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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노동

 

그뿐 아니라, 우리는 바로 이 이집트문명을 고찰할 때, 선사시대의 암흑상태로부터 솟아나오자마자 지극히 짧은 시기 동안 혜성과도 같이 상승하여 인류 최초의 대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던, 그리하여 그로부터 3천 년 이상에 걸쳐 지속하게 되었던 고도의 문화를 눈앞에 대하게 된다. 이 대국가는 성립된 후 처음 1,300년 동안에는 외부로부터 거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오로지 독자적인 상태로 존립하고 있었으며, 그 다음에 이어진 1,300년 동안에도 역시 -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되기 전까지는 - 대단히 자족적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외부로부터 오는 온갖 것을 다 통합하여 <이집트적인 것>으로 변형시키고 있을 정도였다.

 

이집트에 대해서는 언제나 이와 같이 편협할 뿐 아니라 실상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먼 고정관념이 적용되어 왔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고정관념이 너무나도 쉽사리 적용되는 바람에 사람들은 피라미드를 마주 대하고서는 어김 없이, 아주 훌륭한 <노예소유자들의 국가>를 발견해 냈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실상, 이미 고대의 몇몇 저술가들에 의해 맨 처음으로 그 결정적인 자료가 제공되었으며 그 후 온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던 설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초기의 인류역사가 지니고 있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실례로서 다름 아닌 이집트가 선정되었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그 타당성을 부여해 주는 근거가 명백히 존재한다. 그 근거란 것은 곧, 역사적인 총체적 발전과정의 내부에서 대규모의 협동노동이, 그리고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현상인 분업이 최초로 실시되었던 한 단계가 바로 이 이집트에서 도달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 같은 협동노동은 공동으로 작업을 실시해야만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단일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었는데, 이처럼 벌써부터 엄청나게 큰 규모로 추진되고 있던 이 협동노동이야말로, 점점 더 명백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여러 계급 및 계층의 형성으로 연결되었을 뿐 아니라, 개별적인 노동영역 및 직종의 광범위한 분화라는 현상까지 아울러 초래하였으며, 이에 따라 대단히 복합적인 전체사회를 성립시키게 되었던 요인이다.

 

그런 데다가, 문서들은 대부분 왕의 행동반경 안에서 작성된 것 내지 고위관리들의 수중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말하자면 지배계층의 대표자들은 거의 독점적이다시피 발언권을 얻고 있음에 반해, 노동하는 사람들 자신은 <문맹자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사정까지 겹쳐 곤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이집트에서 진행되는 온갖 생활의 전제조건을 형성하는 자연적 여건에 대해 그리스인 헤로도토스보다 더 적절한 문귀로 특징을 지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을 두루 여행하고 다녔으며, 기원전 450년 경에는 이집트를 방문한 적도 있었던 이 사람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리스인 청중들 앞에서 바로 이 고전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럴 만도 하겠거니와 언제나 되풀이하여 인용되곤 하는 귀절을 표명하였다. 곧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라고. 아스완 저수댐의 웅장한 시설이 이 부문에 관한 한 당대의 거창한 금자탑을 이루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관개시설은 끝없는 향상을 거듭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 일체의 관개 시설조치는 바로 이 나일강이 있음을 전제로 하여 마련된다.

 

"이집트의 범람경영에 있어서 증수기, 파종기, 그리고 수확기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이다. 이는 각기 엄청난 양의 물의 밀려드는 때, 그리고 대규모의 작업이 주민들에게 부과되는 때이다. 성과는 이 두가지를 어떻게 극복해 내는가에 달려 있다.

 

더 나아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무리가 중앙통제 아래 협업을 한다는 일 자체는 벌써 다음과 같은 사실, 곧 기존의 기술공학적인 역량을 총동원하여, 적합한 공동의 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경우에 한해서 수행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성의 향상은 기술 한 가지만의 문제는 아니며, 여기에는 또 다른 요소, 예컨대 사회조직이나 협업의 상황 또는 노동과정에 대해 생산자가 맺는 개인적 관계 등과 같은 요소들도 함께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가내공동체는 말하자면 서로 비슷한 목표와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며, 생산수단을 소유하면서 가내공동체 성원(살아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사람들까지도 포함하여)의 수요를 충족해 주는 일을 보장하기 위해 편성된 경제공동체이다. 이집트의 가내공동체는 바로 이집트식 범람경영의 특수성으로부터 커 나온 것이며, 지속적인 사회적 조직과 결속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집트인식 가내공동체의 살림살이는 대단히 폐쇄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초기 이집트인의 경제적 활동을 포괄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정서적으로 그리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경제적인 기능 및 사회적인 기능을 결합하는 하나의 조직체, 곧 통제된 가부장제적 조직체 속에 그를 깊숙이 편입시켜 넣는 역할을 하였다. 이 조직체는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나 노령에 이르렀을 때에도 초기 이집트인의 생존을 보장해 주고 있었다."

