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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가학증

즉, 프로이트에 있어서도 일상적 가학증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타자의 자유를 제거하여 타자를 사물화하려는 충동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인한다. 그러나 타자의 자유란 항상 가학증에 의해 제거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타자의 자유가 항상 흥분의 양을 증가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프로이트의 방어 개념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방어란 자아에 통합되어 있는 표상들 또는 관념들과 일치하지 않는 표상 또는 관념이 도래할 때 억압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이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표상 또는 관념은 제거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이러한 표상 또는 관념이 흥분의 양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생각과 어긋나는 말들을 들으면 화를 내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상 프로이트의 방어 개념은 주로 내부에서 도래하는 표상에 그 강조점을 두는 것이지만, 우리는 프로이트의 방어 개념에 준거하여 외부에서 도래하는 표상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의식의 정합성을 교란하는 표상이 타자에 의해 제시될 때 흥분의 양이 상승되어 항상성이 교란된다. 이때 쾌락원리를 실행하기 위하여 그 표상을 파괴시키리려는 작업이 행해진다. 이 작업이 바로 일상적 가학증이다. 그리고 의식의 정합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헤겔이 이미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은 욕망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지적했듯이, 나르시시즘에 입각한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동일자의 논리를 타자에게 적용시키려는 것이고 이에 대해 타자가 저항할 때 가학증이 발동되는 것이다.

 

- 가학증,타자성,자유/이종영/백의

 

한때 유행했던 일상적 파시즘은 일상적 가학증에 가깝다. [충동과 충동의 운명]의 서두에서 프로이트는 충동의 문제를 다루면서 가장 중요한 생물학적 전제 중의 하나는 신경체계의 기능이 흥분을 멀리하며 가능한 한 흥분을 가장 낮은 수준에까지 끌어내린다고 이 책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물론 나는 인간이 강렬한 자극을 원한다는 점에서 미심쩍기는 하지만 인용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결국 병적인 가학증이 아닌 우리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가학증은 본인의 마음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참으로 슬프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이 성인이 되면 내면이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를 이루게 되고 이 체계내부에서는 특정한 표상이 특정한 정동과 결합한다는 점이다. 보통 우리의 내면에서는 어린아이의 표상은 귀엽다는 정동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는 좌파라는 표상이 정의롭다는 정동과 결합하고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는 빨갱이라는 정동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나의 사회가 다른 사회로 바뀐다는 것은 그 사회구성원들의 내면에서 이러한 표상-정동 결합이 바뀐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 심성이 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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