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제가요] 오래된 트로트명곡에 대한 단상
-1930년대 ‘목포의 눈물’과 1950년대 ‘봄날은 간다’-⑤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우리 정통대중가요에도 명곡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것은 분명 1930년대부터 시작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90년 가요사에서 60년대 이전의 가요에 국한해 짚어보자면 최고의 대중성을 획득하고 있는 노래는 1935년도에 레코드를 취입한 이난영 씨의 ‘목포의 눈물’에서 시작하여 백설희 씨가 1953년도에 부른 ‘봄날은 간다’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지만 두 곡은 오늘날까지 노래 제목에서부터 내용 일부분이나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만인에게 회자되며 사랑을 받고 있다 생각되는 곡이기에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포의 눈물’과 ‘봄날은 간다’가 “어떤 점에서 명곡일까?”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봅니다. 먼저 ‘목포의 눈물’은 제목부터 묘합니다. 문학적 수사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도시 이름에 눈물이라는 말을 매칭 시킨 것은 무척이나 이질적이고도 엉뚱한 표현이라 할 수 있지요. 이처럼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언어를 접목하여 은유든 직유법이든 의미 전달에 성공하는 경우에는 상식을 파괴하는 표현법으로서 희소성을 갖습니다. 예술 분야에서만 허용되는 특별한 문법체계이겠지요. 더하여 발표 당시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독자와 평단으로부터 꾸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경우엔 좀 더 우월한 존재감을 발휘합니다.

그렇습니다. 시어나 노랫말이 다양하게 해석될수록,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생각의 파장이 넓고 깊을수록, 명곡.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 하겠습니다. ‘목포의 눈물’은 이런 점에서 제목부터 한 점 따고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겠고요. 노랫말도 그렇습니다. 내용이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고 뚜렷하게 잡히는 것이 없지만 애매하고도 추상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이 직선보다는 곡선의 멋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감성의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특이한 점이죠.

 

‘목포의 눈물’의 존재감은 시대 배경과도 무관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목포는 눈물’이다. ‘목포는 설움이다’라는 정서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노래가 나온 시기는 1935년 일제 강점기입니다. 목포 주변에 있는 1004개의 섬들은 결코 기득권층이 사는 곳이 아니었고요. 섬은 목포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기대어 염전을 일구고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식민 백성들의 터전이었습니다. 목포가 대처로 나온 가난한 집의 맏형이라면 주변의 섬들은 형의 출세 소식을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는 두메산골의 동생들이라고나 할까요. 신흥도시 목포의 뒷자락엔 그렇게 숨죽이고 사는 사람들의 터전 천여 개가 있었습니다. 목포는 지금도 ‘섬들의 수도’라 불리며 애잔한 정취를 발산하고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노래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첫 구절은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으로 시작합니다. 이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으로 끝나는데요. 여인은 이별로 인하여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으며 그게 바로 ‘목포의 설움’이라고 주장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 노래의 청자들은 그 같은 주장에 이의 없이 동의하는 사람들로 보이는 점이죠. 여인의 눈물이 ‘목포의 눈물’이고 이어 목포의 눈물은 곧 ‘망국의 설움’이라는 식의 가치 전도가 예상되는 가운데 이 역시 이심전심 이해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원곡자인 이난영(이하 경칭 생략)을 보죠. 약간의 콧소리 섞인 고음에 대책 없이 넓은 음역 대에서 애조를 가득 띠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난영에게서 배태되는 애조는 일제 강점기라서 그런지 유난히 세기말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목소리는 맑고 좋다는 식으로 단순 명쾌하게 규정할 순 없습니다. 그렇다고 탁음이 섞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문득 “요즘 가수들 중에 누가 저처럼 치명적으로 애조 띤 음색으로 변화무쌍한 결을 드러내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백설희의 목소리는 이난영에 비해 굵고 맑은소리를 자랑합니다. 참 백설희 이전에 꾀꼬리라는 애칭을 가졌던 황금심에 대해서 소개해야겠네요.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보다 3년 늦은 1938에 발표됩니다. 이후 1953년에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가 나오면서 우리 정통대중가요 계는 그야말로 최고의 여가수 3인방을 배출하는 모양새였습니다. 백설희의 목소리는 은쟁반에 알이 굵고 실한 옥구슬이 구르는 소리라 한다면, 황금심의 소리는 백설희의 것보다는 조금은 더 얇고 맑고 섬세하게 구르는 옥구슬 소리라고 밖에는 더 이상 알맞은 표현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현대에 와서도 즐겨 소환되는 노래에는 그만의 특장점이 있습니다. 정상급 가수들 중에서 다시 부르기를 꾸준히 하고 있는 곡이죠. 그런데 발표 당시에는 대박이 나고도 세월이 흐른 후엔 관심이 덜한 경우가 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멋과 한 그리고 대중성이 조금 더하고 덜한 차이에서 난다고 생각합니다. 탁월한 보이스의 소유자인 황금심의 노래는 앞의 두 곡보다는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별화가 됩니다. 이에 비해 ‘목포의 눈물’과 ‘봄날은 간다’는 멋과 한 그리고 대중적인 면에서 항상 기시감을 주고 있습니다. 곡의 수용자들이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응용하고 대입할 수 있는 융통성을 허락하는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봄날은 간다’도 ‘목포의 눈물’에 못지않게 제목 멋있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곡입니다. 이 노래는 6.25동란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나온 곡으로서 우리나라 시인 100명이 응답한, 광복 이후 대중가요 중 가장 아름다운 노랫말 1위로 선정된 곡으로 알려져 있죠. 노랫말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라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첫 구절은 특히 시각적 이미지가 강하죠. 그림 한 폭이 그려집니다. 연분홍 치맛자락을 휘날리고 서 있는 여인의 모습 한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1953년이라면 망국의 아픔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습니다. 더구나 6.25의 상흔 한복판에서 힘든 생활고를 겪던 때였고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물로 허기를 달래는가 하면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이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래의 첫 소절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라며 낭만이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노랫말의 힘이죠. 그런데 현실에서는 누군가의 요란한 약속도, 연인의 사랑의 맹세도 공수표로 맴돌고 있는 사이에 봄날은 흔적 없이 가버립니다. 열아홉 처녀는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꽃이 필 때도 울고 꽃이 질 때도 울었다 합니다.

