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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체중이 늘어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어서 약간의 식이조절만 하고있다.
이번 다이어트의 특징은 식초다. 처음엔 요구르트를 먹었는데 배가 너무 아파서 포기했고 대용품으로 찾은게 식초다. 식초를 물에 타서 마시면 체중감량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처음엔 마트에서 사서 마셨는데 너무 달아서 인터넷으로 매실식초를 주문했다. 한병에 칠천원. 값도 저렴하다. 이걸 물에 타서 마시면 기분이 약간 술마신것처럼 나른해진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한동안 식욕이 없어진다. 그러나 마실 때는 끔찍하다. 저녁은 일찍 먹고 잠도 될 수 있으면 일찍 잔다. 여기까지는 순조롭다. 고통도 없다. 그러나 자리에 누운 뒤 한두시간이 지나면 배고픔의 고통이 찾아온다. 그때는 식초물도 마시고싶어지지 않는다. 배가 고픈게 아니라 머릿속에 먹는거 생각밖에 안난다는게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러다 못참고 결국 밥을 두숟갈 정도 먹고 잘때고 있고 배고픔에 사경을 헤메다 잠이 들 때도 있다. 나의 다이어트는 밤에만 괴롭다.
어제 신문에서 미국인 7명 중 1명이 굶는다는 기사를 봤다. 한참 성장할 아이들이 배가 고픈채로 잠이 든다고 한다. 유튜브에서도 그와 관련된 동영상을 찾아봤더니 미국인들은 지옥에 가야한다는 저주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한쪽은 비만인구가 넘쳐나서 위 절제수술을 받고 난리인데 한쪽은 먹을게 없어서 굶고 참으로 기이한 나라다. 물론 원인이야 실업이라고 하지만(10%라고 한다) 미국처럼 생산력이 발전한 나라가 그 많은 인구에게 다 일자리가 돌아갈까 싶다. 미국의 부자들은 그 넘쳐나는 부를 왜 빈민들에게 나눠주지 않을까.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차를 타고 돌아다녀야 하는 집이 필요한걸까. 나처럼 불어나는 뱃살때문에 굶어야하는 이유가 아니라면 배가 고파서 고통스러워하며 잠들어야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돈을 흥청망청써대는건 천벌을 받을 짓이다.
즉, 프로이트에 있어서도 일상적 가학증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타자의 자유를 제거하여 타자를 사물화하려는 충동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인한다. 그러나 타자의 자유란 항상 가학증에 의해 제거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타자의 자유가 항상 흥분의 양을 증가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프로이트의 방어 개념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방어란 자아에 통합되어 있는 표상들 또는 관념들과 일치하지 않는 표상 또는 관념이 도래할 때 억압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이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표상 또는 관념은 제거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이러한 표상 또는 관념이 흥분의 양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생각과 어긋나는 말들을 들으면 화를 내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상 프로이트의 방어 개념은 주로 내부에서 도래하는 표상에 그 강조점을 두는 것이지만, 우리는 프로이트의 방어 개념에 준거하여 외부에서 도래하는 표상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의식의 정합성을 교란하는 표상이 타자에 의해 제시될 때 흥분의 양이 상승되어 항상성이 교란된다. 이때 쾌락원리를 실행하기 위하여 그 표상을 파괴시키리려는 작업이 행해진다. 이 작업이 바로 일상적 가학증이다. 그리고 의식의 정합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헤겔이 이미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은 욕망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지적했듯이, 나르시시즘에 입각한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동일자의 논리를 타자에게 적용시키려는 것이고 이에 대해 타자가 저항할 때 가학증이 발동되는 것이다.