 

두말 할 나위도 없는 일이겠지만, 이와 같이 전지역에 걸쳐 조직이 스며들어 가기 위해서는 그 전제조건으로 반드시 문자가 확립될 가능성이 마련되어 있어야만 하였다. 실제로 이 같은 필요성으로부터 촉발되어, 그리고 짐작컨대 메소포타미아에 근거를 둔 수메르문화와 상업상의 접촉을 함으로써 자극도 받고 하였던 덕분에, 왕국 통일 직전에는 상형문자가 발전해 갔다.

 

분업의 진전, 전문가 계층의 형성 및 이와 결부된 개별직종의 성립 등과 같은 것은 이미 그 이전 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던 현상이었거니와, 문자가 발전하자 이는 즉각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를 초래하게 되었다. 특히, <서기>는 상형문자를 터득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공공연하게, 통례적인 직업으로부터 뚜렷이 구분되고 있던 존재였으며 - 그들은 수적으로도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 <정신노동자>로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과 스스로의 정신적, 지적 능력 덕분에 이와 같은 엘리트적인 위치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특징을 대단히 잘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는 현상, 다시 말해 고대 이집트에서는 상형문자를 <신의 말>이라고 지칭하였다는 사실에서도 그들의 지위는 잘 표현되고 있다. 말하자면 이집트인들에게는 이 문자를 통하여 지고의 힘, 즉 신성과 특히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념이 생겨났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여기에는 이미, 글로 씌어진 것 일체는 어느 정도 내재적인 <합법성>을 가진 것이라는 생각까지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당시 사람들에게는 글로 씌어진 것은 신적인 세계질서와 공명하고 있다고 느껴졌던 셈이다.

 

요컨대, 선사시대 말기에는 이미 뚜렷한 발전, 즉 생산력과 잉여생산을 엄청나게 증가시켰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정치적인 중앙집권화를 낳을 정도로 현저한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 우리는 이 당시의 눈부신 문명의 진보와 이에 일치하는 분업이 진전되고, 전문가계층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영역에서 그네들의 위치를 확고히 뒷받침받고 있던 사회의 상류계층은 원시공동체적인 민주주의의 유제를 보잘것없는 생활권으로 밀어내버리고는 그 대신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호할 목적으로 국가장치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바로 초기의 이집트에 있어서 종교는 다른 어떠한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체의 것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면서, 개인적인 차원이거나 사회 전체적인 차원이거나를 막론하고 거의 일체의 생활표현을 규정짓고 있는 요인이었다.

 

인간이 아직 자연의 힘 앞에 거의 무방비상태로 놓여 있었던 시절,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견고한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자기의 존립을 확보하고자 하였던 시절인 저 까마득한 옛날에는, 특수하고 탁월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갖춘 한 개인이 특수한 임무를 맡음으로써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뚜렷이 돋보이는 존재가 되곤 하였다. 민중을 영도하는 수장으로서의 역할이든가, 이적을 행하는 마술사로서의 역할이든가, 아니면 주문을 외는 능력을 갖춘 사제로서의 역할이든가간에, 위에서 말한 특수한 역할을 맡게 된 이와 같은 사람은 공동체에 대해 특별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보다 명백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는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개개인의 복리를 위해서는 이러한 권력을 실제적으로 이용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딴 사람의 조력을 받을 수밖에 없기도 하였거니와, 또한 권력을 보유하게 된 사람에게는 자기가 일단 도달한 지위를 보존하고 확대시켜 나가려는 욕심이 생겨나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더욱더 많은 개인들이 권력의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복장이나 예의범절에서, 또 권력의 상징을 과시하는 면에서 이러한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간격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왜냐하면 <권력>을 갖춘 그 통치자는 자신이 자연에 대해 작용을 가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은 남들은 파악할 수 없는 힘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을 통해>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통치자는 죽음을 초월하는 힘까지 획득하게 되는 셈이었다.