2절도 3절도 ‘봄날은 간다’로 끝나는데 맥락은 똑같습니다. ‘실없는 그 기약에 매달리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봄날은 갔다 하고 ‘얄궂은 그 노래만 듣다가’ 봄날은 또 속절없이 갔다 합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거듭되는 약속과 맹세에도 불구하고 봄은 쉽게 오지도 않거니와 왔다가도 눈 깜짝할 사이에 가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봄날은 간다’ 역시 곡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속적 향토적 감성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아주 모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봄날은 간다’와 ‘목포의 눈물’은 우회적인 표현과 곡선적인 미학에 세대 불문하고 다양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부르기 좋은 다면성을 가지고 있는 노래로 여겨집니다. 하여 인간의 내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까지 실어 담을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해주면서 변함없이 사랑받는 곡으로 살아남아 있습니다. ⑥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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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향, 제가요] 매스미디어환경과 방송채널시장
-방송채널의 속성과 상업방송의 허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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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그동안 정치 쪽 기사와 칼럼을 주로 써온 기자로서는 다소 뜬금없는 분야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마침 불붙기 시작한 트로트 장르에서 일어나는 관심과 유행, 대중문화현상에 대한 소회까지를 폭넓게 밝혀보고자 합니다.】

 

코로나19와 TV시청

코로나19 소식이 여전히 들리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로 최고 호황을 누리는 업종은 아무래도 매스 미디어계 방송채널업자와 각종 배달업체가 아닐까 합니다. 방송은 재빨리 비대면 프로를 늘리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고, 배달과 택배업은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도 웬만한 것은 다 해결할 수 있으니 요즘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한 서비스 업종으로 자릴 잡았나 봅니다. 외출 자제하기, ‘다중이용시설’ 방문하지 않기 여기다 사회적 거리 두기까지 권하는 사회가 되다 보니 성장 추세를 높이높이 이어갈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면 매스 미디어계와 TV 시청하기는요? 입시를 앞두고 있는 학생과 취직시험에 다급한 각종 취준생 말고는 귀가 후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무리 지적 호기심과 지식욕이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전처럼 종이책을 통해서만 정보를 취하는 것도 아니고, 내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을 터치하여 읽고 싶고 접하고 싶은 것을 얻는 세상이 된 데다 코로나19는 날개를 달아주는 모양새입니다. 각종 매스미디어 이용은 그래서 우리 몸에 피를 공급해주는 대동맥만큼이나 사회를 관통하는 혈맥이 돼버렸습니다.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인데요. 필자가 TV를 켜는 시간은 주로 밤 10시 너머입니다. 하루 일과를 끝내면서 맘 편히 있다가 잠에 빠져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TV 프로라는 것이 어디 맘에 맞는 것만 있나요. 채널은 많은데 볼만한 프로가 의외로 적습니다. 인생은 유한하고 시간은 한정돼 있는 인간인지라 마냥 TV만 볼 수는 없고, TV도 가려봐야 하고 나름 절제해야 합니다. 자연히 채널과 방송프로의 선호도는 취향과 여유시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죠. 그래서 TV 시청은 선택과 집중 차원에서라도 자신에게 유익하고도 최선인 프로를 골라야 하는 것이어서 제약이 만만치 않습니다.