- 가학증,타자성,자유/이종영/백의
한때 유행했던 일상적 파시즘은 일상적 가학증에 가깝다. [충동과 충동의 운명]의 서두에서 프로이트는 충동의 문제를 다루면서 가장 중요한 생물학적 전제 중의 하나는 신경체계의 기능이 흥분을 멀리하며 가능한 한 흥분을 가장 낮은 수준에까지 끌어내린다고 이 책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물론 나는 인간이 강렬한 자극을 원한다는 점에서 미심쩍기는 하지만 인용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결국 병적인 가학증이 아닌 우리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가학증은 본인의 마음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참으로 슬프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이 성인이 되면 내면이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를 이루게 되고 이 체계내부에서는 특정한 표상이 특정한 정동과 결합한다는 점이다. 보통 우리의 내면에서는 어린아이의 표상은 귀엽다는 정동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는 좌파라는 표상이 정의롭다는 정동과 결합하고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는 빨갱이라는 정동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나의 사회가 다른 사회로 바뀐다는 것은 그 사회구성원들의 내면에서 이러한 표상-정동 결합이 바뀐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 심성이 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도 지각을 했다. 말수가 없는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00씨, 직장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둘 중에 하나는 있어야돼요. 실력이 있든가, 성실하든가."
"제가 둘 다 부족하죠."
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믿고 일을 맡겼으면 좋겠는데.."
"..."
"나이가 어린 사람도 아니고.."
"..."
계속 고개를 떨구고 있자 그도 별 수 없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는 나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순하다.
밖으로 나가면서 한번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체념과 자기연민이 깊게 배여있다.
미안해요.. 게을러터져서..
T.T
청올님, 논쟁이 길어지는군요. 님도 답답하시겠지만 저도 답답합니다. 청올님은 계속 집회인과 정부의 논리의 유사성을 주장하고 계시고 저는 집회인의 폭력과 정부의 폭력을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논쟁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올 연말까지 이 논쟁이 계속되지 않을까 두렵네요. T.T
"용산참사에서 지배계급이라 하신 정부가 모든 정당화한 수단을 갖추고 정당화하고 있다고 하셨지만 그 정당화가 잘못되었다고, 부당하다고,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물 론 그 싸움이 당장 그들이 가진 수단에 비해 실질적인 힘이 미약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세상에서 (그런 수단들을) 못 가진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고민하고 같이 나누면서 서로 영향을 받고 (생각이 그런 지배계급에 지배받던 사람들도 성찰과 대화를 통해 생각이 바뀌기도 하고) 비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것이 운동이 아닙니까? "
저는 정부가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할 모든 수단을 갖고 있고, 집회인들에게는 그럴 수단이 없다는 그 차이를 지적했을 뿐입니다.
"집회하던 사람들이 노숙인에게 그렇게 하고 끝까지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도 '저자가 먼저 폭력을 저질렀고 자기는 어쩔 수 없었다' '집회의 효율성을 위해서' 등등 정당화 논리가 정부에서 하는 것을 흉내낸다 싶을 만큼 닮았다는 점에서, 저는 같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청올님은 정부와 집회인들이 똑같이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점만이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폭력은 관계속에서 사고해야 하고, 단순히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비판할 수 없음을 지적했습니다. 더욱이 정부는 자신들이 폭력을 저질렀으며, 그것이 어쩔 수 없었다고 정당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철거민들이 폭력을 저질렀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글 쓴 저는 실제로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를 가지고 그들이 '정부만큼 유리하다'고 한 적은 없으며 심지어 '정부보다 더 폭력적'이라고 한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그들이 더 폭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피지배계급이 늘 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말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어서 덧붙임)."
제가 청올님이 그런 주장을 했다고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계급지배를 무시하고 폭력을 논의하게 되면 피지배계급이 더 폭력적이 된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니까 폭력을 관계속에서(누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저지르는가) 사고하자는 얘기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인터넷에서 온갖 비판을 당하'고 있다는 표현은 무슨 말씀이지요? 블로그에서의 이 논쟁 정도가 '그들'을 부당하게/지나치게 몰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지요. 과도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올님이 글을 올리고 나서 그들은 비판을 당했습니다. 덧글을 읽어보시면 아시잖아요. 저는 그 사실을 지적한 것 뿐이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판을 받아야합니다. 노숙인에 대한 폭력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폭력을 정부의 폭력과 비교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저는 주장했습니다.
"역시 신문과 뉴스라는 영향력을 가진 정부가 나발대는 것만큼 '그들'이 자기 정당화를 위해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그 폭력과 정당화의 논리마저 희석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들이 그랬다'는 고발보다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저지르는 폭력을 돌아볼 계기가 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거고요. "
집회인들에게 정부처럼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폭력이나 정당화가 희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저는 계속 이 것을 지적했지 그들을 두둔하지 않았습니다.
