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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30
    췟!(2)
  2. 2009/09/30
    성은 예외적인가(12)
  3. 2009/09/26
    페미니즘 무엇이 문제인가(5)

췟!

오늘 직장에서 퇴근 30분전에 마구 구박당했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저번에 산 책 하나도 안 읽었는데 저번에 급여 나왔을때 또 책 샀는데 그동안 하나도 안읽었는데 방바닥에 널려있었는데 집에 들어와봤더니 아빠가 두 줄로 쌓아놓으셨다. 그러실 필요없는데..

오늘도 책 한 줄 읽지 않았다.

이마트에 갔더니 추석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옷을 사고 싶은데 값은 싼데 맘에 드는게 없다.

1층에서 호가든 맥주를 무척 싸게 팔길래 네 병 샀다.

지하에 갔더니 김말이 튀김 3천원짜리를 1950원 정도에 할인판매하길래 맥주랑 먹을려고 두통이나 사왔는데 맛이 하나도 없다.

한통도 많은데..

한심한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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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예외적인가

 

얼마전 사회과학 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페미니즘 강의에 갔다. 젊은 연구자가 강의를 한다는 것밖에는 모르고 갔었는데 가보니 해러웨이 강의였다. 세시간 동안 굉장히 많은 얘기들을 했고 해러웨이에 대해 잘 몰라서 이해하기 상당히 어려웠다. 그런데 이 분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은 인상적이었다.

 

"하나의 보편적인 억압이 존재하는가"

"성매매인가 성노동인가"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사회에서 성만이 예외적일 수 있는가"

"(성이 상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순결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것이 아닐까"

 

나는 이와 같은 주장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강의를 하는 동안 나는 반론을 제기했고, 강의 동안 그리고 술자리에서 그 연구자는 자신의 생각을 풍부하게 밝혔지만 나는 우선 그 분의 생각보다는 애시당초 나온 저 주장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싶다. 왜냐면 이 글은 그 연구자에 대한 반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상황이 어수선해서 그 분 생각이 어떤지 잘 정리되지 않았다) 또한 나는 연구자도 아니고 이론가도 아니기 때문에 성에 대한 단순한 나의 느낌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저런 주장은 그 연구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그동안 많이 제기되어온 주장이다. 5년전 방지법 시행 이후에 어떤 사이트에서는 육체노동자로 보이는 어떤 남성(그는 전부터 글을 계속 써왔다)이 "나도 몸 파는데 왜 그 여자는 몸 팔면 안돼"라는 식의 울분을 터뜨리는 글을 썼다. 그에게는 자신이 노동력을 파는 것과 그 여성이 성을 파는 것이 비유적이기는 하나 동일하게 몸을 파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매매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노동(질료의 변형)이 아니라 성기의 임대이다.

 

그렇다면 왜 성은 문제가 되는가. 나는 이것에 대해 달리 답변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을 바꾸어서 성이 문제가 안된다면 성폭력도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논리에 도달한다고 본다. 성이 문제가 안된다면 성폭력도 일반 폭력가 다를 바가 없고 실제로 내가 술자리에서 이런 주장을 했을 때 내 앞에 앉아 있던 한 남성은 바로 그렇다고 했다. 구타를 당해도 그 정신적 충격이 성폭력을 당했을 때와 크게 다를바 없다는 것이다. 바꿔말해 언어폭력과 성적인 언어폭력은 근본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이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사회관계를 무시하는 발언이며, 남성도 군대에서 구타를 당했을 때와 성폭력을 당했을 때는 그 정신적 충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심지어 군사정권 때는 고문을 할 때 "너네 빨갱이들은 거기도 이렇게 생겼냐"고 모멸을 준 사례도 있었다. 성적으로 모멸감을 줄 때 인간은 가장 견디지 못한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사회가 비정하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육은 상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못배우면 가난이 재생산될 뿐만 아니라 무시당하고 서럽다. 우리는 의료는 상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돈만 있으면 살릴 수 있는데 돈이 없어서 가족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자는 그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성은 상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난자매매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성매매보다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남자들은 난자는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데 반해 여성의 성은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성매매에 대해서는 성매매폐지무용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대리모 사업이 성행하고 있는데 대리모는 자궁임대와 아이 생산이라는 점에서 훨씬 더 노동개념에 가깝다. 대리모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난자매매, 장기매매, 매혈과 같은 판매들은 자기 신체에 대한 처분이라는 점에서 성매매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낙태를 허용할 것을 원한다. 신체처분이라는 잣대로 이 모든 것을 동일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역주변에 있는 업소들 영업 못하게 한다고 성매매가 없어진다는 발상은 순진하지만 성산업 종사자들의 단 몇 퍼센트도 안되는 집결지 여성들의 단결이 성에 대한 남성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온라인에서는 "시키는대로 할께요"라는 개인사업자 형태의 프롤레타리아가 넘쳐나고 있다. 이들을 조직화할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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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무엇이 문제인가