 

매스미디어환경과 방송채널시장

요즘 TV는 ‘영상물 공해 집합소’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재방(再放), 삼방, 사방은 기본이고 수개월에서 수년 전 아니 수십 년 전에 제작된 데다 화질과 내용면에서 결코 후한 평가를 받지 못하던 C급 D급 콘텐츠들까지 안방극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유는 미디어 환경과 방송 채널업자들의 사정 때문입니다. 유튜브를 비롯한 1인 미디어에서부터 기존의 거대 방송국들까지 각종 영상물이 홍수를 이루다 보니 이에 뒤질세라 플랫폼 사업자들도 난립하고 있습니다. 허나 질적인 수준은 이를 못 따르고 있고요. 방송계 사정은 그야말로 외화내빈에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딱 그 모양 그 지경입니다.

그 많은 채널에게 “방송시간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우나?” 질문을 해보면 짚이는 것이 허다히 떠오릅니다. 그들 중에는 콘텐츠의 질과 품격은 뒷전이고 시간을 때우고 송출에만 급급한 곳이 꽤나 많습니다. 이 세계에서도 적당히 현상 유지나 하다가 권리금이나 받고 채널을 팔아넘기려는 얍삽한 장사꾼 심리가 없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요. 이것저것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저질 콘텐츠를 경계해야 할 이유는 널려있기만 합니다.

방송미디어 업계는 살벌한 정글의 세계입니다.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도태됩니다. 아시다시피 방송 채널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작 능력이 있던지 좋은 작품을 사들일 자본과 안목을 갖춰야 합니다. 이른바 영상물 제작에는 자본과 제작 여건이 필요하고 창발 적 의지와 영감이 따라줘야 합니다. 자본이 투입돼야 각 분야별 전문팀이 꾸려지고 이들이 저마나 씨줄과 날줄이 되어 온갖 창의적이고도 특별한 직조물을 생산해내는데 공헌을 해냅니다. 이후 시장에 나간 작품들은 평작, 히트작, 대박, 초대박 작품 등으로 가치가 매겨집니다. 초대박 상품은 엄청난 재화를 창출해내는 요술 양탄자라 할 수 있지요.

이 현대판 요술 양탄자는 극장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에서뿐 아니라 유튜브와 넷플릭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또는 멜론이니 기존의 빌보드 차트를 막론하고 거침없이 유영(遊泳)하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요술 양탄자를 많이 가진 업자들일수록 천문학적인 부와 영예를 거머쥐게 되겠지요.

 