"폭력이 당하는 입장에서 같다는 말도 시위 진압에 동원된 경찰도 맞으면 아프다는 것과 바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홀로 떨어진 경찰이 사람들에게 증오/화풀이로 몰매를 맞는 상황이 아니라면요(이런 경우 그 노숙인을 팽개친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저는 생각하니). 저는 오히려 맞은 노숙인 입장에서 때린 자가 누구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인데(저는 차라리 공권력으로부터 맞은 것보다 그 공권력을 비판하겠다고 집회 하던 사람으로부터 그렇게 당한 것이 더 배신감과 치욕스러움이 크면 컸지 덜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집회 하던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지배 계급'의 막돼먹음은 없을 거란 기대가 있었을지 모르니까요), '그렇게 얘기하면 경찰도 맞으면 똑같이 아픈데' 하는 말이야말로 중간에 삭제된 부분이 크다고 봅니다. "
폭력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똑같다는 말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분이 하신 것입니다. 그 분이 이 폭력은 국가폭력이고 저 폭력은 사적폭력이고 구분할 의미가 없다고 하시면서 폭력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다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청올님은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걸 좀 헤아려주시면서 글을 좀 써주세요. T.T 당연히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피켓만들어서 집회하신는 분들이 폭력경찰들처럼 약자를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고 저도 당근 생각해요. T.T
"블로그의 글을 보고 아무도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았지만 용산 참사를 일으킨 정부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사람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이런 얘긴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아무도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한 사람이 없다는 것만이 중요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신문과 뉴스가 떠들 만큼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아니기 때문에 정당화하는 사람도 적은 것이기도 하고요. 가령 용산 문제에서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과 같은 입장들이 블로그에 있다면 정당화도 충분히 있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보통 일반인들은 교통신호만 위반해도 벌금뭅니다. 옆집에서 남자가 처자식 두들겨 패면 저런 죽일 놈 하면서 욕합니다. 사람들도 뭐가 옳고 그른지 다 알아요. 집회하러 나온 사람들이 집회 좀 방해했다고 노숙인을 들고가서 내팽개치면 다 욕해요. 하지만 철거민들은 용역한테 온갖 행패 다 당해도 나 몰라라 하고 노동자들은 구사대한테 온갖 폭력 다 당해도 관심도 안 가지고 정부와 자본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저는 그 점을 지적한 거에요. T.T
"'그들'은 자신이 가진 자원을 가지고 폭력을 저질렀고 자신들이 가진 자원을 동원하여 정당화를 했어요. 그 자원들이 정부라는 지배계급이 가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지 모르지만, 폭력의 피해자인 노숙인 입장에서는 그들과 노숙인 사이에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의 차이보다 '못하다''덜하다''적다'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만큼 엄연한 차별과 폭력과 정당화가 있었습니다. 계급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엇이고 폭력 중에는 좀 더한 폭력도 있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이 그 당장 당한 폭력 앞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기존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분리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것이 폭력의 피해자들(좀 덜한 계급을 가진 자로부터 폭력을 당한 자와 지배계급으로부터의 폭력을 당한 자) 간에도 필연적으로 계급의 차이를 낳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
청올님과 다른 모든 분들이 무어라 말씀하시든 저는, 지배-피지배 관계를 떠난 폭력논의를 거부합니다. 저는 그냥 차라리 욕먹으면서 폭력주의자가 되겠습니다.
"공권력의 비판이 당연히 추가로, 구조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부분까지 삭제하면서 비교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왜 자꾸 비교의 여집합 부분의 이야기로 공집합 부분을 희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님과 저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반차별팀님의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지 못하는 차별 _청올] 에 관련된 글.
