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후 잡설>친노 태동... 누가 그들의 못자리였는가?-⑤

-정동영을 죽여야 우리 차례가 온다

 

[브레이크뉴스 선임기자 박정례= 잡초는 자칫 농사꾼들에게 불청객이다. 해당 식물들이 먹고 자라야 할 자양분을 사정없이 빨아들여 고사시키는 특징 때문이다. 잡초의 이런 속성 때문에 성실한 농부는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잡초를 제때 뽑아낸다.

필자는 줄곧 오늘 날의 야당에 김대중의 민주당은 없다는 전제를 깔아왔다. 친노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세태는 민주당의 구성원들이 무능해서일 것이다. 성실한 농부의 정신을 가진 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권 창출에 헌신했던 측근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고령이었듯 대부분이 은퇴를 하게 된다. 그렇더라도 당에 남은 후배들은 우직한 충성심과 뛰어난 열정이 있어야 했다. 더해서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라도 가졌었더라면 좋았을 터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권교체를 이룬 것에 대해 전 독립기념관 관장이었으며 전기 작가인 김삼웅 작가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역사상 정적(政敵)에 주살(誅殺)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정권교체를 이룬 유일한 인물”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정권재창출까지 한 분이었다.”고 덧붙인다.

대저 운동선수들은 정해진 룰 안에서 승리를 다투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모습에서는 상처와 부상과 땀범벅 된 유니폼을 연상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관중들은 경기를 즐기며 대리만족을 하다가 부담없이 자리를 뜨면 된다. 관전자들은 대게 운동장에서 직접 뛴 선수들처럼 상처나 부상 그리고 슬럼프 등 그 어떤 데미지는 걱정 없는 사람들이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손에 흙 묻히지 않고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끼어든 사람들에겐 그들만의 특성이 있는데, 이런 부류들에게서는 왠지 여유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할 짓 다 하면서 관망하고 있다가 뭔가 될 만하면 뛰어들어서 과실을 따먹으니 상처 입을 일도 없고 투자금 때문에 쪼들리지도 않는다. 팔짱끼고 있다가 기회다 싶으면 잽싸게 뛰어들기에 고생도 덜 하고 기회비용도 들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은 천신만고 끝에 손에 넣은 것을 뒤늦게 발을 걸친 자들은 수월하게 차지하기만 한다. 누구 말마따나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들이 가져간다.’하는 형국이다.

그래서 얘기다. 김대중의 민주당 멸망 사를 언급하려면 필히 호남정치의 몰락과 전북정치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임실,진안,장수,무주에 관련된 부분을 빼놓지 말아야 하고, 그 중에서도 임실을 빼놓을 수 없다. 임실은 선출되는 군수마다 고소고발로 인해 3명이나 수감되고 재보궐 선거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던 곳이다. 때문에 치유불능 상태인 지자체선거의 진면목을 바라볼 수 있는 리트머스시험지라 할 만 하다. 오죽했으면 다큐멘타리로 제작되어 전국에 방송되기까지 했을까.

 

임실선거와 언론보도

억울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이에 관한 언론의 보도는 다수지만, 그중에 중앙일보와 뉴시스 보도를 그대로 옮겨본다. (임실선거, 정세균 결자해지론 대두 2014.05.06)

“일찍이 임실은 군수의 무덤으로 불리고 있다. 군수가 되면 모두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95년 민선 자치 도입 이후 4명 군수가 취임했고 4명 모두 각종 사건과 비리로 임기 중 중도 하차했다. 4명 중도 하차 군수 중 무려 3명이 교도소 신세를 져야 했다. 5번의 공식 군수 선거 이외에 군수 보궐선거만 3번을 치른 전대미문의 악기록을 남긴 곳이 바로 전북 임실이다.

현재도 군수직은 공석이다. 지난해 10월 당시 강완묵 군수가 선거 자금 문제로 3년간 재판을 받아오다 끝내 유죄를 받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지금도 비리 문제로 조사 중이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공천 즉 당선’이란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는 곳. 따라서 이런 사태에 대해 사실 민주당,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측의 책임이 가장 큰 곳이다. 이렇게 되자 새정치민주연합의 대표를 맡았다가 지금은 고문을 맡고 있는 정세균 책임론과 결자해지론이 대두되고 있다.