 

지은이 캐롤린 라마자노글루는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고 있다. 이 책은 1997년에 국내에서 출간되었고, 나는 이 책을 빌렸기 때문에 대충 훑어보고 빨리 반납해야 한다. 옮긴이 김정선은  "여성의 적은 여성이란 말인가? 이 질문에 답해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이 아닐까 싶다"고 한다. "라마자노글루는 모든 여성들이 다 똑같이 억압받지 않는다는 건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여 페미니즘 이론으로 구성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모든 여성은 "다 똑같이" 억압받지 않는다.

 

"1960년대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이러한 페미니즘의 논리는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분리를 간과하고 있다. 때문에 1970년대의 많은 페미니즘 이론들은 이러한 여성들의 공유된 억압 대신, 여성들의 차이와 분리에 주목하게 된다. " "여성들은 현실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억압을 경험하고 있으며, 여성들끼리보다는 오히려 남성들과 여러 형태의 억압을 공유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라마자노글루가 이를 위해 이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이유는 분리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야말로 그 분리를 해소하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인 듯하다. 여성들 간의 차이를 간과한 일반화된 페미니즘 이론이야말로 오히려 여성과 여성을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을 서로 분리시키기에 이르며, 이것은 헤어날 수 없는 페미니즘의 모순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옮긴이의 주장에 따르면 이제 페미니스트의 과제는 남성 지배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 사이의 차이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접합점을 인식하는 것이 된다.

 

"여성들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나와 너의 다름을 받아들일 수있는 상황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앞으로의 여성운동을 풀어나가기 위한 정치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여성들 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노동자들 간에도 존재하고 흑인들 간에도 존재하고 성적 소수자들 간에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정치적 연대가 가능한 것은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조건에 처해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지배자는 언제나 분리 지배하고 노동자들도 소수에게는 생존을 보장해주며 이러한 차이는 끔직한 노-노갈등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연대를 말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다 똑같이" 억압받지 않지만 동일한 지배 하에 있기 때문에, 바로 그 동일한 지배자의 속성 때문에 우리의 정치적 연대가 가능한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세심한 비판이 필요하지만 글은 반납일까지 보충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은 부분.

 

p.228 

"여성할례가 여성에게 성적 즐거움을 상실시키고, 정신적 고통과 질병을 야기하며, 여성의 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를 강화시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el Saadawi 1980). 그러나 이슬람과 아프리카 여성들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무차별적인 금지에 대해, 특히 데일리(Mary Daly 1978)의 분석에 강하게 반대한다. 이러한 반대는 여성의 할례를 다른 측면, 예를 들어 식민지주의와 세계적 자본주의의 발전에 위협받는 아랍과 아프리카의 문화적인 특성과 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이다. 만약 외부인이 여성할례를 금지한다면, 그들은 한 문화, 그리고 그 문화의 사람들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다. 만약 이슬람 여성들이 가장 불만스러운 것으로 여성할례를 지적한다면, 그들 또한 자신도 그 안에 속해 있는 종교를 포함한 문화 전체를 공격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위험하다. 타집단의 현실에 대한 관심도 없는 무차별적인 금지(이를테면 아동노동에 대한 반대)는 순진하지만 아랍과 아프리카 남성들이 세계적 자본주의의 발전때문에 위협받는다고 해서 여성할례를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 타자의 타자에 대한 억압적인 행위에 대해 개입할 수 있다. 만약 미국 여성이 이슬람 남성에게 여성할례를 하는 야만인이라고 공격하면 이슬람인들은 미국인들에게 전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의 씨를 말리는 살인마들이라고 상호비방하면 된다.

