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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무거움과 한없는 가벼움 사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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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무거움과 한없는 가벼움 사이에서

 

  몸.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까지도 여전히 남아 ‘나’라는 녀석을 형태짓는 육체. 우리에게 몸은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짐이자, 쾌락과 고통, 즐거움과 슬픔을 전해주는 평생의 동반자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역사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몸을 더 사랑한 듯 하다. 어릴 적부터 들어오던 ‘이성을 잃지 말라’는 격언이나 ‘육신의 노예’라는 수사 등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문화에서 몸은 언제나 정신과 이상의 숭고한 가치 앞에서 2등자리를 면치 못하였다. 사실 이러한 ‘몸’에 대한 저평가와 ‘정신’의 우위는 우리 사회뿐 아니라 서구 문명 전체를, 그리고 적어도 그 문명의 장악력 안에 포섭된 대부분의 사회를 관통하는 공통된 기반이다. 고대의 헬라스 문명을 꽃피웠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중세 신학의 최고권위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근대 철학의 시조라고 평가되는 테카르트에 이르기까지 몸과 정신의 이분법과 육체에 대한 적대감은 실로 뿌리 깊은 것이다. 영원불변하다고 생각되어진 진리와 이성의 빛 앞에서 시시각각 통제할 수 없이 변화하는 몸의 욕망과 나이를 먹으며 늙어가는 몸은 더럽고 비천하고 극복해야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정신과 몸의 이분법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또 하나의 이분법으로 이어진다. 많은 이들이 우리 안에서 몸을 밀어내려고 할 때, 몸을 통제하고 몸을 지배하려고 할 대 그것의 인격화된 담지자는 여성이었다. 아기(육체)를 낳는 몸(육체)로서의 여성은 말 그대로 단지 하나의 몸 그자체일 뿐이었고, 이성의 능력이 없다고 간주되었던(혹은 남성들의 이성을 보증하기 위해 그렇게 간주되어야만 했던) 여성은 그렇기 때문에 노예와 다를 바 없는 2등시민이었다. 민주주이ㅡ의 상징인 그리스 아테네에서도 노예와 외국인 그리고 ‘여성’에게는 시민권이 없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신화나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매혹적인(그러나 파괴적인 그러므로 결코 그것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여성이나 악녀들은 역시 그러한 재현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여성은 그저 ‘여성인 몸’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존재로 평가되었다. “이 여자가 나를 유혹했다!”라는 성폭력 가해자들의 전형적인 변명들과 그것을 꽤나 진지하게 공감하는 현실은 정확하게 우리 문화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단면 중에 하나이다.

 

