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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0/22
    청올님 제발 나 좀 살려줘 T.T
  2. 2009/10/21
    악수님과 쩝님께(1)
  3. 2009/10/19
    두 개의 폭력(1)
  4. 2009/10/18
    독서(3)
  5. 2009/10/17
    고대 이집트의 노동
  6. 2009/10/17
    공장
  7. 2009/10/16
    힘든 하루
  8. 2009/10/15
    다문화사회, 그 서글픔(4)
  9. 2009/10/14
    나의 망상
  10. 2009/10/11
    내가 걷는 길

청올님 제발 나 좀 살려줘 T.T

청올님, 논쟁이 길어지는군요. 님도 답답하시겠지만 저도 답답합니다. 청올님은 계속 집회인과 정부의 논리의 유사성을 주장하고 계시고 저는 집회인의 폭력과 정부의 폭력을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논쟁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올 연말까지 이 논쟁이 계속되지 않을까 두렵네요. T.T

 

"용산참사에서 지배계급이라 하신 정부가 모든 정당화한 수단을 갖추고 정당화하고 있다고 하셨지만 그 정당화가 잘못되었다고, 부당하다고,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물 론 그 싸움이 당장 그들이 가진 수단에 비해 실질적인 힘이 미약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세상에서 (그런 수단들을) 못 가진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고민하고 같이 나누면서 서로 영향을 받고 (생각이 그런 지배계급에 지배받던 사람들도 성찰과 대화를 통해 생각이 바뀌기도 하고) 비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것이 운동이 아닙니까? "

저는 정부가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할 모든 수단을 갖고 있고, 집회인들에게는 그럴 수단이 없다는 그 차이를 지적했을 뿐입니다. 

"집회하던 사람들이 노숙인에게 그렇게 하고 끝까지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도 '저자가 먼저 폭력을 저질렀고 자기는 어쩔 수 없었다' '집회의 효율성을 위해서' 등등 정당화 논리가 정부에서 하는 것을 흉내낸다 싶을 만큼 닮았다는 점에서, 저는 같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청올님은 정부와 집회인들이 똑같이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점만이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폭력은 관계속에서 사고해야 하고, 단순히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비판할 수 없음을 지적했습니다. 더욱이 정부는 자신들이 폭력을 저질렀으며, 그것이 어쩔 수 없었다고 정당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철거민들이 폭력을 저질렀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글 쓴 저는 실제로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를 가지고 그들이 '정부만큼 유리하다'고 한 적은 없으며 심지어 '정부보다 더 폭력적'이라고 한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그들이 더 폭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피지배계급이 늘 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말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어서 덧붙임)."

제가 청올님이 그런 주장을 했다고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계급지배를 무시하고 폭력을 논의하게 되면 피지배계급이 더 폭력적이 된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니까 폭력을 관계속에서(누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저지르는가) 사고하자는 얘기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인터넷에서 온갖 비판을 당하'고 있다는 표현은 무슨 말씀이지요? 블로그에서의 이 논쟁 정도가 '그들'을 부당하게/지나치게 몰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지요. 과도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올님이 글을 올리고 나서 그들은 비판을 당했습니다. 덧글을 읽어보시면 아시잖아요. 저는 그 사실을 지적한 것 뿐이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판을 받아야합니다. 노숙인에 대한 폭력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폭력을 정부의 폭력과 비교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저는 주장했습니다.

 

"역시 신문과 뉴스라는 영향력을 가진 정부가 나발대는 것만큼 '그들'이 자기 정당화를 위해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그 폭력과 정당화의 논리마저 희석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들이 그랬다'는 고발보다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저지르는 폭력을 돌아볼 계기가 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거고요. "

집회인들에게 정부처럼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폭력이나 정당화가 희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저는 계속 이 것을 지적했지 그들을 두둔하지 않았습니다.

"폭력이 당하는 입장에서 같다는 말도 시위 진압에 동원된 경찰도 맞으면 아프다는 것과 바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홀로 떨어진 경찰이 사람들에게 증오/화풀이로 몰매를 맞는 상황이 아니라면요(이런 경우 그 노숙인을 팽개친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저는 생각하니). 저는 오히려 맞은 노숙인 입장에서 때린 자가 누구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인데(저는 차라리 공권력으로부터 맞은 것보다 그 공권력을 비판하겠다고 집회 하던 사람으로부터 그렇게 당한 것이 더 배신감과 치욕스러움이 크면 컸지 덜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집회 하던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지배 계급'의 막돼먹음은 없을 거란 기대가 있었을지 모르니까요), '그렇게 얘기하면 경찰도 맞으면 똑같이 아픈데' 하는 말이야말로 중간에 삭제된 부분이 크다고 봅니다. "

폭력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똑같다는 말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분이 하신 것입니다. 그 분이 이 폭력은 국가폭력이고 저 폭력은 사적폭력이고 구분할 의미가 없다고 하시면서 폭력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다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청올님은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걸 좀 헤아려주시면서 글을 좀 써주세요. T.T 당연히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피켓만들어서 집회하신는 분들이 폭력경찰들처럼 약자를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고 저도 당근 생각해요. T.T

"블로그의 글을 보고 아무도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았지만 용산 참사를 일으킨 정부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사람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이런 얘긴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아무도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한 사람이 없다는 것만이 중요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신문과 뉴스가 떠들 만큼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아니기 때문에 정당화하는 사람도 적은 것이기도 하고요. 가령 용산 문제에서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과 같은 입장들이 블로그에 있다면 정당화도 충분히 있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보통 일반인들은 교통신호만 위반해도 벌금뭅니다. 옆집에서 남자가 처자식 두들겨 패면 저런 죽일 놈 하면서 욕합니다. 사람들도 뭐가 옳고 그른지 다 알아요. 집회하러 나온 사람들이 집회 좀 방해했다고 노숙인을 들고가서 내팽개치면 다 욕해요. 하지만 철거민들은 용역한테 온갖 행패 다 당해도 나 몰라라 하고 노동자들은 구사대한테 온갖 폭력 다 당해도 관심도 안 가지고 정부와 자본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저는 그 점을 지적한 거에요. T.T

"'그들'은 자신이 가진 자원을 가지고 폭력을 저질렀고 자신들이 가진 자원을 동원하여 정당화를 했어요. 그 자원들이 정부라는 지배계급이 가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지 모르지만, 폭력의 피해자인 노숙인 입장에서는 그들과 노숙인 사이에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의 차이보다 '못하다''덜하다''적다'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만큼 엄연한 차별과 폭력과 정당화가 있었습니다. 계급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엇이고 폭력 중에는 좀 더한 폭력도 있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이 그 당장 당한 폭력 앞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기존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분리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것이 폭력의 피해자들(좀 덜한 계급을 가진 자로부터 폭력을 당한 자와 지배계급으로부터의 폭력을 당한 자) 간에도 필연적으로 계급의 차이를 낳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

청올님과 다른 모든 분들이 무어라 말씀하시든 저는, 지배-피지배 관계를 떠난 폭력논의를 거부합니다. 저는 그냥 차라리 욕먹으면서 폭력주의자가 되겠습니다.