나쁜 채널, 나쁜 방송

예컨대 매스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업계 사람들은 늘 ‘대박 칠 꿈’을 꿉니다. 그러려면 아이디어든 자본이든 투자가 선행돼야 하겠습니다만 주야장천 같은 작품을 우려먹기만 하는 곳이 있다 보니 이런 곳은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받기 십상입니다. 그 끝은 인수합병되거나 문을 닫는 수순이 될 것입니다. 상당히 친숙하다고 생각했던 채널이 어느 날 번호가 확 바뀌어 있거나 채널 이름은 똑같은데 기존의 포맷은 온데간데없이 낯설고도 엉뚱한 프로그램만 돌려대는 채널을 볼작시면 영락없이 문제가 발생한 나쁜 채널과 나쁜 방송이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채널들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금쪽같은 시간 버려가며 굳이 더럽고 무섭고 야비하며 잔혹하기까지 한 영화로 몸과 마음에 음습하고도 부정적인 기운을 드리우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폭력과 낭비를 조장하거나 선악에 대한 판단력을 무디게 하는 프로, 맥락과 필연성도 없이 황당한 스토리에 스케일만 강조하는 영화에 유료채널을 표방하며 끼어드는 성인물까지 결코 건전한 영상물이라 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취향과 착각은 자유라서 판단하는 관점이 다 같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럼 ”뭘 주로 보느냐?”라는 질문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 검증된 명작을 소재로 만들어진 콘텐츠, 국악 채널, 각종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채널, 예술과 관련한 프로를 만나는 경우엔 정말이지 TV라는 문명의 이기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란하지 않고 허풍스럽지 않고 뒤틀린 가치관으로 세상을 호도하려 들지 않는 이야기라면 흠이 될 리 없습니다. 이름께나 알려지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 떼거지로 나와 웃고 떠드는 프로보다는 어렵게 뜬 사람이나 새롭게 조명 받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는 분명 가치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계해야 할 방송 채널은 세뇌 성 홍보 방송을 너무 자주 하는 곳, 뻔뻔할 정도로 편향된 방송, 한 번 뜬 프로라 해서 한도 끝도 없이 우려먹는 행위를 노골적으로 반복하는 방송사입니다. 시청자들은 볼만한 프로를 찾아 헤매는 술래와 같습니다. 브라운관을 보며 숨은 그림을 찾아 헤매는 헌터와 같습니다. “어디 좋은 프로 없을까?” 수준 높은 콘텐츠를 골라보려 채널 돌리기를 반복하는 수고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이런 수고는 누가 보상해 줄지, 이는 개인을 넘어 국가적으로도 대단한 전파낭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각종 순위 장사에 뛰어든 플랫폼사업자들의 폐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뭐든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성상 순위 장사를 하는 사업시장 역시 확장 일로에 있는 것 같습니다. 순위 플랫폼사업자들은 시청자들과 팬심을 이용하여 경쟁을 부추기며 유료 방문을 하도록 자극합니다. 서로 자기가 선호하는 연예인이나 가수에게 ‘투표하라!’는 식의 ARS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는 겁니다. 

올바른 비평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보고 즐겨야 할 방송프로의 수준과 유익한 미디어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건전하고도 올바른 비평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트로트가 대세라며 방송가는 온통 트로트 열풍으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채널 사업자 중에는 트로트를 아예 사골 뼈 우리듯이 우려먹고 또 우려먹으려 작정을 하는 통에 고개가 절로 흔들어집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한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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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이 글은 한 연예인을 중심에 놓고 쓴 칼럼입니다. 그동안 정치 쪽 기사와 칼럼을 주로 써온 기자로서는 다소 뜬금없는 분야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게 된 연예인은 ‘송가인’이라는 트로트가수에 대해서이니까요. 때마침 불붙기 시작한 트로트장르에서 일어나는 관심과 유행, 대중문화현상에 대한 소회까지를 폭넓게 밝혀보고자 합니다.】

삼국지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누어진 지 오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또 반드시 나누어지는 법이다.’ 천하대세를 놓고 다투는 영웅호걸들의 각축전과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해 설파해놓은 명 구절입니다. 하물며 바닷가 백사장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그래서 너무나 흔한 존재일지 모르는 민초들의 희로애락을 구현해낸 대중가요와 대중예술가들의 명멸에 이르러서는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명곡과 명가수