 

말하자면 이 같은 예술은 통치자가 최고 지배자임에 틀림없다고,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목표에 봉사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고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선 오늘날과 같은 식의 <노동자> 개념이 고대 이집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해 두어야 하겠다. 그 원인으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고왕국시대와 중왕국시대에는 특별명령에 의해 이러한 봉사수행을 면제받지 못하는 한, 원칙상 누구나 다 육체적 활동, 그러니까 노동에 동원될 수 있었다는 사실읻다. 이러한 일 가운데서도 개개의 작업종류별로 따져 볼 때, 주민들에게 주로 부과되는 것은 경작노동이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돌을 깨는 작업, 건축작업, 그리고 전쟁에의 출정 등과 같은 데에도 모든 주민들이 다 동원될 수 있었다. 이집트말로 <노동> 및 <노동자>를 가리키는 데 쓰이던 단어는 원래 <일을 맡아 함> 내지 <일을 맡아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3왕조로부터 시작되었던 고왕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이집트의 전체 인구는 네 개의 주요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셈이다. 그 첫째는, 왕의 권력 가운데 일정한 몫을 차지하고 있던 관직자들이고, 두번째는 특별법령에 의해, 주로 사자사원에서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지내면서, 단지 죽은 통치자에게 봉사할 의무만을 지고 있던 면역자계층, 세번째는 수공업자 내지는 숙련노동자계층, 그리고 마지막이 예농들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압도적인 다수는 농업노동자들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예란 것은 고왕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권리가 전혀 없거나 또는 딴 사람들보다 더 적은 권리만을 가진 사람, 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할 뿐더러, 딴 경우 같으면 어느 정도나마 참작의 여지를 인정받을 터인데도 이를 전혀 무시한 채 이용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의 계층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피라미드와 관련하여 노예에 관한 이야기가 무수히 오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황이 이와 같은 한 <노예>는 전혀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 - 실제의 노예라면 당연히 그러한 존재가 되었으리라 - 을 부려서는 결코 그와 같은 성과를 완수하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명제, 즉 이와 같은 노력이 투입되는 과정을 통하여, 실제로 포괄적인 조직과 행정을 동원함으로써 어떠한 개개인이라도 모두 포섭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하고도 강력한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이 사업의 목표였다고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닌게아니라, 고왕국의 주민들은 등록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것은 대규모의 국가부역사업을 수행하는데 주민들을 끌어냄은 물론, 이러한 노동이 진행되는 동안 물품을 공급하는 데도 동원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된 것이었다는 사실 등은 밝히 알려져 있는 터이다.

 

본격적인 대중동원은 매년 3개월에 걸치는 범람기간 동안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때는 일체의 경작지가 물 속에 잠겨버리는 시기인지라, 딴 계절 같으면 토지경작이 이집트인들의 으뜸가는 생업활동이 될 테지만, 이 시기에만은 그것이 전혀 불가능해지는 바람에 노동력이 크게 남아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수련을 쌓은 인적 자원, 즉 숙련노동자, 서기, 계획입안자, 행정가 기타 온갖 종류의 <상급자>에 대한 수요가 지금까지는 예측도 할 수 없었던 정도로 <상승하였으며> 확실히 "인구 가운데 상당한 비율에 달하는 사람들이 <전문가>가 됨으로써 생산으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는가 하면"

 

"(파라오의> 후계자들이 더욱 광범한 농장들을 새로 건립함에 따라 전 인구는 즉각 이 농장 안에 빈틈 없이 편입되었다. 이로써 오랜 전통을 지닌 촌락경제는 치밀하게 조직화된 국영농장 경영에 길을 물려주고 사라지게 되었다."

 

한 이론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평가해 볼 때 "이집트 전체가 단 하나의 농장이었다."

 

도시의 발전은 주로 피라미드 도시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왜냐하면 피라미드 축조가 계속되는 동안 피라미드 건축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다닥다닥 붙은 연립주택에 거주하면서 이곳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죽은 왕은 관리들이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이들을 돌보다 주어야 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들을 위해서도 왕의 분묘시설과 흡사하게 분묘 옆에 사자추모관이 건립되었으며, 왕을 위한 시설과 꼭 마찬가지로 역을 면제받는 사자관리사제가 배치되어 이를 돌보고 있었다. 이러한 관행이야말로 바로, 고왕국 말기에 이르면서, 한때는 거의 전능이다시피 했던 국가가 점점 더 수입과 권력을 잃어버리고 마침내는 완전히 혁명적인 격변 상태에 놓여 붕괴해 버리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 요인이었다.

 

개인의 해방과 더불어 출현하였던 불안한 상태가 더욱 더 심화되어 가자, 사람들은 현세에서의 환멸스러운 체험엗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런 체험 때문에, 내세에서는 영구불멸한 삶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려에서 출발하여, 현실은 회화에 의해 대치될 수 있다는 확신이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이제 사람들은 현실세계의 덧없음을 막기 위해 농장과 제품생산장의 모습을 거의 지워지지 않는 그러한 재료로 묘사하게 되었다.