"공권력의 비판이 당연히 추가로, 구조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부분까지 삭제하면서 비교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왜 자꾸 비교의 여집합 부분의 이야기로 공집합 부분을 희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님과 저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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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님과 쩝님께

반차별팀님의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지 못하는 차별 _청올] 에 관련된 글.

 

윗글에 내가 댓글을 달았고 악수님과 쩝님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먼저 악수님은 부르주아 남성들의 폭력과 하층계급 남성들의 폭력 중 누구의 폭력이 더 폭력적이냐고 비교할 필요가 있냐고 질문하셨다. 폭력은 지배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부과하고 싶으면서, 정작 자신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싶은 모순된 존재다. 그래서 동등한 두 인간이 힘겨루기를 할 때 패자는 힘의 우위에서 약자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부르주아들이 우리처럼 일상에서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화폐나 지위같은 지배의 자원이 있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타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다. 하층계급 남성은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성폭력을 저질러서라도 여성의 성을 향유하려하지만, 부르주아 남성은 돈벼락을 내려주고, 부르주아 남성의 소유인 여성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모든, 거의 모든 여성은 그를 욕망한다. 그렇다면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타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인 화폐, 지위 등등이 없는 사람과 지배의 자원이 있어서 일상적으로 폭력을 별로 행사할 필요가 없는 부르주아를 비교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 이런 식으로 비교를 하면 지배를 당하는 피지배계급이 더 폭력적이라는 이상한 결론이 도출된다. 나는 이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악수님은 지배와 통제권력이 자본가에게만 있지 않음을,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이주민보다는 선주민에게, 장애인보다는 비장애인에게, 청소년보다는 성인에게, 동성애자보다는 이성애자에게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통제권력이 더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물론 악수님이 비교한 관계들은 결코 동등한 관계들이 아니다. 그리고 나도 노숙인에 대한 차별, 노숙인이기 때문에 함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이 그런 폭력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모두 지배를 욕망하는 지배의 주체들이다. 나는 남성이다/여성이 아니다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타인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 있고 싶어한다. 노숙인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한 존재이기 때문에 질질 끌고가서 어디다 내팽개치고 집회를 방해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나도 물론 우리 내부에 차별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것을 어쩔 수 없다고 방어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청올님이 집회인들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했을 때 아무도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부가 특공대를 투입해서 철거민을 살해한 행동은 정당화되었다. 살인이라고 인정되지도 않았다. 그들 스스로 죽은거였다. 왜냐면 지배계급이 저지른 일은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옳기 때문에 옳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옳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모든 수단을 갖추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다. 하지만 집회인들이 노숙인들에게 저지른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들은 지배계급이 아니므로.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 것만 빼고 그들이 한 행동과 정부가 한 행동은 같지 않다.

 

쩝님은 그 근원이 어디든간에 폭력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폭력을 계급지배와 분리해서 논의할 수 없다는 내 얘기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하간의 폭력도 사용하지 말아야한다. 평택 쌍용차 공장에 특공대를 투입하건, 시위 도중 전경과 대치중이건 우리는 평화적으로만 행동해야한다. 폭력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다 똑같기 때문이다. 경찰도 맞으면 아프다. 쩝님은 이 논의에서 이 폭력은 국가폭력이고 저 폭력은 사적폭력이고 이런 식의 구분을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했는데 집회인들이 노숙인을 들고 가서 어디다 내팽개치고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 뒤 인터넷 게시판에서 온갖 비판을 당하는 것과 정부가 특공대를 투입해서 사람을 다섯명이나 죽인 뒤 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신문과 뉴스를 통해 나발대는 것은 완전 다른 것이다.

 

두 분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어제 행사가 있어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너무 횡설수설 썼더라도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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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폭력

여기 두 개의 폭력이 있다.

집회인 -> 노숙인 ("집회를 하는데 귀찮고 깜짝 놀라게 한 방해꾼에 대한 정당한 반응"),

정부 -> 철거민 ("순순히 나가지 않은 불온한 자들의 도심 테러에 대한 정당한 진압")

청올님은 "그저 '나와는 다른 만만한 사람'으로 보고 함부로 했다는 점에서", 이 차이를 모르겠다고 하신다.

 

너무 압축적으로 설명했으니 여기에서 청올님의 덧글을 읽으시면 된다.

 

청올님의 순수한 뜻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논리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거의 모든 폭력은 공권력과 같아진다. 원래 폭력이란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관철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리력이다. 교사가 학생을 구타할 때, 남편이 아내를 구타할 때, 부모가 자식을 구타할 때 기타등등 거의 대부분 폭력은 자신보다 힘이 약한 대상에게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행사하는 것이다. 나는 폭력을 찬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력일반이 공권력과 같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폭력은 항상 관계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고, 정부가 행사하는 폭력은 단순히 그저 나와는 다른 만만한 사람에게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에게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권력은 계급지배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공권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계급지배는 현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임금을 받고 일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만일 친구에게 만원 줄께 심부름 좀 갖다와 하면 친구는 굉장히 굴욕감을 느낀다. 누군가를 위해 돈을 받고 일한다는 그 자체가 굉장히 굴욕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용이 되면 기뻐한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계급지배가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지배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폭력은 행사될 필요가 없다. 아무도 저항하지 않으므로. 그럼 언제 폭력은 행사되는가. 생존권을 빼앗겨서 목숨을 내걸고 저항할 때 공권력이 동원된다. 그 공권력은 그 사람의 생명까지도 빼앗을 수 있는 폭력이고 실제로 죽였다. 지배계급의 폭력이 동원되는 경우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이런 종류의 폭력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보다 더 만만한 누군가를 굴복시키기 위해 저지르는 폭력이 같은 것일까. 그 폭력이 추악하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폭력과 같다고 하는 것이 온당한 것일까. 정운찬의 "철거민 사망원인은 화염병" 발언이 훨씬 더 폭력적이라고 한 것은 살인을 사후적으로 승인했기 때문이며 유족들의 가슴에 또 한 번 대못질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노숙인을 어디다 내팽개치고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은 것과 결코 같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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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1970년대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 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 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한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소년의 눈물/서경식 지음. 돌베개

