀다.’라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역설의 미학이 느껴지는 말이다. 꽃이 피고 나무가 생장하려면 분명히 흙 위에서나 가능한데도 쇠에서 꽃이 핀다고 비유해 놓은 것은 불가능하거나 흔치 않은 행운이 현실로 이루어졌을 때를 찬탄하는 표현임에 틀림없다 

딴은 그렇다. 세상사는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원치 않는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10여 년 전에 초. 중생들의 무상급식 실시 여부로 주민투표에서 패배하여 사퇴한 서울시장 자리를 놓고 지지율 5%였던 박원순 씨가 당선된 것은 그야말로 운이 좋아 쇠나무에서 꽃이 핀 경우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다. 재보궐선거로 정치를 시작한 박원순 씨가 미투 문제로 재보궐선거를 낳게 한 장본인이 됐으니 말이다. 문제는 47일 재보선 정국에서 현 집권 여당은 눈에 띄는 후보자가 보이는데 반해 야권에서는 모처럼 올라간 지지율을 믿고 자천타천 후보가 난립하고 있는 상황인 점이다. 그런데 안철수 씨는 왜 출마를 하는 것일까?’ 금태섭 씨는 왜 또 나오는 것이고. 피선거권이 있으니 출마하는 것은 자유고 야권 단일화는 좋은 것이야!”하고 접어준다 해도 처음부터 안철수 씨는 본인으로 단일화돼야 한다는 인상을 너무 강하게 풍기고, 금태섭 전 의원 역시 너무나 뻔한 행태를 드러내고 있다.

선거철마다 무한 반복하는 익숙한 모습이다. 물론 기회를 이용하여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것이 정치인들의 속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서다. 아직은 후안무치한 짓을 한 적도 없고 한국 정치사에 크게 해악을 끼친 적도 없는 전직 의원에게 딴죽을 걸 생각은 없다. 그렇더라도 안철수 씨를 놓고 볼 때는 짚어 볼 일이 없지 않고, 유권자도 사람인 이상 단일화라는 판박이 공식을 대입하려는 수 순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이 적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안철수 씨의 출마 일성을 보자. ‘야권 단일화를 이루겠다.’ 또한 "대한민국 서울의 시민후보, 야권 단일후보로 당당히 나서서 정권의 폭주를 멈추는 견인차 역할을 하겠다"고 한다. 제가 입당했을 경우 중도층의 파이(지지층)’가 줄어드는 게 가장 우려되는 점이라는 말을 쏟아냈다. 아하! 필자는 이 지점에서 저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속 주인공 저만 알던 거인이 연상된다. 저만 알던 거인은 아집과 오만으로 세상을 얼음 공화국으로 만들었던 문제의 인물이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에 염증을 느끼거나 1, 2당에 실망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본인의 지지자라는 투로 일관하는 지점에서 그 근거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더구나 이미 지난해 총선에서도 지역구 후보를 내지 않고 양보했는데 또 양보를 하라고 한다그런데도 누군가는 제게 더 양보하고, 더 물러서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그런데도 누군가는 제게 더 양보하고, 더 물러서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는 제법 고난도의 수사법(?)을 구사하는 부분에서는 정말이지 헛웃음을 넘어 쓴웃음마저 나올 지경이다.

묻자! 안철수 씨가 현재 제1당이나 2당에 속해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본인이 제3지대를 온통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통칭할 수 있는가. 예컨대 안철수 당이 20204월에 치러진 제21대 총선에서 지역구 후보를 내지 않은 것이 누구의 강요에서 생긴 일이었던가. 또 그 누군가를 위한 희생의 일환으로 지역구에 후보를 내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아니지 않은가. 안철수 씨에 대한 거부 정서 때문에 후보를 낼 엄두도 못 냈으면서 왜 희생자이자 착한 양보를 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는 것인가.