 

노동을 묘사한 자료에 대해 논의를 할 때에는 특히, ... 이집트인들이 노동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던 방법에 대해 마땅히 언급을 해야 한다. ... 사람들이 주고받은 말까지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였던 노력, 다시 말해서 음성을 매체로 하여 진행된 사태경과의 영역까지도 붙들어 매두려고 하였던 노력을 말한다. ... 이 같은 방식은 우리 시대의 <만화>에서 애용되는 말 묶은 주머니 표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 ... 이 주목할 만한 혁신은 <현실>의 전체적 면모를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영원한 시간 속에 <동결시켜 잡아두려는> 시도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며 외침이며까지 한데 보여주고 있던 이러한 묘사도 결코 그 당시 생활의 <진정한> 모사라고 할 수는 없으며, 실은 노동의 긍정적 측면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현실미화적 성격을 띤 증언임에 틀림이 없다.

 

특별히 수공업자라는 직업집단에 촛점을 집중시켜 보자. 여기에서 이들을 다른 집단, 예컨대 <노동자>들과 명백하게 금을 그어 분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다시 말해 <농민>들만은 아마도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집단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무릇 이집트의 농민들은 짧은 과도기 동안을 제외하고는 자기 자신의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못하고 있던 존재거니와, 이들은 전 주민 가운데 수적인 비율이 가장 높은 부류였으며, 그들이 하는 일도 다른 일과는 특별히 구분되어 취급되고 있었다. 어쨌든 필자가 생각하기에, 수공업자들은 원칙적으로 자기 소유의 원료도,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 다시 말해 수공업도구도 전혀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는게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수공업자들은 <국가> - 다시 말해 왕과 신전에 봉사하거나, 아니면 고위관직자의 가계 안에 전속되어 있었다. ... 그런데 피라미드의 축조가 끝나면 그들은 <자유로이 풀려난 사람들>이 되어 국가의 강권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렇게 되면 딴 사람들에게 품을 팔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수공업자들에 대한 임금지불은 현물임금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이제 여성들의 노동력 편성에 관해 살펴보자. 우리는 이집트에서 여성들은 주로 방적공, 직조공, 제분공 등의 일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잇다. 그 밖에도 그들은 <가사>노동 즉 부엌에서 빵을 만들고 음식을 굽는다거나 또는 빨래하는 일을 하고 있었음을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선사시대에만 하더라도 술 빚는 일은 여인들이 담당하였다고 하는 지적, 즉 나중에 가서는 반죽하는 일의 어려움 때문에 여인들이 하는 법이 거의 없게 되었다고 여겨지는 이 작업을 당시에는 그네들이 주로 맡아 하였었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는 퍽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헬크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사실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선사시대에는 곡물경작이 전적으로 여성의 수중에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셈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후대에 이르면 여성들은 거의 예외없이 가사노동에만 전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원칙적으로는 여성들 또한 남성드로가 대체로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 관직자계층에 속하는 여성들의 경우에조차 읽고 쓰는 법을 터득한 예는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니까 일체의 <대외>지향적인 직업은 남성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었던 것이다.

 

"맞은 편에서 몰아치는 높은 물결, 곧 개인의 자유를 획득하고 토지 소유를 보다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 기울여지는 열렬한 노력도 더욱더 확대되어만 갔다. 관리들은 사자추모관에 부속된 농경지의 경작자라는 명목을 내세워 사실상으로는 신전토지를 자기네가 소유하고 있었고, 지방관구의 관리들은 향토신의 <예언자들을 주재하는 이>라는 자격을 내세워 신들에게 바쳐진 농장을 가로챘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왕이 지방에 있는 신전에 자기의 조상을 모시기 위해 건립했던 농장을 이 농장의 <지배인>이라는 구실 아래 자기네 수중으로 인수해 버리고 있었다. 이로써 분배체제는 완화되고 말았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뭉쳐 사는 거대한 집결지인 피라미드 도시도 중앙행정도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곤궁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개인적 자유라는 생각은 들에서 일하는 예농들의 뇌리에까지 굳게 스며들어 갔다. 그들은 이제 개인적 토지소유를 요구하며 봉기할 것을 외치면서, 거센 물결처럼 몰아 닥치게 되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고왕국시대에 작성된 문학작품으로 가장 중요하면서도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의 하나인 이른바 [이푸베르의 예언]이라고 불리는 책에서는 고왕국 말기 혁명적 상황을 대단히 유창하고 화려한 필치로, 마치 눈에 보이듯이 그려내고 있다. ... 우리가 가진 텍스트는 봉기에 가담한 인구계층을 열거하는 문구로 시작되고 있다.

 

"문지기는 말한다. '우리, 가서 닥치는 대로 뺏읍시다.'고. 세탁하는 이는 맡겨진 일 처리하기를 거부하고... 새잡이들은 싸움꾼 무리를 이루었느니..."