지난해 낙마한 강완묵 전군수는 정세균 고문이 임실군 지역 국회의원 시절 두 번을 공천해 만든 사람이다. 정 고문의 고등학교(전주 신흥고) 직계 후배이기도 하다. 정 고문은 별다른 사회 경력이 없이 농사만 짓던 고등학교 후배를 군수로 만들기 위해 보좌진을 전면 투입했었다.

당초 2007년에 있었던 군수 보궐선거에 정 고문은 강모 보좌관을 앞세워 강 전군수를 공천했다. 보궐선거에서 이 강 전군수가 낙선했으나 그 다음 2010년 공식 군수 선거에 다시 내세웠다. 이에 앞서 정 고문이 임실 지역구 위원장으로 있을 당시 군수를 지냈던 김진억 전군수도 민주당 소속이었다.

정 고문이 2년 전 서울 종로로 지역구를 옮기기 전까지 임실을 맡았던 시절, 각종 사고가 터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정 고문은 서울로 지역구를 옮기면서 임실을 자신의 대학교(고려대) 후보인 박민수 국회의원에게 물려줬다. 박 의원에게 지역구를 물려주기 위해 정 고문은 친동생을 투입했었다.

일련의 군수 사고가 터지는 상황에서 정 고문은 지역 유권자 및 전북 도민을 상대로 단 한마디의 사과나 유감 표시가 없었다. 새정치민주연합도 마찬가지였다. 공천은 당이 하고 사고 책임은 개인으로 몰았다. 이에 따라 임실군내에서는 군수 사태에 대해 지금이라도 정 고문이 책임 있는 사과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현재 민선6기 선거를 앞두고도 정 고문의 전직 보좌관이 지역 선거에 개입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김대중의 민주당....‘멸당(滅黨)이유’ 찾아내야

2010년도에 실시된 지방선거 당시 정세균은 당대표로서 공천을 총괄했다. 그런 그의 공천이 선기능으로 작용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임실지역은 그토록 쑥대밭이 된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들꽃처럼 만발’해도 시원찮을 우리들의 고향은 그렇게 엉망진창이 된다. 군(郡) 행정을 책임진 사람들이 걸핏하면 재판정에 드나들고 보니 경제는 낙후되고 사람들은 철창으로 직행하는 일이 수시로 벌어진다. 엉뚱한 곳으로 힘이 새나갔다. 군민들은 열등한 행정서비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임실은 낙후된 곳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웅변으로 말해주는 사건들이 아닐 수 없다. 왜 호남만, 왜 전북만, 왜 임실만 영혼 없는 사악한 자들의 착취대상이 되고 권력의 희생양이 돼야 하는지 물어보게 된다. 따져 묻는 사람이 없어서 인가. 호남사람들이 물러터져서인가.

당하더라도 알고나 당하자. 망했더라도 진단이라도 해보자. 소를 잃었더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왜 왜?” 알고 있어야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고, 외양간을 고쳐야 예나 지금이나 농촌의 값비싼 재산인 소를 또다시 잃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2010년도 지방선거는 친노들의 세력 확장과 상당부분 맞물린다. 단언커데 이는 친노들의 기사회생이 됐으며 김대중의 민주당이 희석되는 단초가 됐다고 보아진다. 정동영이 사라질 때 최정상에 선 사람과 정동영이 추락했을 때 대권후보를 차지한 사람이 누구였던가.

 

정동영 추락과 전북의 맹주자리와 2012년도 대선후보

친노.친문들은 김대중의 민주당을 무력화 시키고, 100년 정당을 표방하며 열우당을 창당했지만 3년 9개월 만에 문을 닫는다. 그러니 집도 당도 없던 처지였다. 하지만 민주당을 차지할 발판을 이내 마련한다. 친노들은 그처럼 날개를 단다.