 

p.26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사회적 성차 때문에 차별받고 있다고 인식하지만, 양성의 관계를 특수한 권력관계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성의 정치학의 권력관계와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급진적 페미니즘이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과는 이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다르다." "만약 그들이 포함된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는 해방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해석을 하는 아주 다른 종류의 이론과 정치적 실천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확대는 페미니즘의 정의를 정치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게 만든다."

 

라마자노글루는 리버럴들을 페미니즘에서 배제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리버럴들은 래디컬들이나 맑스펨들처럼 양성의 관계를 권력관계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단두대에서 사라진 리버럴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미국의 거짓말] 서두에 언급된 부분을 발췌했다.

 

"많은 기념비나 기념물들이 여성의 활동을 생략한 탓에 다수의 미국인들이 여성은 지금까지 위대한 업적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고 믿는 한 여성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한 세대가 현장에 새겨넣은 것은 다음 세대의 마음을 구속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 결과 일리노이 주에는 여성을 기리는 기념비가 전혀 없다. 여성 개인을 위한 기념비는 물론이고 1890년 시카고에 창설되어 1910년에는 무려 100만 명의 회원을 갖게 된 여성 클럽 총연맹, 에번스턴에 본부가 있으며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단체인 여성 기독교 금주 연합, 1920년 시카고의 한 호텔에서 창설된 여성 유권자 연맹 등을 위한 기념비조차 없다." "노동자 계층은 '가끔' 그들의 역사를 돌에 새기는 반면 상류 계층은 '항상' 그렇게 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리버럴들이 양성관계를 권력관계로 보건말건 남성들은 리버럴 여성들의 투쟁을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본다는 것이다. 리버럴들이 요구하는 "평등과 재분배, 즉 동등한 임금, 동등한 시민권, 교육, 건강과 복지에 대한 동등한 기회, 민주주의 정치과정에 대한 동등한 접근"을 여성들에게 주었을 경우 자신들의 권력이 심각하게 도전받는다는 것을 남성들은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리버럴은 리버럴이 할 일이 있고 그 일도 제대로 못하면 사회주의자들이 굉장히 고달퍼지게 된다. 리버럴이 해야 할 일까지 다 해야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운동만 소중하고 남이 하는 일은 한심하다고 평가절하하는 것은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질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변화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진보하는 것이다. 전공투 A의 말을 들어보자.

 

"가령 현실에서 러시아 혁명의 문제를 봅시다. 이 혁명은 레닌이 지도한 무혈 혁명입니다. 그리고 레닌은 위대하다는 것이 민청(民靑:일본공산당 계열 학생운동 조직. 전공투와 적대적이었다. 동경대 점거 투쟁을 물리적으로 저지했다.)이나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사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혁명전 100년간, 50년간을 보면 차르에 대한 수많은 나로드니키들의 피로 점철된 투쟁이 있습니다. 그때 수많은 폭동을 지휘하고 처형되어 죽은 사람들이 없었으면 러시아 혁명은 절대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피비린내나는 처형을 기꺼이 받아들여 테러리즘에 스스로를 내걸고 농민 폭동을 지휘한 것이죠.그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물론 우리는 절대로알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 되기 위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어야 했던 여성들이 권력관계를 자신처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여성해방에 대한 열정이 없다고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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