 

이에 덧붙여 빵 굽는 사람과 술 빝는 사람도 함께 지칭이 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봉기는 본질적으로 하층민들로부터 출발했던 것 같다. 그런 다음 텍스트는 현상을 일일이 열거하는 서술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서술마다에는 꼭 <정녕 그러하도다>라는 단정적 귀절이 되풀이하여 첨부되어 있다.

 

"정녕 그러하도다. 나라는 도적떼로 뒤덮여 있느니. 밭 갈러 가는 이는 방패로 무장한 모습... 정녕 그러하도다. 나일강 물 넘쳐 흐르나 이것 보고도 땅을 가는 이는 하나도 없음이여. ... 일찌기 샌들 하나 자기 것으로 못 가졌던 사람이 이젠 재산깨나 만지는 처지... 정녕 그러하도다. ... 피는 도처에 흘러 넘치나니... 정녕 그러하도다. 가진 자는 서러워하고 없는 자는 기뻐하는구나... 정녕 그러하도다. 집무실은 휑하니 열어젖혀져 주소록이 이곳에서 빼내져 버렸음이여.... 재판소의 법전이 길거리에 내팽겨쳐지니, 사람들은 이 위를 짓밟으면서 도시의 구역마다를 돌아다니고, 폭동 일으킨 천민들은 법전을 찢어 길거리에 흩뿌리는구나...."

 

두번째 절에는 몇 귀절마다 되풀이하여 <보아라>라는 정형문귀가 따라다니고 있다.

 

"보아라, .. 천민폭도가 주군을 폐위시켜 버린 것을. 보아라, 묻힐 때는 매(파라오)였던 이의 시신이 관에서 꺼내져 산산이 찢어지고, 피라미드의 밀실은 휑뎅그렁 비어 버렸음을... 보아라, 나라 안, 가진 것 없던 뱅성은 부자가 되어 있으나 가진 자는 빈털터리가 되었음을. 보아라... 얼굴을 비춰볼 거라곤 물밖에 없던 이들이 이제는 청동거울을 가지게 되었음을... 지옥이 가까와졌음이여...."

 

제1과도기 이래 자기네 권리를 유지해 오고 있던 농민적 소생산자들은 제12왕조 초기에만 하더라도 아직, 대체로 가족경영으로서의 자기의 경영을 독립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있지 않아서 즉각, 너무나도 과중한 노동의무 및 납세의무를 수행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농민들은 도주함으로써 국가의 강권적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가는 상비군을 동원하여 정규적인 인간사냥을 펼침으로써 이 같은 사태에 대응할 만한 능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또한 분명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형을 부과할 수 있는 역량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도주자에 관한 사형부과는 "자기의 작업장소를 버리고 떠나는 자에 관한 법령"에 근거를 두고 법적으로 규정된 것이었다.

 

제12왕조의 파라오들이 장악하고 있던 막강한 군사력은 드디어는 군사적 정복사업을 위해서도 동원되었다. ... 그뿐만 아니라 이 정복사업에 힘입어 이집트는 대규모 황금산출지역까지 수중에 확보하게 되었다. 누비아에는 ... 매장량이 풍부한 금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황금산출지는 금을 채굴하고 세광하는 작업에 대체로 원주민들이나 전쟁포로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였으며 신왕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집트가 누리는 세력의 핵심적 근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 신왕국시대에 이집트는 세계적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이 같은 일은 누비아의 광대한 금광이 없었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중왕국시대의 사회는 고왕국시대의 사회와는 현저하게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부터는 노예도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노예는 맨 처음에는, 전쟁이나 상거래를 통해 획득되어서 당시의 공식명칭대로 하자면 <왕에게 속한 몸>이 된 사람들, 즉 이집트인의 소유물이 된 외국인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이 당시에는 관리들을 통치자에게 확고히 결속시켜 고분고분한 신하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직책과 업적에 부합되게 토지를 분배해 주는 방식이 채택되었으며, 이로써 그들의 재산은 늘어나게 되었다. " 이 같은 토지의 용익권이 소유권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관료장치 내지 행정장치느 크게 팽창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서기>야말로 다시금,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모든 것을 수중에 장악하는 존재가 되었다.

 

다음에 보기위해 정리해둔 것인데 너무 많아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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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OPLE UNITED WILL NEVER BE DEFEATED

Frederic Rzewski performs his own composition--live March 2007 at the Miami international Piano Festival: the theme and opening variations of this monumental work based upon the Chilean protest song"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 The entire performance is available on VAI-- http://www.vaimusic.com
http://www.miamipianofe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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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숨겨진 기억의 비밀