정세균 대표 때 민주당의 민선5기 후보들의 면면이다. 친노 한명숙을 서울시장 후보로, 역시 친노 이광재를 강원지사, 역시 친노 안희정이 충남지사로 공천된다. 경남지사에는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는 김두관이 무소속으로 출마를 한다. 특히 “대구에 가서 뼈를 묻겠다.”던 유시민이 뒤늦게 선거판에 뛰어들어 경기지사 후보가 된다. 민주당에서는 이종걸 의원과 김진표 의원이 겨루고 있었지만 이들을 제치고 유시민이 경기지사 후보가 된다. 민주당 내에서 힘께나 쓰는 사람들이 동조해주지 않았다면 가능했을까 싶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김만수 전 청와대 대변인(부천)을 비롯, 김성환(노원), 김영배(성북), 차성수(금천) 당선자 등 상당수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이 대거 진입했다.

호남에서 자라 호남의 것으로 배불리 먹으며 호남인들 덕분에 정치 거물로 자란 정치인들이 정작 키우고 보살펴야 할 호남인들에게는 무관심하다니... 서로 상생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커나가야 할 동향인들에게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자들이 친노들에게는 못자리가 되고 모판이 돼준 이런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정세균은 당 외곽에 있는 친노의 복당에 대해 “아무리 늦어도 지방선거 전에는 힘을 모아야 할 것이고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고 말했다. 지난 4·29 재보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정동영 의원의 복당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는 것과 상반되는 태도였다(2009년 7월8일 한겨례 21 [768호] 최성진 기자) 라는 기사도 그 중 하나다. 이 내용은 동향인 정동영의 복당에는 당헌당규를 들이대며 짜게 굴던 것 하고는 상반되는 태도로서 친노들에게 우호적인 점이었던 것 하고는 비교거리가 될 수 있겠다.

같은 맥락에서 보도된 기사는 또 있다. ‘친노 우선 통합론’을 우선적으로 밝히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를 겨냥해서 한 민주당 의원은 사석에서 “친노가 들어오면 당에 또 분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통합할 때 친노 세력은 배제해야 한다”(한겨레 2009년 9월 4일 이유주현 기자)

정통적인 김대중 지지자들은 점점 당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김대중의 후예들이 당을 나간 그 자리에 채워진 사람들은 누구인가. ⑥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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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1 17:29 2016/06/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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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세균 대표시절에 일어난 일 -④

-정세균이 남긴 빛과 그림자

 

<총선 후 잡설> 브레이크뉴스 선임기자 박정례= 필자는 앞서 17대대선 기간 중에 참여정부와 친 노무현 세력들이 ‘정동영 돕지 않기’, “내가 정권재창출할 의무가 있냐?”와 같은 대통령의 언행, 형님들을 앞세워 맺은 밀약으로 ‘MB의 BBK주가조작 사기혐의’ 덮어버리기’에 관한 것 들이 ‘정동영 죽이기’의 1라운드였다는 논지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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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고로 원인 없는 결과란 없다. 이같이 당연한 것들을 우리는 상식이라 한다. 상식 중에서도 이해력이나 판단력처럼 사리분별에 속하는 것들은 추상의 영역에 속하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추상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어서 손에 잡거나 육안으로 신속하게 인식할 수 없다손 쳐도 다수가 알고 있는 지식이 곧 상식이다. 정치의 분야에 대해서도 우리는 상식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정세균이 전북정치의 맹주

지난 몇 년 동안 정세균의 위상은 탄탄대로였다고 할 수 있다. 안정적이고도 거칠 것 없는 위치로 봐서다. 하지만 정세균의 출세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는지 새겨 볼 이유는 너무나 많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국회의원으로서 당대표로서 민주당의 중요한 축을 형성해온 사람이었으니 말해 뭣하랴. 혹자는 그가 늘 웃음 띤 얼굴을 하고 있는 데서, 무난하고도 원만한 성정을 지닌 사람으로 유추한다. 타인에 대해서 결코 싫은 소리 한 번 못할 것 같고, 엔간한 일엔 화 한 번 안낼 것 같은 선량한 이미지를 연상한다.

천편일률적인 인상비평이 아닐 수 없다. 수년에 걸쳐서 의도적으로 다듬어 놓은 셀프이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부용과 대인용은 다른 것이다. 세상만사에는 무엇에나 양면이 있는 것이기에 한 번 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뒤에 또 다른 면은 없는지 물음표를 던져보는 것이야말로 이성적인 태도라 본다.

