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⑦
시베리아여행의 기억-⑦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구한말, 연해주에는 다양한 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 처음엔 농사지을 땅을 찾아서, 나중엔 항일독립운동을 위하여 조선 팔도 경향 각지에서 소문을 듣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농업이민지에서 차츰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 이민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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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 최재형

어느 시대나 선구자는 있게 마련이다. 연해주에 고려인촌을 형성한 이래 이들의 버팀목이 돼준 사람은 최재형 선생이었다. 우리가 흔히 연해주라고 하는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주의 주도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의병을 양성하는데 드는 비용을 최재형 선생이 감당했다고 전해진다. 돈이 없으면 무장투쟁이든 문화투쟁이든 가능치 않은 일이었다. 내 한 몸 의지할 데도 없는 나라 잃은 백성들이었기에 너나없이 빈곤하고 힘든 상황에서 최재형 선생만이  손수 많은 부분을 짊어진 명실상부한 대부였다.

최재형은 함경도 노비 출신이었다. 1860년 심한 기근으로 고향을 떠나 아버지와 함께 연해주로 건너간다. 그러나 형수의 구박에 더해 배고픔은 여전했고 이를 타개하고자 무작정 집을 나와 헤맸다. 낯선 땅에서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포트르 세묘노비치라는 러시아 선장에게 발견된다. 최재형은 선장을 따라 6년간 원양어선을 타고 러시아의 '남해항로'를 누비게 된다. 그러는 동안 선량하고 교양있는 선장의 부인에게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견문을 넓히며 정교회에 입문하고 고등교육도 받는다. 프트르 세묘노비치의 양자가 되고 러시아 국적도 취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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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가 된 최재형

최재형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을 때는 부동항 건설이 한창이었다. 우리가 세계역사에서 배운 대로 러시아는 겨울에도 바다가 얼지 않는 부동항 건설이 지상 과제였던 나라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그들의 희망이었기에 주요 군항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려던 참이었다. 한인 이주자들은 건설노동자로 대거 참여하게 된다.

최재형은 러시아어에 능통했으므로 이일에 수완을 발휘하고 군납으로 큰돈을 벌어 거부가 된다.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게 가능한 위치가 된 것이다. 이러한 선생은 일본에게 눈엣가시가 되고 말았다.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하고 러시아는 일본의 사주를 받아 최재형의 사업에 직간접적인 타격을 입힌다. 이뿐만이 아니라 ‘최재형은 일본스파이’라는 거짓정보를 흘려 체포하게 만든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여 풀려나오긴 했지만 그들의 방해와 핍박은 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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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20년 일본은 러시아 혁명기를 틈타 연해주를 점령한다. 그들은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한인들을 체포하여 학살을 자행한다. 이를 4월 참변이라 부른다. 4월5~7일 선생도 잡혀 참변을 당한다. 선생을 체포한 일본은 정당한 조사나 재판도 없이 이틀 후 살해를 한다. 최재형 선생의 나이 61세 때다.

러시아 국적을 가진 재산가로서 편히 살 수도 있었던 선생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지원한다. 신채호와 이광수가 글을 썼던 <권업신문>의 발행인이 최재형이었다. 안중근이 사격 연습을 했던 장소도 최재형이 마련해주었다. 연해주가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의로운 사업가 최재형의 공이 이처럼 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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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죽음 전후의 연해주 정세

레닌 사후에 30년간 권좌에 있었던 스탈린은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포정치를 일삼았다. 일본에 의해 만주국이 세워지는 것을 보며 연해주 일대에 살고 있는 황인종들을 화물차와 가축운반 차를 개조한 차량에 싣는다. 그러고는 6천키로나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의 황량한 동토에 집중적으로 소개시킨다. 시베리아와 연해주와 사할린 섬 등에 대한 영유권을 공고히 하려는 스탈린의 속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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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語)로 통칭 ‘까레이스키’라고 불리는, 고려인 또는 고려족들은 토굴을 파고서 몸을 뉘였고, 황무지 자갈밭을 개간하여 집단 농장을 꾸렸다. 악착같이 일하고 강한 생명력으로 버틴 결과 소련 내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노동영웅 칭호를 받으며 잘사는 민족으로 뿌리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빼앗긴 들녘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절규하던 이상화의 시어(詩語)처럼 빼앗긴 조국이었기에 참다운 봄도 없었고, 자유도 인권도 없었기에 그들에게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발해의 옛 땅 연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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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조라고 부르던 연해주는 그처럼 우리 민족에겐 슬픔과 회한의 역사가 잔존하는 곳이다. 조선인들이 그곳을 밑도 끝도 없이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부터 극동국립대 학자들에 의해 산성과 평지성터인 ‘스쪼클랴누하성터’와 평지성으로 된 ‘콜라예프카성터’가 발굴되었는데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의 행정구역이 있던 발해 현(縣)터가 발견된다. 이와 같이 연해주는 고구려의 옛 유민들이 살던 곳이라는 얘기다.