윗글에 내가 댓글을 달았고 악수님과 쩝님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먼저 악수님은 부르주아 남성들의 폭력과 하층계급 남성들의 폭력 중 누구의 폭력이 더 폭력적이냐고 비교할 필요가 있냐고 질문하셨다. 폭력은 지배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부과하고 싶으면서, 정작 자신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싶은 모순된 존재다. 그래서 동등한 두 인간이 힘겨루기를 할 때 패자는 힘의 우위에서 약자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부르주아들이 우리처럼 일상에서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화폐나 지위같은 지배의 자원이 있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타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다. 하층계급 남성은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성폭력을 저질러서라도 여성의 성을 향유하려하지만, 부르주아 남성은 돈벼락을 내려주고, 부르주아 남성의 소유인 여성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모든, 거의 모든 여성은 그를 욕망한다. 그렇다면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타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인 화폐, 지위 등등이 없는 사람과 지배의 자원이 있어서 일상적으로 폭력을 별로 행사할 필요가 없는 부르주아를 비교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 이런 식으로 비교를 하면 지배를 당하는 피지배계급이 더 폭력적이라는 이상한 결론이 도출된다. 나는 이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악수님은 지배와 통제권력이 자본가에게만 있지 않음을,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이주민보다는 선주민에게, 장애인보다는 비장애인에게, 청소년보다는 성인에게, 동성애자보다는 이성애자에게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통제권력이 더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물론 악수님이 비교한 관계들은 결코 동등한 관계들이 아니다. 그리고 나도 노숙인에 대한 차별, 노숙인이기 때문에 함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이 그런 폭력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모두 지배를 욕망하는 지배의 주체들이다. 나는 남성이다/여성이 아니다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타인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 있고 싶어한다. 노숙인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한 존재이기 때문에 질질 끌고가서 어디다 내팽개치고 집회를 방해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나도 물론 우리 내부에 차별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것을 어쩔 수 없다고 방어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청올님이 집회인들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했을 때 아무도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부가 특공대를 투입해서 철거민을 살해한 행동은 정당화되었다. 살인이라고 인정되지도 않았다. 그들 스스로 죽은거였다. 왜냐면 지배계급이 저지른 일은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옳기 때문에 옳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옳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모든 수단을 갖추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다. 하지만 집회인들이 노숙인들에게 저지른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들은 지배계급이 아니므로.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 것만 빼고 그들이 한 행동과 정부가 한 행동은 같지 않다.
쩝님은 그 근원이 어디든간에 폭력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폭력을 계급지배와 분리해서 논의할 수 없다는 내 얘기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하간의 폭력도 사용하지 말아야한다. 평택 쌍용차 공장에 특공대를 투입하건, 시위 도중 전경과 대치중이건 우리는 평화적으로만 행동해야한다. 폭력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다 똑같기 때문이다. 경찰도 맞으면 아프다. 쩝님은 이 논의에서 이 폭력은 국가폭력이고 저 폭력은 사적폭력이고 이런 식의 구분을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했는데 집회인들이 노숙인을 들고 가서 어디다 내팽개치고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 뒤 인터넷 게시판에서 온갖 비판을 당하는 것과 정부가 특공대를 투입해서 사람을 다섯명이나 죽인 뒤 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신문과 뉴스를 통해 나발대는 것은 완전 다른 것이다.
두 분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어제 행사가 있어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너무 횡설수설 썼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여기 두 개의 폭력이 있다.
집회인 -> 노숙인 ("집회를 하는데 귀찮고 깜짝 놀라게 한 방해꾼에 대한 정당한 반응"),
정부 -> 철거민 ("순순히 나가지 않은 불온한 자들의 도심 테러에 대한 정당한 진압")
청올님은 "그저 '나와는 다른 만만한 사람'으로 보고 함부로 했다는 점에서", 이 차이를 모르겠다고 하신다.
너무 압축적으로 설명했으니 여기에서 청올님의 덧글을 읽으시면 된다.