반문해 본다. 정세균은 호남과 호남정치에 무엇이었는가 하고. 오늘 날 호남정치가 변방으로 밀려나고, 김대중 선생이 이룩해 놓은 야당의 상징재산은 거덜이 나버렸잖은가. 김대중을 사랑하는 수많은 개미군단 같은 평당원들이 모여 당의 근간을 이뤄줬던 “그 민주당은 다시 올 수 없는가?” 자문해본다. 하지만 이제는 지쳤다. 다만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나서서 민주당이 왜 이 모양이며 김대중 정신은 왜 희미해졌는지 눈 똑바로 뜨고 찾아보자.

제 9대 지방선거에서다. 정동영의 지역구에 지역맞춤형 공천 룰이 적용된다. 이후 지방의원 후보 5명 전원을 중앙당에서 결정하다.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예라고 한다.

그렇잖아도 모두가 민감한 시기였다. 전라북도 도내 민주당 소속 시장과 군수들 중 30%는 전략공천을 통해서 물갈이할 것이라는 얘기가 떠돌았다. 이 이야기는 “이번 전북의 지방선거에서, 전주 덕진과 완산갑 4.29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정동영-신건 연대’를 도운 사람들에 대해서 징계를 하겠다(2009년6월18 연합뉴스)는 기자회견으로 뒷받침 된다. 정세균은 또 “전북이 민주당 공천 혁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며 “전북이 개혁정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시민공천 배심원제 도입은 당 지도부의 권한을 포기하고 시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주는 것”이라 한다.

참고로 국민참여형, 능력중심형, 지역맞춤형 세 가지가 그것이었는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나 진배없었다.

지역맞춤형 공천, 말은 좋다. 이러저러한 방침으로 정동영 쪽 후보들이 모두 주저앉고, 그 자리에는 중앙당에서 내리꽂은 후보들이 들어앉는다. 이러한 중앙당 공천의 대표적인 수혜자가 김성주다. 김성주는 이후 전주 덕진을 근거지로 도의원으로 시작하여 국회의원까지 활동을 펼치게 된다.

다음으로 공천학살을 당한 곳이 전라북도 임실지역이었다. 도내에서 유일하게 국민참여형 공천 룰이 적용되고, 10번의 여론조사에서 10번 다 1위를 달리고 있던 A의원이 대표적인 희생자가 된다. A는 2선의 도의원인데 의정활동에 있어서도 평판 좋은 젊은이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8대 도의원 임기 4개월을 앞두고 사퇴를 하게 되는데, 제 5기 민선 임실군수에 도전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A의원은 2007년 대선 때 전북 출신 정동영 후보를 도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상상해 보라. 실력 있는 젊은이가 내 고장의 번영과 발전을 이루고 싶어 군수에 도전하는 모습을. A는 전라북도에서 초.중.고는 물론 대학,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모든 학업을 전북에서 이뤄낸다. 당시로 돌아가 임실군수를 뽑기 위해 당내결선을 펼친 정황을 들여다본다.

A는 출마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방에서 선거 모드로 전환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하는 마음으로 주민인사 다니는 일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A에게 사람이 찾아온다. 정세균이 보낸 강모 보좌관이었다. “강00이 지지율 5%잖아 모두 A의원 상대가 못돼. 임실은 시민공천배심제로 할 거라고.” 보좌관은 이어 “믿고 응하면 여론조사로 2배수만 남길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A에게 던져주고 갔다.

 

여론조사, 보좌관 앞세운 작업 끝에 후배 심어

이 와중에 정세균 측이 내세운 강00 후보의 지지율이 조금씩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이를 보며 A측 운동원들은 “정세균 대표의 동생이 여론조사 회사를 한다. 경선 앞두고 무슨 꼼수를 부릴지 모르니 참여하면 안 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런데 A측이 무소속으로 출마할 것 같았는지 강모 보좌관이 또 찾아온다. “A의원이 무조건 이긴다. 딴 생각 말고 참여해라.” A가 행여 딴 생각을 할까봐 명토 박으러 왔는지 다짐에 또 다짐을 하며 떠났다. 헌데 이내 ‘3배수로 뽑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공식적인 결과를 발표하기도 전인 아침 6시였다. 임실 삼거리 시계탑 밑에서 주민인사를 하고 있는 A한테 보좌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A의원 2배수가 아니라 3배수가 됐다.”