158년 전, 자유를 찾아 둥지를 튼 곳이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린 유대인이나 백인들처럼 독립국가든 자치를 인정받는 형태로든 탄탄하게 권리를 인정받거나 입지를 굳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오랫동안 쇄국에 갇히고, 유교사상에 절어 산 탓이었을 거다. 이민족들과 섞여 사는데 필요한 요령과 열린 사고가 부족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핸디캡이 해방정국에선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조선인들 앞에는 또 다른 얼굴의 악마가 얼굴을 디밀고 나타난다. 무국적자라는 낙인의 악마였다. 언덕에 올라가 오지도 않을 귀국선만 무한정 기다리며 국적 취득의 시기를 놓친 탓이다. 주어진 기회를 활용할 감각을 지니지 못했고 그에 대한 인식이나 대비책도 부족했다.  

그래서 말이다. 역사를 주워 담고 챙길 것이냐 흘려보낼 것이냐의 문제는 중요하다. 그렇다. 우리가 찾은 한인유적지들은 1992년 1월 구 소련이 붕괴된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되돌아온 고려인들이 그나마 가다듬고 챙긴 곳이다. ‘까레이스키’들이 뿌리의식을 살려 다시 발돋움 하며 힘을 모은 결과다. 그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 귀환하여 노후를 의탁하고 있다. 돌아갈 고국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최재형, 표트르 세메노비츠 최, 그의 애칭은 페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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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로 태어났기에 국가로부터는 멸시천대만 받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거부가 되었고, 러시아 국적도 가지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안락한 삶이 보장되는 사람이었다. 이 길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서 자금을 조달하고 언론매체를 발행하였으며 한인사회의 미래 꿈나무를 양성하는 교육사업가로 나섰다. 이런 일 때문에 일본의 주적이 되어 제거대상 1순위가 된 인물이다. 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 경제적인 후원자자로서 독립운동과 국민계몽운동에 헌신한 조선 사람이었다. 이런 이유로 1920년 4월 죄명도 없이 체포돼 주살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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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이 죽고 난 후 그의 후손들은 러시아 곳곳으로 흩어지거나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최재형의 큰 아들 최운학은 러시아 내전 중 전사한다. 그의 둘째 아들 최선학은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강제추방 시절 모함을 받아 지식인 숙청으로 역시 죽임을 당한다. 그의 부인 엘레나 페트로브나 역시 다른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시아에서 살게 된다. 1952년 7월13일에 사망한 엘레나 페트로브나, 최재형의 부인은 키르기스탄 공화국 비쉬케크 묘지에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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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는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유패도 국립현충원에 모셨다. 선생이 살던 유럽풍의 벽돌집은 지금 고려인사회와 영사관의 도움으로 리모델링이 한창이다. 그곳은 선생이 일본군에게 체포되기 전까지 1년 정도 살던 집으로서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2014년 정의화 국회의장의 추천으로 고려인 연해주 이주 150주년 기념 모국 방문단 120명이 오게 됐다. 그의 후손들도 한국을 찾았다. 독립유공자 최재형 선생의 외증손자인 쇼루코프 알렉산드르(43)씨가 아들 샤샤 알렉산드르(12)와 함께 했다. 이날 열린 ‘국회의장 초청 만찬회’에서 알렉산드르는 정의화 국회의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 시철 외증조부의 독립운동 지원에 대해 알렉산드르씨는 “자랑스럽다. 잘 하신 일이라 생각한다”며 자랑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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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최재형,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의병을 조직하여 게릴라전을 펼친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는 재무총장으로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책임진 재력가, 1909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배후에서 지원한 최고의 공로자, 한국 식 이름은 최재형, 러시아 식 이름은 표트르 세메노비츠 최, 그의 애칭은 난로와 같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뜻의 페치카! 페치카!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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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9 12:19 2018/09/2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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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리스크 한인 역사와 고려인문화센터-⑥
-시베리아여행의 기억-⑥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이상설 유허지를 뒤로 하고 이어 찾은 곳이 한인문화센터였다. 일명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 기념관’으로서 고려인들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는 후손들의 공간이었다. 빛바랜 사진과 태극기를 비롯한 자료들이 지난 세월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진정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이라면 과연 그에 걸 맞는 지속적인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문화센터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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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수교 다지며 고려인문화센터 설립