청올님의 순수한 뜻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논리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거의 모든 폭력은 공권력과 같아진다. 원래 폭력이란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관철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리력이다. 교사가 학생을 구타할 때, 남편이 아내를 구타할 때, 부모가 자식을 구타할 때 기타등등 거의 대부분 폭력은 자신보다 힘이 약한 대상에게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행사하는 것이다. 나는 폭력을 찬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력일반이 공권력과 같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폭력은 항상 관계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고, 정부가 행사하는 폭력은 단순히 그저 나와는 다른 만만한 사람에게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에게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권력은 계급지배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공권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계급지배는 현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임금을 받고 일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만일 친구에게 만원 줄께 심부름 좀 갖다와 하면 친구는 굉장히 굴욕감을 느낀다. 누군가를 위해 돈을 받고 일한다는 그 자체가 굉장히 굴욕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용이 되면 기뻐한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계급지배가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지배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폭력은 행사될 필요가 없다. 아무도 저항하지 않으므로. 그럼 언제 폭력은 행사되는가. 생존권을 빼앗겨서 목숨을 내걸고 저항할 때 공권력이 동원된다. 그 공권력은 그 사람의 생명까지도 빼앗을 수 있는 폭력이고 실제로 죽였다. 지배계급의 폭력이 동원되는 경우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이런 종류의 폭력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보다 더 만만한 누군가를 굴복시키기 위해 저지르는 폭력이 같은 것일까. 그 폭력이 추악하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폭력과 같다고 하는 것이 온당한 것일까. 정운찬의 "철거민 사망원인은 화염병" 발언이 훨씬 더 폭력적이라고 한 것은 살인을 사후적으로 승인했기 때문이며 유족들의 가슴에 또 한 번 대못질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노숙인을 어디다 내팽개치고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은 것과 결코 같을 수는 없다.
1970년대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 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 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한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소년의 눈물/서경식 지음. 돌베개
요즘 열심히 책을 사 모으고 있다. 전에는 퇴근 후에 서점에 가서 책 구경을 하다가 책을 사곤 했었는데 요샌 책을 거의 인터넷으로 산다. 그러다보니 책 소개나 리뷰를 보고 책을 사게 된다. 한 번 살 때는 십만원어치 정도 사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거의 읽지 않고 있다. 그래도 직장 그만두면 책 읽을 시간이 있겠지.. 하고 있다. 요즘 조금씩 읽고 있는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란 책을 읽다보니 당시 전공투H라는 이름으로 미시마와 격론을 벌였던 고사카 슈헤이의 방은 왼쪽 한 면이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책이 꽉 차 있었다고 한다. 논쟁이 끝난 뒤 미시마는 방패의 모임(일본 우익모임)에 가서 동경대 전공투는 아주 머리가 좋아 하고 기분좋게 말했다고 한다. 나도 요즘 들어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구입한 책을 읽다보면 느끼는건데 거의 8할이 꽝이라는 사실이다. 돈이 아깝다. 샀으니까 어쨌든 읽긴 읽는데 어차피 내년에는 버릴 책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런 책들의 대부분은 쉽게 읽힌다는 사실이다. 정독할 필요도 별로 없고 책을 읽고 나서 어.. 이 책은 한번 더 읽어봐야겠네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고대로 책장에 꽂는다. 돌이켜보면 내 생애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책은 정말 몇 권 안되는것 같다. 그리고 그런 책들을 읽을 때 상당히 고통스럽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깨지기 때문이다. 하나도 슬프지 않은데도 슬플 때가 있다. 두서없이 이 책 저 책 손에 잡히는대로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게 갑자기 허망해졌다. 예전에 아는 사람과 같이 술을 마시다가 그 친구가 난 리버럴이야 하면서 웃었다. 나는 그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도 안하는 한심한 리버럴들.. 이라고 욕하고싶지만 나부터 공부를 좀 해야겠다.