 

요즘 열심히 책을 사 모으고 있다. 전에는 퇴근 후에 서점에 가서 책 구경을 하다가 책을 사곤 했었는데 요샌 책을 거의 인터넷으로 산다. 그러다보니 책 소개나 리뷰를 보고 책을 사게 된다. 한 번 살 때는 십만원어치 정도 사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거의 읽지 않고 있다. 그래도 직장 그만두면 책 읽을 시간이 있겠지.. 하고 있다. 요즘 조금씩 읽고 있는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란 책을 읽다보니 당시 전공투H라는 이름으로 미시마와 격론을 벌였던 고사카 슈헤이의 방은 왼쪽 한 면이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책이 꽉 차 있었다고 한다. 논쟁이 끝난 뒤 미시마는 방패의 모임(일본 우익모임)에 가서 동경대 전공투는 아주 머리가 좋아 하고 기분좋게 말했다고 한다. 나도 요즘 들어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구입한 책을 읽다보면 느끼는건데 거의 8할이 꽝이라는 사실이다. 돈이 아깝다. 샀으니까 어쨌든 읽긴 읽는데 어차피 내년에는 버릴 책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런 책들의 대부분은 쉽게 읽힌다는 사실이다. 정독할 필요도 별로 없고 책을 읽고 나서 어.. 이 책은 한번 더 읽어봐야겠네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고대로 책장에 꽂는다. 돌이켜보면 내 생애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책은 정말 몇 권 안되는것 같다. 그리고 그런 책들을 읽을 때 상당히 고통스럽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깨지기 때문이다. 하나도 슬프지 않은데도 슬플 때가 있다. 두서없이 이 책 저 책 손에 잡히는대로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게 갑자기 허망해졌다. 예전에 아는 사람과 같이 술을 마시다가 그 친구가 난 리버럴이야 하면서 웃었다. 나는 그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도 안하는 한심한 리버럴들.. 이라고 욕하고싶지만 나부터 공부를 좀 해야겠다.

 

전엔 책보다는 영화를 보면서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영화감독 중에는 일생 고통이니 구원이니 하는 문제에 천착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삶의 진실을 잘 포착하고 있었다. 요즘은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평일엔 거의 책을 읽지 않고 주말에만 책을 읽고 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문제에서 시작하게된다. 그건 가족의 문제일 수도 있고, 노동의 문제일 수도 있고, 폭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여성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항상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세상과 싸워야한다는것. 그것이 점점 중요해지는것 같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입장이 옳은지 항상 확인하는 작업, 그것이 독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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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노동

 

그뿐 아니라, 우리는 바로 이 이집트문명을 고찰할 때, 선사시대의 암흑상태로부터 솟아나오자마자 지극히 짧은 시기 동안 혜성과도 같이 상승하여 인류 최초의 대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던, 그리하여 그로부터 3천 년 이상에 걸쳐 지속하게 되었던 고도의 문화를 눈앞에 대하게 된다. 이 대국가는 성립된 후 처음 1,300년 동안에는 외부로부터 거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오로지 독자적인 상태로 존립하고 있었으며, 그 다음에 이어진 1,300년 동안에도 역시 -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되기 전까지는 - 대단히 자족적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외부로부터 오는 온갖 것을 다 통합하여 <이집트적인 것>으로 변형시키고 있을 정도였다.

 

이집트에 대해서는 언제나 이와 같이 편협할 뿐 아니라 실상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먼 고정관념이 적용되어 왔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고정관념이 너무나도 쉽사리 적용되는 바람에 사람들은 피라미드를 마주 대하고서는 어김 없이, 아주 훌륭한 <노예소유자들의 국가>를 발견해 냈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실상, 이미 고대의 몇몇 저술가들에 의해 맨 처음으로 그 결정적인 자료가 제공되었으며 그 후 온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던 설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초기의 인류역사가 지니고 있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실례로서 다름 아닌 이집트가 선정되었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그 타당성을 부여해 주는 근거가 명백히 존재한다. 그 근거란 것은 곧, 역사적인 총체적 발전과정의 내부에서 대규모의 협동노동이, 그리고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현상인 분업이 최초로 실시되었던 한 단계가 바로 이 이집트에서 도달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 같은 협동노동은 공동으로 작업을 실시해야만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단일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었는데, 이처럼 벌써부터 엄청나게 큰 규모로 추진되고 있던 이 협동노동이야말로, 점점 더 명백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여러 계급 및 계층의 형성으로 연결되었을 뿐 아니라, 개별적인 노동영역 및 직종의 광범위한 분화라는 현상까지 아울러 초래하였으며, 이에 따라 대단히 복합적인 전체사회를 성립시키게 되었던 요인이다.

 

그런 데다가, 문서들은 대부분 왕의 행동반경 안에서 작성된 것 내지 고위관리들의 수중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말하자면 지배계층의 대표자들은 거의 독점적이다시피 발언권을 얻고 있음에 반해, 노동하는 사람들 자신은 <문맹자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사정까지 겹쳐 곤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이집트에서 진행되는 온갖 생활의 전제조건을 형성하는 자연적 여건에 대해 그리스인 헤로도토스보다 더 적절한 문귀로 특징을 지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을 두루 여행하고 다녔으며, 기원전 450년 경에는 이집트를 방문한 적도 있었던 이 사람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리스인 청중들 앞에서 바로 이 고전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럴 만도 하겠거니와 언제나 되풀이하여 인용되곤 하는 귀절을 표명하였다. 곧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라고. 아스완 저수댐의 웅장한 시설이 이 부문에 관한 한 당대의 거창한 금자탑을 이루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관개시설은 끝없는 향상을 거듭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 일체의 관개 시설조치는 바로 이 나일강이 있음을 전제로 하여 마련된다.

 

"이집트의 범람경영에 있어서 증수기, 파종기, 그리고 수확기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이다. 이는 각기 엄청난 양의 물의 밀려드는 때, 그리고 대규모의 작업이 주민들에게 부과되는 때이다. 성과는 이 두가지를 어떻게 극복해 내는가에 달려 있다.