러 우스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는 우리가 흔히 연해주라 부르는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주인 우스리스크에 소재한 고려인을 위한 문화센터다. 규모는 약 1천300여 평이다.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연방 고려인 이주 140주년위원회'를 만들고, 양국이 기념관 건립 협약서를 체결하면서 2006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완공하였다. 이로서 140년 간 3차례에 걸친 한인 이주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고려인들이 한.러 양국 간 우호협력의 매개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3차례에 걸친 한인 이주’라 함은 1860년 농가 13가구로 시작한 18만 고려인 수가 연해주 인구의 10% 쯤 되던 시기에 스탈린에 의해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사실과 1990년대 초 본래 살던 연해주로 약 4만 가량의 사람들이 재이주 한 사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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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구(舊)소련이 무너지는 시기였다. 소비에트연방에 소속돼 있던 중앙아시아의 각 나라들은 연방을 탈퇴하며 독립을 선언하는 추세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사회 혼란이 가중되고 정세는 한치 앞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러시아어를 쓰는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원주민들과의 충돌을 겁내며 앞날을 걱정하게 된다.  소련이 해체되는 시기였기에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뜻하지 않게 발생할지도 모르는 분쟁과 생활고의 위험을 경계한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상당수의 고려인들이 다시 연해주로의 귀환을 결정한다.

문화센터의 시설현황과 공간 구성

먼저 1층 이주역사관이다. 그곳엔 항일영웅들을 기리는 코너가 있다. 연해주 지역 고려인들이 꼽은 항일투쟁 영웅 59인인데 이곳엔 안중근(1879∼1910년), 신채호(1880∼1936년), 이동휘(1873∼1935년), 이범진(1852∼1911년), 이상설(1871∼1917년), 박은식(1859∼1925년), 이동녕(1869∼1940년), 홍범도(1869∼1943년) 등이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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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고려인문화센터에는 한국어와 컴퓨터를 배울 수 있는 정보화코너가 있었다. 한국 방문객을 위한 간이숙소에 여러 개의 모임방까지. 특이점은 국제 NGO(비정부기구) 메디피스가 서울대치과병원과 경희대 한방의료원의 도움을 받아 치과와 한방과 등 외래병원을 개원한 사실이다. 2층엔 공연장을 겸한 체육관이 있어 크고 작은 행사가 수시로 열린다. 자연스럽게 고려인뿐 아니라 러시아인에 다른 소수민족들도 즐겨 찾는 소통과 친교의 장이 되고 있다.

현재, 전체 고려인수는 약 50만명으로 추산된다. 우즈베키스탄 18만, 러시아 15만, 카자흐스탄 11만 등 주로 CIS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구 귀국하여 국내에 거주하는 고려인도 6만 5천 명 정도다.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은 4만여 명, 고려인 문화센터가 들어서있는 우스리스크에는 약 2만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옛 우리의 발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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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전부터 이곳으로 온 사람들은 아무런 맥락이나 정서적인 끈 하나 없이 무작정 이주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연해주는 고조선에서 발해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와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결코 낯설지 않은 땅이었다.
 