전엔 책보다는 영화를 보면서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영화감독 중에는 일생 고통이니 구원이니 하는 문제에 천착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삶의 진실을 잘 포착하고 있었다. 요즘은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평일엔 거의 책을 읽지 않고 주말에만 책을 읽고 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문제에서 시작하게된다. 그건 가족의 문제일 수도 있고, 노동의 문제일 수도 있고, 폭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여성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항상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세상과 싸워야한다는것. 그것이 점점 중요해지는것 같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입장이 옳은지 항상 확인하는 작업, 그것이 독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 우리집은 공장을 했다. 아버지는 직원이 열명이 채 안되는 작은 공장을 운영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잘 이해하기 힘들지만 우리집이 공장이었다. 집에 공장시설이 있었다. 당연히 일을 하는 시간에는 집이 시끄러웠다. 나는 시끄러운 집이 싫어서 학교에 갔다오면 거의 대부분 동네를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쯤엔 공부에 지장이 있다고 해서 공장을 딴데로 옮기고 우리는 이사를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닐 땐 집에 오면 항상 사람들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엔 나이가 어린 오빠들도 있었다. 그 오빠들은 집이 지방이어서 우리 집에서 숙실을 해결했다. 쉬는 시간에는 나와 만화책을 같이 보기도 했다. 그 오빠들 중엔 직장을 옮겨서 다른 데로 간 뒤에 내게 잘 지내냐고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어릴 때는 애교가 많고 붙임성이 있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답장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난 그때 편지 내용을 잘 이해하지도 못했다. 언젠가 이주노동자와 압류를 하러 갔는데 집행관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 그 사람은 자긴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사장과 부딪치기 싫어서 그런가보다 했더니 하는 말이 그 집에 나이 어린 딸이 있는데 마주치면 안된다고 한다. 그 사람은 그 소녀가 자신을 반가워할까봐, 자신이 여기 왜 왔는지 그 이유를 알까봐, 그 소녀가 상처받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집행관들이 나오자마자 사장이 달려나와 우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는 성급히 집행관의 차를 타고 거길 빠져나왔다. 내가 예전에 만난 사장들은 인간말종들도 있지만 대부분 돈없는 사장들이다. 이주노동자때문에 몇 백만원짜리 원단을 손해봤다는 둥, 말도 없이 그만둬서 손해를 엄청 봤다는 둥 하면서 괘씸해서 돈을 못주겠다고 하면 돈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니까 끈기를 갖고 기다려야 한다. 저도 사장님 심정 이해합니다. 하면서 이해하는 척 하다가 사장님 임금 지급안하시면 검찰에 가서 조사받습니다. 하고 사무적으로 말했다가 이 두개의 설득과 협박을 반복해서 하다보면 사장도 결국 탈진해서 괘씸해서 다는 못준다고 한다. 그러면 노동사무소에 가셔야겠네요 하면 또 그때부터 내가 범죄자냐고 내가 왜 노동사무소에 가냐고 노발대발한다. 그러길 또 한시간. 보통 이런 사장 만나면 공장에서 나올땐 녹초가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장들은 돈이 없어서 못준다고 한다. 나는 그가 정말 돈이 없는지, 없는척하는건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내가 상대하는 사장들이 못배우고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이라는건 사실이다. 언젠가 찾아갔던 공장에선 임금을 못줘서 직원들이 다 떠나가고 사장 혼자서 힘겹게 일을 하고 있었다. 사장님이 힘들다고 그 사람까지 힘들어야하는건 아녜요, 임금 지급하세요. 하고 말하지만 저런 사장들 상대로 싸워야 하는 내 처지가 서글플 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장들은 난 아가씨처럼 배우질 못해서.. 라고 항변하다. 그런 말 정말 듣기 싫다. 나도 한 때 조직가가 꿈이었던 적이 있다. 조직화를 할 수 있는 사업장에 들어가려고 했고, 친구들이 일자리를 알아봐주고 있었다. 그 땐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경제가 어려워서 그런지 폐쇄하는 사업장은 있어도 새로 사람을 뽑는데는 별로 없었다. 얼떨결에 어떤 노조에서 상근하게 되었다. 그 노조가 있는 사무실은 서울에서도 보기드문 노동자구역이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져서 미로처럼 되어있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작업장들이 있었다. 점심 때는 노변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도 그 곳에선 차꾸러미를 들고 가는 여종업원이 있고 퀵서비스 오토바이들이 질주를 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걷다간 다칠 수 있다. 나와 함께 사업장을 둘러보러 같이 다녔던 부지부장은 기계나 작업공정에 대해 세심히 설명해주었다. 부지부장은 기계를 가리키며 저걸 보라고 했다. 안정장치가 벗겨져있었다. 화학연맹에 가입해도 될 정도로 화학약품이 많아서 머리가 좀 아프다고 했더니 어딜 가면 시야가 뿌옇고 골이 뱅글뱅글 돌아서 처음 간 사람은 쓰러진단다. 여자들은 거의 대부분 단순노동을 하고 있었다. 일하는데 손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손놀림이 빨랐다. 얼마나 하면 이렇게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일년, 아무것도 안하고 이 일만 일년하면 이렇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여자들은 이렇게 십년 일해도 한달에 80만원 넘게 받기 힘들다. 토요일은 당연히 저녁 6시에서 8시까지 일한다. 일요일에도 바쁘면 출근해야하고. 내가 그 노조를 그만두었을 때 부지부장이 일을 좀 배우는게 어떻겠냐고 해서 한동안 고민했는데 나는 결국 내 모든 꿈을 접었다. 되도 안는 영세사업장 조직화를 위해 하루종일 그 지겹고 끔찍한 단순노동을 해야한다니. 정말 노동자 조직이 필요한 저 사람들에게는 조직이 없었다. 사장의 지급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노동자들은 잉여가치를 나누어달라고 할 수 있지만 아마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자기가 다니는 공장이 문 안닫고 임금 안밀리고 일하다 사고 안나고 안정되게 직장 다니는게 꿈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죽도록 일만 하고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나이가 될 때 그들 손에 돈 몇 푼이나 쥐어지며 그들 삶을 누가 보상해줄까.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여의도에서는 어디 가서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모두 주식얘기다.