14대 총선에서 4당 체재의 합의제 민주주의를 경험한 국민들이 다당제의 필요성을 통감하고서 20대 총선에서 38명이라는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줬다. 이는 30여 년의 정성과 인고의 세월 끝에 만들어진 금쪽같은 제3지대였다. 이러한 다당제 구도를 안철수 씨가 1년도 안 되어 깨부쉈다. 안철수 씨는 제3지대를 초토화시킨 역사의 죄인임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이런 사람이 제3지대를 트레이드마크처럼 내세우며 제3지대 장사를 하고 있으니 형용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래서 안철수 버전의 내로남불역시 여타의 내로남불 못지않게 치가 떨리기는 마찬가지다. 이러고도 3지대는 오로지 내 거야!“라고 부르댈 터인가. 어불성설이다.

개인이 아닌, 정치인이 저지르는 잘못은 국가와 사회에 엄청난 혼란과 해를 끼친다. 더구나 자신의 존재감 부각과 카메라 세례가 고파서 습관적으로 뛰어드는 정치연습생들의 단일화 놀음은 결코 건전하지 않다. 이들이 유발하는 피해와 기회비용은 어디서 보상받는단 말인가.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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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2 19:16 2021/02/12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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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한국 최초 미국무대에서 성공한 걸그룹과 프로듀서
-미국 ‘에드 설리번 쇼’ 22번 출연한 김시스터즈-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우물 안 개구리’는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일인 줄 알면서도 보폭을 넓혀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서든 개척자의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개척자의 길은 십중팔구 수많은 걸림돌로 인한 가시밭길, 그중에서도 해외 진출과 같은 낯선 곳으로의 모험은 이중 삼중의 고충이 뒤따르곤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009년도에 JYP의 걸그룹 원더걸스가 미국 진출을 위해 용감하게 나섰고, 뒤를 이어 소녀시대, 보아, 그룹 엑소, 씨엘 등이 잇따라 미국 진출 시도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초창기 시도는 그리 큰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선제적이며 능동적인 도전은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던 중 2012년도 반가운 소리 하나가 들려왔습니다. 가수 싸이가 성공적으로 미국 무대에 서게 되었던 것, 싸이의 경우 선(先) 현지 진출 후 위치 확보를 기대하는 식의 방법을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유튜브 영상이 널리 퍼져 인지도가 올라가고 있을 때 ‘아일랜드 레코드’ 소속의 유명 프로듀서인 스쿠터 브라운 쪽이 싸이의 영상을 재밌게 보게 되었습니다. 스쿠터 브라운은 때마침 콘텐츠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재미동포 이규창 씨를 통하여 싸이 측과 계약을 성사시킵니다. 이후 방탄소년단을 위시하여 지구촌 곳곳에서 다수의 K-Pop 예인들이 위상을 높이고 입지를 굳혀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K-pop에 대한 희소식은 금 번 2020 여름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방탄소년단의 ‘다이너마이트’라는 디스코 팝 장르 곡이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확인시켜주고 있으니까요.

60,70,80,90년대 매번 해외 진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초창기 해외 진출 시도라야 대부분 일본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만, 거짓말 보태서 연예인들의 해외 진출 기사가 나올 때마다 국내 팬들의 ‘묻지 마’ 응원은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격 향상에 도움 되는 일이라 생각해서 현실과 기대감을 분리하지 않은 채 이성적인 사고는 접어두고 “애국이 따로 있나? 해외 진출을 한다는데, 말로 부조하고 박수로 일조하면 서로 좋은 일인 거지!”라는 식의 단순, 명쾌, 순진한 정서가 작용한 때문이었던가 봅니다.

집단으로 발현되는 군중심리는 때로 무조건적일 때가 있잖습니까? 축구 경기를 예로 들어보죠. 우리 선수가 골을 넣기라도 하면 온 천하를 다 얻은 것 같은 환호가 쏟아지고 상대에게 골을 먹으면 갖은 야유와 한숨이 파도를 치듯이 뒤덮습니다. 승리하면 축제 분위기요 지게 되면 그야말로 뒤끝이 작렬하는 겁니다. 골인했을 때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버리려고 작심했던 희망이 사라지는 판이니 애먼 한탄만 쌓이는 거죠.