한인들의 첫 마을은 지신허이고 대표적인 이주 지역은 바닷가 포시에트촌인데 1937년까지 지신허는 항일의 근거지였던 연추(안친혜)와 더불어 대규모마을이 형성된 곳이었다. 먼저 조선후기인 1860년에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농업이주를 시작한 이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소문과 필요성에 의해 집단을 이뤄 신한촌으로 발전했다. 이러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엔 항일운동의 구심점으로 큰 몫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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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삶은 한반도의 농경문화에 기반하고 있다. 자료사진을 보면 혼례모습에서 생활문화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사람의 일생을 묘사한 평생도와 농사일을 묘사한 경작도로도 고려인들이 당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연해주 항일운동의 실재

이범진은 이위종의 아버지다. 이범진은 대한제국의 초대 러시아 상주 공사로서 외교권이 박탈되자 일본의 소환명령을 거부한 채 대한제국의 황제 특사로서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소명을 다한 사람이었다. 아들 이위종을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 사람이기도 하다. 연해주 항일의병 조직결성에 고군분투했으나 일제의 조선 강점이 완료되자 1911년 스스로 목을 맨다. 자결로서 일제에 항거한 그의 유해는 우즈벤스크 묘지 제8구열에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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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군대를 조직했다. 1910년에 의병부대인 13도의군을 조직하고 13도의군의 유인석과 이범윤과 이상설 등은 ‘합병조약무표’ 선언을 위한 ‘성명회’를 조직했다. 이 선언서에는 총 9,624명이 서명을 하여 독립의지를 선포했다.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벌이기 위해 ‘권업회’와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 등을 조직하여 학교 설립과 교원양성과 신문발행을 해나가며 교육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언론분야에서의 활약은 활발했다. 민족과 독립을 기치로 내걸었던 한인 언론의  시초는 해조신문과 대동공보였고, 다음으로 시베리아독립운동의 대부인 최재형 선생이 자금을 댄 <권업신문>의 등장이다. 권업신문은 105인 사건과 의병운동 등 항일 이슈를 전하는데 앞장섰다. 이후 사회주의 계열인 <선봉>도 1923년에 창간하여 <고려일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발행되고 있는 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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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려인들의 독립운동에 놀란 일제는 러시아 혁명기의 혼란을 틈타 연해주를 공격하여 1920년 4월참변을 일으킨다. 연해주의 한인 거주지를 무차별 습격하여 인명살상과 마을 파괴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신한촌에서 죽은 숫자만 300여명이다. 이때 시베리아 항일 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도 살해된다. 우스리스크 자택에서 잡혀가 재판도 없이 총살당한다. 우스리스크에는 당시의 피해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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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의한 연해주 4월참변 이후는 또 어땠는지,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스탈린은 고려인들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한인 지식인과 민족주의자들을 숙청하고 시베리아횡단열차에 태운다. 열차 안은 굶주림과 공포로 점철된 지옥이었다. 그들의 최종 종착역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인근 우쉬토베와 우즈베키스탄의 타슈겐트 남부였는데 동포들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40일 동안이나 짐칸에 갇혀 지냈다.

스탈린은 레닌 사후 30년간 권좌를 유지한다.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인간백정으로 악명을 떨친 사람이었다. 스탈린 시절에 죽은 러시아인들은 2차 대전을 포함해서 2천4백만에서 2천7백만으로 추산된다. 이중 군인전사자만 800만인데 대부분이 젊은 청년들이다.

스탈린은 일본에 의해 만주국의 세워지는 것을 본다. 본래 중국 땅이었던 연해주에 대한 영토 반환 분쟁이 일 것이라 예단한다. 이에 대비하려는 계획으로 연해주에 살고 있던 황인종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다. 이로서 시베리아와 연해주와 사할린 섬 등에 대한 영유권을 공고히 한다. 그 기저에는 ‘일민족일국가(一民族一國家)주의’가 한 몫을 하고 있다.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민족만이 존재한다는 거다. 그런 정책 때문에 타 민족들은 배척과 탄압으로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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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배움의 기회도 없었다, 국가기관 취업과 사회진출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고려인들은 7000명 이어 4800 명 매년 목숨을 잃는다. 학대와 굶주림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질병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일했다. 살기 위해 노동에 몰입하며 농토를 개간하고 그 땅에 볍씨를 심어 대풍작을 이룬다. 3년 만에 자립기반을 일구고 소비에트 농업 생산의 주요 축이 된다.