맥락 기억의 또 다른 결과는 우리가 들은 (또는 보거나 만지거나 맛을 보거나 냄새를 맡은) 거의 모든 정보가 좋든 싫든 몇 가지 다른 기억들을 (종종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촉발한다는 사실이다. '비자의적 기억'이란 말을 만들어낸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유명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회상들은 모두 맛과 냄새가 결합된 딱 하나의 자극을 의식적으로 재인한 뒤에 촉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기억의 실재는 프루스트가 상상한 것보다도 더 굉장하다. 정서적으로 의미심장한 냄새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예컨대 나의 옛 동료인 존 바르그가 뉴욕대학에 있을대 수행한 독창적인 연구를 살펴보자. 그의 실험에서 피험자들은 모두 대학생들이었는데 그들은 흐트러진 문장들을 정돈하라는 과제를 받았다. 이 흐트러진 문장들 가운데는 어떤 공통 주제와 관련된 단어들(예컨대 '늙은', '현명한', '잘 잊는', '플로리다' 같이 '노인'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들어 있었다. 피험자들은 그들이 부여받은 과제를 열심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진짜 실험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바르그는 학생들이 과제를 마친 뒤 실험장소를 떠나 복도 저편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장면을 몰래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학생들이 이전에 읽은 단어들이 그들의 걸어가는 속도에 영향을 미쳤다. 모든 학생들이 저마다 볼 일이 있고 갈 곳이 있었을 텐데, 유독 '은퇴한', '플로리다' 같은 단어들을 정돈했던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천천히 걸었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사소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연구 대상이었다. 실험 결과 '교수', '지적인' 같은 단어를 미리 접했던 사람들은 '축구장 난동꾼', '어리석은'같이 덜 고상한 표현들을 접했던 사람들보다 지적인 과제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이렇게 볼 때 농구선수들이 상대팀에게 퍼붓는 온갖 험담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효과를 발휘할지도 모른다.

 

- 클루지/게리 마커스 지음

 

내가 처음 그 곳에서 일했을때 그녀와 나는 사이가 좋았고 우리 사이가 틀어진 것은 그녀가 나의 문제해결방식을 문제삼으면서부터였다. 그녀는 냉소적으로 웃으며 네가 정의의 사도라도 되니하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생각했을때 내가 정의가 사도라서가 아니라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이 원래 그랬다. 나는 그녀의 문제해결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녀는 나의 윗사람이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못했다.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그녀는 거의 매일같이 나에게 넌 논리적이지 못해서 라고 말했다. 그 사무실엔 거의 매일 그녀와 나 둘 뿐이었고 아무도 그녀가 나에게 매일같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한번은 나와 대화를 하다가 화가 나니까 자기가 먹던 사과를 내게 던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또 어떨때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애처럼 행동하는거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하니. 내가 애처럼 행동하는건 사실이지만 그녀도 애처럼 행동할때가 있고 나는 감히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나는 매일같이 그 사무실에서 혼자 창밖을 바라보며 나 자신과 싸워야했다. 논리적이지 않다는 말은 한번 들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매일같이 들으면 상당히 자신감이 떨어진다. 나는 결국 그 직장을 좋게 끝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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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Adelita

"Adelita"or "La Adelita, "like "La Cucaracha," is a song from the Mexican Revolution in the early years of the twentieth century. Adelita was a soldadera, or woman soldier, who not only cooked and cared for the wounded but also actually fought in battles. In time the word adelita was used for all the soldaderas, who became a vital force in the war eff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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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연합적군

 

実録・連合赤軍 2007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해방구와 소변은 붙어다니는 모양이다. 뉴욕에서도 파리에서도 해방구에서는 학생들이 노상 방뇨를 했다고 한다. 해방된 인간의 감정과 소변과는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 실제 패널 토론이 진행되고 있을 때도 요의를 느낀 학생들은 때때로 강단 위로 뛰어올라와 뒤쪽으로 바쁘게 사라졌다. 왜 저러지 하고 궁금했는데, 화장실에, 아니 노상 방뇨하러 간 것이었다. 또한 토론회 도중에 유리창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이것도 뭔가 폭력적인 행위였던 것이 아니라 만원인 강당에서 화장실 갈 길을 못 찾아서 참지 못해 창문을 깨고 탈출한 학생의 행위임이 밝혀졌다. (미시마 유키오)

 

그리고 우리는 타자의 진실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있다. 공동체를 부정하는 욕망이 시간의 외연 속에서 거의 무한에 가깝다면, 이 열린 욕망의 계열 속에서 행위를 통해 살아가는 중에 육체는 있으리라. 행위 속에서 처음으로 관념성과 폭력적인 육체성은 결합한다. 지속되는 육체는 초월된 것을 환상의 혁명 과정으로 지니면서, 현실을 육체로 사는 것이다.