“어찌 그러냐?”

“A의원의 지지율은 예상대로 월등히 높았다. 하지만 2,3등의 차이가 0,07% 밖에 안 돼. 둘 사이를 구분하기가 뭣해서 3배수로 결정했다.”는 통보였다.

이를 보면서 A의 운동원들은 시민공천배심제에 참여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반대했다. 하지만 알면서도 빠져들고, 고민을 하면서도 점점 빠져들더라는 것이었다. 이미 선거라는 대열에서 같이 걸음을 내딛게 된 입장이었다. 우리가 그렇지 않나. 민주당은 김대중 선생과 우리가 만든 당이고, 민주당을 지켜야한다는 의식에 투철했다. 호남 사람들은 병이 깊었던 거다. “우리 아니면 민주당을 누가 지키랴?” 하는 순수하고 우직한 병, 나는 이런 외골수 중 한 사람이었다. 내가 내디딘 발을 스스로 거두는 일이 어디 쉽냐?

시민공천배심원은 200명으로 구성한다고 했다. 임실 주민 60명과 서울과 기타 지역 사람들로 중앙당이 모집해온 140명이었다. 전주 와중리에서 모두 모여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소문은 어느새 “강**이 당선된다더라.” 또는 공청회 장소인 임실 군민회관 복도에서나 화장실을 오가면서 “우린 강** 뽑으러 왔다.” 공공연하게 떠돌아다녔다.

 

임실을 군수들의 무덤으로 만든 것은 누구인가

소문대로였다. 결과는 지지율 5% 짜리가 군수후보가 됐다. 하지만 정세균 측 신흥고 후배 강**은 뇌물수수죄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된다. 일곱 차례에 걸친 재판 끝에 대법원에서 벌금 200만 원이 확정돼 군수 직을 상실한다. 기라성 같은 대법관 출신 변호사와 이례적으로 많은 변호사 선임 끝에도 결론은 사법심판이었다.

대한민국의 한 귀퉁이 아주 작은 고장 임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임실주민만의 속사정이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일이 터지다 보니 구정물의 악취는 스스로 진동을 시작했다. 부정과 부패의 완결판으로서 언론과 방송 심지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방영되기에 이른다. 거간의 사정을 한데 뭉뚱그려 놓은 신문기사를 참조하기에 앞서 먼저 같은 민선 5기 후보였던 청와대 행정관 출신의 김 모 후보의 말을 들어본다. (임실뉴스 인터뷰 2013.8.29)

“민주당이 불투명하고 공정하지 못한 경선 방식과 정의롭지 못한 것에 침묵으로 일관하는데 실망해 정치를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며 여론조사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임실은 지역특성상 농사일 때문에라도 여론조사에 관심이 없고, 조작 가능성이 높다”

불쌍하지 않은가. 임실주민들이, 정세균 대표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웃음 띤 얼굴을 보인다. 그 덕분인지 그에 대한 선입견은 얼핏 너그러운 사람으로 인식된다. 정치인들이 남긴 빛과 그림자, 잘 살펴보지 않으면 손해는 고스란히 민초들에게 돌아온다. ⑤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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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1 11:57 2016/05/3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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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후 잡설>아쉬움의 정동영, 영광의 정동영,-③

-부조리의 토양에서 피고 지는 야합과 패거리정치

 

사용자 삽입 이미지

 

[브레이크뉴스 선임기자 박정례]= 지금도 눈에 선하다. 20년 전 일이다. 어느 방송이었든가 딱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TV를 켜는 순간 풀 샷으로 잡은 영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띄는 화면 속의 인물은 이제 막 정계에 얼굴을 내민 신진 정치인 정동영이었다. 필자가 뉴스를 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본 기자의 뇌리에 찍힌 인상은 길고도 강했다. 정동영이라는 인물에게 관심을 갖는 계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날의 최고 사냥꾼은 단연 촬영기자였다. "당신, 잘 나가던 방송인이었지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나의 취재원 일뿐이오." 입장이 뒤바뀐 기자와 취재원의 처지가 어떤 것인가를 그처럼 대비시켜 주는 장면은 일찍이 없었다.