아리랑과 고려인이라는 명칭

아리랑은 한인들의 가치이면서 삶이요 역사였다. 애잔하고도 잔잔한 그 가락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위로해 주는 그 무엇이 있었다. 19세기 말 러시아 이주와 함께 러시아에 전해졌고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일대로 전파되었다. 전파 경로는 지난 150년간에 걸친 고려인의 가슴시린 삶의 역사와 괘를 같이했다.  슬픔과 고난의 여정에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슬프지만 힘이 되는 치유의 가락이었다. 명절 때 부르고 친구들과 함께 나무하러가면서 부르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리랑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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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이라는 명칭의 유래다. 원래 고려인은 중국의 동포들과 같이 조선인이라고 했지만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르기 결정하였다. 때는 서울올림픽 전후이며, 1988년 6월 전 소(蘇)고려인협회가 결성되면서 부터다. 이후 1993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조선인 대표자 회의에서 정식으로 소련 이주 조선인의 명칭을 ‘고려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아리랑 소리가 들려왔다. 체육관에서는 한국에서 온 ‘대구대학교 연해주 고려인문화센터 해외봉사단’ 학생들이 현지 학생들과 어울리고 있는 모습이 었다. 친교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어린이들과는 기념사진을 찍고 대구대 하계봉사단원들과는 서로 인사를 나눴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한국에서 찾아온 일행을 배웅해줬다.

고려인, 고려족, 까레이스키,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다. ‘역사를 잃은 민족은 혼을 잃은 민족과 같다’고 한다. 조선인, 고려인, 한국인, 까레이스키들은 먼 훗날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더라도 대한민국이라는 뿌리 앞에서 마음은 늘 이심전심일거라 생각한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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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유허지와 마지막 유언-⑤
시베리아여행의 기억-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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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7월6일, 우리 일행의 오전 일정의 대미는 이상설 선생 유허지와 한인문화센터를 거쳐서 ‘최재형 선생의 생가’ 방문이 될 것이다. 우스리스크에는 고려인들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생활문화 흔적과 항일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다. 우리들의 역사이자 거울이기도한 그 현장으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직진하기로 한다.

그 넋을 위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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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선생 유허지’가 성큼 다가왔다.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는 하얀 국화꽃바구니를 준비해 열사 앞에 바쳤다. 선생을 찾은 우리들의 발걸음이 지사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곡이 됐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유허비에 새겨진 글을 원광대의 최재덕 교수가 낭독을 했고, 이어 경건한 마음으로 경청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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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허비는 글자 그대로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 아닌가. 최 교수가 낭독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유허비 말미에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선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중 순국하다.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물에 뿌리다’로 끝을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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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설은 25세 때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27세 때 성균관 교수를 역임할 만큼 총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형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러시아 땅으로 방향을 틀어 그곳에 먼저 정착한 고려인들과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중 1916년 초부터 병들어 눕게 된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상당 기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차도가 없자 기후가 온난한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로 옮겨 요양을 시작한다. 하지만 건강은 지사를 외면하며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이 지사는 결국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기에 이른다. 지사 나이 48세 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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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

지사의 유언은 서릿발 같았다. 눈을 감으며 남긴 지사의 마지막 유언은 그처럼 비장하고 서슬 퍼런 것이었다. 임종을 지킨 이동녕과 백순, 조완구, 이민복 등은 선생의 유언에 따라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화장하여 선생의 유분을 북해 바다에 날렸다. 이때 선생의 문고(文藁)와 유품도 모조리 거두어 함께 불살랐다.

이상설 유허비, 그곳을 서둘러 떠나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다. 정동영 대표의 제안에 따라서 모두 유허비 주변을 천천히 세 바퀴 돌기로 했다. 불교신자들이 탑돌이를 하면서 소원을 빌듯이 우리 일행은 침묵 가운데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로 떠나던 밀사의 심정이 되어 ‘조국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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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처럼 무거운 책임감이 가슴 가득 차올라 “유품도 남기지 말라. 제사도 지내지 말라. 무덤도 만들지 말라.”며 못다 한 독립의 한을 죽어서까지 자신의 빚으로 인식하는 모습이다. 지상에서의 온갖 흔적을 지워버리는 단호함 앞에서 열사에 대한 아쉬움이 더욱 사무치도록 치밀어 오른다.

외교권을 상실한 망국의 한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 이상설 선생, 선생은 가셨지만 오늘도 유허지를 찾는 한국인들에게 그날의 원통함과 ‘조국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글쓴이/박정례.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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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4 17:41 2018/09/2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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