 

더 나아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무리가 중앙통제 아래 협업을 한다는 일 자체는 벌써 다음과 같은 사실, 곧 기존의 기술공학적인 역량을 총동원하여, 적합한 공동의 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경우에 한해서 수행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성의 향상은 기술 한 가지만의 문제는 아니며, 여기에는 또 다른 요소, 예컨대 사회조직이나 협업의 상황 또는 노동과정에 대해 생산자가 맺는 개인적 관계 등과 같은 요소들도 함께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가내공동체는 말하자면 서로 비슷한 목표와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며, 생산수단을 소유하면서 가내공동체 성원(살아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사람들까지도 포함하여)의 수요를 충족해 주는 일을 보장하기 위해 편성된 경제공동체이다. 이집트의 가내공동체는 바로 이집트식 범람경영의 특수성으로부터 커 나온 것이며, 지속적인 사회적 조직과 결속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집트인식 가내공동체의 살림살이는 대단히 폐쇄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초기 이집트인의 경제적 활동을 포괄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정서적으로 그리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경제적인 기능 및 사회적인 기능을 결합하는 하나의 조직체, 곧 통제된 가부장제적 조직체 속에 그를 깊숙이 편입시켜 넣는 역할을 하였다. 이 조직체는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나 노령에 이르렀을 때에도 초기 이집트인의 생존을 보장해 주고 있었다."

 

두말 할 나위도 없는 일이겠지만, 이와 같이 전지역에 걸쳐 조직이 스며들어 가기 위해서는 그 전제조건으로 반드시 문자가 확립될 가능성이 마련되어 있어야만 하였다. 실제로 이 같은 필요성으로부터 촉발되어, 그리고 짐작컨대 메소포타미아에 근거를 둔 수메르문화와 상업상의 접촉을 함으로써 자극도 받고 하였던 덕분에, 왕국 통일 직전에는 상형문자가 발전해 갔다.

 

분업의 진전, 전문가 계층의 형성 및 이와 결부된 개별직종의 성립 등과 같은 것은 이미 그 이전 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던 현상이었거니와, 문자가 발전하자 이는 즉각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를 초래하게 되었다. 특히, <서기>는 상형문자를 터득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공공연하게, 통례적인 직업으로부터 뚜렷이 구분되고 있던 존재였으며 - 그들은 수적으로도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 <정신노동자>로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과 스스로의 정신적, 지적 능력 덕분에 이와 같은 엘리트적인 위치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특징을 대단히 잘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는 현상, 다시 말해 고대 이집트에서는 상형문자를 <신의 말>이라고 지칭하였다는 사실에서도 그들의 지위는 잘 표현되고 있다. 말하자면 이집트인들에게는 이 문자를 통하여 지고의 힘, 즉 신성과 특히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념이 생겨났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여기에는 이미, 글로 씌어진 것 일체는 어느 정도 내재적인 <합법성>을 가진 것이라는 생각까지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당시 사람들에게는 글로 씌어진 것은 신적인 세계질서와 공명하고 있다고 느껴졌던 셈이다.

 

요컨대, 선사시대 말기에는 이미 뚜렷한 발전, 즉 생산력과 잉여생산을 엄청나게 증가시켰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정치적인 중앙집권화를 낳을 정도로 현저한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 우리는 이 당시의 눈부신 문명의 진보와 이에 일치하는 분업이 진전되고, 전문가계층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영역에서 그네들의 위치를 확고히 뒷받침받고 있던 사회의 상류계층은 원시공동체적인 민주주의의 유제를 보잘것없는 생활권으로 밀어내버리고는 그 대신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호할 목적으로 국가장치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바로 초기의 이집트에 있어서 종교는 다른 어떠한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체의 것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면서, 개인적인 차원이거나 사회 전체적인 차원이거나를 막론하고 거의 일체의 생활표현을 규정짓고 있는 요인이었다.

 

인간이 아직 자연의 힘 앞에 거의 무방비상태로 놓여 있었던 시절,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견고한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자기의 존립을 확보하고자 하였던 시절인 저 까마득한 옛날에는, 특수하고 탁월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갖춘 한 개인이 특수한 임무를 맡음으로써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뚜렷이 돋보이는 존재가 되곤 하였다. 민중을 영도하는 수장으로서의 역할이든가, 이적을 행하는 마술사로서의 역할이든가, 아니면 주문을 외는 능력을 갖춘 사제로서의 역할이든가간에, 위에서 말한 특수한 역할을 맡게 된 이와 같은 사람은 공동체에 대해 특별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보다 명백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는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개개인의 복리를 위해서는 이러한 권력을 실제적으로 이용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딴 사람의 조력을 받을 수밖에 없기도 하였거니와, 또한 권력을 보유하게 된 사람에게는 자기가 일단 도달한 지위를 보존하고 확대시켜 나가려는 욕심이 생겨나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더욱더 많은 개인들이 권력의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복장이나 예의범절에서, 또 권력의 상징을 과시하는 면에서 이러한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간격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왜냐하면 <권력>을 갖춘 그 통치자는 자신이 자연에 대해 작용을 가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은 남들은 파악할 수 없는 힘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을 통해>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통치자는 죽음을 초월하는 힘까지 획득하게 되는 셈이었다.

 