연예인들을 소비하는 심리나 운동경기를 관람하는 태도나 오십 보 백 보입니다. 당사자들은 설레발, 순진한 팬들은 묻지 마 응원, 언론과 방송들은 ‘밑질 것도 없고 해될 것도 없다’는 생각해서인지 폼 날 것 같은 뉴스라 생각되면 소나기 퍼붓듯이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경향이 있지요.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흐지부지 없었던 일이 되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말이죠. 이런 패턴은 자주 반복됐습니다. 입으로는 ‘기와집 열댓 채 지었다 허물었다’를 누군들 못 하겠습니까. 그런 와중에 계은숙 씨가 일본 가요계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죠. 그러다가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확실하게 성공을 거둔 사람으로 김연자 씨를 꼽을 수 있고요.

옆 나라 일본 진출만 해도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 미국에 진출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지 않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엔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시절이었는데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 진출이 그리 쉬웠겠습니까? 그런 현실 속에서도 “김시스터즈가 성공했다”더라 정도는 바람결에 꽃잎 흩날리듯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게 알고 보니 작곡가 겸 악단 장인 김해송과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의 딸 들이었습니다.

김시스터즈의 리더인 김숙자 씨에 의하면 언니 영자 12살, 본인 나이 9살, 막내 여동생 애자가 8살 적부터 부친에 의해 구성된 가족뮤지컬 쇼로 시공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부친은 5~6세 난 자녀들에게 클래식에 가사를 붙인 아주 빠른 속도의 노래로 연습을 시켰다고 하는데, 이후 부친이 북한군에 끌려가 변을 당한 후 어머니 이난영은 대식구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남긴 악극단을 운영하려면 돈이 들었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이난영은 재능 있는 자식들과 함께 무대에 서게 됩니다. 체격 큰 미군들을 상대로 흥을 돋우고 리듬을 타며 공연을 하자면 아무래도 코러스도 필요하고 막간을 메꿔줄 막간 가수도 필요했을 테지요.

세 자매는 미군들이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 노래를 불렀고 미 8군 무대에도 섰습니다. 부산 피난 시절 낮엔 학교에 밤엔 무대로 달려갔습니다. 모두 열 살 갓 넘은 나이에 말이죠. 출연료 대신 받은 것은 위스키나 양담배 소시지 같은 현물이었습니다. 이것을 암시장에서 쌀과 돈으로 바꿔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이후 키가 훌쩍 커버린 큰 언니 영자는 무용단으로 가고, 언니의 빈자리를 외사촌 민자로 채워 숙자와 애자 민자로 팀을 이뤄 김시스터즈의 멤버를 확정 짓습니다.

이난영은 자매들에게 가야금, 장구, 북 같은 우리 악기를 기본으로 바이올린과 트럼펫 등 서양악기와 한국무용에 발레 레슨까지 시켰습니다. 연습량을 다 채워야 바나나와 초콜릿이 상으로 주어졌습니다. 당시로서는 아주 귀한 간식이었던 바나나 초콜릿은 어린 나이에 혹독한 연습을 견디게 해주는 작은 보상이었는지 모릅니다. 안 그래도 자매들은 청음 실력이 좋고, 악기 습득력이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이라 할지라도 갈고닦지 않으면 빛날 수 없습니다. 혹독한 훈련은 그래서 당연하고도 상시적인 일과였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톰 볼’이라는 미국인 프로듀서가 한국에 옵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아시아계 특집 쇼를 구상하던 중 김 자매들의 소식을 듣고 실력을 테스트하러 온 것입니다.

4주 계약을 하고 달려간 라스베이거스였습니다. 한국을 떠나 생면부지 타국에서 처음 해본 공연이었습니다. 공연이 호평을 받은 덕분에 연장 계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선더버드 호텔 측과 연 8개월씩 15년간 전속 가수로 공연을 펼치게 돼요. 이들은 40분 공연을 매일 밤 2~4개씩 소화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줍니다. 20여 종류의 악기를 연주하는 실력에 재기 발랄하고 속도감 있는 동작과 환상적인 화음에 높은 음악성을 가진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라스베이거스를 기반으로 점차 뉴욕과 시카고 등 미국 전역으로 입지를 넓히게 됩니다. 김 자매들의 활약상은 라이프지에 실리고 시카고 TV 가이드 지에는 표지로도 소개됩니다.