명곡이란, ‘뛰어나게 잘 된 악곡’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가요 사에 불멸의 명곡을 남긴 가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미스트롯’ 우승자로 뽑혀 트로트의 진가를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는 송가인 이후에도 가수는 많고 세상에 나올 노래 또한 부지기수일 테지요. 장담하건대 가수와 곡의 운명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대중가요라는 장르가 민초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점이죠.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깊이 파고들어 그들의 일거 수 일 투족을 정직하게 반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같은 가요의 선(善)기능이야말로 가요가 종속변수가 아닌 대중예술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이유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마침 생각 몇 개가 엮어집니다. 세대를 초월하여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 내로라하는 정상급 가수들이 공통적으로 도전하여 부르고 있는 노래, 중장년층들의 가슴속에 머물며 무한한 애정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노래, 이들은 대부분 명곡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신선하게 등장한 미스트롯 송가인이 ‘트로트 계의 대세’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중장년층들’에게 좀 더 초점을 맞춰볼까 합니다. 중장년층들은 최소 40,50에 6070세대를 넘어 그 윗세대 연령층에까지 맞닿아 있는 연배들로서 결코 간단치 않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중요한 시기를 살아낸 분들로서 멀리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8.15 광복을 맞고 6.25전쟁까지 겪어낸 대한민국의 산증인들입니다. 그 후엔 경제개발을 이루며 산업전사로서의 소임을 다 했고요. 대한민국이 오늘날과 같은 세계 무역량 12위 선진국으로 진입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는 얘기죠. 그 사이 독일 파견 광부는 없었나요? 베트남 전쟁을 치러내며 멀리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이념전쟁의 모순과 국제간 세력균형의 엄중함을 몸소 겪어낸 분들이 아니던가요? 열사의 땅 중동의 건설현장에서 달러를 벌어들인 산업역군들 또한 지금의 중장년층 들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장년을 넘어 그 윗세대 연배들은 그래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변한다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때마다의 풍랑을 수없이 겪으며 살아남은 백전노장들입니다. 바로 이런 배경 때문에라도 이 땅의 중장년층들은 문화 소비주체로서도 상당한 지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필자는 앞에서 트로트장르는 무려 ‘30년 이상 찬밥신세였다.’는 주장을 폈더랬습니다.

즉 트로트에 대해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은, 비슷비슷한 실력의 가수가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노래를 주야장천 불러대며 붙박이 터줏대감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때문이라는 논지를 폈습니다. 이에 비해 대중음악 소비자들은 보다 수준 높은 음악을 고대해왔고, 아이돌가수출신들의 댄스곡처럼 정통가요에도 한과 흥을 세련되게 녹여 리드미컬하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뒤지지 않는 노래를 들려달라는 바람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귀명창이란 말’이 왜 있는데요? 애창곡 한두 곡쯤 없는 사람 없고 좋은 노래를 들을 귀를 안 가진 사람 없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어 ‘목포의 눈물’이나 ‘봄날은 간다’와 같은 불후의 명곡에 도전한 후세대 가수들을 보죠. 내로라하는 정상급 가수들이 옛 명곡을 찾아 부르고 도전하지만 뭔가 늘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2%라고 해두죠. 트로트는 그렇게 향상심 없고, 소양 부족한 음악인들의 무사안일주의와 무관치 않았던 거죠. 이 땅의 귀명창이자 산업역군이었던 중장년층들이 오랫동안 침묵했던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같은 노래라 하더라도 기본기 탄탄하고 보컬 능력을 남다르게 갖춘 사람이 부른 노래는 전달력에서부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필자가 생각하는 명곡이란 사람의 심금을 울리면서도 시대정신이 살아 있고,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공감을 자아내게 하며, 위로와 평화를 선물하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잘 담아 만족감을 주고, 더해서 인생을 관조하게 만들고,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아 삶에 기폭제가 되는 노래라면 가히 명곡이라 할 것입니다. 그 무엇이든 예술작품은 아름다워야겠지요.

흔히 ‘한과 흥은 통한다’고 합니다. 혹자는 ‘한이 눈물이라면 흥은 기쁨의 영역에 속한다.’고 예단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슬퍼서도 울고 너무 기뻐도 우는 존재죠. 춥고 시리기만 하던 겨울의 끝이 곧 봄의 시작이듯, 좋은 노래에는 한과 흥이 맞물려 있기 마련입니다. 다양한 감정을 유발하는 곡일수록 인간을 치유와 회복의 길로 인도하는 힘을 가지기에 명곡은 그렇게 만인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오늘날 내로라하는 정상급 가수들이 ‘불멸의 노래 부르기’를 시도하는 이유죠. 덕분에 애청자들은 원곡과 정상급 가수들이 부른 노래를 비교 감상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양적인 풍요가 곧 질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에 좋은 노래와 좋은 가수에 대한 갈증은 여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명곡이 주는 감동의 힘이 막강할수록 메신저들의 능력치는 그래서 필요조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곡과 명가수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 지점에서 불멸의 명곡, 중장년층들의 팬심, 송가인으로 연결되는 세 가지 핵심 고리가 접점을 이루며 트로트 장르는 대중음악의 중심부로 들어왔다고 진단합니다. 가수 송가인, 부쩍 타 장르 음악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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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5 15:20 2020/07/15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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