말하자면 이 같은 예술은 통치자가 최고 지배자임에 틀림없다고,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목표에 봉사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고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선 오늘날과 같은 식의 <노동자> 개념이 고대 이집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해 두어야 하겠다. 그 원인으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고왕국시대와 중왕국시대에는 특별명령에 의해 이러한 봉사수행을 면제받지 못하는 한, 원칙상 누구나 다 육체적 활동, 그러니까 노동에 동원될 수 있었다는 사실읻다. 이러한 일 가운데서도 개개의 작업종류별로 따져 볼 때, 주민들에게 주로 부과되는 것은 경작노동이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돌을 깨는 작업, 건축작업, 그리고 전쟁에의 출정 등과 같은 데에도 모든 주민들이 다 동원될 수 있었다. 이집트말로 <노동> 및 <노동자>를 가리키는 데 쓰이던 단어는 원래 <일을 맡아 함> 내지 <일을 맡아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3왕조로부터 시작되었던 고왕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이집트의 전체 인구는 네 개의 주요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셈이다. 그 첫째는, 왕의 권력 가운데 일정한 몫을 차지하고 있던 관직자들이고, 두번째는 특별법령에 의해, 주로 사자사원에서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지내면서, 단지 죽은 통치자에게 봉사할 의무만을 지고 있던 면역자계층, 세번째는 수공업자 내지는 숙련노동자계층, 그리고 마지막이 예농들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압도적인 다수는 농업노동자들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예란 것은 고왕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권리가 전혀 없거나 또는 딴 사람들보다 더 적은 권리만을 가진 사람, 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할 뿐더러, 딴 경우 같으면 어느 정도나마 참작의 여지를 인정받을 터인데도 이를 전혀 무시한 채 이용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의 계층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피라미드와 관련하여 노예에 관한 이야기가 무수히 오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황이 이와 같은 한 <노예>는 전혀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 - 실제의 노예라면 당연히 그러한 존재가 되었으리라 - 을 부려서는 결코 그와 같은 성과를 완수하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명제, 즉 이와 같은 노력이 투입되는 과정을 통하여, 실제로 포괄적인 조직과 행정을 동원함으로써 어떠한 개개인이라도 모두 포섭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하고도 강력한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이 사업의 목표였다고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닌게아니라, 고왕국의 주민들은 등록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것은 대규모의 국가부역사업을 수행하는데 주민들을 끌어냄은 물론, 이러한 노동이 진행되는 동안 물품을 공급하는 데도 동원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된 것이었다는 사실 등은 밝히 알려져 있는 터이다.

 

본격적인 대중동원은 매년 3개월에 걸치는 범람기간 동안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때는 일체의 경작지가 물 속에 잠겨버리는 시기인지라, 딴 계절 같으면 토지경작이 이집트인들의 으뜸가는 생업활동이 될 테지만, 이 시기에만은 그것이 전혀 불가능해지는 바람에 노동력이 크게 남아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수련을 쌓은 인적 자원, 즉 숙련노동자, 서기, 계획입안자, 행정가 기타 온갖 종류의 <상급자>에 대한 수요가 지금까지는 예측도 할 수 없었던 정도로 <상승하였으며> 확실히 "인구 가운데 상당한 비율에 달하는 사람들이 <전문가>가 됨으로써 생산으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는가 하면"

 

"(파라오의> 후계자들이 더욱 광범한 농장들을 새로 건립함에 따라 전 인구는 즉각 이 농장 안에 빈틈 없이 편입되었다. 이로써 오랜 전통을 지닌 촌락경제는 치밀하게 조직화된 국영농장 경영에 길을 물려주고 사라지게 되었다."

 

한 이론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평가해 볼 때 "이집트 전체가 단 하나의 농장이었다."

 

도시의 발전은 주로 피라미드 도시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왜냐하면 피라미드 축조가 계속되는 동안 피라미드 건축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다닥다닥 붙은 연립주택에 거주하면서 이곳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죽은 왕은 관리들이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이들을 돌보다 주어야 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들을 위해서도 왕의 분묘시설과 흡사하게 분묘 옆에 사자추모관이 건립되었으며, 왕을 위한 시설과 꼭 마찬가지로 역을 면제받는 사자관리사제가 배치되어 이를 돌보고 있었다. 이러한 관행이야말로 바로, 고왕국 말기에 이르면서, 한때는 거의 전능이다시피 했던 국가가 점점 더 수입과 권력을 잃어버리고 마침내는 완전히 혁명적인 격변 상태에 놓여 붕괴해 버리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 요인이었다.

 

개인의 해방과 더불어 출현하였던 불안한 상태가 더욱 더 심화되어 가자, 사람들은 현세에서의 환멸스러운 체험엗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런 체험 때문에, 내세에서는 영구불멸한 삶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려에서 출발하여, 현실은 회화에 의해 대치될 수 있다는 확신이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이제 사람들은 현실세계의 덧없음을 막기 위해 농장과 제품생산장의 모습을 거의 지워지지 않는 그러한 재료로 묘사하게 되었다.

 

노동을 묘사한 자료에 대해 논의를 할 때에는 특히, ... 이집트인들이 노동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던 방법에 대해 마땅히 언급을 해야 한다. ... 사람들이 주고받은 말까지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였던 노력, 다시 말해서 음성을 매체로 하여 진행된 사태경과의 영역까지도 붙들어 매두려고 하였던 노력을 말한다. ... 이 같은 방식은 우리 시대의 <만화>에서 애용되는 말 묶은 주머니 표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 ... 이 주목할 만한 혁신은 <현실>의 전체적 면모를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영원한 시간 속에 <동결시켜 잡아두려는> 시도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며 외침이며까지 한데 보여주고 있던 이러한 묘사도 결코 그 당시 생활의 <진정한> 모사라고 할 수는 없으며, 실은 노동의 긍정적 측면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현실미화적 성격을 띤 증언임에 틀림이 없다.

 

특별히 수공업자라는 직업집단에 촛점을 집중시켜 보자. 여기에서 이들을 다른 집단, 예컨대 <노동자>들과 명백하게 금을 그어 분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다시 말해 <농민>들만은 아마도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집단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무릇 이집트의 농민들은 짧은 과도기 동안을 제외하고는 자기 자신의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못하고 있던 존재거니와, 이들은 전 주민 가운데 수적인 비율이 가장 높은 부류였으며, 그들이 하는 일도 다른 일과는 특별히 구분되어 취급되고 있었다. 어쨌든 필자가 생각하기에, 수공업자들은 원칙적으로 자기 소유의 원료도,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 다시 말해 수공업도구도 전혀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는게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수공업자들은 <국가> - 다시 말해 왕과 신전에 봉사하거나, 아니면 고위관직자의 가계 안에 전속되어 있었다. ... 그런데 피라미드의 축조가 끝나면 그들은 <자유로이 풀려난 사람들>이 되어 국가의 강권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렇게 되면 딴 사람들에게 품을 팔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수공업자들에 대한 임금지불은 현물임금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이제 여성들의 노동력 편성에 관해 살펴보자. 우리는 이집트에서 여성들은 주로 방적공, 직조공, 제분공 등의 일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잇다. 그 밖에도 그들은 <가사>노동 즉 부엌에서 빵을 만들고 음식을 굽는다거나 또는 빨래하는 일을 하고 있었음을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선사시대에만 하더라도 술 빚는 일은 여인들이 담당하였다고 하는 지적, 즉 나중에 가서는 반죽하는 일의 어려움 때문에 여인들이 하는 법이 거의 없게 되었다고 여겨지는 이 작업을 당시에는 그네들이 주로 맡아 하였었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는 퍽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헬크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사실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선사시대에는 곡물경작이 전적으로 여성의 수중에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셈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후대에 이르면 여성들은 거의 예외없이 가사노동에만 전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원칙적으로는 여성들 또한 남성드로가 대체로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 관직자계층에 속하는 여성들의 경우에조차 읽고 쓰는 법을 터득한 예는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니까 일체의 <대외>지향적인 직업은 남성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었던 것이다.