 

취재 대상 일 순위 정치인

대변인, 당의장,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대변인으로서의 첫날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예식에 다름 아니었다. 김대중이라는 노(老) 정객의 편에 서서 이제 막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려하는 고독한 전사, “오늘 우리 '국민회의'에서는 당직 인선을 단행하게 됐습니다. 대변인에는 저 정동영입니다...." 영상기기에서 쏟아지는 굉음소리를 가르며 정동영은 대변인 성명을 낭독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여전히 취재를 다투며 셔터를 내리눌렀다. '타다닥 찰칵찰칵' 

 

기약 없이 계속될 것 같던 길이었다. 그러나 반전의 시간은 의외로 빨리 찾아온다. 시작도 끝도 모를 만년 야당의 생활이 끝났던 것이다. 김대중 총재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른다. 55년 만의 수평적 정권교체였다. 정동영도 그렇고 야당의 다른 의원들도 여당의원으로의 신분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노무현 대통령 시대까지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동안 여당의원으로서 꿀맛 같은 기간을 보낸다. "지내놓고 보니 15cm는 족히 땅위에서 붕 떠서 지낸 세월이었던 것 같다."고 정동영은 술회했다.

 

17대 선거가 찾아왔다. 민주당 의원들은 대부분 새로 창당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 갈아타 있었다. 정동영도 새당에 둥지를 튼다. 특히나 천정배와 신기남과 정동영 트리오는 <천.신.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열우당 창당을 앞장서 선도한다. 이중 정동영은 열우당의 당의장 직함을 갖고서 총선을 지휘하게 된다. 정동영에게 설화(舌禍) 사건이 터진 것은 이 때였다. 젊은이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는 과정에서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당의장 사퇴는 물론 22번으로 올라 있는 비례대표후보 직 마저 내려놓는다.

 

정동영의 정치신조는 책임정치의 구현이었다. 큰 책임만 두 번이다. 2004년에 치룬 17대 총선이 첫 번째이고 2006년 지방선거가 두 번째였다. 선거 참패로 인해 또다시 대표직을 사퇴한다. 열우당은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대책 없는 추락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초지종은 정세균 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

 

정동영에게는 꿈이 있었다. 상향식 공천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자 후임자들은 정동영이 확립하려던 전통을 서둘러 파괴한다. 선거공학적인 계산과 패거리정치라는 맹독이 뿌려지기 시작한 거다. 염치도 체면도 다 팽개친 패권정치, 정동영의 상향식 공천을 뭉개고 담합과 야합의 공천이 대세로 자릴 잡는다. 그 결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쌓아온 야당의 전통은 간 데 없고, 독재에 맞설 때마다 빛을 발하던 야성(野性) 또한 자취를 감춘다.  

 

이는 필자의 워딩이 아니다. 뜻있는 사람들이 야당을 향해서 너 나 없이 내뱉는 쓴 소리다. 소신 없는 정치인들은 거짓과 위선을 장착하고서 매사에 개기고 뭉개고 뒤집으며 60년 동안 일궈온 전통을 일거에 군내 나는 묵은 지 취급을 해버린다. 정도를 걷는 사람은 뒤로 처지고, 분장(扮裝)에 능한 사람은 각광을 받는다. 계속되는 편법과 꼼수는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이내 제 2의 천성으로 굳어졌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관성은 관성을 낳고 특정 집단의 형질을 형성한다. 야합과 패권정치는 결국 그렇게 부조리한 토양에서 피어났다

 

영광의 정동영, 

아쉬움의 정동영

 

정동영의 선전(善戰)은 그런대로 이어진다. 2007년도에는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로 확정되는 시기까지다. 100년 정당을 표방하고 창당한 열우당이 4년 만에 막을 내리고 새롭게 결성된 통합야당에서였다. 하지만 그가 나선 17대 대선은 대패(大敗)로 끝난다.

 

이유는 많았다. 노무현 정권은 집권 내내 순탄치 못한 여정을 이어갔다. 당시의 프레시안, 중앙일보 보도내용 등(2016.12.6)을 보면 “불과 1주일 전 14%에서 ‘노 대통령 국정지지도 5.7%로 최저치 갱신’”이라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 기사는 부제목으로 ‘바닥 모르는 하락추세...임기 말 YS보다 못해’로 참여정부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로 김영삼 대통령이 임기 말 지지율은 8.4%다.