미시마의 태양이 천황이라면 나의 태양은 5월 혁명이 외친 선언, 즉 '명석함이란 태양에 가장 가까운 상처이다'라는, 자아가 도달해야 할 이상과 진흙탕인 현실 사이에서 행위를 낳는 것이다. 비록 기성의 좌익 운동과 단절하는 지점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동경대 투쟁은 미완이며 하나의 서막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처참한 백년 전쟁이 가까워 온 것을 예감할 수 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는지... (전공투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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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가족제공동체

클로드 메이야수(C. Meillassoux), 『자본주의와 가족제공동체:여성,곡창,자본』 (김봉률 역), 까치, 1989.

 

Femmes, greniers et capitaux (1975, Maspero; transl. as Maidens, Meal and Money: Capitalism and the Domestic Community)

 

Claude Meillassoux (December 26, 1925 - January 3, 2005) was a French neo-Marxian economic anthropologist and Africanist.

Meillassoux, a student of Georges Balandier, did fieldwork among the Guro (Gouro) of the Côte d'Ivoire: his thesis was published in 1964. In the 1970s he criticised Marshall Sahlins's use of the notion of "domestic mode of production". Meillassoux was throughout his life a politically committed critic of social injustice.

 

The early period of Meillassoux’s work also marked the feminist debates of the 1970s and 1980s. Many participants in these debates were indebted to Meillassoux for pointing out generational rivalry, the importance of marriage in the constitution of the farming unit, and transitions to market production. In the style of those decades, however, Meillassoux drew as much fire as praise. In particular, his Femmes, greniers et capitaux (1975a), which with translations into six languages is the most widely diffused of all Meillassoux’s writings and offered a systematic account of the absorption of the self-sustaining farm community into the capitalist world, was criticized for confusing social and demographic reproduction, for making women invisible, and for homogenizing the category of women. It is possible that a dispassionate reading today would draw more tempered conclusions (as, e.g., in Guyer 1981), but Meillassoux responded by trying to clarify some of his positions.

 

친족 개념이 인류학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미개사회에서조차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하나의 사회조직 원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재생산, 그것은 경제적 차원에서는 모든 형태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엥겔스의 이런 관점에도 불구하고 사적 유물론은 이 문제에 대해 주의를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가족제공동체에서부터 출발하여 발전하고 그것을 지배하여 물질생산과 생명재생산 능력을 착취하여왔던 '여러 생산양식'을 가족제공동체보다도 모든 점에서 우선하며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은 엄밀히 말해 정확하지 않다. 그런 생산양식은 물질생산의 능력에서는 고차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생명의 재생산의 능력에서는 가족제공동체보다도 저차원적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가족은 명목적으로 종속적 지위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가족은 자본주의의 존재에서 필요불가결한 '자유로운 노동자'(노예, 농노나 군졸 같은 예속상태로부터 자유로운)를 생산하는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엥겔스도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저작에서 보다 더 적절한 접근방법의 몇몇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이 공동체는 1)자급자족적 농업을 경영하며 2)공동의 토지에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며 그 토지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에 귀속되어야 하며 3)사용가치만이 발전하는 공동체로서, 상품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격적 종속이라는 불평등한 관계에 의해 결합된 개인들로 구성된다.

 

("역사를 소급하여 거슬러올라갈수록 생산하지 않는 개인뿐만 아니라 역시 생산자도 종속의 상태, 그리고 보다 커다란 총체 - (...) 가족, 확대가족, 부족, 부족 공동의 분열, 합병 등에서 파생된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 의 구성원으로서 나타난다.

"가장 오래된 공동체에서는 기껏해야 남자 성원의 평등이 문제될 뿐이었다. 여자, 노예, 그리고 연소자는 당연히 이 평등의 문제에서 배제되었다.

"[가장 오래된 공동체는] 성원들의 혈연적 유대에 의거하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친족으로 편입되든가 양자로 되지 않고는 공동체의 성원이 될 수 없다. 이들 공동체의 구조는 족보 나무이다. 베라 자수리치에게 보낸 마르크스의 편지)

 

거듭 말할다면, 공동체가 자급자족적이라고 하는 명제는 물질적 생산에 관해서만 정확한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재생산은 비슷한 공동체들의 집단에 또 하나의 공동체가 개입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살린즈는 가족제생산양식의 주요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는 최소 가족에 기초를 둔,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의 성별 분업이고, 둘째는 개인적으로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인간과 도구와의 관계, 셋째는 기본적인 필요의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이다. ... 넷째는 인간에 대한 권리를 통하여 행사되는 재물에 대한 권리의 발생이고, 다섯째는 가족제생산물의 '내부로 향한' 유통, 즉 사용가치의 우월이 생긴다는 것이다.