 

"맞은 편에서 몰아치는 높은 물결, 곧 개인의 자유를 획득하고 토지 소유를 보다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 기울여지는 열렬한 노력도 더욱더 확대되어만 갔다. 관리들은 사자추모관에 부속된 농경지의 경작자라는 명목을 내세워 사실상으로는 신전토지를 자기네가 소유하고 있었고, 지방관구의 관리들은 향토신의 <예언자들을 주재하는 이>라는 자격을 내세워 신들에게 바쳐진 농장을 가로챘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왕이 지방에 있는 신전에 자기의 조상을 모시기 위해 건립했던 농장을 이 농장의 <지배인>이라는 구실 아래 자기네 수중으로 인수해 버리고 있었다. 이로써 분배체제는 완화되고 말았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뭉쳐 사는 거대한 집결지인 피라미드 도시도 중앙행정도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곤궁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개인적 자유라는 생각은 들에서 일하는 예농들의 뇌리에까지 굳게 스며들어 갔다. 그들은 이제 개인적 토지소유를 요구하며 봉기할 것을 외치면서, 거센 물결처럼 몰아 닥치게 되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고왕국시대에 작성된 문학작품으로 가장 중요하면서도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의 하나인 이른바 [이푸베르의 예언]이라고 불리는 책에서는 고왕국 말기 혁명적 상황을 대단히 유창하고 화려한 필치로, 마치 눈에 보이듯이 그려내고 있다. ... 우리가 가진 텍스트는 봉기에 가담한 인구계층을 열거하는 문구로 시작되고 있다.

 

"문지기는 말한다. '우리, 가서 닥치는 대로 뺏읍시다.'고. 세탁하는 이는 맡겨진 일 처리하기를 거부하고... 새잡이들은 싸움꾼 무리를 이루었느니..."

 

이에 덧붙여 빵 굽는 사람과 술 빝는 사람도 함께 지칭이 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봉기는 본질적으로 하층민들로부터 출발했던 것 같다. 그런 다음 텍스트는 현상을 일일이 열거하는 서술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서술마다에는 꼭 <정녕 그러하도다>라는 단정적 귀절이 되풀이하여 첨부되어 있다.

 

"정녕 그러하도다. 나라는 도적떼로 뒤덮여 있느니. 밭 갈러 가는 이는 방패로 무장한 모습... 정녕 그러하도다. 나일강 물 넘쳐 흐르나 이것 보고도 땅을 가는 이는 하나도 없음이여. ... 일찌기 샌들 하나 자기 것으로 못 가졌던 사람이 이젠 재산깨나 만지는 처지... 정녕 그러하도다. ... 피는 도처에 흘러 넘치나니... 정녕 그러하도다. 가진 자는 서러워하고 없는 자는 기뻐하는구나... 정녕 그러하도다. 집무실은 휑하니 열어젖혀져 주소록이 이곳에서 빼내져 버렸음이여.... 재판소의 법전이 길거리에 내팽겨쳐지니, 사람들은 이 위를 짓밟으면서 도시의 구역마다를 돌아다니고, 폭동 일으킨 천민들은 법전을 찢어 길거리에 흩뿌리는구나...."

 

두번째 절에는 몇 귀절마다 되풀이하여 <보아라>라는 정형문귀가 따라다니고 있다.

 

"보아라, .. 천민폭도가 주군을 폐위시켜 버린 것을. 보아라, 묻힐 때는 매(파라오)였던 이의 시신이 관에서 꺼내져 산산이 찢어지고, 피라미드의 밀실은 휑뎅그렁 비어 버렸음을... 보아라, 나라 안, 가진 것 없던 뱅성은 부자가 되어 있으나 가진 자는 빈털터리가 되었음을. 보아라... 얼굴을 비춰볼 거라곤 물밖에 없던 이들이 이제는 청동거울을 가지게 되었음을... 지옥이 가까와졌음이여...."

 

제1과도기 이래 자기네 권리를 유지해 오고 있던 농민적 소생산자들은 제12왕조 초기에만 하더라도 아직, 대체로 가족경영으로서의 자기의 경영을 독립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있지 않아서 즉각, 너무나도 과중한 노동의무 및 납세의무를 수행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농민들은 도주함으로써 국가의 강권적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가는 상비군을 동원하여 정규적인 인간사냥을 펼침으로써 이 같은 사태에 대응할 만한 능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또한 분명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형을 부과할 수 있는 역량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도주자에 관한 사형부과는 "자기의 작업장소를 버리고 떠나는 자에 관한 법령"에 근거를 두고 법적으로 규정된 것이었다.

 

제12왕조의 파라오들이 장악하고 있던 막강한 군사력은 드디어는 군사적 정복사업을 위해서도 동원되었다. ... 그뿐만 아니라 이 정복사업에 힘입어 이집트는 대규모 황금산출지역까지 수중에 확보하게 되었다. 누비아에는 ... 매장량이 풍부한 금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황금산출지는 금을 채굴하고 세광하는 작업에 대체로 원주민들이나 전쟁포로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였으며 신왕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집트가 누리는 세력의 핵심적 근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 신왕국시대에 이집트는 세계적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이 같은 일은 누비아의 광대한 금광이 없었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중왕국시대의 사회는 고왕국시대의 사회와는 현저하게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부터는 노예도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노예는 맨 처음에는, 전쟁이나 상거래를 통해 획득되어서 당시의 공식명칭대로 하자면 <왕에게 속한 몸>이 된 사람들, 즉 이집트인의 소유물이 된 외국인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이 당시에는 관리들을 통치자에게 확고히 결속시켜 고분고분한 신하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직책과 업적에 부합되게 토지를 분배해 주는 방식이 채택되었으며, 이로써 그들의 재산은 늘어나게 되었다. " 이 같은 토지의 용익권이 소유권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관료장치 내지 행정장치느 크게 팽창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서기>야말로 다시금,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모든 것을 수중에 장악하는 존재가 되었다.