 

한편, 언론에서는 참여정부의 몰락과 지지율을 보며 노 대통령이 '탈당 불사'를 말했다가 '당 사수' 발언을 하는가 하면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연이은 실언을 하는 바람에 ‘불신감을 갖게 되지 않았나?’하는 해석을 내놨다. 지지층으로부터는 외면을 당하고, 국민들과는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타협과 상생은 실종되고, 오기와 자만심만 성하여 정치는 상대편들과 접점을 찾지 못하는 노무현 정권이었다.

 

2007년 대선은 누가 뭐래도 참여정부에 대한 심판과 민심이반 속에서 치러졌다. 그 조짐은 제4회 지방선거 때부터 나타났다. 결과는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울 정도의 참패였다. 당시 열우당은 광역단체장 16개 중 단 한군데만 당선했을 뿐이다. 기초자치단체장도 230명 중 19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쳤다. 이런 모습을 보며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개나 소나 내보내면 다 당선됐을 것이다.”고 열우당을 호기롭게 비아냥거렸다.

 

앞에서 필자는 2004년 총선 때 그랬던 것처럼 2006년도의 지방선거에서도 정동영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을 내려놓았다’고 말했다. 이때를 기해서 당은 급속히 와해 모드로 접어들고 많은 사람들이 ‘열우당을 떠났고, 의원들 또한 탈당러시를 이루느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유권자들은 그처럼 열우당에 냉소적이었다. 정동영은 열우당의 온갖 실정을 등에 지고 싸웠고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선거를 치르고 있었다. 예정된 독배였던 것이다. 내부의 적과 바깥의 적으로부터 동시에 얻어맞는 형국이었다. 죽어라. 죽어라! 안팎이 나서서 정동영을 패대기 쳤다. 전자는 실패한 대통령에 대한 콤플렉스와 내부 모순을 정동영이 뒤집어쓰고 죽기를 바라고, 후자는 노무현 정부를 심판하기 위해 단호하게 돌아선 유권자들이었다.

 

후보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 대를 잠깐 보자. 애시 당초 친노들은 대통합민주신당에 맹비난을 퍼붓던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열우당에 그대로 남아 당을 계속 꾸려나간다 한들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으련만 열우당 세력들은 이내 신당에 얼굴을 디민다. 앉아서 폭삭 망하느니 큰판에 뛰어들어 실리라도 챙길 작정이었던 모양이었다.

 

열우당 잔류 세력들은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몰려오고, 이해찬과 한명숙과 유시민이 곧 바로 대선 판에 뛰어든다. 하지만 며칠 못가서 한명숙과 유시민은 후보를 사퇴한다. 사퇴의 변이란 “이해찬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언론에서는 초장부터 이들의 중도 사퇴를 예견하고 있어서인지 “완주를 할 거냐?”고 묻는 기사가 보도되고 있었던 터다.

 

2007년 대선은 이와 같이 정동영의 패배로 끝났다. 5.7% 밖에 안 되는 임기 말 노무현의 지지율이 말해주듯이 참여정부의 온갖 실정과 실책 속에서 치룬 선거였다. 기가 막힌 사실은, 현직 대통령의 형님과 차기 대통령이 된 이명박의 형님 간에 맺은 밀약(위키리크스 폭로문건)이다. 이로 인해서 이명박의 BBK 사기사건과 온갖 비리혐의가 조사도 못해보고 덮인 사실(2007년 12월 12일 수요일자 시사인의 “노무현과 이명박 통했을까?” 등 수많은 기사 참조)과 현직 대통령과 친노들이 합세를 해서 이명박의 승리를 위해 헌신을 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선 기간 중에 이들이 벌인 ‘정동영 돕지 않기’, “내가 정권재창출할 의무가 있냐?”는 대통령의 언행, 형님들 간의 밀약으로 ‘BBK 주가조작 혐의 덮어버리기’ 등은 ‘정동영 죽이기’의 1라운드에 불과했다. 이후 정동영에게는 수많은 불운이 이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아쉬움을 토로하게 만든다. ④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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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8 14:38 2016/05/2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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