 

고도로 다양한 성격을 지닌 사회를 하나의 총체로 연결시키는 일반화는 검토의 대상인 각각의 체제를 하나하나 분석하여 인식한 후가 아니고서는 적용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생산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엥겔스)는 위의 말에서 명시적으로 정식화시키지는 않았지만 '혈연'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생산관계를 넘어 생명의 재생산 때문에 사람들이 결합하고 있는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근친상간의 금지는 보편적이었다는 가설은 족외혼과 여자의 교환의 기본적 요인으로서 즉 친족이론의 기초로서 구조주의학파도, 기능주의학파도 똑같이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족외혼:공동체 귀속집단 외부와의 결혼. '여자의 교환'은 보다 일반적 현상, '가임기 남녀의 이동이라고 하는 현상'의 특수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가임기의 남자보다 여자의 이동이 더 선호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로빈 폭스는 근친상간의 금지를 친족이 기초로 하고 있는 네 개의 공리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다. 즉 '일급의 친족은 서로 교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친족' 집단의 성원은 이런 금지이유로 서로 성적 관계를 가질 수 없고 그 집단 밖에서 상대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여자의 교환'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성원들끼리 성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귀속집단의 규모가 충분히 큰 경우에도 이런 '여자의 교환'은 준수되었다.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근친상간의 금지는 자연의 원리에서 발생하였는데 혼인규제가 정치권력의 한 요소가 되었을 때 내혼금지(즉 사회적 성격의 금지)가 성교 금지(즉 '자연의' 혹은 도덕상의 절대적 효력을 지닌 금지)로 전화되었던 것이다.

 

즉 생명의 재생산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들에게 여자를 어떻게 평등하게 분배하느냐가 아니고 그 집단에 속한 생식 가능한 여성의 수태능력이다.

 

그는 이런 계산에서 수렵채취민의 경우에는 '원초적 집단은 지극히 한정된 수의 남녀에 의해 구성되며, 그리고 이 집단의 존재는 '생명재생산의 필요'에 일치하는 교환망을 통하여 인근의 여러 집단과 결합하고 있다고 추론했다. 두 가지의 집단화의 수준 사이에서 원초집단(부부 또는 가족)의 경우에는 식량의 획득이 현저한 특징을 이루는 데 비해 대집단(친족, 부족)의 경우에는 혼인의 확보(아내의 획득)가 지배적이다.

 

이런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집합과 이들의 동맹은 단순한 물질적 생산, 교환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재생산이라는 지상명령에 의해 요청된다.

 

만약 '생산양식'이 존재하게 되면 그것은 생명의 재생산을 위하여 조직되는 이러한 여러 생산세포의 집합적 수준에서 연구되지 않으면 안된다.

 

메이야수는 가임기의 남자보다 여자의 이동이 더 선호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친족의 기본구조를 지닌 사회들의 결혼에서 남성들이 교환의 주체로 행위하기 때문에 남성들이 여자를 교환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메이야수는 노동력의 생산자로서의 여성이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메이야수가 말한 가족공동체, 혹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친족사회는 여자를 둘러싸고 벌어질 수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비해 여자들을 사회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기구의 성격을 지닌다. 물론 그 1차 목적은 가족형성과 재생산이다. 그러나 [군중과 권력]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사례는 여자를 둘러싸고 피비리낸나는 비극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원래, 타울리팡 족과 피샤우코 족은 서로 우호적이었다. 그런데 여자를 놓고 다툼이 일어났다. 먼저 피샤우코 족이 숲속에서 타울리팡 족 총각 한 명을 습격하여 살해했다. 그리고는 한 젊은 타울리팡 족 부부를, 그리고 그 후에는 3인의 타울리팡 족을 숲에서 또 죽였다. 이래서 타울리팡 족은 피샤우코 족 전체를 없애 버리고 싶은 열망이 점점 강해졌다. ... 여자를 두고 다툼이 시작되었고 총각 몇 명이 살해되었다. 주목을 끌게 된 것은 다른 종족이 죽였다는 사실 뿐이다. 타울리팡 족 전체에게는 적이 자기들을 멸종시키려 한다는 확고부동한 확신이 서게 되었다. ... 16인은 아무런 전리품도 없이 돌아왔다. 승리는 했지만 어떠한 부도 얻지 못했다. 그들은 단 한 명의 여자도 아이도 남겨 두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적대적인 상대방 무리를 말살,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남김없이 싹 쓸어 없애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흥이 나서 설명했다. 살인자였으며, 또 살인자로 낙인찍혀 남게 된 자들이 자기들이 아닌 남이었던 것처럼."

 

노동력과 생명의 재생산을 위해 여자를 평화롭게 교환하고 재분배했다는 메이야수의 설명은 논리적이다. 그러나 말년의 스티븐 제이 굴드가 말했듯이 쓸모없는 것, 이상한 것, 별난 것, 앞뒤가 안 맞는 것은 역사를 보여주는 기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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