 

다음에 보기위해 정리해둔 것인데 너무 많아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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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어릴 때 우리집은 공장을 했다. 아버지는 직원이 열명이 채 안되는 작은 공장을 운영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잘 이해하기 힘들지만 우리집이 공장이었다. 집에 공장시설이 있었다. 당연히 일을 하는 시간에는 집이 시끄러웠다. 나는 시끄러운 집이 싫어서 학교에 갔다오면 거의 대부분 동네를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쯤엔 공부에 지장이 있다고 해서 공장을 딴데로 옮기고 우리는 이사를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닐 땐 집에 오면 항상 사람들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엔 나이가 어린 오빠들도 있었다. 그 오빠들은 집이 지방이어서 우리 집에서 숙실을 해결했다. 쉬는 시간에는 나와 만화책을 같이 보기도 했다. 그 오빠들 중엔 직장을 옮겨서 다른 데로 간 뒤에 내게 잘 지내냐고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어릴 때는 애교가 많고 붙임성이 있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답장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난 그때 편지 내용을 잘 이해하지도 못했다. 언젠가 이주노동자와 압류를 하러 갔는데 집행관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 그 사람은 자긴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사장과 부딪치기 싫어서 그런가보다 했더니 하는 말이 그 집에 나이 어린 딸이 있는데 마주치면 안된다고 한다. 그 사람은 그 소녀가 자신을 반가워할까봐, 자신이 여기 왜 왔는지 그 이유를 알까봐, 그 소녀가 상처받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집행관들이 나오자마자 사장이 달려나와 우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는 성급히 집행관의 차를 타고 거길 빠져나왔다. 내가 예전에 만난 사장들은 인간말종들도 있지만 대부분 돈없는 사장들이다. 이주노동자때문에 몇 백만원짜리 원단을 손해봤다는 둥, 말도 없이 그만둬서 손해를 엄청 봤다는 둥 하면서 괘씸해서 돈을 못주겠다고 하면 돈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니까 끈기를 갖고 기다려야 한다. 저도 사장님 심정 이해합니다. 하면서 이해하는 척 하다가 사장님 임금 지급안하시면 검찰에 가서 조사받습니다. 하고 사무적으로 말했다가 이 두개의 설득과 협박을 반복해서 하다보면 사장도 결국 탈진해서 괘씸해서 다는 못준다고 한다. 그러면 노동사무소에 가셔야겠네요 하면 또 그때부터 내가 범죄자냐고 내가 왜 노동사무소에 가냐고 노발대발한다. 그러길 또 한시간. 보통 이런 사장 만나면 공장에서 나올땐 녹초가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장들은 돈이 없어서 못준다고 한다. 나는 그가 정말 돈이 없는지, 없는척하는건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내가 상대하는 사장들이 못배우고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이라는건 사실이다. 언젠가 찾아갔던 공장에선 임금을 못줘서 직원들이 다 떠나가고 사장 혼자서 힘겹게 일을 하고 있었다. 사장님이 힘들다고 그 사람까지 힘들어야하는건 아녜요, 임금 지급하세요. 하고 말하지만 저런 사장들 상대로 싸워야 하는 내 처지가 서글플 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장들은 난 아가씨처럼 배우질 못해서.. 라고 항변하다. 그런 말 정말 듣기 싫다. 나도 한 때 조직가가 꿈이었던 적이 있다. 조직화를 할 수 있는 사업장에 들어가려고 했고, 친구들이 일자리를 알아봐주고 있었다. 그 땐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경제가 어려워서 그런지 폐쇄하는 사업장은 있어도 새로 사람을 뽑는데는 별로 없었다. 얼떨결에 어떤 노조에서 상근하게 되었다. 그 노조가 있는 사무실은 서울에서도 보기드문 노동자구역이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져서 미로처럼 되어있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작업장들이 있었다. 점심 때는 노변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도 그 곳에선 차꾸러미를 들고 가는 여종업원이 있고 퀵서비스 오토바이들이 질주를 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걷다간 다칠 수 있다. 나와 함께 사업장을 둘러보러 같이 다녔던 부지부장은 기계나 작업공정에 대해 세심히 설명해주었다. 부지부장은 기계를 가리키며 저걸 보라고 했다. 안정장치가 벗겨져있었다. 화학연맹에 가입해도 될 정도로 화학약품이 많아서 머리가 좀 아프다고 했더니 어딜 가면 시야가 뿌옇고 골이 뱅글뱅글 돌아서 처음 간 사람은 쓰러진단다. 여자들은 거의 대부분 단순노동을 하고 있었다. 일하는데 손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손놀림이 빨랐다. 얼마나 하면 이렇게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일년, 아무것도 안하고 이 일만 일년하면 이렇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여자들은 이렇게 십년 일해도 한달에 80만원 넘게 받기 힘들다. 토요일은 당연히 저녁 6시에서 8시까지 일한다. 일요일에도 바쁘면 출근해야하고. 내가 그 노조를 그만두었을 때 부지부장이 일을 좀 배우는게 어떻겠냐고 해서 한동안 고민했는데 나는 결국 내 모든 꿈을 접었다. 되도 안는 영세사업장 조직화를 위해 하루종일 그 지겹고 끔찍한 단순노동을 해야한다니. 정말 노동자 조직이 필요한 저 사람들에게는 조직이 없었다. 사장의 지급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노동자들은 잉여가치를 나누어달라고 할 수 있지만 아마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자기가 다니는 공장이 문 안닫고 임금 안밀리고 일하다 사고 안나고 안정되게 직장 다니는게 꿈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죽도록 일만 하고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나이가 될 때 그들 손에 돈 몇 푼이나 쥐어지며 그들 삶을 누가 보상해줄까.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여의도에서는 어디 가서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모두 주식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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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하루