주급 400달러로 시작한 출연료가 이내 1만 5천 달러가 되고, 급기야 2만 달러를 받게 됐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예인의 가치는 출연료가 증명해 줬습니다. 당시 한국인의 1인당 연 국민소득이 2천 달러였으니 김시스터즈의 수입이 얼마나 고액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라스베이거스 고액납세자 6위는 이들의 공식적인 납세 기록입니다. 세계 각지에서 휴양과 여흥을 위해 모여드는 라스베이거스 공연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고는 가능치 않은 일이고, 비틀스가 미국을 강타할 때 교두보로 삼았던 CBS 인기 TV 쇼 <에드 설리번 쇼>에 김 자매들은 무려 22번 출연하는 기록을 세웁니다. 이난영은 63년도에 도미하여 딸들과 함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우리나라 트로트 가수로서는 미국 최고의 메이저 쇼 무대를 밟은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일 겁니다.

트로트 양식이 정립된 시작점에서부터 일세를 풍미했던 가수 이난영, 그 자신 재즈와 블루스 장르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미국 무대에서도 먹힐 수 있는, 보컬 실력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에 춤 실력까지 갖춘 걸그룹을 조련한 엔터테인먼트 계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최초로 미국 무대에 진출하여 성공 가도를 달린 걸그룹은 ‘김시스터즈’이고 그들을 길러낸 최고의 프로듀서는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사람 그 이난영이었습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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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0 18:09 2020/09/1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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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제가요] 트로트 양식의 시작점과 시대적 양상
-가요사,,,이애리수와 고복수 그리고 이난영과 남인수까지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예인들의 눈부시고도 고달픈 삶은 그들이 부른 노래와 세월만큼이나 천차만별로 회자되며 빛과 어둠 사이를 오갑니다. 하여 트로트 양식이 시작된 지점과 변화의 양상을 짚으며 해당 분야에서 이름을 남긴 가수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일은 그들의 영광스러운 여정만큼이나 신산한 흔적과 고달프고도 오래된 기억과도 마주치는 일일 것입니다.

화향백리, 주향천리 ‘인향만리’라는 말, 꽃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향기는 천리를 간다 하는데 어째서 인간의 향기만은 유독 만 리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여타의 종(種)들과는 달리 스스로 업적을 쌓고 그 치적으로 말미암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20세기 초에 시작된 우리의 대중가요도 작은 물방울이 냇물을 거치고 강을 이루다가 마침내 바다에 이르듯이 부침과 우여곡절을 거듭한 후에야 오늘날과 같은 서민 풍의 노래 장르로서의 위치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윤심덕의 ‘사의 찬미’도 굴곡진 가요사의 한 단면이겠네요. 어떤 이들은 ‘사의 찬미’를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라 하는데요. 윤심덕이 관비 유학생으로서 동경음악학교에서 서양음악을 전공한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인 것은 맞습니다만. 그녀는 음악 활동과 신극 운동에 참여하다가 ‘메기의 추억’과 ‘어여쁜 새악시’ 등 외국의 번안곡을 취입하러 일본행 배에 오르게 됩니다. 녹음은 오사카에 있는 닛토 레코드사에서 했다고 하고요. 직접 가사를 지었다고 하는 ‘사의 찬미’는 막판에 윤심덕의 주장으로 수록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더라도 이 곡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느린 선율로 변환하여 가사만 입힌 번안곡에 불과했습니다.

‘사의 찬미’는 제목 그대로 죽음을 찬미하고 삶에 회의적인 지극히 암울하고도 퇴폐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주인공은 노래 제목과 부합하는 행동을 결행하고 맙니다. 귀국 도중 현해탄 선상에서 목포 갑부의 아들이자 유부남인 극작가 김우진과 동반 투신자살을 하고 말았으니까요. 이일은 그야말로 조선 최고의 초특급 스캔들로서 구구한 억측과 화제성을 증폭시키며 인구 약 2천만인 가난한 나라 식민 조선에서 10만 장이라는 당시로는 경이적인 레코드 판매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아무튼 대중가요의 시작점은 1932년 이애리수가 내놓은 ‘황성 옛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어 고복수의 ‘타향살이’가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에 이르러 트로트 풍의 노래 양식이 완성되고 정돈되었다는 것이 평단의 대체적인 정설입니다.