  오늘날 그러한 재현들은 조금은 달라져 보인다. 여성과 남성, 몸과 정신의 이분법은 여전히도 굳건하지만 몸에 대한 무관심과 홀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몸에 대한 찬사와 관심이 쏟아진다. ‘당신의 몸을 가꾸라!’ 이것은 오늘날 전해지는 신종정언명령이다. 그렇지만 과연 오늘날 몸은 제 위치를 온당히 차지한 것일까? 그래서 과연 우리의 몸은 지금 편안한가? 하루가 다르게 등장하는 화장품 브랜드의 새로운 라인들, 아찔하게 높아진 힐, 55사이즈 이상으로는 나오지도 않는 옷, 몇 년 사이에 여자들의 감춰야할 부끄러움이 되어버린 몸 구석구석의 털들, 조각조각 분해되어 부위별로 관리되는 체형관리소오 성형수술대 위의 몸들. 오늘날 우리의 몸은 어느 한 부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그야말로 전쟁터이다. 그렇다면 몸을 찬양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몸을 통제하고 극복하려는 정신의 방법들이 변한 것은 아닐까? 컴퓨터처럼 정확하게 꽉 짜인 몸 관리 시스템 앞에서, 오늘날 여성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편하게 구박받는 슬픈 몸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런 구속에서 벗어나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통제에서 벗어난 해방된 자유로운 몸! 이 얼마나 매력적인 말인가! 자신의 신체 사이즈에 상관없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개개인들의 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의 몸을 존중해주는 세상. 화장과 패션이 진정한 내 몸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세상!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무엇을 망설이는가? 두꺼운 화장과 힐을 훌훌 털어버리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순진한 생각은 2천년 넘게 지속되어오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의 근본을 구성하는 역사와 문화를 가볍게 뛰어넘으라는 말 그대로 순진한 생각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단지 여성 개인의 의지로 말이다. 그 말이 은폐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싫으면 벗어 던져라!”,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불평하지 말아라!”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첫째로 그것은 결코 혼자서 멋대로 자유롭겠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 그런 사회와 제도 속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고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다. 무인도에 가서 살지 않는 한 말이다. 실제로 성형수술을 하고, 몸매 관리를 받고, 다이어트를 하고, 화장을 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속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들은 그것이 약속하는 것이 무언지, 우리 사회와 제도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수고를 마다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렇게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문화와 제도, 그리고 그것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살 수밖에 없는 여성-‘나의 자아’의 입장에서 몸과 외모에 대한 통제는 단순하게 폭력과 강제의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성의 강요와 여성의 복종이라는 단순한 구도도 아니며 오히려 남성의 역사와 여성의 욕망이 뒤엉켜 혼합되어 있는 성격에 가깝다. 실제로 현실의 여성 중엔 예쁜 옷을 입는 것을 즐기고, 즐겁게 화장을 하고, 다이어트로 자존감을 되찾은 여성들도 많다. 이런 성격을 깡그리 무시한 채 ‘외모에 투자하는 여성’은 단지 ‘바보 같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는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면 왜 화장을 하느냐?’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의 복잡성을 보지 못한 역시나 속편한 이분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짜로 진짜로 뭘 어쩌자는 말인가? 글쎄다. 무책임할 수 있겠지만 가능한 한 가지 답은 ‘답을 내려줄 수 없다’는 답이다.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의 저자 수잔보르도는 “페미니즘 이론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페미니즘은 “체중을 줄일 것인가 말 것인가, 화장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주름살을 펼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페미니스트 비평의 우선적인 목표는 “문화의 힘과 복잡성, 그 체계적 성격, 그리고 상호 연결된 그물망 같은 문화의 작용을 이해시키고 더 잘 의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할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의 모든 결과들을 긍정하고자 함은 아님을 강조하자. 가부장제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과,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를 존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현대의 광기어린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활용하며 상부상조하는 방식으로 후자를 택했다. 모든 선택과 모든 결과, 결국 이 세상 만물을 긍정하는 ‘해탈’의 자세로 모든 것을 팔아치우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결코 의심되지 않는다. 성형을 하는 사람, 지방 제거 수술을 받는 사람, 다이어트를 위해 장을 잘라내는 사람 모두는 자기 몸을 사랑하는 주체적인 사회인이 되어 버린다. 흑인의 갈색 눈 렌즈를 택할 수도 있고, 백인의 파란 눈 렌즈를 택할 수도 있다는 ‘중립적’인 광고에서, 도한 이제는 남자도 꾸민다는 메트로섹슈얼 붐에서 정말 이제는 모든 차이들이 평등한 차이가 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은폐하는 것은 샤라포바와 비너스의 사뭇 다른 인기의 원인이고, 얼마 전 극심한 다이어트 끝에 사망한 중국 소녀의 생명이다. 이러한 중립화된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페미니즘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할 것이다. 다이어트 산업의 규모와 상술, 그리고 그것이 여성을 통제하는 역사와 제도를 알고 다이어트와 ‘협상’하여 선택을 취하는 것과, 성형수술을 찬양하며 모든 아름다움을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이번 문화제가 여러분에게 바로 그러한 ‘복잡함’을 생각해보고 내 안에서의 ‘모호함’을 인정하면서 어떻게든 조금은 더 나은 ‘협상’을 선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은 할 일이 없는 것도, 비관적인 체념도 아니다. 정해진 답이 없는 만큼 우리는 더 많은 다름을 상상할 수 있고 그만큼 더 다양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 ‘2005 사회대 페미니즘 문화제‘ 자료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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