이 곳에 들어온지 가장 바쁜 하루였다. 오늘도 그 사람에게 몹시도 시달렸다. 그 사람은 자기 방을 쓰고 있는데 ~부자~앙 하고 부르면 나는 그 방에 가야한다. 또 뭐라고 뭐라고 하면서 지시를 내린다. 내 직책은 총무부장이다. 돈과 회원관리를 하고 있다. 처음 여기 왔을때 전화번호, 메일주소, 주소 여기저기에 구멍이 숭숭 뚤려있는 회원명부를 보고 경악을 했다. 어떻게 회원관리를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애꿎은 전임자를 탓했다. 네가 일을 열심히 안하고 가니까 내가 개고생이잖아. T.T 그런데 어제 이 사무실에서 일했던 사람이 다녀갔다. 몰래 물어봤다. 어떻게 회원관리가 이렇게 엉망일 수가 있죠. 전임자들이 오래 안 있고 금방 그만둬서 그래요. 다들 나처럼 잔소리듣는게 짜증나서 금방 싫증을 내고 그만뒀다고 한다. 사실인것 같다. 나도 그 사람 잔소리를 들을때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 자리에서 울고싶다. 제발 닥치라고. 그 사람 말이 너무 많다. 회원관리가 안되는것도 그 사람 탓이라고 한다. 이 조직은 그 사람의 사조직이나 다름이 없는데 회원조직방식이 어느 날 전화걸어서 어이~ 너 우리 조직에 회원으로 가입해 가입할거지 응 알았어 너 우리 조직 회원이다 안녕. 이런 식이란다. 그래서 회원정보도 그 사람이 업데이트 시켜줘야하는데 하지 않고 있단다. 아.. 다행히도 평상시에 나의 노동강도는 그리 높지 않다. 단지 나를 자주 부르고 부르면 잔소리가 많고 인신공격이 심하고(일을 왜 그렇게 못해 블라블라) 칭찬은 하나도 안한다는 점이다. 야단만 맞고 산다. 그러고보니 이 나이 먹도록 나는 한번도 누구의 윗사람이었던 적이 없구나. 내가 윗사람이 되면 어떨까. 차라리 당하고 사는게 나은걸까. 쫌 고상한 일기 좀 쓰고싶은데 내 삶이 전혀 고상하지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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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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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식초 먹는걸 해봤는데, 빈속에 어느 이상 먹으니 속이 부대끼더라구요. 조절 잘 하셔야 될 듯..전 따뜻한 보리차(혹은 옥수수 혹은 결명자.. 전 섞어먹음) 먹으니 배고픔이 꽤 가시는 것 같아요.. 따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약간의 곡기라서 그런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따뜻하다는게 뱃살에도 바로 연결되는걸로 아는데.. 뱃살이 붙는 이유 중 하나가 배 속이 차졌기 때문에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살이 붙는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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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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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에 왕도는 적게 먹고 운동 많이 하기죠^^(체중조절 실패중인 1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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