이후 뛰어난 미성의 소유자인 남인수가 등장하여 ‘애수의 소야곡’과 ‘낙화유수’를 내놓으며 20년 이상 최정상의 자리를 지킬 불세출의 가수가 출현했음을 알립니다. 뒤를 이어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이 출시되며 트로트는 더한층 대중들의 곁으로 다가섰던 것, 한편 일제 막바지에 백년설의 ‘번지 없는 주막’과 ‘나그네 설움’이 나와 큰 호응을 얻었고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과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서민들의 취향과 사회적인 관심을 저격하며 40년대를 일단락 짓습니다.

이 지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노래의 시대적 양상과 변화입니다. 30년대 노래에는 나라를 잃은 설움이 주조를 이루었는가 하면, 일제 말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는 강요된 친일노래가 판을 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땅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지고 이에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은 왠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가거라 삼팔선’을 통하여 강대국들이 우리 땅에 임의로 그어놓은 3.8선에 구애받지 말고 남북이 자유롭게 오가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니까요. 트로트가 친서민적이요 대중들의 삶에 기반한 노래 장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50년대에 들어서자 백설희는 그 유명한 ‘봄날은 간다’로 옥구슬처럼 탱글탱글하고 멋진 목소리를 뽐냅니다. 이 곡은 화려하지만 덧없고 변덕스러운 봄날의 속성에 빗대어 대중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역설의 미학을 발휘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와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발표되는데, 이때는 또 6.25가 끝나 환도(還都)와 귀향(歸鄕)으로 바쁜 데다 공산주의를 피해 3.8선 이남으로 남하한 실향민들까지 뒤엉키는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특히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피난살이를 마치고 떠나는 청춘 남녀의 엇갈린 운명을 표현하고 있지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50년대는 혼란과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기는 해야겠는데 너 나 없이 가난한 사람들로 넘쳤습니다. 그렇더라도 남인수의 음반은 요즘으로 치면 초 대박급인 수만 장이나 팔렸다고 합니다. 대중예술의 힘일까요. 팬심의 발로일까요. 그의 목소리는 고음에서조차 흐트러짐 없이 한결같이 맑고 시원한 넘사벽 그 자체였다고 하고요. 예술가의 매력과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는 예라 할 것입니다. 문화예술이란 결국 자연의 모방이자 인간의 상호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소박한 창법과 단순한 음악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고복수의 ‘타향살이’가 인기를 얻은 시점은 만주로 연해주로 타향살이 타국살이를 위해 조선 땅을 떠나는 사람들의 많았던 30년대 초였고, 같은 고복수의 노래 중 첫 소절이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하는 ‘짝사랑’은 흥미를 유발하는 의문형 기법이 재밌고 매력적이어서 인기를 부르는 요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부인 황금심의 ‘뽕따러 가세’는 요즘 모 방송 프로그램의 타이틀로 차용되면서 시대적 트렌드와 맞물리며 재소환의 예를 보여주고 있고요.

다시 이난영과 남인수의 예를 들어봅니다. 네이버의 한 기사에 의하면 ‘목포의 눈물’은 대중가요의 전성시대를 연 공전의 히트곡이며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명소로 되살리는 마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데서 보듯 시대성, 화제성, 예술성, 대리만족 등 여러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하겠습니다. 여기에 남인수와의 로맨스는 다른 예술인들이 갖지 못한 엄청난 차별점이 됩니다. 아마 이일은 그들의 음악적 궤적을 논할 때마다 인간적인 매력의 근거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음악인들이 추구하는 진선미의 결정체는 무엇일까요. 가수든 연주가든 작곡가든 자신들의 음악행위 앞에 명곡과 명음반, 명가수 명연주와 같은 말이 헌정되는 일이 아닐까요? 각각 44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1천여 곡을 부른 남인수와 48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5백여 곡을 부른 이난영입니다. 하더라도 그들이 함께 써 내려간 러브스토리야말로 둘의 음악 인생에 있어 최고의 화룡정점이라 생각합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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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2 22:14 2020/09/02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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