이 곳에 들어온지 가장 바쁜 하루였다. 오늘도 그 사람에게 몹시도 시달렸다. 그 사람은 자기 방을 쓰고 있는데 ~부자~앙 하고 부르면 나는 그 방에 가야한다. 또 뭐라고 뭐라고 하면서 지시를 내린다. 내 직책은 총무부장이다. 돈과 회원관리를 하고 있다. 처음 여기 왔을때 전화번호, 메일주소, 주소 여기저기에 구멍이 숭숭 뚤려있는 회원명부를 보고 경악을 했다. 어떻게 회원관리를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애꿎은 전임자를 탓했다. 네가 일을 열심히 안하고 가니까 내가 개고생이잖아. T.T 그런데 어제 이 사무실에서 일했던 사람이 다녀갔다. 몰래 물어봤다. 어떻게 회원관리가 이렇게 엉망일 수가 있죠. 전임자들이 오래 안 있고 금방 그만둬서 그래요. 다들 나처럼 잔소리듣는게 짜증나서 금방 싫증을 내고 그만뒀다고 한다. 사실인것 같다. 나도 그 사람 잔소리를 들을때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 자리에서 울고싶다. 제발 닥치라고. 그 사람 말이 너무 많다. 회원관리가 안되는것도 그 사람 탓이라고 한다. 이 조직은 그 사람의 사조직이나 다름이 없는데 회원조직방식이 어느 날 전화걸어서 어이~ 너 우리 조직에 회원으로 가입해 가입할거지 응 알았어 너 우리 조직 회원이다 안녕. 이런 식이란다. 그래서 회원정보도 그 사람이 업데이트 시켜줘야하는데 하지 않고 있단다. 아.. 다행히도 평상시에 나의 노동강도는 그리 높지 않다. 단지 나를 자주 부르고 부르면 잔소리가 많고 인신공격이 심하고(일을 왜 그렇게 못해 블라블라) 칭찬은 하나도 안한다는 점이다. 야단만 맞고 산다. 그러고보니 이 나이 먹도록 나는 한번도 누구의 윗사람이었던 적이 없구나. 내가 윗사람이 되면 어떨까. 차라리 당하고 사는게 나은걸까. 쫌 고상한 일기 좀 쓰고싶은데 내 삶이 전혀 고상하지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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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사회, 그 서글픔

얼마전 친구가 파리를 다녀왔다. 생각보다 도시가 너무 혼잡하고 지저분해서 실망했다고 하는데 놀란 점 중에 하나가 이주노동자, 특히 아프리카 출신 노동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독일도 택시 노동자들은 터키 출신으로 알고 있다. 책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파리의 어느 공장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그들은 노동자라는 정체성보다는 이민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소외된 자들 중에서도 소외된 자들이다.

 

현재 한국에서 이주민을 수입하는 방식은 크게 노동력과 신부 수입이다. 노동력은 다시 연수생과 불법체류자로 나뉘며 결론적으로 합법적인 신분의 노동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다시피 하고 있다. 정부는 주기적인 강제추방으로 이들을 솎아내어 이들의 정착을 막고있다. 한국에 3년, 혹은 5년 이상 체류한 노동자에 한해서 합법적인 비자를 발급했을 경우 본국에서 가족을 데려오거나 한국인과 결혼하여 정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정부는 이를 우려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 이주노동자의 경우 한국인과 결혼하면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며 한국에 정착할 수 있다. 한국에 수입되는 신부들도 한국인과 결혼하기 때문에 이들이 낳은 자녀는 한국인이 되고 이들의 2세는 한국인과 결혼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숫적으로 봤을때 한세대가 지나면 혈통에는 큰 지장이 없다고 보는 것이 좋다. 한국은 많은 수의 국민이 해외로 이민을 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정부는 이민자들이 정착국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길 바라면서 정작 본국에서 본국 경제를 위해 희생하고 본국의 국민과 결혼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대하고 있다.

 

다문화사회라는 말은 어쩌면 듣기 좋은 허울 좋은 말일지도 모른다. 이동하는 사람들은 이동의 자유가 부여된 상류층과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 어딘가로 떠나야하는 사람들이다. 중간에는 대다수의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붙박이인생들이 있다. 우리는 이제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을 대신 해 줄 사람들이 여기에 와 있다. 일본에서는 유흥가의 '삐끼'들도 아랍노동자들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제 도처에서 이주노동자들과 만날 것이다. 한국여성과 결혼할 수 없는 남성을 위해 빈곤한 세계의 여성은 계속 수입될 것이다. 필요해서 수입했다면 최소한 이들을 위한 대책은 세우는게 도리라고 하겠다. 그들은 오늘도 한국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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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망상

한동안 꿈같은 백수생활을 하다가 지옥같은 직장생활을 하고있다. 내 꿈은 백수지만 나도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돈때문에 직장에 다니고 있다. 몇년씩 조신히 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집에서 노는게 주말이나 휴가때나 가능하지만 나처럼 밥먹듯이 수시로 직장을 그만두는 인간은 직장을 다닐 때와 집에서 놀 때가 확연히 다르다. 우선 직장에 다니면 밥을 많이 먹게 된다. 집에 있을땐 먹고 싶으면 아무때나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한번에 많이 먹을 필요가 없지만 직장에 다니면 먹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한 번 먹을 때 많이 먹어둬야한다. 나는 고기는 먹지 않는 주의지만 직장생활을 할 땐 고기를 먹는다. 선택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고기를 즐겨먹던 그 옛날부터 고기를 먹으면 소화가 잘 안되서 고기가 나한테 안맞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직장에 다닐땐 고기를 먹어야한다. 먹을땐 맛있지만 소화가 안되서 괴롭다. 퇴근후엔 화풀이로 주로 먹는다. 지하철 타기 전에 먼저 뭔가를 먹고 지하철에 내려서 또 뭔가를 먹을 때도 있다.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돈이 너무 많이 지출된다. 어젠가 옷이 좀 끼는 것 같아서 어~ 안되겠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그 날 퇴근후에 또 먹었다. 집에 들어오면 또 망상의 세계로 달려간다. 나의 오랜 꿈은 돈버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결혼을 해서 남자는 돈벌러 밖에 내보내고 나는 남자가 벌어오는 돈으로 사는 상상에 잠긴다. 어차피 요새 직장인들은 아침은 안먹으니까 아침엔 그냥 나갈테고 점심은 밖에서 먹을테고 저녁은 먹고 들어올테니까 나는 그냥 나 먹을것만 챙기고 주말엔 모.. 단촐한 외식.. 어차피 내가 만든게 맛있을리 없잖아.. 청소와 빨래 정도하면 되지 않을까. 남의 노동에 기생해서 살아가려는 내 꿈은 아주 오래전부터인테 아무도 나와 결혼하겠다는 남자가 없어서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영악함이 마음에 든다. 왜 내 꿈은 실현되지 않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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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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